현진건의 맏형 홍건은 러시아 유학 후 조정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고, 일본 명치대 졸업 뒤 1908년 진주지방법원 부산재판소 판사로 임용되었던 둘째형 석건은 진주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일본놈들에게 삼천리 강토가 유린된 경술국치 직후 뜻한 바 있어 열아홉 나이에 중국 유학을 떠났던 막내형 정건은 그때부터 줄곧 상하이 소재 서양인 회사에 다니면서 항일운동에 전념하고 있다.
진건은 스무 살 ‧ 열여섯 살 연상이라 거의 아버지 지경의 나이인 백형 ‧ 중형과는 친밀감이 없고, 여덟 살 차이인 막내형 정건과만 피붙이다운 정을 애틋하게 쌓으면 자랐다. 하지만 1910년에 결혼식을 마치자마자 곧장 중국으로 가버린 막내형 탓에 막내형수는 벌써 8년째 혼자 살고 있다. 그 사실이 현진건은 너무나 안타깝다. 그래서 자기 자신도 3년째 아내와 거의 헤어지다시피 지내고 있는 점을 자격지심으로 돌이켜보고 있다.
‘그렇다고 공부를 아니 할 수도 없고 ….’
누가 생각해도 근래는 격변의 시대이다. 독립운동에 투신을 하든 그저 소시민으로 살아가든, 신학문을 하지 않고는 우물 안 개구리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시대상황이다. 조선에 태어난 지식 청년인 이상 아내와 몇 년 떨어져 사는 정도는 감수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신혼의 아내를 8년째 독수공방시키고 있는 막내형은 너무한 것 아닌가! 게다가 갓 시집 온 어린 며느리가 시어머니 별세 이래 몇 년 동안 혼자서 홀시아버지를 모셨으니 그 어려움을 누가 알아줄까? … 우리 막내형수님 속은 시커멓게 다 타버렸을 게야.’
현진건의 아버지 현경운은 어느덧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1860년에 출생했으니 막내아들 진건이 기차에 몸을 싣고 압록강을 건너려고 하는 지금 59세나 되는 고령이다.
그는 마흔하나에 막둥이 진건을 얻었다. 손자를 볼 나이에 막내아들을 낳은 것이다. 사실 차남 석건의 아들인 손자 한주가 사남 진건보다 불과 4년 늦게 태어났다.
현경운으로서는 진건이 얼마나 귀여울까! 하지만 현경운은 그런 내색은 내비치지도 못했다. 그는 아내 이정효의 삼년상이 끝난 1914년 새 아내를 얻었고, 작년에 진건의 이복동생 성건이 태어났다. 58세나 되는 노인네가 또 자식을 생산한 것이다. 그러니까 진건과 성건은 열일곱 살 차이가 났다. 본 막둥이 진건은 19세, 새 막둥이 성건은 2세, 아버지 현경운은 누가 더 귀여울까!
아버지 현경운의 재혼은 당시로는 막내아들이었던 진건의 장가 보내기가 명분이었다. 위로 시아주버니들이 층층시하인데다 시아버지까지 홀로 된 막막한 집에 귀하게 키운 딸을 시집보낼 양반가는 없을 터이다. 아무튼 현경운의 세상 보는 눈이 정확했던지, 그런 우여곡절 끝에 진건은 대구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부호인 경주이씨 집안(미주) 40세 장년 이길우의 사위가 되었다.
또 기차가 ‘덜컹’ 소리를 내면서 승객들의 오장육부를 뒤흔든다. 진건의 머릿속도 지금으로 돌아온다. 차창 밖의 아이가 사라진 지는 이미 한참 되었고, 유리창에 뽀얀 김처럼 서렸던 아내의 얼굴도 봄날 아지랑이인 양 종적을 감추었다. 두 손으로 상기된 얼굴을 살며시 누르던 진건은 짐짓 목을 뒤로 젖히면서 마음의 긴장을 풀어본다. 기적소리 탓이다. 신의주역이 그리 멀지 않았다는 신호로 요란한 굉음이 울려 퍼진 것이다.
다른 역도 아니고 신의주역이다. 1906년에 경의선 종착역이 설치된 이래 의주를 대신하여 중국과 대한제국의 관문으로 우뚝 선 곳이 바로 신의주다. 압록강철교가 개통되면서 세관, 우정국, 영림청 등의 관공서들이 세워졌고, 급기야 1910년에는 의주에 있던 도청까지 옮겨왔다.
1910년대 최대의 항일 무장독립운동단체 광복회가 강 건너 중국 단둥과 이곳 신의주에 비밀 연락소를 설치하고, 또 대구의 독립지사 송두환이 사비로 이곳에 집 한 채를 사서 항일운동 거점으로 삼은 것도 그만큼 압록강 철교를 마주보고 있는 단둥과 신의주가 교통망의 요지이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중국으로 넘어가는 신의주역에서 일제 경찰이 엄중한 검문검색을 실시할 것이야 물어보지 않아도 자명했다.
“작은서방님, 조심 또 조심을 해야 합니다. 아시겠지요?”
“부디 무사하셔야 해예. 아시겠어예?”
다섯 살 많은 막내형수 윤덕경과 세 살 연상의 아내 이순득이 두 손을 맞잡은 채 눈물을 흘리면서 배웅하던 일이 생각난다.
진건이 집을 떠나 외국으로 출발하는 경우가 오늘이 처음인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두 여인이 유난히 슬퍼하는 것은 종전처럼 단순한 유학이 아닌 탓이다.
지금까지는 서울과 일본을 드나들었는데 이번은 중국으로 간다는 점부터 다르다. 그것도 형 정건이 불러서 상하이 호강滬江대학 유학길에 오르는 만큼 사실상 독립운동에 투신하러 가는 길이나 진배없다. 그런즉 위험 정도가 말로 표현할 수 있을 수준이 아니다. 언제 어디서 생명이 끝날지 알 수 없는 것이 중국 망명 독립운동가의 삶 아니던가.
게다가 윤덕경은 시동생 진건을 떠나보내는 순간에 남편 정건의 모습까지 더불어서 보고 있었다. 남편은 결혼한 지 사흘 만에 중국으로 떠나버렸다. 그 원망스러움이야 어찌 필설로 형용할 수 있으랴만, 그녀는 그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뒷날 대한민국임시정부 재정차장으로 활약하게 되는 자신의 둘째오빠 윤현진이 정건에게 ‘큰 결심을 했네!’라고 극력 격려까지 하였으니 ….
윤덕경은 1910년 결혼 이래 시동생 진건과 함께 살아왔다. 아니, 키워왔다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한 말일 듯하다. (계속)
(미주) 1915년 이길우의 딸 이순득과 혼례를 치른 현진건은 대구 중구 인교동 처가에서 신혼 생활에 들어간다. 따라서 “15세 때 이상화와 가까운 친척인 경주 갑부의 딸 이순득과 결혼하여 처가인 수동(현 인교동) 255번지에서 신혼 생활(2020년 10월 16일치 모 일간지)” 식으로 소개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길우는 대구 중구 인교동에 거주했으므로 ‘경주 갑부’가 아니라 ‘대구 갑부’이다. 그가 경주 이씨인 것을 ‘경주에 거주하는 이씨’로 잘못 이해한 탓에 ‘경주 갑부’와 같은 오기가 생겨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