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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에 왔다가 귀화. 전라도 안렴사 按廉使(도지사) 부임. 문연각은 지금의 국립도서관의 기능을 했던 곳이다. 안렴사는 현재의 도지사 그러니까 전북도지사급으로 생각하면 된다. 그당시에는 전라도지사 격이니 현재의 전남,전북을 합쳤던 지역이니 훨씬 지금보다 권력이 대단했을 듯하다. 예전에는 행정뿐아니라 사법권과 군사권도 겸했으니 말이다.
고려는 지방을 5도로 분리해 통치했는데 5도는 ① 양광도(지금의 충청도) ② 경상도 ③ 전라도 ④ 서해도(지금의 황해도) ⑤ 교주도(지금의 강원도) 이다. 조선 건국 후 보성으로 은퇴해서 살아서 본관은 보성이 되었다.
돈은 넘치는데 큰 인물이 안 나오는걸 안타깝게 여겨 당대 제일의 풍수지리 고수를 찾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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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살펴보니니 연꽃이 물에 뜬 형상인 연화정수형인 지세였다. 인물 많이 나오겠다고 여겨서 1만평 사들였다. 당대의 목수를 구하러 한양에 도착. 조선의 목수들은 선공감 소속 1백명이 최고의 실력자들이었다. 지금의 신문로 구세군회관 건너편 선공감을 찾았다.
도편수와 목장을 구하여 속리산 근처로 내려왔다. 속리산을 뒤져 적송을 찾았다. 나라가 망해가는 관계로 베는 사람이 임자인 시절이었다. 그만큼 관리가 허술했다는 말이다. 이 속리산 적송을 공사 현장으로 갖고 내려와 천막을 치고 1년 6개월간 그늘 아래서 건조했다. 다 터지고 갈라질 때까지 기다린다. 인고의 세월이다. 1925년 드디어 완공했다. 공사기간만 23년이다. 대공사인 것이다. 짓다 보니 제한 칸수인 99칸이다. 왕만 규제가 없고 조선시대에는 100칸을 넘으면 안되었다. 아무리 높은 사대부라하더라도. 1926년 서당인 35칸의 관선정 觀善亭(선함을 관조하는 집)을 건립하였다. 동네 아이들도 무료로 교육해주고 한글도 가르쳤다. 1944년 왜놈들이 강제로 이 교육기관인 관선정을 이유를 들어 철거했다. 그나마 깊은 계곡의 서당이라 오래동안 버틴거겠지 우리 시대의 한학자 임창순은 1927년부터 6년간 이 관선정에서 성리학자 홍치유에 사사. 1974년 경기도 남양주시 수동면에 한문 서당인 지곡정사 芝谷精舍 설립, 관선정의 대를 잇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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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주사 들렀다가 보은의 문화유산인 선병국 가옥을 찾았다. 1984년 중요민속자료 134호로 지정될 때 20대손인 선병국이 살고 있어서 선병국 가옥으로 불리고 있지만 지금은 21대손인 선민혁이 주인. 입이 쫙 벌어지는 장대함. 있는 것도 없고, 없는 것도 없는. 마당에 장독대가 즐비하다. 21대 종부 김종옥은 2006년 ‘대한민국 명품 로하스 식품전’에 덧간장(햇간장 만들 때 넣는 묵은 간장) 1리터 전시. 5백만 원에 팔렸다. 간장 한 병에 5백만 원. 조금씩 먹어야겠다...금값이네. 3백50년 된 간장이라 그런가보다. 하긴 와인이 350년됐음 50억 갈수도 있겠다. 4천 평의 이 집은 주택이라기보다 하나의 마을 규모. 먼저 H 형태의 사랑채. 밀려드는 탐방객들에게 차라도 한잔 대접하려고 1998년 찻집을 열었다. 찻집 이름은 ‘도솔천’. 미륵불이 살고 계신 극락. 기단은 다듬은 화강석에 원형 기둥으로 되어있다. 그 당시에는 개인 주택에 사용할 수 없는것이었다. 5천 원짜리 대추차를 시킨다. 사방에서 바람이 들락 날락허니 시원스럽다. 주인 마나님이 영광스럽게도 직접 날라다주신다.
제2 영역인 안채로 들어갔다. 몰래. 역시 H형 평면의 우람한 전각. 현판은 이렇다. 위선최락 爲善最樂. 선을 행하는 것이 최고의 즐거움이다. 1백 미터는 됨직한 기다란 행랑채는 1995년 고시촌으로 변신. 이곳을 다녀간 고시생만 4천 명. 종부는 매일 30여 명의 고시생들에게 유기농 식사를 제공한다. 전국 최고의 합격률을 자랑한다는 소문이 있다. 관선정이 다시 살아난 거다.
뒷마당에 제3 영역인 사당이 있다. 선조를 모시면서 미래를 대비하는 센 집안이다. 보은군은 최근 62억 원을 투자, 선병국 가옥 인근에 대추테마공원 조성에 들어갔다. 선병국 가옥을 보은군의 관광지로 키우자는 생각인가 보다. 하지만 넘 알려지는것은 좋치않다. 그저 그곳에 항상 손짓하며 반기는 그런 소담한 곳이 좋다.. 너무 관광지화 시키면 맛과 멋이 좀 떨어진다..자연스러움이 좋다. 하늘과 바람이 어우러져 부드러운 볼살처럼 약간은 부끄러이 볼 수 있는 한국적인 면이 살아있어야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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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 신부가 꿈이었다. 전교는 전세계를 다니면서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신부인데 이것은 그당시에는 꽤나 힘들었을것같다.처형도 많이 당했고. 신부도 타고 있었다. 1845년 김대건은 제물포항에서 라파엘호를 타고 중국 상해로 넘어간다. 금가항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고 대한민국 1호 신부가 된다. 조선으로 돌아가는 길에 다블뤼를 만난다. 제주도에 들렀다 42일 만에 전북 익산 근처 나바위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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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6년 선교사의 안전한 입국을 위한 비밀 항로를 찾아 나섰다가 백령도에서 체포되어 새남터에서 사형되었다. 이때가 27세. 대한민국 최초의 신부는 이렇게 덧없이 가버린것이다. 김대건 신부의 귀국선 라파엘호는 지금 제주도 용수리 하멜표류기념관에 복원 전시중이다. 11명이 타고 온 작은 나룻배. 이걸 타고 바다를 건넜겠지.
1887년 사제 서품을 받은 파리외방전교회의 베르모렐 신부에게 연락을 받은 다블뤼 신부는 김대건 신부가 개척한 비밀항로를 이용해 나룻배를 타고 6개월 만에 백령도에 도착했다. 백령도는 그 당시에도 물살이 꽤 쌨을것이다. 이번에 침몰한 천안함이 인양된곳도 그곳이었으니... 나룻배를 타고 제물포 잠입에 성공해서 용산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게된다. 1897년에 보두네(1859~1915) 신부와 함께 전라도를 남과 북으로 해서 선교활동을 펼쳐간다. |
성당을 열게된다. 현판을 걸었다. 나바위성당.
그 지역의 문화에 관여하지 않는 게 외방전교회의 법도이다. 중앙에 기둥을 죽 세우고 칸막이를 설치하여 좌측은 남자석, 우측은 여자석으로 만들었다. 입구도 따로였다. 지금도 이 법을 따르고 있다. 칸막이는 제거했지만 천주교와 유교가 함께하는 위대한 성당인셈.
지붕에는 우리가 늘 보아왔던 친근한 기와를 사용했다. 고딕에 기와지붕이라 약간 아이러니컬 한 면도 보이지만 그 당시에는 뭐 그럴수도 있겠지. 성당과 서원의 합작품 정도로 생각하면 될것같다. 벽은 처음에는 흙으로 만들었다. 10년만인 1906년에 축성식 을 했다. 현재로 봐도 참 기발한 건축양식이 된셈이다.
으로 집을 짓는 것을 보면 참 안타깝다. 물론 작은 땅에 많은 인구가 살고있으니 어쩔수는 없겠지만 집을 건축할때 지형과 주변환경을 고려하여 조금더 친환경과 자연친화적인 건축물을 지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리고 100년을 내다보는 건축이었으면 한다. 1907년 계명학교를 설립하여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육기관 역할도 한다.
1912년 대구교구장 드망즈 주교가 나바위를 찾았다. 대주교가 이곳에서 피정을 하고자했다. 주교가 돌아가자 누각 신축에 착수했다. 나바위에 천막 치고 피정하게 할 수는 없고 공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담양 면앙정을 찾아가서 면앙정을 본따서 나바위 위에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 기둥 세우고 기와를 얹었다. 1915년 주교가 다시 찾았다. 주교는 이 누각을 망금정 望金亭이라고 명명했다. 금강을 바라보는 정자라는 뜻이다.
1931년 베르모렐 신부는 72세로 고룡이라 은퇴하였다. 28세에 이 땅을 밟았으니 44년 동안이나 먼 타국에서 나바위를 지켜온 것이다. 신부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한국땅에 살면서 성바오로 수녀원 지도 신부로 취직 하여 6년 동안 고아들을 가르친다. 1937년에 선종했다. 77세. 1955년 성 김대건 신부 순교비 건립. 1991년 피정의 집 건립. 사적 제 318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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