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註 ;
다음글은 '월간 朝鮮' 에서 선정한
저명인사 10명을 대상으로,
최근에 자주 희자되는
"Soul Food (영혼이 담긴 음식,
추억이 깃든 음식.)" 제목으로
"월간조선 2월호" 특집에 올려진 글입니다.
" 나의 소울 푸드 (Soul food)."
金 武 一.
前)현대,기아車그룹 부사장.
현대제철(株) 부회장 역임.
0. 눈물 젖은 빵.
'이 빵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인생의 참 맛을 모를것이다 !.'
독일의 大문호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말이다.
괴테는 눈물 젖은 빵과 슬픔으로,
울면서 밤을 지새운 사람에 대해
이와 같이 말했다.
필자의 세대가 좀 그런편이다.
우리 세대는 日帝말기에 태어나
祖國광복과 정부수립,
그리고 한국전쟁과 국가 수차례의
정치, 경제적 위기를 비롯한
격동의 사태를 겪으며 살아온 세대다.
특히 비참하기 이루 말할수 없었던
한국전쟁중 우리 가족은 더 했다.
당시 필자는 초등학교 초년생이었고,
부친 金錫吉翁은 조선일보 主筆로
재직중이셨다.
신문사 社主 계초 방응모선생을
가까이 모시던중
강제로 납북(拉北)되신후,
공산치하 3개월 동안 땅굴속에
숨어 굶으며 살았다.
아버님은 당시 철저한 反共주의자
論客이셨기 때문에 우리가족들은
저들의 魔手를 피하느라,
무척 苦되고 힘든 3개월을 보냈다.
수도서울 탈환후 전쟁의 양상이
호전될줄 알았었는데,
4개월만에 또다시 赤化되어
험난한 피난길에 올라야만 했다.
그해의 1월은 몹씨도 추웠다.
엄동설한이 北風과 더불어 몰아치는
그 추위는 半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에도
몸서리 칠만큼 추웠다.
한강물은 물론, 동네 수도, 우물 개천等,
온전한 물종류들이 얼어붙어,
食水마져도 구하기 힘든 겨울이었다.
쇳조각으로 만든 문고리나 양동이처럼
쇠 철판에 손(手)이 닿는 순간,
즉시 얼어붙는 추위였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서울 보금자리를 떠나야 했던 이때,
고맙게도 언론사에서 마련해 준
특별 피난열차를 겨우 얻어 타고 南下 한다.
몇날 몇밤을 가다 서다를 반복하던
피난 남행열차가 어느 늦은밤,
이름 모를 큰 도시의 역(驛)에
잠시 머물게 되어,
추위에 떨던 피난민들이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우루루 驛 밖으로 쏟아져 나갔다.
우리가족도 그 속에 껴 뭍혀
함께 밀려 나가,
한 겨울밤 역전앞 길거리 좌판에 올려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삶은 통오징어를
씹지도 않고 게눈 감추듯 먹던
그맛은 아마도 필자의 생애(生崖)동안,
잊지 못할 눈물젖은 필자의
'Soul food' 로 남을것이다.
그 驛은 지금의 경상북도 대구驛 이었었고,
때는 1951년 1.4 후퇴때 였다.
0. 1953년 7월 休戰을 맞는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까까머리 학창이 시작된다.
전쟁의 소용돌이는 잠시 멈췄지만,
온누리는 온통 전쟁의 폐허속에
어느곳 하나 제대로 된것 없는
아수라장 판으로 변해 있었다.
폭격을 맞은 도심의 건물들은
벽돌더미가 쌓인채 방치되어 있었고,
광화문 도심과 중앙청 석조 건물은
화염에 휩쌓였던 화재모습 그대로
검게 끄슬려 진채 상처 투성이었다.
남대문, 청계천시장을 비롯한
삶의 치열한 터전에는 피난지에서 돌아온
누추한 모습의 인파(人波)에 뒤 덮혀,
혼잡의 극한을 보는듯 했다.
어수선한 나라 형편상 마땅한 볼꺼리나
이렇다할 휴식공간도
옳게 찿지 못하던 그때,
영화관람은 당시 시민들에게
유일한 위안거리이며 문화생활로
꼽혔었던 어느날,
산악영화 'The Mountain.'을
감명깊게 보았다.
名배우 '스펜서 트레이시'卿 이
출연 했는데, 내용은 高山 등반도중,
조난사고를 당해 사경(死境)을 헤매이던
아우를, 죽음의 눈사태속에서
극적으로 구출하며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정신을 몸소 일깨워 주는
감명깊은 영화였다.
그는 이 작품을 계기로
英여왕으로부터 작위(爵位)를
수여받을 만큼 名연기를 발휘했다.
이때부터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등산활동에
붐이 일어 산악부를 편성해,
암벽등반에 몰두했다.
그때 백운대와 인수봉,
도봉산 만장봉과 선인봉
그리고 우이암,
柱峰, 五峰을 비롯한
전국 팔도강산의 암벽은
모두 우리 산악인들의 신나는
활동무대였으며,
이곳을 외줄 Rope 에
매달려 오르고 내리면서
몇일씩 묵던 야영생활과,
혹은 겨울철 내내 눈(雪)덮인 횡계리
民泊 스키마을에서 때우던
하루 3時 세끼 음식은
主로 美軍 PX 에서 흘러나온
군용식품 깡통조림을 곁들인
김치찌게가 단골 Menu 였다.
햄, 쏘세이지, 베이컨으로 조리한
즉석 음식들은 아마도 한참후,
서울 용산구 미 8군부대 근처나
혹은 의정부, 파주 용주골等,
기지촌 주변에서 번성했던
'부대찌개'의 원조가 아닐까 ?.
이 또한 필자의 잊지못할
두번째 'Soul food' 중 하나다.
그런데 이 '꿀꿀이 죽' 같은
'Soul food' 가
어찌하여 인연을 끊지 못하고
다시금 필자의 뒷꽁무니를
졸졸 따라 다닐줄이야 ..?.
0. '나의 Soul food.' 다시 만나다.
학창을 끝내고,
당시 사회진출前 필수과정중에
한 대목인 국토방위의무를
畢해야 했는데,
그 유명한 귀신이나 한놈 잡아볼까 해서
제발로 찿아간 곳이 하필이면
그때 惡名깨나 높았던 海兵隊 였다.
(지금은 바퀴벌레나
빈대도 못 잡지만 ...ㅋㅋ.)
"The Few !. The Proud !." 라는
남성적이고 매력적인 Slogan 에
이끌려단기장교로 입대해,
주야장창 북한 괴뢰군을
코앞에 노려보며 철책선을 지켰다.
1년쯤 지났을까 ?.
조금만 더 참고 견디면
병역의무를 끝내고 사회로 복귀해,
보람된 사회생활을 꿈꾸던 어느날,
느닷없이 당시 치열했던
베트남戰 파월명령이 떨어졌다.
한참 젊은나이에
운명론자는 아니었지만,
이 또한 가야할 주어진 운명이라면
기꺼이 가겠노라고
큰소리 팡팡 치면서 전쟁터로 向한다.
그리고 기왕이면 최전선 소임을 自任,
용감한 부하들을 이끌고
수색중대 소총소대장으로
최 선봉에 섰다.
청룡부대 최 장기 소대장으로 1년간
아슬아슬하고 치열한 전투중,
지뢰밭을 누비거나 적탄에
철모가 뚫려 가면서도 용케 살아 남았다.
아침, 눈만 뜨면, 맨땅에 꿇어 업드린채
"나의 수호신이신 主님 !.
오늘 하루를 主님께 맞겨 드리오니,
오늘 하루도 저와 제 부하들을
친히 보살펴 주셔,
무사한 하루를 지내게 해 주심을
간절히 빌어 올립니다.
그리고 소대원들의 무사 귀환을
애타게 기다리는 저들의 가족 품으로,
무사히 살아서 돌아갈수 있도록
지켜주옵소서..!." 가
하루 시작의 기도였다.
이 치열한 전투기간동안
하늘이 안보일 정도의 어두운 정글속에서,
혹은 거머리가 우굴대는 늪지대에서,
그리고 피투성이된 부하들과 함께
하루 세끼 1년 내내 먹던 피와 눈물젖은
'Soul food' 가 바로
미군 전투식량 C- Raition 이었다.
치열한 전투중
식수(食水)가 떨어지기가 다반사였다.
열대 40ㅇ를 웃도는 열기로
타 들어가는 갈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맨몸도 아닌 방탄조끼와 무기류,
실탄,탄약 철모等은 왜 그리 무겁던지...
제대로된 식수를 구하지 못해
논두렁에서 걸러낸 흙탕물에
콩알만한 소독약을 타, 함께
억지로 위장속으로 꾸역꾸역 밀어넣던
햄, 쏘세이지, 베이컨이 지겨워,
무척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저것들을 볼라치면 딸꾹질 칠
정도의 food 였지만,
그래도 추억과 哀歡이 담긴
필자의 잊지못할
이 'Soul food' 를 마주 할때면,
잠시 눈을 감고 어깨를 나란히 하다
장열히 산화한 옛 戰友들의
명복을 빌어보곤 한다.
0. 또 하나의 잊지못할 'Soul food.'
그리고 또 한 세월이 흘렀다.
가정을 이루고 경상남도 울산공단
자동차 생산현장에서 젊은 혈기를
온 몸으로 불 태울때였다.
억눌렸던 민주화의 봇물이
마치 화산이 폭발하듯 일시에 터져,
전국 공장지역이 노사분규에
휩쓸려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아수라장으로 돌변했다.
1987년 6.29 민주화 선언의 폭탄이
점화되던 시기에, 필자는
그 분규의 중심에 있었다.
울산지역에 밀집했던
현대그룹 전 사업장은
하룻밤 사이에 술에 만취한
거칠기 이를데 없는 강성 노동자들에
의해 급습을 당한다.
'코로나 펜데믹' 도 아닌 그때,
검은 마스크로 얼굴을 온통 싸매고
쇠파이프와 각목으로 무장한 그들은
본관 건물은 물론, 지네들의 현장사무실,
식당, 화장실까지 닥치는 대로
깡그리 때려부셔, 집기 비품등,
유리창 한장 남기지 않고 아작을 냈다.
이 엄청난 사태 수습을 위해,
몇날 몇밤을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뜬눈으로 낮,밤을 새우면서
업무 복구작업에 혼신을 다 하던 어느날,
전화교환실 여직원들에 이끌려,
깨져 나간 유리창 대신
비닐로 임시 바람막이한
통신실로 불려갔다.
그날,
부셔진 탁자위에 놓인 생일 케잌과
따끈한 미역국은 마치
어머님의 정성어린
미역국과 진배 없을만큼 따뜻하고
감동스러운 또 하나의 잊지못할
'Soul food' 였다.
그때 이 음식을 정성껒 차려준
총무부의 하금자부장은
지금도 울산에서
귀여운 손주들과 함께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요즘들어 'Soul food' 라는 음식이
부쩍 눈에 뜨인다.
직역하면 '영혼을 울리는 음식' 혹은
'추억을 담은 음식'으로
사용되는것 같다.
정확히 풀이하면 미국 남부 흑인들의
전통 요리법이 담긴 음식과
요리법을 뜻하는 單語다.
아울러 그들의 정체성과 그들만의
고유한 문화와 역사가
담긴 음식이기도 하다.
그 유래(由來)는 다음과 같다.
미국 식민지 시절, 남부지역 농장에서
苦된 노예생활을 하던
아프리카계 이주민들이,
그들의 그리운 고향
아프리카 전통음식으로
미국식 요리법과 재료를 결합시켜
만들어 먹던 어려웠던 시절이 있었다.
이 음식은 눈물과 哀歡이 담긴
추억의 음식을 뜻한다.
필자는 1970년대쯤,
미국 흑인 해방운동가인
'Malcolm X' 의자서전에서도
이 단어를 읽었던 기억이 난다.
이렇듯 오늘을 사는 많은 사람들은
제각기 잊지못한 추억의
'Soul food' 가 시대의 변화에 따라,
혹은 세월의 흐름속에 떠 오를것이다.
왜냐 하면 온 세상의
생물들은 먹어야 살고,
살기 위해서는 먹어야 하니까 ...
필자의 경우도 그렇다.
그리나 필자의 경우
그 수많은 추억어린 food 중에
가장 '영혼을 울리는
소중한 추억음식.' 을 든다면
역시 젊었던 그시절,
옛 戰友들과 生死의 갈림길에서
함께 나눠 들던
'美 군용 깡통 food' 가 바로 그것이다.
이 추억의 음식을 대할때 마다 문득,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양지바른 언덕에
잠들고 있는 필자의 옛 부하와
동료들을 떠 올려 본다.
그리고 뒤 이어 故 이동룡장군의
묘비명(墓地銘)을 되 뇌여 본다.
이분은 필자가 젊었던 시절,
가까이 모셨던 해병대 제 1사단장을
역임하신 분이다.
"아들아 !.
혹시, 祖國이 위태로워 지거든
즉시 깨워다오.
내 분연히 일어나
다시금 銃을 들리라 !.".
(完)
다사다난 했던 癸卯年이 저물고
희망찬 甲辰年의 새해가 힘차게
떠 오르는 새해 새아침.
祖國의 영원한 평화와
번영을 기원하면서...
金 武 一
출처: 산마루 오두막 원문보기 글쓴이: sp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