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문학 2023년 8월호
< 때여! 나의 때여! 동학의 세상이여! >
3부 - 민중의 바다에 뜬 동학(東學)의 달(月) - 11
(38)
‘업(業)에 편안하라’는 비답을 받은 해월(海月)
효유(曉諭)를 생각함에
두렵기 이를 데 없다면서
다음과 같은 경통(敬通)을 발했네
“무죄지이여죄 (無罪之以如罪)
동동학미념념동 (同同學味念念同)”
“죄 없는 곳에서 죄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겸허한 마음가짐은 같고
같은 배움의 맛이 같고 같다”
* 주석 : 경통(敬通 - 이번 대궐 앞에 나아가 부르짖은 것은 보통 생각으로 말하면 가(可)히 시기에 맞고 대의(大義)에 합(合)한다 이를 것이나 도(道)를 만세(萬世)에 크게 펴는 것으로써 말하면 일시(一時)의 속정(俗情)으로 「원통하다」 또는 「원통한 것을 편다」하는 것은 결코 우리 스승의 큰 덕(德)에 비하여 족(足)히 거론할 바 못되는 것이다. 그러나 팔역(八域)이 동정(同情)하여 만인(萬人)이 상소(上疏)하는데 나아갔으니 이 또한 천심(天心)이라 대궐 문 앞에서 부르짖은 지 3일에 사알(司謁)의 구전(口傳)으로 평온(平穩)하게 물러가 각각 그 업에 편안하라는 효유가 있었으니 이 효유를 생각함에 두렵기 이를 데 없도다. 어(語)에 이르기를 「사람이 누가 허물이 없으리오마는 고치는 것이 귀(貴)하니라」하였으니 깊이 원컨대 여러 도인(道人)은 항상 사문(師門)에 「무죄지이여죄(無罪之以如罪)」란 지극한 교훈(敎訓)을 생각하여 악(惡)을 징계하고 선(善)에 옮기며 허물을 뉘우치고 스스로 새롭게 하여 천명(天命)을 공경하고 내 몸을 바르게 하면 「동동학미념념동(同同學味念念同)」의 진리(眞理)와 묘(妙)한 뜻이 또한 그 가운데서 벗어나지 않은 것이다. 대개 복(福)이 되는 일과 화(禍)가 되는 일이 전혀 이 마음이 바르냐 바르지 못하냐에 달렸으니 부지런히 부지런히 게으럼이 없이 나의 본래(本來)의 적자(赤子)의 마음을 잃지 않은 연후(然後)에야 무위화기(無爲化氣)의 자연(自然)한 이치(理致)에 거의 그 요령(要領)의 방법을 얻을 것이라 요언을 더럽게 여기지 말고 두려운 마음으로 스스로 반성하여 써 무궁(無窮)의 진리(眞理)를 통하고 무극(無極)의 대운(大運)에 참여하는 것이 옳으니라.
복합상소(伏閤上疏) 후
소문만 듣고 동학교도 행세를 하거나
수도를 등한히 하는 교도들이 많아지자
해월(海月)은 어떠한 곤란이 있을지라도
수도에 힘쓰라는 통유문(通諭文)를 내렸네
* 주석 : 통유문 - 대개 나무의 뿌리가 굳건하지 못하면 바람을 만나 거꾸러짐을 면(免)치 못할 것이요 물의 근원이 깊지 못하면 능(能)히 웅등이를 채우고 전진(前進)하지 못할 것이라. 사람의 마음도 또한 이와 같으니 마음이 정치 못하면 믿기도 하고 의심도 하여 일이 되지 않고 공도 이루지 못할 것은 필연(必然)한 이치라. 그윽히 생각하면 비(譬)하건대 먼 지방 사람이 장차 서울에 갈세 속장(束裝)을 하고 길에 오르면 혹(或) 물에 임(臨)하여는 건너기 어렵고 혹(或) 영(嶺)을 만나면 넘기 어려우며 갈랫길을 보면 의심(疑心)이 생기고 관문(關門)을 당(當)하면 두려움이 생겨 머뭇거리면서 나아가지 못하고 물러가는 것은 곧 마음이 서지 못한 자(者)요 또 혹(或) 물에 임하여 능(能)히 건너고 영(嶺)을 만나 능(能)히 넘으며 갈랫길을 보고 능(能)히 나아가며 관문(關門)을 당(當)하여 능(能)히 나아가나 그러나 날이 오램을 견디지 못하여 중로(中路)에 질러 돌아가는 자(者)는 이것은 뜻이 정성되지 못한 자(者)라. 그 중에는 날이 오램을 꺼리지 않고 노고(勞苦)를 관계하지 않으며 행(行)하고 또 행하여 마침내 서울에 이르는 자(者)도 있으니 이것은 마음이 굳고 뜻이 독실(篤實)하여 능(能)히 대업(大業)을 성취(成就)하는 자(者)라. 하물며 이 무극대도(無極大道)의 무궁(無窮)한 이치(理致)를 어찌 얕은 마음으로써 진경(眞境)에 이를 수 있으리오. 오직 우리 종도(宗徒)는 힘써 나아가 게으름이 없이 일염(一念)으로 일을 받들어 구인(아홉길)의 우물을 버리지 말고 일궤의 공(功)을 이지러뜨리지 말지어다.
서병학(徐丙學) 등 강경파 교도들은
대신사(大神師)의 신원(伸寃)은 해결되지 않고
관리(官吏)의 지목(指目)이 전보다 심하여
교도들의 생명재산을 하루도 안보하기 어려우니
해월(海月)에게 방책을 지시해 달라는 건의를 했네
대도소가 설치된 보은장내(報恩帳內)에
‘동학교도들은 모두 모이라’는 명이 하달되었네
청산군 포전리[옥천군 청산면] 김연국(金演局)의 집에서
대신사의 조난향례(遭難享禮)를 거행했네 (1893년 3월10일)
보은장내에는 충청, 전라, 경상, 경기, 강원도 등
각지에서 수만 명의 동학교도들이 연일 몰려들었네.
이들은 도소를 중심으로 성(城)을 쌓기 시작했네
갈수록 동학교도의 수가 늘러나자
보은 군수 이중익(李重益)이 해산령을 내렸네
* 주석 : 이 무렵 보은(報恩) 장내(帳內)에 모인 도인의 수(數)에 대한 기록이 일정치 아니하여 정확한 숫자를 표시하기는 매우 어려운 형편이었으니 날마다 사방에서 모여드는 도인의 수가 증가했기 때문에 어디에서나 확실한 숫자를 표시하지 못한 듯하다. 나타난 기록들을 상고해 보면 『3월11일 해월신사께서 보은에 이르니 도인회자수만인(道人會者數萬人)이라. (천도교창건사(天道敎創建史) 제2편 55면)』한 것과 하(夏) 4월 어윤중(魚允中)을 선무사로 하고 홍계훈(洪啓薰)을 초토사로 하여 충청도와 전라도의 동학도(東學徒)를 진무(鎭撫)키로 하였는데 이때 동학군이 보은에 모인 수를 『시시동비회보은자팔만인(是時東匪會報恩者八萬人)』이었다고 한 매천야록(梅泉野錄)(124면)의 기록과 김윤식(金允植)의 속음청사(續陰晴史) 상권 261면에는『취자가 이만칠천여인(聚者可 二萬七千餘人)』(3월26일자)이라 있는데 1주일 후 4월3일자에는 『회자위칠만여인(會者爲七萬餘人)』(동서263면)이라는 기록이있다. 황현(黃炫)과 김윤식(金允植)은 한결같이 동학도인(東學道人)들을 동비(東匪)라고 매도(罵倒)하는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이같이 기록했으니 이 숫자는 과장된 표현이 아니라고 보겠다.
“- 국왕은 인덕이 있으나
보좌하는 현명한 재상과 장군이 없어
외적이 틈을 타고 기회를 엿보고 있으니
모든 도유는 뜻을 같이하여
요사스러운 기운을 쓸어버리고
사직을 공고히 하는 것이 사군자가
충효하는 길이 아니겠는가 -”
라는 통유문(通諭文)을 해월(海月)이 직접 선포했네 (1893년 3월 16일)
* 주석 : 통유문 = 이 통유문은 무릇 입도(入道)라는 것이 중(中)에 위치하여 천시(天時)를 받들고 지리(地理)를 순(順)히 하여 써 위를 섬기고 아래를 기르는 것이라 사람의 자식이 되어서는 힘을 다하여 어버이를 섬기고 사람의 신하가 되어서는 절개를 세워 나라에 죽는 것이 이것이 인륜(人倫)의 큰 것이라. 무릇 우리 동방(東方)은 비록 바다 모퉁이에 편재(偏在)하였으나 천하(天下)의 동(東)쪽인지라 단군(檀君)의 강역(疆域)을 열므로 부터 기자성조(箕子聖朝)의 봉건(封建)에 이르기까지 천시(天時)의 정(定)함과 인륜(人倫)의 차례가 스스로 바꾸지 못할 규범(規範)이 있도다. 성주현신(聖主賢臣)이 사이사이 이어 나와 전장법도(典章法度)와 예락교화(禮樂敎化)가 환연(渙然)히 창명(彰明)하여 천하(天下)에 들린 것은 그 인륜(人倫)이 가장 밝고 더욱 나타난 때문이라 어찌하여 중년이래(中年以來)로 천하(天下)가 크게 어지러워 강기(綱紀)가 퇴이(頹弛)하고 법약(法約)이 문란(紊亂)하여 이적(夷狄)의 화(禍)가 중토(中土)를 침릉(侵凌)하고 우리 동방(東方)을 침범(侵犯)하여 주치횡행(周馳橫行)하되 염연(恬然)히 듣고 심상(尋常)하게 보아 그 끝이 화(禍)가 국가(國家)에 미칠 것을 알지 못하는지라 성인(聖人)이 근심하사 대도(大道)로 가르치시니 무릇 우리 도인(道人)이 일심(一心)으로써 지킨 지 여러 해가 되었으며 뜻을 세워 충효(忠孝)의 역(域)에 세워 죽기를 맹세하고 변(變)치 아니하여 제가치국(齊家治國)의 마음으로써 책임(責任)을 삼는 것도 생각컨대 응당 얼마가 있은지라 하물며 왜적(倭賊)은 일월(日月)을 같이할 수 없는 불공대천(不共戴天)의 원수로되 시양(豕羊)의 무리에게 곤난(困難)함을 보았으니 또한 차마 말해 무엇하랴. 방금(方今) 국세(國勢)가 거꾸로 매달린 것과 같이 급(急)하되 그것을 풀 줄을 알지 못하니 오히려 나라에 사람이 있다고 하겠는가. 우리들이 비록 초야토민(草野土民)일지라도 선왕(先王)의 녹(祿)을 입어 써 조선(祖先)을 안보하며 국군(國君)의 땅에서 밭갈아써 부모를 봉양(奉養) 하나니 신민(臣民)의 분(分)에 직업(職業)은 비록 다르나 의(義)인즉 하나이라 어찌 동로서사(同老誓死)의 의(義)가 없으리오. 지금 황천(皇天)이 실(實)로 더러운 기운을 싫어하여 무극(無極)의 조화(造化)로써 주시니 이는 진실로 지사남아(志士男兒)의 입절건의(立節建義) 할 때로다. 조생(祖生)의 격즙(擊楫)과 범공(范公)의 람비는 장(壯)하도다 뜻이여. 문산(文山)의 경천(擎天)과 육부(陸夫)의 봉일(捧日)은 자품(姿品)이 이미 빼어나고 양공(襄公)이 원수와 연소(燕昭)의 부끄러움은 보복(報復)에 한정(限定)이 있으니 시호시호(時乎時乎)며 시재시재(時哉時哉)라. 지금 우리 성상(聖上)은 순덕(純德)이 인유(仁柔)하고 만기(萬機)를 총찰(總察)하시되 안에 현양(賢良)의 좌(佐)가 없고 밖에 웅용(雄勇)의 장(將)이 없어 외적(外賊)이 틈을 타서 기회(機會)를 엿보아 절박(切迫)함이 조석(朝夕)에 있으니 복원(伏願)하건대 모든 도유(道儒)는 일심(一心)으로 뜻을 같이하여 요사(妖邪)스러운 기운을 깨끗이 쓸어버리고 종사(宗社)를 극복(克服)하여 다시 중광(重光)의 일월(日月)을 밝게 하는 것이 어찌 사군자(士君子)의 충효(忠孝)를 하는 길이 아니겠는가. 인(仁)이란 생육(生育)의 봄이요 의(義)란 수장(收藏)의 가을이라 지인(智仁)이 비록 덕(德)이긴 하지만 용(勇)이 아니먼 달(達)하지 못하나니 복원(伏願)하건대 모든 군자(君子)는 본연(本然)의 의기(義氣)를 극여(克勵)하여 써 대충대공(大忠大功)을 국가(國家)에 세우면 심행(甚幸)이겠노라. 계사(癸巳) 3월16일
“왜양지사를 치는 것으로 죄 삼아 가둔다면
화(和)를 주장하는 매국자를 상을 준단 말인가?
어찌 우리 순상의 밝음으로써
헤아리지 못함이 이처럼 심하단 말인가?
미혹하여 왜양의 신복이 되려는 자는 관령을 따르라”
해산을 거부하고 도소 중앙에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큰 기를 세웠네 (1893년 3월 18일)
동학도소(東學都所)는 지금에 이르러
생명이 도탄에 빠진 것은
방백수령의 탐학 무도함과 세호가의 무단에 있으니
만약 지금 소청하지 못하면
어느 때에 국태민안이 있겠느냐며
지방수령들의 탐학을 강력하게 비판했네.
충청감사 조병식(趙秉式)을 파직시킨 고종(高宗)은
동학교도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보은 출신 어윤중(魚允中)을 선무사(宣撫使)로 기용
충청병사 홍재의(洪在羲)와
군사 3백 명을 지휘하게 했네. (1893년 3월 25일)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 깃발을 본 어윤중(魚允中)
겉으로는 오랑캐를 배척한다지만
내심으로는 난리를 일으킬 것 같다는 생각에
도소 지도부를 대포(大砲)로 위협을 하는 한편
서병학(徐丙學)을 회유하여
고종(高宗)의 칙유문(勅諭文)을 주었네.
“제가 불행하게도 여기에 들어와
사람들의 지목을 받은 지가 오래되었소이다.
마땅히 이곳에 모인 내력을 상세히 말씀드리지요.
호남에 모인 무리들[이 시기 전라도 원평에서는 남접이 주도한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은
예사로 보면 같으나 종류가 다르옵니다.
통문을 내고 방문을 붙인 것은
모두 그들이 한 짓이니 실정이 매우 수상합니다.
원컨대 공께서는 자세히 살피시어 결단하되
이들 무리와 혼동하지 말고 옥석을 구분해 주십시오.”
동학당의 해산을 명한 어윤중(魚允中)
다음과 같이 조정에 보고했네
“동학당(東學黨)이 모인 것은
선사(先師)의 신원(伸寃)과
척양척왜(斥洋斥倭) 및 동학군에 대한
침학행위(侵虐行爲)의 시정(是正)을 요구할 뿐이요
그 들의 손에는 무기(武器)를 가진 바 없고
오직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송주(誦呪)를 일삼으며
즉시 해산할 기색은 보이지 않으나
오직 정부에서 내려줄 다음 처분만을 기다릴 뿐입니다.”
서병학(徐丙學)의 청원(請願)과 함께
도소(都所) 지도부는
먼저 노약자와 어린이부터 귀가시켰네.
공주영장(公州營將), 청주병영 군관(軍官) 및 보은군수와 함께
순무사(巡撫使) 어윤중(魚允中)이 도소를 찾아왔네 (4월 1일)
왕의 윤음(綸音)을 낭독한 후
관리(官吏)의 탐학과 살상행위는
반드시 엄히 징벌(懲罰)하리니
제군은 각각 집에 돌아가 업(業)에 편안하라.
본관이 조정(朝廷)에 보고하여
소원을 펴게 하리라며 이들을 효유(曉諭)했네
도소(都所) 지도부는 3일 안에 해산을 약속했네.
해월(海月), 손병희(孫秉熙), 서병학(徐丙鶴) 등은
교도들의 해산을 지시하고
4월 2일 밤 도소를 떠나 잠행했네
도소에 모인 동학교도들은
20여 일 만에 해산을 하였네.
* 주석 : 방문(榜文)
대저 인사의 어려움은 세 가지가 있으니 절의(節義)를 세우고 충성을 다하여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은 신하의 어려움이요. 힘을 다하여 정성으로 효도하여 어버이를 섬기다가 죽는 것은 자식으로서의 어려움이요. 정절을 지키고 열녀를 본받아 남편을 좇다가 죽는 것은 아내의 어려움이라. 나고 죽는 것은 사람의 떳떳한 것이요. 일이 있고 없는 것은 때가 정하는 것이라 무사안락(無事安樂)한 때에 나서 충효의 도(道)를 즐기며 유사환난(有事患難)의 시기(時期)에 나서 충효의 곳에 죽는 것은 이것이 신하와 자식으로서 어렵고도 쉬우며 쉽고도 어려운 것이라 생(生)의 낙(樂)이 있는 자(者)는 임금이나 어버이의 어려운 일에 죽으려 하지 않고 죽겠다는 마을이 있는 자(者)라야 임금과 어버이의 어려운 일에 죽기를 즐거워하나니. 죽음을 아끼는 자는 능히 신하와 자식의 의리를 이루지 못하며. 죽기를 즐겨하는 자라야 능히 충효의 절개를 세울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왜양(倭洋)의 적(賊)이 심복(心腹)에까지 들어와 있으니 어지러움이 극도(極度)에 이른지라 진실로 오늘의 서울 형편을 보면 마침내 이것이 오랑캐의 소굴이 된지라 가만히 생각하면 임진년(壬辰年)의 원수와 병인년(丙寅年)의 치욕(恥辱)을 어찌 참아 말할 수 있으며 어찌 참아 잊을 수 있으리오. 지금 우리 동방(東方) 삼천리 지역(地域)은 다 짐승들의 발자국이 되었고 오백년 종묘사직(宗廟社稷)은 장차 쑥밭이 되게 되었으니 인의예지(仁義禮智)와 효제충신(孝悌忠信)이 지금 어디 있는가. 하물며 왜적(倭賊)은 도리어 회한(悔恨)의 마음을 두어 화단의 씨를 품고 방금 그 독(毒)을 펴려하니 위태로움이 조석(朝夕)에 있으되 이것을 염연(恬然)히 보아 편안하다고 이르니 지금 형편이 마치 불더미 위에 앉은 것과 무엇이 다르랴. 우리들은 비록 초야(草野)의 어리석은 백성이나 오히려 선왕(先王)의 법(法)을 이어받고 이 나라 국토에서 밭을 갈아 부모를 봉양하고 있으니 신하와 백성된 직분(職分)에 귀천(貴賤)은 비록 다를망정 충효(忠孝)야 어찌 다르리오. 원컨대 적은 충성이지만 나라에 바치고자 하나 구구(區區)한 하정(下情)을 상달(上達)할 길이 없으니 생각컨대 각하(閣下)께서는 세가충양(世家忠良)으로 길이 국록(國祿)을 보전하고 나아가나 물러가나 근심이 충군애국(忠君愛國)의 정성에 있다는 것은 저희들과 비(比)할 바 아니리오. 옛말에 이르기를 「큰 집이 기울어질 때에 한 나무로 버티기 어렵고 큰 물결이 밀려 올 때에 조그만 배로 막기 어렵다」하였으니 저희들 수만 명이 죽기로써 힘을 같이하여 왜양(倭洋)을 소탕하고 나라에 크게 보답(報答)하는 의리(義理)를 다하고자 하오니 원컨대 각하(閣下)께서는 뜻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충의의 선비와 관리(官吏)를 모집하여 다 같이 국가를 돕기를 천만(千萬) 바라나이다.
* 주석 : 순무사에게 호소하는 동학군의 방문(榜文)
무릇 왜양(倭洋)이 견양(犬羊)과 같다는 것은 우리 동방(東方) 삼천리에 비록 삼척동자(三尺童子)라도 알지 못하는 바람이 없고 살피지 못하는 사람이 없거늘 어찌하여 노성(老成)하고 또 밝게 살피는 순상(巡相)께서 도리어 왜양(倭洋)을 배척(排斥)하는 우리들을 사류(邪類)라고 하는가. 그러면 견양(犬羊)에게 굴복하는 자가 정류(正類)가 될 것인가. 또 왜양(倭洋)을 공격하는 사람을 죄를 주어 잡아가둔다고 하면 주화매국(主和賣國)하는 자가 높은 상을 받을 것인가" 오호통재(嗚呼痛哉)라 이것이 운(運)인가 명(命)인가. 어찌 우리 순상(巡相)의 총명됨이 이다지도 살피지 못함이 심(甚)할까. 길거리에 이와 같이 게시(揭示)하는 것은 혹 미혹된 자(者)들이 관(官)의 명령에 순종하여 왜양(倭洋)을 섬길까 두려워 함이라.
* 주석 : 참고 - 어윤중(漁允中)의 장계에 의하면 충청관찰사(忠淸觀察使) 조병식(趙秉式)은 탐학무도(貪虐無道)하여 불효불륙(不孝不陸)과 간음잡기(奸淫雜技)등 허구(虛構)의 죄명을 씌위 양민(良民)의 재산을 탈취함은 물론이요 공금(公金)과 계전(契錢)을 가로채어 사복(私腹)을 채우며 전영장(前營將) 윤영기(尹泳璣)와 공주진영장(公州鎭營將) 이존필(李存馝)과 공주 공주 신천서(愼天瑞) 영리(營吏) 고복은(高福殷) 서형래(徐亨怏)등을 내세워 돈 있는 자는 돈을 바치고 무사케 하고 돈 없는 자는 잡아가두어 형장(刑杖)을 가하며 유배(流配)를 시키는 등 기탄없이 행하였으니 그 예로서 각읍보진전(各邑補賑錢) 육만일천육백량(兩)을 전혀 진휼금(賑恤金)으로 내주지 않고 온양궁 수리(溫陽宮 修理)에 사만량을 쓰고 산성역사(山城役事)에 이만량을 썼다고 하나 온양궁(溫陽宮) 수리(修理)에 든 비용(費用)은 불과 팔천량이오 산성역사(山城役事)에는 따로 돈을 거두었다는 것이 사실이며 보은군 대동전 삼천사백량은 구경채(舊京債)라 하여 향리(鄕吏)를 잡아가두고 빼앗아갔으며 태안(泰安) 기속전(技贖錢) 육만육천량을 탐욕에 가득찬 군수(郡守)를 시켜 강제로 징수하여 한 고을이 텅 빌 정도가 되었으며. 가장 통분한 것은 공주민(公州民) 오덕근(吳德根) 등의 대지(垈地)를 빼앗기 위하여 간음(奸淫)으로 무고(誣告)하여 모든 오씨(吳氏)를 진영(鎭營)에 잡아가두고 협박하여 가산을 몰수(沒收)하고 군인(軍人)을 발동(發動)시켜 군악(軍樂)을 울리며 남자와 부인들을 엄동설한(嚴冬雪寒)에 밖으로 내쫓아 노약(老弱)의 죽은 자 오륙인으로서 촌락(村落)이 폐허(廢墟)가 되어 초목(草木)이 상조(相吊)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며. 공주(公州)의 김현익(金顯益), 임태순(林台淳), 고성용(高成龍)과 은진(恩津)의 최성숙(崔成叔)과 홍주(洪州)의 박계화(朴桂和)와 홍산(鴻山)의 김팔서(金八瑞)등을 간음(奸淫)으로 몰아 그 가산(家産)을 몰수하였으며. 아산(牙山)의 김상준(金相俊)을 공주진(公州鎭)으로 옮겨 가두고 몇 만량(萬兩)을 내라고 혹독한 형(刑)을 가(加)하여 견디다 못한 그 사람은 자살을 하고 말았으며 연산(連山)의 전감역(前監役) 이익제(李益濟)에 대(對)하여는 그의 아들이 이웃 처녀와 간음(奸淫)하였다고 무고(誣告)하여 그 처녀로 하여금 죽게 하였는데 먼저 일만양의 뇌물을 받고 나서 진령현감(鎭岺縣監) 이시우(李時雨)로 하여금 이웃 처녀의 무덤을 파내어 검사한 후 옥사(獄事)로 위협하며 연산(連山)과 은진(恩津)에 있는 옥답(沃畓) 이십여석(二十餘石)지기를 빼앗으며. 기타 민전(民田)과 민보(民洑)를 강제로 빼앗아 자기소유(自己所有)로 만들었으며. 남의 무덤을 파헤치고 다른 사람에게 입장(入葬)을 허(許)하며 이미 무덤을 파라고 명령한 후에 다시 입장(入葬)케 한 일도 있었으며. 또 뇌물받은 것이 드러날까 두려워 김제홍(金濟弘)을 죽이고 이에 대하여 그 마을사람에게 입을 열지 못하게 하였으며. 도내(道內) 공사전간(公私錢間) 그에게 빼앗긴 돈은 당전(當錢)으로 육십사만사천삼백구십일량(兩)이요 엽전(葉錢)으로 십만팔천삼백구십량인바 인명(人名)과 액수(額數)는 별도로 책을 만들어 올릴 것이요 이것은 명확히 드러난 것만 조사한 것으로 실수(實數)의 십분지이삼(十分之二三)에 불과할 것이라』고 하였으니 이러한 위인(爲人)들이 방백수령(方伯守令)이 되어 동학(東學)을 금한다는 구실로 실제에 있어서는 탐학과 토색(討索)을 일삼았으니 그 당시의 도인들의 곤욕과 울분과 원한은 그 극에 달하여 생사(生死)를 내걸고 이 모임에 참가하였던 사람이 많았는데 이것이 우리 나라 초유(初有)의 가장 큰 조직적인 민간시위운동(民間示威運動)이었으며 또 이것이 다음해에 일어난 갑오동학혁명운동(甲午東學革命運動)의 전주곡(前奏曲)이기도 하였을 뿐 아니라 실로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위기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서병학(徐丙學)은 황해도 서흥 객사에서
천우협(天佑俠) 단원으로 조선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던
일본의 낭인 혼마 규스케[本間九介]와 조우
하룻밤을 보내며 필담을 나누었네 (1983년 4월)
* 주석 : 천우협 天佑俠 - 1894년(고종 31) 갑오농민전쟁 때 일본낭인들이 만든 침략주의 단체.
이들은 대개 메이지[明治] 연간에 구(舊)무사계급의 집안에서 태어난 청년들로, 조선의 개항 이래 조선으로 진출했다. 그들은 문화적·민족적 유사성 내지 동질성을 가지고 동문동조론(同文同祖論)을 주장하고 지정학적 접근성을 가지고 순치보거론(脣齒輔車論)을 내세우면서 한일연합을 주장했다. 이들은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천우협을 조직해서 조선의 농민군에게 접근하여 그들을 이용하여 친청반일적인 민씨정권을 타도하고 동학중심의 친일정권을 수립하여 조선을 식민지화하려고 획책했으나, 농민측의 냉대와 청일간의 개전으로 그들의 계획은 실패했다. 그러나 그때의 체험을 기반으로 해서 조선사정 전문가로 성장하여 정치적 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다. 그후 그들 중 일부는 민비학살사건에 관여했으며 조선에 계속 거주하면서 낭인 생활을 하기도 하고, 만주·시베리아 방면에서 정탐활동을 하기도 했다. 특히 삼국간섭과 친러적 정권의 수립으로 인해 조선합병이 좌절되었다고 생각한 그들은 가상적국으로 러시아를 상정했다. 이에 러시아와 전쟁하기 위해 조선·만주·시베리아에서 활동하고 있던 낭인들을 규합하여 1901년 흑룡회(黑龍會)를 조직했다.
* 주석 : 조선잡기 - 서병학과 혼마 규스케는 1893년 4월 황해도 서흥의 객사에서 만났다. 두 사람은 하룻밤을 보내며 필담으로 역사 등 많은 대화를 나누었는데 서병학은 헤어지면서 “경상도 상주 남면 거주 서병학”이라고 써주어 자신을 밝혔다. 혼마 규스케는 이 사실을 『조선잡기』에 기록하면서 그를 “강개의 거사”라고 표현했다.
금산군[金山郡=금릉군] 편사언(片士彦)의 집으로
이거한 해월(海月)을 서병학(徐丙鶴) 등이 찾아와 (1893년 7월)
대신사(大神師)의 신원(伸寃)과
탐관오리(貪官汚吏)의 횡포를 제거키 위해
정부(政府)를 공격하여
국가를 혁신할 것을 진언(進言)하였으나
아직은 때가 아니니 기다리라고 했네
손병희(孫秉熙). 조재벽(趙在壁)의 주선으로
청산군(靑山郡) 문암리(文岩里) 김성원(金聖元)의 집으로
이거한 해월(海月)은 강원도 인제 최영서(崔永瑞)의 집에서
대신사 탄신향례(大神師誕辰享禮)를 지냈네 (1893년 10월 28일)
각군관리(各郡官吏)의 탐학이 더욱 심해지자
동학교도 수천 명이 이천군에 모여 거사하다
관병(官兵)의 출동으로 저지되었네 (1893년 11월 )
접주 신택우(申澤雨), 이상옥(李祥玉)
홍재길(洪在吉) 등이 체포되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