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 마산항쟁
자주시보 / 한 찬 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올해는 (4월혁명의 도화선이 된) 3.15 마산항쟁 64주년이다. ... 자유당은 1960년 3월 15일, 제4대 대통령·제5대 부통령 선거에서 무조건 이기기 위해 온갖 범죄행위를 저질렀다. 대통령이, 장관이, 공무원이 직접 선거에 나서서 관권 불법 부정선거 그리고 공갈 협박 등 기상천외한 방법을 동원했다. 물론 관권 불법부정선거의 원흉은 이승만 대통령이다.
- 이승만의 탐욕(貪慾)과 여촌야도(與村野都)의 수수께끼
1960년, 이승만은 85세의 고령이었다. ... 64년 전 당시로 생각하면, 85세인 이승만이 대통령에 출마한다는 것은 노인의 권력 탐욕으로 보기에는 너무도 황당무계(荒唐無稽)했다. 조선 이씨 왕조의 부활이자 이승만 자신을 우상화(偶像化)하려는 행위로 민중은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과 해방공간 그리고 6.25전쟁을 겪은 민중은 숨을 죽였다. 너무나 큰 홍역을 앓았기 때문이다.
“한국의 농민들이 미군정으로부터 한국전쟁이 끝나는 분단국가의 형성 과정에서 격렬한 정치투쟁을 겪으며 가지게 된 정치적 패배의 상처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그래서 한국의 농민들은 ‘우리가 나선다고 뭐가 되는 일이 있나’라는 식으로 자신들의 정치적 효능(efficacy)에 회의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
-(김태일, 「농촌사회의 구조변화와 농민정치」, 『한국현대정치론 1』, 한배호 편, 오름, 2000.)
농민은 그동안 치른 홍역 속에서, 국가의 정책결정 과정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는 차단당하고, 조직화는 아예 엄두를 못 냈다. 농민은 정치에서 아예 배제당했다. 농민 자신이 피해 대중임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당한 처절한 탄압과 희생으로 인해 ‘더 이상의 피해나 당하지 말자’는, 정치 불신과 무관심이 농촌을 지배했다. 이것이 당시 선거에서 나타난 농촌 여당 승리, 도시 야당 승리라는 '여촌야도(與村野都) 현상'의 수수께끼였다.
함석헌은 『사상계』 58년 4월호에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 6.25 싸움이 주는 역사적 교훈」이라는 글을 썼다.
“우리가 일본에서는 해방이 됐다 할 수 있으나 참 해방은 조금도 된 것 없다. 도리어 전보다 참혹한 것은 전에 상전이 하나였던 대신 지금은 둘 셋이다. 남한은 북한을 쏘련 중공의 꼭두각시라 하고 북한은 남한을 미국의 꼭두각시라 하니 있는 것은 꼭두각시뿐이지 나라가 아니다. 우리는 나라가 없는 백성이다. (중략) 민중의 시대에 민중이 살았어야 할 터인데 민중이 죽었으니 남의 꼭두각시밖에 될 것 없지 않은가. (중략) 선거를 한다면 노골적으로 내놓고 사고팔고 억지로 하고 내세우는 것은 북진통일의 구호뿐이요. 내 비위에 거슬리면 빨갱이니, 통일하는 것은 칼밖에 모르냐?”
- 기상천외한 3.15 부정선거
이승만은 직접 1959년 3월 ‘최후에 써먹을 총알’이라는 43세의 최인규를, 선거 진두지휘하는 내무부장관에 지명한다. ... 최인규는 지방자치단체장을 불러 놓고 “어떠한 비합법적인 비상수단을 사용하여서라도 이승만 박사와 이기붕 선생이 꼭 당선되도록 하라. 세계 역사상 대통령 선거에 소송이 제기된 일이 있느냐? 법은 나중이니 우선 당선시켜 놓고 보아야 한다. 콩밥을 먹어도 내가 먹고 징역을 가도 내가 간다”라고 공무원 부정선거 개입을 직접 지시했다.
이것이 바로 1960년 3월 15일 대통령·부통령 선거에 대하는 자유당의 선거운동이었다. 선거운동으로 4할 사전 투표, 3인조·5인조 공개 투표, 유권자명부 조작, 완장부대를 동원한 위협, 야당 참관인 축출, 투표함 바꿔치기, 개표수 조작 등 온갖 기상천외한 선거 불법부정 방법이 동원되었다. 또한 농촌에서는 막걸리 고무신 선심선거가 판을 쳤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야당선거 판세는 너무도 암울했다. 조봉암은 사형을 당했고,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도 신병 치료차 미국으로 출국했다가 운명했다(1960년 2월 15일). 이런 호조건(?)에서 당선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상상을 초월한 불법 부정선거로 몰락의 길을 간 것은, 이승만의 고집과 추종자들의 권력욕 때문이었다. 물론 뒤에는 세계의 냉전반공 교두보로 이승만을 이용하려는 미국이 있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이 참담한 불의를 두 눈 뜨고 볼 수 없었다. 마침내 끓어오르는 분노가 대구에서 폭발했다. 독재권력은 야당인 민주당의 강연회가 있을 예정인 대구에서 시내 고등학생들을 일요일에도 불구하고 강제 등교시켰다. 학생들의 강연회 참여를 원천 봉쇄하고자 한 야비한 술책에 학생들은 격분했다.
- 3.15 마산항쟁의 방아쇠, 2.28 대구 학생의거
1960년 2월 28일, 일요일 “학원을 정치도구화 하지 말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경북고 학생들이 먼저 시위에 나섰다. 불어난 시위대는 민주당의 강연회장에 가지 않고 시내 중심가로 진출했다. 학생들은 민주당에 대한 지지보다 이승만 독재권력에 저항한 것이다.이것이 바로 2.28 대구 학생의거이다.
그들은 일제 지배하에 신음하던 식민지 조국에서 태어났다. 1945년 일제 패망 후의 해방공간에서는, 일제 식민지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사람만 바뀐 미 제국주의에 의한 제2의 신식민지임을 알았다. 1948년 이승만과 반민족 세력에 의해 친일 청산을 하지 못하고, 남쪽만 단독 정부가 수립되는 것을 목격하였다. 6.25전쟁을 전후하여 백만 민간인 학살을 보고 형언할 수 없는 고통과 분노를 느끼며, 우리 앞 세대가 무엇을 위하여 어떻게 싸우고 어떻게 죽어 가는가를 보며 소년·소녀시기를 보낸 학생들이었다.
사실 정부 수립 이후 최초의 반정부 데모였다. 1990년대까지 이어진 학생운동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최초의 유혈 사태는 3월 15일 마산에서 발생했다. 선거 무효와 부정선거를 폭로하며 시위를 벌이던 민중에게 경찰이 발포했다. 이날 8명이 희생됐고, 80여 명이 다쳤으며, 200여 명이 연행되었다.
그런데 4월 11일 아침, 3월 15일 시위 때 눈에 최루탄을 맞고 사망한 김주열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서 참혹한 모습으로 떠올라 2차 “마산항쟁”이 시작된다. 마산 민중 2만여 명은 “이승만 정권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마산 경찰서와 시청에 진입하고 파출소를 습격했다. 이날 밤 경찰 발포로 2명이 또 희생된다.
다급해진 이승만은 “이 난동에는 뒤에 공산당이 있다는 혐의도 있어서 지금 조사 중”이라는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이어 15일에도 공산당 선전에 속아서 “마산 폭동”이 일어났다는 특별담화를 또 낸다.
민중봉기가 전국적으로 확산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이승만이 직접 나서, “마산항쟁”을 빨갱이가 조종한 것으로 몰고 간다. 한술 더 떠 부통령 후보였던 이기붕은 “총은 쏘라고 준 것이지 가지고 놀라고 준 것은 아니다”라는 망언을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3.15 마산항쟁으로 곪을 대로 곪은 자유당 정권의 환부가 드디어 폭발하고,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다. 단독 정부 수립으로 조국을 분단시킨 원흉인 이승만은, 마침내 1960년 4.19혁명으로 민중으로부터 단죄받아 쫓겨난다.
- 이승만의 죄과(罪過)
이승만이 일제 강점하에서 했다는 독립운동은 독단적 행동으로 항일운동 세력의 분열만 일으켰다. 그는 분열주의자였다. 또한 해방공간에서 이승만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해산시키고, 친일파들을 대거 등용한 친일파의 아버지이었다.
특히 이승만의 미국에 대한 충성심은 1948년 9월 1일 한국에 대한 미국의 착취를 제도화해 주는 ‘한미 재정 및 재산 이양에 관한 협정’ 체결을 위한 발언에서 잘 드러나 있듯이, 이승만은 사대 숭미(崇米)주의자였다.
“미국 측 제안대로 전부 동의하라. 미국의 힘으로 정부가 세워졌고 앞으로도 미국의 힘에 의하여 유지될 우리 정부가 미국 사람들의 비위를 거슬러 가면서 그들의 그만한 요구를 거부할 수 있겠는가.” -(한동혁 엮음, 「안재홍 유고집」, 『지배와 항거』, 힘, 1988.)
그뿐만 아니라 이승만은 단독 정부 수립 이후 서북청년회 등 정치 깡패를 이용한 정적 탄압, 제주 4.3사건, 보도연맹 학살과 같은 민간인 학살 사건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민중을 죽인 학살 책임자였다.
이승만은 1949년 제헌국회 내의 일부 소장파 국회의원들이 외국군 철수와 평화통일을 주장한다고 남조선노동당의 국회 내 프락치로 몰아 대거 구속하고, 무엇보다 민족통일 세력에 대한 영원한 전쟁을 선포한 국가보안법을 제정한 반인권·반민주 범죄자였다.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주장하여 6.25전쟁을 유발하게 하였으며, 전쟁 전후 군경을 동원해 민간인 백만여 명을 학살한 범죄 집단 우두머리였다. 특히 한강 인도교 폭파, 국민방위군 사건, 거창양민학살사건, 부산정치파동 등 전쟁 중에도 책임회피만 한 보신주의자였다.
이후에도 민주주의와 인권을 짓밟은 이승만의 독재 범죄 행위는 사사오입 개헌, 진보당 사건과 당수 조봉암 사법 살인, 3.15부정선거, 4.19혁명 당시 115명의 사망과 수천 명의 부상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하략)
원글; 한 찬 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3.15 마산항쟁과 윤석열의 민생토론회> 중에서
출처; http://www.jajusibo.com/645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