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고구려(高句麗) 또는 고려(高麗)는 삼국시대 한국의 고대왕조 중 북쪽에 있었던 군주제 국가다.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를 중심으로 전성기에는 한반도 중·남부에 이르기까지 광활한 영토를 지배했던 나라로서 삼국 가운데 가장 큰 영토를 점유했다. 만주를 지배했던 고대 국가라는 점에서 고구려를 계승한 한국의 또 다른 왕조인 발해와도 비교되는 경우가 많다. 신라(991년) 다음으로 긴 기간(704년) 존속한 장수 왕조다.
2. 상징
2.1. 국호
2.1.1. 명칭
한국어
고구려(高句麗, Koguryŏ, Goguryeo) / 고려(高麗, Koryŏ, Goryeo)
광개토대왕 또는 장수왕 때부터 '고려'라고 고정하여 불렀지만 현대 한국에서는 왕건의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 여전히 '고구려'라고 부른다.
중국어
가오거우리(高句丽, Gāogōulí) / 가오리(高丽, Gāolí) 현대 관화 기준이다.
'가오리'가 일반적이며, 굳이 '高句丽'라고 쓸 때는 '句'의 독음이 일반적인 '쥐(jú)'가 아니라 '거우(gōu)'가 된다. 이 독음법은 오로지 고구려라는 단어에만 존재하기 때문에 중국인들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고 컴퓨터 입력기에도 반영되어 있지 않다. 일부 유사역사학자들이 고구려를 '가우리'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 근거는 결국 중국어 독음인 것. 그러나 이 독음 역시 결국은 현대 중국어의 독음일 뿐이며, 옛 중국어의 한자 발음은 현대 중국어보다는 오히려 한국식 발음과 상대적으로 더 가깝다.
고구려의 경우 한나라에서 사용한 상고한어로는 "kˤaw kˤo rˤe", 당나라에서 사용한 중고한어로는 "kɑu kəu liᴇ"로 발음했다. 고려의 경우 상고한어로는 "kˤaw rˤe", 중고한어로는 "kɑu liᴇ"로 발음했다.
일본어
코쿠리(高こう句く麗り, Kōkuri) / 코라이(高こう麗らい, Kōrai) / 코마(高こ麗ま, Koma)
때때로 '高麗', '狛(박)', '駒(구)' 등으로 써 놓고 '코마(こま)'라고 읽는 경우도 있다.
고대 티베트어
케우리(Ke'u-li)
고대 튀르크어
뵈퀼리(𐰋𐰇𐰚𐰠𐰃, Böküli)
고대 튀르크어는 어두에 /m/ 등의 비음이 오는 경우가 드물어 다른 음가로 변화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아래의 산스크리트어 명칭과 비교하면 원래 형태는 뫼퀼리(Möküli)였을 것이다.
중세 그리스어
무크리(Moúkri)
산스크리트어
무쿠리(Mukuri) / 쿠쿠테스바라(Kukutesvara)
'고구려'라는 이름은 중국 후한의 역사가 반고(32~92)가 지은 《한서》 〈지리지〉에 최초로 등장하며, 한사군 중 현도군에 속한 현인 '고구려현'(高句驪縣)이라는 지명으로 나온다. 이는 한나라의 지명 조어법과는 상이하므로, '고구려'는 일대의 토착민들이 본래 자신들의 마을 또는 지역을 부르던 고유어 지명으로 추정된다. 현도군 고구려현은 본래 오녀산성과 국내성이 있는 압록강 지안시 일대에 있었으나 기원전 75년에 토착민의 강력한 저항으로 흥경(신빈만주족자치구 일대)으로 이전하였으며, 1세기에 다시 무순(푸순현 일대)으로 후퇴하였다. 이 과정은 나라로서의 고구려가 성립하는 과정이기도 했는데, 부여계 유민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졸본에 도읍을 세웠으며 이들도 '고구려'라는 지명사를 국호로 사용하게 되었다. 현도군의 '고구려현' 쪽도 계속 이름은 남아 있다가 서기 14년 고구려 유리명왕에게 흡수당했다. 그래서 《삼국사기》에는 고구려가 고구려를 공격하여 복속하는 대목이 나온다.
三十三年 秋八月 王命烏伊 摩離 領兵二萬 西伐梁貊 滅其國 進兵襲取漢高句麗縣
오이(鳥伊)와 마리(摩離)에게 명하여 병사 20,000명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양맥(梁貊)을 정벌하여 그 나라를 멸망시켰다. 계속 진군하여 한의 고구려현을 습격하여 빼앗도록 하였다.
《삼국사기》 권13 〈고구려 본기〉 1 유리왕(琉璃王) 33년 가을 8월
건국 초기에는 국명이 여러 가지로 나타나서 고구려(高駒驪), 구려(句麗), 구려(駒驪), 고리(高離) 등으로 기록되었는데 주로 고구려(高句麗)의 빈도가 가장 높았다. 당연하겠지만 이는 고유어 이름을 한자를 빌려 나타내는 과정에서 여러 표기가 나타났다가 점차 '고구려'로 통일된 것이다. 고구려의 기원과 관련되어 졸본부여나 '맥'(貊)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후 4세기부터는 '고려'(高麗)로 불리기 시작하여, 5세기에 이르러서는 '고구려'라는 이름은 거의 등장하지 않고 '고려'로만 불리게 되었다.
현재 사학계의 정설은 장수왕 때 고구려가 고려(高麗)로 고정되어 멸망할 때까지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실은 한국사 교과서에도 실리지 않아 한국의 비전문가들 사이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듣보잡인 경우가 많다. 장수왕 때 고려로 국호를 바꿨다는 증거들은 여럿 있다. 가령 5세기 장수왕 대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충주 고구려비에는 고려라는 두 글자가 떡하니 박혀 있고, 장수왕 시기부터 중국 측 문헌에 '고려'라고만 표기되기 시작된다. 전성기를 맞이한 장수왕 재위기에는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는 등 국가의 분위기를 일신하는 여러 정책들이 추진됐는데, 국호 역시 그 일환으로 변경된 것으로 추정된다.
왜 바꾸었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아무래도 고구려(高句麗)의 고(高)와 구(句)의 발음이 비슷해서 빨리 발음하면 고려(高麗)나 구려(句麗)로 줄어들게 되는데 구려보다는 고려가 한자의 의미를 봤을 때, 물론 어원은 한자의 의미와 무관한 고유어에서 유래했겠지만 더 그럴 듯해 보여서 고려로 변경했을 수도 있다. 처음 나타나는 《한서》 〈지리지〉에서는 현도군의 속현으로 고구려현과 함께 상은태(上殷台)현과 서개마(西蓋馬)현이 소개되는데, 이 둘은 전부 방위어인 상(上)과 서(西)로 시작하므로 고구려 역시 본래 방위어 고(高)와 토착 지명 구려(句麗)의 합성어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본다면 국호가 '고려'로 변경된 것은 의도하진 않았지만 국명의 본래 형태와 유사하게 돌아온 셈으로 볼 수 있다.
이 '구려(句麗)'의 정확한 어원은 불명이나, 가장 유력한 설은 《삼국지》 〈동이전〉에 소개된 성(城)을 뜻하는 고구려의 고유어 '구루(溝漊)' 및 《삼국사기》 〈지리지〉에 기록된 고구려 지명에서 역시 성의 의미로 자주 사용된 '홀(忽)'과 연관짓는 것이다.
하지만 이후 동명성왕이 세운 나라를 보장왕 때까지 통째로 고구려, 대조영이 세운 나라를 발해, 궁예가 세운 나라를 후고구려, 그리고 왕건이 세운 나라인 고려를 그냥 고려라고 부르는 관례가 생긴다. 이는 우리가 '고려시대'라고 부르는 그 시대 중에 성립된 관습이라고 볼 수 있다. 언급한 네 국가 모두 궁예가 기분 내킬 때마다 바꾼 태봉을 제외하면 다 고려가 정식 국호였다.
장수왕 이래로 고구려를 고려라고 불러왔던 탓에, 5대 10국 시대와 북송을 거친 이후부터 전근대까지의 중국과 일본에서는 왕건이 세운 고려도 고구려가 거의 그대로 이어지되 왕조만 바뀐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았다. 송나라 사신이 쓴 《고려도경》에서도 중세의 고려를 고씨 고려가 망하고 왕씨가 일어나 세운 고려라 표현했으며, 중국 역사학자들이 종종 이렇게 부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오늘날 한국에서 쓰듯이 고구려, 발해, 고려 등으로 부른다.
현대에 로마자로 표기할 때는 북한식 표기법을 따른 Koguryŏ와 남한식 표기법을 따른 Goguryeo 두 가지가 쓰인다. 남한 매체가 세계적으로 영향력은 높지만 고구려 자체가 현 북한 지역에서 기반한 왕조였다보니 두 표기법의 저명성은 엇비슷한 편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신청서에서는 북한과 중국의 세계유산으로 등재했으므로 Koguryŏ로 표기했다.
왕씨 고려 때는 구고려(句高麗), 구려(駒驪)라는 명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또한 자국을 고구려의 고려에 맞춰 후고려(後高麗)라고 칭하기도 했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는 아예 고구려와 고려를 동일시하여 고구려를 우리 고려[我高麗]라고 부르는 축문도 등장한다.
궁예가 처음 세운 나라 이름이 '후고구려'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그냥 '고려'였다가 나중에 마진, 태봉으로 바꾼 것이었다. 왕건이 세운 고려는 궁예의 태봉을 멸망시키고 세웠으며 고구려를 계승했다는걸 표방하기 위해 국호를 고려로 정한 것이다. 일본에서 발견된 외교문서에서는 고구려의 뒤를 이은 발해도 고려라는 이름을 사용했음이 나타난다. 사실 발해라는 국호는 당과의 협상에서 어쩔 수 없이 합의된 대외용 국호였고, 어디까지나 공식 국호는 고려였으나 워낙 발해라는 국호 사용 빈도가 평소에도 높다보니 발해인들 스스로도, 적어도 요나라 시대 후기, 금나라 때부터는 본인들이 발해인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하게 된다. 장수왕 대의 국호 변경을 대체로 제대로 반영한 사극으로는 태조 왕건이 있다. 고증 등에서 문제 제기가 여럿 있는 사극이긴 하지만, 극중에서 고구려가 장수왕 때 고려로 바꾼 것은 제대로 반영해서 해설했으며, 궁예가 처음 세운 나라의 이름 역시 후고구려가 아닌 고려로 불렀다. 그런데 극중에서 옛 고구려를 언급할 때는 고구려라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옛 고구려도 나중 이름을 써서 고려라고 불렀을 가능성이 높지만 시청자들이 헷갈려 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그냥 고구려라 한 듯.
같은 이환경 작가가 대본을 쓴 연개소문에서는 고구려로만 표현했다. 태조 왕건과 달리 연개소문은 아예 작중 내내 고구려를 언급해야 하는데 극중에서 계속 고려라고 부르면 시청자들이 혼란을 느낄 게 뻔하니….
이외에도 고구려 유민 고모의 묘지명(高牟墓誌銘)에 따르면 별칭으로 동해지동(東海之東, 동해의 동쪽), 한향(韓鄕)이라 부르기도 했고 삼한=삼국으로 여겨지면서 그 중 마한에서 유래했다고 여겨 그냥 마한이라 불리기도 했다. 근데 보통 고구려는 마한과 동치되긴 했지만 이게 좀 어지러워서 진한이나 변한으로 불리기도 했다.
2.1.2. 발음
학계 일각에서는 고구려 당대에 쓰이던 국호를 현대 한국 한자음으로 변환하면 '고구리' 또는 '고리'가 될 가능성이 있음을 주장한다. 호삼성은 《자치통감》을 주해하며 37권의 고구려 관련 기사에서 수말당초 학자 육덕명을 인용하여 "려(驪)는 력(力)과 지(支)의 반절로 발음한다[力支翻]"라고 기록했다. 또 《책부원귀(冊府元龜)》에도 "려는 려(驪)라고도 쓰고 리로 발음한다[亦作驪 音離]"라는 주석이 붙어 있다. 즉 중국 당·송 시대에는 통상 麗를 거성으로 발음하여 '려'로 읽었지만, 고구려의 국호에서 麗를 읽을 때는 통상적인 발음과 달리 평성으로 '리'라고 읽어야 했기 때문에 음가 주석을 붙인 것이다.
이는 시간이 꽤 흐른 뒤에도 마찬가지였는데, 여말선초 사람들이 직접 저술한 일부 문헌에서도 고구려의 麗는 '리'로 발음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를테면 《용비어천가(1445)》 제6장에 '麗運이 衰ᄒᆞ거든(고려의 운이 쇠하거든)'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여기에는 "려(麗)는 리(离)로 발음하고 고려를 말한다[麗音离, 高麗也]"라는 주석이 달려 있다. 한마디로 '고려'로 읽지 말고 '고리'로 읽으라는 소리다. 조선 후기의 성호 이익이나 연암 박지원도 이에 대해 기록을 남겨두었다.
이 연구에 따르면 고구려가 다른 문헌에서 '고리(高離)'로도 나타난다는 것이나, 한국을 제외한 타국에서 부르는 '코리아(Korea)', '코리(Coree)'라는 이름, 돌궐에서 뵈퀼리, 인도에서 무쿠리, 중국에서 가오거우리(가오리), 일본도에서 코우리 등으로 불렀던 것을 참고하여 '본디 발음이 고리였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추정할 수도 있다.
조선 후기의 글인 《대동지지》에서도 "한나라 현도군에 속한 현에 고구리(高句麗 — 麗[려]자는 离[리]로 읽는다)가 있는데..."라는 대목이 있어 '고구리'라는 음가가 옳다는 인식이 지속되었음을 나타낸다. 《증보문헌비고》에서도 '리'로 읽으라고 주석하고 있다. 즉 조선 전기에 麗 자의 발음이 일반적으로는 려로 읽히는 음가가 제시되었으나, 국명으로서는 리라는 음가가 옳다는 인식이 학자들 내에서는 계속된 것이다. 그래서 조선 시대에 간행된 자전을 보면 麗자에 '나라 이름 리'라는 훈음이 계속 병기된다.
그러나 이러한 설과 반대되는 자료도 있는데, 《삼강행실도언해(1481)》, 《번역노걸대(1517)》, 《동국신속삼강행실도(1617)》, 《박통사언해(1677)》, 《오륜행실도(1797)》 등 조선시대에 간행된 다수의 한글 서적에는 고구려와 고려의 발음이 한글로 '고구려', '고려'라고 분명히 적혀 있다. 따라서 조선시대에는 이미 '고구려'를 현재와 같이 발음하였음을 알 수 있다.
容齋以爲高麗之麗字本平聲, 而作側字用之, 誤也.
용재(容齋)가 고려의 '麗'자는 본래 평성인데 측자로 만들어 (한시에) 사용한 것을 두고 잘못이라고 하였다.
湖陰曰, 初以山高水麗爲國號, 此何害? 華人精於聲律, 豈容有誤. 容齋嘿然.
호음(湖陰)이 말하였다. "처음 고려가 산고수려(山高水麗)에서 따와 국호를 삼았으니, 이것이 해가 될 것이 있겠는가. 화인(華人)은 성률에 정통하니, 어찌 잘못이 있겠는가." 이에 용재는 말이 없었다.
대동야승 패관잡기 권4, 용재총화 中 (1525)
이에 따르면 호음 정사룡(1491~1570)은 고려의 발음을 [고려]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산고수려(山高水麗)에서 麗는 곱다는 뜻으로서 거성으로 읽어야 하며, [려]로 발음된다. 물론 산고수려 기원설 자체는 많은 비판을 받은 주장이기는 하지만, 그 진위와는 별개로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민간어원에 이끌려 고려의 麗가 [려]로 발음되었던 것이다. 이는 다음 기록들에서도 확인된다.
心溪甞謂惠風曰, 高麗之麗, 中原人雖以離讀, 本國則以厲讀, 則爲詩不從平聲, 未爲不可. 余亦以心溪言爲是.
심계(心溪)가 일찍이 (우리나라의) 풍속을 사랑하여 말하기를, "고려(高麗)의 麗 자를 중국 사람들은 비록 리(離)라는 음으로 읽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려(厲)라는 음으로 읽으니, 시를 짓는 데 있어서는 평성을 따르지 않아도 안 될 것이 없다." 라고 하였다. 나도 심계의 말을 옳게 여긴다.
《청장관전서》 제33, 청비록 2 려(麗) 中 (1795)
內史侍郞徐熙語契丹蕭遜寧曰, 我國卽高句麗之舊地故號高麗. 按麗音離, 而東史寶鑑作麗音呂, 是未詳何義也. 今華人猶呼音離, 而韻學等書皆從之, 東人變呼音呂.
내사시랑 서희가 거란의 소손녕에게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곧 고구려의 옛 땅에서 일어났기에 고려라 이름하였다." 라고 하였다. 살피건대 麗의 음은 리(離)이다. 그러나 동사보감은 麗의 음을 려(呂)라 했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 오늘날 중국인은 리(離)라고 부르고 음운학 책은 모두 그것을 따르지만, 우리나라 사람은 려(呂)라 바꾸어 부르고 있다.
《대동지지》 방여총지(方輿總志) 권4 中 (1861~1866)
따라서 고구려 당대에는 국호를 현대 한국 한자음의 '고구리'에 대응되는 형태로 발음했을 가능성이 높으나, 이후 조선시대에는 '고구려'로 국호 발음이 변화하여 현재까지 이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일각의 내용을 근거로 '고구리'만이 정당한 발음이라 단정짓고, 나아가 현대에 통용되는 표기까지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부적절한 담론이다. 애시당초 고구려 당시의 한자음 대다수가 현대의 것과 완전히 같지 않아 본래 음가를 현대 국, 한문으로 정확하게 전사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고구려'와 '고려'라는 발음 역시 상술한 바와 같이 상당한 역사성이 있기 때문이다.
현대에 '고구리', '고리' 등으로 표기를 정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세력 가운데에는 환단고기 추종자(환빠)로 대표되는 유사역사학자들이 섞여 있는데, 이들이 오늘날에 와서 교과서 등지의 표기 정정을 주장하고 예찬하는 이유는 역사 용어를 주류 사학계에서 쓰이던 명칭에서 분리함으로써 고구려사 전체를 자신들의 이론대로 재인식하게끔 하려는 저의가 깔려 있다. 동시에 '고구려', '고려' 등을 '외세의 영향을 받은 근본없는 독음' 취급하려는 국수주의 사관의 영향도 들어 있다. 환빠의 경우 역사학계의 연구부정행위와 밀접하게 닿아 있어, 단순한 사료 외 주석이나 해설에서도 이러한 명칭을 의도적으로 유지하는 서적이 있다면 저자와 인용출처 등 확인에 주의가 필요하다.
2.2. 군기
고구려 군기
彼師雖多, 皆備數疑兵而已. 其驍勇唯赤旗. 若先破之, 其餘不攻自潰.
고구려 군대가 비록 수는 많으나 모두 수를 채운 가짜 병사입니다. 그 중 날쌔고 용감한 병사는 오직 붉은 깃발의 군대뿐이니, 만일 그들을 먼저 쳐부수면 그 나머지는 치지 않아도 저절로 무너질 것입니다.
삼국사기 권제24 백제본기 제2 근구수왕 원년 11월 첫번째기사
고구려군은 스스로를 상징하는 깃발로 붉은 기를 사용하였다. 초기에는 고구려의 계루부 내지 중앙군만 붉은 기를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시기가 뒤로 움직이며 고구려군의 깃발은 붉은 깃발로 통일되어 갔다.
5세기 말 쌍영총 연도동벽화 거마행렬도 출처, 한국콘텐츠진흥원 문화콘텐츠닷컴 '고선지 실크로드 개척사-기창을 든 개마갑주무사와 석반부철모' 원전 이미지와 복원 이미지 발췌.
안악 3호분 벽화에서도 기수가 붉은 색 깃발을 들고 있으며, 개마무사 부대가 붉은 깃발을 사용했다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에 붉은 색 깃발을 군기(軍旗)로 사용한 것은 명확해 보인다. 다만 근대적인 국기(國旗)의 개념이 없었던 만큼 국가의 상징은 아니었을 것이다.
2.3. 옥새
遂賜姓負鼎氏. 抵利勿林宿, 夜聞金聲. 向明使人尋之, 得金壐·兵物等. 曰, “天賜也.” 拜受之.
동틀 무렵 사람을 시켜 찾아보게 하니, 금새[金壐]와 병장기 등을 얻었다. (왕이) 말하기를, “하늘이 주신 것이다.”라고 하고 절한 다음 받았다.
삼국사기 권제14 고구려본기 제2 대무신왕 4년 12월 첫번째기사
고구려는 금새(金璽)를 하늘에서 받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동양 세계에서 새(璽)라는 단어는 원래 오직 황제의 옥새에만 사용할 수 있었으며 제후는 인(印)을 사용해야 했다. 물론 제후의 의미가 비중화 주변국으로 확장된 뒤로는 그런 거 없고 개나소나 (대중외교 문서를 제외한) 모든 문서에 옥새를 쾅쾅 찍어대긴 했다. 심지어 류큐(...)조차 금인은 구석에 처박아두고 옥새를 마구 휘둘러 썼으니 별 의미 없는 규정.
그런데 고구려의 금새가 여타 제후국의 옥새와 차별화되어 중요한 것은, 고구려는 중원왕조에게 도장을 하사받았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다른 제후국들은 중국에 보내는 문서에만 중국이 준 도장을 찍고 자기들의 문서엔 자기들의 옥새를 찍었다면, 고구려는 중국에 보내는 문서에도 자신들의 금새를 찍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후의 고구려와 중국 왕조들의 관계를 본다면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고구려의 금새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생겼는지는 아직 알려져 있지 않아서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다.
3. 국력
72년(484) 겨울 10월에 사신을 위(魏)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그때 위나라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강하다고 생각하여, 여러 나라 사신의 숙소를 두는데, 제(齊)나라 사신을 첫 번째로, 우리 사신을 그 다음으로 두었다.
《삼국사기》 18권 〈고구려 본기〉 장수왕
영명 7년 에 평남참군 안유명과 용종복사 유사효가 위나라에 사신으로 갔더니 원회에서 고려(고구려) 사신과 나란히 앉게 하였다. 이에 안유명이 위나라 주객랑 배숙명에게 말하였다.
'우리는 중국 임금의 명을 받고 그대 나라에 왔소. 천하에 우리나라와 겨룰 수 있는 나라는 오직 위나라(북위)뿐이거늘…(중략)… 하물며 동이의 조그만 맥국(고구려)은 우리의 신하인데 어찌 감히 우리랑 나란히 선단 말이오'
유사효 역시 위나라 남부상서 이사충에게 '우리는 위나라에 이런 적이 없었소.'라고 하자 사충이 답하였다.
'정사와 부사 모두 전 위에 오르지 못했을 뿐이지 이 자리도 충분히 높은 자리이니 이 정도도 족히 갚음이 될 것이오'
《남제서(南齊書)》 〈동남이열전〉 고구려.
정시 연간에 세종이 동쪽 당사에서 고구려의 사신 예실불을 인견하니, 실불이 말하였다.
'고려는 하늘과 같은 정성으로…(중략)… 황금은 부여에서 나고, 가는 섭라에서 생산됩니다. 이제 부여는 물길에게 쫓겨났고 섭라는 백제에게 합병되었는데…(중략)…지금 두 가지 물건을 올리지 못하는 것은 사실 두 도적들 때문입니다.'
하자, 세종이 말하였다.
“고려가 대대로 상장(上將)의 직함을 가지고 해외를 마음대로 제어하여 교활한 오랑캐인 9이(九夷)를 모두 정벌하여 왔소, 술병이 비는 것은 술동이의 부끄러움이라고 하니 그것이 누구의 허물이겠소? …(중략)…위압과 회유의 방략을 다하여 못된 무리들을 멸망시키고 동방의 백성들을 편안케 하여, 두 읍을 옛 터로 돌아가게 하고 그 지방의 토산물을 항상 바치는 공물에서 빠짐이 없게 하오.”
《위서》 〈열전〉 고구려
15만 군대가 내달리고 깃발이 30리에 뻗쳤다.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닿은 것이 누런 뱀이 흙먼지를 토하듯 하였고 기병들이 들판을 뒤덮은 것이 마치 붉은 개미떼와 같았다(有徒十五萬, 連旗三十里. 烟火稽天, 若黄虵之吐霧. 彀騎横野, 邁赤蟻之爲羣)
《전당문》
초기의 고구려는 작은 나라였다. 졸본의 성읍 국가였으며, 4세기까지만 해도 한반도 북부와 남만주 일대의 유력 세력에 불과했다. 하지만 미천왕, 소수림왕, 광개토대왕, 장수왕 등 연이은 명군들의 치세를 거치면서 한강 유역을 포함한 한반도 중·북부과 요동, 만주를 아우르는 강력한 대국으로 성장했다.
전성기의 고구려는 백제를 정벌하여 멸망에 준하는 피해를 입히는 한편 백제, 가야, 왜 연합군으로부터 신라를 구원하여 신라를 사실상 속국으로 삼았다. 북으로는 동만주, 연해주 일대의 말갈 세력 대부분과 요서, 내몽골 일대의 거란 세력 일부를 복속시켜 고구려의 세력권에 편입시켰다. 요동을 차지한 후에는 중국 왕조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할 정도의 힘을 가지게 된다.
이 시기 고구려는 아시아 전역을 범위로 잡아도 그 존재감이 뚜렷할 만큼 위상이 높았고 강대국으로 군림하였다. 명실상부 자타가 공인하는 한반도와 요동, 만주 지방의 지역 패권국이었다. 그러나 동아시아 최강국이었던 중국 통일 왕조들의 침략을 70여 년 가량 막아내면서 국력은 지속적으로 소모되었고, 진흥왕 이후 급성장해 백제를 밀어내고 고구려와 한반도 패권을 두고 경쟁하게 될 신라와의 외교에 실패함과 동시에 군사 면에서도 신라 방면으로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특히 660년의 백제 멸망과 663년 백제부흥운동의 좌절로 인해 양면전선의 불리함이 가중되었으며, 여기에 연개소문 사후 그 아들들의 분열이 겹치면서 정치적 소요 사태가 크게 발생했으며 결국 당나라, 신라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다.
생산력
건국 직후 고구려는 인구 3~6만호 남짓한 현도군의 변방, 압록강 상류의 험준한 산지에서 인구를 부양하며 국력을 어렵사리 키워나가는 판국이었다. 그러다가 초기에는 간도를 차지하고 송화강과 요하 일대에 있는 동북 평원과 평안도, 황해도 등의 비옥한 땅을 석권하면서 전성기에 접어들고 높은 생산력을 갖추게 되었고 멸망 당시에는 대전을 치르고도 70만호를 남기는 여력이 구당서와 신당서에 기록되어 있다. 동시대 남조 대다수의 국가의 집계 인구가 50~90만호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수준의 체급이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고구려가 얼마나 건실하게 국력을 길러왔고 또 그것을 철저하게 관리해왔는지 알 수 있다.
군사력
고구려 초기에는 20,000~30,000명의 병력에 나라가 휘청였지만 이후에는 이 정도의 병력이 외지에 여유롭게 투사할 수 있는 병력이 되었다. 또한 일거에 수십만 대군을 동원하고 야전에 투입하는 모습을 보일 정도로 체급 면에서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전성기에 접어들면서 대외적으로 백제와 가야를 굴복시키고 신라를 복속했고 중국으로부터도 한반도와 만주 지역의 패권을 인정받았으며 나아가 만주와 내몽골, 연해주 일대에 말갈, 거란, 실위 등을 두고 요긴하게 활용하거나 공존하고 혹은 그들에게 강력한 패권을 행사하여 일부는 멸망 때까지 고구려와 운명을 같이하고 발해 건국의 초석이 되기도 했다. 후대에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청나라를 생각한다면 이들을 통제한 고구려의 저력이 상당했음을 방증한다. 하지만 이중/삼중 전선의 문제 역시 해결되지 않았기에 고구려는 끝내 백제나 신라를 완전 병탄하여 자력에 의한 한반도 통일을 이룩할 수는 없었다.
국제적 위상
초창기 중국의 대 고구려 외교 및 무력 투사는 군현의 태수, 일개 주의 자사 선에서 정리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6세기 이후에는 황제를 위시한 중앙 관료들이 직접 나설 뿐 아니라 세계 최대를 자랑하는 중원의 물자와 인력을 총동원해야 할 정도의 상대가 되었다. 고구려 자신은 유목민족 세력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랜 기간 중국의 북쪽 및 북동쪽 유목민족 전반에 대해 강한 지배력을 행사했으며, 대륙 세력들이 치고받는 중심지에서 살짝 비껴난 입지와 착실히 쌓아온 전적까지 더해져서 상당한 대접을 받았다. 특히 고구려의 국왕은 중국 황실에게 동이교위라는 관작을 받았는데, 이는 중국이 고구려 국왕을 동이 지역의 최고 패권국 수장임을 공인한것이다. 유연, 남조를 쥐어패는데는 망설임이 없던 탁발선비의 북위는 고구려에게 압박이나 도발을 받고도 대결을 피했고 오히려 남조와 동등한 의전으로 달랬으며 백제나 탐라(신라), 말갈, 거란 등에 대한 패권을 인정하기도 했다. 북제와 북주, 유연을 굴복시킨 돌궐 제1제국을 상대로는 고구려가 승리하여 이웃 국가로서 대등하게 병존하였다. 그 돌궐을 무너뜨린 수나라는 이러한 병존적인 질서를 뒤엎고 새로이 판을 짜다가 고구려를 상대로 수백만의 대군을 쏟아넣는 등 국력을 고갈하여 멸망하였다. 당나라 역시 고구려가 실질적으로는 신하국이 아님을 자각하고, 중화사상을 배제한 대우를 논의하기도 하였으며 고구려를 상대하다 나라가 휘청였고, 가까스로 멸망시킨 후에도 이를 건사하지 못하고 국방력의 고갈이 현저해진다. 중국에서도 고구려의 인상은 그 뒤로도 깊게 남아있어서 여몽전쟁 당시 몽골 제국의 쿠빌라이는 고려가 항복하자 당태종도 어찌하지 못한 나라의 항복을 받아냈다며 기뻐했고, 조선 초기에 조준이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으로 시를 써놓자 명나라 사신이 굴욕을 느낀 적이 있으며, 임진왜란 당시 조선이 명나라에 지원 요청을 하니 명나라 조정에서는 고구려의 후예들이 20여 일 만에 수도를 뺏기고 의주까지 도망쳤을 리가 없다며 진상조사단을 파견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이렇듯 당시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의 패권국이었으며 동시에 여러 유목민족을 자기 뜻대로 거느린 국가였다. 고구려는 중국이 여러 난세를 거칠 때도 꿋꿋이 세력을 키웠고 5호 16국 같이 갈기갈기 찢어졌을 때는 후연과 직접 겨루는 등 중국 안쪽으로도 영향력을 끼쳤으며(광개토 대왕) 중국이 남북조 시대로 개편되자 힘의 차이를 인정하고 적당히 밑으로 들어가면서도 자신들의 힘을 과시 했다.(장수왕) 중국 통일 왕조가 들어선 후에는 유목민과 연합하여 직접 선제 공격을 하는 등(영양왕) 동북아시아의 패권국임을 여실히 드러냈다. 종합해보면 중국의 통일왕조와도 1:1 사생결단을 내는게 가능한 유일한 한민족 국가이며 동아시아 전체로 범위를 넓혀봐도 유사 이래 이정도 국력을 지닌 국가는 중원 왕조를 제외하면 열 군데밖에 되지 않는다.
4. 영역과 행정구역
고구려의 영토는 수도와 지방을 각각 5부로 나눴다. 수도 5부의 경우, 고구려의 주요 부족집단이었던 5부(계루부, 연노부, 절노부, 관노부, 순노부)가 고국천왕에 의해 행정구역인 5부로 정리된 것으로, 각각 방위의 이름(동, 서, 남, 북, 중)을 가졌다. 지방 5부의 경우 욕살(褥薩, 지방관)이라고 하는 대표를 두어 다스렸다. 부의 아래에는 대성(大城), 중성(中城), 소성(小城)을 두었는데, 각 성을 다스리는 처려근지(處閭近支, 중국식으로는 '도사')를 두어 넓은 영토를 효율적으로 관리했다. 욕살과 처려근지는 모두 어떤 관직을 뜻하는 순우리말(고대 한국어, 고구려어)을 한자를 빌려 표기한 것으로, 원음은 알 수 없다.
고구려는 4세기 이전까지는 압록강 북부~함경도에 걸쳐 있던 소국이었으나, 미천왕을 시작으로 광개토대왕, 그리고 장수왕과 문자명왕 대에 전성기를 맞이했다. 중국 군현의 터를 몰아내면서 한반도 북부 전역을 지배하고, 서쪽으로는 요동을 차지하고 요하를 건넜으며 남쪽으로는 한강을 포함한 한반도 중부 지방까지 정복했고, 북쪽으로는 송화강 유역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 그 대략적인 기록은 다음과 같다.
十四年 冬十月 侵樂浪郡 虜獲男女二千餘口
재위 14년 10월, 낙랑군을 공격하여 남녀 2,000명을 사로잡았다.
十六年 春二月 攻破玄菟城 殺獲甚衆
재위 16년 2월, 현도성을 함락시켜 많은 사람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삼국사기》 제17권 〈고구려 본기〉 제5(미천왕)
冬十月 攻陷百濟關彌城 其城四面峭絶 海水環繞 太王分軍七道 攻擊二十日 乃拔
(재위 원년) 10월, 백제 관미성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관미성은 사방이 절벽으로 되어 있고 바다로 둘러싸였는데, 태왕이 군대를 일곱 방면으로 나누어 20일만에 빼앗았다.
十一年, 太王遣兵攻宿軍 燕平州刺史慕容歸 棄城走
재위 11년 태왕이 병사로 하여금 숙군을 치게 했다. 연나라의 평주 자사인 모용귀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삼국사기》 제18권 〈고구려 본기〉 제6(광개토대왕)
九月 太王帥兵三萬 侵百濟 陷王所都漢城 殺其王扶餘慶 虜男女八千而歸
(재위 63년) 9월, 태왕이 친히 군사 30,000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해 수도 한성을 함락시켰다. 부여경(개로왕)을 죽이고 남녀 8,000명을 사로잡아 귀환했다.
《삼국사기》 제18권 〈고구려 본기〉 제6(장수왕)
장수왕에서 문자명왕 대에 고구려는 남으로는 평택 아산만에서 경상북도 일부, 북쪽으로는 북부여에 이르는 영토를 손에 넣고 일대의 말갈 및 실위를, 동쪽으로는 책성을 중심 거점으로 말갈을 지배했고 서쪽으로는 요하를 건넜다. 이 밖에 고구려계 왕족인 고운이 북연의 천왕이 되었고, 변경의 말갈, 두막루와 실위를 군사적 영향권 아래 두었다. 백제는 한성이 함락되자 웅진성으로 수도를 옮겼으며, 신라는 왜의 침략에 시달려 광개토대왕의 지원군을 받는 등, 고구려는 동아시아의 강대국으로 거듭났다. 이러한 정세는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고 고구려 원정을 시도하기까지 계속된다. 이와 관련한 고고학적 증거로는 지안의 광개토대왕릉비, 충주의 충주 고구려비, 신라 호우총 등이 있다.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 신라에 이르고, 서북쪽으로 요수를 건너 영주에 이르며, 남쪽으로 바다를 건너서 백제에 이르고, 북쪽으로 말갈에 이른다. 동서 3,100리이며, 남북 2,000리이다."
《구당서》
其地後漢時方二千里. 至魏南北漸狹, 纔千餘里. 至隋漸大, 東西六千里.
후한 때에 사방 2,000여 리였다. 위대에 이래로 남북이 점점 축소되어 겨우 1,000여 리였으며, 수대 이래로 동서 6,000여 리로 확대되었다.
《통전》 제186권 〈변방〉 2
고구려는 전성기 이래로 요하~송화강 선을 국경으로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거란, 말갈, 실위, 지두우 등을 복속시키거나 군사적인 영향권 안에 두고 중원 세력과 요서의 지배권을 다투면서 동몽골, 북만주, 요서 등지의 진출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사료의 부족으로 지리를 상고하기 힘들고, 이탈과 복속이 일정치 않아서 구체적인 비정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이인철 고구려의 부여와 말갈 ...
한국 역사 교과서(이인철)의 고구려 지도
말갈 영역 상당 부분을 고구려 영토에 포함시킨 지도이다.
고구려의 강역은 성곽을 깔아놓고 조밀하게 통치하는 구역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드문드문 거점을 두고 통치하는 구역, 세력들의 복속을 통한 간접지배를 통해 통치되는 구역도 있다. 이에 대한 해석에 따라 상이한 강역 비정이 나오곤 하는데 이 지도는 후기 부여, 말갈이 위치한 연해주와 동북만주 일대에만 신경을 썼지만 흥안령, 동몽골, 요서 등 다른 지역에도 비슷하게 견해 차이로 강역 비정이 달라지곤 한다.
한편, 북한의 경우 당국의 정책에 따라 역사관이 변화하였다. 서울특별시를 아직 명목상의 수도로 정하고 있던 1960년대의 북한은 다른 사회주의 국가가 그렇듯 유물론적 역사관을 채용하여 고대 노예제 국가에 불과한 고구려를 크게 평가하지 않았고, 영토 비정에서도 사료에서 명확히 드러나는 사항외의 추측은 자제하는 것이 관찰된다. 그러나 김일성이 1인 독재 체제를 완전히 굳히고 휴전이 장기화된 70년대 이후 북한에서는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고조선이나 고구려의 존재를 부각시킴으로써 역사적, 민족주의적 정통성을 제고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는데, 한 예로 단군 신화가 미신에 불과하다고 여기던 것에서 단군릉을 피라미드 형태로 개축하고 실존 인물임을 인정한 점 등이 있다. 최근의 역사 교과서에서 북한은 "고구려가 차지한 령역은 서북-내몽골 동부, 북-흑룡강 남쪽 류역, 동북-우쑤리강 류역을 넘어 흑룡강 하류, 남-아산만으로부터 청하계선에 이르게 되였다. 즉 동족의 나라 전 령토의 90%를 차지하였다."고 서술하며, 말갈, 거란, 실위 등 북방 민족을 고구려의 영역으로 통합시켜 매우 방대한 영토를 가진 것으로 해석한다.
안동도호부는 9도독부+42개 주=51개 주로 구성되어 있지만 32개만 확인되는데, 압록강 이북으로 서술을 한정한 영향으로 보인다. 나머지 19개 주는 확실하지 않지만 압록강 이남 한사군의 현을 그대로 계승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발해의 행정구역으로도 족보가 이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5. 멸망과 유민
중원 왕조들과의 피비린내 나는 국가간 총력전부터 시작해서 이남의 신라와 전선을 수십년간 맞대었던 고구려는 멸망 시점인 668년에 인구가 69만 7천여 호(戶)로 급감하게 된다. 그 상태에서 고구려 유민들은 주로 신라, 발해, 당 등으로 뿔뿔히 흩어졌으며 고토에 잔류하거나 당을 탈출해 발해에 합류한 유민들은 훗날 발해 유민의 형태로 고려, 요나라, 금나라 등에 편입되기에 이른다. 더러는 말갈, 돌궐, 왜국 등으로 도피하였지만 수는 위의 세 부류에 비하면 얼마되지 않았다. 이렇듯, 고구려 유민들의 거취는 대규모 망명, 강제 이주, 부흥운동의 여파로 여러 국가에 걸쳐져 있었다. 타향으로 끌려가거나 객지에 머물게 된 고구려 유민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고구려인으로서의 의식이 희석돼 현지 사회에 동화되는 양상이었다. 그렇기에 최종적으로 고구려의 적통을 잇게 된 건 고구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끝까지 보존해 종국에는 고려를 건국한 신라 내의 일파들이다.] 이들은 동족인 발해인들의 합류에 힘입어 백제인, 신라인과 더불어 한민족(韓民族)의 원류(原類)를 구성하는 세 축 가운데 하나가 되었으며 나아가 통일신라가 실패했던 세분화된 종족 정체성의 통합을 이루어내게 된다.
신라 ➪ 고려
첫째로는 신라에 흡수된 일파이다. 신라가 영역화해서 그대로 편입된 인구, 멸망 직전 연정토가 바친 고구려 남부의 12성 700호의 주민 3,543명, 안승을 따라 신라로 남하해 귀부한 4천여 호, 고구려부흥운동 세력의 대다수와 이들하고 연계한 고구려의 반당(反唐) 백성들, 그리고 당나라 영주에서 탈주한 고구려 유민 가운데 발해에 합류하지 않고 패서에 정착한 고구려 유민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렇듯 진흥왕 대부터 고구려 멸망 직후인 검모잠과 안승의 고구려부흥운동 시기까지 신라에 편입된 고구려인들의 규모는 무시못할 정도로 거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가 멸망하기 직전에 신라가 무탈하게 차지해서 편입시킨 한성(漢城) 일대와 패서(浿西) 지역은 고구려의 심장부이자 내지(內地)로 일컬어지는 인구 밀집지였다. 이러한 이상적인 조건 때문에 고구려 멸망 이후 남부의 부흥운동 세력이 한성과 패서 일대를 근거지로 삼았고, 먼 훗날에는 고구려 유민 출신의 패서 호족들이 태동할 수 있었다. 당나라의 직접 통치를 피해 달아난 반당(反唐) 성향의 고구려인들, 고구려 부흥운동의 잔당 세력, 당나라에서 이탈해 신라로 탈출한 무리들까지 합세하면서 임진강 일대와 그 이북은 사실상 고구려 유민들을 주류로 하는 반자치적인 보금자리 혹은 엔클레이브로 남게된다. 한편, 안승과 고연무를 위시로 한 고구려 부흥운동 세력의 한 일파는 구 백제의 수도권 지역인 금마저에 보덕국을 세우면서 존속하다가 신문왕에 의해 서라벌과 남쪽 변방 등으로 철저하게 사민당한 탓에 고구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만다. 상술한 두 부류의 고구려 유민들에 비하면 존재감은 낮지만 영동의 고구려계 유민들도 신라에 편입되면서 존속하다가 훗날 고구려계 호족들이 세운 고려에 합류하였다. 종합해보면, 신라에 흡수된 고구려인들 중 보덕국을 구성했던 이들과 전쟁 포로로서 서라벌로 사민된 이들 외의 대다수는 현재의 임진강과 그 이북인 패서 지역에서 통일신라의 구성원으로 살다가 몇백년 뒤 신라가 흔들릴 때 일어나서 후고구려(태봉)를 세웠다. 그리고 이는 최종적으로 왕건이 세운 고려로 이어지게 된다. 발해가 멸망한 뒤로 고구려의 적통은 사실상 신라에 편입되어 훗날 고려를 건국한 고구려 유민들에 의해서 계승된다. 이러한 계승 의식은 훗날 직계 후손인 한민족에게로 이어져 고구려가 국내외에서 온전히 한국사로 인정받는 중요한 원천이 되었다.
발해 ➪ 거란 ◦ 고려 ◦ 금나라
둘째로는 발해 건국과 함께 발해인이 된 사람들이다. 다만 발해는 고구려 멸망 이후 30년 뒤에 건국되었고, 발해 건국의 주체들은 한때 당나라 내지로 끌려갔던 고구려 유민들이었다. 고구려를 멸망시켰음에도 결과적으로 당은 서쪽 토번의 위협으로 옛 고구려의 땅인 요동을 계속 장악하는 것에 실패했고, 영주에 사민된 고구려 유민들은 말갈족과 함께 탈출, 동쪽으로 이동해 동만주 일대에 발해를 건국한다. 이후 발해가 초기 영역을 중심으로 확장하면서 요동과 동만주 일대에 머물러 있던 옛 고구려 유민들을 흡수하고 주변 말갈족들을 복속하였다. 그러나 발해는 926년 거란의 침공으로 멸망하게 되는데, 이때 발해인들은 보통 세 갈래로 또다시 갈라져서 운명을 달리하게 된다. 자신들을 정복한 새로운 열강인 요나라에 귀속된 부류, 한반도의 후삼국을 통일한 남방의 또다른 고구려계 왕조인 고려에 대규모로 이주한 부류, 발해 고토에 잔류해 요나라의 지배를 받다가 금나라 건국 이후 말갈의 후신인 여진족에 동화된 부류가 그것이다. 요나라나 금나라에 복속된 발해 유민들은 성향에 따라서 정체성을 유지한 쪽과 거란족 혹은 여진족에 협조하면서 동화된 쪽으로 또 나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발해인들의 지속적인 저항이 꾸준히 일어나 내부에 혼란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다만 발해인들이 해당 나라 내에서 전체 인구의 한 축을 담당하고 한인(漢人)들과 더불어 선진 문물의 전수를 통해 요나라의 사회문화적 발전을 주도한 점은 특기할만 한 점이다. 이들의 대다수는 최종적으로 여진족이나 거란족, 그리고 한족 집단으로의 동화를 거치면서 궁극적으로는 융화된다. 한편, 고려에 투화한 발해 유민들은 요나라나 금나라에 복속된 발해인들과는 달리 같은 고구려계로서의 동질감과 고려 태조 대부터 지속적이고 일관된 포용 정책 덕분에 쉽고 빠르게 고려 사회에 적응하였다. 규모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던 발해 유민들의 수에도 불구하고 신라계나 백제계처럼 부흥을 명분으로 한 봉기가 일어나지 않았음을 생각하면 고려 내의 발해인들이 일찍이 주류로 편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툭하면 현지의 거란족이나 여진족과 갈등을 빚었던 요나라, 금나라의 발해인들과의 가장 결정적인 차이점이다. 일각에서는 고려의 후삼국 통일의 원동력으로 발해 유민들을 꼽기도 하는데, 수뇌부의 다수가 전사하고 왕건 본인이 겨우 목숨만 건져서 돌아온 공산 전투의 궤멸적인 피해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태세를 정비할 수 있었음에는 고려에 유입된 압도적인 수의 발해 유민이라는 인적 자원이 있었다는 것이다. 고려에 정착한 발해인들은 주로 북진 정책의 일환으로 다시금 개척된 북방 지역과 패서 지역에 정착했으며 일부는 남쪽 영토에도 대거 자리잡아 훗날 한민족의 원류에 흡수, 현대 한국인들의 조상이 된다.
당나라
셋째로는 당나라 내부로 옮겨진 인구 중 발해에 합류하지 않은 집단으로, 연개소문의 아들들 및 연비 등 그 후손들, 그리고 당나라 군인으로 활동한 고선지나 이정기가 여기에 해당한다. 당나라는 나당전쟁으로 갈라선 신라의 삼국통일을 인정하지 않아 725년 당현종의 태산 봉선의식 때까지도 고구려와 백제의 구 왕족을 '고려조선왕'과 '백제대방왕'으로 형식상 존치시켜 당나라 경사(장안)에 거주시키는 등 내신지번으로 삼아 이용했다. 이들은 당에서 대를 거듭하고 8~9세기를 거치면서 당나라 사회에 동화, 중국인 집단으로 스며들었다. 당 내지로 끌려간 고구려인들의 수가 수인만큼 당시 고구려인들의 존재는 당 내에서 상당한 파급력을 낳았다. 당나라의 내지 각지로 이주된 고구려 유민들은 새로운 땅을 개척하는데 이용되거나 빈 땅을 채워 주민 사회를 형성하는데 기여한 바가 있어 당나라 황실에서조차 높이 평가했을 정도였다. 당장 고선지나 이정기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어떤 이들은 당나라를 위해 헌신하며 당의 팽창과 발전에 기여했고, 반대로 자치적인 항거 세력을 구축해 당 조정에 도전하기도 하였으며, 더러는 걸걸중상이나 대조영처럼 상당수가 당에서 이탈해 발해, 신라, 말갈 등에 투화하였다. 그러나 탈주하지 못하고 당나라 내지에 잔류한 고구려 유민 다수는 타국의 피지배층이 된 이민족으로서의 궁핍한 삶을 살아야만 했다. 당장 당나라 조정에 입신양명한 몇 안되는 고구려 유민 출신의 신하였던 왕모중도 처음에는 노비였다. 궁극적으로 당나라 내지의 고구려 유민들은 신라나 발해에 편입되었던 고구려인들과 달리 고구려인으로서의, 나아가 고구려의 유예(流裔)로서 최소한의 자각조차 없는 채로 한족에 서서히 동화되었다.
잔류 고구려인
넷째로는 요동 및 평양, 평안도 지역에 계속 남은 집단인데 여기는 본래 황해도/평안남도와 함께 고구려의 삼경(三京)을 이루는 핵심 지역 중 하나였지만 수나라-당나라와 고구려 부흥군, 신라군이 얽히고 설킨 오랜 전쟁과 혼란으로, 《신당서》에 의하면 나당전쟁까지 끝난 시점의 요동에는 늙고 빈곤한 자만 남겨두고(弱窶者留安東), 나머지는 당나라 내지로 가능한 이주시킨 것으로 되어 있어 이 지역의 고구려계 유민 사회는 크게 위축되었으며, 특히 수도였던 평양성은 황폐화되었다. 당나라로 강제이주 조치된 요동의 유력 민호들은 당나라의 관할에 들어간 항복한 11개의 성(城)에서 나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요동과 압록강 이북의 안시성, 요동성, 오골성, 신성 등 항복하지 않은 성(城) 11곳은 고구려부흥운동이 실패한 시점에서 신라에 귀부하거나 당나라에 의해 점거당했을 때 말갈 등으로 탈출하기도 하였다. 요동과 평양성의 고구려 유민들은 거주 인구가 없지는 않았지만 훗날 고려가 복원하기 전까지 비중은 다소 떨어진다. 평안도 일대의 고구려인들은 고려 왕조에 의해 수복되어 한국인의 원류에 합류하였지만 발해 멸망 당시 고려에 귀부하지 않았던 요동의 잔류 고구려계들은 이민족 치하를 거치며 만주, 중국인 집단에 동화되었다.
북방 초원
다섯째로는 몽골 고원 방면 북방 유목민 사회인 돌궐 제국으로 유입된 집단으로 고문간, 고공의 등이 이끌던 집단이 이에 해당한다. 고구려의 강토에서 먼 만큼 그 인구 비중이 낮은 것으로 보이겠지만 후일 고문간과 고공의 모두가 돌궐의 혼란을 틈타 당나라에 망명할 때 규모가 모두 합해서 만여장(萬餘帳)에 달했음을 보면 적어도 일본으로 이주한 무리보다는 압도적으로 많은 숫자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는 돌궐 등의 초원 일대에서 생활하다가 당나라 측에 망명한 고구려 유민의 수만 합산한 경우이기 때문에 당나라에 귀부하지 않고 북방 유목민 사회에 잔류한 고구려인들도 상당수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당나라에 망명한 부류와 돌궐 등 북방 유목사회에 잔류한 부류 모두 현지에 동화되어 고구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된다. 몽골 고원 방면으로 이주한 고구려 유민들은 대다수가 고구려의 내지(內地)나 핵심 거점 출신이 아닌 지리적으로 북방과 인접한 북만주 일대 성읍들에서 나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장 압록강 이북에 위치한 고구려의 주요 성읍 32곳 가운데 내미홀성(乃勿忽城)처럼 도망한 성읍이 7곳이나 되었으니 상술했다시피 몽골 등지로 이주한 고구려 유민들은 이들 도망한 성읍들을 출신으로 두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왜국
여섯째는 일본으로 이주해 간 집단으로, 《신찬성씨록》에서 52개의 고구려계 씨족이 확인된다. 대부분은 일본인에 동화됐지만 코마 후미야스처럼 일부는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고마 신사 등이 일본에 귀부한 고구려 유민의 흔적이다. 다만 지리적 여건도 여건이지만 당시의 시대적인 정황상 위아래로 나당 연합군에게 공격당하는 고구려의 상황 때문에 일본으로 이주한 고구려인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멸망을 전후로 적지 않은 수의 백제인과 가야인이 왜국으로 피신했을 때의 규모와 비교하면 새발의 피 수준이다.
6. 관련 사료 목록
고구려 관련 사서
6.1. 한국
삼국사기
삼국유사
제왕운기
동명왕편
해동고승전
삼국사절요
6.2. 중국
후한서
정사 삼국지
진서
위서
양서
북제서
주서
북사
수서
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
책부원귀
당회요
6.3. 일본
일본서기
6.4. 금석문
광개토대왕릉비
지안 고구려비
충주 고구려비
모두루 묘지명
7. 유적
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 화이트 고대 고구려 왕국 수도와 묘지
수산리 벽화분 | 용강대총 | 쌍영총 | 안악 1호분 | 안악 2호분 | 안악 3호분
고구려 고분군
고대 고구려 왕국 수도와 묘지
고구려왕릉
국내성
대성산성
동명왕릉
동황성
부벽루
아차산 일대 보루군
안악 3호분
안학궁
오녀산성
을밀대
장군총
정릉사
천리장성
태왕릉
통구 고분군
평양성
호로고루
환도산성
8. 왕조
고구려 계루부 고씨 왕실의 후손이라는 가문이 존재한다. 한국에는 동명성왕 고주몽을 시조로, 보장왕의 아들인 고인승을 중시조로 하는 횡성 고씨가 있으며, 일본에는 보장왕의 아들인 고약광의 후손 고마씨가 있고, 중국의 경우에는 장수왕을 시조로 하는 요양 고씨가 있다.
9. 고구려의 대(對)중국 전쟁 목록
고구려-신 전쟁
고구려-한 전쟁
고구려-위 전쟁
고구려-수 전쟁
고구려-당 전쟁
10. 고구려부흥운동
고구려는 멸망 직후부터 활발하게 부흥운동이 일어났는데 부흥운동에 투신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검모잠, 고안승, 고연무 등이 있다. 이때의 부흥운동 세력은 신라에 귀순해 보덕국을 세우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실패했지만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은 고구려 유민들에 의하여 30년 뒤에는 발해가, 200년 뒤에는 고려가 건국되며 전체적으로 보면 성공한 부흥운동이 되었다.
11. 기타
해외에서는 통일된 한국(Korea)을 기준으로 하지 않고 남한과 북한 지역의 역사를 분리해서 인식하는 경우도 많은데 이런 이유로 고구려도 북한의 역사로 인지하는 경우가 많다. 평양 등 역사적으로 고구려와 관련이 깊은 도시를 비롯해서 상대적으로 남한보다 북한 지역에 고구려의 흔적이 훨씬 많은 것도 이러한 인식을 낳는 이유다. 실제 북한에서도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등 한반도 북부의 고대 왕조를 계승한 것은 북한이라고 규정하고 교육 및 선전을 한다. 이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할 목적도 내포되어 있다.
한국사 교과 과목 시험에서 고구려는 다음과 같은 사료로 등장하고는 한다. 대가들은 농사를 짓지 않으므로, 좌식자가 10,000여 명이나 되는데, 하호들이 먼 곳에서 양식, 고기, 소금을 운반하여 그들에게 공급한다. 그 나라의 동쪽에 큰 굴이 하나 있는데, 수혈이라 한다. 감옥이 없고 범죄자가 있으면 제가들이 의논하여 사형에 처하고 처자는 노비로 삼는다. 이 사료에서 고구려인 걸 알아차려야하며 고구려가 아닌 부여나 동예 등 오답형으로 종종 출제된다. 처음보는 수험생은 당황할 수도 있다.
1999년 4월 동양 철학을 전공한 교수인 김경일은 유교 문화와 한국 사회를 비판한 책인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을 출간하여 국내에서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는데, 이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에서 김경일 교수는 "고구려가 있던 만주는 러시아 영토인 연해주와 가까우며, 아울러 만주의 중심 도시인 하얼빈에는 러시아 정교회 성당이 세워져 있다. 그런 의미에서 만주에는 백인종인 슬라브인, 즉 러시아인들이 이주하여 살았으니 고구려인들은 러시아인과 혼혈이 된 집단일 가능성이 높다."라는 뉘앙스가 담긴 내용을 집어넣었다. 하지만 이 주장은 역사적 사실과 완전히 틀린 말이다. 우선 연해주가 러시아 땅이 된 때는 1860년 베이징 조약이 체결되고 나서였고, 러시아인들의 이주는 그 이후의 일이다. 아울러 시베리아에 러시아인들이 진출한 시기는 아무리 빨리 잡아도 서기 16세기 중엽에서야 가능했다. 그러니 고구려가 활동하던 기원전 1세기에서 서기 7세기까지 러시아인들의 조상격인 슬라브족들은 시베리아 차지도 못했을 때였으며, 고구려에 백인종의 유입자체는 있었지만 주로 토하라인, 소그드인 계통의 종족들이었지 슬라브족은 아니었다 , 당연히 고구려인들이 러시아인들과 혼혈이 될 일도 없었다. 아마 연해주나 시베리아 동부가 원래부터 러시아 땅인 것으로 잘못 알고서 이런 터무니없는 오류를 저지른 듯하다.
역사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고 고구려 관련 사료가 많이 번역 및 정리되면서, 단순히 "진취적인 기상", "넓은 땅" 수준으로만 인식되던 고구려 역시 대중 사이에 독특한 인식 내지 진짜 상남자 국가(...)의 인식으로 자리잡았다. 안악 3호분의 마교를 연상시키는 괴물 그림과 빛이 바래 소름끼치게 변한 벽화 등을 두고 마교국가, 한민족 막나가던 시절(...)이라는 등과 같은 반응을 보이거나, 약탈지의 농사가 잘되길 바라는 축제나 결혼할 때 수의부터 맞췄던 풍습 등을 두고 "내 조상이니까 웃지 진짜" 등의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