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촌유고〔錦村遺稿〕
■ 형태서지
권수제 | 錦村遺稿 |
판심제 | 없음 |
간종 | 필사본 |
간행년 | 사후에 23.2×35.3cm의 규격지에 半郭 18×25cm의 목판 틀로 찍어낸 지면에 후손이 필사 기록하여 편찬 |
권책 | 2권1책, 표지 제외 106쪽, 책 규격 : 23.2×35.3cm |
판식 | 四周雙線, 半郭 18×25cm, 有界 , 舞魚尾 寫記 |
행자 | 10행 20자 |
어미 | 없음 |
소장처 | 나주나씨 석호공 문중 소장 |
■ 저자
성명 | 나학경(羅學敬) 초명 학주(學周) |
생년 | 1801년(순조1) |
몰년 | 1875년(고종12) |
자 | 희서(希瑞) |
호 | 금촌(錦村) |
본관 | 나주(羅州) |
특기사항 | 해방 후 필사본 원본을 영인하여 재간함 |
■ 가계도
나주나씨15세 石壕 羅海龜 石壕公派祖 石壕集選 配南平文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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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세 羅得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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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세 羅學敬/初名 學周 字希瑞, 號錦村 錦村遺稿 配光山金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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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세 羅性德 配晉州鄭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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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세 羅英集/初名泓集 字明淑, 號小栢 小栢遺稿 配平澤林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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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羅炳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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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세 羅炳觀 字聖行, 號裕齋 裕齋私稿 配長興高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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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세 羅東均, 號杏園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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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羅夏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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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羅殷均, 號春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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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羅洛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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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와 작품구성
금촌유고(錦村遺稿)의 저자 나학경(羅學敬)은 나주나씨 21세로 『석호집선(石壕集選)』을 남긴 석호 나해구(石壕 羅海龜)의 6세 종손으로 1801년(순조1) 11월23일 아버지 나득종(羅得綜)과 어머니 남평문씨(南平文氏) 사이에서 나주 경현동에서 태어났는데, 초명은 학주(學周)이며, 자는 희서(希瑞), 호는 금촌(錦村)으로, 『소백유고(小栢遺稿)』를 남긴 나영집(羅英集)의 조부(祖父)이며, 유재사고(裕齋私稿)를 남긴 나병관(羅炳관)의 증조부가 된다.
선생은 1875년(고종 12)에 향년 75세로 졸하여 묘는 나주 금성산 산록인 경현동에 묻혔다가 본양면으로 옮겨졌다,
금촌유고(錦村遺稿)는 선생 사후에 四周雙邊, 半郭 목판으로 찍어낸 지면에 필사로 편찬하였는데, 해방 후 이 원본을 영인하여 재간한 듯하다.
직계 후손집안으로 비전(祕傳)되어 오다가 최근에 본양면 평림마을 후손 댁에서 석호집선, 금촌유고, 소백유고, 유재사고가 일괄 발견되었다.
금촌유고는 <권1>에 시(詩) 115제가 수록되고, <권2>에 책(策) 2편, 서(書) 1편, 서(序) 2편, 기(記) 2편, 론(論) 2편, 설(說) 1편, 문(文) 2편이 수록되어 있다.
<권1>에 시편(詩篇)은 시체(詩體) 구분 없이 총 115제에 177수가 편차되어 있다.
오언절구는 9제에 11수, 오언율시는 4제에 4수, 오언배율은 2제에 2수, 7언절구는 38제에 86수, 칠언율시는 66제에 74수가 수록되어 있다.
한 제목에 두 개의 시체(詩體)가 있어 제목 수치는 불어난다.
선생이 태어난 순조조는 조선이 몰락해가는 외척 세도(勢道) 정치가 시작되어 1811년 홍경래(洪景來) 난, 1862년 진주 민란이 전국적으로 확대 되어 전국 70여 고을에서 임술민란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으며,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 1876년 한일병자수호조규(韓日丙子修好條規)가 조인(調印)되었으니 살아생전의 삶이 평탄치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시는 당시의 역사 상황을 비유하여 썼기에 몇 편은 영사시(詠史詩)라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으로 선생이 지은 작품의 역사적 가치와 지역사적 가치를 살펴보자.
첫 번째, 시편 제94) 「삼가 성주 김병우의 수죽헌(水竹軒) 운을 차운하다」의 시는 나주목 관아 안에 수죽지(水竹池)란 연못이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데, 때마침 나주시와 문화재관리국이 나주목 관아 터를 발굴 조사하는 과정에서, 2020년 발굴 때 수죽지를 발굴해 냈다. 시문의 일부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제금당(製錦堂) 앞에 수죽지(水竹池)는
물속에 노는 물고기가 활발하니 살도록 놓아주는 것이 마땅하네.
그러므로 이 시문을 통해 관아 안에 제금당(製錦堂)이 있고, 제금당 앞에 수죽지(水竹池)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금당은 현존하는 목사 내아의 현판 명칭이며, 그 앞에서 수죽지가 발굴되었는데, 연못으로 유입되는 물길도 발굴되고, 연못을 넘쳐 빠져 나가는 수로도 발굴되었다. 제금당과 수죽지를 기록한 유일한 사찬(私撰)의 글로 평가된다.
두 번째, 시편 제96) 「삼가 남산의 최고정(最高亭) 운을 차운하다. 경오년(1870년) 늦봄에 이 정자를 새로 짓다」란 제목의 시를 살펴보자. 이 정자는 동점문(東漸門)과 남고문(南顧門) 사이에 남산(南山)이 있는데 나주목사 김병우(金炳愚,1868∼1871년 재임)가 남산 꼭대기에 정자를 건립하고 최고정(最高亭)이란 현판을 게시하는 준공의 자리에서 목사가 시를 지으니, 지역 선비들이 차운 시를 지었다. 선생은 차운 시에 이어서 나주목사의 원운 시도 편차하여 넣었으니, 당시의 최고정 건립의 역사를 시로써 입증한 셈이다. 나주목사 원운 시를 보면 다음과 같다.
붉은 빛 정자를 두 소나무 사이에 새로 짓고/紅亭新作二松間
-중략-
한 폭의 성(城)과 해자(垓字)가 손바닥처럼 보이는데/一幅城池如視掌
-중략-
나라가 태평한 이날에도 국경의 관문은 중하네/昇平此日重邊關
붉은 빛 정자는 최고정이 단청(丹靑)되었음을 말하고, 최고정은 남산 꼭대기인데 여기에 아름드리 큰 소나무 두 그루가 있다고 말하고 있으며, 최고정에서 동점문 쪽 읍성을 바라보면 성(城)과 해자(垓字)가 마치 손바닥처럼 보인다라고 했으며, 나라가 태평해도 국경의 관문이 중요하듯, 나주고을의 태평을 위해 최고정은 성을 지키는 파수대 또는 전망대 역할을 한다고 시로 읊은 것이다.
세 번째, 지역의 가장 아름다운 풍광을 대체로 팔경(八景)이란 이름을 돋보이게 시를 읊는 것은 중국의 소상팔경(瀟湘八景)이 효시로, 후대 사람들이 이를 따라 자신의 지역 팔경을 읊었다.
선생은 「금촌팔경」이란 제목으로 나주 팔경을 읊었다. 금촌(錦村)은 곧 ‘비단고을’이니, 나주(羅州)의 ‘비단고을’과 상통한다. 나주팔경은 다음과 같다.
①용암폭포(龍巖瀑布), ②광포귀범(廣浦歸帆_) ③보사소종(寶寺疎鍾) ④남산만하(南山晩霞) ⑤원봉제월(元峰霽月) ⑥한계완사(寒溪浣紗) ⑦동성취각(東城吹角) ⑧월봉낙조(月峰落照)
이를 좀 더 상세히 소개하면, 용암폭포는 경현동 방성산(訪聖山)에 있고, 광포는 영산강에서 동점문으로 이어지는 일대를 말하니, 과거에는 밀물 때 동점문 아래로 돛단배가 정박한 듯하다. 나주시 시내에서 들리는 다보사 종소리는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만 선생은 이를 풍광으로 읊었다. 해질녘에 끼는 남산의 노을빛도 풍광의 극치요, 비가 갠 뒤 장원봉에 떠오르는 달빛도 풍광의 극치이며, 나주천의 과거 이름이 한계(寒溪) 즉 찬물이 흐르는 시내라고 불렀으며 상류 쪽 바위벽에 큰 글자로 한수동천(寒水洞天)이란 글이 새겨졌는데, 저수지 축조 때 매몰되어 버렸다고 한다.
동천(洞天)은 도교적 말로 신선세계라는 말이니 곧 경현마을이 신선세계의 동천이라고 읊었다. 동성 곧 동점문으로 나주읍성 대표 출입구인데, 아마 성문을 열고 닫을 시간에 성문위에서 뿔피리를 불었기기 동성취각을 이 또한 극치의 풍광이라고 읊었다. 저자는 월정봉으로 지는 햇살을 마지막 나주팔경을 읊었다. 팔경은 지역을 파는 상품으로 최고의 재료이다.
네 번째, 시편 제111) 「청(淸)나라의 쇠돈을 없앤다는 것을 듣고 분개하여 읊다」의 시문을 보면
건융(乾隆)과 가경(嘉慶)의 쇠돈도 모두 쓸 수 없었는데/乾隆嘉慶皆無用
순치(順治)와 강희(康熙)의 쇠돈도 또한 몇 년도 쓰지 못했네/順治康熙亦不數
만세토록 쓰는 상평통보(常平通寶)는 나라의 보물이니/萬世常平通國寶
이 시에서 건융(乾隆)과 가경(嘉慶), 순치(順治)와 강희(康熙)은 중국 연호로, 그 당시 중국에서 만든 쇠돈〔엽전〕이 국내에서도 한시적으로 통용되었다는 말이다. 상평통보는 조선시대 사용하던 우리나라 엽전이니 만세토록 사용하여 좋다는 말이다.
조선시대 중국 엽전을 사용했다는 역사적 연구에 도움이 될 만하다.
다섯 번째, 순조조에 삼정(三政)의 문란은 극에 달했다. 왕실에서 그 해답을 찾지 못하니 임금이 직접 그 해답을 백성에게 묻는 것이 윤음(綸音)이라 하는데 승정원일기에 임술록에도 윤음이 수록되어 있다. 이에 나주 백성 나학경은 윤음에 응지상소(應旨上疏)를 하였던 상소문이 <권2> 책(策)에 수록되어있다. 선생이 올린 장문(長文)의 상소문 연구를 통해 당시 상황을 가늠할만하니, 역사적 가치가 있겠다.
여섯 번째,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가 일어나다, 선생은 「어융(御戎)/오랑캐를 제어하다」란 책문을 지어 또 다시 임금께 올렸다. 유고 마지막 편에는 1866년 9월초6일 서양오랑캐가 강화도를 함락하자, 「의병을 일으키는 통문 초안/[擧義通草」을 작성 하였다.
이로 보아 선생은 다만 시골에 은둔하여 유유자적하는 것 같아도 적극적으로 임금의 통치와 나주목사의 행정에 의견을 개진하였다. 이를 통해 당시의 역사를 가늠할 수 있으니 금촌유고는 역사적으로 매우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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