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격분석 - 선화(善化) 공주의 실체
“ 선화공주님은 / 남모르게 정을 두고
맛동 도련님을 / 밤에 몰래 안고가다 ”
너무나 유명한 향가 서동요와 서동설화. 그러나 1,400년을 이어져 내려온 백제의 왕자 서동과 신라 선화공주의 전설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다. 지난 1월 19일 전북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 보수를 위한 해체과정에서 그 사리봉안기가 출토되었는데, 그곳엔 미륵사를 세운 사람이 백제의 왕후인 좌평 사택적덕의 딸이라 기록되어 있었다. 따라서 신라의 선화공주가 미륵사를 세웠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은 사실과 다르며, 무엇보다 백제 무왕의 왕후가 선화공주가 아닌 백제 귀족의 딸이라 적혀 있으니 서동설화 자체가 그야말로 송두리째 흔들리게 된 것이다.
삼국유사에 기록되어있는 서동설화를 요약 정리해보면, 무왕의 어머니는 과부였는데 용(임금을 상징)과 정을 통하여 서동을 낳았고, 그 서동이 자란뒤 신라 선화공주가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신라로 가서 아이들에게 마를 나누어주며 선화공주가 남모르게 정을 두고 맛동 도련님을 밤에 몰래 안고간다는 내용의 향가를 퍼트리게 한 것이다. 격분한 임금이 선화를 궁밖으로 쫓아보냈고, 왕후가 선화에게 금 한말을 여비로 주었는데 유배지에서 우연히 서동을 만났다. 선화가 서동에게 순금 한말을 보여주자 서동은 자신의 고향엔 금이 흙처럼 쌓여져 있다고 말했고, 선화가 그 보물을 우리 임금님이 계신 서울로 보내는게 어떻겠느냐고 하자 둘이 함께 용화산 사자사로 가 지명법사에게 부탁 신통력으로 그 금을 나르게 했고, 진평왕이 이 신통력을 기이하게 여겼다는 것이다. 그리고 훗날 서동은 왕위에 올라 백제 무왕이 되었다. 여기까지가 삼국유사에 실려있는 선화와 서동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이 설화처럼 실제 신라공주가 백제왕자에게 시집갔을 가능성에 대해선 지금까지 회의적으로 보아왔다. 무엇보다 이 무렵은 백제와 신라가 자주 전쟁을 치렀던 시기며 -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을 견제하게 위해 백제는 신라와 동맹관계를 맺지만, 이후 신라 진흥왕때 신라가 먼저 나제동맹을 깨고 한강유역을 침입 이때까지 이어져 내려온 120년간의 나제동맹은 깨지고 두 나라는 원수지간이 된다 - 따라서 이 무렵 혼인동맹 같은 이야기가 두 나라 사이에서 나왔을 가능성은 매우 적다는 것이다.
따라서 혹자는 실제 신라의 공주와 혼인을 한 백제의 왕은 무왕이 아닌 다른 왕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한편 삼국사기를 다시한번 살펴보면 진흥왕 14년 10월에 왕이 백제 왕의 딸을 취하여 소비(小妃)를 삼았다는 기록이 있기도 하니, 이때 신라와 백제간의 혼인관계가 전혀 없었을거라 단정하기도 어렵다. - 백제본기로는 성왕 31년의 일이다 -
그렇다면 도대체 선화공주란 어떤 인물이며 그 정확한 실체는 무엇일까. 어떻게 해서 이와같은 설화와 향가가 1,400년을 이어져 내려오는 것일까. 이제부터 한번 본격적으로 그 실체를 파헤쳐 보기로 하자.
- 선화공주는 없다 ! -
현재 전해져 내려오는 삼국시대의 사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그리고 화랑세기가 있다. 화랑세기는 1989년 부산에서 그 필사본이 발견되었고, 한동안은 그 위서론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지금은 화랑세기를 정설로 인정하는 학자도 점차 늘어나는 분위기다. 순서대로라면 신라시대 김대문이 쓴 화랑세기가 고려시대에 쓰여진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보다 더 오래된 가장 오래된 삼국시대 역사서가 되며, 무엇보다 신라시대에 직접 신라 화랑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역사서란 점에서 그 당시의 시대상황에 가장 근접해있다.
삼국유사엔 선화공주가 신라 진평왕의 셋째딸이라 나와있으나, 화랑세기엔 선화공주가 등장하지 않는다. 진평왕의 딸로 화랑세기에서 찾아볼수 있는 인물은 선덕여왕으로 잘 알려진 덕만공주와 김춘추의 어머니가 되는 천명공주 두명뿐이다. 화랑세기의 기록에 의하면 선덕공주가 점차 자라며 용봉(龍鳳)의 뛰어난 자질과 태양과 같은 생김새를 지녀 왕위를 이을만하였다고 나와있다. 따라서 대왕(진평왕)이 선덕공주를 마음에 두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한편 천명공주는 훗날 김춘추의 어머니가 되는 인물로 본래 김용춘을 연모하였는데, 어머니인 마야왕후가 이를 오인하여 용수전군에게 시집보냈다고 되어있다. 한편 천명공주는 훗날 왕이 선덕공주를 후계자로 염두에 두게 되자 스스로 궁밖으로 나갔다고 한다.
삼국사기에도 선화공주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선덕여왕이 신라 진평왕의 큰 딸이며, 태종무열왕(김춘추)의 어머니는 신라 진평왕의 딸인 천명부인(즉 천명공주)이다. 진평왕의 딸로 삼국사기에서 찾아볼수 있는 인물 역시 이 둘이 전부이며 선화공주에 대해선 어디에도 기록되어있지 않다.
그렇다면 이렇게 화랑세기에도 나와있지 않고, 삼국사기에도 나오지 않는 선화공주가 왜 난데없이 일연의 삼국유사에선 진평왕의 셋째딸이 된 것일까.
- 선화(善化)와 선화(仙花) -
사실 화랑세기에 선화(善化)공주는 등장하지 않지만, ‘ 선화 ’란 단어는 몇 번 나온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선화(仙化)는 국선화랑(國仙花郞)의 약자로 선화공주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화랑세기에 7세 설원랑을 찬한 가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 미실궁주의 신하로 미륵선화(彌勒仙花)의 시초로다.
불문에 의지하여 그 훌륭함을 더했노라.
성대한 맑은 이름 길이 청사에 남으리라
한결같은 충성으로 하늘의 복을 열었다네 ’
문노는 국선(國仙)으로서 화랑의 우두머리가 되었기에 설원랑은 선화(仙花)로 불리었고, 다시 미실을 따라 영흥사에서 살았으므로 뒤에 미륵선화(彌勒仙花)로 일컬어졌다. 한편 삼국유사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져 있다. 진지왕때 흥륜사에 진자라는 스님이 있었다. 매번 절에 모시는 미륵불 앞에서 기도하기를 부처님께서 화랑으로 태어나 주시기를 발원했다는 것이다.
하루는 꿈에 한 스님이 나타나 ‘ 웅천사로 가보면 미륵선화를 만날 수 있을것이다 ’ 라고 하니, 처음에 갔을때 한 소년을 우연히 만났으나 그가 미륵선화임을 알아보지 못하고, 한 절에서 기다리는데 산신령이 노인으로 나타나 ‘ 전에 미륵선화를 만나보지 않았느냐 ? ’고 꾸짖자 다시 영묘사 동북쪽 길가 나무아래서 한 소년을 보게되었다. 소년의 이름은 미시(未尸)로 그가 바로 미륵선화였던 것이다. 지금 나라사람들이 신선을 ‘ 미륵선화 ’라 부르고 남에게 중매서는 이를 미시라 하는데 이는 모두 진자가 남긴 풍속이다. (삼국유사 탑상 제4 미륵선화와 미시랑 그리고 진지사)
선화(善化)공주와 선화(仙花)는 한자도 다르고 그 뜻도 다르다. 두 단어가 아무런 관련이 없는 동음이의어(同音異議語)지만, 이 두 개와 절묘하게 연관되어 있는 이야기가 있다. 바로 미륵신앙과 관련된 부분이다. 미륵이란 불가에서 말하는 훗날 세상을 구원하러 내려온다는 내세불로 불교나 민족종교쪽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두번쯤 들어보았을 개념일 것이다. 세기말(世紀末)에 한때 자신이 미륵임을 자처하는 이런저런 신흥종교들이 생기기도 했으나, 실상 거슬러 올라가보면 미륵신앙은 동양 특히 불교문화권에선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던 내세불 혹은 구세주의 개념인 것이다.
화랑세기를 참조하면 신라시대엔 화랑의 우두머리격, 또는 모범이 될만한 국선화랑을 ‘ 선화(仙花) ’ 혹은 미륵선화라 불렀으며, 서동설화에서 선화(善化)공주는 사자사로 가는길에 용화산 밑 큰 연못가에 이르러 이곳에 큰 절을 세워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리고 지명법사가 신통력을 발휘, 미륵상 셋과 회전(會殿), 탑, 낭무(廊廡)를 각기 세군데 세우고 미륵사라는 편액을 달았다.
- 선화와 서동은 결혼하지 않았다 ? -
하지만 미륵사지 석탑 사리봉안기에서 미륵사를 세운 사람이 백제 왕후인 좌평 사택적덕의 딸이라고 적혀져 있는것이 발견되었으니 삼국유사에서 선화공주가 미륵사를 세웠다는 이야기는 분명 사실과 다름이 증명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삼국유사엔 이와같은 기록이 실린것이며, 무엇보다 화랑세기에도 삼국사기에도 나오지 않는 진평왕의 셋째딸 선화공주가 등장 서동설화의 중심인물이 된 것일까.
덕분에 졸지에 사학계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그 속사정이야 능히 짐작할만 하다. 가령 서동설화의 배경이 되었던 전북 익산시의 경우 애초 민간차원의 축제였던 마한 민속예술제를 근래에 들어와 ‘ 서동문화축제 ’로 명칭을 변경하고 지자체의 공식 축제로 격상시켰다. 또 근래엔 서동공원을 조성하겠다는 발표를 하는등 서동설화를 지역 공식 문화상품이자 관광상품으로 자리매김하고자 갖은 노력을 다해오고 있던 차였다.
뿐인가. 3년전 제작된 SBS 드라마 ‘ 서동요 ’는 지금도 동아시아 몇몇 나라에 수출되어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다. 헌데 서동설화의 주인공인 선화공주의 정체성이 송두리째 흔들리게 되었으니, 서동설화가 무너짐으로 인해 입게될 경제적 타격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
따라서 사학계에선 억지로라도 사리봉안기의 진상과 서동설화를 꽤맞추려는 눈물겨운 노력이 시작되었다. 그 첫 번째로 나온 주장이 무왕의 비가 두명이었을 가능성이다.
1) 무왕의 비가 두명 ? - 상식적으로 옛날의 왕에게 후궁이 어디 한둘이었나.
뿐인가. 왕비가 죽거나 폐위되면 국모의 자리를 비워두면 안된다는 명분하
에 얼마 지나지 않아 계비(繼妃)를 들인 사례도 수두룩하다. 하물며 42년간
즉위한 백제 무왕에게 정비가 달랑 한명이진 않았을 것이다.
특히 KBS 역사추적은 얼마전 이 주장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나름대로 이 주
장을 뒷받침해주는 내용을 제작,방영하기도 했다. 일본서기의 기록에 의하면
의자왕이 즉위한 직후, 왕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이 과정에서 백제에서
대란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는 것이다. 옛날에 왕의 이복형제와 그를 지지하
는 세력간의 갈등과 그로인한 반란음모등은 수두룩하게 많았다. 따라서 무왕
에게 왕후가 두명이었을 가능성을 전제한다면 의자왕 즉위 직후 발생하는 변
란은 그 배경설명이 충분히 된다. 더욱이 무왕에게 비가 두명이었음을 전제
한다면 그것이 곧 서동설화의 실존 가능성까지 뒷받침하게 되는 것임에랴.
하지만 이 주장은 아무래도 억지로 꿰맞추려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만약
무왕에게 선화공주와 백제귀족의 딸 사택왕후 이렇게 두명이 있다고 전제한다
면 백제의 계파도 백제 토호세력대 친 신라계열의 갈등이 되어야 한다. 그리
고 그 정변의 변수는 어떤 형태로든 신라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수 없을 것이
다. 허나 문제는 이 무렵 백제와 신라의 관계엔 백제내의 정변과 관련된 그
어떤 변동 사항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의자왕은 바로 이듬해에 친히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습격 40여성을 함락시킨
다. 만약 의자왕이 선화공주의 아들이라면 신라는 어머니의 나라며, 특히 이
무렵 즉위하고 있는 선덕여왕은 의자왕의 이모가 된다. 즉위하자마자 바로
이렇게 곧바로 신라에 적대적인 입장을 취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역으로 의자왕이 사택왕후의 아들이라면 ? 두말할것도 없이 의자왕의 비호세
력은 백제 토호세력이고 귀족세력이다. 그렇다면 정변으로 인해 선화공주 지
지 세력이 몰락했다는 말인데, 일본서기 기록에 의하면 의자왕의 동생인 교기
왕자가 추방되고 40여인이 일본으로 망명한다. 훗날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키
자 백제를 돕기위해 원군을 파견한 일본임을 생각한다면 친 신라계가 일본으
로 망명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혹 선화공주 지지세력이 신라로 망명해봤자
그곳에서 정착하기가 힘들것 같아 일본으로 간 것으로 해석한다 할 지라도 최
소한 교기왕자는 신라에 망명했어야 이치에 맞는다. 교기왕자가 선화공주의
친아들이라면 아무래도 모계혈통인 신라로 망명하는게 더 났지 않았을까 ?
무왕은 즉위 3년만에 친히 군사를 이끌고 신라의 아막산성을 포위하는등 즉
위 42년동안 무려 11차례나 신라를 침공한다. 무왕의 아내가 신라의 공주였다
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2) 선화공주는 백제인 ? - 또 하나 흥미로은 주장은 사실은 사택왕후의 딸이 선
화라는 것이다.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사리봉안기엔 백제 왕후가 사택적덕의
딸이라는것만 밝혔을뿐 그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바로 사택적덕의
딸 이름이 선화일수도 있는것 아닌가 ?
하지만 근본적으로 ‘ 서동요 ’는 신라에서 발생한 향가다. 만약 선화가 그
냥 백제 호족의 딸이었다면 단순히 백제 왕자와 호족의 딸간의 평번한 결혼인
데, 그걸 가지고 신라인들이 향가를 지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무엇보다 일연
은 그렇다면 왜 뜬금없이 멀쩡한 백제 호족의 딸을 신라 공주로 둔갑시켰다는
말인가. 꽤 논리가 빈약한 주장이다.
3) 미륵사 건립 주체가 여러명 ? - 익산 미륵사지 석탑은 본래 1998년 붕괴 위
험성이 제기되어 문화재 위원회에서 장기보존을 위해 해체,보존을 결정한 것
이 다. 석탑 해체 과정에서 서탑 남서쪽 부근에서 통일신라 시대 항아리라던
가, 조선시대 상평통보가 발견되기도 해 탑의 보수가 이전에도 여러차례 있었
음을 입증시켜 주기도 했다.
미륵사는 꽤 넓고 큰 규모의 절이다. 무엇보다 백제왕후가 직접 불사를 하고
사리봉안기를 넣을 정도면 그야말로 한 나라의 국력을 총 동원해 일으킨 대규
모 불사였음을 알 수 있다. 신라와 백제가 갈등의 골이 갈수록 깊어지고, 전
쟁이 끊이지 않던 그 시절 무왕은 미륵사에서 무엇을 발원하고 싶었던 것일
까.
미륵사는 동원과 중원 그리고 서원이란 세 개의 가람(伽藍 : 불도를 닦는곳
을 뜻하는 불교용어)으로 이루어진 삼원병립식 사찰이다. 또한 왕실의 원찰이
란 점에서 다른 왕후나 왕족도 발원이나 봉안을 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
다. 사택왕후의 사리봉안기가 발견된 곳은 서탑. 따라서 동원이나 중원엔 선
화공주라던가 또 다른 인물의 발원문이나 봉안기가 묻혀져 있을 가능성에 근
거한 주장이다.
4) 또 다른 주장 - 그렇다면 필자는 여기서 한번 또 다른 이채로운 주장을 해
보고자 한다. 삼국유사 무왕편을 다시한번 살펴보면 뜻밖의 사실을 하나 발견
할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서동요 또는 선화공주와 백제 무왕의 결혼 이야기로
알고 있는 서동설화이지만, 정작 무왕편엔 서동과 선화가 ‘ 결혼 ’ 했다
는 의미의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
삼국유사 무왕편에 실린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처음부터 끝까지 그 주체가 무
왕인 것이고, 선화공주는 무왕의 이야기를 신비롭게 만들기 위해 등장하는 부
수적 인물인 것이다. 그 무왕이 어린시절 서동요를 퍼트려 선화공주를 궁에서
쫏겨나게하고, 유배지에서 그녀를 만나게 되고, 선화가 궁을 떠날 때 왕후가
준 금을 보고는 자신(서동)의 고향에 이런것이 많다고 서동이 말하자 선화가
그 금을 우리 궁궐(신라)에 실어 나르는게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한 것이다.
서동과 선화가 금을 실어나를 방도를 묻기위해 지명법사를 찾아갔고 지명이
신통력으로 금을 나르자 진평왕은 다만 그런 조화를 기이하게 여겼을 뿐인 것
이다.
서동과 선화의 이야기는 다만 여기까지다. 혹자는 여기서 금의 의미를 혼수
품으로 확대해석하기도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정작 삼국유사 원문엔 서동과
선화가 결혼했다는 이야기가 없다. 이어 미륵사를 세우게 되는 이야기는 다음
과 같다.
‘ 하루는 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로 거동하는 길에 용화산 밑에 있는 큰
연못가에 이르렀다. 마침 미륵삼존이 나타나자 수레를 멈추고 절했다. 부인
이 왕에게 말했다. ‘ 이곳에 큰 가람(절)을 세우는것이 저의 소원입니다. ’
그래서 다시 지명법사의 신통력으로 절을 세웠다는 것이다. 무왕의 이야기
를 살펴보면 크게 두 개의 구조로 나뉘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앞부분은 신
라 선화공주와의 이야기고 뒷부분은 미륵사 창건 배경이다.
즉, 우리가 지금까지 서동과 선화에 얽힌 하나의 이야기가 이어지는걸로 알
고있었던 무왕편은 실상 두 개의 스토리라는 것이다. - 삼국유사엔 이런식의
이야기 구조가 많다. 하나의 인물을 가지고 2-3개의 에피소드를 소개한 경우
가 - 즉 앞부분 서동과 선화의 이야기는 별개의 이야기 - 전설이었든 설화였
든 또다른 무엇이었든 간에 - 고, 뒤에 나오는 절을 세우고 싶다고 말하
는 무왕의 부인이 실상 다른 인물일수 있다는 것이다. - 바로 그 부인이 사
택왕후일수도 있는 것 아닌가
- 서동설화에 담긴 민중의 여망은 무엇일까 ? -
사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화랑세기에도 삼국사기에도 선화공주는 나오지 않는다. 헌데 왜 그럼 일연의 삼국유사에만 뜬금없이 진평왕의 셋째딸 선화공주가 등장하는 것일까.
삼국유사는 사실 역사서라기 보담은 불교적 색채의 설화를 모아놓은 성격의 책으로 보아야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삼국유사 자체가 그 존재가치가 줄어들진 않는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설화로도 그 당시 민중의 정서라든가 시대상황, 사회분위기등을 유추 해석해 볼 수 있는 그 정도의 의미는 분명히 있다.
거듭 말하지만 사실 이 무렵 - 백제 무왕 혹은 신라 진평왕을 전후한 시기 - 에 백제왕자와 신라공주가 혼인을 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국유사에는 버젓이 서동과 선화의 이야기가 나온다. ‘ 선화공주님은 남모르게 정을 두고 / 맛동 도련님을 밤에 몰래 안고가다 ’ 라고 하는 향가와 함께.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고전문학 장르이기도 한 향가. 그 장르는 의식가(儀式歌), 민요, 연락가(宴樂歌), 찬가(讚歌)등의 집단가요와 개인적 서정가요등으로 나뉜다. 한편 그 작자는 화랑,승려,여성,일반백성등 다양하다. 서동요의 경우 굳이 작가를 말하자면 서동이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그 만들어지고 퍼져나간 과정을 생각해보면 개인 서정가요라기 보담은 주술(呪術)적 성격이 강한 민요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만들던 시절 어떤 형태로든 그 당시까지 이어져 내려오던 서동요와 그와 관련한 백제왕자와 신라공주의 사랑(?) 이야기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이런 이야기가 신라 진평왕때로부터 약 수백년동안 전해져 내려올수 있었을까.
삼국사기를 살펴보면 초창기 신라와 백제 사이엔 특별한 갈등관계가 보이지 않는다. 신라는 백제보다 국가 형성시기가 늦었고, 고구려의 속국과 같은 형태였을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그러한 신라와 백제가 본격적으로 동맹관계를 맺게 되는것은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이 시작되면서부터다. 백제와 신라는 혼인동맹을 맺어 함께 고구려의 남진을 견제하지만, 그와같은 동맹관계는 120여년 정도가 지난뒤, 신라 진흥왕이 전격적으로 백제의 옛 영토인 한강유역을 습격함으로써 깨지게 된다. 이후 두 나라는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어버리며, 660년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게 될 때 까지, 두 나라의 역사는 그야말로 지독한 전쟁의 세월이었다.
- 신라와 백제, 그리고 오늘날의 영호남 -
호사가들은 오늘날 영호남의 지역감정이 그 옛날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때부터 비롯된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 오늘날도 민생을 뒤로한채 자신들의 기득권 싸움에만 매달려있는 정치권의 갈등이 이토록 국민을 피곤하고 고통스럽게 만드는데, 하물며 백 수십년간 지속되는 전쟁의 시대 신라와 백제땅에 살던 백성들의 고통은 또 오죽하였으랴.
삼국사기에 기록에 의하면 실제로는 백제 동성왕 15년 (신라 눌지 마립간 15년) 왕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하니 신라왕이 이찬 비지의 딸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와 백제가 혼인동맹이 이루어진 이 무렵의 양국관계는 대체로 평온하였다.
하지만 진흥왕에 의해 양국의 동맹이 깨어지고나서 두 나라엔 바야흐로 지독한 전쟁의 시기가 열린다. 백제 성왕은 신라와의 전쟁때 해를 입고 사망하고, 그 아들 위덕왕은 8년뒤 다시 신라를 침공한다. 2년간 단명한 혜왕,법왕에 이어 즉위한 무왕은 무려 10여차례나 신라를 침공했고, 신라의 반격도 만만찮았다. 의자왕 역시 즉위 2년만에 신라를 치는등 여러차례 전쟁을 일으켰고, 이렇게 끊임없이 지속된 양국의 난타전은 결국 660년 백제가 멸망함으로써 막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헌데 아이러니하게도 서동설화는 바로 이 지독한 전쟁의 시기에 형성된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 혹시 백제와 신라 양국의 평화를 바라던 그 당시 민중의 여망이 향가로 민요로 만들어져 퍼지고, 구전되고 또 구전되면서 하나의 설화로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신라와 백제가 한참 전쟁을 치르던 시기에 오히려 백제왕자가 신라공주를 연모해 역으로 신라공주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내용의 향가를 만들어 퍼트렸고, 결국 우여곡절 끝에 두 사람이 결혼에 이르게 된다는 이야기를 만들어낸 그 당시 민중의 심리와 정서는 어떤것이었을까 ?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그 진평왕의 셋째딸을 선화(善化) 공주라고 했다. 혹시 진평왕의 셋째딸이라는 설정 자체가 그 당시까지 전해내려오는 민간설화를 인용 일연이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 ? 이미 화랑세기와 삼국사기등의 전해지는 사서엔 진평왕의 두 딸 덕만공주(선덕여왕)와 천명공주가 기록되어 있으니, 선화공주가 셋째딸로 그려진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원래 신라에선 국선화랑을 뜻하는 선화(仙花)란 명칭이 있었다. 선화공주와 이 선화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동음이의어다. 하지만 하필이면 두 선화가 공교롭게도 미륵신앙과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후세에 중생을 구제하려 내려온다는 미륵불. 헌데 신라와 백제 화합의 상징인 선화공주를 미륵사의 창건배경으로 등장시켰다는것은 결국 그 당시 백성들의 갈망을 대변해주는 상징이 아닐까. 신라와 백제가 끊임없는 지독한 전쟁을 치르던 혼란의 시기. 그 시기의 백성들이 양국간의 화해와 평화를 갈망하던 심정. 그것이 서동설화를 만들어 낸 것은 아닐까. 실제 양국간에 혼인동맹을 맺었던 시절은 전쟁이 없던 평화롭던 시기였음을 감안한다면, 아울러 그와같은 평화로왔던 지난 시절을 그리는 향수도 어느정도 있었으리라.
- 오늘날 서동설화는 어떻게 받아들여져야 할까 ? -
하지만 참으로 당혹스럽게도 1,400년간 내려오던 이 설화를 뒤엎으며 익산 미륵사지 석탑에선 백제 무왕의 비 사택왕후가 발원한 사리봉안기가 나왔다. 이에 무엇보다 서동설화를 지역의 대표적 관광상품이자 문화상품으로 만들려던 익산시가 가장 당황하게 되었다. 익산 서동축제 총감독 남정숙씨는 이때 한 인터뷰에서 ‘ 마치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사실은 아빠였다는 걸 알았을때 같은 기분 ’이라며 이때의 심경을 피력했다.
하지만 서동요가 설화라고 해서 그와 관련한 문화행사나 축제가 축소되거나 사라져야 할까 ? 그건 아니다. 가령 예를들자면 세익스피어의 대표적 희곡 햄릿의 배경인 덴마크 엘시노어성에는 지금도 찾는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심지어 햄릿의 무덤과 기념비까지 만들어져있어 혹시 햄릿이 실존인물이었던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지경이다. 피노키오의 고향(?) 콜로니에도 동화 피노키오와 관련된 여러 가지 조형물과 피노키오 공원이 만들어져 있다. 마크 트웨인의 소설 ‘ 톰소여의 모험 ’의 배경인 해니벌엔 아예 작가의 생가를 ‘ 톰소여의 집 ’이라 이름붙여놓았고, 그 옆엔 바로 소설에서 톰소여가 말썽을 부린 벌로 울타리에 페인트칠을 했던 그 울타리가 그대로 만들어져 있기까지 하다. 소설이나 동화를 같고도 세계 각국에 이런 관광유적이 수두룩할진대 서동요가 역사적 사실이 아닌 설화라고 해서 그 축제가 축소되거나 폄하될 이유가 하나도 없는 명명백백한 증거들이다.
다만 익산 미륵사 창건의 주체가 선화공주가 아니란 사실이 밝혀진 이상, 그로인한 일반대중의 정신적 충격이 어느정도 가시기 전 까진 익산 서동축제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이 줄어드는건 불가피할것 같다. 더욱이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남달리 까다로운 우리나라 국민임을 감안한다면.
천수백년전 신라와 백제간의 앙금에서부터 비롯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날 영호남간의 지역감정 역시 그 시절 못지않게 심각하다. 무엇보다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지지기반 확보에 지역정서를 철저히 악용하고 있음에랴. 민생은 외면한채 자신들의 기득권 싸움에만 혈안이 되어있는 정치인들 때문에 일반국민들이 당하는 고통역시 천수백년전 끊임없는 신라와 백제간의 전란속에 신음하며 스러져갔던 그 시절 백성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공교롭게도 선화공주의 설화는 바로 미륵신앙으로 마무리된다. 어쨌든 삼국유사는 미륵사 창건의 주체를 선화공주로 만들어놓은 것이니까. 그렇다면 그 역시 새로운 세상을 구현하기 위해 내려온다는 내세불 미륵불에 그 시절 민중의 기대심리를 반영한것은 아닐까. 끊임없이 전란에 시달리던 그 시절의 백성들. 제발 전쟁이 끝나고 새로운 평화의 시대가 열리기를 미륵이란 내세의 구세주에 의지해 기원하고 갈망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바로 그렇게 수백년간 구전되어 내려온 서동설화는 일연의 삼국유사로 인해 기록으로 남게된다. - 어쩌면 선화(善化)란 이름 자체가 일연이 임의적으로 만든것은 아니었을까 ?
천사백년전 신라와 백제간의 평화를 갈망했던 백성들의 여망이 하나의 설화로 만들어진게 서동요라면, 그것을 오늘날엔 영호남의 화합을 바라는 하나의 상징으로 만들어 보는것도 의미있는 일 아닐까. 신라공주와 백제왕자간에 벌어진 염문. 그것이 정녕 그 시절 백성들이 신라와 백제의 화해와 평화를 바랬던 염원으로 인해 만들어진 이야기라면, 오늘날엔 영호남의 화합을 바라는 일반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그러한 상징적 설화로 자리매김시키기에 전혀 손색이 없다. 무엇보다도 지역감정을 자신들의 정치적 이득에 철저히 이용하는 정치인들에게도 그러한 일반대중의 여망을 똑바로 보여주며 경계로 삼게 하기에도 충분한 이야기거리며 상징적 소재가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