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학력고사를 부활시킵시다
2017년 대입 수능시험이 끝났습니다. 작년보다 많이 어려웠고 그 결과 과목별 등급 컷이 많게는 7~8점씩 내려갈 거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습니다. 학력고사 세대인 필자에게는 ‘등급 컷’이란 말이 매우 낯섭니다만 요즘 대입에서는 이 등급 컷이 매우 중요하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수시전형에서 합격선에 들었어도 특정 과목의 수능 등급이 1등급 또는 2등급 안에 들어야만 합격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예 수능점수를 고려하지 않는 수시전형도 매우 많습니다.
해마다 수능시험 날이 되면 관공서는 출근 시간을 한 시간씩 늦추고 은행 영업시간과 심지어 증권거래 시간까지 한 시간씩 늦춥니다. 수험생들에게는 일생을 좌우하는 첫 관문일 수도 있기에 사회적으로 많은 배려를 하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사실 수능 점수로만 대학에 들어가는 비율은 20퍼센트 안팎에 불과합니다. 수시전형의 비율이 70~80퍼센트에 육박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세칭 일류대의 경우 수시전형으로 신입생을 선발하는 비율이 점점 높아지고 있습니다. 수능 날 경찰 오토바이 뒤에 수험생을 태우고 고사장으로 향하는 장면들을 뉴스시간마다 단골로 보여주며 긴박한 느낌을 주고는 있습니다만, 수능과 상관없이 대학에 입학하는 학생들의 숫자는 이미 너무 많이 늘어난 상태입니다.
최근에 불거진 정유라의 이화여대 입학 특혜는 수시전형이 멍석을 깔아준 결과입니다. 아래 내용은 2015학년도 이화여대 체육특기자 전형의 모집 요강입니다. 이 전형은 수능점수는 물론이고 고교 성적도 평가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엊그제 구속이 결정된 장시호 씨는 1998년도에 연대에 입학했는데, ‘양가집 규수’라는 별명으로 알 수 있듯이 주요 과목 성적은 전부 ‘가’였고 음악이나 체육에서 ‘양’이나 ‘미’를 받았습니다. 262명 정원에 260등이었는데 당당히 연대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연대는 보관기간이 지나서 입학 당시의 서류는 폐기한 상태라고 합니다.
대입 수시 전형은 정성적(定性的) 평가입니다. 합격과 불합격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어떤 전형보다도 ‘공정성’이 담보되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합격 과정을 보면 도대체 어느 한 구석도 공정성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그 결과 대한민국 국민은 이제 어느 누구도 대입 전형을 신뢰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과연 부정 입학한 사람이 이 두 사람만 있을까?” “이참에 전수조사라도 해봐야 되는 거 아냐?” 요즘 심심찮게 들려오는 말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수시전형이라는 것이 너무나 다양하고 대학마다 기준이 들쭉날쭉해서 대학 교수들조차도 “너무 복잡해서 잘 모르겠다.”는 얘기를 할 정도라서, 제대로 평가가 이뤄지지 않을 수 있는 개연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다양하고 복잡해지면 오히려 허점이 생깁니다. 아는 사람만 교묘하게 쉬운 길을 택할 수도 있고 악의적으로 특정 수험생에게 편의를 봐주더라도 표가 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선∙후배 기자와 “이럴 바에는 차라리 예전의 학력고사 시절로 돌아가는 게 낫지 않아?”라는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다시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는 얘기도 나왔지만 지금의 대입 체계에 대한 비판 여론은 기자의 시각에서도 학부모의 시각에서도 매우 높았습니다. 우리 교육이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현재 우후죽순처럼 솟아나오고 있는 갖가지 미사여구로 치장된 교육 관련 구호가 아니라 그 결과만 봐야 합니다. 서울의 금천구와 중랑구 두 곳은 지난 5년 동안 서울대 진학자 수가 10명을 넘긴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합니다. 중랑구의 인구는 41만 8,341명으로 강남구 인구 57만 8,862명의 72%지만, 올해 서울대 신입생 수는 7명으로 강남구 출신 신입생 248명의 2.8%에 그쳤습니다.
부에 따른 대학 입시의 차별적 결과는 ‘지금 우리가 정말 나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정말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왜곡을 바로잡아야 할 사람들이 이 왜곡의 잠정적 수혜자가 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겁니다. 부자일수록, 권력에 가까울수록 현재의 대입 수시전형에서 받게 되는 이득이 큽니다. 학력고사점수만으로 대학 입시의 당락이 결정되는 시대였다면 정유라, 장시호 같은 경우가 절대로 생기지 않았을 겁니다. 대학 수시 전형은 스펙과 자금의 싸움입니다. 정유라가 "돈 없고 힘 없는 네 부모를 원망해."라고 얘기한 것은 절대로 그냥 나온 말이 아닙니다. 이들을 보며 열패감에 젖었을 다른 선량한 학생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그리고 이들을 선발하면서 탈락시켰던 다른 경쟁자들의 인생은 누가 보상해 줘야 하나요?
그런데 지금 교육부는 물론이고 각 시도 교육청의 현안을 보면 뜬구름만 잡고 있습니다. 교육부는 교육과정 개정을 준비하고 있는데 ‘입시 위주의 교육이 아닌 진정한 교육’을 위한 과정으로 개정하려고 하고 있다고 하면서 이를 홍보하기 위해 1억 원의 협찬금을 들여 방송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입시 위주의 교육이 아닌 진정한 교육’은 필자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30여년 전에도 무수히 들었던 얘기입니다. 30년 동안 달라진 게 근본적으로 없다는 반증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제대로 된 교육은 고사하고 입시관리만이라도 제대로 했으면 좋겠습니다.
고 3 때 17일만 출석한 정유라가 무사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대에 특혜입학을 했는데, 학사관리의 최종 책임이 있는 서울 교육청에서는 문제가 표면화되자 마치 자신들은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듯, 조희연 교육감이 직접 나서서 감사결과를 발표하는 촌극을 보여줬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 교육을 혼자 다 책임지는 것처럼 전국 방송을 통해 홍보하는 경기도 교육청의 이재정 교육감은 초∙중∙고등학교 등교 시간을 혁신적으로 9시로 옮기더니, 도내 고등학교의 야간 자율학습을 폐지하고 예비대학 프로그램을 만든다고 야단법석입니다. 교육은 백년대계인데 교육감이 바뀔 때마다 이리저리 흔들립니다. 그리고 그러한 흔듦의 목적이 순수한 교육적 목표가 아닌 정치가로 변한 교육감과 그를 도와서 선거에서 힘이 되어준 주변 사람들의 이익과 재선을 위한 것으로 보일 때가 많습니다. 필자의 상식으로 교육감을 TV에서 보게 되는 경우는 그가 범죄행위를 저질러서 검찰에 출석할 때 외에는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육을 정치적 목적으로 풀어내려고 했기 때문에 정유라, 장시호라는 괴물을 만든 것입니다.
지금은 근원적인 처방이 필요한 때입니다. 땅에 떨어진 입시제도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다른 어떤 혁신적 교육과정을 만드는 것보다 더 교육적으로 시급합니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어느 누구도 제2, 제 3의 정유라, 장시호가 없을 거라고 확신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리사욕으로 망가져버린 교육과정과 입시제도를 개선하는 데 진보와 보수 할 것 없이 머리를 맞대고 풀어내야 합니다. 지금 우리 교육은 걷지도 못하면서 춤을 추고 있는 꼴입니다. 며칠 전 수능 시험을 본 수험생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어른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펌] / 필자소개; 박상도(SBS 아나운서) / 2016년 11월 23일 (수) 02:25:39
실용과 도덕 어우러진 동이문명 집합처
중국 전통 지리 개념에서 산서(山西)와 산동(山東)의 이름은 자주 등장한다. 중국 동북부 지역의 양쪽 경계가 확연하게 갈라지는 지층이기 때문이다. 멀리 서쪽에서 다가오는 황토고원(黃土高原)은 남북으로 약 400㎞에 걸쳐 흐르는 태항산맥(太行山脈)에 막혀 발길을 멈춘다.
이 산맥이 바로 서북부 황토고원의 지형과 그 동쪽으로 펼쳐지는 드넓은 화북(華北)평원의 경계선이다. 그 서쪽이 바로 산서, 동쪽은 보통 산동으로 일컬었다. 산서는 지금 중국 발음으로 ‘산시’라는 이름을 달고 성(省)으로 존재한다. 그에 비해 산동은 원래 태항산맥 동쪽의 광범위한 지역의 지칭이었다가 결국 지금 우리가 여행하는 ‘산둥’의 이름으로 좁혀졌다.
산둥은 한반도와 가깝다. 따라서 중국 진출 우리 기업이 가장 많다. 그러나 원래 이곳을 지칭했던 대표적 이름은 齊魯(제로)다. 춘추전국시대 지금 산둥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제(齊)나라와 노(魯)나라를 합쳐 불렀던 명칭이다. 2014년 현재 인구는 9784만 명, 경제 규모로는 중국 전체 3위다.
황허 지역과 다른 동이 문화
신석기 시대에 이미 서부 황허(黃河) 지역과는 다른 문명의 요소를 키웠던 곳이다. 이곳의 바탕을 이야기할 때 중국 학계가 공통적으로 꺼내는 말이 동이(東夷)다. 일찌감치 중원과는 다른 동이족이 거주하며 독특한 문화를 형성했다는 얘기다.
중원의 영향이 미치기 시작한 때는 서주(西周 BC1046~771) 무렵이다. 우리가 잘 아는 강태공(姜太公)이 산둥의 동쪽, 주(周)나라 왕실 주공(周公)의 아들이 산둥의 서쪽에 분봉(分封)을 받았다. 그로써 동쪽은 제(齊), 서쪽은 노(魯)나라가 들어섰다. 산둥의 본래 이름은 여기서 나왔다.
공자의 고향이자 노나라 수도였던 취부시에 있는 공자의 사당(공묘). 공묘는 중국 전역에 수천 개 있지만 이곳은 기원전 478년에 세워진 최초의 공묘다.
그러나 원래의 바탕인 동이의 전통은 강했다. 제나라와 노나라는 그런 동이의 문화를 근간으로 삼아 독특한 인문을 이룬다. 두 나라는 중국 인문의 형성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위상을 차지한다. 먼저 제나라는 ‘부국강병(富國强兵)’이라는 국가 통치적 지향이 가장 이르게 성숙한 곳이다. 제나라의 환공(桓公)과 그의 명 파트너인 관중(管仲)이 이곳에서 부국강병의 지향을 처음 선보였다. 아울러 커다란 성공을 거뒀다. 부국강병은 달리 설명이 필요 없을 수 있으나, 원래의 출발점에서는 “나라가 부유해야 국방력도 강해진다”는 논리였다. 요즘에는 우리가 이 성어를 쓰면서 ‘부국’과 ‘강병’을 동렬(同列)의 요소로 인식하고 있지만, 원래는 ‘부국’이 ‘강병’의 선결(先決) 조건이었다는 얘기다. 아무튼 환공과 관중은 이를 충실히 집행한 사람들이다. 부국강병의 꿈은 중국 역사에 등장한 통치자들의 일관된 꿈이었으며, 그 점은 지금의 집권 공산당 또한 마찬가지다.
'백가쟁명' 화려한 사상의 산실
그 제나라 수도는 직하(稷下)라는 곳이었다. 지금의 쯔보(淄博)라는 도시다. 이곳에 제나라가 운영한 학교가 있다. 직하학궁(稷下學宮)이다. 중국인 표현을 빌리자면 ‘세계 최초의 대학’이다. 성악설(性惡說)을 주창한 순자(荀子)가 세 번이나,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총장’을 지낸 중국 고대 학문의 요람이었다.
백가쟁명(百家爭鳴)이라는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화려한 지적인 전통이 이곳에서 비롯했다는 점에 많은 중국학자가 동의한다. 황제(黃帝)와 노자(老子)의 전통을 이은 황로(黃老)사상을 근간으로 매우 실용적인 학문을 연마했던 곳이다. 그로써 제나라는 실용에 근간을 둔 경세(經世)의 학문을 연구하면서 부국강병의 방도를 모색했다.
그 서쪽의 노나라는 국력을 크게 떨치지는 못했으나 중국 인문에서 가장 우뚝한 인물을 하나 키워냈다. 바로 공자(孔子)다. 이 노나라는 제나라가 실용적인 경세의 학문 전통을 키운 데 비해 윤리와 도덕을 바탕으로 삼은 예치(禮治)의 인문 전통을 빚었다. 공자는 그런 전통을 체계적으로 승화시킨 인물에 해당한다.
부국강병의 경세를 위한 학문 전통, 윤리와 도덕을 중시하는 인문 전통이 모두 담긴 곳이 오늘의 중국 산둥이다. 양산박(梁山泊) 108명 두령이 활약했던 《수호전(水滸傳)》의 스토리도 이곳에서 영글었다. 실용적인 사상에 윤리와 도덕의 전통, 게다가 상무(尙武) 기질까지 갖춘 중국 속 동이 문명의 집합처가 산둥이다.
[폼] / 출처; 한국경제신문 / 유광종(중국인문경영연구소장) / 2016-11-21 22:52:43
56억 원짜리 드레스
‘세기의 포주’가 있다. 지난해 92세로 숨진 페르낭드 그뤼데다. 마담 클로드로 통한 그녀는 파리에 고급 윤락업소를 열어 각계 거물들을 주무른 것으로 전해진다. 고객 명단엔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도 들어 있었다. 그래서 ‘세기의 포주’다.
소문난 바람둥이였던 케네디가 마담 클로드의 업소만 기웃거렸을 리 없다. 백악관 일정은 점심 무렵부터 오후 3∼4시까지 낮 시간대가 공백으로 남기 일쑤였다. 케네디가 수영장에서 사생활을 즐긴 시간대다. 경호원들은 수영장 접근을 엄금했다. 미모의 낯선 여성들만 빼고는. 경호국 요원들은 훗날 케네디가 매춘부들을 줄줄이 만났다고 증언했다. 백악관 외부에 있을 때도, 내부에 있을 때도.
케네디의 부친 조지프는 여성 편력으로 유명했다. 무성영화 시대의 스타였던 글로리아 스완슨과의 불륜 관계는 세상에 모를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조지프 스스로 떠들고 다녔으니 그럴밖에. 부전자전이어서일까. 아들 케네디도 할리우드 여배우로 여성 편력의 정점을 찍었다. 바로 섹스심벌 메릴린 먼로였다.
먼로는 위험한 상대였다. 불륜 관계가 전면 공개되면 대통령 도덕성에 흠집이 날 개연성이 다분했으니까. 호색 기질을 잘 아는 최측근들조차 먼로를 멀리하도록 강권했다고 한다. 케네디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1962년 45회 생일을 앞두고 뉴욕 매디슨스퀘어가든에서 열린 행사에 참석해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도록 먼로를 초청하는 무리수도 뒀다. 참모진은 진땀을 흘렸다고 한다.
먼로가 그 행사에서 걸쳤던 드레스는 ‘해피 버스데이 미스터 프레지던트 드레스’로 불린다. 이 드레스가 최근 로스앤젤레스 경매에서 약 56억원에 낙찰됐다. 거액을 낸 구입자는 ‘믿거나 말거나 박물관’이다. 박물관 측은 “20세기 문화에서 가장 유명한 옷”이라며 “미국 정치사에서도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그렇게 보면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역시 꿈보다 해몽이다.
어쩌면 최순실 씨가 골랐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의상도 먼 훗날 ‘한국 정치사에 중요한 의의’ 운운하는 해몽에 힘입어 비싼 값에 팔릴지도 모를 일이다. ‘세기의 의상’으로 박물관에 걸릴지도 모르고….
[펌] / 출처; 세계일보 / 이승현(세계일보 논설위원) / 2016-11-22 22:10:01
공직자의 수첩
참여정부 시절 때다. 어느 날 국무회의 참석 멤버이던 한 고위공직자가 자신의 수첩을 꺼내 보이며 재미난 얘기를 해 줬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야당의 정치 공세로 불편한 심기였는데, A총리가 “대통령 힘내시라”며 국무위원들의 박수를 유도하는 ‘아부성’ 발언을 했단다. 그는 회의 석상에 있었던 일들을 수첩에 적어 놓았다며 훗날 보여 주겠다고 했지만 아직도 그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다.
누가 정권의 실세인지도 국무회의 풍경을 전해 들으면 알 수 있다. 대통령의 발언 중 누군가가 “그게 아니고요”라며 말을 자른다면 그가 ‘실세’다. 대통령이 말하는 도중에 끼어들어 갈 정도면 대통령과 보통 막역한 사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명박 대통령 시절 B장관이 그런 경우였다. 그는 장관 이후에도 승승장구했다. 이런 얘기도 국무회의에 참석했던 한 공직자의 수첩에서 나왔다.
어느 정권에서나 대통령이 주재하는 각종 회의에서 공직자들의 손은 대통령의 발언을 받아 적느라 바쁘다. 공직자 중 일부는 퇴임 후 낸 책을 통해 대통령과 국무위원의 언행 등 당시 정국 상황 등을 드러내 보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열심히 쓴 메모들을 개인의 ‘추억’으로 간직하는 경우가 많다.
얼마 전 회고록을 낸 송민순 전 외교부 장관은 전자다. 참여정부가 유엔의 북한 인권결의안 표결에 기권한 것과 관련해 북한과 사전 교감이 있었다는 내용의 그의 회고록은 정치권에서 논란이 됐다. 그가 책을 쓰면서 참고한 자신의 메모만도 수백 개에 이른다고 한다.
‘역사의 기록’이 될 수 있는 공직자의 수첩이 최근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과 관련해 박근혜 정부의 비정상적인 정국 운영을 입증하는 증거물로 ‘진가’를 발휘하고 있다. 유족이 공개한 고(故)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비망록에는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2014년 ‘정윤회 문건’ 유출 파동 때 “불만, 토로, 누설은 쓰레기 같은 짓”, “조기 종결토록 지도”, 비판적인 보도에는 “제재는 민정” 등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고 적혀 있다.
다이어리 형태의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의 수첩에는 미르·K스포츠 재단 설립의 전 과정이 기록돼 있다고 한다. 박 대통령이 모금 액수, 재단의 임원진, 사무실 위치 등까지 세세하게 지시한 것을 그는 빠짐없이 적어 놓았다. 박 대통령이 공공기관뿐 아니라 포스코, KT 등 민간 기업 임원에 특정인을 보내라는 지시와 최씨의 개인 광고회사에 기업 광고를 몰아주라는 지시도 포함돼 있다.
대통령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하고자 깨알같이 받아썼던 ‘충신’의 수첩이 이제 자신은 물론 박 대통령의 범죄 행위의 증거가 되는 아이러니를 빚었다. ‘수첩 인사’로 흥(?)한 이 정부가 결국은 수첩에 발목 잡힐 줄은 ‘수첩 공주’로 불린 박 대통령은 꿈에도 생각 못 했을 것이다.
[펌] / 출처: 서울신문 / 최광숙(서울신문 논설위원) / 2016-11-22 21:26
‘경복궁(청와대) 설계자’ 정도전의 속뜻
필자가 근무하는 사무실에서는 북악산 아래 청와대와 경복궁이 한눈에 들어온다. 서울은 어디에 내놔도 꿀리지 않는 대명당이다. 그런데 북악산 자락만큼은 자릿값을 못 하는 것 같다. 주말마다 촛불시위가 열리는 세종대로와 청와대 주변을 바라보노라면 ‘경복궁 설계자’ 삼봉 정도전(1342∼1398)이 떠오른다. 청와대는 경복궁의 ‘부속 작품’이니 정도전도 요즘 마음이 편치 않을 듯하다.
600여 년 전, 조선 개국 때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개국공신 정도전은 조선의 새 도읍지로 한양(지금의 서울보다는 좁은 한양도성)이 결정되자 북쪽의 북악산 아래를 궁궐터로 지목했다. 이유는 하나. ‘제왕(궁궐)은 북쪽에 앉아 남쪽을 바라봐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 논리는 유학자 정도전이 규범으로 삼은 ‘주례·고공기’ 등의 도성건축법과도 맞아떨어진다. 정도전은 북악산을 주산(主山·건축물의 배경이 되는 산)으로 삼아 전조후시(前朝後市·앞은 조정, 뒤는 시장)와 좌묘우사(左廟右社·왼쪽은 종묘, 오른쪽은 사직단)라는 유교적 이상도시를 만들려 했다.
먼저 경복궁 근정전을 중심으로 남쪽(앞쪽)인 주작대로(세종대로)를 따라 육조(六曹)거리 등 중요 행정기관을 배치했다. 그런데 평지 위에 만든 중국의 도성 체제를 따르려다 보니 문제가 생겼다. 궁궐 뒤가 북악산이어서 시장을 만들 수 없었다. 대안으로 종로와 청계천 일대에 시전과 육의전 등을 만들었다. 궁궐 좌우의 산들도 조화가 무너져 좌묘우사 원칙이 민망해졌다. 종묘가 있는 동쪽(왼쪽)의 낙산 줄기(청룡)는 초라하고 짧은 반면, 사직단이 있는 서쪽(오른쪽)의 인왕산 줄기(백호)는 웅장하면서도 길었다.
당시에 다른 주산론이 없었던 게 아니다. 하륜은 무악(毋岳)을 주산으로 삼자고 했다. 그는 도참설과 물길을 중시하는 중국 풍수설을 근거로 한강과 가까운 무악산 아래(지금의 신촌 일대)가 길지라고 주장했다. 태조도 직접 무악을 둘러볼 정도로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정도전이 “어찌 술수(術數)하는 자의 말을 믿느냐”고 반대하는 바람에 무산됐다.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장했다. 서쪽 인왕산 자락에서 동쪽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궁궐을 짓자는 것. 정도전은 이 역시 “임금이 동향(東向)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며 거부했다. 이에 무학은 “200년이 지나면 내 말을 생각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한양 도성도(필사본·서울대 규장각 소장)
무학과 정도전의 다툼을 기록한 ‘오산설림초고(五山說林草藁)’의 저자 차천로(1556∼1615)는 무학의 예언처럼 200년 뒤 임진왜란으로 궁궐이 불탄 일 등을 거론하며 정도전을 비난했다. “정도전은 무학의 말이 옮음을 알지 못한 게 아니었다. 그는 다른 마음이 있어서 듣지 않은 것”이라고 공격했다. 왕권(王權)을 약화시키고 신권(臣權)을 강화하려는 정도전의 욕심 탓이라는 것이다.
사실 정도전의 북악 주산론은 의심스러운 점이 적지 않다. 첫째, 정도전이 근거로 삼은 ‘제왕=남향’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중국 서한(西漢) 시대의 수도 장안성의 경우 제왕이 남향하는 시기도 있었고, 동향하는 시기도 있었다. 둘째, 무학의 주장처럼 인왕산을 주산으로 하면 북악산(청룡)과 남산(백호)이 좌우 균형을 이뤄 한양의 지기(地氣)를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다. 셋째, 그는 도참설과 풍수를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애써 부인하거나 외면했다.
그러다 필자는 1년 전쯤 경북의 한 지역신문에서 어떤 기사를 읽고 무릎을 쳤다. 정도전이 궁궐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는 것이다. “하륜과 자초(무학대사)가 꼽은 곳이 길지(吉地)라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무악 아래는 후학들을 위해 숨겨두어야 했고, 종로는 백성들의 생계를 위해 써야 했다. 그러자니 임금은 백악산 아래밖에 없었다. 용상의 자리는 백성을 생각하느라 잠을 못 자고, 백성을 바라보느라 자손과 형제도 버려야 한다. 그러니 비수가 날아다니는 터에 들어간들 어떻겠는가.”
정도전을 위한 변명처럼 들리는 말이다. 조선 말기 고종이, 이방원의 미움을 받아 죽은 정도전을 신원(伸寃)시켜 준 이후 경상도와 강원도의 촌로들 사이에 전해진 얘기라고 한다. 사실이라면 정도전은 선지자였다. 오늘날 무악산 아래는 연세대 이화여대 홍익대 서강대 등 명문 사학이 자리 잡고 있고, 종로와 중구 일대는 지금도 왕성한 상업지가 아닌가.
이 구전을 채록한 작가는 ‘진정한 지도자는 경복궁(청와대 포함)의 비수 정도는 이겨내야 한다’는 게 정도전의 감춰진 뜻이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경복궁은 지도자가 권력을 남용하고 탐욕을 부리는 순간 비수로 작용한다. 반면 국민을 받드는 이에게는 세계적인 지도자가 되도록 도와주는 축복의 터이기도 하다. 권력자들이 청와대 터를 두려워해야 할 이유다.
[펌] / 출처; 동아닷컴 / 안영배(동아일보 전문기자·풍수학 박사) / 2016-11-23 03:37:10
나라가 기우는 때
흥선 대원군 부친 남연군의 묘를 도굴해 패륜 외국인의 대명사가 된 독일 상인 에른스트 오페르트(1832∼1903). 그는 1860년대에 세 차례 조선을 방문했을 때 보고 들은 것을 책(국내 번역서는 『금단의 나라 조선』)으로 남겼다.
그는 책에서 이미 접해 본 중국·일본과 조선을 비교하기도 했는데 “조선 사람들의 산업 기술과 기량은 아시아의 다른 민족들에 비해 훨씬 못 미친다. 이렇게 된 결정적 이유는 억압적 정치 체제에 기인한다. … 현재의 정치 체제가 바뀌지 않고서는 어떠한 발전도 이룰 수 없다”고 악평했다.
그는 “조선에는 총신(특별히 총애받는 신하)이라는 흥미로운 존재가 있는데 그들의 영향력은 왕에 맞먹는다”며 특정 세력의 국정 농단을 지적했다. 국가의 사정(司正) 업무에 대해서는 “백성들의 행복을 위해 관리들에게 행해지던 감시가 작금에 와서는 정부 자체를 보전하기 위해 불만을 표시하고 있는 백성들에 대해 행해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오페르트는 “‘간관(諫官·왕에게 직언하고 비판을 가하는 존재로 책에 묘사돼 있다)’이라는 관직은 단지 명목상으로만 존재한다”고 적었다. 그가 본 것은 40여 년 뒤에 망할 운명에 놓인 ‘헬조선’이었다.
정병석 전 코리아텍 총장은 지난달에 펴낸 책 『조선은 왜 무너졌는가』에서 양반들의 특권 독점, 권위적 행정, 착취적 조세제도를 조선 후기의 핵심 문제로 지적했다. 최근 김종인 의원이 잡지 인터뷰에서 관료 사회의 경직성, 대기업의 탐욕, 정치권의 무능을 국가 위기의 근본 이유로 꼽은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정 전 총장은 “과거(科擧) 제도는 교육열을 북돋우고 능력 중심의 관료제를 구현했다는 측면에서는 기여했다. 그러나 시험이 지나치게 관념적인 철학 위주였고, 실용적인 교육을 못함으로써 인적자원이 낭비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진단했다. 그는 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피로인(被虜人)’ 중 평민·천민은 대부분 조선으로 돌아가길 꺼렸다고 설명하며 일본에선 기술자로 대우받았고,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어 안정된 생활이 가능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천시받고 의식주도 기약 없는 조선으로 굳이 돌아갈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10만 명 안팎으로 추정되는 왜란 피로인 중 귀환한 이는 수천 명에 불과했다.
정 전 총장은 책 끝머리에서 이렇게 물었다. “국가 존망의 위기를 맞고도 책임을 묻거나 반성하지 않고 근본적 혁신을 못했던 조선의 전통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것인가.”
[펌] / 출처: 중앙일보 / 이상언(중앙일보 사회2부 부데스크) / 2016.11.23 00:34
사람 닮은 기이한 꽃
트럼프와 터랑푸
영어의 중국식 표현은 재미있다. 미국을 뜻하는 아메리카는 미리견(彌利堅), 맥도널드는 맥당노(麥當勞)이다. 순종은 선황 고종의 능(陵)에 전화기를 설치해놓고 곡(哭)을 하는 덕진풍(德津風) 문상을 했다. 텔레폰이 덕진풍이다. 미리견의 오바마 대통령은 오파마(奧巴馬)이다. 트럼프 당선자는 뭘까. 특랑보(特朗普) 또는 천보(川普)라고 쓰고 터랑푸, 촨푸로 읽는다.
중국 언론은 트럼프가 지난 2005년부터 중국에 터랑푸 상표권을 82건이나 출원했다고 전한다. 호텔·골프장 등 부동산과 서비스 제품이 대상이다. 대선 행보를 시작한 지난해에 40개 상표를 출원해 총 78건을 확보하고 있다. 2006년 11월 중국 정부는 영문 소문자 ‘trump’ 상표 등록을 거부했다. 2주 먼저 중국 사람이 선수를 쳤다. 8년 후 재심을 요청했지만 실패, 다시 베이징(北京) 중급인민법원, 고급인민법원에 연이어 소송을 제기했으나 또 실패. 지독해 보였던지 그를 상표 광인(狂人)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영문 대문자 ‘TRUMP’ 상표는 허용됐다. 대통령에 당선된 지 나흘 만이다. 중국 당국의 우호적 제스처였을까.
그는 중국을 ‘보호주의 정책과 사이버 도둑질로 미국을 약하게 만드는 나라’라고 규정하고 있다. 애플이 아이패드 상표권을 6000만 달러(711억 원)를 주고 매입하는 것을 소송으로 하겠다는 것이다. 미국이 수출품 20%를 사주는 데도 중국은 환율을 조작한다고 주장한다. 하루 수입 6억 원인 기업 사냥꾼 칼 아이컨 같은 전문 협상가들을 고용해 중국을 바꿔야 한다고 공언한다. 하지만 THC(트럼프 호텔 컬렉션)의 에릭 댄지거 CE0는 대선 유세 기간이던 지난 10월 중국 시장 진출 방침을 밝혔다. 20∼30개 도시에 트럼프 호텔을 짓겠다는 것이다. 차기 대통령은 중국을 옥죄고, 그의 소유 기업의 CEO는 시장 진출 확대를 천명하고…. 미국판 ‘최순실 게이트’라는 비판은 없을까.
미 연방법에 공무원 이해충돌방지 규정이 있지만, 대통령과 부통령은 예외다. 제한 없는 헌법적 공무 수행을 위해서다. 트럼프는 아버지에게 빌린 100만 달러(11억8000만 원)로 현재의 100억 달러(11조8000억 원) 규모 자산을 일궜다. 미국 언론은 물론 최측근인 루돌프 줄리아니 전 뉴욕시장도 “재산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며 백지위임을 촉구하고 있다. 퇴임 때 재산 규모가 얼마로 늘까. 벌써 궁금하다
[펌] / 출처; 문화일보 / 최영범(문화일보 논설위원) / 2016년 11월 22일(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