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사변의 소용돌이 속에서 현역 국회의원으로 피살되거나 납치 또는 행방불명된 사람만 30명이다. 그런데 이들에 대해서는 아무도 거론하는 사람이 없다.
6·25가 터지기 직전인 1950년 6월19일 2代 국회가 開院하여 공식적으로 제헌국회가 문을 닫았는데 2代 국회의원들은 활동을 시작한 지 1주일 만에 전쟁을 맞이했다. 2代국회는 6·25 남침사실을 듣고 이튿날 李承晩 대통령을 출석시켜 긴급 상황을 청취한 다음 6월27일 국방부 장관과 참모총장을 불러 긴박한 전선상황을 듣는다.
이때 두 국방의 주역은 『북한 괴뢰군이 남침을 감행했지만 용감한 국군의 반격으로 퇴각중이며 우리 군대 사기는 드높아 38선은 물론 평양까지도 마음만 먹으면 진격할 수 있다』고 코미디 같은 답변을 하는 것이다.
이에 고무된 국회는 유엔과 미국에 메시지를 보내기로 하고 「수도 死守 결의안」을 채택한다. 아무 정보도 갖고 있지 못한 국회가 허수아비 같은 국방부 장관과 참모총장의 세 치 혓바닥에 놀아난 것이다. 그러나 이미 포천을 지나 동두천을 점령한 인민군의 대포 소리는 의정부를 육박하고 있을 때여서 수도 死守 결의는 우스갯거리가 되고 말았다.
李承晩 대통령 역시 방송을 통하여 수도 死守 의사를 분명히 하면서 민심을 가라앉히려 했지만 시시각각으로 다가서는 침략군의 도도한 물결을 바라보면서 6월28일 대전으로 정부를 이전한다. 이런 경우 최우선적으로 정부와 함께 떠나야 하는 기구가 국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단 한 마디 전화통보도 없이 자신들의 짐만 챙겨 도망갔고 6월28일 한강다리를 폭파시키고 만다.
수도 死守를 결의한 국회의원들은 서울이 유린되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할 수 없었다. 대통령이 수도 死守 의지를 밝히고 있고 국방부장관과 참모총장이 사리원에서 점심을 먹고 평양에서 저녁을 먹을 수 있다고 큰소리 탕탕 치는데 믿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그러나 한강다리는 이미 끊겨 나룻배조차 구하지 못한 사람은 한강을 건널 수 없었다.
제헌의원 元長吉(원장길)씨를 만나 당시 상황을 물어봤다.
─6·25 때 어디 계셨으며 어떻게 한강을 건넜습니까.
『서울에 살았는데 6월28일 광나루 다리를 건너 한강을 건넜지요. 한강 인도교가 끊겨 피난민들이 아비규환이었는데 나는 다행히 광나루로 갔기 때문에 건널 수 있었습니다』
─제헌의원이나 2代 의원들은 특별한 신분으로 보호를 받아야 하는데 정부에서 아무런 조치가 없었습니까.
『아무 연락도 받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국회에서는 수도 死守 결의를 하고 대통령은 방송으로 38선을 수복한다고 하는데 믿지 않는 사람이 잘못된 것이지요. 나도 하루 이틀 내려갔다 오면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광나루를 건넌 것뿐입니다』
2代 국회의원 210명 중 148명은 눈치 빠르게 피난길에 올랐지만 62명은 넋을 놓은 채 서울에 남아있다가 崔允鎬(최윤호), 金洪鏞(김홍용), 李鍾麟(이종린) 세 의원은 피살되고 만다.
27명의 국회의원은 북한으로 납치되거나 행방불명으로 분류되는데 그 중 24명은 납북자로 확인되나 3명은 지금까지 행방을 모른다. 서울에서 체포되지 않고 숨어 있다가 수복 후에 다시 복귀한 이는 32명인데 피난길에 원인불명으로 사망한 사람도 5명이나 된다. 부산 출신 崔元鳳(최원봉), 달성 權五勳(권오훈), 구례 李判烈(이판열), 공주 金明東(김명동), 연기 李肯鍾(이긍종) 의원 등이 그들이다.
1950년 12월8일 피난 국회에서는 국회의원 재적수에 관한 특별법을 통과시키고 있다. 이 법은 납북 또는 행방불명된 27명의 국회의원을 국회의원 在籍數(재적수)에서 제외하는 것인데 만약 그 중의 한 명이라도 그 당시 복귀했다면 그는 이미 국회의원의 정수에서 제외된 사실상의 제명자로서 더 이상 국회의원 신분을 가질 수 없는 입장이 되는 것이었다.
趙素昻·安在鴻·元世勳 등 피랍
국회의원 정족수 때문이라면 2代 국회에 한하여 개회 정족수를 줄이는 방법을 선택했어야지 그들의 신분에 불리한 결의를 한 것은 헌법을 위반한 중대한 과오가 있었다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戰時下 비상시라고 할지라도 국민이 직접 뽑은 국회의원을 대량으로 「재적수」에서 제외한다는 것은 권한 밖의 입법행위였다고 지탄받아야 마땅하다.
제2代 국회는 5·30 총선을 거쳐 6월19일 개원했다가 1주일 만에 6·25를 맞았다는 것은 앞서 살핀 바 있다. 의장에는 申翼熙(신익희), 부의장에 張澤相(장택상), 曺奉岩(조봉암)을 뽑지만 이듬해 張澤相이 국무총리가 되면서 金東成(김동성)으로 보강되고 다시 尹致暎(윤치영)으로 교체되어 1954년 5월30일 임기를 마친다.
184명의 정원으로 구성되었는데 북한으로 납치된 것으로 확인된 24명의 면면을 살피고 관심을 쏟는 것은 남아 있는 우리들의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한다. 그 중에는 가장 연세가 높아 開院의 사회를 맡았던, 33인 중의 한 사람인 서울 종로 출신 吳夏英(오하영) 의원도 있다.
상해임시정부 외교부장을 역임하고 서울 성북구에서 趙炳玉(조병옥)을 떨어뜨린 趙素昻(조소앙), 독립운동가로 한민당 총무였던 서울 중구 출신 元世勳(원세훈), 평양 출신으로 조선일보 사장·민정장관·국민당 당수를 역임한 평택의 安在鴻(안재홍), 대법관과 검찰총장을 지낸 이천 李宗聖(이종성), 보성전문 교수와 적십자사 부총재였던 장단 白象圭(백상규), 중국에서 신흥군관학교 교관으로 독립군을 양성한 서울 서대문 尹琦燮(윤기섭), 대법관 출신의 부안 崔丙柱(최병주), 독립운동가로 경제를 전공한 부산 金七星(김칠성), 경성의전을 나온 서천 丘德煥(구덕환), 경도제대 출신으로 논산소방서장이라는 이색적 직업을 거친 논산 金憲植(김헌식), 사범학교를 나와 대한교련 사무국장을 역임한 예산 朴哲奎(박철규), 상주농잠학교를 나온 상주 朴成宇(박성우), 변호사로 체신부 장관 출신의 남해 趙柱泳(조주영), 전주북중을 나와 면장으로 국회의원에 당선한 완주 朴榮來(박영래), 과도정부 입법의원인 서울 동대문 張連松(장연송), 일본 고베상고를 나온 진안 金俊熙(김준희), 명치대 법과를 졸업한 하동 李相慶(이상경), 경성법전을 나온 창령 辛容勳(신용훈), 建準(건준)요원으로 언론사 사장이었던 문경 梁在廈(양재하), 정읍농고를 나와 전북도 내무국장을 지낸 정읍 辛錫斌(신석빈), 대한식량영단 부이사장을 지낸 영천 曺圭卨(조규설), 경신중을 나와 광산군 지산면장을 지낸 광산 鄭仁植(정인식), 경성사범 출신의 용인 柳驥秀(유기수) 의원 등이 지금까지 확인하고 있는 拉北 국회의원이다. 물론 행방불명으로 되어 있는 세 사람도 拉北되었거나 피살되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생존 제헌의원 네 명
제헌의원의 총수는 209명이다. 그 중에서 오늘까지 한국에 생존해 있는 분은 네분이다. 제헌국회의원동지회를 구성하고 서울 효자동 인근에 사무실도 유지하고 있으며 강릉에서 당선한 元長吉(원장길)의원이 회장을 맡아 아직도 건강한 몸으로 1주일에 두 번씩 출근하고 있다.
여든아홉의 고령에도 각종 행사에 빠지지 않는다. 元회장보다 한 살 아래인 옹진출신 金仁植(김인식) 의원도 아직 원기왕성하다. 여든여섯의 김포 출신 鄭濬(정준) 의원은 도덕 재무장 운동으로 더 알려진 분이다. 그는 3, 4, 5代까지 연임한 분인데 건강이 좋지 않다고 하며 여든하나의 용인 출신 閔庚植(민경식) 의원 역시 거동이 불편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금까지 파악한 바에 따르면 拉北된 제헌의원은 모두 54명이다. 그 중에는 국회프락치 사건으로 연루되었던 6명의 의원들이 있고 그들은 拉北이 아니라 자진월북이라는 설도 떠돌고 있기 때문에 전원이 「납북자」라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따를 수 있다. 그러나 일단 「拉北」이라고 표현하기로 한다.
이들 중에는 2代 국회에도 진출한 분이 5명 있는데 2代에 삽입하지 않고 제헌의원에 범주에 넣었다는 것도 밝혀둔다. 여기서 우리는 54명의 출신구와 간단한 경력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기록의 순서는 무순이지만 생년월일을 기준으로 삼았으며 6·25 사변중 피살이 확인된 분은 「피살」로 밝혔다.
◇拉北 제헌의원 54명
金東元(김동원) 용산. 평양대성학원 설립, 제헌국회부의장, 2代의원.
徐廷禧(서정희) 포천. 한문 수학, 관립 영어학교 졸, 항일독립운동.
金敎賢(김교현) 보은. 수원농림 졸, 면장, 중학교장.
白寬洙(백관수) 고창. 경성법전, 와세다大 졸, 동아일보 사장, 2·8 독립선언 주도.
吳基烈(오기열) 진안. 한문수학, 조선독립군청년단의용군 조직, 6·25 중 피살.
吳澤寬(오택관) 옹진. 평양신학교, 목사, 독립운동.
金若水(김약수) 동래. 경남공업학교, 일본대, 吉林軍政暑(길림군정서) 군사위원, 부의장.
金禹植(김우식) 달성. 北京大 졸, 기독교 장로, 중학교장.
李康雨(이강우) 진주. 日本大, 3·1 운동 참가, 진주고보 교원, 광업.
尹錫龜(윤석구) 군산. 예수교 장로, 군산여고 교원, 한독당, 체신부 장관.
金尙德(김상덕) 고령. 와세다大 정경학부, 경신중학교장.
洪熺鐘(홍희종) 김제. 한문 수학, 조선민족 청년단.
金孝錫(김효석) 합천. 明治大(명치대) 법학부, 은행지점장, 내무부 장관.
趙重顯(조중현) 장단. 보성전문 졸, 광업.
金庚培(김경배) 연백. 평양 대성중 졸, 독립운동, 연백군수, 2代 의원.
鄭光好(정광호) 光州(광주). 明治大, 在東京 조선청년단 대표, 광주시장.
具中會(구중회) 창녕. 보성중, 와세다고등사범 영문과 졸, 목포여고·마산중 교장. 큰 아들 具滋鎬는 민추협 대변인 역임.
金雄鎭(김웅진) 수원. 수원농림 졸, 반민족행위특별법 기초위원장, 2代 의원.
金長烈(김장열) 완도. 日本大 정치학부, 나주경찰서장, 경찰청 총무과장.
韓錫範(한석범) 부산. 부산상업 졸, 독립운동, 부산 서부치안대장.
姜己文(강기문) 산청. 일본 오사카大 상과 중퇴, 대한건설회사장.
宋昌植(송창식) 이천. 한문 수학, 면장, 대한독립촉성국민회.
韓巖回(한암회) 상주. 양정고보 졸, 九州帝大(구주제대) 농학부, 上海중화일보하남지국.
張炳晩(장병만) 칠곡. 明治大, 농업, 建準 참여, 대한독촉국민회.
趙在勉(조재면) 부안. 전주농림 졸, 부안군수, 독촉국민회, 6·25 중 피살.
金仲基(김중기) 장흥. 광주사범 졸, 교사, 장흥읍장.
趙憲泳(조헌영) 영양. 대구고보, 와세다大 고등사범 영문학부, 한약종상, 2代 의원.
趙玉鉉(조옥현) 순천. 上海 南京大 졸, 대한독촉국민회.
趙鍾勝(조종승) 단양. 소학교 졸, 면장, 2代 의원.
金景道(김경도) 함양. 사범학교 졸, 교원, 함양 석산면장, 대한독촉국민회.
吳宅烈(오택열) 영덕. 소학교 졸, 영덕주조회사 사장, 입법의원.
朴鍾煥(박종환) 청도. 일본 中央大 법과, 정미업, 美 군정청 고시과장.
吳龍國(오용국) 제주. 중졸, 입법의원.
申性均(신성균) 전주. 와세다大 전문부, 곡성 면장, 한독당, 전북위원장.
李周衡(이주형) 밀양. 정진학교 설립 운영, 밀양중교장, 독촉국민회.
權泰羲(권태희) 김천. 숭실전문, 일본 京都 同志社大 신학교, 목사, 김천중교장.
金永東(김영동) 고창. 고창고 졸, 자동차판매업, 조선전업 근무, 교체위원장.
李文源(이문원) 익산. 전주사범, 한독당 조직부장, 국회프락치사건으로 징역 12년 언도받음.
李 錫(이석) 경주. 휘문고보 졸, 明治大법문학부, 대학독촉국민회.
崔錫洪(최석홍) 영주. 대구상업 졸, 영주금융조합, 대동청년단.
金德烈(김덕열) 양주. 중앙고보, 일본中央大, 면장, 美 군정청 관재처 감찰관.
朴允源(박윤원) 남해. 여수 수산중 졸, 만주 대동대 졸, 技士생활 9년.
趙炳漢(조병한) 문경. 대구고보 졸, 東京帝大 법학부 졸.
柳聖甲(유성갑) 고흥. 日本大 법학부, 동국대 강사, 6·25 중 피살.
李萬根(이만근) 청원. 청주고보 졸, 경찰청 부청장.
辛相學(신상학) 김해. 소학교 졸, 상업, 민족청년운동, 독촉국민회.
李龜洙(이구수) 고성, 소학교 졸, 신문기자생활 4년.
盧鎰煥(노일환) 순창. 배재고보 졸, 보성전문 상과 졸, 국회프락치사건에 연루.
黃潤鎬(황윤호) 진양. 진주중학 졸, 면장, 국회프락치사건 징역 6년 언도받음.
金用鉉(김용현) 무안. 중앙중 졸, 일본 中央大 법학부, 한민당.
金沃周(김옥주) 광양. 양정고보 졸, 와세다大 법과, 국회프락치사건으로 징역 6년 언도받음.
金秉會(김병회) 진도. 소학교 졸, 보통문관시험 합격, 목포일보, 대한노총.
崔泰奎(최태규) 정선. 東京 전수대 3년수료, 대동신문 기자.
裵重赫(배중혁) 봉화. 東京 태동중 졸, 목재회사 근무, 대동청년단.
生死확인부터
지금까지 국회는 무얼 하고 있었는지 그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5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국민의 대표자가 한두 사람도 아니고 78명이나 북한 땅에 강제로 납치되어 있다. 그 동안 수없이 진행된 남북회담時 정부측에 한 번이라도 이 문제를 정식으로 거론했는지 묻고 싶다. 국제의원연맹(IPU) 총회가 평양에서 열렸을 때 한국의 국회의원들도 참석한 바 있는데 공식적인 문제제기조차 없었다.
일반인들도 생사를 확인하고 상호 왕래하며 상봉의 기쁨을 누리고 있는데 잊혀진 국회의원이라고 하더라도 최소한 生死는 확인하고 있어야 그 가족들에게 조그마한 위로가 되지 않을까. 타계하신 분은 유해를 인수하여 국립현충원 등에 모셔야만 正道(정도)다.
정기국회에서 「납북 국회의원 생사확인의 건」을 정식안건으로 채택하여 가장 기초적인 자료부터 마련한 다음 국회 차원의 남북문제 접근 자세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 순서임을 건의한다.●
첫댓글 중3 여학생이 어찌 이런걸 알수있을까?
더러운놈들...
하루빨리 생사확인을 빕니다..
안타까운 역사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