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서구 마곡동에 있는 조선시대 대표 화가 "겸재 정선미술관". 천원짜리 지폐 앞면은 조선 중기의 학자 "퇴계 이황"이며 뒷면에는 겸재 정선(1676 ~ 1759)이 그린 산수화 "계상정거도"다. 삼원 삼재 중 한사람으로 삼원에 속하는 사람은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오원 장승업"이고, 삼재에 속하는 사람은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 "공재 윤두서"다. 정선은 1676년 서울에서 태어나 김창집의 천거로 20살에 도화서 화원이 되었으며, 1721년 46세에 하양현감(현 경산시장)을, 1734년 청하현감(현 포항시장) 재직시 59세때 "내연삼용추도"를 그렸으며, 1740년 65세때 부터 1745년까지 양천현령(현 양천구청장)으로 근무하면서 "경교명승첩", "양천팔경첩"등 불멸의 작품을 남겼다. 1747년 72세때 금강산을 유람하고 "해악전신첩"을 제작하였다. 1759년 84세 사망.
벚꽃이 만개한 겸재 정선미술관.
겸재 정선 기념실.
겸재 정선 1720년경 작품 "자화상, 독서여가".
겸재 정선 1711년 작품 "해산정도(海山亭圖)". 해산정은 강원도 고성에 있는 정자로 이곳에서는 동해바다와 금강산 모두를 조망할 수 있다고 하여 "해산정"이라 부른다.
겸재 정선 1719년 작품 "추경산수도(秋景山水圖)". 정선이 44살 그린 사계산수도첩에 수록된 그림으로 가을날의 산수화 그림이다.
겸재 정선 1746년 작품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 퇴계 이황 생존 당시 경북 안동의 도산서원을 그린 그림이다.
겸재 정선 1747년 작품 "금강내산도(金剛內山圖)". 금강산 내금강 경치를 위에서 내려다본 시점으로 그린 그림으로 장안사에서 정양사에 이르는 사찰이 연이어 있다.
겸재 정선 "단발령망금강도(斷髮領望金剛圖)". 이 그림은 단발령에서 바라본 금강산 그림이다. 단발령은 금강산 서쪽 천마산에 있는 고개인데 전설에 따르면 신라 마의태자가 아버지 경순왕에게 하직하고 개골산(皆骨山)으로 입산할 때, 이 고개에서 부처의 도움을 받고자 멀리 금강산의 여러 봉우리를 바라보며 출가를 다짐하는 뜻에서 삭발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겸재 정선 "장안사도(長安寺圖)". 금강산 4대 사찰 중 하나인 장안사를 그린 그림으로 특히 만천교를 강조하여 그렸다. 단발령을 넘은 여행자들은 이곳에서 하룻밤을 유숙하곤 하였다.
겸재 정선 "백천교도(百川橋圖)". 백천교는 금강산과 고성의 길목에 위치하며 금강 외산의 물길이 만나 바다로 흘러가는 곳이다. 산행중 계곡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정선 일행, 그들을 기다리는 가마꾼 승려들과 마부들의 모습을 그렸다.
겸재 정선 1734년 작품 "금강전도(金剛全圖)". 금강전도는 내금강에 있는 "혈성루"라는 정자(누각)를 중심으로 금강산 전체를 그린 그림인데, 혈성루는 거기에서 내려다 보는 금강산의 경치가 매우 좋아 금강산의 전망대 역할을 했다. 하지만 6.25전쟁때 불타 버렸다. 옛날 사람들은 죽기 전에 한 번이라도 금강산을 다녀오면 지옥에 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돈이 많이 들어 갈 수 없었으며 그 대신 금강산 그림을 집에 걸어 놓고 지옥에 가지 않도록 바라는 사람들이 많았다. 겸재 정선은 평생동안 여러번 금강산을 여행했으며 금강산 그림만 해도 100점이 넘는다. 겸재 정선은 어릴때부터 그림에 재주가 많았으며 20살때 도화서 화원이 되었고 경상도 청하현감(현재 포항 지역)을 지내기도 했다. 그는 여행을 좋아하여 전국 명승지를 찾아다니며 그림을 그렸는데 스스로 개발한 진경화법으로 우리나라 산과 들을 그렸다. 겸제 정선은 1751년 "인왕제색도"를 그렸는데 중국에서 들어온 남종화를 바탕에 두고 자신만의 화법으로 그리기 시작했는데 그게 바로 "진경산수(眞景山水)"화법이다. 진경산수란 "이상산수(理想山水)"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상상속이 아닌 진짜 있는 풍경을 그린 그림을 말한다.
겸재 정선 1747년 작품 "삼부연도(三釜淵圖)". 이 그림은 강원도 철원에 있는 삼부연폭포를 그린 그림으로 정선이 금강산 가는 길에 들렀던 폭포다. 이 폭포에는 궁예가 철원을 태봉의 도읍으로 삼을 때, 이 소에 살던 이무기 3마리가 폭포의 바위를 뚫고 승천했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 이때 만들어진 바위의 구덩이 세 개가 가마솥(釜, 가마솥부) 모양과 닮았다 하여 "삼부연(三釜淵)"이라 이름 붙여졌다.
겸재 정선 1740년 작품 "서원소정도(西園小山圖)". 서원은 인왕산 자락에 위치한 이춘제의 정원으로 이곳은 사방이 탁 트여 도성의 집들과 궁궐, 남한산성과 관악산까지 다 보였다. 그는 서재 이름을 "중은재"라고 부를 정도로 벼슬살이 중에서 서원에서의 한적하고 깨끗한 삶을 꿈꾸었다. 1740년 봄 이춘제가 자신의 서원에 작은 정자를 세우자 정선은 그에게 "서원소정도"와 "서원조망도"를 그려주었다.
겸재 정선 "공암층탑도(孔巖層塔圖)". 공암이란 구멍이 뚫린 바위(광주바위)란 뜻으로 양천의 옛 지명이다. 세개의 바위 가운데 오른쪽 바위는 위에 탑이 있어 "탑산"으로 불렸다.
겸재 정선 "박연폭도(朴淵瀑圖)". 박연폭도는 송도삼절로 유명한 지금의 북한 개성(송악)에 있는 천마산 박연폭포를 그린 그림이다. 박연폭포는 경치가 아름다워 예로부터 그림이나 시의 소재로 많이 쓰였다.
※ 박연폭포의 유래와 한민족과 가장 친근한 악기 퉁소 이야기 : 조선시대 경기도 개풍군 천마산 기슭에 퉁소를 잘 불기로 유명한 박진사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친구들과 천마산 폭포로 나들이를 갔는데 날이 어두워 졌는데도 박진사는 퉁소만 불고 있었다. 친구들은 기다리다 지쳐 모두 내려가고 밝은 달이 떠올랐다. 폭포에는 천년 묵은 용이 살고 있었는데 퉁소 소리에 반해서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장하여 "우리 집으로 가면 평생 퉁소만 불고 살수 있습니다"라고 하자 박진사는 여인의 손에 이끌려 연못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 후 그 연못은 "박진사가 빠져 죽은 연못"이라 하여 "박연폭포", "박진사 연못", "선폭(仙瀑)"이라 불리게 되었다. 퉁소는 오래 묵은 대나무에 구멍을 뚫어 입김을 불어넣어 소리를 내는 악기이다. 피리처럼 세로로 불지만 입술을 대는 "서"가 없다.
겸재 정선 "사직송도(社稷松圖)". 이 그림은 사직단에 있었던 소나무의 한 품종인 반송을 역동적으로 그렸다.
겸재 정선 "여산초당도(廬山草堂圖)". 여산은 중국 강서성 구강시에 위치한 명산으로 당나라 시인 "백거이"는 한때 구강으로 좌천되었는데 이곳에서 여산의 빼어난 경치에 반해 이 산에 초당을 짓고 머물렀는데 이 그림은 백거이의 이야기를 그린 것이다. 초당에 앉아있는 시인이 정원의 연꽃을 바라보며 시상에 잠겨있다.
겸재 정선 초상화. 2020년 박철종 화가가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