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思悼世子)의 여체방황(女體彷徨) 사도세자는 수명의 시신과 선비만 거느리고 부왕 영조 몰래 평양으로 유람 의 길을 떠났다. 부왕이 언제 역적으로 몰아서 죽일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감돌고 있는 궁중에서 잠시 해방되려는 생각과 부왕에 대한 소극적인 반항 이기도 했다. '언제 죽을지 모를 몸이니 청춘의 향락이나 실컷 채워보자.' 하는 자포자기의 방탕한 기분이었다. 영조 삼십칠년 사월, 평양 가는 연도의 산천에는 신록이 무르익고 늦봄의 꽃이 만발했다. 거의 반광인(半狂人)이 된 이십오세의 왕세자는 객사(客 舍)의 달밤 두견새 우는 소리에도 단장(斷腸) 눈물을 흘렸다. 비록 왕 몰래 하는 미행이었지만 대신들도 거의 광증(狂症)의 왕세자가 도 중에서 무슨 변이 생길까 해서 연도 수령들에게 비공식적으로 대접하라는 통첩을 내렸다. 그런가 하면 노론파에서는 "왕세자가 자주 지방으로 돌아 다니는 것은 무슨 음모를 꾸리며는 계획인 지 모르니 불온한 언동을 내사하라." 하고 각도 수령에게 비밀 지령도 내렸다. 그러나 왕세자의 평양미행은 철두철미한 방탕의 만유(漫遊)였다. 평양은 자연도 좋았지만 색향(色鄕)으로 유명했다. 세자는 평양기생들과 마음껏 놀았다. 주색을 즐기는 그의 습성은 정치싸움의 고통을 잊어버리는 데에 가장 좋은 약이었다. 궁중의 모든 구속에서 벗어난 자유인으로서 마음껏 방탕한 유흥을 즐기는 세자는 평양의 일류 기생은 모조리 수청을 들리겠다는 기세를 올려서 평양 화류계를 떠들썩하게 했다. 심지어 산에 놀러갔다가 기생에서 여승으로 전 향하고 수도하던 가선(假仙)이까지 농락했다. 평양에서 서울로 돌아올 때는 그동안 정들인 평양 미인을 오륙명이나 가마 에 태워 가지고 몰래 돌아왔다. 그들은 가선을 비롯한 평양 기생들이었다. 사도세자(思悼世子)는 기생들을 몰래 데리고 서울로 돌아왔으나, 처음에는 부왕 영조의 노염을 두려워해서 동대문 밖에 숨겨 두고 밤으로 미행해서 정치적 공포를 방탕한 향락으로 풀곤 했다. 정숙하기로 유명한 세자비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는 질투의 기색은 보이 지 않고 다만 "대조(大朝=영조)께서 평양을 다녀오신 것도 아직 모르시지만 불원 아시면 또 불호령을 내릴 것입니다. 더구나 기생들까지 데려다가 밤으로 보러 다 니시는 것을 아시면 큰 변이 날지 모릅니다. 그러지 않아도 대조께 반역의 뜻이 있다고 참소하는 무리가 있는 때인만큼 조심하셔야 하옵니다." "동궁비답지 못하게 질투하는 거요? 언제 역적으로 몰려 죽을지 모를 몸이 니 죽기 전에 지랄이라도 실컷 해보겠소." 사도세자는 영조로부터도 미친 자식으로 구박을 받아 온지가 오래였고 영 조를 극도로 무서워하는 공포증은 마침내 일종의 정신병 환자의 증세를 나 타내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영조가 세자에게 왕위를 빼앗길까 오해하고 대노한 사건도 이미 십 년 전인 영조 이십육년에 있었던 일이다. 그때 사건은 사도세자가 홍역으로 죽다 살아난 병후였는데 마침 대간(臺 諫) 홍준해(洪準海)가 영조에게 세자를 너무 엄하게 다루지 말고 인자하게 다루라는 의미의 상소를 올렸다. 그때는 아직 당파들이 세자를 이용하려고 하지 않았고 순수한 교육적 의미 에서 올린 홍준해의 상소였다. 그러나 영조는 대노하고 소년 세자를 더욱 엄하게 몰아대었다. 세자는 중병 끝의 약한 몸으로 눈이 쌓인 마당에 엎 드려서 용서를 빌었다. 눈이 펑펑 내려서 세자의 몸을 파묻어도 용서할 때 까지 땅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노기는 다시 폭발해서 그 해 섣달 십오일에는 영조가 창의궁으로 가서 왕실의 어른인 인원왕후(仁元王后)에게 "세자에게 전위(傳位)하겠습니다." 하고 화풀이까지 했다. 그러나 노령으로 귀가 어두운 인원왕후는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상감 좋을 대로 하오." 하고 지나는 말로 대답했다. 그러나 영조는 자교(滋敎)의 허락까지 받았으니 세자에게 전위(傳位)하고 물러나겠다고 역정을 부렸다. 이에 대해서 세자는 망극해서 시신에게 곧 영조의 번의를 애원하는 상소문 을 올렸다. 그리고 인원왕후도 귀가 어두어서 내용도 모르고 한 마디 잘 못 대답한 것을 알고 영조에게 빌다시피 해서 겨우 무마시켰다. 이때 세자는 망극해서 손지각(遜志閣) 뜰 얼음 위에 짚자리를 깔고 대죄 (待罪)하다가 다시 창의궁 앞에 엎드려서 빌었다. 그때 세자는 부왕의 노 엽게 한 불효를 탄식하고 머리를 돌에 부딪혀서 망건이 찢어지고 이마에 피가 흐르는 상처까지 입었다. 이로써 영조는 화를 풀었으나 그때부터 세 자는 정신적으로 광병의 징조가 나타났다. 세자는 부친을 염라대왕같이 무서워했다. 낮에도 귀신이 보인다고 야단을 했다. 그리고 부왕과 스승이 강권하는 유학경서(儒學經書)는 읽지 않고 불 경과 도경(道經)을 읽는 버릇도 생겼다. 도경의 하나인 옥추경(玉樞經)을 읽고 도를 닦으면 잡귀를 물리치고 도술을 부리게 된다고 마음을 쓰게 되 었다. 그러나 옥추경을 읽은 뒤에는 더 귀신을 무서워했다. 이 귀신은 공포증에 서 생긴 변형된 영조의 환영(幻影)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옥추(玉樞)라는 글자조차 무서워 했고 옥추단(玉樞丹)이라는 패물까지 무서워서 가지지 못 했다. 천둥소리나 번갯불도 무서워해 정신을 잃었고 그런 글자만 봐도 혼돈하는 경계증(驚悸症)이 고질이 되었으니 일종의 광병(狂病)이었다. 그러다가 여관(女官=英嬪朴氏))을 가까이 해서 아이를 배자 영조의 꾸중이 두려워서 낙태시키려고 하다가 못하고 영조 삼십년에 은언군(恩彦君) 인(仁)을 낳은 후, 영조의 엄한 꾸중으로 벌벌 떨며 지냈다. 영조 32년에 세자는 모친상을 당해서 정신상에 더 큰 타격을 받았다. 그런 데 영조의 총애를 받는 후궁 문숙의와 친정 동생 문성국(文聖國)이 사사건 건 세자의 욕을 고자질 했다. 그래서 영조는 신화와 궁녀들 면전에서도 죽일놈 미친놈하고 엄한 꾸중을 했다. 세자는 이때부터 울화병이 점점 격화해서 궁중의 내관(內官)들을 매 질하는 광증이 생겼고, 칼로써 직접 궁중비복을 찔러 죽이는 살인극도 여 러번 저질렀다. "동궁은 살인마(殺人魔)이다. 걸리면 죽는다. 피하는 게 상책이다." 하고 궁중의 내관들과 비복들은 세자를 두려워하고 벌벌 떨었다. 그리고 다음해 영조 33년부터는 해괴하게도 옷에 대한 광증이 생겼으니 의 대병(衣帶病)이라고 불렀다. 아내 혜경궁 홍씨는 이 의대병 때문에 수십 벌의 새 옷을 해대느라고 죽을 고생을 했다. 궁중의 비용으로도 동궁에 대한 예산은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혜경궁 홍씨는 친정 부친 홍봉한(洪鳳 漢)에게 호소해서 친정 신세를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세자는 귀신을 위해 놓고 새 옷을 모두 불살라 버렸다. 그리고 옷이 마음 에 들지 않는다고 찢어 버리고, 또 옷 입히는 시중을 잘못 든다고 마구 때 려서 상하게 했다. 이런 의대병은 죽을 때까지 6, 7년이나 계속되었다. 그 런데 어쩌다가 한벌을 입으면 그 옷이 더럽고 해질 때까지 벗지 않아서 마 치 거지 같은 주제로 지냈다. 그럴 때 새옷으로 갈아입히려고 하면 그 사 람을 또 때려서 피흐르는 것을 보고 웃었다. 그러나 정권욕에 눈이 어둔 당파들은 이렇게 부자간의 불화로 정신병까지 든 세자를 업고서 반역음모를 꾸몄으니 실로 무자비한 망동이었다. 부왕에 대한 공포증과 정신착란증은 그런 것을 다 잊어버리려는 핑계 비슷 한 자포자기의 방탕으로 날로 기울어졌다. 동궁 처소 후원에서 말타기, 활 쏘기, 칼쓰기로 울화를 풀었다. 그러다가 하루는 "대조(大朝)께서 내가 무술놀이 하는 것을 위험한 음모 준비로 뒤집어 씌 우려 한다." 하고 누가 고하지 않은 일을 지레 겁을 먹고 모조리 파괴해버렸다. 그리고 "대조가 나를 잡아 죽이려 하니 깊이 숨어야겠다." 한 후 횐취정(環翠亭)에 숨어서 나오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후원에 땅을 파고 그 속에 들어가서 숨기도 했다. 굴로 내려 가는 출입구 뚜껑 위에도 뗏장을 덮고는 어두운 굴 속에 틀어박혀서 오뉴 월의 한증막 같은 더위도 참았다. 그래서 정신적인 광증은 마침내 육체적 건강까지 상케하고 중병이 들어버렸다. 그래도 밤으로는 동대문 밖에 데려다 숨겨 둔 가선(假仙)을 비롯한 평양기 생을 보러 다녔다. 그런 방탕은 점점 심해져 마침내는 궁중에까지 데려다 가 건달패, 동궁 시신들을 데리고 밤을 세우며 놀았다. 세자비 혜경궁은 모든 것을 병으로만 돌리고 질투 같은 것은 한번도 나타내지 않았다. 어느날 무슨 바람인지 세자는 오래간만에 돌연 혜경궁 방을 찾아와서는 우 는 소리를 했다. "대조의 노염이 아무래도 무사하지 못할 것 같소." "설마 그럴리야 있겠습니까?" 하고 세자비는 남편을 위로했다. "세손만은 귀여워 하시니까, 나는 죽여버려도 국본(國本)엔 지장이 없을 거 아니요." "병환 때문에 그런 지나친 공포를 느끼시지만 그럴수록 대조께 안심하시도 록..." "흥, 모를 소리. 나를 점점 더 미워만 하시니까, 동궁을 폐위(廢位)하고 죽여버린 뒤에 세손은 죽은 형님 양자로 빼앗아 가실 거요." 혜경궁은 이럴 때의 남편 동궁의 정신이 성한 사람 같으므로 더욱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가선을 비롯한 계집들과 밤을 새우며 방탕한 잔치를 하는 광경은 마치 상가(喪家)와 같았다. 주효가 낭자한 잔치상도 마치 귀신의 난장판 같은 것을 만들어서 그 속에 들어가서 송장처럼 누워서 잤으며, 나인들도 함부로 강간하고 말을 듣지 않으면 살상하기를 예사로 했다. 세자의 이러한 방탕과 광증의 행패가 심해지자 부왕파에 속하는 노론파에 서는 세자를 위하는 소론파를 숙청하는데 절호의 기회라고 보고 흉계를 꾸 미기 시작했다. 그것도 세자를 직접 해치는데 충분한 증거를 잡아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영조도 이제는 형식상으로 세자에게 대리(代理)를 시키고 직접 정치엔 관 계하지 않았으므로 어린 세손에게 글 가르치는 것을 낙으로 삼고 있었다. 근력도 노쇠해서 전과 같이 당파싸움도 강경히 금하지 못하고 오직 고집만 을 전보다 심해서 일종의 노망증까지 걸려 있었다. "너는 아비를 닮지 말고 공부를 잘해서 장차 좋은 임금이 되어야 한다." 아들에 대한 실망과 증오심은 어린 손자에게까지 이런 말로 훈계했으나, 세손은 어린 마음에도 조부와 부친의 나쁜 사이가 자기 부자지간까지 이간 하는 듯하여 민망하고 가슴 아팠다. - "아버지, 제발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영조 38년 여름 마침내 세자와 영의정 신만(申晩)과의 사이가 극도로 악화 했다. 신만은 영조에게 세자에 대한 걱정을 여러 가지로 말을 올렸는데 그 것이 모두 세자의 잘못에 대한 선후책이었다. "영의정 신만이 대조께 내욕을 고자질해 바쳐서 대조의 노염이 심하였다.' 세자는 그런 생각에서 울화를 터뜨렸다. 그러나 세자의 지위로서도 영조의 신임을 받는 영의정 신만에게 직접 화풀이를 할 수가 없자 그의 아들인 영 성위(永城尉)를 아비 대신 잡아다 죽인다고 별렀다. 영성위는 세자의 누 이동생 화협옹주(和協翁主)의 남편이었다. "영성위를 잡아다 죽여야 한다!" 세자는 날마다 별렀다. 만일 세자와 만나기만 했으면 직접 칼로 죽였을 것 이다. 그러나 겁을 낸 영성위는 세자의 그런 눈치를 알고 일체 궁중에 들 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큰 소리로 벼르기만 하면서 화합옹주에게 자기 일 을 영조께 잘 말해 달라고 편지로 애원한 것도 처량한 일이 아닐 수 없었 다. 그래도 효과가 없자 영성위를 위협하려고 영성위의 집에 관원을 보내서 관 복을 비롯한 그의 패물과 일용품을 압수해다가 불살라버렸다. "내가 직접 대조께 가서 억울한 사정을 아뢰겠다." 하고 영조를 만나려고 했으나 부왕과 세자를 싸움 붙이려고 안내할 신하들 은 없었다. 노론파의 행동파 구실을 하는 중인(中人) 건달 나경언(羅景彦)은 영조 삼 십팔년 윤5월 11일에 형조참의(刑曹參議) 이해중(李海重)에게 중대한 밀고 를 했다. "대감, 요즘 세자께서 큰 일을 꾸미신다는 소문이 있는데 알고 계십니까?" "자네, 그게 무슨 소린가, 누구한테 그런 말을 들었는가?" "소인의 형이 액정별감 상언(尙彦)이 아닙니까." 액정별감은 궁중 하인들의 감독역이다. "아, 그렇지." "대감, 실은 소인 형의 말이온데, 세자께서 노망든 부왕을 들어내고 임금 이 되시려고 바로 무슨 변을 일으키신답니다." "에잇, 어디 그런 망극한 말을 함부로 하는 법이 있는가?" "대감께서 형조참의시니까 미리 아시지 않습니까?" 이해중은 전 영의정이요, 세자의 장인인 홍봉한에게 그런 밀고 사실을 말 했다. 형조참의의 직책상 이런 사건을 상감께 아뢰지 않을 수도 없고, 그 러자니 부자 사이의 의를 끊는 것 같기도 해서 "망극하오. 홍대감은 국구(國舅)의 관계이기도 하니, 이 문제를 잘 조정 해서 무사하게 해주시오." 그러나 홍봉한으로서도 사위를 역적으로 고발 할 수도 없고, 또 그것이 분 명히 어떤 일파의 날조한 음해인 줄은 알았지만, 그렇다고 사위를 두둔하 고 변명하기도 거북해서 망설였다. "나로서 어찌 이런 문제의 시비를 따질 수 있소. 이참의가 상감께 잘 말 씀 드려서 공연한 풍설이라고 사실을 밝혀 주시오." "나로서도 실로 난처합니다." 이해중과 홍봉한은 서로 책임을 미루려고 했으나 결국 이해중이 변(變)을 고하는 상소를 올렸다. "에잇, 궁중에서까지 대역(大逆)의 변이 생기다니. 내가 친히 조사하겠 다." 하고 영조는 상을 치면서 대노했다. 좌우의 신하들은 깜짝 놀랐다. 여기서도 노론파와 소론파의 반응은 정반 대로 달랐다. "이 문제는 심중히 사실을 밝혀야 하겠으니 상감께서는 진정하시고 일단 사헌부에 맡겨 주십시오." 이런 의견은 세자를 두둔하는 소론파의 의견이었다. 그들도 대노하는 영조 앞에서 그것이 노론파의 중상모략이라고 단언하고 나서진 못했다. "사세가 급박한지도 모릅니다. 빨리 친국(親鞫)하시되, 상감마마의 신변 이 위험하오니 경호군을 풀어서 주위를 엄중히 경호해야 하옵니다." "음, 곧 경호군을 대령시켜라. 그리고 모든 궁문을 굳게 닫아라." 분노한 영조는 엄명을 내렸다. 그리고 전임 시신과 현임 대신들을 급히 소집했다. 이 소문이 장안에 퍼지자 인심은 흉흉했다. "아이고, 기어이 궁중에서 골육지간에 피를 흘리게 됐군." "동궁이 하도 방탕만 하고 미친 병까지 걸렸으니 노론파에서 동궁파를 없 앨 흉계다." "아냐, 동궁이 미친 행세한 것도 대역의 흉계를 숨기려는 거짓 미친 짓이 었다는군. 정말 미친 사람이 그렇게 계집을 밝힐 수 있어. 글공분 않고 무술만 익힌 것을 봐도 알 거 아닌가." 민간의 유언비어도 자연 두 갈래로 갈라졌다. 그것은 반대파 쌍방에서 풍 설을 서로 조종하는 관계이기도 했다. "좌우간 나라 꼴은 말이 아니다. 노망한 부왕이 미친 왕자를 잡아 죽이려 는 판국이다." "자식을 죽이지 않으면 아비가 죽을 테니까. 왕위와 목숨을 지키려면 그럴 수밖에 있겠나?" 이런 흉흉한 소동은 궁중에서 더욱 심했다. 세자도 죽을 각오를 하고 5월 13일에는 혜경궁에게 비장한 마지막 편지를 보냈다. 『어젯밤의 소문이 심상치 않고 무섭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내가 죽어서 모르거나, 요행히 살면 종사(宗社)를 붙들어야겠지만, 죽을지 살지 모르겠 소. 그러나 내가 죽어야지 세손의 목숨이 보전될 것 같소. 그러니 이대로 죽은 후엔 빈궁을 다시 보지 못할 것 같소.』 혜경궁은 남편의 비장한 편지를 보고 천지가 무너지는 듯 아득했다. 한편 세자의 모친 선희궁도 왕실의 참변을 어떻게 해서든지 잘 수습하려 했다. 남편 영조의 끔찍한 각오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참변이 세자 뿐 아 니라 세자비와 세손에까지 미칠까 두려웠다. 그러면 국본(國本)의 계승조 차 끊어지고, 궁중의 혼란은 격화되는 동시에 당파와 먼촌 왕족들까지 왕 위계승의 쟁탈전을 벌일 것은 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희궁은 영조에 게 눈물을 흘리면서 아뢰었다. "상감의 결심을 아오며 더는 말 드리지 않겠습니다. 동궁의 하는 일은 사 실이거나 아니거나 모두 본 정신이 아닙니다. 병으로 그러니 어찌 책망하 겠습니까. 처분은 하시더라도 부자지정으로 은혜는 베푸셔야 하옵니다." "처분을 하면 그만이지 무슨 은혜를 베푼단 말이요?" "세손 모자를 평안케 하시도록..." "그 아비의 죄를 모자에게까지 씨울 생각은 없소마는 아비를 죽이려는 미 친 자식은 용서 못하오. 그것도 왕실의 일이라 열성(列聖)께 대한 면목으 로도 처분하지 않을 수 없소." 영조가 세자를 처분할 결심은 이미 요지부동이었다. 마침내 친국이 휘녕전(徽寧殿)에서 열렸다. 사도세자는 그 곳으로 끌려 나 가기 전에, 세자비 혜경궁이 있는 덕성각(德成閣)에 잠시 들려서 최후의 상면이 될지도 모르는 잠시를 함께 지냈다. 그리고 거기서 담을 격한 휘녕 전으로 간 뒤에, 바로 부왕의 노성이 들려서 혜경궁은 피눈물을 쏟으며 울 었다. 그러나 나인을 담밑으로 보내서 동정을 살피라 하고 남편의 운명을 빌었다. 친국의 장소는 살기가 돌고 있었다. 남태제(南泰齊)를 지의금(知義禁)으 로, 한익모(韓翼謨)를 판의금(判義禁)으로 임명했다. 이런 사람들을 거느 리고 영조가 직접 재판을 통솔하는 형식을 취했지만 모든 권한은 영조에게 있었다. 그리고 여러 대신들이 배석했다. "먼저 고변(告變)한 나경언의 증언을 듣자." 영조의 명에 따라서, 역시 죄인 취급을 받는 나경인이 법정에 끌려 나왔 다. 그러나 그는 태연한 태도로 어전(御前)에 엎드려서 입을 열었다. "소신은 이번 일을 미리 알고서 상소코자 하였으나 미천한 몸이오라 상소 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형조에게 사실을 여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사 건 내용을 상세히 글로 기록해 왔사오니, 먼저 이 글월을 올리옵니다." 하고 미리 준비한 고발문을 올렸다. 동궁이 장차 나라를 새로 만든다는 소문이 떠돌아서 신이 그 내용을 알아 보고...』 임금은 여기까지 읽고서 화를 버럭 내고, 그 문서를 세자의 장인 홍봉한에 게 휙 던져 주었다. "영상이 이 흉서를 읽어 보시오." 홍봉한은 영조가 자기에게 역정을 내는 태도에 황공해서 "황공하옵니다. 신을 먼저 죽여 주십시오." 하고 엎드렸다. 그 흉서는 다른 법관과 대신들에게 회람되었다. 모두 침울한 안색으로 말 이 없었다. "나경언은 벼슬도 없는 일개 서민으로도 나라에 대한 충성에서 이런 흉사 를 고발했는데 여러 대신은 다들 알면서도 나에게 알리지 않았으니 그 심 사를 알 수 없소. 저 나경언에게 부끄럽지도 않소?" 대신들은 여전히 묵묵히 앉았을 뿐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홍봉한은 더욱 책임을 느끼고 "동궁을 불러 들여서 엄중히 책망하십시오." 이런 정도의 말은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세자는 홍화문(弘化問) 밖에 엎드려서 죄를 기다리고 있었다. 영조는 세자를 불러 들이라고 명했다. 홍봉한은 다시 "그러나 죄인 나경언을 한 자리에 있게 하는 것이 미안하오니 나경언을 잠 시 물러나게 하십시오." 나경언은 군사에게 끌려서 일단 퇴장하면서도 태연한 태도로 홍봉한을 불 만스러운 시선으로 쏘아보았다. 나경언이 퇴장한 뒤에 세자는 휘녕전 섬돌 아래 엎드렸다. "너는 나의 대리로서 정사는 버리고 지방으로 다니면 방탕한 짓을 했고, 인제는 해괴한 계집들과 여승까지 궁중에 들여서 후궁을 삼았으니, 중년의 자식을 낳아서 왕자를 삼을 작정이냐? 더구나 너는 나를 죽이고, 여승은 왕손의 어미를 죽인 뒤에 무슨 꼴로 나라의 임금이 될 작정이냐?" 영조는 부친으로서나 왕으로서나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을 토하면서 노발대 발 했다. 듣던 대신들이 민망해서 숨도 쉬지 못할 지경이었다. 이런 놀라운 광경을 홍화문 밖에서 지켜보던 소년 세손은 문 안으로 뛰어 들어가면서 "할바마마, 아비를 살려 주십시오." 하고 울면서 애원했다. 대신들은 어린 세손의 효성에 측은한 눈물을 머금었다. 그러나 영조의 아 들에 대한 분노는 극도에 달했다. "너는 나가거라!" 하고 세손에게 호령했다. 세손은 하는 수 없이 쫓겨 나와 왕자재실(王子齋室)에서 엉엉 울음을 터뜨 렸다. - 뒤주 속에서 몸부림치는 세자 혜경궁은 남편이 처형되기 전에 먼저 세상을 떠나려고 칼을 들었으나 측근 에 있던 사람들이 칼을 빼았고 말았다. 혜경궁은 숭문당(崇文堂)과 휘녕전 사이의 건복문(建福門) 밑으로 가서 세자가 친국 당하는 휘녕전 안의 동정 을 살피려고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영조가 칼을 휘두르면서 호령하는 소 리가 들렸다. 그리고 세자가 겁에 질려서 애원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님, 그전의 잘못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금후로는 아버님 분부도 잘 듣고 글도 읽겠습니다." "여승과 기생들을 궁중에 들여다가 난잡한 행동을 하고, 심지어 대역의 음 모를 한 죄를 뉘우치고 하는 말이냐?" "그런 죄상은 억울한 말씀입니다. 그런 풍설의 출처가 알고 싶습니다." "네 가슴에 물어 봐라. 임금의 대리인 동궁 네가 죄인과 따지면 체면이 어 떻게 되겠느냐?" "전부터 화증병이 있어서 저도 모르게 실수하는 일은 있었사오나, 이런 억 울한 말씀에는 정말로 미치겠습니다." "그 이상 더 미치겠느냐? 아주 미쳐 죽든지 자결하든지 해라. 보기고 싫 다. 밖으로 나가서 기다려라." 세자는 휘녕전을 나와서 금천교(禁川橋)에서 죄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자 가 나간 뒤에 세자의 장인 홍봉한은 영조에게 조심스럽게 아뢰었다. "상감마마, 불충불효한 무고를 하여 상감 부자지간을 이간시킨 나경언을 극형에 처해서 다시는 이런 흉화(凶禍)가 없도록 하십시오." "흉악한 죄를 고발한 충성된 백성을 왜 처형하란 말이요. 차라리 이런 흉 한 죄를 덮어 두려던 대신들을 벌할망정 정직한 백성은 벌할 수 없소." 다른 대신들도 홍봉한의 변호에 동조해서 부자지간의 참변을 막으려고 애 섰다. "상감, 대저 동궁께서 잘못된 점이 있다손치더라도, 신하로서 그 죄를 들 추는 것은 임금의 잘못을 폭로하는 불충이니 나경언의 소행은 엄벌해서 후 세를 경계케 해야 하옵니다." "나경언은 일개 무식한 서민이지만, 그 충성은 대신들 보다 극진한데, 어 찌 죄를 주겠소." "군주에 대한 고변자(告變者)는 자고로 죄를 주었습니다." 대신들은 나경언의 죄를 주장했다. 그것이 비록 사실이라도 죄를 받아야 했기 때문에, 노론파의 벼슬아치들은 나경언 같은 건달을 이런 경우의 행 동대로 이용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경언이 죄인으로 옥에 갇히게 되자, 그는 비로소 자기가 희생물로 죽나싶어 겁이 덜컥 났다. 그는 옥으로 끌려 가면서 "나는 동궁마마를 모함한 죄로 죽어 마땅하오나, 나에게 그런 고변을 하라 고 시킨 김한구(金漢耉)와 홍계희(洪啓禧) 등 노론파가 있습니다." 하는 배후관계를 폭로했다. 이에 당황한 노론파에서는 곧 나경언의 구명운동을 개시했다. 문성국은 영조의 후궁 문숙의를 찾아가서 "누님, 나하고 친구이며 우리 파를 위해서 동궁의 죄를 고발한 나경언이 도리어 불경죄로 죽게 되었소. 동궁의 죄를 자세히 상감께 여쭈어서 억울 한 나경언의 목숨을 살려 주시오." "염려 마라. 이번에 미친 동궁을 처분하지 않으면 우리에게도 큰 화가 미 칠 것이다. 내 힘껏 상감께 말하겠으니, 옥중의 나경언에게 연락해서 안 심하게 해라." 하고 간악한 요부 문숙의는 그날 밤에 영조를 선동해서 세자를 더욱 미워 하도록 갖은 말을 고잘질 했다. 다음날도 친국은 계속되었는데 영조는 우선 나경인을 귀양 정도로 가볍게 다루려고 했다. 그러나 재판장격인 남태재와 홍낙순(洪樂純) 등이 반대했다. "신하로서 임금 대저를 고발한 것만으로도 대역죄가 성립됩니다." "아니다. 역적을 고발한 자는 상을 주어야 한다." 왕의 고집은 대단했다. "세자를 역적이라고 부르시면 상감의 경우가 어찌 되십니까?" "경들의 왜 형식만 갖추려 하고 죄의 진상 조사는 피하려고만 하오." 하고는 영조도 나경언의 구명을 포기했다. 그래서 나경언은 노론파에게 이용만 당하고 억울한 희생을 당했다. 그가 처형되었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영조는 또 대신들을 조롱했다. "경들도 나경언같이 충성을 위해서 목숨을 버릴 용기를 가지시오." "..........." 대신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영조는 "나경언의 유족을 후하게 대우하라." 하는 분부를 내렸다. 영조가 일개 서민인 나경언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관대한 것은 세자에 대한 분노가 얼마나 컸던가를 증명하는 태도이기도 했다. 이때야말로 소위 부왕파라는 노론과 자왕파라는 소론들은 숨가쁜 암투를 벌였다. 나경언이 처형되자 문숙의를 중심으로 세자배척의 운동이 더욱 속 도가 가해졌다. 그와 동시에 위급해진 세자를 구하려는 운동도 조심스럽 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세자를 살리려는 구명운동을 영조의 노염에 불을 지르는 역효과밖 에 지나지 않았다. 어떤 충신의 말보다도 후궁인 요부 문숙의의 말을 믿 게 된 영조의 마음은 아들을 원수로 삼는 악마로 화해 버렸다. 문숙의는 세자의 생모까지 위협적으로 농락했다. "이번 사건으로 상감의 감정을 더 상하게 하면, 동궁 뿐 아니라 동궁빈과 세손에게까지 화가 미칠까 두렵습니다." 이런 협박에 놀란 세자의 생모까지도 영조에게, 세자는 처분하더라도 빈궁 과 세손은 보호해 달라는 애원을 했다. 이것은 생모까지도 세자를 죽이라 고 승낙한 결과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세자 처단을 결심한 영조는 역대 임금의 영정을 모신 선원전(璿源殿)에 참 배하고 중대한 결심을 고했다. "불효 자식 때문에 열성께 큰 죄를 지을지 모르게 되었습니다. 자식이 아 비 왕을 시역하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 하는 수 없이 자식에게 자결을 권 하겠으니 저의 이 고충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런 최후의 절차를 밟은 뒤에, 영조는 친국장소인 휘녕전으로 나왔다. '인젠 동궁이 죽었구나.' 혜경궁은 남편이 오늘로 죽을 것을 직감하고 기절해 버렸다. 세자를 불러 낸 뒤에 승지를 시켜서 세자의 관과 버선을 벗기고 뜰아래 엎 드리게 했다. "더 말하지 않겠다. 속죄하려면 이 자리에서 자결하라." 냉혹한 선언이었다. 부친이 아들에게 자살하라는 형식으로 죽이려는 것이 었다. "영의정, 세자가 자결하기 전에 먼저 세자위(世子位)를 폐하게 하오." "그런 것은 대신들에게 분부하셔서 심중히 정하도록 하십시오." 영의정 신만도 민망스로워서 이렇게 아뢰었다. "왕실에 관한 일은 내 집안 일이요. 내 말대로 하시오!" 영조는 영의정에게 호령했다. "아버님, 저를 살려 주십시오." 세자도 이때만은 본 정신으로 목숨을 빌었다. 이마로 땅을 부딪쳐서 피가 낭자하게 흘렀다. "대신들은 다 밖으로 나가시오. 내 집안 일로 경들의 수고를 끼치지 않게 하겠소." 대신들도 하는 수 없이 밖으로 퇴장했다. 사태가 위급해지자 문 밖에서 동 정을 살피던 소년 세손이 울면서 들어왔다. 세손은 땅에 엎드린 부친(세 자) 뒤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아비 대신 저를 처벌해 주십시오." "네가 또 왜 왔느냐?" 하고 시신을 시켜서 세손을 밖으로 데리고 가라고 명했다. 영조는 그 뒤에 칼을 빼어 들고 세자 앞으로 내려갔다. "어서 이 칼로 자결해라." 동궁의 시신들이 하는 수 없이 세자를 묶은 포승을 풀었다. 자살할 손을 자유롭게 해준 것이다. "동궁의 시신들도 물러가라!" 영조는 또 명령했다. 시신들도 하는 수 없이 물러났으나 한림(翰林) 임덕제(林德提)만은 세자 옆에 엎드려서 함께 죽으려고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왕은 군사를 시켜 서 그도 끌어내 보냈다. 세자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를 잡는 듯이 "한림, 한림까지 가면 어떡하오." 하고 한림의 옷자락을 잡고 울었다. 그러나 군사들은 세자의 손을 잡아 떼고 한림을 끌어 냈다. "아버님, 살려 주십시오." 모든 신하가 쫓겨 나가고 군사들만 남은 적막한 휘녕전 안에는 냉혹한 살 기만 등등했으나 세자는 부자지간에만 통할 수 있으리라는 최후의 애원을 했다. "네 죄를 알거든 어서 이 칼로 자결하라." 영조는 아들에게 자살을 권했다. 그러나 세자는 살려 달라고 애원하며 차 라릴 부친이 직접 죽일지라도 자살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설마 죽일까 하 는 일루의 희망이 없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내관들은 뒤주를 가져 오너라!" 영조는 자결하지 않는 세자를 뒤주 속에 넣어서 죽일 생각으로 내관(內官) 에게 명했다. 내관들은 소주방으로 가서 큰 쌀 뒤주를 운반해 왔다. "너 죄를 용서 받으려면 이 속에 들어가서 천지신명에게 조용히 빌어라." "아버님, 그러면 용서하시겠습니까?" 세자는 망설이면서도 칼보다는 좀 안심한 듯이 물었다. "어서 들어가서 속죄하라." 세자는 하는 수 없이 뒤주 속으로 들어갔다. 큰 뒤주였지만 간신히 무릎을 세우고 앉을 정도의 넓이었다. 영조는 손수 뚜껑을 탁 닫고, 쇠를 철컥 잠 갔다. 그 순간 뒤주 안은 암흑세계로 변했다. '언제나 용서하고 뒤주에서 내주실 것인가..' 세자는 그런 일루의 희망을 걸었으나 그것이 산송장의 관이 될 줄은 아무 도 몰랐다. 왕은 쇠잠긴 뒤주를 엄중히 감시하라고 명령하고, 풀을 뜯어다가 퇴비(堆 肥)처럼 덮어 쌓았다. 폭양 아래서 풀더미는 찌는 듯한 열기로 뒤주 속의 세자를 질식시켰다. 그리고 사흘만에 세자는 숨을 거두고 말았다. 서인(庶人)이 된 세자의 아내 혜경궁은 영조께 상소하고 세손과 함께 친정 홍봉한 집으로 물러 나갔다. 혜경궁은 자결하고 싶었으나 아들(세손)의 장 래를, 위해서 모진 목숨을 끊지 못했고 그때부터 늙을 때까지 눈물로 쓴 사도세자의 장편 비극을 남겼는데, 이 저술이 국문학의 중요한 고전(古典) 의 하나인 [한중록(恨中錄)]이다. 사도세자를 뒤주에 넣어서 죽인 노망한 영조도, 나중에 노론파의 음모인 것을 깨닫고 후회 했으나, 죽은 아들을 살릴 수는 없었다. 총애하던 후궁 문숙의를 귀양 보내고 음모에 관련한 노론파를 처형했으나 그래도 영조는 즉위 이래 오십여년 동안이나 당파싸움을 금지하려고 소위 탕평정책(蕩平 政策)을 써보았으나, 자신도 노망한 만년에가서는 그 당파싸움에 말려들어 서 자기 아들 사도세자까지 참살했던 것이다. - {정조} 비단폭에 서린 꿈 제22대 임금 정조(正祖)는 학문을 좋아했다. 그래서 학문에 대한 정열은 수많은 편찬 사업을 해서 문운(文運) 발전에 공헌이 컸다. 그러나 문약(文 弱)으로 왕실중흥(王室中興)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영조가 일생을 두고 금지하려던 당파싸움도 완전히 없애지 못한 끝 이어서, 영조가 승하하고 정조가 즉위(卽位)할 때부터 다시 발호하기 시작 했다. 그것은 척신(戚臣)에 의한 전형적(典型的)인 세도정치로서 모양을 달리하 고 나타나게 되었다. 그 뒤의 순조(純祖), 헌종(憲宗), 철종은 인물부터가 무능하거나 무식한 임금으로서 조선 역대를 통해서 척신들의 발호와 왕기 쇠미(王氣衰微)를 가져온 대표적인 인물이다. 철종(哲宗)은 강화도에서 글도 배우지 못하던 빈농소년(貧農少年)이었다. 열강(列强)의 세력이 조선에 밀려 들어서 중대 사건이 많이 발생한 것도 이때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대원군(大院君)과 민비(閔妃)가 이런 거센 외국의 폭풍을 가로맡아 막기는 했지만 대원군과 민비를 중심으로 한 싸움 이 척신 암투와 바꿔짐에 따라서 그 영향도 커지는 동시에 결과적으로 이 씨 왕조를 멸망의 길로 몰아 넣었던 것이다. 정조는 영조가 뒤주에 넣어서 참살한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외아들이었다. 영조의 재위(在位)시에 세손(世孫)으로 책봉되어서, 부친과는 반대로 어려 서부터 조부 영조의 사랑을 받았다. 부친 사도세자가 어느날 밤에 자다가 용꿈을 꾸었다. 세자가 창공을 나는 용으로부터 찬란한 주옥(珠玉)을 받은 꿈을 꾸고 잠을 깨자 혜빈(惠嬪) 홍 씨(洪氏)에게 기이한 꿈 이야기를 하고 "백견(白絹)을 내주오." "왜요?" "하도 훌륭한 용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니 그림으로 그려 두어서 이 대몽(大夢)을 기념하겠소." 그림을 잘 그리는 남편의 취미려니 했으나 그 이상으로 기뻐한 세자비(世 子妃)는 부끄러운 듯이 말했다. "동궁(東宮)께서 제 대신 태몽(胎夢)을 꾸셨으니 장차 나라에 경사가 있을 징조인가 하옵니다." "허허 부부일신이니까, 남편도 태몽을 꿀 수 있겠지." 하고 흰 비단 폭에 생동하는 용을 꿈에 본 모습대로 그려서 벽에 걸고 기 뻐했다. 그리고 각별한 감명으로 동침한 그날 밤에 과연 잉태해서 낳은 것이 세손 (世孫)으로서 나중에 조부 영조의 대를 이어서 임금이 되었다. 용의 태몽으로 탄생한 세손은 과연 용안(龍顔)이 준수했고 어진 웃음소리 도 종소리같이 맑게 울렸다. 그런데다 그 얼굴이 미인이던 모친의 모습을 닮으므로 모친의 기쁨은 더욱 컸다. 그리고 기질은 부친을 닮아서 백일 전 에 일어섰고 돌이 되기 전에 걸음마를 했다. 말을 하기 전부터 글자를 보면 좋아했으며 네 살 때는 글자를 곧잘 외었 다. 영조와 글 선생은 세손의 글 재주가 차차 비범한 것을 보자 동국성인 (東國聖人)이 될것이라고 기뻐했다. 정조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해서 일류 학자의 실력이 있었고 재위 이십 사년 동안 역사와 문학을 학자들에게 편찬시키는데 온 정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그밖의 모든 정치문제는 신하들에게 맡겼다. 이 때문에 척신들의 세도정치를 조장하는 폐단을 남기게 되었던 것이다. 정조는 임금이 되었어도 학문에 흥미를 가졌기 때문에 정사에는 도대체 열 성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정권을 노리는 무리들은 정조의 이복형제 (異腹兄弟)들을 추대해서 임금으로 세우고 정조를 몰아내려는 반역 음모를 여러번 일으켰다. 정조에게는 이복형제가 셋이나 되었다. 즉 영빈 임씨(英嬪林氏) 소생의 은 언군(恩彦君), 숙빈 임씨(肅嬪林氏) 소생의 은신군(恩信君), 귀인 박씨(貴 人朴氏) 소생의 은전군(恩全君)이다. 정조가 임금이 된 원년(元年)에는 홍상범(洪相範) 등이 은전군 이찬을 임 금으로 세우려는 반란을 음모했다. 홍상범의 부친 홍술해(洪述海)는 황해 감사(黃海監司)로 있다가 재물을 탐낸 죄로 먼 섬으로 귀양을 가자 그의 일족인 홍상간(洪相簡)이 원한을 품고 역적음모를 하다가 잡혀 죽었다. 그 리고 그의 일족은 모두 귀양을 가거나 폐적을 당했다. 홍술해의 아들 홍상범과 홍상길(洪相吉)은 전주에 귀양가 있다가 부친과 일족의 원수를 갚으려고 서울로 잠입해서 홍필해(洪弼海), 강용휘(姜龍 輝), 전흥문(田興文) 등과 결탁하고, 궁녀들과 짜서 정조를 침전에서 시역 하고 은전군을 왕으로 세울 흉계를 착착 진행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홍술 해의 처와 첩은 무당에게 정조가 망하고 은전군이 왕이 되도록 저주의 굿 까지 했다. 그후 장정 오십여명에게 무장을 시킨 뒤에 홍술해는 추석이 가까운 밝은 달밤에 궁중 기습(奇襲)을 하려고 복면을 한 후 밤중에 행동을 개시했다. 홍술해와 전흥문과 강용휘 세명이 맨 먼저 궁궐의 담을 넘었으나 파수병에 게 들켜서 죽음을 당했다. 사건에 격분한 대신들과 대사헌(大司憲) 및 종 친관(宗親官)들은 "은전군을 법대로 다스려서 이런 흉계의 근본을 없애야 하옵니다." 하고 은전군에게 독약을 내려서 죽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마음이 온순하고 우애가 두터운 정조는 "은전군이 불우한 환경에서 곤궁히 지낸다 하나 과인이 후히 대접 못한 것 이 후회되오. 더구나 이번 음모사건은 은전군의 본의가 아니고 오직 흉한 자들이 명목상 업고 나섰을 것이니, 은전군을 처형하는 것은 형제지정에서 차마 할 수 없소." 하고 반대했다. "국가의 대죄를 사친(私親)의 정리로 용서하면 금후에 이런 변이 그치지 않을 것이니 안됩니다." 정조를 옹위하는 신하들은 자기들의 반대세력에 이용될 은전군의 처벌을 강경히 주장했다. "아아, 사실 여부를 막론하고 왕위 다툼으로 형제지간에 이런 불행이 있다 니 참으로 조상 열성(列聖)에 대한 면목이 없소." 정조는 은전군을 미워하기 전에 자기의 권한으로 형제에게 독약을 내리는 것이 슬펐다. 그러나 하는 수 없이 신하들의 주장대로 독약을 내려서 은전 군의 목숨을 끊게 했다. 이런 역적사건이 있은 후에도 당파싸움으로 몰린 불평파에서는 경향 각처 에서 때때로 역적음모 사건을 일으켰다. 충주에 사는 이술조(李述祚)는 홍인한(洪麟漢)일파가 정권을 제 마음대로 휘두르면서 반대파를 역적으로 몰아 죽인다고 분개하고 대담하게도 충주 목사에게 직접 장담을 하고 나섰다. "조정에 역적 홍인한이 제 마음대로 학정을 하면서 유능한 충신들을 역적 으로 몰아 죽이고 있소. 그 놈을 없애려면 그 역적을 신임하는 암군(暗君) 을 갈아 치워야 하겠으니, 나는 군사를 일으켜서 의병대장이 되어 대궐을 쳐들어 가서 나라를 바로잡겠소. 목사도 언제 역적으로 몰려 죽을지 모를 사람이요. 나의 의거에 찬동하시오. 성사 후엔..." 하고 목사를 꾀이는지 위협하는지 모를 소리로 호언장담을 했다. 충주 목사는 '이자슥이 미쳤나.' 하고는 그 사실을 곧바로 조정에 밀고해버렸다. 조정에서는 깜짝 놀라 어사를 보내서 이술조를 잡아 처벌했으나 아무런 군 사 모집의 사실도 없고 단순한 당파적인 불평임이 밝혀졌다. 이런 불평 언동은 각처에서 발생했다. 그리고 숙청당한 홍국영(洪國榮)의 잔당은 수령의 제도가 놀라왔던 만큼 잔당들의 세력도 아직 남아 있어서 시국을 비방하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 형을 팔아먹은 비겁한 동생 홍국영에게 등용되었던 송우암(宋尤庵)의 후손 송덕상(宋德相)은 평산(平 山) 땅의 신형하(申亨夏)와 함께 소론파를 누르려는 음모를 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서 귀양살이를 했다. "그런 역적의 무리는 귀양으로 부족하니 응당 사형에 처해야 합니다." 득세한 소론파에서는 불온한 말 한 마디만 해도 잡아 죽여야 한다고 왕에 게 요구했다. 그러나 파쟁에 골치를 앓던 정조는 "북은 칠수록 소리가 나는 법이요. 이런 불평이 자꾸 나는 것은 나의 부덕 의 소치요. 또 노론 소론이니 시파(時派)니 벽파(僻派)니 하는 파벌 싸움 의 여파요. 그러나 파벌 싸움부터 없애야 하오." 정조 즉위 당시에 세도를 소론파가 부리고 있었으나 왕의 힘으로도 막을 수가 없었다. 다만 이런 문제가 날 때마다 마치 학자 모양으로 너희들 소 론파는 불우한 노론파를 너무 학대하지 말라는 정도로 설교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왕의 설교에 귀를 기울일 신하들은 아니었다. 충주와 평산에서의 반란 문제는 세력도 없는 자들의 작은 사건이었다. 그 러나 그 뒤에는 조정안에서도 정조를 비방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지평(持 平) 지위에서 쫓겨난 이유백(李有白)과 공조참의(工曹參議) 이택징(李澤 徵)은 공론했다. "임금은 규장각(奎章閣)에 벽파(僻派) 놈들만 모아놓고 국정을 그리치고 있다. 규장각을 때려 부셔야 하오." "놈들 세력을 무슨 방법으로 때려 부수겠소. 말만 들어도 시원하지만 공연 히 또 역적으로 몰리게.." "충신이 역적으로 몰려 죽는 것이 두려워서 의로운 일을 못하겠소? 방법 이야 합법적으로 상소를 해서 상감의 잘못을 깨우쳐 드리는데서부터... 그래도 효력이 없으면 다른 방법을 쓰는 수밖에..." 그들은 은근히 실력 행사도 사양치 않겠다는 음모를 했다. 그리고 이택징 은 곧 시폐(時弊)를 규탄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상소문으로 역적에 몰리는 일이 많았으므로 그들은 죽을 각오로 그 상소문을 올렸던 것이다. 『근자에 규장각은 승정원(承政院) 이상의 집정(執政) 기관으로 변해서 모 든 국정이 거기서 논의되고 집행되니, 앞으로 규장각은 본무(本務)로 돌아 가게 하셔야 합니다. 만일 지금과 같이 하실 바에는 규장각과 승정원 둘 중의 하나를 없애버리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규장각은 본시 상감께서 사 사로이 학문을 연구하시는 곳입니다. 학문을 숭상하고 학자를 대우하시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만일 중대한 국사를 규장각의 신하들로 하여금 처리 케 한다면 상감은 결국 규장각의 사신(私臣)으로 하여금 국정을 요리하게 하는 결과가 됩니다. 금후로는 전교(傳敎)를 비롯한 모든 국정문제는 승정 원을 통해서 하시기 바라옵니다.』 이런 상소문의 내용은 국왕을 간(諫)하는 신하의 말로는 과격한 표현이었 고, 은근히 규장각에서 과분한 총애를 받는 벽파에 대한 독설이었다. 정조 는 이에 대해서 노하지 않고 여러 가지로 알아듣도록 이야기했다. 규장각과 승정원은 물론 성격이 다른 기관이지만, 규장각의 사신(私臣)이 라도 좋은 인물은 얼마든지 승정원의 공신(公臣)으로 등용하겠으며, 그것 이 오히려 당파를 초월한 인물 중심의 인사정책이라고 얘기했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는 규장파의 인물은 벽파 중심으로 되어 있었고 승정 원의 고관도 거의가 벽파일색이었다. 그래서 대사헌(大司憲)은 이택징을 반역죄로 다스려야 한다고 들고 일어났 다. 이에 대해서 이유백은 이택징의 상소를 옹호하는 상소문으로 대항했는 데, 그 내용은 더욱 용감하게 청풍김씨(淸風金氏)의 중전(中殿)에게까지 미쳤고, 중전의 친정 출신인 김시묵(金時默)의 죄상까지 들추어서 그를 숙 청해야 한다고 극언(極言)했다. 그러나 결과는 이택징과 이유백을 귀양 보내라는 왕명이었다. 사태가 이쯤 되자 자기에게도 화가 미칠 것을 겁낸 이유백의 아우 이유원(李有遠)은 자 기만 살아나려고 형까지 파는 비굴한 행동을 했다. 그것은 "이유백과 이택징은 반역의 뜻을 품고 공모해서 상소문을 전후로 올렸습니 다. 사전에 그런 일을 알고 미리 보고하지 못한 속죄를 하기 위해서 늦게 나마 사실을 아룁니다." 하고 사헌부(司憲府)에 밀고한 것이었다. 따라서 귀양갈 형과 이택징을 결국 사형시키게 하고 말았다. '내게 그런 비겁한 동생이 있었으니 누구를 탓하랴. 나를 죽이고 너만 살 면 얼마나 좋을 것이냐?' 형 이유백은 탄식하면서 조용히 사형을 받았다. '그놈도 우리와 뜻을 같이 했습니다.' 하고 아우를 고발했으면, 아우 이유원도 사일등(死一等)을 감해 받더라도 귀양살이는 했을 것이다. 그러나 형만한 아우가 없다는 격으로, 형은 아우 에 대하여 보복 밀고는 하지 않고 죽었다. 그러나 반대파에서는 이 사건을 발전시켜서 귀양 보냈던 송덕상, 신형하를 비롯한 일파 등 일곱명도 완풍군(完豊君)을 임금으로 내세우려는 음모를 했다고 역적으로 몰아서 모조리 사형에 처했다. 이들은 모두 득세한 소론 파에 몰린 노론파들이었으므로 노론파의 불평과 불안은 더욱 심해졌다. 그러던 중 정조 8년에 소용 서씨(昭容徐氏)가 정조의 아들을 낳았다. 서자 였지만 왕세자(王世子)로 책봉했다. 중전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이 원 자(元子)를 왕세자로 삼은 것이다. 장차 임금이 될 중대한 자리였다. 왕실에서는 이 경사를 영희전(永禧殿)에 봉고(奉告)하는 식전(式典)을 올 리게 되었다. 고백헌관(告白獻官)인 김하재(金夏材)는 직무상 하는 수 없 이 제전을 집행하였으나 예방승지(禮房承旨) 이재학(李在學)에게 정조를 비방했다. "죄없는 노론파를 모조리 잡아 죽이더니, 인젠 젊은 중전이 세자를 낳을 때도 기다리지 않고 서실 소생을 왕세자로 봉하니 나라 꼴이 어찌 될지 걱 정이요. 충신들은 이때 일어서서 나라를 바로 잡아야 하오." 그는 믿는 친구라 이런 불평을 말했다. 그러나 이재학은 그런 말을 듣고 그냥 있으면 나중에 자기도 역적으로 몰려서는 죽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 서 곧 친구를 배반하고 왕에게 밀고했다. 왕은 김하재를 잡아다가 직접 심 문했다. 그러나 김하재는 왕에게 당당히 소신을 진술했다. '왕은 당파싸움을 말로만 금하면서 실제로는 소론파만 중용하고, 소론파가 날조한 반역죄로 노론파의 충신을 얼마나 죽였는가. 중전이 아직도 젊은데 왜 좀 생남을 기다리지 않고 서실 소생을 왕세자로 봉하느냐'고 공박했다. "이 대역무도(大逆無道)한 놈을 능지처참 하라!" 왕은 대노했다. 그러나 김하재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신은 죽겠으나 억울한 충신을 죽이는 것은 신으로 그치시기만 바랍니다." 하고 조용히 형장으로 끌려나갔다. 김하재가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죽은 뒤에 정조는 아무래도 마음이 좋 지 않았다. 그래서 조용히 김하재의 말을 되새겨 보았다. 처음에는 노론 파의 유력한 집안으로 역적죄로 끌려서 죽은 사람을 세어보고 몸에 소름이 끼쳤다. 다음에는 소론파의 대가집을 생각해 보았다. 역시 역적에 몰린자 가 많았다. '이러다가는 어느 파를 믿어야 할까. 모두 저희들끼리 세력싸움으로 죽이 고 죽는 미친 짓이 아니냐?' 정조는 그런 생각을 심각하게 했다. 그래서 원로대신들과 상의한 뒤에 "선왕 때부터 국사범으로 죽은 자는 할 수 없으나 귀양 간 자들은 전부 용 서해 돌려보내라." 하는 국법의 대사령(大赦令)을 내렸다. 그 덕택으로 거의 다 풀렸고, 중한 죄로 멀리 귀양 갔던 김구주(金龜柱)와 화원옹주도 가까운 곳으로 옮긴 뒤에, 그들도 적당한 시기에 용서를 하였 다. 그러자 반대파에서는 이에 대해서 또 반대운동을 일으켰다. '아아, 선왕께서 일생을 두고 막지 못한 당파싸움을 어찌 내 힘으로 막겠 는가?' 정조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당장이라도 양위할 세자(世子)가 있으면 정 치에서 떠나서 학문에만 전력을 기울이고 싶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