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nsen, M. D. (2015). Noah, the Eighth Proclaimer of Righteousness: Understanding 2 Peter 2.5 in Light of Genesis 4.26. Journal for the Study of the New Testament, 37(4), 458-469.
노아, 의의 8번째 선포자: 창4.26의 조명에서 벧후2.5를 이해하기
Abstract
본 논문은 의의 8번째 선포자로서의 노아에 대한 설명이 에노스로부터의 세대들의 수에 대한 분명한 언급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에노스의 때에, 사람들은 주님의 이름을 처음으로 선포하기 시작하였다(창4.26). 밷후2.5의 ‘8번째’(ὄγδοος)에 대한 세 가지의 해석들과 의의 선포자로서의 노아에 대한 설명을 정당화하는 주장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후에, 본 논문은 창4.26과 주님의 이름을 처음으로 선포한 사람들에 대한 설명을 살펴본다. 본 연구는 노아가 주님의 이름을 선포한 에노스로부터 8번째 세대라고 주장한다.
벧후2.5의 그리스 텍스트에서 노아에 대한 설명은 두 가지 어려움을 포함한다. 첫째, ὄγδοος(‘8번째’)가 어떻게 이해되어야만 하는가? ‘8번째’의 정확한 언급은, 이 절의 영어번역들에서 분명히 나타나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였다.
ὄγδοον Νῶε δικαιοσύνης κήρυκα (GNT)
노아, 8번째 사람, 의의 설교자 (KJV)
노아, 7명의 다른 자들과 함께한 의의 전령관 (NRSV)
KJV는 서수인 ‘8번째’에 대한 언급을 포함한다. 그럼으로써 독자들이 이것의 정확한 의미를 해결하려고 노력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두고 있다. 반면, NRSV는 ὄγδοος를 노아를 홍수에서 구원 받은 8번째 사람으로 설명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ὄγδοος를 노아와 관련되어 언급하지 않고, 노아와 함께 구원 받은 7명의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언급한다.
둘째로, 창세기의 서사에서 노아를 의의 선포자로서 인지할 수 있는 언급이 없다는 것이다. 노아는 의로운 사람으로 묘사된다(창6.9).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의의 선포자로서는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
이 짧은 논문의 목적은 창4.26에 대한 새로운 성경해석적 분석에 기초하여, 벧후2.5를 이해하는 방법을 제안하는데 있다. ὄγδοος가 베드로후서에 대한 학문에서 이해되는 세 가지 주요한 방법들과 노아의 의의 선포자로서의 묘사를 정당화하는 주장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후, 본 논문은 창4.26을 다시 고려한다. 본 연구는, 이 절의 내용이 서수인 ‘8번째’를 이해하는데 있어 관련된 배경을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이 배경에서 ‘8번째’는 주님의 선포자로서의 셋의 경건한 계보의 설명을 포함한다.
2 Peter 2.5 in Previous Research
Eighth (ὄγδοος)
벧후의 2.5에서의 ὄγδοος의 의미와 관련된 세 가지 주요한 제안들이 있다. 첫째, ὄγδοος를 노아를 구원 받은 8번째 사람으로 언급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구원 받은 사람들은 노아, 그의 아내, 세 아들, 세 아들의 세 아내들이다. 숫자 8이 노아와 홍수에 대한 설명에서 나타나기 때문에, 이 시각을 옹호하는 것으로 벧전3.20의 병행구가 인용된다: ‘노아의 시대에, 8명의 사람들이 물로부터 구원을 받았다’. 이에 더해서, Moulton(1906: 97-98), BDF§248(5), BDAG689는 모두 분명하게 ὄγδοος의 올바른 이해로서 기수인 ‘8’을 언급한다. 이들은 서수들이 때때로 그룹의 총 수를 언급하는 관용적인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는 고대 그리스어의 병행구를 언급한다. 따라서 예를 들어, BDAG689는 총 7개의 명백한 경우들을 인용한다: Thucydides로부터 세 개, Plato, Plutarch, Ps. Apollodorus, 2 Maccabees로부터 각 1개.
그러나 이 시각은 2개의 배경적 그리고 의미론적인 약점들을 가진다. 배경적으로 노아는 주님이 불의한 자는 심판하는 반면 경건한 자를 구원하는 방법을 아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벧후2에서 인용된 세 개 중 두 번째 예이다(2.9). 모든 세 개의 예들은 불의한 자를 판단하는 주님의 능력을 보여준다. 그러나 겨우 두 번째와 세 번째 예들만이 의로운 자들의 구원을 말한다. 그러나 만약 ὄγδοος가 노아와 그의 가족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된다면, 여기에는 노아와 롯에 대한 서술 사이의 뚜렷한 차이가 존재한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롯의 딸들의 구원에 대한 병행되는 언급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ὄγδοος 구원 받은 사람의 수를 언급하는 것이라면, 노아의 예는 롯의 예와 다르게 시작된다. 비교의 중심점은 의로운 자를 구원하는 주님의 능력이지만, 그 구원의 정도는 다르다. 다른 한편으로, 만약 ὄγδοος가 구원 받은 사람의 수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면, 여기에는 노아와 롯의 비교 사이에 긴밀한 유사성이 존재한다. 이에 더해서, 이것은 노아와 그의 가족의 구원을 설명하기 위한 흔치 않은 방식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창세기의 서사는 노아를 구원 받은 8번째 사람으로 이해하기보다는, 노아를 첫 번째 그리고 그의 가족을 노아와 함께한 자로 나타내기 때문이다. 벧전3.20와의 비교는 또한 과신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벧전3.20는 노아의 방주에서 구원 받은 사람의 수를 언급하는 것이고 노아를 형용사로서 수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의미론적으로, BDF, BDAG, 그리고 Moulton 모두가 ὄγδοος가 보통의 ‘서수’가 아니라 이 경우에는 기수로서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또한 이것이 규범에 대한 예외라고 말한다. 형용사 ὄγδοος는 신약성경의 다른 네 가지 경우들의 어느 곳에서 이러한 방식으로 사용되지 않았다(눅1.59; 행7.8; 계17.11; 21.20). 이에 더해서, 이것은 신약성경에서 어떤 서수에 대한 이러한 유일한 사용이 될 수 있다. BDAG는 이 가능성을 지지하는 기수로서 기능하는 서수들의 7가지 예들을 나열한다. 그러나 다른 그리스 문서들로부터의 몇 개의 흩어진 예들이 이것이 이러한 의미에서 이해될 수 있음을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서수들의 보통의 사용과 일관된 간단한 선택이 더 마음을 끈다. 이 절을 이해하는 더 직접적인 방식이 존재한다는 것과 이 예외에 대한 호소가 불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이 논문의 의도이다.
둘째로, 몇 학자들은 ὄγδοος를 종말론적 구원에 대한 상징적인 언급으로 해석한다. 세계는 7일 동안 창조되었고, 부활절 일요일(‘8번째’ 날)에의 예수의 부활과 함께, 새로운 창조의 알렸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8번째 날의 이 상징적 시각을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한 경우에, 이것은 노아와 연결된다. 이 이해에 기초해서, 구원 받은 8번째 사람으로서의 노아는 부활에 대한 한 유형, 그러므로 새로운 창조물이 된다.
이 위치의 주요 약점은 베드로후서와 기독교 역사 모두와 관련된 배경적인 것이다. 베드로후서에서 왜 ὄγδοος가 상징적인 수로 해석되어야만 하는지에 대한 어떤 배경적인 이유도 없다. Davids는 이 상징주의를 베드로후서에 도입할 어떠한 이유도 나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베드로의 요점은 숫자의 적음이지, 상징주의적인 8이 아니기 때문이다. Schreiner는 이보다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느 신약성경 저자도 숫자 8을 상징적으로 사용하지 않았고, 배경도 이러한 사용을 나타내지 않는다. 추가적으로, 서수적 ‘7번째’는 히4.4-10에서 종말론적 구원으로 사용된다. 이것은 1세기 독자들에게 통용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신약성경 저자가 종말론적 구원을 언급하기 위해서 숫자를 상징적으로 사용할 때, 그 숫자는 8이 아니라 7이다.
셋째로, ὄγδοος는 아담으로부터 노아의 세대의 수에 대한 언급으로 간주된다. 이 가능성은 Bigg에 의해서 언급되었다. 그는 이것의 자료로서 ‘한 늙은 주석학자’를 인용한다. 이 제안을 지지하는 증거는 노아가 라멕의(아담으로부터 7번째) 아들로 이해되는 창4.17-24, 또는 아담과 셋이 목록에서 제외되어 있는 창5에서 찾을 수 있다. 세대를 셀 때 서수를 사용하는 논리는 유14에서도 분명하다. 여기서 에녹은 아담으로부터 7번째 아들로 인용된다. 베드로후서와 유다서 사이의 내용의 중요한 중첩은 이 관찰에 무게를 더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주장은 몇 약점을 가지고 있다. 창4.17-24의 계보는 노아가 속해 있지 않은 가인의 계보와 연결되어 있다. 유14가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창5의 신실한 계보는 노아를 아담으로부터 8번째가 아닌 10번째로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Bigg은 노아를 8번째로 만들기 위한 아담과 셋의 제외는 임의적이라고 말한다.
Proclamation in Genesis 6–9
벧후2.5에서 불확실한 두 번째 영역은 의의 선포자로서 노아를 설명하는 것에 대한 자료이다. 많은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노아에 대한 이러한 이해가 이미 1세기에 확립되었다는 것을 안다. Josephus, ant.1.74, 그리고 Sib. Or. 1.148-98이 지지하는 증거로서 언급된다. 그러나 이것들은 이러한 설명을 위한 텍스터적인 기초로 작용하는 창세기의 단일한 구절을 규정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Bauckham은 ‘노아’의 설교가 창세기에서 언급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두 개의 일반적인 정당화가 이 설명을 위해서 주어졌다. 첫째, ‘의의 선포자’로서의 노아는 창세기 서사로부터의 부당한 추론이 아니라고 주장된다. 노아는 의로운 사람으로 설명되고, 이와 같이 그의 삶은 하나님의 의를 증거한다. 그러나 이 설명은, 베드로후서의 저자가 ‘의로운 사람’이 노아가 설교자라는 것을 함의한다는 것을 추론할 것을 요구한다. 창세기가 노아를 설교하는 자로 명확하게 언급하지 않고 있고 베드로후서가 그것의 논지에서 노아의 설교를 사용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단어의 더 분명한 사용은 더 바람직하다. 둘째로, Bailey는 이 해석에 대한 문학적 정당화를 제안하면서 Veenker의 연구를 인용하였다. 창6-9의 홍수 이야기와 메소포타미안 문헌들 사이의 병행구들을 언급한 뒤에, Bailey는 Utnapishtim이 홍수 전에 사람들에게 설교하였고 노아는 설교하지 않았다는 것을 관찰하였다. 그는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개인들’이 노아를 설교자로 이해함으로 인해서, 창세기 서사에서의 이 격차를 메우며, 이것이 후대 유대교 전통과 또한 베드로후서에서 전통의 기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독자들이 메소포타미안 문헌에 대한 지식을 가지는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것은 증명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설교하는 노아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존재했다면, 대부분의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학자들이 여전히 설명하기 위해서 여전히 설명하고자 시도하는 그 격차는 채울 필요가 없을 것이다.
Summary
벧후2.5에서 ὄγδοος의 의미와 관련된 세 개의 주요 주장들 각각은 각자의 약점을 가지고 있다. 예외적인 방식으로 서수로 이해하는 것, 또는 기수나 상징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더 많은 증거를 필요로 한다. 추가적으로, 계보에서 위치에 대한 언급하는 방식으로서의 서수로 해석하는 것은 강한 선례를(유14) 가짐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주장된 공식은 창4 또는 5의 증거에 맞지 않는다. 이에 더해서, 노아를 의의 선포자로 이해하는 것의 정당화는 단어 κῆρυξ를 함의하거나 수정하는 의의 추론적인 이해 또는 메소포타미안 문헌들에 상당히 밝은 독자들의 시각을 필요로 한다. ‘8번째’의 서수적 사용을 허용하고 선포자로서의 노아에 대한 창세기에서의 분명한 언급을 발견하는 벧후2.5에 대한 이해가 선호된다.
A Re-examination of Genesis 4.26b
본 논문의 두 번째 부분은 벧후2.5의 ὄγδοος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고, 창세기에서 κῆρυξ에 대한 분명한 언급을 제시한다. 이 논의는 창4.26에서 또한 나타나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다’ 구절의 가능한 의미를 살펴보기 전에 창4.26에서 에노스에 대한 언급으로부터 시작한다. 마지막으로, 본 연구는 창4-5의 즉각적인 배경을 고려해서 이 제안의 가능성을 증명할 것이다.
본 논문의 이 부분은, 벧후2.5에서 노아에 대한 언급의 자료로서 70인역보다는 히브리어 텍스트에 초점을 맞춘다. 왜냐하면 베드로후서가 70인역을 자료로서 의존했다는 것을 나타내는 확정적인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베드로후서(2.22)에서 구약성경의 한 인용은 명백하게 70인역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어휘와 구문론적 구성의 측면에서 다르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서, 히브리어 텍스트는 70인역의 자료이기 때문에, 본 논문은 히브리어 텍스트의 70인역 해석보다는 히브리어 텍스트를 따른다.
Starting-Point
Schreiner는 베드로가 아담으로부터 시작하였다는 근거가 없다는 점을 관찰함으로써, Bigg이 설명한 것과 같은 계보 주장을 비판한다. 유14는 분명하게 계보의 계산을 아담과 연결시킨다. 그러나 아담에 대한 언급이 벧후2.5에서는 빠져 있다. 이 관찰은 아담이 벧후2.5의 언급의 시작점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므로 보다 더 나은 추리는, 노아로부터 거꾸로 8번째 세대를 계산하는 것이다. 이 접근의 변화는 에노스가 벧후2.5의 시작점이라는 것을 제안한다. 이 때 등장하는 질문은, 왜 베드로후서의 저자가 아담 대신 에노스로부터 시작하느냐는 것이다. 그 이유는 창4-5에서 에노스에 대해서 알 수 있는 내용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 같다.
창5.6-11은 에노스에 대해, 그가 90세에 게난을 낳고 815년을 더 살았다는 것 외에는 거의 기록하지 않는다. 그러나 에노스는 창4.26에 소개된다. 이 절은 일반적인 계보의 패턴에서 벗어나는 방식으로, 하늘과 땅의 창조의 이야기를 끝내면서, 이후의 아담의 후손에 대한 이야기로 어조를 바꾼다. 창4.26은 5.6-11과 같은 정보를 포함한다. 즉, 셋이 에노스의 아버지라는 정보를 포함한다. 그러나 이 절의 두 번째 부분은, 새로운 활동의 시작을 설명한다: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였다.
Calling on the Name of the Lord
창4.26b의 ‘주님의 이름을 부르다’ 구절은 구문론적으로 hophal 동사 ‘시작하다’의 부정 보어이다. 이 구절은 접속사 אז로 시작된다. 이것은 일시적으로 또는 논리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 אז는 hophal 동사와 짝을 이루기 때문에, 이것을 이것의 시간적인 의미에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즉, 이때는 사람들이 주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한 때였다.
창4.26의 ‘주의 이름을 부르다’ 구절은 보통 예배의 행동을 설명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 이 이해에 대해 인용되는 증거는 창12.8, 13.4, 21.33, 26.25에서의 이 구절의 반복이다. 이것은 제단을 세우는 배경(아브람12.8; 13.4; 이삭26.25)과 나무를 심는 배경(아브라함21.33)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개인을 설명한다. 그러나 이 배경에서 이 구절을 이해하는 다른 방식이 있다. 즉, 이것은 출33.19와 34.5에서처럼, 야훼의 이름의 선포를 언급한다. 여기서 주는 모세 앞에서 자신의 이름을 선포하는 것으로 설명된다. Ross는 창12.8을 ‘선포’의 사상에 대한 증거로 포함한다. 그러나 그 근거에 대해서는 거의 제공하지 않는다. 이 두 선택들 간의 선택에 대한 열쇠는, 어려운 단어인 קרא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에 있다: ‘부르다’ 또는 ‘선포하다’.
Translating קרא
HALOT 1128-32와 BDB 894-96은 이 동사 stem의 두 개의 다른 사용들에 주목한다: I. 연설과 관련됨, II. 만남을 언급함. 더 일반적은 연설과 관련된 첫째의 용법은 창4.26b에서 나타난다. 그렇기는 하지만, HALOT는 קרא의 11개의 가능한 다른 번역들을 나열하며, BDB는 이 동사의 qal 형태가 만들어질 수 있는 6개의 방법들을 제공한다: ‘call, 부르다. 선포하다, 크게 읽다, 부르다, 이름을 짓다’. 이 동사에 대한 가능한 영어 번역들 중 결정하는 것은 이것의 배경에 의존한다. 즉, 이 단어가 발생하는 즉각적인 구절과 이 구절이 위치하는 문장.
정확한 구절 קרא בשם יהוה는 모세5경에서 10번 더 나타나며, קרא는 세 가지 다른 방식으로 번역된다: ‘부르다’(창12.8; 13.4; 21.33; 26.25), ‘이름 짓다’(창16:13; 출17.15; 35.30), ‘선포하다’(출33.19; 34.5; 신32.3). 이 모든 경우에서 이 구절의 비슷한 형태는, 전치사 ב가 행동의 목적을 지칭하는 것으로 기능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와 같이, 각 경우에 ב를 번역하는 것은 불필요하다. 다른 단어들에서, קרא ב의 ‘부르다’로의 번역은 ב의 존재에 의해서 요구되는 ㄱ서이 아니다. 그러므로 다른 두 번역들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이름 짓다’ 그리고 ‘선포하다’. 영어 해석들 간의 선택은 이 구절이 사용된 문장들의 넓은 배경에 의해서 결정된다.
창12.8, 13.4, 21.33, 26.25에서, 더 넓은 배경은 제단이 건설에 대한 언급을 포함한다. 따라서 왜 קרא בשם יהוה 구절이 이것의 의도한 언급대상과 같이 예배의 행동과 함께 ‘부르다’로 번역될 수 있는지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창4.26의 즉각적인 배경에서 제단에 대한 언급이 없다. 결과적으로 4.26을 예배에 대한 언급으로 이해하기 위한 배경적인 필수요소가 없다. 창16.13, 출17.15, 35.30에서, קרא의 내용을 제공하고 קרא가 언급하는 목표의 ‘이름’을 나타내는, 동사 뒤의 분리된 구절이 있다 - ‘보시는 하나님’(창16.13), ‘주는 나의 깃발’(출17.15), ‘유다 지파 사람, 훌의 손자이며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출35.30). 동사에 대한 내용을 주는 창4.26에서의 분리된 구절이 없기 때문에, 이것은 선택지에서 ‘이름 짓다’를 제외한다. 출33.19, 34.5, 신32.3에서, ‘선포하다’는 קרא의 최선의 해석이다. 논의가 되고 있는 동사의 대상은 ‘주’인 출애굽기의 절들 모두에서, 즉각적인 배경에서 제단에 대한 언급들이 없고, 이름 짓는 대상을 언급하는 구절이 없다. 이에 기초해서, ‘선포하다’의 번역은 이 특정한 예들에서 קרא에 대한 해석을 널리 받아들여진다. 신32.3에서 이 구절의 경우가 출애굽기에서 이에 해당하는 경우가 비슷하다. 왜냐하면, 즉각적인 배경에서 제단에 대한 언급을 포함하지 않고, 동사에 대한 내용을 제공하는 구절을 포함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중요한 차이를 포함한다: 주가 동사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 주의 이름에 대한 찬양의 노래를 선언한다. 이것이 하나님이 대상이 아닐 때, ‘주의 이름을 선포하다’를 의미하는 קרא בשם יהוה의 예를 제공하기 때문에, 중요하다. 그러므로 이것은 창4.26이 ‘주의 이름을 선포하다’로 번역되어야 한다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따라서 좋은 배경적인 이유들에서, 이것은 창4.26b를 야훼의 이름의 선포를 시작한 것으로 설명하는 것은 가능성이 있다: 제단/나무의 언급의 부재와 주어진 이름의 내용을 나타내는 분리된 구절이 부재. 이러한 배경적 특징들이 역시 없는 다른 경우들에서, 이 절은 ‘선포하다’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신을 선포하거나(출33.19, 34.5)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주의 이름을 선포하기 때문이다(신32.3). שם는 이름과 특성 모두를 의미할 수 있기에, 주의 이름은 주의 특성에 대한 언급이다. 구약성경의 다른 곳에서, 주의 이름은 그의 의로운 특성과 관련이 있다(출9.27; 사45.21; 렘12.1; 습3.5; 시11.7; 116.5; 119.137; 129.4; 145.17; 애1.18; 단9.14; 에9.15; 대하12.6). 즉, 주의 이름을 선포하는 것은 의의 선포자가 되는 것이다.
The Wider Context of Genesis 4.26
창4.26의 이러한 이해는 창4-5의 넓은 배경에 잘 부합한다. 그리고 특히, 이 논문에서 제안된 노아에 대한 논지와 두 가지 방식에서 잘 부합한다.
첫째, 4.25-26의 출생기록과 함께, 셋과 에노스를 통한 새로운 계보는 가인의 계보와 대조적인 것으로 확립된다(4.17-24). 가인의 계보는 그의 형제 아벨에 대한 살인으로 인해서 부정적으로 보이며, 이것은 가인의 계보가 마무리되는 그의 아내에 대한 라멕의 말에서 강화된다(4.23-24). 대조적으로, 아담과 이브는 셋과 에노스를 통해서 새로운 계보를 시작한다. 그들은 긍정적인 시각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셋은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희생을 드린 아벨을 대신하였기 때문이며(4.4), 에노스는 주의 이름/특성의 선포의 시작을 나타내기 때문이다(4.26). 이후의 노아에서 끝나는(5.32) 아담의 계보는, 긍정적인 배경에서 이해된다. 그러므로 노아는 아담의 유산의 궁극적인 상속인이며, 이 유산은 셋의 탄생으로 재시작되며, 그의 아들 에노스의 생애 동안 주의 이름의 선포를 시작함으로써 나타난다. 노아는 에노스로부터 선포자의 8번 째 세대이다.
이 지점에서, 창세기의 계보가 에노스로부터 시작되지 않는다고 반박될 수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계보적 패턴을 부수는 에노스에 대한 서술은 – 자신의 생애에서 주의 이름을 처음으로 선포하기 시작한 사람으로서 – 그와 함께 새롭게 시작한 무엇인가를 나타낸다. 이것은 계보가 아니지만, 이것은 그 다음의 계보를 이해하기 위한 톤을 세팅하는 설명이다. 이에 더해서, 유대인과 기독교인 번역학자들은 모두 에노스를 새로운 시대의 시작으로 보았다: 선(하나님 예배의 시작) 또는 악(세계에서의 악의 출현). 따라서 예를 들어, Philo는 ‘On Abraham’에서 에녹과 노아를 논의하기 전에, 에노스의 경건한 계보에 대한 설명을 시작한다. 이에 더해서, Vermeylen는 창4.26과 5.28-29 사이의 관계와 관련된 문학적인 문제들의 많은 것이, 만약 창세기의 pre-P 텍스트에서 5.28이 4.26 바로 다음에 온다면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그러므로 노아는 직접적으로 에노스의 뒤를 잇는다.
둘째로, 노아는 의로운 사람으로 설명된다(6.9). 이 설명은 그가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의 언급으로 확대된다. 즉, 의로움은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 같은 설명이, 즉각적인 배경에서 에녹을 묘사하는데 사용된다(5.24). 그는 주의 이름을 선포한 셋과 에노스의 계보의 멤버이며, 아담으로부터 에녹의 위치를 언급하는 창세기와 동일한 이해를 사용하는 유14에서 언급된다.
Conclusion
이 논문은 벧후2.5가 노아를 ὄγδοον δικαιοσύνης κήρυκα인 것으로 설명할 때, 노아가 에노스로부터 새로 계산되는 아담의 계보에서의 의의 8번 째 선포자로 이해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야훼의 이름을 ‘부르는’ 예배가 아닌 ‘주의 이름을 선포하는’ 행동의 시작에 대한 설명으로서, 창4.26의 마지막 절의 해석에 기초해서 제안된다.
벧후2.5에 대한 이러한 이해가, 앞서 제안하였듯이, 원래의 ὄγδοος의 용법에 대한 적절한 이해이다. 이것은 그리스어 κοινή의 서수들의 받아들여지는 용법과 일치하며, 유14에서 서수의 사용과 병행한다. 이것은 또한 어떻게 노아가 설교자로서 그려질 수 있는지를 설명하며, 창4-5의 계보와도 일치한다.
첫댓글 방주에 여덟번째로 들어갔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리고 노아는 아담 8대손이 아닌 10대손이구요
글을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노아는 에노스의 8대손이며 에노스가 주님의 이름을 선포하기 시작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방주에 여덟번째로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추측일 뿐인 것 같습니다. 성경을 그렇게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위험하겠죠. 물론 이건 크게 중요한 내용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번역하기 전에는 중요한 내용일 줄 알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