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방곡곡 수작하는 부랑배들의 반란음모 그날 밤 채희재는 "나는 채제공(蔡濟恭) 종손으로서 이 나이까지 공부는 했으나 김가들의 세 도정치가 남인(南人)으로 모는 바람에 과거도 단념하고, 이렇게 산수를 찾 아서 돌아다니며 세월을 보냅니다." 신세한탄겸 자기 소개를 했다. 그리고 주인 눈치를 보면서 세상에 대한 불 평을 늘어 놓았다. 이명섭 형제는 그를 경계하면서 그의 정치 불평에는 관 심이 없는 듯이 지나는 말로 흘려 듣고만 있었다. 신분도 모르는 사람의 이런 불평에 맞장구를 치다가 화를 입을까 두려웠다. 혹 자기들의 내심을 염탐할고 온 밀정인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도련님들은 나를 수상한 사람으로 의심하는 것 같은데, 실은 연안 김진사 하고는 생사를 맹세한 동지입니다. 김진사가 요전에도 댁에들려서 세상 이 야기를 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하고 채희재는 갑자기 친밀한 표정을 지으면서 음성을 낮추었다. "김진사의 뜻이 바로 내 뜻입니다. 김진사가 도련님 선친과 막역한 사이가 아니었습니까?" "예, 김진사는 선친과 친하셨고, 선친이 돌아가신 뒤에도 가끔 들려서 외 로운 우리 형제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김진사는 우리들 동지와 함께 큰 꿈을 꾸고 있습니다. 요전에 와서도 초 도에 새로운 왕기가 돈다는 말을 하셨죠?" "네. 그러나 그게 정말입니까?" 이명섭도 안심하고 채희재의 말에 끌려 들었다. "지금 임금이 무식한데다가 몸도 나약해서 멀지 않아서 병몰하겠지만 살아 도 없애야 할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 뜻있는 동지들은 멀지않아서 도련 님을 신왕으로 모시려고 전국의 충의지사(忠義之士)를 규합 중에 있습니 다." "여러분의 뜻은 고맙습니다. 그러나 그런 큰 일이 어찌 쉽겠습니까?" "도련님은 이 조그만 섬에 계시니까 서울사정과 전국의 민심을 모르실 겁 니다. 그러나 시운은 무르익어 거고 있습니다. 우리 동지의 의거(義擧)를 믿고 기다리십시오. 모든 일은 우리 동지들이 하겠으니..." 이명섭도 자기를 임금으로 추대해 준다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그전에 김 진사가 하던 말보다도 확고한 태도로 다짐하는 채희재의 말에 세상형편이 그렇게 돌아가는 듯하기도 했다. 직접 행동으로 나와서 모험을 하라면 겁이 나서 거절 하겠지만, 그 비밀만 알고 기다리라는 말까지 사양할 생각은 없었다. '일이 실패하지 않도록 잘해 주시오.' 하는 말을 하고 싶을 정도로 마음이 동했다. 채희재는 그런 이명섭 형제의 심중을 살피자 무릎을 탁 치고 자신만만하게 역설했다. "염려 마시고 기다리시오. 우리도 일을 섣불리 하다간 역적으로 몰려서 죽 을 텐데 조심 않겠습니까. 그리고 시운과 실력에 자신이 없이 어찌 경거 망동을 하겠습니까?" 하고 밤이 늦도록 철종의 욕과 척신 안동 김씨 타도를 역설하고 이튿날 아 침에 그 집을 떠났다. 이명섭 형제는 멀지 않아서 임금이 될 듯해서 흥분했다. 좁은 섬에서 육지 에도 가보지 못한 그들은 글은 읽었지만 정치세계가 얼마나 복잡하고 위험 한 것을 모르는 순진한 청년들이었다. '무식한 강화도 나무꾼 원범이도 되는 임금이라면 우리 형젠들 못 될 법이 있으랴.' 하는 기묘한 망상조차 하게 되었다. 그리고 채희재는 연안으로 가서 진사 김응도에게 풍을 쳤다. "이번엔 초도로 가선 이명섭 형제에게 우리 뜻을 털어놓고 얘기해서 잘해 달라는 부탁까지 받았소. 관상을 보니 그만 인물이면 훌륭한 임금입니다. 역시 김진사 눈이 높아요." "이제 동지를 모아 자금을 조달합시다." 하고 두명은 구체적인 행동에 나섰다. 그들은 무식한 시골 부자들에게 새 세상이 되면 큰 벼슬을 시켜 준다고 돈 을 받아내고, 중병자에겐 병을 고쳐 준다고 속여서 정치 자금을 모았다. 그리고 채희재는 대담하게도 친구 사이인 구월산성의 별장(別將)에게까지 군사비 중에서 돈을 대고 병력도 협조시키라고 권하다가 코만 떼고 말았 다. "내가 친구로 알고 한 말이니 비밀만 지켜주게." 채희재는 애걸했다. "친구를 고발해서 죽게야 할 낸가? 그러나 그런 허무맹랑한 음모는 그만 두어야 하네. 그만둔다는 약속을 하면 고발만은 않겠네." 산성별감은 위협조로 충고했다. "허허허, 자네도 아다시피 내가 홧김에 해본 소리지, 그런 무모한 짓이야 어찌 하겠나? 그만두고 말고 할 것이 있겠나? 농담이니 염려말게." 그런 수작으로 산성별장의 고발만은 모면했다. 그러나 자금이 조달되자 불 량배의 장사 (壯士)들을 매수해서 폭력으로 세상을 뒤집어 엎을 모의를 했다. 그런데 이들 중의 한명으로 그전에 포교를 지낸 고성욱(高成旭)이라는 자 는 문화현(文化縣)에서 행동대 병력을 거느리고 평양으로 나갈 임무를 맡 고 있었다. 그러나 점점 내막을 알고 보니 허장성세(虛張聲勢)의 협잡성을 알게 되자 겁이 났다. '에라 언제 볼 작자들이냐. 공연히 역적으로 잡혀 죽느니보다 이 기회에 벼슬이나 하자.' 하는 생각으로 몰래 서울로 가서 포도청에 밀고했다. 포도청에서는 대사헌(大司憲)에 보고하고 곧 황해도로 병력을 출동시켜서 김응도, 채희재 외 주동자와 그 부하들을 일망타진했다. 그리고 그들이 초 도의 이명섭을 추대한다는 내막이 드러나자 그들 형제도 잡아들였다. 이로써 초도의 왕기는 사라졌고, 음모를 고발한 고성욱만 상으로 오위장 (五衛將) 벼슬을 했다. 전에는 철종의 사촌동생 경평군(慶平君)이 희생되었고 이번에는 십육촌의 이명섭 형제가 희생되었다. 다음에는 완창군(完昌君)의 아들 이하전(李夏 銓)이 또 희생될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이하전을 추대하려던 김순성과의 관계는 앞에서 본바와 같았으나 그 뒤에 이하전은 돈녕도정(敦寧都正)의 한직에 있었고 당시의 종친으로서는 유일 한 관직자로 남아 있었다. 그는 왕족이 반란음모에 이용되는 페단을 알고 있었으므로 모든 언행을 조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하전이 모르는 동안에 김순성 오위장은 이하전을 임금으로 추대 하려는 음모를 꾸준히 해왔다. 그는 그전에 현감(縣監)을 지내다가 김씨 세도의 여파로 몰려난 후에 불평을 품고 있던 이긍선(李兢善)과 의기가 투 합(投合)했다. 시골로 돌아다니며 불평객 친구들과 연락하고 서울로 돌아 온 김순성은 우선 이긍선의 집을 찾아갔다. "영감, 시골 다니면서 동지들과 연락하고 왔습니다. 그런데 지방민의 인 심도 모두 김가 세도에 진저리를 내고 있으며 병신 임금을 몰아내고 새 세 상이 돼야 살겠다고 아우성들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거사할 시기가 왔다 고 봅니다. 새 임금으론 전에 다 말씀 드렸지만 돈녕도정 이하전, 그 분 을 모시면 정계에서도 세상에서도 환영할 것입니다." "그야, 지금 왕족으론 그 분밖에 없으니까 그분을 추대하는 건 좋지만 우 리 둘 힘으로야 어찌 세상을 둘러 엎겠는가? 일할 행동대가 있어야지." "지금 장사로 유명한 자로선 네명이 있는데 모두 협력하기로 약속했습니 다. 그들의 부하가 또 각각 많으니까 문제 없습니다." 오위장으로 행새하는 김순성은 건달 두목들과 안면이 넓어서 임일희(任馹 熺), 이재두(李載斗), 고제유(高濟儒), 정유성(鄭裕誠) 등과 손을 잡게 되 었다고 자랑했다. "허어 자네 활동이 놀랍군." "그래서 황해도 곡산(谷山)으로 가서 정유성을 만났고, 잔라도 해남으로 가서 임일희도 만나고 왔습니다." "음, 그러나 거사할 시기는 더 두고 연구해 보세. 그러는 동안에 실력이 나 더 길러 두기로 하고..." "아닙니다. 우리가 안해도 딴 패가 일어설 것입니다. 기왕이면 먼저 해 야지 늦으면 다음 세상도 딴 놈들 세상이 됩니다." "그럼 거사할 준비를 하세." 그들은 장사들을 매수해서 그들 부하의 부랑배를 이용할 계획을 세우고 그 들이 사용할 무기를 마련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장사들에게 칠월 오일에 궁중으로 쳐들어 가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병력 모집이 여의치 않아서 팔 월 십일로 연기했다. 그러나 음모 내용이 허술한 것을 알게 된 장사의 하나인 이재두가 김순성 의 협잡성을 의심하게 되었다. 우선 현재 진행 중인 음모의 내용이 이상했 다. 일을 연기하는 것도 실력이 없음을 나타내는 것 같았다. 그뿐 아니라 그가 오위장으로 출세한 것도 그전에 천주교도를 팔아 먹은 배신행동으로 이룬 것이 꺼림했다. '저놈이 이러다가 일에 자신이 없게 되면 또 우리를 팔아 먹을지도 모른 다. 아니 처음부터 팔아 먹으려고 꾸민 협잡인지도 모른다. 그놈 장단에 춤추다가 역적으로 몰려 죽고 그놈만 출세시켜 주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장사 임일희에게 상의했다. "설마 그럴 리야 있나. 더 참고 있게. 내가 자네보다 더 가까우니까 잘 알 아 보겠네. 그가 배신할지 모른다는 의심만으로 자네가 배신하면 그보다 나쁜 사람이 되지 않겠나. 죽어도 의협심을 지킬 자네가 그런 비겁한 행동 을 해서야 되겠나." 하고 이재두를 타일렀다. "그럼 기다려 보지요." 이재두는 임일희의 충고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한번 의심한 그는 점점 불 안해지기만 했다. 그는 임일희도 모르게 포도청에 밀고했다. 포도청에선 곧 김순성을 잡아서 엄중한 고문을 했다. 이때 이미 영남지방에서는 조정을 규탄하는 행동과 재물을 강탈하는 등의 민란(民亂)이 일어나고 있었으므로 서울에서 이런 흉계를 꾸민 음모사건은 본보기로서도 엄단해야 한다고 김씨 일파에서 들고 일어섰다. 102- 무능한 지존에 외척은 날뛰고... 고문 결과 완창군의 아들 이하전을 임금으로 추대하려던 내막도 드러났다. 영문도 모르던 이하전은 잡혀서 문초를 받았다. 그러나 이십이 갓 넘은 이 하전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의 무죄를 주장했다. 김순성은 부친 재세시에 집에 온 것을 본 일은 있지만 그 후 수년 동안 만난 일조차 없다 는 사실을 증명했다. "저들이 무슨 일을 했는지 전연 모릅니다. 그자들이 흉계를 꾸미느라고 혹 내 이름을 팔았다 하더라도 나로선 모르는 일이니까 나를 괴롭히지 마시 오. 그자들 중에서 나를 만나서 그런 모의의 말 한마디라도 한 사실이 있 는지 그 자들이나 철저히 조사해 주시오." 추관(推官)이 김순성 등을 조사한 결과 자기들 마음대로 이하전을 추대하 려고 했을 뿐 이하전과의 접촉은 없었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추관도 이하 전에게는 오히려 미안하게 여기고 일단 석방하고 근신하라는 훈계를 받았 다. 그러나 김순성, 이금선 등을 역적죄로 참형한 뒤에, 김씨 일파는 이하전을 없애 버려야 금후에는 그런 추대음모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사건에 관련시 켜서 처단할 것을 주장했다. 철종도 마지 못해서 이하전을 제주도로 귀양 보냈다. "이하전은 소년 때부터 우리 김씨 일문을 원수로 삼아왔다. 과거 때도 우 리 김씨 일문을 욕한 일이 있었다. 이번 일도 그놈이 주동이 되진 않았더 라도 정(情)을 알면서 성공하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좌우간 그 놈은 우리 김씨의 적이다. 이 기회에 없애 버려야 한다." "귀양 보냈으면 됐지 억울한 종친은 그 이상 벌할 수가 있느냐?" 온건파에는 이런 주장도했다. 그러나 김씨파에서는 직접 철종에게 대들었 다. "이번 역적음모도 이하전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상감께서 종친이라고 사정 을 두고 살려 두시면 또 언제 반란을 일으킬지 모릅니다. 그는 또 종친의 세를 믿고 충성된 척신을 타도하려고 벼르고 있습니다. 그런 자와는 같은 하늘 밑에서 상감을 보필하기 어려우니 불신 받는 우리는 조정에서 물러나 겠습니다." "나야 종친이라고 무슨 두둔을 하겠소. 귀양 보내는 것이 옳다고 하기에 그러라고 했을 뿐이요. 귀양이 경하다는 경들의 의견이라면 적당히 처분 하시오." 그전에도 이런 식으로 사촌동생 경평군까지 희생시킨 철종이었다. 그런데 덕흥대원군의 후손인 이하전은 촌수도 먼 일가로서 개인적으로도 정이 들 지 않은 왕족이었으므로 김씨 주장에 맡겨버린 것이다. "상감께서 이하전을 대역죄(大逆罪)로 사사(賜死)하라시는 엄교(嚴敎)가 내리셨다." 김씨 일파는 곧 이하전에게 독약을 내리는 절차를 취했다. 그래서 제주도 로 귀양간 이하전은 목숨만 산 것이 다행이라고 체념하고 있다가 왕이 내 렸다는 독약을 마시고 세상을 떠났다. 김씨 일파는 이로써 왕족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그러고도 분을 풀지 못했는지 서울에 남았던 이하전의 모친 과 아내까지도 그가 죽어 없어진 제주도로 귀양 보냈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안동 김씨의 행패가 너무 과격해서 왕실의 인륜까지 끊 으면서 자파와 정권연장에만 급급하다는 비난이 높아갔다. ‘왕족도 우리 앞에 맥을 못 춘다. 하물며 불평정객이나, 성명 없는 백성 이 김씨 세도에 반대하겠느냐?’ 하는 김씨 일파의 기세는 기고만장했다. 그러나 천운(天運)과 민심은 이미 철종과 안동 김씨한테서 멀어지고만 있 었다. 철종은 얼마 후 삼십삼세의 청년으로서 후계 시킬 아들도 없이 과음(過淫) 여독의 부족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 철종의 승하를 계기로 척신 세도로 극성(極盛)을 부리던 안동 김씨도 급전직하로 몰락해 버렸던 것이 다. 사사로운 집안에서도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서 양자를 하면 가정불화가 생 기기 쉽다. 더구나 왕실(王室)에서는 더욱 심하다. 세자가 없어서 종친 (宗親)의 소년을 맞아 임금으로 세우는 수가 있을 때 이런 양자임금을 가 리켜서 입승 대통(入承大統)이라고 한다. 철종(哲宗)의 선왕(先王) 헌종(憲宗)이 무후(無後)해서 부득이한 사정으로 강화도에서 곤궁히 지내던 빈농소년(貧農少年)을 맞아서 임금을 삼은 것은 앞에서 본바와 같이 소위 강화도령(江華道令)으로서 등극한 철종이었다. 선왕 헌종이 이십삼세의 청년임금으로서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 났듯이 철종도 삼십삼세의 단명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역시 아들이 없었다. 그런데 헌종과 철종 이대의 임금은 모두 무능한 임금이었다. 헌종시대에는 모친 신정후(神貞后) 조대비(趙大妃)의 수렴정치(垂簾政治)로서 외척(外 戚) 조씨가 세도를 부렸다. 그리고 철종시대에는 외척 김씨(金氏)가 세도를 부렸는데 이 두 국척(國 戚) 사이의 추잡한 파쟁 속에서 철종은 무위 무능한 임금으로 치맛바람에 취하여 스스로 젊은 생명을 소모해 버렸던 것이다. 일개 무능한 임금의 죽음은 인간적으로 동정이나 해주면 족했지만 지존(至 尊)한 그 임금의 뒤를 잇는 자리다툼에는 실로 국가의 운명이 좌우되지 않 을 수 없었다. 철종이 세상을 떠난 뒤에 다음 임금을 모시는 문제로 세도 하던 외척의 김씨와 조씨 사이에는 치열한 경쟁의 암투가 있었다. 결국 조대비는 흥선군(興宣君)의 둘째 아들을 맞아서 고종(高宗)으로 등극 시켰다. 그 뒤로는 흥선군이 어린 임금을 대신하는 영악한 집권자(執權者) 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 흥선군이 바로 조선말기(朝鮮末期)의 역사를 뒤 흔들고 민비(閔妃)와 함께 나라를 망쳐버린 대원군(大院君)이다. 103- 33살에 주색잡기에 탕진한 목숨 철종이 세상을 떠나고 고종이 양자임금으로 들어선 시기는 조선왕운(朝鮮 王運)이 이미 기울었고 백성은 부패한 세도정치(勢道政治)에 지칠대로 지 쳐서 생활이 말 아닌 상태에 있었다. 위로는 왕위 쟁탈과 당파의 알력으로 집권층의 암투가 계속되어서 암살이 횡행했고 아래로는 병란(丙亂)과 민란 (民亂)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조선의 정치가 이처럼 부패 문란하고 민생이 도탄에 빠져 있을 때, 밖의 세계는 십팔세기부터 과학문명의 발달과 함께 부국강병(富國强兵)의 경쟁 이 치열해서 식민지 확장정책에 여념이 없었다. 이러한 구미(歐美) 열강의 세력은 점점 동양으로 손을 뻗어 왔다. 중국은 서양 열강의 강요로 굴욕적인 개항(開港)과 할양(割讓)을 하지 않을 수 없 었고, 일본도 삼백년 동안의 봉건전제(封建專制)의 막부정권(幕府政權)이 무너지고 명치유신(明治維新)을 단행해서 서양문물을 수입 활용하여 근대 국가(近代國家)로서의 새출발을 착착 진행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의 왕실과 위정자들은 이러한 동서양의 국제정세와는 고립해서 오직 왕위와 정권의 쟁탈에만 몰두하면서 소경 제 닭 잡아 먹는 우거(愚 擧)만 일삼고 있었다. 그러나 거센 외세(外勢)의 바람은 우리 한반도(韓 半島)에도 불어와서 마침내 외국 군함에서 쏘는 대포소리에 놀라게 되었 다. 대원군은 이에 대한 자위(自衛)로 쇄국(鎖國) 정책을 단행했으나 결국 방 안의 호랑이 노릇에 지나지 못했다. 그와 호적수였던 민비는 교묘한 외세 이용의 번복으로 자파 세력 유지에 급급했으나 결국 제 꾀에 빠져서 죽은 여우에 지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1863년(哲宗 十四年) 봄에 아직도 삼십삼세의 젊은 임금으로 거품 꺼지 듯 이 허약해진 목숨을 거두고 말았다. 궁중과 집권층 양반들은 임금의 죽음 보다도 자파(自派)의 세도를 유지할 수 있고 또는 부활시킬 수 있는 임금 을 택하기에 골몰했다. "세자를 정하지 못한 채 승하(昇遐)하셨으니 어떤 분으로 입승대통(入承大 統)해야 좋을까..." 모두 왕실을 위하는 충성스런 말을 수색 띤 얼굴로 걱정했다. 그러나 검은 뱃속에선 '이 기회에 꼭 우리 파에 유린한 분을 업고 들어가야겠다.'하는 야심으로 암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반 항간에서는 쉬쉬하면서도 철종이 일찍 죽는 병인(病因)에 대한 화제에 더 흥미를 느꼈다. 흰 것을 쓰고 흰 옷을 입는 국장(國葬)은 단순한 형식에 지나지 않았다. 그만큼 백성의 존경을 받지 못한 임금이었다. 국상이 났다는 소문으로 비 로소 철종이라는 임금이 있었던가 하는 반응밖에 없었던 항간에서는 쉬쉬 하는 풍문에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궁중에서 밤낮 한 일이란 허리 운동밖에 없었다니 무쇠 허리라도 병이 날 것 아닌가. 오랫동안 허리를 못 쓰고 누워서만 지냈다네." "허리 운동은 본디 누워서 하는 게 아닌가?" "젊은 분이 요통으로 죽다니..." "죽을 정도로 색에 곯으셨으니 염복도 많은 임금이셨군." 술자리에서 시정천민(市井踐民)들까지 이런 무엄한 흉을 볼 만큼 철종은 여색으로 몸이 허약해서 스스로 죽음을 재촉한 것이 사실이었다. 아무리 궁중 침실의 허리 운동이라도 인간이 사는 세상에는 비밀이 없었다. 어려서부터 왕자교육(王子敎育)도 받지 못했던 무식한 강화도령에게서 명 군(名君)의 치적을 바라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였다. 결국 등극 동기부터가 당파들의 이용물로 시작된 철종에게는 우선 왕의 실 권을 행사할 만한 소양과 능력이 없었다. 그뿐 아니라 외척 안동 김씨가 국권을 좌지우지 했으므로 한 일도 없고 시키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궁중에서 주색의 환락에만 빠져서 짧은 인생을 취생몽사(醉生夢 死)한 젊은 임금이야말로 인생으로서 가장 불행한 인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철종이 강화도의 도령. 아니 나무꾼 총각으로 도민(島民)의 처녀와 가정을 이루고 빈한한 농부의 생활을 계속하였으면 아마 평범하고 건강한 몸으로 육, 칠십의 수명을 누렸을지도 몰랐을 것이다. 철종은 정비(正妃) 이외에도 무수한 궁녀들과 애욕의 생활을 누린 젊은 임 금이었다. 주지육림(酒池肉林)에서 밤낮으로 정력을 소모한 젊은 임금은 몸이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서 허리까지 제대로 쓰지 못해서 요통증이라는 병명으로 용미봉탕(龍尾鳳湯)의 천하 보약을 썼으나 아무런 효력이 없었 다. 정확한 현대의학으로 진찰했으면 폐병이었을는지도 모른다. 여색의 중독 환자에게는 보양(補陽)하는 정력제도 소용이 없다. 약으로 보충한 이상의 정력을 계속 소모한다면 무슨 선약이 소용 있을 것인가? 몸이 허약해서 여자와의 동침을 감당하지 못하면서도 허양(虛陽)만 동해서 죽는 순간까지 궁녀의 치마폭을 잡고 놓치 못했다 한다. 궁녀들로부터 새어 나온 말이지 만 결코 소박 맞은 궁녀가 꾸며낸 질투의 거짓말은 아니었다. 철종은 허리를 못쓰고 누워서만 지냈다. 궁녀들이 좌우에서 부축해 일으켜 도 머리가 어찔어찔하고 눈에서 오색 불똥이 빙빙 돌다가 눈이 먼 듯 앞이 캄캄했다. 누워 있기에 지루해서 앉아 있으려 해도 혼자는 몸을 가누지 못 해서 등뒤와 좌우에 궁녀들을 앉히고 기대 있어야 했다. 젊고 탄력 있는 궁녀의 몸에 기대어 있으려면 젊은 임금은 또 허양이 동해 서 성적 유혹을 느꼈다. 그러면 궁녀 중 하나의 치마끈을 잡고 바르르 손 을 떨었다. 치마끈을 풀 기력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다른 궁녀들이 자리를 비켜서 그 방에서 나간다. 치마끈을 잡힌 궁녀는 남아서 이미 남 자 구실도 못하는 임금을 만족켜 주지만 궁녀 자신은 아무런 쾌감도 느끼 지 못하는 순간적인 봉사를 해주어야 했다. "아아, 내가 이렇게도 허약해졌을까. 너를 마음으론 귀여워하면서 몸으론 귀여워할 힘조차 없구나. 이러다가는 아들 하나 남기지 못하고 죽을지도 모른다...." "상감마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황송하오나 쾌차하실 때까진 여자를 가까이 하지 마옵시면 어떠세요?" 궁녀로서도 상감의 건강을 염려하고 말했다. 여자로서도 무의미한 육체의 봉사가 쑥쓰럽기도 했을 것이다. "너까지 나를 실망시키느냐?" 임금은 노염과 탄식섞인 음성으로 궁녀의 허리를 껴안았으나 팔에는 힘이 없었다. "그런 말이 아니오라..." "아, 다 듣기 싫다. 너는 나보다도 힘차게 오래 안아 줄 하인 놈이 더 좋 단 말이 아니냐? 바른 대로 말해라." 임금이 이렇게까지 애원하듯이 추궁하면 궁녀는 의무적으로라도 갖은 성적 아양과 기교를 부려서 무능한 임금을 위로하고 자극해 주었다. 이래서 임 금의 정력은 더욱 소모되고 생명은 단축되었다. "나는 너를 안은 채 죽어도 좋다. 너희들 없이는 살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다." 풍류탕아(風流蕩兒)는 남자의 죽음은 여자와 동침 중에 복상사(腹上死)가 제일 좋은 인생의 최후라고 한다지만 이 젊은 임금의 건강은 이미 복상할 기력조차 없었다. 그러면서도 여색을 단념하지 못하고 환락의 습성도 버리 지는 못했다. 철종 자신으로도 너무 여색을 탐하는 것이 건강에 좋지 못한 것을 알고 있 었으나 그런 반성 정도로는 여자의 치마끈을 놓을 수 없는 것이 야속했다. "아들 하나 두지 못하고 죽을지도 모른다." 하는 철종의 탄식은 왕위를 자기 혈통에게 이어주고 싶다는 희망 이외에 본능적인 고독감이기도 했다. 철종의 환경과 능력과 성격이 정치에 열중할 수 있었다면 그렇게까지 밤낮으로 궁녀들과 성적유희에 빠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정치에 대한 아무런 실권도 없고 할 일도 없는 정력은 어느덧 여색에 빠져 서 무료한 세월을 보내게 되었고, 그것이 습성의 중독이 되어서 마침내 정 력과 생명을 단축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명예롭지 못한 병인(病因)의 화제만 남기고 아들 하나 남기지 못한 채 승하해 버리자 왕실과 세도 정치가들에게는 왕위 계승이란 중대하고 심 각한 문제가 닥쳤다. 이때에 정권을 전횡한 파는 안동 김씨(安東金氏) 일족이었다. 영의정 김좌 근(金左根)은 세상에서 보통 생각할 수 있는 가까운 종친(宗親) 중의 인물 (소년)로서 전계군(全溪君)의 아들 영평군(永平君)과 풍연군(豊燕君)의 아 들 완평군(完平君), 그리고 흥녕군(興寧君) 아들의 사형제 가운데서 임금 을 생각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 외척으로서 가장 발언권이 강했던 국구(國舅) 김 문근(金汶根)이 작년에 이미 세상을 떠났으므로 큰 타격이었고 그때까지 치밀한 사건 공작을 하지 못했으므로 매우 당황했다. "자칫하면 조가(趙家)들이 무슨 음모를 할지 모르니 그쪽 동정을 살펴보 라." 김좌근은 정적(政敵)의 움직임을 경계했다. 조가라 함은 조대비(趙大妃)와 그의 조카 조성하(趙成夏) 등을 가리킨 것이다. 그러나 조대비와 조성하는 안동 김씨 세도에 불평을 품고 철종이 승하하기 전부터 세자책립(世子冊立)에 관한 공작을 은연중에 해왔다. 조대비는 이 기회에 자기 파에 유리한 종족을 다음 임금으로 삼으려는 종전의 계획을 급속히 진행시켰다. 104- 철종의 후계 음모 이런 문제에 대해선 조대비가 결정권을 갖고 있는 것이 궁중 관례(宮中慣 例)였기 때문에 아직 준비도 없고 발언권도 약한 영의정 김좌근파에게는 불리했다. 더구나 조대비 일파의 움직임에 대한 정보에도 아직 어두었다. 한편 조대비파에서는 전격적으로 이 문제를 당행하려고 했다. 왕위 계승에 관한 발언권은 혈통문제인만큼 왕실과 외척(外戚)에 있고 대신들은 의견을 말할 정도이지 결정권은 없었다. 당시의 사정으로 발언권의 순서를 보면 조대비를 비롯한 과부(寡婦) 삼대 (三代)의 왕후가 첫째요, 외척의 세력과 관계로는 철종비(哲宗妃)의 외척 인 안동 김씨파가 둘째요, 익종비(翼宗妃)의 외척인 풍양 조씨(豊穰趙氏) 가 셋째, 헌종비(憲宗妃)의 외척 남양 홍씨(南陽洪氏)는 미미한 존재에 지 나지 못했다. 철종이 승하하자마자 조대비는 궁중의 최고 위의 권한으로 중신들을 창덕 궁 안의 중희당(重熙堂)으로 소집하고 긴급회의를 열었다. 발을 늘인 상좌에는 신정후(神貞后) 조대비와 익종비와 철종비의 삼대 과 부가 차례로 앉고,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와 남양 홍씨 출신의 중신들이 연석했다. 이 중대회의의 중심격은 물론 조대비였다. 조대비는 비로소 마땅치 않던 외척 김씨의 거두(巨頭)들을 멸시하는 권력의 쾌감을 느끼면서, 다음 임금 으로 어떤 분을 모시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이 자리에서 응당 강경한 복안을 주장할 영의정의 아들 김병기 이하의 안 동 김씨들은 신통한 대책이 없었으므로 서로 얼굴만 쳐다보면서 당황한 빛 을 감추지 못했다. 조대비는 외척들을 비롯한 중신들에게 아직 이렇다 할 안이 없는 것을 알 아채고 자기 생각대로 결정해 버릴 결심을 했다. 만일 시간의 여유를 두 고 생각해 보자고 하면 암투와 잡음이 생길 것을 두려워한 조대비는 당황 하는 중신들에게 명령하듯이 독촉했다. "나 같은 미망인이 이런 망극한 국상을 당하여 원통한 중이나, 지금 나라 사정이 일시의 여유를 허락치 못할 중대 시각이니, 이 자리에서 속히 종사 (宗事)의 대계(大計)를 결정하고, 이 전국대보(傳國大寶)를 계승케 하오." 하고 그 자리에 모셔 내놓은 옥새를 가리켰다. 조대비로서는 계획한 대로의 일대 연기를 한 셈이다. "............." 그러나 김씨 일문을 비롯한 세도가들은 사건이 중대한 만큼 준비 없는 대 답을 경솔히 할 수 없어서 묵묵히 앉아만 있었다. 그것은 침울한 권력투 쟁을 내포한 무거운 침묵이었다. 이때 정계에서는 오히려 세력이 미악하던 팔십 노신(老臣)인 영중추부사 (領中樞府事) 정원용(鄭元容)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이는 이미 조대비와 연락이 되어 있었으므로 역시 예정대로의 역할을 맡고 나섰던 것이다. "여러 중신들이 별로 아뢸 의견이 없는 것은 자성(慈聖)의 명지(明旨)를 기다리는가 하옵니다. 그러하온즉 이 문제는 역시 자성께서 책정하시는 것 이 좋을까 하옵니다." 이 말에 당대의 세도가 김씨 일파는 정신이 아찔했다. 그러나 대의명분으 로 조대비의 독단을 막을 준비도 없었다. 한층 더 침울한 공기가 흘렀다. 조대비는 이 중대한 문제가 뜻밖에도 자기의 생각대로 결정할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하면서 그러나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중대 결정을 발표했다. "그러면 흥선군(興宣君)의 제이자(第二子) 명복(命福)으로 익종(翼宗)의 대통(大統)을 이어 받도록 하고 싶소." 하고 당당한 선언을 했다. 김씨 일파에게는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지금까지 멸시해 오던 흥선군 이 이 순간에 득세하고, 김씨 일파를 조정에서 축출할 뿐 아니라, 보복적 인 살육과 투옥을 감행할 것 같은 공포로 몸이 떨렸다. 흥선군이 자기 아 들을 임금으로 등극시키면 곧 제일의 권력자로서 등장해서 어린 임금의 이 름으로 무소불육의 괴완(怪脘)을 발휘할 인물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대왕대비의 말씀이 지당한 분부로 아옵니다. 황공하오나 후일의 증거로 친히 그 뜻을 글로 써서 내려 주십시오." 하고 정원용이 요청했다. 이 중대회의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조대비와 정원용의 문답으로 된 연극 이요, 다른 대부분의 중신들은 불평을 품은 침묵의 관객에 지나지 못했다. 조대비는 발 안에서 한글의 친필로 한 장의 선언문을 썼다. {흥선군의 제이자로 익종의 대통을 잇도록 하라.} 정원용은 자기가 미리 조대비의 뜻을 받아서 하는 연극이라는 눈치를 채이 지 않기 위해서 심중한 태도로 일을 진행시키려고 도승지(都承旨) 민치상 (閔致庠)에게 부탁했다. "도승지, 이 교서(敎書)를 한문으로 번역해서 좌중에 들려 주시지요." 한문으로 번역된 조대비의 교서 낭독을 들은 안동 김씨들은 과부인 조대비 의 말로 들을 때보다 글로 되자 자기들에게 내린 냉혹한 사형선고문 같이 무서워졌다. '이제 흥선군 손에 우리 안동 김씨는 다 죽겠구나!' 하는 한숨이 여기 저기서 새어나왔다. "대왕대비께 아뢰오. 사왕(嗣王)은 아직 봉군(封君)하지 않고 계시오니 먼 저 봉군하도록 분부를 내리시오." 역시 정원용이 절차순서를 요청했다. "과연 그렇소. 익성군(翼成君)으로 봉하고 곧 궁중으로 모셔들이도록 예를 갖추어 마중 가게 하오." 조대비가 봉군(封君)의 칭호까지 그 자리에서 지어서 발표하는 것을 본 중 신들은 미리부터 치밀한 준비를 해 왔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더욱 놀랐다. 그리고 흥선군 - 즉 신왕(新王)의 생부(生父) 이하응(李昰應)의 야망이 번 개같이 성공한데 놀랐다. 세도 정치를 하던 안동 김씨 일족은 임금으로 왕실에 들어앉은 이명복(李 命福)이라는 소년이 문제가 아니고 그의 생부인 흥선군 이하응이 섭정세도 (攝政勢道)로 정권을 빼앗기게 될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흥선군 이하응은 그때까지 관도령(官道令)이라는 별명으로 불려온 몰락왕 족(沒落王族)으로서 세도하던 안동 김씨의 멸시를 받아 왔었다. 일반 양반 사회에서도 그를 장안의 부랑자(浮浪者)로 여기고 교제조차 하기를 꺼려했 던 사람이었으나 아들이 고종(高宗)으로 즉위(卽位)하게 되자 일약 대원군 (大院君)이 되어서 정권(政權)을 장악해 버리고 자기 마음대로 국사를 요 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살고 있던 운현동(雲峴洞)의 집도 운현궁(雲 峴宮)으로 존칭하게 되었으니 이때야말로 운현궁은 꽃피는 봄을 맞아 최고 의 행운으로 빛나게 되었던 것이다. 흥선군은 1,820년, 즉 순조(純祖) 이십년에 안국동(安國洞)에서 종친(宗 親) 이병원(李秉源)을 조부로 남원군(南原君) 이구(李球)를 아버지로 하여 넷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부인은 민씨(閔氏)였다. 영조(英祖)의 현손(玄孫) 뻘이 되고 자(子)는 시백(時伯), 호는 석파(石坡)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대담한 성격으로서 기국(器局)이 크고 호탕했다. 헌 종(憲宗) 구년에 흥선군으로 봉군(封君)되었고, 같은 십삼년에 중국으로 가는 동지사(冬至使)의 물망에 올랐으나 실격(失格)하고 말았다. 그는 이 때부터 관운이 비색했으며 동시에 세도가들에 대한 불평객이 되었다. 그 후에도 종친부유사당상(宗親府有司堂上)이니, 또는 오위도총부도총관 (五衛都摠府都摠管)이니 하는 미미한 한직(閑職)에서 썩고 있는 신세에 지 나지 못했다. 그 이유는 헌종과 철종의 시대에는 외척 안동 김씨가 정권 을 독점하고 왕족의 유능한 인물일지라도 정계 진출을절대 허용하지 않았 기 때문이다. "김가 놈들이 왕실과 국가를 망쳐버리고 있다. 그러나 내가 죽기 전에 그 놈들 역적을 소탕해 버리겠다." 불우한 시대에 태어난 흥선군은 시정의 부랑배와 불평정객들과 막걸리 타 령을 하는 자리에서 이런 소리를 탕탕했다. 그러나 안동 김씨는 이런 몰 락 왕족의 불평을 문제도 삼지 않고 무시해 버렸다. "외척의 세도가 우리 왕족을 다 역적으로 몰아 죽이더라도 나는 놈들의 손 에 죽지 않는다. 놈들의 원수를 갚지 않고는 죽지 않는다." "대감께서 그런 큰 소리 하는 것도 우리들 같은 서민과 술친구가 된 덕분 인 줄 아시오." "만일에 그자들이 두려워할 만한 세력이라도 있어 보시오. 당장에 도정궁 (都正宮)과 경평군(慶平君) 같은 참변을 당하실 게 아니오?" "우핫핫핫, 그러니까 자네들과 술타령하는 것이 역시 제일이야." 하고 흥선군은 호탕하게 웃었다. "그러나 흥선군도 세도하게 되면 우리들 막걸리 친구를 잊으실걸요." "그땐 기생집 유흥비며 노름돈 걱정은 시키지 않을 테니 염려 마라. 큰 감 투는 자네들 머리에 어울리지 않으니까 적당한 호강을 시켜 줄게 두고 보 아라." 흥선군의 시중의 서민 부랑자들과도 이렇게 친한 교제를 하고 취중 농담으 로 정치적인 세력의 씨를 뿌리면서도 심중의 큰 야심은 숨기고 있었다. 불 평과 고민을 이런 부랑자들과의 술타령으로 잊으려고 했으며 유명한 난초 그림(蘭畵)의 청아(淸雅)한 풍류로 고독을 위로했다. 그리고 무슨 일을 몰 래 꾸미는데도 뒤에서 기안묘책(奇案妙策)으로 동지를 지휘했다. 헌종 때에는 세도하는 외척 김씨 때문에 왕족들이 숨도 못 쉬던 수난을 겪 어야 했다. 철종 십삼년에는 도정궁 이하전(李夏銓) 사건이 발생했다. 왕 족 이하전은 기개가 높은 인물로서 영의정 권돈인(權敦仁)의 지지를 받고 철종 대신으로 왕위계승(王位繼承)의 후보자로까지 등장했다. 그러나 외척 김씨들은 그런 유능한 인물을 임금으로 맞아들이면 자기들의 세력에 방해가 되리라는 생각에서 반대하고 무능한 강화도령을 철종으로 맞아들이게 했던 것이다. 그때는 그것으로 무사했으나 이하전을 지지하는 영의정 권돈인을 몰아낸 뒤에는, 이하전이 왕위를 찬탈하려는 대역죄(大逆 罪)로 몰아 없애고 연루자 이긍선(李兢善)과 김순성(金順性) 등도 처형하 였다. 이 사건도 그들을 배척해 버리기 위하여 김씨 일파가 꾸민 연극임을 세상에서는 의심하지 않았다. 105- 타락한 유야랑(遊冶郞)을 가장(假裝)한 대야망 이 사건보다도 이년 전인 철종 십일년에도 왕족 경평군 이호(慶平君 李皓) 도 세도하는 외척을 비난했다는 설화(舌禍)로 원도(遠島)로 귀양을 갔다. "경평군도 김좌근, 김문조 등 세도 외척의 욕을 하다가 그런 봉변을 당했 으니 대감도 말조심하시오." 하고 술친구들이 충고하면 흥선군은 껄껄 웃으면서 "그 분은 같은 말을 해도 상대자가 자네들 같은 무식쟁이 망나니가 아니고 꽁한 샌님들과 찬물만 마시면서 심각한 표정으로 했으니까 무슨 음모라도 한 것처럼 몰아대기 쉬웠던 거야." "그렇지 않소. 경평군의 말동무가 우리들보다 유식한 양반이래서가 아니라 대감이 경평군만도 못하게 김씨일족에게 무시당하고 있는 덕분입니다." "허긴 그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놈들에게 철봉을 가할 순간까지 내가 무능 력한 주정뱅이로 인정되기를 나는 바란다." "그러면 우리는 대감의 신변보호를 하는 광대란 말인가요?" "그러니까 내가 막걸리라도 사는 게 아니냐? 아무튼 이런 시절엔 술이나 먹는 게 제일이다. 그런 얘기를 하면 술맛이 쓰다. 자! 잔이나 들까." 그런 농담을 하면서도 그는 경평군이 세도가 김좌근의 욕을 한 죄로 작호 (爵號)를 박탈당하고 귀양까지 갔던 사실에는 항상 분개하고 있었다. 그래 서 그는 후일의 대망(大望)을 도모하기 위해서 우선 생명의 안전만을 유지 해야 했기 때문에 정계 진출의 뜻을 일단 단념했다. 그래서 모략과 살육을 일삼는 정계(政界)를 멀리하고 세상을 버린 풍류객, 또는 타락한 유야랑(遊冶郞)을 가장(假裝)하고 시정(市井)의 부랑아와 어 울려서 막걸리 타령으로 세월을 보냈다. 취하면 세도 김씨의 욕도 안주삼 아 탕탕했다. 그러나 이런 자리에서 한 말을 문제삼기엔 영의정 김좌근은 너무도 위대한 권력자였고, 흥선군은 너무도 타락된 관도령에 지나지 못했 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심중에 원수로 여기는 세도가의 집을 직접 찾아 다니면서 비 참한 구걸행각까지 했다. 모든 자존심과 체면도 버린 그런 행색도 그의 도 량이 큰 원모(遠謀)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우선 빈한한 그로서는 그들의 동정을 빌어서 당장의 실리(實利)도 취하고 그들에게 자기의 야심을 숨겨서 안심시키고 겸해서 그들의 동정을 염탐하 려는 목적에서였다. "대감, 큰 아들 놈이 빈들빈들 놀고 있어서 꼴이 보기 싫으니 무슨 일자리 하나 생각해 주시오." 하고 엽관운동도 아닌 밥벌이의 취직운동을 했다. "대감, 좋아하는 술은 해야겠으니 술값을 좀 주시오." 하고 용돈 구걸도 했다. 재상 김좌근의 으리으리한 저택을 비롯한 여러 재상집을 이런 구걸로 무상 출입했다. "하하, 관도령님이 헌신짝을 질질 끌면서 재상집 구걸을 다니시니 상당한 술값을 얻으셨겠군요." 재상집 큰 사랑에 우글거리는 문객(門客)들도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 멸시하는 태도로 조롱했으나 관도령은 조금도 개의(介意)하지 않았 다. "마침 병풍을 꾸미게 됐으니 관도령님 난초 그림이나 몇 폭 그려 주고 가 시오. 그림값은 생각하리라." 하고 돈을 거져 주기가 아까와서 그런 청을 조롱하듯이 하는 재상도 있었 다. "대감, 나는 이래도 환쟁이는 아니니까 그림 값은 싫소. 그림은 선사할 테 니 대감도 술값을 선사하시오. 하하하." 하고 관도령은 난초 그림을 신나게 휙휙 그려 주고 그 그림값의 몇 분의 일도 못 되는 술값을 주면 "아아, 대감댁 인심이 제일야." 하고는 술집으로 갔다. 이런 흥선군의 탈속한 태도에 정객들은 그를 위험한 정적으로는 꿈에도 생 각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면으로는 귀신도 모르게 세력의 줄을 잡으려고 비밀 운동을 하고 있었다. 궁중에서 제일 어른으로 있는 익종후(翼宗后) 조대비(趙大妃)와 그의 조카 조성하(趙成夏)가 세도 김씨에 대한 불평을 품고 있는 것을 안 그는 우선 조성하와 친분을 맺는데 성공했다. 그는 그 풍류객다운 가야금 솜씨와 난초그림 솜씨와 술과 말재주로 조성하 와 인간적인 친분을 맺었다. 인간적으로 친해진 뒤에서야 "대왕대비께 있어서나 조공에게 있는 부당한 고적감과 불우한 사정을 나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소. 나야 세상을 버린 몸이라 세도고 벼슬이고 다 구역질이 나서 입에도 올리기 싫지만 공이야 대비님의 어엿한 조카로서 왜 관운이 이렇게 비색하오? 그것이 모두 김좌근을 괴수로 한 김씨 일족의 횡포한 세도 때문이 아니요? 나는 내 야심이 아니라 자유롭게 행동 할 수 있어요. 만일 조공과 대비님을 위한 일이라면 우정으로 무슨 도움이라도 되겠소. 또 그 세도 김씨를 타도하는 일이라면 나라의 장래를 위해서 목숨 이라도 바칠 셈이요. 다행히 놈들은 나를 몰락왕족의 타락분자로 멸시하고 조금도 경계하지 않으니 뒤에서 돕는데는 편이한 일이요." 이러한 말로써 조성하와는 김씨 타도의 동지가 되었다. 그는 감히 궁중에 출입할 자격이 없는 미미한 신분이라 조대비와는 만날 기회가 없었다. 조 성하를 통해서만 깊은 궁중에 있는 왕실의 제일 어른인 조대비와도 연락을 자주 취할 수 있어 김씨 타도의 먼 계획을 착착 진행시키면서 장차 천하를 잡을 꿈을 꾸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대원군에게 뜻밖의 행운이 빨리 왔다. 그것이 바로 철종의 승하로 아들이 없던 철종의 뒤를 이을 임금을 종친 중의 인물에서 구하는 문제가 난 것이다. 조대비, 조성하, 대원군, 정원용은 김좌근 등 김씨일파의 세도를 꺾는 절 호의 기회가 왔다고 기뻐했다. 흥선군의 둘째 아들 명복을 임금으로 세우 자는 계획이 전격적으로 성공한 것도 이러한 흥선군의 치밀한 예비공작 때 문이었다. 새로운 임금을 정하는 중신들의 긴급회의가 조대비의 이름으로 소집된 날, 아직 관도령의 조롱받는 신분인 흥선군은 운현궁에서 외출하지 않고 초조 한 마음으로 대망(大望)의 기쁜 소식이 예정대로 오기를 기다렸다. '김가놈들이 무슨 수작으로 대비님 의향을 방해할지도 모른다. 만일의 경 우엔 어찌할까?' 만일 자기 둘째 아들이 이번에 임금이 되지 못하면 어찌 할까.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 자신이 없었다. 오직 비는 것은 이 문제에 한해서 제일 강 한 발언권이 있는 조대비의 용단만 바랄 뿐이었다. 문제가 미묘하게 발전 해서 권력으로 쟁탈전을 벌리게까지 된다면 영의정 김좌근을 영수로 한 김 씨의 세력에 압도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보, 궁중에서 무슨 기별이 없소?" 흥선군은 부인 민씨에게 자주 물었다. "아무 기별도 아직 없습니다." "형님한테서도? 명복이 유모한테서도?" "예." 그의 형님은 종척회(宗戚會)에서 일을 보고 있었으므로 조대비의 뜻을 미 리 알려고 궁중에 보냈고, 임금이 될 명복의 유모도 연락차 형님에게 딸려 서 궁중에 보냈던 것이다. 흥선군은 일말의 불안감이 섞인 초조한 마음으 로 혼자서 술만 마시며 기다렸다. 그답지 않게 어젯밤에 꾼 꿈도 되생각하 면서 쓴 웃음도 지어 보았다. 이른 봄의 햇빛은 뜰에서 밝게 빛났고 남산 위에는 흰 구름이 가볍게 흐르고 있었다. 운현궁 뒷뜰 공중에는 조그만 구름 조각 같은 연 두 개가 경쟁하듯이 깜쭉 깜쭉 떠오르고 있었다. 오늘 임금이 될 대명(大命)이 내린 명복이가 형과 함께 연을 띄우며 무심히 놀고 있는 것이다. 올 봄에 열두살 된 명복의 모습이 갑자기 거인(巨人)의 환상(幻像)으로 흥 선군에게 보이기도 했다. 이 순간에 흥선군은 영달(榮達)의 신(神)과 같이 보이는 어린 아들의 뒷모습에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으로 "부디 임금이 되어 주십시오."하고 빌었다. 아들을 위한 마음보다도 아들을 미끼로 자기 의 영달을 위한 야망이었다. 난초그림을 그리며 가야금을 즐기던 풍류객의 심정과는 딴판이었다. 천하를 호령할 호랑이가 숲에서 튀어나오려고 그 출발 시각을 기다리는 순간의 심정이었다. 그런 초조한 때에 운형궁과 문 밖에서 "쉬위!" 하고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 렸다. "앗, 그러면 그렇지!" 흥선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가 안심한 듯이 웃음을 짓고 다시 태연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이윽고 팔십노인의 정원용이 청지기의 안내로 사랑 마루에 올랐다. 흥선군 이 방문을 열고 나가서 공손히 읍하고 모른 척하는 인사를 했다. "원로(元老)께서 어찌 오셨습니까?" "대비님 명으로 왔소이다." "무슨 분부로?" 하고 물으면서도 흥선군은 낯이 간지러웠다. 그리고 은인인 동지에게 그렇게 하는 것이 약간 미안한 감도 없지 않았다. 역시 피차의 체면을 존중하는 정원용은 공식적으로 정중한 음성을 내어 "대감의 둘째 아드님을 익성군(翼成君)에 봉하시라는 분부올시다." "황공하온 분부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사주(嗣主)로 모시게 되어서 곧 궁중으로 모시고 오라는 분부올시다." "네에." 하고 흥선군은 정원용에게 칙사에 대한 감사의 읍을 다시 했다. "잠깐 편히 앉아 계시오. 곧 차비를 시키겠습니다." 흥선군은 안으로 들어갔다. 정원용도 이번 일에 성공한 공으로 앞으로 흥 선군의 덕을 후하게 받을 것으로 짐작하고 마음이 흐뭇했다. 주인이 안으 로 들어간 뒤에 혼자 사랑방을 둘러보니 집꼴과 방안 광경이 말이 아니었 다. 집만은 큼직했으나 기둥이 기울고 벽이 터졌으며 몇 해 묵은 도배지도 그을고 군데군데 찢어져서 밖의 화창한 봄 햇살과는 달리 우중충한 찬 바 람이 돌았다. 오직 소박한 병풍에 주인이 그린 난초그림만이 싱싱한 향기 를 피울 듯이 살아 있었다. '폐옥 같은 운현궁에도 저 병풍의 난초가 봄을 맞았구나..' 정원용의 노안(老眼)에는 유명하다는 흥선군의 난초그림이 오늘따라 더욱 명화로 보였다. 흥선군은 내실로 들어가서 부인에게 그 소식을 전하고 뜰에서 연 날리기에 열중해 있던 명복이를 불러들였다. 십이세의 소년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서 의아한 얼굴로 부모의 웃는 낯을 쳐다보았다. 106-[高宗] "개똥이가 임금이 되었네.." "명복아, 네가 임금이 되어 궁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네 이름을 불러 보 는 것도 오늘뿐이다. 네가 임금이 되면 우리 부모도 네 신하가 되어 충성 을 바치게 된다. 임금이 되면 지금까지의 개똥이짓 장난을 해선 안된다. 임금답게 될 공부를 열심히 해야 된다." 개똥이는 명복의 별명이었다. 이것이 그에 대하여 생부로서 사사롭게 타이 르는 최후의 훈계였다. "오오, 우리 상감님, 축하 올리오." 하고 모친 민씨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그 눈물 속에는 비록 임 금으로 지존(至尊)의 영위(榮位)에 오르지만 오늘부터 아들을 빼앗긴다는 어머니로서의 슬픔이 섞여 있었다. "좋은 영광의 날에 왜 눈물을 보이는 거요?" 부인을 충고하는 흥선군에게는 아들을 빼앗긴다는 기분은 조금도 없었다. 아들이 임금이 되어서 궁중으로 들어가면 그 궁중이 곧 자기의 집으로 된 다는 생각 뿐이었다. 어린 임금의 실권을 자기가 대신 맡아 가지고 천하를 호령할 야망은 이미 달성되었다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아들로서 명복아, 개똥아 하고 불러 보는 것도 오늘 뿐 내일부터는 지 존한 나랏님이며 우리 부모도 나랏님을 섬기는 백성이요. 그러나 역시 사 친(私親)은 다른 백성과는 달리 친근하게 대해야 인륜에 어긋나지 않으니 앞으로도 잘 요량해 주시오." 모친은 이런 말까지 했다. 그것은 부친 흥선군도 같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부친의 그런 심정은 모친의 단순한 애정의 호소와는 달리 세도에 대한 야 망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물론 임금이 되시더라도 부모의 정은 잊어선 안 되지요." 하고 부친도 모친의 말에 얼른 맞장구를 쳤다. "아버님, 어머님, 무엇을 벌써부터 저에게 그런 공대 말씀을 하십니까?" "그 인륜의 효성은 감사하나 역기 지금부터 임금으로 대접해 올리는 것이 백성된 도리요. 그러나 일단 귀한 자리에 앉으시면 조정의 권력을 쟁탈하 려고 임금을 둘러싼 추악한 음모가 극심한 법이니 무슨 일이 있더라도 부 모의 정을 저버리는 일에는 귀를 기울이지 마시기 바라오. 이것이 등극을 앞둔 임금에게 아비로서 부탁하는 말이요." 흥선군은 아직 어린 아들이지만 왕좌(王座)에 오르는 그에게 위협의 주사 를 미리 놓아 주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아버님, 제가 입궁하는 것부터가 아버님 덕택인데 어찌 부모님 은혜를 잊 겠습니까. 앞으로도 공사나 사사나 모두 아버님 뜻에 맞도록 하겠습니다." 아버님 덕택으로 임금이 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 임금이 된 소년 이 자기를 임금으로 세우는데 치밀한 정치적 공작을 했다는 사실은 조금도 몰랐다. 오직 왕족인 부친의 혈육을 타고 났기 때문이라는 의미에서 한 말 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흥선군은 공사간의 문제를 부친의 뜻에 맞도록 하겠다는 말에는 매우 만족했다. "자아, 그럼 대비께서 기다리시겠으니 어서 궁중에서 보내신 이 옷을 입고 입궁해 가시오." 모친 민씨는 궁중에서 보낸 홍포(紅袍)를 입히고 복건을 씌워서 사랑에서 기다리는 원로 정원용에게로 보냈다. 명복은 사랑으로 가서 팔십 노인 정 원용에게 할아버지를 대하는 존경의 마음으로 절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정원용은 깜짝 놀라 말리면서 "익성군님, 이번 대경(大慶)을 축하 아뢰오." 하고 정중한 읍을 먼저 했다. 궁중예법에 능숙한 그는 이미 정계의 실권자로 등장한 흥선군 앞에서 『상 감마마』라고 아첨해 보이고 싶기까지 했으나 공직으로는 아직 등극대례를 올리지 않은 임금 후보자였기 때문에 지금 봉해진 익성군이라고 불렀던 것 이다. "그럼 노신(老臣)이 궁으로 모시고 가겠습니다." 정원용은 흥선군 부자에게 인사하고 방을 나왔다. 대문 밖에는 남여(藍輿) 가 대기하고 있었다. "어여 가마에 오르시지요." 정원용은 가마 문을 열면서 소년에게 타라고 공손히 권했다. 소년은 배웅 나온 부모에게 하직 인사의 절을 하려고 했다. "아니올시다. 지존(至尊)은 사친에게 절하지 않는 법이랍니다." 하고 아들이 부모에게 절하려는 것을 막고 못하게 했다. 그러자 부모가 도 리어 허리를 굽히고 아들이 가마에 타기를 기다렸다. "오오, 잘 가시오." 모친이 목멘 소리의 인사를 했다. "어머니!" 어린 소년의 음성이 가마 안에서 들렸다. 정원용은 전격적인 조대비의 명령으로 비밀리에 운현궁에 왔으나 소년 신 왕(新王)을 실은 남여가 떠날 때는 벌써 부근의 시민들이 소문을 듣고 문 전에 몰려와서 이 놀라운 경사스런 가마가 떠나는 광경을 구경하고 있었 다. "허허, 사람팔자는 모르겠다. 외입쟁이 관도령의 아들 개똥이가 새 임금이 됐다!" "관도령도 이젠 임금 아들을 업고 관재상(官宰相)이 되겠군. 용꿈 꾼 건 아들보다 아버지다." 백성들은 감히 부러워할 수도 없는 이 사람 팔자의 용꿈으로 수군거렸다. 어느덧 운현궁에서 창덕궁까지의 길에는 구경 나온 백성들로 혼잡을 이루 었다. "개똥이가 임금이 돼서 궁중으로 들어가는 가마다." "개똥이가 어떤 아인데. 그 이름이 천해서 천하 제일로 귀하게 된 모양이 다. 이젠 쇠똥이가 영의정이 될 판이군." 정치에 무관심한 백성들도 그 이름만 듣고 이런 농을 했다. 그들은 쇠똥이 가 될 흥선군 곧 대원군으로 세도를 부릴 인물의 존재조차도 몰랐다. "쉬이, 길 비켜라!" 신왕이 탄 남여(가마)의 전후에는 동원된 친군영(親軍營)의 병정들이 호통 을 치면서 혼잡한 군중을 정리했다. "개똥아, 너 임금이 되었으니 나도 벼슬 한자리 부탁한다." 어제까지 이놈 저놈하고 흙투성이가 되어 싸우던 동무 아이들이 부러운 듯 이 외치기도 했다. 그러나 가마에 탄 소년 임금은 그런 소리에 무슨 대꾸 를 할 자유도 없었다. 그는 가마 속에서 그 정답던 아이들과 다시는 놀 수 없게 된 것이 가장 섭섭했다. 어쩐지 겁만 나서 몸이 덜덜 떨렸다. 자기가 임금이 되어서 궁중의 주인으로 들어간다는 기쁨보다도 무서운 임금 앞으 로 잡혀 가는 죄인 같은 공포심이 앞섰던 것이다. 궁중에서는 만조 백관들이 모여서 신왕이 될 익성군의 입궁을 기다리고 있 었다. 이윽고 가마가 도착해서 정원용이 어린 익성군을 조대비 앞으로 인 도해 가자 조대비는 영의정 김좌근 이하 고관 대작이 도열(堵列)한 앞에서 "오오, 익종의 뒤를 이을 내 아들이 왔구나." 하며 소년의 손을 잡고 반가와했다. 앞서 익성군을 봉한 것이 바로 조대비 자신의 양자로 삼아서 왕을 삼으려 던 계획이었음을 이제 분명히 알게 된 김좌근 이하의 김씨 일파는 아연실 색하고 새삼스럽게 놀랐다. '세도만 믿고 나를 무시하던 너희들 안동 김가는 새 임금이 내 양아들이라 는 것을 알아 두어라.' 하는 위협이 조대비의 말고 행동에 여실히 나타났다. 조대비는 당황해 하는 김씨들 면전에서 예정대로 봉군식(封君式)을 그 자 리에서 재빨리 거행하였다. 어느덧 황혼이 되고 곧 어두어졌다. 큰 촛불이 켜진 뒤에 궁중에서의 첫 수라상을 받은 익성군 옆에서는 따라온 유모 박씨와 처음 보는 궁녀들이 깎듯한 시중을 했다. 오늘 하루의 일이 아직 꿈만 같은 소년은 배가 고팠 으나 진수성찬이 목을 넘어가지 않았다. 몸이 그냥 공중에 떠 있는 것만 같았고 정신이 없고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이런 어려운 왕노릇은 곧 그만두고 동무들과 장안 골목에서 술래잡기나 하 고 노는 편이 훨씬 더 좋다고 생각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자유인(自由 人)의 언어와 행동을 할 수 없이 임금이라는 울에 갇힌 소년이었다. "시장하실 테니 어서 많이 드십시오." 궁녀들이 좌우에서 권했으나 소년은 그러는 등살에 먹을 것도 먹지 못하는 것이 화가 났다. 혼자 내버려 두면 오죽 잘 먹으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점씩 먹어도 배가 부를 지경으로 많은 반찬이 큰상에 가득한 것 이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난한 살림에서 어머니가 고생해서 차려 놓 던 아버지 진지상의 무김치와 된장찌개만을 생각하니 부모에게 미안한 마 음이 들기도 했다. 그는 아직도 빈상(貧相)이 밴 순진한 소년이었다. "유모, 다음부터는 내 밥상엔 이렇게 여러 가지 반찬을 놓지 못하도록 전 하오." "네." 유모는 무심코 그런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그 말을 들은 한 궁녀 는 아첨할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곧 조대비에 그 소식을 전했다. "어쩌면 어린 임금의 말씀이 그렇게도 현명하시게 지당합니까?" "그러니까 내가 고른 아들 새임금이 아니냐? 이제 나라가 바로잡히겠구 나." 조대비는 나라가 바로잡힌다는 것은 으례하는 형식상의 칭찬이요, 궁녀들 로부터 칭찬해 주는 것이 기뻤던 것이다. "이것이 모두 대왕대비님의 복이 아니겠습니까?" 궁녀들은 조대비의 세력이 오늘부터 강해진 눈치를 알기 때문에 침이 마르 도록 조대비의 비위를 맞추려고 새로운 임금의 칭찬에 정신이 없었다. 다음 날에는 임금의 생부에 대한 대우 문제가 각의에 올랐다. 조대비와 그 일파는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라는 칭호로 승격시키려고 했다. 임금의 생부에게는 자고로 대원군의 칭호를 주었다. 그러나 일찌기 생존한 임금의 생부로서 대원군이 된 사람은 없었다. 이에 대해서 영의정 김좌근이 비로소 신왕 섭정에 대한 불만의 일단을 들 고 반대 의사를 표시했다. 이미 소를 잃은 외양간을 고치려는 어리석은 짓 이었으나 흥선군이 임금된 아들을 업고 정계에 등장하는 것을 막아 보려는 차선(次善)으 행동을 개시한 셈이었다. "옛날부터 우리나라에는 생존한 대원군이 없었습니다. 익성군의 생부를 대 원군으로 봉하면 혹시 정치운동에 관여할까 두려우니 대원군 칭호는 그이 생존시엔 보류하는 것이 좋을까 합니다." "익성군의 생부가 혹시 정치운동에 관여할까 두려워하는 영의정의 뜻은 잘 알겠소. 그러나 영의정도 아다시피 흥선군은 그림과 술만 즐기는 세상이 다 아는 풍류객이니 번거러운 정치엔 뜻이 없을 분이요. 전례가 없다고 대 원군을 봉하지 않으면 그 분이 죽기를 기다리는 것 같기도 해서 어린 임금 의 효성으로는 송구스러워 하겠으니 그것도 딱한 일이요." 조대비는 인정론(人情論)도 꺼내서 영의정을 괴롭혔다. 그러나 김좌근은 그 말은 못들은 척했다. 대원군이 될 흥선군은 김좌근의 그런 소견에 분격 했으나 실권만 잡으면 그만이지 대원군 칭호는 실권을 잡은 뒤에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대원군의 봉작(封爵)은 나 스스로 원하지 않으니 사양한다. 다시는 그 문 제를 입에 올리지 말라." 하는 소문을 퍼뜨렸다. 그러나 조대비를 비롯한 일파에서는 정식으로 중지된 대원군 칭호로 흥선 군을 불렀다. 김좌근은 명분만 얻고 실속을 잃었다. 이 문제에서도 그는 대원군에게 진 셈이 되고 말았다. "대비께서는 그 문제보다도 빨리 신왕의 즉위식을 올리도록 하시오." 대원군은 조대비를 충동였다. 조대비는 김좌근을 불렀다. "미망인으로 나는 세상 일을 모르오. 익성군을 좋은 임금으로 기르는 것만 즐거운 희망이요. 임금으로 기르기 위해서도 빨리 즉위식을 올리도록 제반 절차를 빨리 갖추게 하오." "즉위식의 시기는 잘 생각해서 아뢰겠습니다." 영의정 김좌근은 기정사실이지만 형식적으로라도 신왕의 즉위식만은 될 수 있는 대로 지연 시킬 전략을 세웠다. 어린 익성군이 정식으로 국왕 자리에 앉게 되면 대원군이라는 무서운 호랑이 역시 정식으로 정권을 뒤흔들고 나 설 위험성이 빨리 노출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대비는 며칠 후에 또 즉위식의 재촉을 했다. 익성이 정식으로 임 금이 되기 전에 김씨 일파에서 무슨 음모를 꾸밀는지 몰랐다. 김좌근도 성 화 같은 조대비의 재촉은 그냥 묵살하고 연기만 할 명분도 서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하는 수 없이 곧 기일을 정하고 창덕궁 인정전(仁政殿)에서 즉위식을 올렸다. 이래서 어린 임금은 조선(朝鮮) 제이십육대 고종(高宗) 으로 등극했다. 107- 대원군(大院君)의 섭정(攝政) 아들을 고종으로 정식 등극시킨 대원군은 완전히 정권장악의 정치무대를 완성시켰다. 이제는 그가 복면을 벗고 그 정치무대에 주역배우로 등장만 하면 되었다. "음, 이젠 김씨에게 사원(私怨)도 풀 기회가 왔다. 아니 사원보다도 썩은 종래의 파당정치를 숙청하고 서정(庶政)을 일신하고 나라에 봉사할 기회가 왔다." 대원군은 세도하던 김씨에게 학대 받던 불평을 풀 수 있다는 것을 통쾌하 게 느꼈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정치적인 포부와 용기도 새롭게 갖게 되 었다. '미미한 존재로서 아들을 임금으로 등극시키는 첫 번 난관을 무난히 돌파 한 나다. 이제야 무슨 일인들 못하랴. 알고 보면 김가에게도 수완 있는 정 객은 없다. 모두 쓸개가 빠지고 머리까지 썩은 놈들이었구나' 대원군은 이번 왕위계승문제로 김씨의 세력단결이 대단치 않은 것을 실지 로 알았다. 더구나 세도가 중에 중요한 한명을 자기 파로 무난히 매수해 버리기까지 할 만큼 놀라운 수완을 발휘했던 것이다. 김씨 일족의 거물 중에서도 김병학(金炳學)은 비교적 당파성이 적고 관용 성이 있었다. 그래서 대원군은 왕위계승 문제가 나오기 전부터 인간적으로 접근해서 친분을 맺고 지냈다. 그래서 대원군은 불우한 시절에 적지 않은 도움을 물심양면으로 받기까지 했다. 그러다가 왕위계승 문제가 나자 대원 군은 김병학에게 자기의 의중을 털어놓고 찬성해 주기를 원했다. "이 일이 성사되면 대감께도 서운치 않은 대우를 하겠소." "허어, 그게 무슨 말이요. 이런 중대한 국사에 우리들 개인의 이해가 개입 돼서야..." 하고 김병학은 점잖은 미소를 띠웠다. "이런 말까지 하는 나의 심정은 대감이 찬성하건 반대하건 비밀을 지켜 주 실 것을 믿기 때문에 한 것이니 그것만 알아 주시오." "음, 그런 신의가 없을 사람 같이 보였다면 섭섭한데요." 김병학은 역시 친구답게 웃었다. 대원군은 그가 적극 후원하지 않더라도 김씨 일족과 함께 반대하지 않기만 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종친 중에서 어떤 한분을 모실 문제니까 흥선군의 아들인들 물망에 오르 지 말란 법이야 있겠소. 왕비와 충신들의 공의로 정할 문제니까 흥선군도 낙관은 못하겠지만, 과히 비관도 할 필요는 없어요." 김씨 일파의 거물로서 이런 이해와 동정을 해주었으므로 대원군은 큰 힘을 얻었다. 김병학의 이런 호의를 받게 되자 대원군은 그의 독특한 매력있는 교제술을 발휘하면서 무릎을 치면서 바싹 다가 앉았다. "기왕 말을 했으니... 대감 잠간 귀를..." 하고 김병학의 귀로 입을 가져갔다. "내 아들이 왕위에 오르면 대감의 따님을 꼭 왕비로 맞도록 힘쓰겠습니 다." "음, 흥선군이 나를 그렇게까지 믿소? 당신이 나를 그렇게 믿으면 나도 흥선군을 믿어야 하겠군요." 김병학은 허허 하고 웃을 대목이었으나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도 임금 의 장인이 된다는 뜻밖의 유혹에는 정치적인 욕망이 동하지 않을 수 없었 던 것이다. "대감, 고맙습니다." 김병학이 체면상 차마 확약은 하지 못하고 빙그레 웃기만 할 때 대원군은 그의 확답을 들은 듯이 감사의 뜻을 표하고 표연히 자리를 떴다. 그 뒤에 김병학은 다른 김씨들이 대원군의 아들 왕위계승에 반대하는데 동조(同調) 하지 않았다. 그리고 대원군은 약속했던 김병학의 딸을 고종의 왕비로 맞 아들이지는 않았으나 그가 집권하던 모든 김씨를 관직에서 숙청해 버릴 때 도 이 김병학만은 전보다 중용(重用)해서 그때의 호의에 보답했다. 대원군은 김씨 일파의 일부를 분열시켰을 뿐 아니라 중립파로서 비교적 덕 망이 두텁던 원로 재상(元老宰相)의 정원용과 박규수(朴珪壽)가 고종 즉위 를 지지하도록 하는데 성공한 것도 그 당시의 정세로는 비상한 수완이 아 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러한 이면공작과 함께 조대비를 전면에 내세운 대원군은 뒤에서만 비 밀 공작을 해서 소기의 대망을 달성했다. 실질적으로 궁중의 제일 어른이요, 형식상으로 섭정(攝政)이던 조대비는 영의정 김좌근의 집권당 일파의 세도를 무시하고, 대원군에게 실질적으로 국정을 요리할 수 있는 실권을 위임했다. "내가 미망인으로서 정치에 어둡고 국왕이 또한 어리니 대원군이 뒤에서 보아 주어야 하겠소." 이것이 대원군에게 물려 준 이유였다. 김좌근도 대원군 칭호를 봉하는 형 식적인 반대엔 명분을 세웠으나 조대비가 비공식으로 개인적 고문을 삼겠 다는데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졌다. 조대비와 고종을 사사롭게 돕는 것이 실질적으로는 정권을 잡는 첫출발이 되었던 것이다. 사태가 이쯤 되자 이번에는 김흥근(金興根)이 또다시 조대비에게 직접 항 의했다. "상감의 생부는 일체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어떤 중대한 국 정문제에 상감의 뜻과 생부의 뜻이 다를 경우에 상감께서는 부자의 도리로 뜻대로 하시지 못하고 생부의 뜻을 따를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경(卿)의 그 말이 옳은 줄 나도 아오. 그러나 정치문제가 아닌 상감의 건 강문제, 교육문제로 지도해 올리는 것은 당연하며 그것까지 막는 것은 인 륜에 어긋나는 무정한 일이 아니겠소?" 조대비는 이렇게 김흥근의 화살을 피했다. "그리고 나로서도 상감으로서도 그 분에게 어떤 상당한 대우를 하고 자주 만나서 가정적인 이야기도 하고 싶은데 이것은 정치와는 관계 없는 인정상 문제가 아니겠소?" 하고 조대비는 불쾌한 안색까지 보였다. 여기엔 좀 거북한 표정을 하던 김흥근은 일부러 웃는 얼굴을 하면서 "예. 그런 의미의 대우문제로선 그 분과 나라의 체면을 유지할 정도로 적 당한 땅과 돈을 하사(下賜)해서 생활을 편하게 하고, 그 분은 오직 나라의 태공(太公)으로서 전과 같은 풍류 생활을 한가롭게 즐기게 하면 족하옵니 다." "그러기에 그 분 자신이 전번의 대원군 봉하겠다는 말이 났을 때도 스스로 사양했으니 경들이 염려하는 정치관여는 없을 줄 아오." 조대비도 여자의 앙큼한 마음으로 솜에 비수를 싼 듯한 말로 빈정댔다. 그 러나 대원군이 자주 궁중에 출입해서 그의 정치적 세력이 강화되기 시작하 자 영의정 김좌근이 또다시 조대비에게 항의했다. "흥선군의 궁중출입이 너무 번거로운 듯해서 세상에 많은 오해가 생기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그 분의 궁중출입을 삼가케 하고 천륜의 정의를 위해 서는 상감께서 한달에 한번씩 운현궁으로 행차하여 근문(覲問)하시면 될까 합니다." 대원군의 궁중출입을 금지하려는 계획이었다. 그러자 자리를 같이 하고 있 던 대원군파의 조두순(趙斗淳)이 접적으로 이것을 반박했다. "대원군이..." 이 첫마디부터가 김좌근과는 달랐다. 김좌근은 공식으로 대원군을 봉하지 않았으므로 흥선군이라고 했는데, 조두순은 대원군파가 궁중에서 공공연히 부르는 대원이라 했던 것이다. 김좌근은 조두순이 무슨 말을 할까 하고 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조두순은 슬쩍 대원군의 궁중출입 가부는 피하고 "대원군이 아무리 상감의 생부일지라도 상감 앞에선 사친(私親)의 신하에 지나지 않소. 그런 신하에게 친히 행차해서 볼 의무가 어디 있단 말이요?" "그러면 흥선군에게 한달에 한번씩만 궁중에 들어와서 상감을 뵙게 하고, 정사(政事)는 대비께서 수렴청정(垂簾聽政)하십시오." 하고 김좌근은 타협안을 내놓았다. 이것으로 조대비는 정식으로 섭정(攝政)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그렇다고 조대비가 지지하는 대원군의 정치에 대한 이면활동을 막을 수는 없었고 대 원군을 한달에 한번만으로 궁중출입을 보장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김좌근은 적어도 대원군의 궁중출입 제한과 감시를 제도화(制度化)하 려고 했다. 처음에는 대원군도 김씨 일파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하여 궁중출입을 되도 록 피했다. 그러나 대원군의 세력은 이미 확고부동하게 되었으므로 그가 궁중에 자주 들어 가지 않더라도 그의 정치활동엔 아무런 지장도 없었다. 조대비는 대원군이 궁중에 출입할 때는 장수 한명과 군사 다섯명을 출동해 서 시위(侍衛)케 했다. 중요대관들은 자진해서 운현궁으로 대원군을 찾아 서 문안하고 정치문제의 지도를 받게 되었다. 결국 정치의 중심무대가 궁 중보다도 대원군의 사저(私邸)인 운현궁으로 옮겨진 역효과를 나타낸 것이 다. 그리고 나중에는 창덕궁과 운현궁 사이의 특별 통용로(通用路)와 통용문을 만들고 고종과 대원군만이 자유롭게 출입하게 되었다. 그리해서 처음에 삼가던 대원군의 궁중출입도 자연 무시되고 창덕궁과 운현궁은 한집안의 안채 사랑채처럼 되었다. 조대비는 국정(國政) 전반을 대원군에게 맡겼다. 따라서 대원군은 정식적인 관직명을 바라지 않고 이면에서 조대비의 교명 (敎命)이나 고종의 왕명(王命)으로 자기 뜻대로의 독재정치를 감행했다. 이처럼 대원군이 운현궁에서 천하를 호령하는 무서운 호랑이로 활약하게 되자 그처럼 오랫동안 세도가 드세던 영의정 김좌근 이하의 김씨 일파의 거물 정객들도 스스로 위축되어 자연히 물러나게 되었다. 이때 대원군의 민완(敏腕)과 세력으로는 김씨 일파의 정적(政敵)을 무슨 역적의 죄명으로 몰아서 몰살할 수 있었고 귀양 보낼 수도 있었다. 그러 나 대원군은 그런 옹졸한 방법으로 후환을 남길 작은 인물은 아니었다. "무용지물은 스스로 물러갈 것이다. 가을을 맞은 낙엽은 바람이 안 불어도 우수수 떨어지고 만다." 대원군을 지지하는 조급한 자들이 김씨 일파를 엄중히 처치하자고 건의하 면 대원군은 이렇게 여유 있는 태도로 회심의 민소(憫笑)를 띠우고 정적들 의 자멸을 기다렸다. 그것은 그의 인간적인 관용성(寬容性)에서가 아니라 당파 싸움의 세도정치로 나라가 망하려는 것을 구해 보려는 그의 정치적 탁견(卓見)에서 나온 정책이었다. 그리하여 세도 부리던 김씨 일파가 자 연 위축되어서 자멸적 후퇴를 하는 동시에 그들 때문에 불우하던 유능한 인물을 초당파적으로 새로 등장시켜 청신한 공기를 정계에 일으켰다. 그것이 또한 일반 국민이 갈망하는 여론인 것을 그 자신이 천대 받을 때 시정을 배회하면서 직접 보고 느낀 체험에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 나 그것도 역시 대원군의 독재적 세도정치였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당시 민 심에 환영 받을 근대적(近代的)인 정치를 그는 정책면에서 용감히 개척해 나갔다. "아, 그 놈의 지긋지긋한 김씨 세도의 세상이 망해서 시원하다." 이런 백성의 환호는 간접적으로 대원군의 정책을 지지했으므로 대원군도 더욱 자신을 얻고 종횡무진으로 혁신 정책을 실천하게 되었던 것이다. "운현궁 자리에서 왕기(王氣)가 서리고 이 나라에 성현이 나신다더니, 아 이들까지 동요(童謠)로 부른 그 예언이 이제야 맞았구나!" 하고 운현궁에서 고종이 나서 등극하고 대원군이 집권한 것을 마치 나라의 큰 경사처럼 찬양하는 소리가 장안에 퍼지기도 했다. 이것은 대원군에게 아첨하려고 꾸며진 선전만도 아니고 실은 철종 초년(初 年) 때부터 동요로 불려진 예언이었다. 그러나 이런 예언이 공교롭게도 적중한 것은 대원군에게는 큰 힘이 되고 복이 되었다. 108- 몰락(沒落)하는 김씨세도(金氏勢道) 대원군이 득세하게 되자 오랫동안 세도를 부리던 김씨 일문에 낙엽을 재촉 하는 가을 바람이 쓸쓸히 불어 왔다. 그들에게는 < 김씨가 망해서 시원하 다. 이젠 나라가 제대로 되고 백성도 편히 살게 되었다. >하는 백성의 소 리가 더욱 무서웠다. 이런 판국이라 속으로는 전전긍긍하면서도 자기들끼리 모이면 대원군을 미 워하고 욕했다. 그러면서도 대원군의 혹독한 숙청에서 구명(救命)되기를 은근히 바랐다. 세도 부릴 때는 안하무인으로 강하다가도 한번 세도가 꺾 이면 비굴하게 약해지는 것이 당시 양반들의 특징이었다. 이들 안동 김씨가 득세한 것은 김조순(金祖淳)이 순조(純祖)의 국구(國舅= 임금의 장인)가 된 때부터였다. 그 뒤로는 순조, 헌종(憲宗), 철종(哲宗) 삼대에 걸쳐서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국정을 요리해서 일족 영달의 사욕에 만 급급했다. 따라서 매관매직(賣官賣職)하는 탐관오리(貪官汚吏)가 백성 을 수탈해서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정치는 썩을 대로 썩었다. 김조순이 국구가 된 이후에 그의 일족에 있던 영의정과 좌상(左相)의 재상 노릇을 한 이름만 보더라도 좌근(左根), 병기(炳冀), 병주(炳注), 홍근(弘 根), 응근(應根), 병시(炳始), 병덕(炳德), 달순(達淳), 수근(洙根), 병학 (炳學), 병국(炳國), 이유(履裕), 이교(履喬) 등이다. 그리고 그 이하의 판서(判書)와 참판(參判)은 수십명에 달했고, 지방장관인 감사(監司)와 군 수(郡守) 현감(縣監)까지도 모두 김씨 일족이거나 그들에 추종하는 사람들 만 등용했다. "안동 김씨가 아니면 능참봉 감투 하나 못 쓰는 세상이다." 하고 불우한 정객과 선비들은 한탄했다. 그뿐 아니라 "안동 김가가 아니면 인간이 아니다." 하는 교만한 소리가 그들의 입에서 서슴지 않고 튀어나왔던 것이다. 그렇게 세도가 당당하던 김씨 일파도 철종이 승하하고, 고종이 등극하는 동시에 고종의 생부 대원군이 집권한 순간부터 추풍낙엽처럼 처량하게 시 들어 버렸다. 처량한 신세가 된 김씨와 거두들은 북문 밖 삼계동(三溪洞)에 있는 호화로 운 김홍근의 별장에 모여서 서로 신세한탄을 하면서 대원군이 자기들에게 어떤 숙청방법을 쓸까 하는 정세판단을 하면서 화풀이로 쓴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전 득세 시기에 이 별장에서 흥겹게 진탕 놀아나던 잔치의 술 맛과는 딴판이었다. "그까짓 망나니가 무슨 정치를 하겠소. 그 망나니 일당이란 기껏해야 천하 장안(千河長安)의 잡것들이 아니오?" 김홍근은 대원군을 망나니라고 멸시해 불렀다. 천하장안의 잡것들이란 천 가, 하가, 장가, 안가들로서 그들은 모두 궁녀들의 오라비로서 신분이 천 한 서울의 부랑자였다. 대원군은 그의 불평시대에 그들과 함께 항간을 헤매면서 주색잡기의 친분 을 맺어왔으며, 천하를 호령하게 된 오늘도 그들과 그전 친분을 그대로 계 속하면서 역시 시중 밤거리를 취해 돌아다녔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중요 한 염탐에 이용하고 있었다. "그럼요. 그 따위 천하고 무식한 부랑배 일당만으론 정치를 감당 못할 것 이요. 울며 겨자 먹는 격으로라도 우리 김씨의 힘을 빌지 않고는 일을 못 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김씨에게 아직도 거친 손질을 못하고 있 지 않습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오. 그런 협력을 구하면 못 이기는 척하 고 자리를 지키면서 적당한 기회에 우리 세력의 만회를 도모합시다." 김병기는 비겁할 정도로 낙관론을 말했다. 그러나 김병학은 대원군의 인물 을 잘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의견에도 찬동하지 않았다. 그는 전부터 대원 군과 친했고 고종 등극문제에도 다른 김씨들처럼 적극적인 반대를 하지 않 았으므로 동족들 중에는 "병학이 놈은 집안을 배반하고 대원군 덕을 볼 놈이다. 그러나 그 놈도 딸 을 고종의 왕후로 시켜 준다는 꼬임에 속은 놈이니까 가엾은 놈이다." 하고 욕을 했다. 그러나 그로서는 조금도 동족을 팔아 먹을 마음도 없었고 그런 행동을 한 일도 없었기 때문에 양심의 가책은 받지 않았다. "대원군은 권력을 잡은 이상 나라가 흥하든지 망하든지 좌우간 큰일을 저 지를 인물입니다. 우리 김씨 뿐 아니라 노론파(老論波)를 꺾고 새로운 서 민적(庶民的) 정치를 해보고야 말것입니다. 적어도 우리 김씨만을 모조리 잡아 죽이는 일은 않을 것입니다." "자네는 중용될 테니까 그런 소리 하는 게 아닌가? 그러나 자네 딸과의 국혼문제는 어떻게 됐나?" 하고 김병기가 빈정거렸다. "그야, 흥선군이 낭인시절에 그 다운 농담이었지 지금 와서 어찌 우리 안 동 김씨와 국혼을 하겠어요?" 하고 병학은 겸연쩍게 웃어 넘겼다. "좌우간 그 천하장안의 잡것들과 막상막하(莫上莫下)한 망나니 보잘 것 없 는 자니까 그래도 나라 일을 해보려면 역시 우리 힘을 빌어야 할 거야." 병기는 아직도 정계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자 기들의 힘을 과신하는 말을 되풀이했다. "형님, 그러나 그들 너무 얕잡아 봐선 안 됩니다. 앞으로 보시오. 그가 성 미는 괴팍하지만 민심의 동태엔 우리보다 밝고 더 정확히 알고 있어요. 시 중의 천한 무리와 간격 없이 주색 타량한 것도 실은 위장 호신술이었구요. 그 덕택으로 민심의 기미를 체험했고 백성에게 친밀감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는 단순한 오입쟁이가 아닙니다. 앞으론 아무래도 백성을 떠난 양반정치론 민심을 수습할 것 같지 않습니다." "자네는 그놈 덕을 볼 테니까 칭찬만 하는 게 아닌가?" "아니올시다. 막말로 그가 무식한 망나니라 할지라도 미친 망나니가 권력 의 칼을 함부로 쓸 때는 얼마나 무섭겠어요. 그러니까 그런 의미에서도 경 계하시란 말입니다." 병학은 동족에게 배신자 취급을 당하기 싫어서 이런 말까지 했다. 이 말에 잠시 좌중은 침울해졌다. 자기 이외에는 천하에 인물이 없다는 자존심이 강한 병기도 목에 비수가 스치는 듯한 소름이 끼쳤기 때문이다. "그래, 그 놈이 우리에게 미친 놈의 칼장난을 해오면 어쩔까? 무슨 대책이 있어야 하지." 누군가 걱정스럽게 말하자 병학은 일동을 위안시켰다. "그러나 그가 당장에 우리 김씨에게 잔인한 행동은 안할 것입니다." "음, 세상은 이미 망나니의 것이 됐으니 패군지장의 우리들이 원망하고 욕 하면 소요있나? 이런 때는 몸조심 하는 것이 제일이야. 아무튼 병학이, 자 네가 그의 동정을 잘 아니까 무슨 수상한 눈치가 있거든 잘 연락해 주게. 미운 일가도 고운 남보다는 핏줄이 가깝지 않은가." "원 형님두,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만일 제가 그와 가깝다면, 그럴 경우 에 동지 구실을 할 거 아닙니까?" 대원군을 제일 멸시해 오던 병기가 이번에는 제일 그를 무섭게 생각하고 일종의 구명운동(救命運動) 같은 말을 했기 때문에 병학은 이런 말로 일동 을 안심시켰다. "자, 그럼 피차의 몸조심을 위해서 마지막 잔을 들세." 하고 그들은 삼계동 김홍근의 별장을 나왔다. 초승달이 희미한 봄밤의 산길에는 세도를 잃은 정객들이 남의 눈을 피하듯 이 뿔뿔이 떨어져서 내려갔다. 그 한명 한명의 희미한 그림자는 봄밤을 즐기며 거니는 이름 없는 백성들의 모습이 부러울 정도로 쓸쓸해 보였다. 며칠 후에 김병기는 자기 집에 잔치를 차리고 대원군을 초대했다. 그의 불 안한 마음은 대원군이 자기들에게 대하는 태도를 은근히 떠보고 싶었기 때 문이다. 그것은 동족들에 대한 명분이요, 역시 그 새로운 권력자의 호감을 사려는 비굴한 교제술이기도 했다. "그가 거만해져서 우리 집에 와 줄까? 그전엔 오는 걸 귀찮게 여기고 푸 대접한 것을 분하게 여기고 오지 않을지도 몰라." 그는 대원군이 오지도 않을 것이 걱정스러웠다. "와도 좋고 안와도 좋다. 안 오면 그것으로 그의 태도를 알게 되니까. 초 대한 것이 무의미하진 않다." 그는 또 이런 허세를 부려보기도 하면서 초조하게 대원군을 기다렸다. 109- "제 이름은 화냥년이어요" 그러나 대원군은 그전 낭인 때와 같은 허술한 옷차림으로 청지기 한명 거 느리지 않고 표현히 나타났다. 큰 가마를 타고 많은 수행원을 거느리고 위 엄있게 올 줄 알고 딴 방에 차려 놓은 요릿상이 무색할 정도였다. 그러나 주인 김병기를 비롯한 일족들은 대원군의 단신(單身) 내방에 도리어 위압 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역시 자기들을 경계하지 않는 태도 같아서 고마운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주인 김병기는 옛날에는 거들떠 보지도 않고 문객방에서 푸대접해 보냈지 만 이번에는 진수성찬을 자기 사랑방에 차려 놓고 기다리다가 그가 대문에 들어서자 마당까지 뛰어 내려가서 칙사 대접으로 모셔 올렸다. "대감께서 이런 누추한 집에 와 주셔서 황송합니다." "대감 그게 무슨 말이오? 우리 집보다 훌륭한 고래등 같은 재상집인데 누 추한 집이라니요." 전과 다름 없는 호탕한 농담이었으나 주인 병기에게는 가슴이 뜨끔했다. 우리 집이라는 운현궁은 이름이 궁이지 최고의 득세를 한 오늘까지도 폐옥 을 면할 정도로 간소하게 수리했을 뿐 이 재상집에 비하면 오히려 누추할 정도였다. '너희들이 얼마나 국고를 좀먹고 백성의 고혈을 빨아 모았기에 이런 으리 으리한 고대광실에 떵떵거리고 살아 왔느냐?' 하고 질타하는 듯이 (자격지 심이지만) 대원군의 말이 들렸던 것이다. 대원군은 권하는 대로 윗자리에 앉고 배빈(陪賓)으로 온 김병학과 그의 일 족이 열석했다. 이 초대연에 대원군과 친한 김병학을 꼭 참석시킨 것도 이 자리의 공기를 부드럽게 하기 위한 생각에서였다. 서로들 인사를 마친 뒤에 병학이 먼저 잔을 들어서 대원군에게 권했다. "대감 한잔 드십시오." "이 댁에 올 적에 웬일인지 전과는 달리 다리가 떨리더군. 어디 술 기운 으로 떨리는 마음을 달래 볼까?" 대원군은 역시 뼈 있는 농담을 하면서 잔을 받아서 마신 뒤에 "자아, 대감 도 드시오." 하고 병학에게 잔을 돌렸다. "대감, 요즘은 얼마나 분망하십니까?" 병학이 무심코 물었다. "아아, 나야 예나 지금이나 종로 뒷거리 상술지에서 탁주타령하기에 바쁘 지요. 그밖에 바쁠 일야 있어야죠." 하고 아예 정치 이야기는 듣기도 싫어했다. 사실 지금도 그는 역시 밤이면 종종 옛날 부랑자 친구들과 어울려서 싸구 려 주색을 적당히 즐기고 있었다. "대감, 제 술도 한잔 드십시오." 하고 주인 병기가 술잔을 권했다. "주인 대감의 잔은 못 받겠소."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 술에 독이 들어 있지 않소? 나도 죽기는 싫으니까요." "넷?" 병기는 안색이 창백할 정도로 초풍을 했다. "지금 잡수신 술과 같은 주전자에서 따른 술이 아닙니까?" "허어, 아까 것과 잔이 다르지 않소?" 그러면서도 대원군은 심술궂게 웃어 보이지도 않았다. "그럼 제가 먼저 시음(試飮)하고 드리겠습니다." 병기는 그 술을 쭉 마신 뒤에 다시 술을 부어서 대원군에게 권했다. "허허허, 이제 됐소. 주인이 먼저 하시고 객에게 주는 것이 주법(酒法)의 예절입니다." "제가 워낙 주법을 몰라서 실례했습니다." 대원군은 자연스런 태도로 이런 종류의 농담을 탕탕 해서 가끔 좌중이 서 먹서먹해졌다. 아무래도 주인 병기의 정책적 초대연에 대원군은 흥이 나지 않는 듯 싸늘한 분위기였다. 이럴 때는 김병학이 웃으면서 부자연한 공기 를 완하시키고 기생에게 눈짓하여 술을 권하게 했다. 기생은 좌석의 공기를 눈치채고 아양을 떨면서 "대감님, 한잔 더 드십시오." 하고 잔을 두 손으로 들어서 공손히 올렸다. "네 이년! 기생노릇을 하는 너까지 주법을 모르느냐? 나는 역시 상술집 작부의 막걸리 잔이 구미에 맞더라." 하고 술잔 든 기생의 손목을 탁 쳐서 물리쳤다. 술잔이 날으고 술인 주인 얼굴에 튀었다. 기생은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고 주인은 얼굴에 튄 술은 닦을 경황도 없이 대원군의 얼굴만 옆눈으로 살폈 다. '왜 또 노했을까?' 그런 불안으로 등골이 서늘했다. "너, 무슨 잘못을 했는지 아느냐?" "죄송하옵니다." "잘못도 모르면서 무엇이 죄송하냐. 술좌석에 무슨 대감이 있느냐. 술 먹 을 때는 재상도 망나니요. 정경부인도 화냥년이다. 그래야 술의 진미가 나 는 법이니라" 망나니 별명을 내가 너희들 대감들보다 낫다는 비꼬는 수작이었다. 이런 수작은 다른 재상 양반들은 도저히 몽상도 못할 명기(名技)의 농담이요 또 풍자였다. 이런 면이 대원군의 진정한 인간면이었다. 주인 병기 같은 양반 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망나니의 명기였던 것이다. "네 알아 모시겠습니다." "그 알아 모시겠다는 말도 틀렸다." "망나니께선 이 술 한잔 드세요." "오냐. 먹고 말고. 하하하" 대원군은 웃으면서 기생의 손에서 잔을 받아 마시고 "요 귀여운 화냥년의 기생아. 너도 한잔 들어라." 하고 대원군은 손수 술을 따라 기생에게 권했다. "호호호, 참 재미있는 술꾼이셔." "너 그렇게 반하단 몸선도 보여야 한다." "모르겠어요." "그래 그래, 알면 망나니한테 혼날 테니 모르는 게 좋으리라. 핫핫핫" 대원군은 망나니 노는 꼴을 대감님들에게 보여 주려는 수작이었다. 덕분에 좌석에서 웃음 소리가 터졌다. "허허허, 여러 분의 그 웃음 소리를 들으니까 비로소 술맛이 나는군요." "너 이름이 뭐냐?" 하고 이번엔 기생에게 물었다. "화냥년이요." "그렇지, 화냥년, 노래 하나 들어보자." 기생이 노래를 부르자 좌석은 더 한층 화기가 돌고 주인도 비로소 긴장이 풀렸다. "네 소리를 들으니까 거문고를 타주고 싶구나." 하고 옆에 있던 거문고를 잡아서 스르릉 줄을 훑어 유명하다는 거문고의 풍류객 솜씨를 자랑했다. "어쩌면 그리 잘 타세요? 저 같은 것은 어림도 없는 솜씨입니다." 기생도 정말 탄복해서 칭찬했다. "거문고하고 난초 그림으론 청나라에까지 유명한 분인 줄 모르냐?" 김병학이 기생에게 대원군의 명기 소개를 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덕분에 좌석의 흥이 높아졌습니다." 주인 병기도 대원군에게 치하했다. "자아, 나는 주량이 크지만 주인도 술을 하셔야 연회가 어울립니다." "예, 저야 얼마든지 하겠으니 대감도 좀 더하십시오." "허허허, 또 대감이 나더러도 대감이라는군요. 전엔 그렇게 인색하시던 술 을 오늘엔 왜 이렇게 권합니까?" 전 보다는 누그러진 말이었으나 또 가시 돋힌 말이었다. "용서하시오. 그때는 그때요, 지금은 지금이 아닙니까?" 주인도 솔직히 그전의 푸대접을 인정하고 취담(醉談)처럼 가볍게 사과했 다. "허허, 피장파장이지. 나도 입으론 험담도 잘 하지만 건망증이 있어서 지 난 일엔 구애하지 않는 사람이요. 산천도 변하는데 어찌 인심이 변하지 않 겠소? 인심은 자꾸 새롭게 변해야 살맛 있는 세상입네다." 대원군은 이런 농담으로 주인의 초대연에 감사의 뜻을 표했다. 주인도 이 말에 적지 않은 안도감을 느꼈다. 연회가 파한 뒤에 병기를 비롯한 안동 김씨 고관들은 "알고 보니 대원군도 독종은 아니다. 김씨 일문이 참화까지는 받지 않을 것 같다." 하는 안도감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김홍근만은 너무 호화로운 삼계동의 별장을 짓고 호강했기 때문에 대원군의 애교있는 수단에 걸려서 골탕을 먹고 그 별장을 몰수 아닌 진상 을 고종에게 자진해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삼계동 막바지 북악산 남쪽 기슭의 좋은 산수, 넓은 정원을 꾸민 그의 별장은 장안에서도 유명한 명승 (名勝)이었다. 110- 김흥근의 별장 뺏기 어느날 대원군은 소탈한 평복으로 김홍근의 집에 표연히 나타났다. 그전 같으면 청지기나 문인들이 적당히 대하고 돌려 보냈으나 이번의 예고 없는 그의 방문에는 주인도 깜짝 놀라서 당황하게 사랑으로 맞아 올렸다. "아이고, 대감께서 미리 기별도 없이 어인 일이십니까?" 주인이 황송하게 물었다. "대감에게 청이 있어서 왔지요." "저에게 무슨 청이십니까?" 주인은 듣던 중 반가운 말이었다. "실은 술친구들과 한적한 곳에서 하루 놀고 싶은데 대감의 그 유명한 별장 을 하루만 빌려 주실 수 없겠습니까?" 그전 같으면 대원군도 감히 하지 못할 청이었고 설사 하더라도 당장에 "당신, 그게 무슨 망녕된 소리요. 장안의 잡놈들과 술주정해서 남의 별장 망쳐버릴 생각이요? 원 별소리를 다하오." 하고 펄쩍 뛰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형편이 달랐다. "대감이 쓰신다면 어찌 거역하겠습니까? 요즘은 통 나가 보지도 않아서 지 저분할지도 모르니 며칠 여유만 주시면 소재도 하고 정돈해서 빌려 드리겠 습니다." "아니올시다. 내일 쓰겠으니 그러실 여유도 없습니다." "그럼 오늘 중으로라도 소제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빌려 쓰는 것마도 황송하온데 그런 폐까지 끼쳐선 내가 나쁜 사람이 됩니 다. 정 그러신다면 그만두겠습니다." "허허허, 대감님 성미를 짐작하니 그럼 그대로 나가셔서 노십시오." "넵, 고맙슴다~ㅇ" 그의 집을 나온 대원군은 김홍근의 굽실거리던 광경이 우스웠다. "하하하, 김홍근이도 졸장부로구나. 그전엔 나를 그렇게 멸시하고 푸대접 하더니 이젠 내 앞에 설설 기면서 살려 달라는 시늉을 하는구나. 가엾은 친구지만 이런 것이 세상 인심이다. 홍근이나 병기에 비하면 그래도 김가 중에선 병학이가 의리 있는 친구다. 내가 곤궁할 때는 그렇게 전곡(錢穀) 을 보내서 도와 주더니 내 형편이 달라진 오늘엔 아첨도 않고 친구로서 충 고까지 해준다. 그는 역시 사람이 됐어." 대원군이 혼자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튿날은 천하장안(千河長安) 등의 네명의 유명한 부랑자 친구를 비롯한 천민(賤民) 출신의 옛날 술친구 십여명을 데리고 삼계동에 있는 김 홍근의 별장으로 놀러 나갔다. 장안의 망나니 일당이 별장으로 가니 오늘 따라 굉장한 잔치가 준비되어 있고 장안의 일류 기생이 모두 출동해 있었 다. "대감, 오늘은 웬일입니까? 마치 칙사 도임상 같은 진수성찬이 아닙니까? 대감 취미답지도 않게..." "너희들을 위한 도임상이 아니다. 칙사를 보내시는 분께서 행차하신다. 너 희들은 그 분이 퇴하신 뒤에 이 상을 그대로 받고 진탕 놀아라." 일동은 깜짝 놀랐다. "그럼 상감께서 오늘 여기 행차하십니까?" "대감, 이런 날 불러 주셔서 영광입니다." 하고 일동은 긴장했다. 그러면서도 그전엔 자기들에게 "아저씨, 엿 한가래 사 줘요." 하고 졸라대 던 그 개똥이 시절의 초라하던 소년 모습이 눈에 선해서 꿈결 같은 감회를 금하지 못했다. "이 별장의 여러 체 집과 정자들 가운데서도 제일 경치가 좋은 곳에 자리 잡은 유관재(幽觀齋)는 실로 선당(仙堂) 같은 별천지였다. 대원군도 다른 정자에 간단히 차려 놓은 주석으로 술 친구들을 데리고 가 서 일렀다. "여기서 두서너 잔만 먼저 하자. 상감이 오실때까지 낯이 붉지 않을 정도 로 하면서 놀고 있어라. 나는 잠간 궁중으로 가서 상감을 모시고 나오겠 다." 대원군은 궁중으로 급행하더니 이윽고 고종의 미행(微行) 행차를 인도하고 돌아왔다. 어린 임금은 유관재에서 유곡(幽谷)의 산수미(山水美)를 구경하면서 오찬 을 하고 이내 환궁(還宮)했다. 그 뒤에 대원군은 밤이 늦도록 장안 오입장 이들과 전과 다름 없는 잡스러운 유흥을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세상에서 멸시 받는 이 천민 상인(商人)들의 잡놈들에게 자기의 정치적 포부의 일관 을 피력하면서 그들의 협력을 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나라를 구하는 정치란 별 것이 없다. 세력 없고 가난한 백성을 잘 살게 해주는 것이 바로 요순(堯舜) 시절의 선정(善政)이다. 민심이 천심(天心) 이기 때문에 임금도 대신들도 백성을 하늘로 섬길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 지금 같은 김씨 일파의 양반정치엔 민심이 따르지 않는다. 누가 저를 못 살게 하는 세도 정치를 신뢰하겠느냐? 백성을 위한 정치에 백성의 심정과 살림을 알아야 하고 백성 자신도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너희들은 앞으로 내 수족이 돼서 높은 감투를 씌어 준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너희들에게 어울리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 고관들은 뒤에서 감시하 는 직책을 너희들에게 맡기겠다. 중앙에서 지방에까지 공정하고 치밀한 마 패 없는 암행어사가 돼서 민심의 동향을 살피고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탐관오리의 죄상을 염탐해서 직접 나에게 보고하라." 이것은 민심의 동향과 관리의 행동을 정확 신속히 알기 위한 대원군의 정 보망(情報網) 조직을 위한 중대한 포부였던 것이다. "대감, 그런 일엔 자신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너희들을 적소(適所)에 등용하는 거다. 그러나 만일 사원 (私怨)으로 허위 보고를 하면 너희들 목이 달아날 줄 알아라. 그런 중대한 공사의 죄악은 나의 우정으로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허허허, 좌우간 너 희들의 분투를 위해서 축배를 들자." 대원군의 지기(知己)에 감격한 일동은 간달다운 의협심으로 대원군에게 신 의를 맹세하는 잔을 들었다. 대원군은 누구에게나 이런 식으로 솔직한 심 정을 독특한 변술로 토했으므로 인간적 매력을 상대방에게 주어서 신임을 얻고 대소(大小)의 정치문제에도 큰 효과를 거두었던 것이다. "그런데, 대감님 이 김가 놈의 별장이 참 훌륭합니다. 이것도 모두 국고를 좀먹고 백성의 재물을 훔쳐서 지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물론이다. 앞으론 일체의 벼슬아치가 이따위 짓 못하게 너희들이 잘 감시 하란 말이다." "우선 이 별장부터 대감께서 몰수하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