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일정에는 여수 금오도로 [섬테마 1박 2일]을 할 예정이었으나
일행 중에 사정이 생겨 당일치기로 달마산행을 하고 왔습니다.
신라 경덕왕 때 창건된 미황사의 대웅전은 보물 947호로 지정돼 있다.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된 후 2번의 중창을 거쳤으며
우리가 봐왔던 현재의 모습은 조선 영조 30년(1754) 중창 이후의 모습이라고 한다.
그런 대웅전이 해체복원공사 중이었다.
올해 1월 22일 ‘대웅보전, 천일의 휴식'이란 이름으로 고불식을 가졌었다.
대웅보전은 바위를 쌓아 올린 기단 위에 둥근 주춧돌을 놓고 배흘림기둥을 세워 지었다.
나무와 나무를 끼워서 조립한 품새나 중앙 기둥에 새긴 용머리 장식이 매우 화려하다.
그러나 건물 자체는 담백하고 엄숙한 모습이다. 무채색이어서다.
미황사 대웅보전은 알록달록한 단청이 없다. 남도의 바닷바람에 단청이 다 지워졌다.
그래서 더 그윽한 풍경을 연출한다.
금강소나무의 결이 그대로 드러난 대웅보전이 울퉁불퉁한 암봉들을 두른 채 서 있는 모습은
‘땅끝마을 아름다운 절’ 미황사를 상징하는 장면이었다.
‘한국적 펜화의 명인’이라 불리는 김영택의 손끝에서 탄생한 작품은
0.03㎜의 펜촉을 수만번 그어 완성했다.
자를 대 ‘칼선’을 만들거나 카메라의 눈으로 사물의 크기·거리를 가늠하는 서양펜화와는 다르다.
보고 싶은 것을 더 크게 보는 사람의 눈으로 포착한 ‘혼의 그림’이기 때문이다.
이름하여 ‘김영택원근법’. 덕분에 뒷산바위가 20%쯤 커졌단다.
화백의 눈과 혼이 바위에 비쳤을까?
국내외 건축문화재를 펜화로 기록하고 복원해온 김영택 화백이 지난해 1월 13일 지병으로 별세했다. 76세.
1945년 인천에서 태어난 고인은 홍익대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숭실대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뒤
산업디자이너로 활동을 시작했다. 1993년 국제상표센터가 세계 정상급 그래픽 디자이너에게 주는
‘디자인 앰배서더’ 칭호를 받을 정도로 뛰어난 디자이너였다.
1995년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에서 처음 서양 펜화를 접한 뒤 펜촉으로 건축물을 세묘하는 기록 펜화 에 몰두했다.
펜촉을 사포로 갈아 0.03㎜, 0.05㎜ 굵기로 만든 뒤 도화지에 선을 50만∼80만번 그어 완성하는 작업을 독학으로 익혔다.
전국을 답사하며 전통 건축물의 아름다움을 기록했고, 훼손된 문화재는 역사적 고증 작업을 거쳐 옛 모습을 재현해 냈다.
그의 펜촉 끝에서 화재로 소실됐던 숭례문의 1910년대 전경과 양산 통도사, 해인사 일주문,
경주 황룡사 9층 목탑 등이 되살아 났다.
이탈리아 로마 콜로세움, 일본 호류지 금당, 요르단 하드리아누스 개선문 등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도 펜화로 남겼다.
고인은 한국펜화가협회 회장을 맡아 펜화 활성화에도 힘썼다.
저서로 ‘펜화로 읽는 한국문화유산’, ‘펜화, 한국 건축의 혼을 담다‘ 등이 있다.
@ 효림 스님은
도솔암 아래 바위벽에 자리한 용담샘이자 굴!
이 굴은 용굴 이라고도 하는데 옛날 이 속에서 두 마리의 용이 나와 승천했다고 한다.
바위 앞에서 용이 입을 벌려 바위가 뚫리고 용이 뿔로 받아 바위에 뿔 구멍이 생겼다고도 전한다.
용담물은 가끔 누런 빛을 띄는데 하늘로 올라가던 황룡이 아쉬움에
자신의 몸에 난 가루를 샘의 벽에 묻혀 두고 갔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