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04 주안 온가족 새벽기도회 / 김주영 목사(서울외고 교목)
말씀 : 출애굽기 10:7-10
제목 : 줄다리기, 뺏길 것인가? 빼앗을 것인가?
9 모세가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인즉 우리가 남녀 노소와 양과 소를 데리고 가겠나이다
10 바로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와 너희의 어린 아이들을 보내면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함과 같으니라 보라 그것이 너희에게는 나쁜 것이니라
†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서울외고에서 교목으로 사역하는 김주영 목사라고 합니다.
오늘 이른 시간을 깨워서 온 세대가 함께 예배하는 주안 온가족 새벽기도회에 오신 여러분,
정말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예수님의 은혜와 평화가 오늘 예배하는 우리 모두 가운데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제가 기도하고, 이 시간 말씀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시간 우리 예배를 또 기쁘게 받아주시고
이 땅의 다음 세대를 통해서 하나님은 여전히 예배 받기를 원하시며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전수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이 시간에 우리가 다시금 깨닫고
우리가 비전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성령님, 우리 가운데 임재하여 주셔서 친히 말씀하여 주시고 우리를 가르치실 때
우리가 그 말씀 가운데 온전히 반응하며 나아가는 귀한 시간 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모든 것 주께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오늘 이렇게 예배하는 여러분들을 보니까
여전히 한국교회 그리고 다음 세대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소망과 비전이 더욱 더 선명해집니다.
그 현장에 함께 동참하고 있는 여러분들에게도 저와 같은 가슴 뜨거운 흥분과 울렁거림이 있었으면 참 좋겠다라는 생각을 합니다.
저는 이 시대 예배하는 아이들, 그리고 정말 믿음의 도전을 해가는 친구들을 볼 때마다 늘상 눈물이 많이 쏟아지는데요.
오늘 또 찬양하면서 저도 저기 아래서 기도하는데 이 공간 안에서 함께 예배하는 우리 아이들을 볼 때
얼마나 마음이 뭉클하고 뜨거워지는지...
여기 올라오니까 여전히 그런 마음 안에 있는 깊은 감격과 감동을 주체할 수 없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저희 학교에도 이렇게 특별한 새벽 기도회가 있습니다. 한 학기에 한 번씩 저희는 1주일 동안 특새를 하는데요.
'아주 특별한 1주일'이라는 이름으로 방학을 앞두고 있는 한 주간 동안에 새벽 기도회, 일종의 말씀 사경회를 엽니다.
학교에 채플이 있지만, 채플은 주로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친구들에게
복음에 대해 쉽게 소개하고 또 만날 수 있도록 그렇게 예배를 구성하고요.
이렇게 특별한 신앙 훈련을 통해서는 예수님께 헌신된 제자로 자라갈 수 있도록 훈련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제가 제일 일찍 와서 맨 앞에 앉아서 기도하고, 또 찬양하면서 마음 안에 이런 염려가 언제나 떠나지 않아요.
'하나님, 오늘 아이들 안 오면 어떡해요?' '하나님, 오늘 몇 명 안 나오면 어떡할까요?'
제가 이렇게 늘 연약하고 참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제가 맨 앞에 앉아서 기도하고 찬양할 때
제 마음 안에 '하나님, 오늘 아이들 안 나오면 어떡해요? 오늘 몇 명이나 올까요?'라는 염려는 있지만,
감사한 것은 오늘 몇 명 왔나 하고 절대로 뒤돌아보지 않았다는 겁니다.
찬양이 마치고 이제 말씀의 자리로 나아가서 기도하고 눈을 뜨면, 저는 그때 저의 믿음 없음을 비로소 매 학기마다 회개하고요.
우리가 예배하는 그 공간에 아이들이 가득 찬 것을 보면,
정말 가슴이 막 뛰고 진짜 눈물이 한 학기도 멈추지 않은 적이 없었던 거 같애요.
도대체 이 아이들이 그 이른 시간을 깨워서 여기에 왜 올까?
소망 없는 저의 마음에 하나님이 늘 소망을 회복시키는 시간이 특새이기도 합니다.
저희는 특새를 오늘 주안교회가 시작하는 6시보다 훨씬 뒤인 6시 40분에 시작을 하는데요.
학교가 지역에 기반한 학교가 아니다 보니까 기본적으로 아이들의 통학시간이 한 시간 이상이에요.
그러면 정말 6시 40분 새벽 예배 맞춰 나오기 위해서 아침 첫차를 아이들이 타는 거죠.
5시도 훨씬 전에 일어나서 씻고, 정말 새벽 칼바람을 맞든, 아니면 여름에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나오는 거죠.
제가 여러분들에게 미리 좀 보여 드리려고 했던 사진이 있는데요. 잠깐 한번 좀 보도록 하겠습니다.
두 개의 사진이 있는데, 첫 번째 사진은 1학기 때 특새 광고사진이었고요.
두 번째는 아마 2학기 사진이었던 것 같은데, 넘겨주시겠어요..
지금 저희 아이들이 아침 특새에 이렇게 참여하고 있는 사진입니다.
정말 귀한 것은,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부모님들이
이 아이가 특새를 하기 위해서 아이 데려다 주느라 일찍 부모님이 나오는 경우도 있고요.
그래서 아이가 1주일 동안 특새에 참여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 믿음 없는 부모님이 아이 때문에 그 특새에 나오기도 하고,
그런 아름다운 은혜의 시간들이 이 특새 안에 있습니다.
특새가 믿음의 스피닝, 전력 질주 훈련이라고 한다면,
또 매일매일 믿음의 잔 근육을 키워가는 훈련이 있는데, 바로 그게 '아침 기도회'이기도 합니다.
뒤로 한 장을 또 넘겨주시면, 학생들이 아침 기도회에 나오는 장면이 있어요.
아침 기도회는 아침 조회가 끝난 짧은 10분의 시간, 담임 선생님이 들어오셔서
아침 조회를 끝나고 나면 1교시가 시작되기 전 아주 짧은 10분의 시간이 있는데,
그 짧은 10분의 시간, 화장실 가기도 바쁘고 매점도 가야 되는데, 그 짧은 10분의 시간을 통해 하루의 시작을 말씀으로 시작하는
이 시대의 청소년들이 우리에게 여전히 소망으로 남겨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이 얼마나 가슴 뛰는 일입니까?
오늘날 이 시대의 많은 젊은 세대들, 특히 우리 청소년부 친구들이 예배하는 게 참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도대체 왜 청소년들과 젊은 세대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을까? 많은 문제 진단을 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많은 진단과 문제의 비판들이 있었지만 그런 비판과 문제 진단들이 어떤 열매를 거뒀는가?
그 뒤로 얼마나 교회 안에 정말 다음 세대들이 교회를 찾아오는 거룩한 부흥이 일었었는지 저는 솔직하게 묻고 싶습니다.
비판이 우리를 정말 살렸는가? 문제를 잘 분석 분석하는 것이 우리 영혼을 살리는가에 대한 저의 솔직한 의문이기도 합니다.
제가 얼마 전에 팀 켈러 목사님의 '탕부 하나님'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그 책 안에 이런 글의 대목이 있었습니다.
어느 신문에 '세상의 문제는 무엇인가'라는 공개 질문이 실렸을 때,
카톨릭 사상가인 'G.K. 체스터틴'은 이렇게 짤막한 답신을 보냈다고 합니다.
"담당자에게"
그건 바로 나입니다.
- 체스터틴 드림 -
이것이 예수님의 메시지를 깨달은 사람의 자세이지요.
누군가에게서 타인에게서 자꾸 문제를 찾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는 바로 나에게 있다는 겸손함이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 같습니다.
비판을 타인에게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말씀의 빛으로 우리 자신을 조명하는 것이 저는 훨씬 더 중요하다라고 생각합니다.
이 시대의 젊은 세대들이 왜 예배하지 않을까? 왜 교회를 떠나게 될까?
그 질문이, 그리고 질문에 대한 진지한 애씀과 노력이 틀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를 살리는 것은, 비판이 아니라 탁월한 문제 분석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그분의 사랑이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왜 아이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을까? 한숨 쉬기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상이 예배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예배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이 시대의 한 영혼, 그리고 한 사람을 바라봤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예배 가운데 함께하고 있는 수많은 다음 세대들을 우리가 주목하고 집중했으면 좋겠습니다.
왜 아이들이 많이 없을까? 하지 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른 시간을 깨워 예배의 자리로 나오는 우리의 아이들이 있음을 우리가 보면서 소망하고 또 감사하고
이미 우리에게 허락하신 이 아이들을 우리가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앙으로 성장케 하고 성숙하게 해서
믿음의 사람, 또 신실한 교회의 일꾼,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 키워낼 것인가에
우리의 열정과 비전을 더 쏟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주안교회는 그런 공동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래서 사역자들에게 "목사님, 요새 왜 이렇게 아이들이 안 보여요?"
그렇게 묻지 마시고, 소망의 말 격려의 말을 좀 했으면 좋겠어요.
"목사님, 이번 주에 제가 아이들 가만히 살펴보니까 우리 아이들이 진짜 귀한 것 같아요.
작년까지만 해도 문제 있었던 아이가, 어우! 그렇게 변화된 걸 보고 제가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모릅니다."
"매 예배 때마다 뒤에 엎드렸던 아이가 어느 순간 목사님 말씀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고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라는 이런 이야기들 하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사역자들에게 늘 격려해 주시고,
구멍을 보지 말고 그 구멍이 채워져 가는 아이들의 믿음의 성장, 또 변화에 더욱 더 집중하면 어떨까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역의 방법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저는 요새 참 많이 하고 있습니다.
간음하다가 붙잡혀 온 여인을 사람들이 다 돌로 치려고 했을 때,
그때 예수님이 그곳에 모였던 수많은 의롭다고 자처했던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쳐라"
주님이야말로 그 부정한 여인에게 가장 당당히 죄를 고발할 수 있는 그런 분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사람들의 비난의 말에, 또 다른 비판의 말씀을 섞지 않으시지요.
그러면서 그 여인에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어서 돌아가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 짓지 마라"
주님은 비판하지 않으시되 그러나 분명한 삶의 목적과 방향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오늘 저는 말씀을 통해 우리 시대의 젊은이들이 다음 세대가 하나님께 예배하지 않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다음 세대들에게 그러면 어떤 삶의 목적과 방향을 주어야 하는 것인가?
우리 아이들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회복하도록 만들 것인가?
그것을 함께 말씀을 통해 나누면서 은혜 받는 시간이 되길 원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으로부터 탈출하기까지의 과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열 가지 재앙에 관한 이야기 중에 들어있는 본문의 말씀입니다.
열 가지 재앙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땅을 떠나도록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거절로부터 시작되지요
우리가 오늘 본문 말씀으로 읽지는 않았지만,
제가 출애굽기 10장에 이르기까지 짤막짤막한 본문을 제가 여러분들에게 좀 소개하려고 합니다.
출애굽기 5장 1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왜 부르십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으로부터 탈출시키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예배 받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을 노예의 압제에서 풀어주고, 또 약속의 땅 축복의 땅 가나안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배하는 약속의 백성, 또 언약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셨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이렇게 질문할 수 있어요.
"하나님, 그런데 하나님은 애굽에서도 계시고 광야에도 계시고 이 세계 그 어디에도 한계되지 아니하시는
장소에 제한되는 하나님이 아니신데, 굳이 왜 애굽에서가 아니라 그들을 광야로 불러내어 예배 받기를 원하셨을까?"
여러분, 우리한테 그런 의문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그런데 한번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분명히 예배하는 자들을 통해서 애굽에서도 예배 받을 수 있는 분이셨어요.
그런데 오늘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러내어 "내가 광야에서 예배 받기를 원하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애굽은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는 곳이 아닌 것이지요. 말씀의 원리와 법칙으로 운영되는 곳이 아니라
세상의 힘의 논리, 세상의 기준과 세속의 복으로 기준 삼는 곳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할 수 없는 곳입니다.
어쩌면 이 애굽은 오늘 우리가 싸워야 할 영적인 전쟁터, 하나님을 대적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보다 세상의 권위와 힘의 원리를 따라 사는 것이 맞다고 우리를 혼돈하게 만드는 그런 곳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그들을 애굽으로부터 불러내어 예배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에 바로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2절 말씀 보니까, "바로가 이르되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
그러자 3절 말씀에, "그들이 이르되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우리가 광야로 사흘길쯤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가도록 허락하소서 여호와께서 전염병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까 두려워하나이다" 바로의 신하들이 이렇게 말하고 있어요.
바로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할 때, 애굽 땅에 일어날 재앙의 전조를 우리가 여기에서부터 미리 느낄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제 7장으로 와서 14절 말씀을 보니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의 마음이 완강하여 백성 보내기를 거절하는도다"
그리고 16절 말씀에서 동일하게 출애굽의 목적을 다시 확인하고 계십니다.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나를 섬길 것이니라 하였으나 이제까지 네가 듣지 아니하도다"
그러면서 17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어요.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니 네가 이로 말미암아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예배 받기를 원하시는데, 예배 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에 거역한 바로를 향한
애굽 땅 가운데 임하게 될 그 재앙의 전조를 지금 모세를 통해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알게 하기 위해 이제 애굽 땅을 치기 시작하십니다.
그 첫 번째 재앙이 바로 물이 피가 되는 재앙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가 얼마나 완악한지 7장 23절에 보니까,
"바로가 돌이켜 궁으로 들어가고 그 일에 관심을 가지지도 아니하였다"라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둘째 재앙, 셋째 재앙, 넷째 재앙 이어서 7번째 재앙까지 임하게 하십니다.
이제 8번째 재앙인 메뚜기가 온 애굽에 덮일 것을 먼저 경고합니다.
7번째 재앙인 우박이 내려서 모든 작물 농사가 다 망하게 되었어요.
그나마 남은 것이 얼마 되지 않았을텐데 이제는 메뚜기 떼가 땅을 덮어
그 우박을 면하고 남아 있던 것을 다 갉아먹고 들에 자라는 모든 나물을 먹어버리는 재앙을 맞게 될텐데,
그렇게 되면 진짜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게 돼서 아사 직전에 이르게 되는 지경이 되게 되는 거지요.
이때, 이제 이러다가 정말 다 죽겠구나 싶었는지 바로의 신하들이 바로에게
"이 사람들을 다 애굽 땅으로부터 내보내 달라"고 먼저 간청합니다.
출애굽기 10장,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택한 7절 말씀 보니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바로의 신하들이 그에게 말하되 어느 때까지 이 사람이 우리의 함정이 되리이까 그 사람들을 보내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게 하소서 왕은 아직도 애굽이 망한 줄을 알지 못하시나이까"라고
이렇게 바로 신하들이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바로가 마음이 약간 움찔했던 모양이에요.
'그래, 그러면 가서 모세와 아론을 한번 불러와 봐라' 하니까, 신하들이 모세와 아론을 바로에게로 데리고 옵니다.
바로 앞으로 온 모세와 아론에게 바로가 다시 묻는 것이지요.
8절 말씀에, "그래 좋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너희가 섬겨라. 그러면 갈 자가 누구누구인지 한번 얘기해 봐라"
누가 예배하는 자가 되겠느냐라고 이렇게 지금 바로가 모세에게 묻는 거예요.
그러자 모세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9절) "모세가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인즉 우리가 남녀 노소와 양과 소를 데리고 가겠나이다"
남녀노소는 예배하는 이들이고, 또 양과 소는 하나님께 드릴 예물, 번제물인 것이지요.
여러분, 이 두 가지가 예배에는 항상 필요합니다.
첫 번째는, 예배하는 우리 자신이고, 그리고 우리가 준비할 예물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데 이 양과 소로 이야기되는 이 예물은
구약시대 때는 반드시 하나님 앞에 드리는 그 제사 안에 번제물이 있었기 때문에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에 있어서 눈에 보이는 어떤 물질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 각자의 삶에서 우리가 준비할 마음의 예배,
또 마음의 예물 또한 헌신의 예물들을 우리 예배를 통해서 기대하고 받기를 원하는 것이지요.
모세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우리는 어린이고 노인이고 모두 데리고 가야 하겠습니다.
아들 딸도 데려가고, 소 떼와 양 떼도 다 몰고 가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 축제를 올려야 하기 때문이니까요"
그러자 10절에 바로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바로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와 너희의 어린 아이들을 보내면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함과 같으니라 보라 그것이 너희에게는 나쁜 것이니라"
뭐 이렇게 이야기해요. 이게 좀 번역이 이해하기가 쉽지가 않아요. 그렇지요.
그리고 우리가 10절에 있는 이 말씀을 있는 그대로 우리가 읽고 해석하면 여러 가지 해석에 조금 혼돈이 있을 것 같아서
최대한 성경본문에 기록된 내용에 근접해야 되니까. 제가 다른 성경 번역본을 한번 찾아봤어요.
10절 말씀을 새번역으로 찾아보니까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가 그들에게 호통쳤다. 그래, 어디 다 데리고 가봐라. 너희와 함께 있는
너희의 주가 나를 감동시켜서 너희와 너희 아이들을 함께 보내게 할 것 같으냐?
어림도 없다. 너희가 지금 속으로 악한 음모를 꾸미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면서 11절 말씀에, "그렇게는 안 된다. 가려면 너희 장정들이나 가서
너희의 주에게 예배를 드려라. 너희가 처음부터 바란 것이 그것이 아니더냐?"
"이렇게 해서 그들이 바로 앞에서 쫓겨났다."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무슨 말입니까? -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바로의 속셈은 무엇입니까? - 결국에는 너희들을 보낼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너희 아이들을 보내면, 내가 너희에게 다 내어주는 건데 그렇게는 못하겠다.
내가 너희 아이들을 인질로 잡아둬야 결국엔 너희가 떠나갔다가도 다시 돌아오지 않겠느냐'
하는 그런 속셈이 바로의 마음 안에 있었던 것이지요.
장정만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는 것은 바로 이런 의도에서 하는 말인 것 같습니다.
장정만 가라는 것은, 애굽에 가족이 남아 있으니까 다시 돌아오라는 뜻입니다.
여호와를 섬기는 제사를 하되 애굽으로 돌아와서 바로 자신의 도움을 받으며 살라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애굽에서 나가는 것보다 너희에게 훨씬 더 유익이 되지 않겠냐라고 지금 모세를 설득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의 말에서 우리가 엿볼 수 있는 사단의 아주 교묘한 전략인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을 시작하면서 하나님은 애굽이 아닌 광야에서 예배 받기를 원하신다라고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애굽에서 예배하기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보다 당장 먹고 사는 일,
애굽의 부귀와 영화, 지금까지 누렸던 세속의 기쁨을 계속해서 누리는 것이 좋다고 우리를 유혹하는 곳이기에
그곳에서는 하나님을 우리가 온전히 예배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애굽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계속해서 붙잡아 두려고 합니다.
애굽에서 떠나지 못하도록 우리를 가둬 두려고 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와 근거들을 가지고 우리가 애굽을 떠날 수 없도록 꼼짝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제부터 애굽의 세상과 하나님의 세상으로 대변되는 광야의 줄다리기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서로 빼앗고, 빼앗기지 않으려는 영적인 싸움터, 영적인 줄다리기가 시작됩니다.
애굽의 세상은 우리의 자녀를 인질로 삼고 싶어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질이 자녀이고,
그 자녀 앞에서 우리가 한없이 약해지고 무너진다는 것을 사단은 누구보다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자녀 문제에서만큼은 세계 그 어떤 나라도 따라갈 수 없을 만큼의 애정과 헌신, 그리고 과열된 교육열이 이 애굽의 인질로부터
이 땅을 살아가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 오늘 이 시간에 함께 예배하는 수많은 성도님들을 쉽게 벗어나지 못하도록
우리를 지금도 흔들고 있는 것이지요.
"나는 이렇게 살았는데, 적어도 우리 아이만큼은 좀 잘 자랐으면 좋겠다."
"너는 세속적인 방법으로 좀 성공했으면 좋겠다."
하는 그런 세속의 방법에 여전히 의지하고 살려고 하는 모습이 우리 안에 솔직하게 있지는 않은지
오늘 말씀 앞에 우리가 정직하게 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주일에 학원 가라"
"괜찮다, 온라인으로 예배 드리고 가면 된다."
꼭 중간고사 준비 기간만 되면, 학원에서 주일에 보강을 잡아요.
제가 사역하는 교회의 아이들도 벌써 시험 보기 한 두 주 전부터 나오지 않는 거예요.
물어보면, 목사님 죄송하지만 주일에 학원에서 보강을 잡아서 어쩔 수 없이 보냈다고,
이렇게 몸을 부끄럽게 꼬면서 저한테 변명하는 그런 분들이 많아요.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그걸 뭐라고 우리가 말을 못 하는 거예요.
그 시간에 안 가면, 왠지 아주 중요한 시험 족보를 놓치는 것 아닌가, 그 두려움이 우리 아이들을 엄습해 오는 거예요.
사단이 가장 잘 이용하는 전략 중의 하나가 바로 이 근거 없는 두려움입니다.
여러분, 디모데후서 1장 7절이 우리에게 이렇게 도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할렐루야!
여러분, 그 근거 없는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선포합니다.
"학원 가지 말고 교회 가서 예배하자" 이렇게 말해야 하는데,
바로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렇게 하지 말고 너희 장정만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
'아이들 데리고 가지 말고 너희 어른들만 가서 예배하라'
'굳이 안 가겠다고 하는 아이와 싸우지 말고 너희 어른들만 가서 주일에 예배해라'
이 바로의 목소리에, 애굽이 들려주는 목소리에 우리가 주저앉는 것입니다.
※ 여러분 그런데, [아니요. 저는 주일에 예배하고 가겠습니다.]
제 삶 가운데 그 어떤 우선순위보다도 예배하는 우선순위를 바꾸지 않겠습니다.
여러분, 이런 결단과 도전이 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잠깐 제 얘기 좀 하겠습니다. 저희 아버지가 목사님이셨어요.
제 아버지는 아주 근본적인 원칙주의 신앙을 고수하셨는데요.
제가 고등학교 때 11시까지 야간자율학습을 다 의무로 해야 하는 그런 시대에서 학창생활을 했습니다.
지금은 토요일에 학교에 가지 않지만 그때는 토요일에도 수업이 있었고,
일요일도 학교에서 모두가 다 반강제로 자습을 해야만 했던 그런 학교를 제가 다녔습니다.
그런데, 저희 아버지가 항상 새 학기를 시작하면 저희 담임 선생님에게 이렇게 전화를 하셔서 제가 얼마나 곤욕스러웠는지 모릅니다.
"우리 애는 수요일에 교회 반주해야 되니까 야자 못합니다."
"우리 아이는 여름방학에 수련회도 해야 하고, 여름 성경학교 교사도 해야 되니까, 여름방학 보충수업은 모두 다 빠지겠습니다."
대학을 다니면서 밤이 늦도록 야간 편의점에서 알바하고 너무 피곤해서 눈이 막 감기는데,
저희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저를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으셨어요.
제가 밤새도록 야간 편의점에서 알바를 끝내고 한 새벽 4시, 4시 반쯤 집에 들어오면,
"야, 그래 일하느라 참 피곤할 텐데 새벽기도 오지 말고 집에 가서 좀 쉬어라"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이런 삶이 제가 너무 고되고 힘들어서 제가 새벽 기도 때 기도하다가 울면,
새벽 기도회 끝나고 나서 아버지가 저를 굉장히 호되게 훈계하시는 거예요.
'너 자신의 삶의 연민으로 하나님 앞에서 울지 마라. 그런 눈물은 필요 없는 눈물이다.'
참으로 얄미운 아버지, 인정머리 없는 아버지였지만, 그런 아버지의 단호한 신앙의 원칙이 저를 이제껏 살아오면서
수많은 신앙의 위기와 흔들림 속에서도 그 균형을 잃지 않는, 저는 아주 좋은 기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오늘날 이 시대를 '과잉 위로의 시대'라고 누군가 이야기합니다.
여기저기 위로가 참 넘쳐나는 시대를 우리가 살아가고 있어요.
'괜찮다, 게을러도 괜찮다, 나태해도 괜찮다'
오죽하면 이런 책 제목까지 나왔습니다.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야매 득도 에세이' -
여러분, 이 시대의 이런 분위기 속에서 우리의 이 새벽을 깨우는 예배는
애굽의 문화, 세상의 문화를 거스르는 굉장히 변혁적이고 혁명적인 충돌의 시간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졸리면 자야지, 그 시간을 왜 깨워?'
'아이들이 가기 싫다고 하면, 그 싫음을 인정해야지 왜 데리고 가?'
자기 본성이 옳은 대로 항하는 것, 그것을 긍정하는 이 시대에 과잉 위로가 주는 거짓된 메세지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분별해낼 수 있는 영적인 눈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러분, 사사시대에 그들의 삶이 분별없음을 성경이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그때에는 이스라엘의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사사기 17:6) * 왕이 없는 삶...
* 하나님이 주인이 되는 삶, 하나님이 우리 삶의 근거가 되고 목표가 되고 목적이 되어야 하는데
우리의 감정과 우리의 느낌, 우리의 정서가 주인이 되고, 우리의 삶이 근거가 되는 삶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떠난 '자기 소견의 옳은 대로 행하는 삶'이라는 것이지요.
아무런 죄책감이 없고 옳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 편에서는 그것이 전혀 옳지 않은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의 다음 세대들에게 우리 부모님들이 이제는 말씀의 단호함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 애굽과의 싸움, 애굽과의 줄다리기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말씀의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애굽과의 줄다리기에서 어떻게 이 경기를 이길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우리의 자녀들을 우리의 다음 세대들을 애굽에게 뺏길 것인가?
아니면 애굽으로부터 우리의 다음 세대들을 빼앗아 올 것인가? 하는 중대한 영적 고비이기도 하고, 또 물음이기도 합니다.
저는 크게 세 가지 정도를 정리하면서 오늘 말씀을 좀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첫 번째는, 우리가 이 애굽과의 줄다리기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믿음의 근육, 기초 체력을 키워야 합니다.
여러분, 줄다리기는 팀으로 하는 경기입니다. 하지만 각자의 건장한 힘이 있어야,
건장한 힘으로 준비된 각각의 선수들이 힘으로 뭉쳐져야 우리가 줄다리기에서 이길 수 있는 것이지요.
건강한 한 사람 한 사람이 팀으로 뭉쳐야 상대 팀을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 하나쯤이야 힘을 좀 덜 줘도 된다는 안일함이 있다면, 여러분 어떻게 될까요?
큰 무리에 그냥 기대어서 편승해서 가겠다고 하면, 지는 싸움인 것이지요.
교회에 나오는 것으로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큰 착각입니다. 마치 공부하고 있다는 착각처럼,
우리 아이들이 학원 가서 정작 공부하지 않으면서도 몸만 학원에 가 있으면 내가 공부하고 있다라는 착각이 있는 것처럼,
여러분, 우리의 믿음 생활에도 그런 착각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이 이 경기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의 탁월한 선수로 준비될 수 있도록 믿음의 기초체력을 키워내야 합니다.
믿음의 기초체력은, 바로 말씀과 기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말씀 없고 기도는 있거나, 기도는 있는데 말씀이 없으면 문제입니다. 분명히 조화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매일매일 말씀과 기도의 훈련을 이겨나갈 수 있도록
우리 부모님들이 독려하고 그 시간을 함께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까 제가 저희 학교 학생들의 삶을 소개하면서 매일매일 10분의 시간을 기도와 말씀으로 열어가고 있다고 했는데요.
처음부터 큰 목표를 가지지 말고 작은 것부터 그 기본기를 다져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학기 초에 우리 아이들에게 그렇게 도전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하루의 시작을 책상 위에서 침 흘리면서 시작하겠습니까?
아니면 인생의 지혜와 빛이 들어있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여러분 자신을 앉히는 것으로 시작하겠습니까?"
"여러분 저는, 하루의 시작을 책상 위에서 침 흘리다가 시작하는 친구의 삶과
하루의 시작을 말씀과 기도로 시작하는 친구의 삶은 1년 뒤에 분명히 달라져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3년 뒤의 모습이 어떻게 달라져 있을지, 여러분 스스로 시험하고 도전해 보십시오."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여러분의 자녀에게도 한번 그렇게 도전해 보십시오..
저희 집 아이들은, 아침에는 잠언 전도서 묵상집으로 하루를 시작하고요.
매일매일 하루의 마무리는 성경 마이너 묵상으로 하루를 마무리합니다.
굉장히 수고롭고 고단한 부모의 일이지만, 그러나 우리의 자녀들을 애굽으로부터 우리가 빼앗아 오기 위해서는
그런 부모의 영적인 수고와 결단이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둘째, 줄다리기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팀으로 하는 경기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함께 이 싸움을 이겨낼 수 있도록 팀 전략을 잘 짜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각 부서 안에서도 우리가 어떻게 하면 다음 세대들을 우리 아이들을 이 세상의 문화 앞에,
바로와 애굽의 문화 앞에서 빼앗기지 않을 것인지를 연구하고 전략적으로 우리가 잘 싸워야 하는 것이지요.
무엇보다도 우리 아이들이 교회 공동체 안에 머물며 신앙생활 하는 기쁨을 마련해 줘야 합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혼자라면 감당하기 어려웠을 믿음의 시험 문제를 세 명의 친구가 모이다 보니까 능히 감당해낼 수 있었던 것이지요.
[다니엘의 세 친구를 만들어 주자!]
[우리 아이들에게 믿음의 삼겹줄을 만들어 줍시다!]
혼자 버텨내는 힘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여럿이 있을 때, 함께 믿음의 도전을 할 수 있는 친구들이 있을 때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 4:12)라는
전도서의 말씀이 응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끝으로, [틈을 주지 말자]라는 것입니다.
줄다리기에서 틈을 주면 어느 한순간에 확 빼앗겨 버립니다.
어어~ 하다 순식간에 무너졌던 그런 경험들이, 아마 여러분들 줄다리기 경주해 봤다면, 다 그런 경험들이 있을 것 같아요.
단단히 버텨내는 힘이 중요합니다.
예배 한 번 빠지고, '그래 이번 주는 특별히 시험 기간이니까',
'이번 주에는 특별한 모임이 있으니까', '이번 주는 친구네 집에 가야 하니까' 하고 한번 타협하기 시작하면 끝입니다.
버티기가 힘들지만, 한 번 틈을 내주면 훅 간다는 걸 기억합시다.
힘들어도 여러분 버텨내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가 함께...
또 믿음의 삼겹줄의 친구들이 함께, 이 지루한 줄다리기의 경기, 믿음의 경기를 버텨내 승리로 마무리를 지어야 하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주안교회의 성도 여러분,
애굽은 우리의 자녀를 볼모 삼아 계속해서 타협해 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다.
'그렇게 하지 말고, 너희 장정만 가서 예배해라.'
오늘날의 세상인 애굽이 우리를 향하여, 우리의 다음 세대를 향하여 여전히 우리를 유혹하고 흔들고 도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에게 명령하십니다.
"아니다! 나는 남녀노소 너희 아들과 딸 모두가 애굽이 아닌 광야에서 나를(하나님을) 예배하길 원하신다!"
이것이 이 시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엄중한 명령이자 음성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