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Ⅱ-75]인종대왕의 묵죽도墨竹圖와 하서 김인후
조선 제12대 임금이 인종仁宗(1515-1545)이다. 세자로만 22년, 등극 8개월만에 붕어崩御해 가장 단명短命했으며 불운한 임금이었다. 그가 '학문의 스승'을 맞이한 것은 26세때, 동방 18현으로 추앙받는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1510-1560. 전남 장성의 필암서원 배향)였다. 사제師弟이면서 좋은 벗 '절친'이 되었다. 계모 문정왕후의 등쌀과 그를 죽이려는 수많은 음모(친자식 명종을 임금으로 추대할 야심)에도 불구하고, 인종은 정조대왕 다음 가는 천하의 효자였다. 그가 세자시절 친구이자 스승을 그리며 문인화 한 폭을 그려 선물했다. 이른바 <묵죽도>(먹으로 그린 대나무 그림). 혹시 <천상의 컬렉터>라는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으신가? 감읍한 하서는 세자가 그린 그림 위에 시를 한 편 지어 써놓았다. 후대 광해군과 영조 대에 어느 신하가 그 묵죽도를 목각으로 새겼다. <묵죽도> 목각본은 원래 3점이 있었다. 그 목각본이 10여년 전 도둑을 맞았는데, 2021년 2점이 회수돼 광주국립박물관에서 수장하고 있다. 그림 위의 전서篆書 <인종대왕>의 ‘대왕’이라는 지칭은 불과 8개월 재위에 그친 것을 생각하면 좀 무색하다. 인종이 그린 '묵죽도' 목판, 도난 14년 만에 회수 (daum.net)
위 내용은 이미 알고 있었는데, 목판본에 먹을 칠해 찍은 <묵적도>(74×118cm) 영인본이, 지난 월요일(8일) 저녁, 인생의 도반인 축령산 ‘변신령’집 벽에 붙여 있었다. 멋졌다. 고풍스럽기도 하고, 어디서든 흔하게 직접 볼 수 있는 작품은 아니었다. 진품은 아니고 탁본한 것인데도, 그 스토링텔링을 알고 있었으니 여간 감격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지금은 찍을 수도 없지만, 어디선가 흘러나왔을 터. 얼마 주고 구입했느냐는 질문에 침묵으로 일관했다. 아무튼, 하서의 발시拔詩를 보면, 임금과 신하(군신君臣)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고, 서로의 주고받음이 얼마만한 품격을 갖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어 너무 좋았다. 그 전문을 옮기는 까닭이다.
根枝節葉盡精微: 뿌리, 가지, 마디와 잎새 모두 정미하다
石友精神在範圍: 굳은 돌, 벗의 정신이 깃들었네(石友: 돌처럼 단단한 우정)
始覺聖神俟造化: 조화를 바라는 임금의 뜻을 이제 깨닫노니(俟: 기다릴 사, 聖神: 임금)
一團天地不能違: 천지에 한결 같으신 뜻을 어길 수 없도다
하서는 인종의 돌연한 붕어에 넋을 잃고, 어떠한 벼슬에도 오르지 않은 채 수많은 후학들을 기르며, 한시 3000여편을 남겼다. 해마다 인종의 기일에 몇날 며칠 통곡했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송강 정철이 ‘그날만 돌아오면 온 산이 하서의 통곡소리로 들썩인다’며 시로써 선생을 기렸을까. 한편, 하서는 성균관 재생齋生(왕립장학생)시절, 스승인 ‘호남 예학禮學의 종장 宗匠’으로 불리는 기묘명현己卯名賢 신재新齋 최산두崔山斗(1493-1576)의 별세소식에 삼베깃(기마)을 1년간 옷에 달고 다녔으며, 조의문을 짓기도 했다. 신재는 정암 조광조와 <낙중군자회>를 만들어 ‘지치주의至治主義’를 꿈꾸다 실패했다. 전남 화순에서 18년간 귀양살이를 할 때 하서를 얼마 동안 가르쳤다고 한다. 나로서는 초계草溪 최가 중시조 할아버지이기도 하다. 하서를 기리는 필암서원은 2019년 도산서원, 병산서원, 소수서원, 무성서원, 남계서원, 돈암서원, 옥산서원, 도동서원 등 9개 서원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런 유서由緖깊은 문인화 한 점의 내력만 보아도, 오늘날 시도때도 없이 이합집산하는 부박한 정치인들과 배신을 밥 먹듯 하는 정상배들의 앞날(훗날의 역사의 평가를 생각하면)이 눈에 환히 그려지는 것같지 않은가. 몇 백 년 전, 국민(백성) 그리고 신하와 임금을 진정으로 생각하고 사랑하는 그 지조와 절개에 새삼 경의를 표한다. 임금과 신하는 물과 물고기의 관계(수어지교水魚之交) 라 하지 않았던가. 창경궁 규장각으로 들어가는 대문의 현판이 <수어문水魚門>이다. <묵죽도>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이지만, 그런 점에서도 문화재로서의 가치와 위상은 몇 배 더 윗길일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