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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산마애삼존불상(자료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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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안서순 |
| 백제의 미소로 불리는 서산마애삼존불(국부84호)과 최근 국보307호로 지정된 태안마애삼존불이 당시 대외무역시 내륙왕래 안전과 해상교통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주장이 나왔다.
그간 서산과 태안의 마애불에 대해 그 조성 배경 등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대두되었으나 학계의 전문가에 의해 이런 주장이 공식적으로 제기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 같은 주장은 16일 노중국 교수(계명대 사학과)가 충남 서산문화원이 주최하고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가 주관한 '서산지역의 백제문화'라는 학술회의에서 발표할 예정인 연구논문에 들어 있다.
노 교수는 논문을 통해 "태안의 마애불이 당시 당나라를 오가던 서해 해상교통로가 한눈에 바라보이는 백화산(284m)중턱에 위치해 있고 서산 마애불은 태안과 당진방면에서 도읍지로 가던 통로 역할을 한 내륙지역에 조성되어 있는데다 두 마애삼존불 모두에 안전을 기원하는 관음보살이 배치돼 있는 점 등을 볼 때 안전항해와 내륙교통의 안전을 기원하기 위해 조성된 것이 틀림없다"고 밝히고 있다.
간월암의 성산 암주스님은 "관음보살은 중생의 괴로움을 해결해 준다는 보살이나 '바다에서 폭풍을 만났을 때의 고통도 해결해 준다는 능력도 포함돼 있다"고 설명했다.
노 교수는 또 "서산과태안의 마애불은 만든 불상의 형태 등을 관찰할 때 6세기말에서 7세기초 사이에 만들어진 것이나 기법이나 구도 상으로 볼 때 만든 주체가 각기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며"서산 마애불은 불교의 도형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고 조각솜씨가 매우 뛰어난 것을 볼 때 이를 만든 주체는 경전에 밝은 사람들로 왕실이나 중앙의 유력한 귀족에 의해 솜씨가 뛰어난 파견된 장인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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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안마애삼존불상(자료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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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안서순 |
| 이에 반해 "태안 마애불은 불교경전이나 교리에 크게 얽매이지 않고 서산마애불에 비해 세련미와 형식미가 갖춰지지 않는 등 일반적인 형식을 따르지 않은 것 등을 보면 대외교역 등을 통해 부를 축적한 지역 세력들이 지역에서 활동한 장인에 의해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노교수는 "태안과 서산에 마애삼존불이 조성된 것은 그 당시 이 지역(태안, 서산, 당진)이 대당무역의 중심지이었다는 것이 입증된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어 " 백제시대에 미륵불이 등장하는 것은 그 시대 청소년들 사이에 '미륵신앙'이 유행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서산마매삼존불의 협시불로 '미륵반가상'이 등장하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며 "이 지역이 백제시대 청소년들의 무예와 정신을 단련, 이 땅을 미륵의 세상을 이룩할 수 있도록 심신을 다지던 장소중의 하나로 여겨진다"고 주장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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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16 오전 12:51 |
ⓒ 2004 OhmyNews | | |
첫댓글 태안마애불에는 가운데 관세음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에 약사여래와 아미타여래가 협시하고 있는 도상인데 관세음보살은 중생의 원을 들어주는 보살이니 당연히 당나라를 왕복하는 사람들의 안전을 기원했을 것으로 보이며
왼편의 약사여래는 여행도중에 병이 나면 병을 낫게해달라고 기원했을 것이며, 그래도 죽으면 극락으로 보내달라고 오른쪽의 아미타여래에게 빌었을 것이라고 해석할 수가 있겠지요.
두장의 사진 모두 오래된 사진이네요......최근에 가본 사진는 주변이 너무 차이가 나는군요...
위의 사진은 오래된 사진입니다. 그러나 아래 태안마애불 사진은 최근 아마 1995~98년 사이에 있었던 발굴 때 찍은 사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