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나라 자산의 지혜와 정책을 구사할 때
국력은 ‘경제력’과 ‘군사력’이 핵심이다. 그런 면에서 유럽과 일본은 지는 해, 미국은 유지, 중국은 급속히 뜨는 해다. 이 가운데 미국과 중국은 G2 국가로 뜨겁게 경쟁 중에 있다. 가령 반도체와 AI, 5G를 놓고 치열하게 다툰다. 반도체는 미국이 앞서고, 5G는 중국이 앞서며, AI는 백중세다. 이밖에도 무인무기, 전기차, 희토류, 배터리, 디지털 인프라, 달러의 무기화, 디지털 위안화 등 사실상 양국은 전쟁 중에 있다.
그 사이에 낀 우리는 어떤가? 국익 앞에 이념이 없는 미국과는 달리 눈만 뜨면 지지고 볶는다. 우물 안 개구리 형국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저력이 없는 것도 아니다. 반도체를 비롯한 첨단 산업에서 무시당하지 않을 존재감이 있다. 최강 미국의 바이든이 우리나라를 방문하기 무섭게 평택의 반도체 공장을 찾아 기술 협력을 요청한바 있고, 중국은 미중이 전쟁하는 사이, 우리의 중재자 역할을 은근히 기대한다.
예로부터 나라의 존망(存亡)은 지도자들의 생각과 실천에 달렸다. 그런 면에서 2500년 전, 정(鄭)나라의 자산(子産)같은 지략과 정책이 필요하다. 자산은 춘추시대 때 강대국 사이에서 26년 간 재상을 지내며 안정된 정책을 폈다. 그가 재상에 임명된 지 1년 만에 이른바 소인배들은 행실을 바로 하지 않을 수 없었고, 반백(半白)의 노인들은 무거운 짐을 나르지 않아도 되었으며, 아이들은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됐다.
2년이 지나자, 시장(市場)은 그야말로 자유롭게 움직였으며, 3년째부턴 길에 떨어진 물건이 있어도 함부로 주워가는 이가 없었다. 자산이 법과 원칙, 상(賞)과 벌(罰)을 명확히 하니, 민중들이 하나같이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자산이 처음부터 인정받은 건 아니다. 초기엔 온갖 비난이 쇄도했다. 민중들은 “우리의 전답(田畓)에다 세금을 물리네. 누가 자산을 죽일 것인가? 내가 그것을 돕겠다.”고 힐난했다.
하지만 그가 죽음에 이르자,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통곡을 했다. 민중들은 “우리 아이들을 그가 가르치셨고 우리에게 있는 전답, 자산이 늘려 주셨네. 자산이 돌아가시면 누가 그 뒤를 이을 수 있으리오.”라며 슬픔을 참지 못했다. 말하자면 취임 초기엔 그의 지혜로운 정책을 몰라 비난하기 바빴으나 시간이 지나 민중들의 삶이 나아지자, 그에 대한 평가가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정치는 이런 것임을 일러준 사례다.
자산은 관대함과 가혹함을 동시에 지닌 인물이다. 하지만 그것을 적용할 땐 시의적절했다. 즉 중용의 정치를 구사한 것이다. 그에 대한 공자(孔子)의 평가다. “훌륭하다. 다스림이 관대하면 민중이 태만해지니, 태만해지면 가혹하게 바로잡았다. 다스림이 가혹하면 민중이 나약해지니, 나약해지면 관대함을 베풀었다. 관대함으로 가혹함을 조절하고, 가혹함으로 관대함을 조절했으니, 다스림이 이로써 조화를 이뤘다.”
자산은 박학다식한 인물이다. 그는 작지만 강한나라를 만들기 위해 중장기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철저히 실천했다. 약소국이던 정나라가 주변의 강대국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은 건 순전히 그의 지혜로운 정책 덕분이다. 그런 점에서 강대국들 사이에 낀 지정학적 숙명을 타고 난 우리도 자산과 같은 지혜와 정책적 실천이 필요하다. 140년 전, 청나라 외교관이었던 황준헌은 <조선책략>에서 이렇게 썼다.
쇄국정책을 펴고 있던 우리를 향해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선 중국과 친[親中]하고, 일본과는 맺고[結日], 미국과는 연결[連美]함으로써 자강할 것을 권했다. 이를 요즘말로 바꾸면 미국과는 연대(連帶)하고, 중국과는 친화(親和)하며, 일본과는 소통(疏通)해야 한다는 말과 같다. 다시 말하면 정나라 자산이 추진한 강대국 사이에서 이른바 ‘줄타기 외교’를 통해 강대국 간 힘의 균형을 이룬 것과 다르지 않은 말이다.
미국과 중국이 경제전쟁, 기술전쟁을 하는 사이, 우리 정부는 기묘한 외줄정책보다는 실질적인 정책, 즉 전략적 균형유지 정책이 필요하다. 인구 5천만의 나라가 내수만으로 살아가기 힘든 만큼, 미중 사이에서 ‘자유무역’과 ‘다자주의 원칙’을 고수하면서 미중을 설득하고 대립을 완화시켜야 한다. 그것이 연미(連美), 친중(親中), 통일(通日)정책이다. 그런 전략적 유연성만이 나라를 안정적으로 이끌 수 있는 비결이다.
<참고문헌>
박현, <기술의 충돌>, 서해문집,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