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봄 부흥회 5.19(주일) 저녁 / 김운용 목사(장로회신학대학교 총장)
그대들,
다시 첫사랑의 정열로 일어서라
말씀 : 마가복음 5:25-34
제목 : 하늘 은혜에 둘러싸여 살았습니다
(34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
얼마 전에, 딸네 손녀를 돌보는 지인으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의사가 될 공부를 하느라고 결혼하고서도 딸이 아이를 못 가졌답니다.
그랬다가 의사가 되고 난 다음에 늦으막하게 아이를 가졌는데,
늦은 저녁까지 공부하다 보니까 커피를 거의 하루에 열 잔 가까이 마셨답니다.
그런데 딸이 아이를 갖고 난 다음에는 커피를 딱 끊더랍니다.
그래서 엄마가 그랬답니다. '아이고, 독한 년.. 지 새끼한테 안 좋다고 저렇게 좋아하는 커피를 딱 끊는다'
출산을 했습니다. 출산 휴가까지 다 마치고서 병원으로 복귀하려고 하는 어느 날,
'엄마, 커피가 너무 먹고 싶은데, 딱 한 잔만 하면 안될까?' - '한 잔 해라' 그랬답니다.
딸이 우아하게 모닝 커피를 한잔 하더래요. 한잔으로 끝났을까요?
오후에 한 잔, 저녁에 한 잔, 세 잔을 연거푸 마시더랍니다. 그날 저녁에, 어린 손녀가 잠을 한숨도 안 자고 보채더랍니다.
여러분, 무슨 이야기인지 아시지요?
엄마가 마신 커피의 카페인이 모유를 통해서 어린 신생아에게 전해진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마는, 엄마가 건강하면 아이가 건강하고요. 엄마가 행복하면 아이가 행복해집니다.
바라기는, 이제 성회를 시작하는데 이번 성회 기간 동안에 찬송하다가, 기도하다가, 말씀 듣다가,
우리 모두 한 사람 한 사람들의 입술 속에 "주님, 주님 때문에 나 행복해요!" 이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항상 행복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인생길에는 그렇게 녹록지 않아서 행복해 할 수만은 없는 것이 인생길인 것 같습니다.
제 인생길에도 참 힘든 시간이 있었습니다.
총장 되고 나서 1년 반 동안에는 어쩌면 제 인생에서 제일 힘든 시간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새벽에 엎드려서 우는 방법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염없이 새벽에 울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제 입술에 하필이면, 하필이면 "행복"이라는 찬양을 담아주시는 겁니다.
제 인생길에 가만히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언제나 찬양을 먼저 제 입술에 담아주시고,
그 찬양을 계속 부르다 보면 고백이 생겨나고, 고백이 생겨날 즈음에 언제 해결해 놓으셨는지 모르게,
언제 응답해 놓으셨는지 모르게 문제를 해결해 주시곤 하는 수순으로 늘 역사하셨는데요..
"행복"이라는 찬양을 주시는데, 찬양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행복하지 않거든요."
그런데 낮에 일을 하다 보니까, 제가 그 찬양을 혼자서 읖조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때부터 시작해서 깨어있는 동안에는 계속 그 찬양을 부르고, 계속 찬양을 틀어놓고,
비서실 식구들이 '아이고, 우리 총장님은 어제도 하루종일 저 찬송 듣더니
오늘도 하루종일 저 찬양 들을 기세다. 질리지도 않나' 그런 이야기 할까 싶어서
볼륨을 줄여가면서 한 달 넘게 그 찬양을 부르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찬양을 부르다 보니까, 제 입술에서 저도 모르게 그런 고백이 나왔습니다. "하나님, 행복합니다!"
찬송 가사는 이렇게 되어 있지요.
♬ 화려하지 않아도 정결하게 사는 삶 가진 것이 적어도 감사하며 사는 삶
내게 주신 작은 힘 나눠주며 사는 삶 이것이 나의 삶의 행복이라오
눈물 날 일 많지만 기도할 수 있는 것 억울한 일 많으나 주를 위해 참는 것
비록 짧은 작은 삶 주 뜻대로 사는 것 이것이 나의 삶의 행복이라오~♬ 아멘!
이 찬양 부를 때, 하나님께서 이런 마음을 주셨습니다.
저는 저희 가정에 주신 세 아이들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이 찬양 부를 때 하나님께서 간단히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내 마음도 똑같아!" "내 마음도 똑같다!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말씀 듣다가, 찬양하다가 이 고백이 터져 나올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안성전에서 예배하시는 분들도, 또 송도의 예배처에서 예배하시는 분들도,
온라인으로 예배하시는 분들도, 우리 다 함께 이번 성회가 함께 진행되는 동안
우리의 입술 속에서 그런 고백이 터져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 행복합니다!"
†
하나님,
귀한 찬양 올려드리고 귀한 예물 구별하고 성별하여 들고 나와 주님께 봉헌하는 손길이 있어,
주님 앞에 봉헌하며 이 시간 잠시 기도합니다.
이 물질 얻기 위하여 우리 성도님들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얼마나 허덕이면서 달려야 했을지 모르고,
허리 한번 펴지 못하고 그렇게 애쓰고 수고하여 얻은 생명과 같은 귀한 물질이지만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주님 앞에 구별하여 들고 나온 예물입니다.
주님 감사해 올려드립니다. 주님 기뻐 받으시고 드린 손길 손길들마다 기억하여 주시어서
하늘 은혜로 가득가득 채우시사 더 감사할 것이 쌓여갈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옵소서.
말씀 앞으로 나아갑니다. 성령님, 우리 가운데 운행하셔서 말씀을 듣는 심령이나 말씀을 전하는 심령 똑같이 역사하실 때
우리 속의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게 될 줄 믿사오니 이 시간도 성령님, 우리 가운데 운행하시고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서울대 영문과 교수를 지낸 금아 피천득 선생은
5월에 태어났고, 5월을 노래했고, 5월에 대한 수필을 썼고, 5월을 좋아했고, 심지어는 5월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후배들은 5월의 시인이다, '영원히 늙지 않는 5월의 소년이다.' 이렇게 칭하기도 했습니다.
한국 서정 문학의 대두답게 수필가로서 시인으로서 유명한 영문학자로서 주옥과 같은 글을 남겼고요.
나이 97세까지 해맑은 소년과 같이 웃음을 항상 띄면서 이런 순진무구한 노래를 부르면서 평생을 사신 분입니다.
참 행복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어 보입니다.
* 어른을 위한 동화 작가지요. 정채봉 선생이 금아 선생과 나눈 내용을 중심으로 해서 시를 한 편 썼더군요.
제목도 아예 "피천득"입니다. 그 시를 읽다 보면, 남 보기에는 굉장히 행복한 어른 같아 보이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았겠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이런 내용의 시입니다.
"선생님, 제 마음은 상처가 아물 날이 없습니다.
정선생, 내가 내 마음을 꺼내 보여줄 수 없어서 그렇지
천사의 눈으로 내 마음을 본다면 누더기 마음입니다."
무슨 이야기죠? - 남 보기에는 그럴싸해 보이는데,
금아 선생의 삶에도 얼마나 아픔이 있었고, 얼마나 어려움의 문제들이 많았는지
그것과 허덕이고 씨름하다 보니 천사의 눈으로 만약에 내 마음을 내 삶을 들여다본다면, 온통 누더기 마음이랍니다.
그도 그럴 것이 금아 선생은, 나라를 빼앗겼던 한일 병탄이 일어난 1910년에 출생을 했습니다.
아버지가 7살 때 세상을 떠났고요, 어머니가 10살 때 세상을 떠났습니다.
망국의 슬픔에 더하여, 그의 책을 읽다 보면
"영원히 회복될 수 없는 상실감을 안고 나는 평생을 살았다." 그렇게 고백을 하더군요..
남 보기는 그렇게 행복해 보이는데, 남 보기는 그럴싸해 보이는데 그에게도 아픔이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사실을 우리에게 전해주는 정채봉 선생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20살의 엄마가 시인을 낳다가 핏덩이 남겨놓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평생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살았습니다.
'20살의 엄마'라고 하는 시집을 읽다 보면
"엄마가 천국에서 딱 5분만 휴가 나오신다고 한다면, 나는 원도 없겠다.
휴가 나오신 엄마 품에 안겨서 엄마와 눈 맞춤 하고
세상에서 억울했던 일 가운데 가장 억울했던 일 엄마에게 일러바치고
엄마 품에 안겨서 엉엉 울고 싶다."
* 평생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살았습니다.
아빠가 키울 수가 없어서 외할머니 댁에 보내졌고요.
아빠도 나중에 일본으로 이주해서 행방불명 돼서 어떻게 죽었는지
아빠하고도 연락이 끊어져서 아빠 없이 할머니 품에서 자란 사람이었습니다.
'어른을 위한 동화 작가'로서 참 해맑은 이야기들을 많이 우리들에게 들려주고 있지만, 나이 50대 초반에 간암이 도졌고,
그리고 힘들게 힘들게 투병하다가 그렇게 많지 않은 50대 초반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평생 어머니에 대한 그라움을 안고 살았고, 이런 아픔을 가지고 평생을 살았습니다.
남 보기는 그렇게 아름다운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고 그렇게 해맑은 미소를 보내고 있으나,
그들의 삶에도 아픔이 있었다는 그런 이야기겠지요.
정채봉 시인 살아 생전에 시집이 딱 한 권 발간됐지요.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라고 하는 제목의 시집을 읽다 보면, 발문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 먼지 섞인 바람 먹고 살면서 울지 않고 다녀간 사람은 없으므로",
여러분들은 별로 감동을 안 하시는 표정이신데..
저는 어려울 때 이 시집을 손에 들었기 때문인지 발문이 왜 그렇게 위로가 되던지요.
나만 힘든 줄 알았는데, 나만 어려운 문제가 있는 줄 알았는데, 나만 허덕이면서 인생길을 가고 있는 줄 알았는데...
다 세상엔 먼지 섞인 바람 먹고 살고 있답니다. 울지 않고 인생 길 가는 사람 아무도 없답니다. 다 힘들다는 이야기지요.
다 어렵게 어렵게 자기만의 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오늘 마가복음 5장에서 만나는 여인도 그런 여인이었습니다.
불치의 질병에 걸렸다지요. 아무리 어려운 질병에 걸렸다 할지라도
주님의 날에, 주의 전에 나와서 예배하고 마음껏 찬양하고
목사님께서 주시는 말씀 가슴에 채우고 나가면, 어디서 그런 힘이 솟구칩니까!
그런데 이 병에 걸리면 당시 종교적인 규례에 의해서 부정하게 만드는 질병이어서 예배에도 못 나왔답니다.
그러니까 가족으로부터 교회로부터 공동체로부터 떨어져 나와서 주변인으로,
'아웃사이더'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여인으로 규정된 사람이었답니다.
마가복음 1장부터 시작돼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펼쳐지는 구원의 대서사 드라마가
이 무대에서 1장부터 열연이 되고 있습니다.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공이십니다.
그런데 구원의 대서사 드라마가 여기서 지금 펼쳐지고 있는데,
갑자기 한 여인이 벌떡 일어나더니, 무대 위로 뛰어 올라오는 구조로 이 여인에 대해서 마가는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인공이라고 한다면, 마가복음 5장에 나타나는 조연은 누구였습니까? 야이로라고 하는 회당장이었답니다.
덕망이 있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고요. 속된 표현으로 하면 성공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도 아픔이 있었답니다. 어린 딸이 죽을 병에 걸려서 죽어가고 있었다지요.
딸이 죽어가는데 돈을 아꼈겠습니까? 좋다는 병원, 좋다는 의사 다 찾아다녔을 것입니다.
좋다는 약 다 사서 먹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백약이 무효입니다. 그 어간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이 바닥의 최고 지도자인데, 어떻게 젊은 지도자에 가서 무릎으로 꿇을 수 있어' 그래서 나서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딸이 오늘을 넘기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딸이 죽어가는데 체면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수소문해서 예수님 앞에 달려나와 무릎을 꿇었습니다. "주여, 내 딸이 죽어 가나이다.
우리 집에 오셔서 내 딸 머리에 손 얹어서 기도 한 번만 해 주셔도 내 딸이 낫게 될 줄 믿습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예수님께서 지금 야이로의 집으로 가고 있었답니다.
여러분 상상해 보십시오.
무슨 소풍 가는 길이라고, 유유자적 그렇게 한담하면서 걸어갔을까요?
아무리 예수님 모시고 가도 딸이 숨이 넘어가 버리면 소용없는 일이라고 생각이 되었기에 얼마나 마음이 급했을까요?
'예수님, 조금만 빨리요, 조금만 빨리요'
처음에는 종종 걸음으로 걷다가 나중에는 아예 뛰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중차대한 순간에 이 여인이 딱 끼어 들어오고 있습니다. 왜 이런 중요한 순간에 이런 여인을 끼워넣고 있는 것입니까?
왜 예수님은 이런 여인에게 관심을 보이시다가 시간을 지체하시고 말씀 뒷부분에 보면, 야이로의 딸이 세상을 떠나잖아요.
왜 예수님께서는 이런 하찮은 여인에게 관심을 보이시다가 이 중요한 일을 놓쳐버리는 것입니까?
'왜 이런 여인을 여기다 끼워 넣습니까?' 하고 질문을 던지고 있는데, 마가는 동문서답을 합니다.
왜 이런 여인을 끼워 넣느냐고 묻고 있는데, 마가는 이렇게 말을 이어갑니다.
이 여인이 이 병에 걸린 지가 12년이 되었고요. 하루도 빼지 않고 피를 쏟고 쏟아서 뼈만 앙상하게 남았답니다.
좋다는 병원 의사들에게 가서 씨티 찍으라면 씨티 찍고, 또 MRI 찍으라면 또 찍고 그래서 가진 재산 다 날렸답니다.
'왜 이런 여인을 끼워 넣고 있습니까?'라고 묻고 있는데, 왜 마가는 엉뚱한 동문서답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은혜는 이렇게 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을 우리는 은혜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대가를 지불하고서 얻은 것을 은혜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은혜는 받을 만한 자격도 없고, 대가를 지불하지도 않았고, 한 것도 아무것도 없는데
무조건적으로 허락하시는 사랑,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는 은혜라고 이야기합니다. 은혜는 항상 이런 구조로 옵니다.
절망감에 몸을 떨고 있던 이 여인은 멀리서 예수님의 말씀도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치유의 기적도 친히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믿음이 솟구쳐 오릅니다.
"예수님이라면, 예수님이라면 내 병 고쳐주실 텐데, 예수님이라면, 예수님이라면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실 텐데.."
그런 믿음이 솟구쳐 올라,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예수님께 달려 나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지금 제자들하고 뛰어가고 있습니다. 말을 붙일 틈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내 몸 고침받을 수 있을텐데' 하는 확신이 생겨서
예수님 옷자락이라도 만지려면 예수님보다 두 배 빨리 뛰어야 되는 것입니다.
숨은 헐떡거리면서 예수님보다 두 배 빨리 뛰어 예수님 지나가시는 길목에 서 있다가,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순간, 예수님의 옷자락을 딱 만졌는데,
옷자락을 통해서 전해지는 사랑이 이 여인의 병든 몸을 덮었고, 병든 삶을 덮었고,
병든 가정을 덮었고, 병든 인생을 덮었고, 깨끗하게 깨끗하게 고쳐 주셨답니다.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였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을 자세히 읽어보면 이 여인이 이렇게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을 때,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이 여인에게 임했다라고 전하고 있으면서도
사실은 이 여인이 만진 것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는데,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도대체 이 여인이 만진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성경은, 이 여인이 만진 것은 단순히 예수님의 옷자락이 아니라 이 여인이 만진 것은 예수님의 심장을 만졌습니다.
하늘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내려오실 만큼 사랑으로 불타고 있는 예수님의 심장,
죄인들을 벌하셔야 할 자리에 죄인들을 벌하시기보다는 그들을 사랑하셔서 죄값을 당신이 지불하시고 죄인들은 살려내시고,
당신이 죽임 당하실 만큼 사랑으로 불타고 있는 예수님의 심장, 그 심장을 이 여인이 만진 것이랍니다.
마가는, 아니 정확히 이야기하면, 공관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의 심장에서 불타고 있는
이런 특별한 사랑을 표현하기 위하여 아주 독특한 단어 하나를 사용합니다.
'스프랑크 니조마이'라는 헬라어입니다. 우리 목사님들은 잘 아는 단어인데요.
이것은 창자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영어의 내장학이라는 단어도 바로 이 헬라어에서부터 유출이 됩니다.
'스프랑크 니조마이'라고 하는 단어는, 우리말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지요.
[단장의 아픔을 가지고], [애간장이 녹듯이], [창자가 끊어질 것 같은 간절함으로] 이 때 쓰는 표현입니다.
이 단어는 가식이나 겉치레가 아닌,
[폐부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쳐 오르는 뜨거운 마음으로 누군가를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다] 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 스프랑크니조마이
→ "가식이 아닌, 겉치례가 아닌, 폐부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쳐 오르는 뜨거운 마음으로 불쌍히 여기다"
◆ "불쌍히 여기사..." (마 9:36, 14:14, 15:32, 20:34, 막 6:34, 눅 7:13)
◆ "민망히 여기사..." (막 1:41)
◆ "측은히 여기사..." (눅 15:20)
이렇게 자세하게 설명을 드려도 별로 여러분 감동을 안 하시는 것 같은데요.
제가 예를 하나 들어 볼까요, 우리 주안교회에서도 도와주시고
이사님으로 섬기고 계신 우리 위임 목사님께서 여러 가지로 참 많이 도와주시고,
또 조언도 해 주셔서 학교의 숙원 사업이었던 도서관 전체를 다 뒤집어 엎고 새 도서관으로 탈바꿈을 했습니다.
제가 총장 되고 나서부터 시작을 해서 완공할 때까지 직원이 몇 번을 회의를 모였는가 하고 데이터를 내보았는데
'200번이 넘게 총장님 회의를 했습니다.' 그래요.. 그러니까, 회의의 늪 속에서 1년을 넘게 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여름 방학인데도 불구하고, 하루도 쉴 틈 없이 계속 현장 지도하고,
계속 이 공사를 빨리 정한 시간에 마무리하려고 여름 내내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습니다.(지난 여름의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회의를 마치고 또 외부 자문위원들까지 와서 옆방에서 또 회의가 약속돼 있는데,
여기서 회의가 약간 늦어져서 벌써 10분이 지났습니다.
비서가 몇 번이나 '지금 총장님, 저쪽에 회의 기다리고 있습니다.' 싸인을 보내서
서둘러 마치고서 막 옆방으로 딱 이동을 하려고 하는데, 그 틈새에 딱 끼어 들어오는 한 분이 있었습니다.
대전에서 온 선배 목사님이었습니다. 들어오면서 그분은 천연덕스럽게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옵니다. '김 총장 있어?'
대부분 약속을 하고 오는데, 약속도 안 하고 그냥 학교 왔다가 총장 얼굴 가까이 지내는 사이니까,
얼굴 한번 보려고 지금 들린 것 같습니다. 문제는, 저는 차 한잔 할 시간이 없습니다.
빨리 회의가 늦었으니까 옆방에 가서 회의를 주재를 해야 되는데, 목사님이 딱 끼어든 겁니다.
'어후! 약속 좀 하고 오지, 이렇게 쑥 들어오면 어떻게 하라고~ 대전에서 왔는데 차 한 잔도 대접 못하잖아.'
솔직히 속으로 그런 생각이 들지만, 제가 인격은 좀 되어 보이잖아요. 더 환하게 웃으면서 호들갑을 떨면서
'어이구 목사님 어서 오세요. 웬일이세요.' 그런데 속으로는 '약속 좀 하고 오세요.'
이 때는 절대 쓸 수 없는 단어가 '스프랑크 니조마이'라는 단어입니다.
왜요? - 겉 다르고 속 다르기 때문에 그런 표현을 못 씁니다...
예수님의 심장에서부터 끓고 있는 이 놀라운 사랑을 그 여인은 확신했기에
손을 내밀어서 예수님의 심장을 만지는 마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답니다.
마가는, 공관복음 기자들은 이 단어들을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는데요.
마가도 마가복음 1장 말씀에 보면, 이 혈루병 여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질병,
한센병 환자의 기록을 이렇게 우리들에게 들려줍니다.
마가복음 1장 41절 말씀, 우리 다 같이 한 목소리로 봉독하시겠습니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아멘!
한센병 환자였답니다. 이 자리에 나오면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도 주변인으로 살아야 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붕대 새로 바꾸고, 위장하고, 후드티 모자 쓰고 저 뒷자리에 왔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데, 가슴이 뜨거워져서 갑자기 일어나더니,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2층에서 소리 치더랍니다.
그래서 부목사님에게 '김 목사님, 잠깐 나와서 찬양 좀 인도하세요. 제가 잠깐만 올라갔다 오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2층으로 올라가시더랍니다.
가서 보았더니, 새 붕대 감았는데도 불구하고 벌써 고름이 겉에까지 베어 나왔습니다.
얼마나 중증인지 귓뿌리가 이거 하나 떨어져 나가고 없고요. 손을 들었는데 왼쪽 손에는 세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고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의 피부에다 손을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기노니, 내가 너를 뜨겁게 사랑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말씀하시면서 고쳐 주셨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은혜였습니다.
내가 잘나서, 내가 공부를 잘해서, 내가 머리가 좋아서, 내가 좋은 대학 나와서, 내가 교수여서 이만큼 살고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나이 80이 되고 보니까, 나이 80이 돼서 살아온 인생길을 가만히 돌이켜 보니까 은혜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균관대학교 영문과 교수로 평생 살았던 성찬경 시인은
나이 80이 되면서 은혜에 대한 시, 감사에 대한 시만 주로 썼습니다. 그 중의 한 편입니다.
"은총을 내려 주시는구나...
무조건 무조건 애걸했더니, 이 불쌍한 꼴이 눈에 띄신 모양이다.
즉시 속속들이 다 아신다. 다 아신다.
그러니 오히려 안심이다.
벌거벗고 빌면 그만이다. 은총을 내려 주시는구나..." - 성찬경, "은총을 내려주시는구나" -
주님 앞에 벌거벗고, 그냥 빌고 또 빌었더니, 은총을 내려 주셨답니다.
그 은혜의 힘 믿고 여기까지 달려왔답니다. 그 은혜 때문에 오늘 내가 여기 서 있답니다.
여러분, 지나온 날들을 한번 돌이켜 보십시오.
어려움이 없었습니까? 있었습니다.
답답한 일이 없었습니까? 있었습니다.
울 일이 없었습니까? 있었습니다.
억울하고 분해서 밤잠 이루지 못하던 시간이 없었습니까?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까지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셨습니다.
여호와 이레의 은혜로 덮어주셨고, 에벤에셀의 은혜로 덧입혀 주셔서 오늘 여기까지 달려올 수 있었습니다. 아멘!
어린아이 때부터 지금까지 돌이켜보면,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입니다. 아멘!
앞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총장이 되고 난 다음에 처음 1년여의 시간은 저에게 참 어려움의 시간이었습니다.
어쩌면 제 인생에 있어서 제일 힘든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학교장이 되고 보니까, 일일이 다 대응할 수도 없고 참아 내려고 하니, 몸무게만 쑥쑥 빠졌습니다.
1년여 동안 8kg이 빠졌습니다. 이유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우리 교단의 한때는 자랑스러운 교회에서 목사님이 은퇴하시면서 아들에게 물려주는
소위 이야기하는 목회 세습 문제가 대두되면서,
저희 장신대 교수들이 한 목소리로 '이것은 신학적으로 옳지 않습니다.' 목소리를 냈고,
그러다 보니 학교를 공격하고, 앞장서서 그 일을 주도했던 저를 공격하는 이들 때문에 참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새벽마다 엎드려서 하나님 앞에 울면서 그렇게 따졌습니다.
"하나님, 내가 언제 총장 한다고 그랬습니까? 억지로 등 떠밀어서 이 어려운 때 부족한 사람에게 학교의 책임을 맡겨주셨으면
도와주시고 힘을 실어주셔도 부족한 사람이 어려운 때 학교를 이끌어갈까 말까 하는데
어떻게 학교를 이끌어가라고 이렇게 사람을 박살을 내십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불리하시니까 말씀을 안 하시더라고요..
그저 새벽마다 한 시간여 울고 집에 돌아가고, 또 새벽에 한 시간여 울고 돌아가는 방법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날도 하염없이 울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50여 년 전에 초등학교 6학년 땐가
어머니 따라 새벽 기도 갔다가 어머니의 기도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 기도 소리를 제 귀에 생생하게 들려주시는 것입니다.
50여 년 전의 일이니까, 까마득하게 잊고 살았던 것이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어머니 따라 새벽 기도 가면요,
무릎 꿇고 한 시간 넘게 막 방언으로 기도하고, 주여 삼창하고 막 그렇게 했을 것 같지요..
실컷 졸다가, '운용아, 가자' 그러면 일어나서 오기 일쑤였습니다. 그래도, 새벽기도 어머니 따라 다녔습니다.
남자들은 여기 앉고, 여자들은 여기 앉았지요..
언젠가, 아무리 졸더라도 그 기도 하나는 반드시 드리고 졸더라도 졸았습니다.
'하나님, 저 공부하고 싶어요, 하나님, 저 중학교 보내 주세요. 하나님, 저 공부하고 싶어요. 저 중학교 보내 주세요.'
그런데 어머니가 저쪽에서 제 기도를 들으셨던 모양이에요.
제 기도를 들으시고 어머니가 저를 위해서 이렇게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아버지! 아버지, 책 읽기 좋아하는 우리 운용이, 공부하기 좋아하는 우리 운용이,
하나님, 저 아이 공부하고 싶답니다. 하나님, 저 아이 중학교 보내 주세요."
어머니의 기도가 거기서 끝나는가요? 하나님, 저 아이 고등학교도 보내 주세요.
어머니의 기도가 거기서 끝날까요? 하나님, 저 아이 대학도 보내 주세요.
어머니의 기도가 거기서 끝날까요? 하나님, 저 아이 공부하고 싶은 만큼 시켜 주세요.
어머니의 기도 소리를 듣는데 울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이래야 목사다운데, 저는 이 짓 하고 있었습니다.
그 기도 소리 듣고 나서 뭐 하게요.. 초등학교 6학년 졸업하고 난 다음에 어머니의 기도 때문에 공부를 계속 이어올 수 있었는데,
몇 년 공부했는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신대원 3년, 대학원 2년,
그리고 미국 가서 다시 2년, 석사 과정 2년, 박사 과정 5년 했습니다. 그리고 보니까 23년 공부했더라고요.
제가 지금 공부 많이 했다고 자랑하고 있는 거지요?!
초등학교도 가기 어려운 형편이었는데.. 어머니의 기도 때문에 내가 여기 서 있구나!
저의 부친이 머리도 비상한 분이었고, 공부도 많이 하신 분이었는데, 젊은 날에 당신 꿈이 망가진 것 때문에 술로 사셨거든요..
어머니가 한 번도, '너는 중학교 못 가' 이야기 안 하셨지만, 집안 형편을 보니까 중학교를 못 갈 것 같아요.
그런데 교회학교 선생님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앞길 열어 주신다' 그 말씀이 마음에 새겨져서,
'엄마, 나 내일 새벽에 교회 갈 때 나 깨워 줘, 나 깨워 줘' 그래 갖고 어머니 따라가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기도대로 됐더라고요..
여기 서 있는 것이, 여기 세움 받은 것이 저절로 된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기도 때문에 된 것임을 깨닫고 감사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어김없이 하나님께서 책망하시더라고요..
"이놈아, 니가 똑똑해서 니가 잘나서 여기 서 있는 중 아느냐?
새벽마다 너를 위해서 눈물로 눈물로 기도하였던 네 에미의 기도를 듣고 내가 너를 거기에 세웠느니라"
울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울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제 입술에 담아 주신 찬양이 있었습니다.
늘 그렇지만, 찬양이 들어가면 새 힘이 생기고 고백이 생기잖아요.
억울하고 분한데, 찬양이 들어가니 살아나는 걸 경험했습니다. 분노는 깨끗하게 다 빠져나가고 감사의 눈물로 가득했습니다.
♬ 오늘 숨을 쉬는 것 감사 나를 구원하신 것 감사
내 뜻대로 안 돼도 주가 인도하신 것 모든 것 감사
내려 주신 모든 것 감사 때론 가져가심도 감사
내게 고난 주셔서 주 뜻 알게 하신 것 모든 것 감사~♬
주님 감사해요 주님 감사해요 내가 여기까지 온 것도 은혜입니다.
주님 감사해요 주님 감사해요 나를 사랑하신 주 사랑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그렇습니다. 은혜로 살았습니다.
은혜로 세움 받았습니다. 은혜로 달려 왔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은혜로 고침 받은 그 여인 죽었잖아요.
병든 몸 깨끗하게 깨끗하게 고침 받았지만, 그 여인 또 죽었잖아요.
여러분 알고 계십니까? 병 고침 받은 것보다도 더 큰 은혜가 있고, 더 놀라운 은혜가 있다는 사실..
죽어도 사는 영원한 생명, 그 주신 은혜는 그 무엇과도 비교를 할 수 없는 하나님의 큰 은혜입니다.
모처럼 주일에 설교가 없어서 어느 토요일 아침 아내와 모처럼 마주 보고 앉아서 모닝커피를 한 잔 하게 되었습니다.
아침에 부부가 마주 보고 앉아서 커피를 마실 때, 음악이 있어야 되잖아요.
아내도 저도 클래식을 좋아하니까 분위기를 잡기 위해서 음악을 틀려고 유튜브를 열어서 음악을 검색하고 있는데,
찬 송 한 곡의 제목이 떠올랐습니다.
찬송을 딱 듣는데, 첫 가사부터 얼마나 제 가슴을 치던지 저도 모르게 제 눈에서 눈물이 주루룩 흐르는 겁니다.
문제는 아내하고 마주 보고 앉아서 지금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복음의 핵심을 알려 주잖아요. 우리가 어떤 사랑을 받아서 여기에 서 있는지,
어떤 사랑을 받아서 여기에 앉아 있는지, 복음의 핵심을 우리들에게 들려 줍니다.
우리는 결단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나온 사랑으로 우리를 덮어 주셨고, 우리를 자녀 삼아 주셨고,
우리를, 우리의 심장의 더운 피가 식는 그날까지 하나님의 자녀 삼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겠답니다. 지키시겠답니다.
이렇게 복음의 핵심을 담은 찬양인데, 이게 영어 찬양이어서 딱 보니까 권사님 세 분이 은혜를 못 받으시네요.
그 세 분 권사님을 위해서 한글 번역 찬송으로 찬양팀이 불러 주시겠습니다.
♬ 예수 안에 소망 있네 내 빛과 힘 나의 노래
환난 중에 도우시는 주 나의 견고한 반석
크신 사랑 크신 평화 두렴에서 날 건지네
내 위로자 내 모든 것 주 사랑 안에 서리라
주 예수의 능력으로 내 속에 두려움 없네
나의 사는 모든 순간 주께서 다스리시네
어느 것도 주 손에서 날 빼앗지 못하리라
주 오실 날 기다리며 주 능력 안에 서리라~♬ 아멘!
그렇습니다. 은혜로 살고 있습니다.
12년 혈루병보다도 훨씬 더 중한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받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다음 세상 끝날까지 지키시겠다라고 하는 하나님의 보호하심,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힘 입고
우리는 지금 살아가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
내 삶에는 어려움이 없기를 요행을 바라고, 투자하면 토지는 적어도 10배, 주식은 20배,
우리 아들이 수시를 다섯 군데 넣으면 다섯 군데 최소한 다 합격하고, 이런 요행 바라면서 살아가는 것,
그래서 기도하고, 그래서 새벽제단 쌓고... 이것이 신앙생활입니까? 아니지요..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 오늘 삶에 고난이 있어도, 아픔이 있어도,
그리스도 위에, 내 삶과 내 아픔과 내 눈물과 내 한숨을 그리스도 위에 올려놓고
그리스도 위에 나를 날마다 날마다 우뚝우뚝 세워 나가는 것, 이것이 신앙생활 아니겠습니까?
젊은 날에도, 펄펄 날으는 중년의 때에도, 외로운 노년의 때에도,
내 인생을 주님 앞에 세워 나가는 것, 이것이 바로 신앙생활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양은 이렇게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주 나의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영어 찬양은 얼마나 우리들에게 더 깊이 있게 속삭여 주는지요.
On Christ, the solid Rock,
견고한 반석 되시는 그리스도 위에
I stand All other ground is sinking sand
내가 붙잡았던 것, 내가 의지했던 것, 다 사라지고 없어질 모래성과 같은 것이지만,
All other ground is sinking sand
그러나 우리 주님은 이 땅에서도 나의 영원한 주님, 저 영원한 천국에서도 나를 이끄실 나의 주님!
그 주님 위에 나를 날마다 날마다 세워 나가는 것, 이것이 신앙생활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께서는 은혜 받은 자를 이렇게 찾고 계십니다.
"누가 내 옷자락을 만졌느냐?" "누가 내 옷자락을 만졌느냐?"
"누가 내 옷자락을 만졌느냐?" 끝까지 추격하십니다.
그리고 은혜 받은 여인을 찾아내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저는 다른 사람보다는 한참 싼 편입니다. 한 건에 저는 100만원,
현찰, 카드, 입금 다 됩니다. 어떤 방법으로 하시겠습니까?'
주님이 수고비 받아 내실라고 그 여인을 그렇게 찾아내셨습니까?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건강할지어다! 아멘! 아멘!
큰 은혜 받은 여인에게, 이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입니까?
파리한 손을 내밀어서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나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손 내밀어 주님의 옷자락을 만지던 그때 심정, 그 마음을 내가 가지고 평생을 산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너는 굳건하게 서게 될 것이다." 그 말씀입니다.
처음 은혜 받았을 때의 그 간절함, 그 간절함이 오늘 우리의 예배 가운데 여전히 작동하고 있습니까? 참 복 있는 분들입니다.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우리 이번 성회 기간 동안에 찬양하다가 기도하다가 말씀 듣다가 그 간절함 다시 회복하십시다. 아멘!
주님의 은혜를 처음 받았을 때, 고침 받았을 때, 어려운 문제가 해결 받았을 때에
삼수 하던 아이가 눈물의 기도, 금식 기도를 몇 번을 했는데, "올해 드디어 유수한 대학에 합격했습니다."
아들의 합격증을 안고 펄쩍펄쩍 뛰면서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지금도 여전히 그 감사가, 그 감격이, 그 눈물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습니까? 참 복된 분들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이번 성회 기간 동안에 잃어버린 눈물을 다시 회복하십시다. 감사를 다시 회복하십시다.
오래 전, 시편 기자는 이런 간절함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오는 사람을 목마른 사슴의 이미지로 설명합니다.
♬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헤매이듯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우리는 가난하고 배고프던 시절 이 시편 말씀에 곡을 붙여서 얼마나 많이 찬양을 불렀는지 모르지요.
찬양 가사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 목 마른 사슴 시냇물을 찾아 헤매이듯이
내 영혼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주님만이 나의 힘 나의 방패 나의 참 소망
나의 몸 정성 다 바쳐서 주님 경배합니다~♬
저는 대학 3학년 때 부모에게 독립선언하고 입주 과외하면서 대학을 마쳤고, 신대원 공부를 했습니다.
십일조 떼고, 교통비 떼고, 감사헌금 떼고, 정말 주전부리 단 한 푼도 안 하고
월급 받으면 그거 다 저축을 했지만, 등록할 때가 되면 딱 5만원, 6만원이 부족한 겁니다.
그때 등록금 한 6-70만 원을 하던 때입니다. 그러니까 5-6만원은 굉장히 큰 돈이었습니다.
마련할 방도가 없습니다. 그러면 그냥 금식 시작했습니다.
친구들에게 안 들키려고 친구들 점심 먹으러 가면, '먼저 가라. 나, 곧 갈게' 하고서 저는 아차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만, 그때 좋은 생수터가 있었습니다.
가서 물 한 바가지로 배 채우고 바로 내려가면 친구들에게 밥 안 먹는 거 들킵니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안 들키려고 거기서 찬송도 하고, 몸도 풀고, 운동도 좀 하고,
그리고 지금 딱 가면은 강의실에 들어가면 딱 맞을 시간입니다.
그때까지 약수터에서 지체하다가 내려오면서 물 한 바가지로 배 채우고, 내려오면서 불렀던 찬양이 이 찬양이었습니다.
♬ 금보다 귀한 나의 주님 내게 만족 주신 주
당신만이 나의 기쁨 또한 나의 참 보배~♬
이 찬송을 아시는 분은 연식이 좀 될 분이고,
이 찬송을 전혀 모른다 하면 실망할 필요 없습니다. 연식이 신식이라는 이야깁니다.
참, 우리 70년대 80년대에 이 찬양 많이 불렀지요. 그 간절함이 여전히 내 속에서 작동하고 있는가?
"주님 안 도와 주시면 나는 설 수가 없습니다.
주님 도와주시지 않으시면 나는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새벽마다 나와 아버지 한 마디 불러 놓고 10분 울고, 아버지 한 마디 불러 놓고 10분 울고,
하염없이 하염없이 울다 일하러 나갔던 그 시절, 그 어려움이 다 지나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이제 모든 문제 다 해결됐습니다.
그러면 그때보다 기도는 더 간절해야 되고, 감사는 더 간절해야 될 텐데..
사람인지라 그렇게 안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을 회복하랍니다.
신달자 시인은 '간절함'이라고 하는 제목의 시집의 표제시에서 이렇게 노래하더군요.
"그 무엇 하나에 간절할 때는 등뼈에서 피리 소리가 난다.
열 손가락 열 발가락 끝에 푸른 불꽃이 어른거린다.
두 손과 손 사이에 깊은 동굴이 열리고 머리 위로 빛의 통로가 열리며
신의 소리(하나님의 소리)가 내려온다" - 신달자, "간절함" -
바위 속 견고한 침묵이 온기 피어 오르며
자잘한 입들이 오물거리고 모든 사물들이 무겁게 허리를 굽히며 제 발등에 입을 맞춘다.
엎드려도 서 있어도 몸의 형태는 스러지고 없다. 오직 간절함 그 안으로 동이 터 오른다.
간절함이 있는 곳에 새 날이 밝아온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답니다.
하나님의 소리가 내려온답니다. 하늘이 땅으로 내려오게 된답니다.
간절함으로 예배하고, 간절함으로 주님 찾고, 간절함으로 기도하고,
간절함으로 찬양하는 그곳에 하나님께서 이런 역사를 예비하고 계시기에,
주님은 은혜 받은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누가 내 옷자락을 만졌느냐?"
아시는 것처럼, 오늘 마가복음은 예수님께서 치유의 기적을 행하실 때 마가가 그 옆에서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행적들은 주로 열두 사도들에 의해서 구전의 말씀을, 오늘로 치면 설교지요.
구전의 말씀으로 예수님께서 행하신 행적들이 전해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부활 승천하신 이후 20년이 지나고 30년 가까이 된 그 즈음에
이제 사도들이 한 사람 두 사람 순교를 당하기 시작합니다.
이단들이 나와서 예수님의 말씀의 끝을 조금씩 조금씩 변계합니다.
그래서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행적들을 글로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제일 먼저 기록된 것이 사복음서 중에서 마가복음이 제일 먼저 기록되었지요.
만약에 마가복음이 기록되던 당시에 이 여인이 너무 박해가 심하고 어려웠기 때문에 예수님을 떠났다든지,
신앙이 변질됐다든지, 믿음이 식어졌다고 한다면, 이 여인은 여기에 기록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중요한 여성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었기에
이 여인의 이야기가 구원의 대서사 드라마 중간에 나오고 있는 것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의 이름이 없습니다. 두 가지로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이 여인이 누군지 다 압니다. 그래서 쓰지 않아도 다 알고 있기에 이름을 뺐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별로 타당성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서의 말씀은 그 시대 사람들만 위해서 쓰여진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감동하셔서 오고 가는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을 전하기 위해서 쓰여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두 번째 추론은 그것입니다. 마가가 그 여인의 이름을 썼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소식을 듣고 이 여인이 마가에게 찾아옵니다.
"선생님, 제가 한 거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하셨어요.
제가 한 거 아무것도 없어요. 예수님께서 하셨어요. 예수님의 이름만 높여주세요. 제 이름 빼 주세요."
그래서 빠졌을 가능성이 두번째 추론입니다.
무슨 이야기지요? - 은혜에 대한 감격을 잃지 않고, 은혜에 대한 감사를 잃어버리지 않고,
믿음으로 여전히 굳건하게 서 나가고 있었다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날까지 주의 교회를 위해서 수고할 수 있는 것, 은혜였습니다.
쓰임받는 것, 은혜였습니다. 모든 것이 은혜로 된 일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그 여인의 이름을 쏙 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하늘 은혜에 둘러싸여 살았습니다.
남은 인생길도, 이 고난 많은 인생길도, 어쩌면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켜야 하는
이 어려운 신앙의 여정도 하늘 은혜에 둘러싸여 살아가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이름을 빼고 주의 은혜만 높이고 있는 것일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총장이 되고 난 다음 참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저를 자문해 주는 변호사들은 '명예훼손, 허위사실 유포로 고소하라'고, '변호사비 받지 않고 고소장을 써주겠다'고까지 했지만,
총장이 되고 보니까, 학교에 누가 될까 싶어서 이 생각 저 생각, 또 몇 번의 기도를 한 다음에,
그저 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을 했습니다. 그렇게 할려고 보니, 참아내기가 정말 힘들었습니다.
새벽마다 엎드려 울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세 번째로, 담아주신 찬양이 이번 주제가인 "은혜"라고 하는 찬양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은혜로 살았고, 은혜로 세움 받았고, 은혜로 쓰임 받고 있음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 찬양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 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내가 지나왔던 모든 시간이
내가 걸어왔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은혜였소
아침 해가 뜨고 저녁에 노을 봄의 꽃 향기와 가을의 열매
변하는 계절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은혜였소
내가 이 땅에 태어나 사는 것 어린아이 시절과 지금까지
숨을 쉬며 살며 꿈을 꾸는 삶 당연한 것이 아니라 은혜였소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며 오늘 찬양하고 예배하는 삶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축복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은혜였소~♬ 아멘!
하나님께서 귀한 봄 성회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번 사경회 기간 동안 찬양하다가 기도하다가 말씀 듣다가 벌떡벌떡 일어나는 주인공 내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병든 몸이 고침 받는 역사 내가 주인공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삶의 어려움의 문제가 해결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구원의 확신과 구원의 감격을 회복할 수 있게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성령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시면 우리만 모였다가 끝날까 두렵사오니,
성령님 운행하시고 터치하여 주셔서 심령 심령들마다의 속에 강권적으로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되겠나이다. 하나님, 간절함을 회복하게 하여 주옵소서.
눈물을 회복하게 하여 주옵소서. 주를 향한 첫사랑이 회복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