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걷기_춘천교구 임당동성당. 강릉 대도호부 관아
100+1. 하나를 더하는 삶
채용석 베네딕도 춘천 Re. 명예 기자
본당 설립 100주년을 맞은 강릉 임당동 성 골롬바노 성당(주임신부 고봉연 요셉)의 역사와 발전 과정, 성당 맞은편 길 건너 ‘강릉 대도호부 관아’를 돌아보았다. 여기서는 병인박해 당시 많은 신자가 순교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순교 현양비마저 세우지 못하는 안타까운 사연이 있었다.
영동 지역에 교우촌이 형성된 때는 1866년 병인박해 이후이다. 당시 충청, 전라, 경기도의 신자들이 산간 지대로 피신해오면서 이곳에도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1887년 금강리(강릉군 구정면 금광리) 공소가 설립되는 등 병인박해 이후 꾸준히 신자들이 존재해 있었다.
당시 영동 지역은 1893년 이후 함경남도 안변군 내평본당에서 관할했으나 이 지역은 내평본당과 멀리 떨어져 있었고, 또 신자 수가 점차 늘어나면서 본당 설립이 필요했다. 그 결과 교구에서는 1921년 5월에 양양본당을 설립하고 최문식 베드로 신부를 초대 주임으로 임명하였고, 보좌로 임명된 이철연 프란치스코 신부를 1921년 12월 금광리공소에 파견하여 본당을 설립하고 강릉 지역의 사목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금광리는 시골이라 인구가 적고 발전 가능성도 없어 이철연 신부는 1923년 말에 주문진(강릉군 신리면 교항리 133번지)에 새 용지를 매입한 뒤 성당과 사제관을 짓고 주문진으로 본당을 이전하였다. 하지만 주문진에서의 전교는 활발하지 않았고, 또 지역적으로도 주문진보다는 강릉 지역의 발전 가능성이 더욱 컸다. 이러한 상황에서 1929년 1월 주문진성당이 화재로 전소되자 2대 주임 김인상 야고보 신부는 금광리로 본당을 다시 옮겼다가 1931년 6월 인구가 많고 발전 가능성이 큰 강릉시 임당동에 12칸짜리 가옥을 매입하고 본당을 이전하였다.
복지, 의료, 교육, 경제 등 다양한 사업으로 지역사회와 함께해
1946년 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를 초청하여 본당 사목의 내실화를 기하는 한편 성심보육원과 성심공민학교를(1957년 폐교) 설립하여 고아와 불우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 사업을 전개하였다. 1951년
에는 1128평의 대지를 매입한 뒤 1955년 10월에 성당을 신축 축성(구 도마 주교)하였고, 1956년 12월에는 ‘증거자들의 모후’ 쁘레시디움을 창단하여 레지오 마리애 활동도 시작하였다. 이어 1964년 3월에는 갈바리의원을 개원하여 의료 봉사에도 힘을 쏟았다. 1967년에는 소화유치원을 개원하여 유아 교육을 하였으며, 1970년대에 들어 강릉본당은 외형적으로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신앙적인 측면에서도 더욱 성숙해 갔다.
그리하여 1973년 3월에는 ‘신용협동조합’을 창립하여 신자와 지역 주민들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주었고, 4월부터는 울뜨레아. 효성회, 안나회, 빈체시오회 등 여러 신심 단체가 설립되어 개인 및 가정 성화의 기초를 확립해 갔다. 그런 가운데 본당의 신자 수가 증가하면서 1974년 11월에는 옥천동본당을 분가시켰고 아울러 본당 명칭도 강릉본당에서 임당동본당으로 바꾸었다. 1987년 10월에는 노암동본당을 분가하였다. 또 1991년 4월에는 성당 보수 공사를 시작하여 청동 십자가, 제대, 14처, 스테인드글라스 등을 2년에 걸쳐 갖추었으며, 그리고 1998년 11월에는 노후화된 사제관, 수녀원, 유치원을 신,증축하여 본당의 면모를 일신하였다. 2001년 12월에는 춘천교구 대희년 전대사 지정 순례지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임당동성당은 1950년대 강원도 지역 성당 건축의 전형을 보여주는 건물이다. 이러한 양식은 영국 고딕의 전통에서 따온 양식인데 임당동 성당의 주보 성인인 성 골롬바노와 아일랜드 골롬반회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외관의 뾰족한 종탑과 지붕 장식, 첨두형 아치 창호, 부축벽을 이용한 입면 구성 및 내부의 정교한 몰딩 구성 등 의장 기법에서 보존 가치가 높다. 그뿐만 아니라 강릉 지역 신앙의 중심지로 많은 본당의 모 본당이라는 역사성도 겸비하고 있어 2010년 2월19일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457호로 지정되었다. 잘 정리된 유물 전시관과 박물관을 통해 성당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지난 100년을 살면서 신자들 복지와 더불어 복지, 의료, 교육, 경제 등 다양한 사업으로 지역사회와 함께하면서 내적 성장에도 노력하였다. 본당 출신 사제 16명과 수도자 25명을 배출하였으며 현재 신학생 1명, 수도원 본원 수련자 1명이 있다. 새로운 100년을 시작하면서 2022년도 사목 목표가 100+1. 하나를 더하는 삶이다. “열성을 다하여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앎을 더하며, 앎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신심을, 신심에 형제애를, 형제애에 사랑을 더하십시오.”(2베드 1,5-7) 사목 목표처럼 살면서 하나하나 더해가는 임당동 공동체에 하느님의 사랑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성령님의 친교가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강릉 대도호부 관아 성지
강릉 대도호부 관아는 고려 태종 19년(936년)에 세워져 모두 83칸의 건물이 있었으나 대부분 일본강점기 때 철거되고 임영관 삼문인 객사문과 칠사당만 남아있다. 객사문은 고려말에 지어 현존하는 목재 건축물로는 가장 오래된 건물로 강원도 내 유일하게 국보 제51호로 지정되어 있다. 칠사당은 대도호부 부윤이 주재하던 조선 시대 관공서로 호적, 농사, 교육, 세금, 재판, 풍속, 병무 등 일곱 가지 정사를 집행하던 관청으로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에서 병인박해(1866년) 당시 많은 신자가 심문도 없이 참수형으로 처형되어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임영관(사적 제388호)과 나머지 건물은 1998년 발굴 조사해 2006년 복원한 건물이다. 강릉 지역 순교자로 교회 공식 문헌에 나타나는 이는 ‘치명일기’에 기록된 심능석 스테파노와 이유일 안토니오 정도다. ‘치명일기’의 심능석 스테파노에 관한 내용을 보면 “본디 강릉 굴아위에 살더니 1868년 5월에 경포(포도청 포졸)에게 잡혀 지금 풍수원 사는 전성렬 바오로와 함께 갇히었다가 치명하니 나이는 29세 된 줄은 알되 치명한 곳은 자세히 모르노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교회 학자들의 연구 결과와 구전으로 전해오는 내용을 종합해보면 강릉에서 병인박해가 한창이던 1868년 5월에 이들이 체포되어 한양 좌포도청으로 압송되어 심문을 받고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현재 심 스테파노와 이 안토니오는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안건으로 한국 천주교에서 시복을 추진하고 있다.〈참고 임당동성당 카페〉
<사진 설명(위로부터)>
_ 임당동성당
_ 100주년 감사미사, 100주년 기념 사진전, 본당 출신 사제와 수도자
_ 강릉 대도호부 관아(좌) 객사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