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한국의 성씨 이야기 〈39〉 경주정씨
세계일보 기사 입력 : 2012-10-23 21:04:25
김성회 : 한국다문화센터 사무총장 kshky@naver.com
‘정씨 원시조’ 지백호 42세손 고려 문정공 정진후가 중시조
경주정씨(慶州鄭氏)는 정씨의 원시조인 지백호(智伯虎)의 후손으로 정씨 문중에서 큰 집안이라 할 수 있다. 원래 지백호는 진한(辰韓) 사로(斯盧) 6촌장의 하나인 진지부(珍支部) 촌장으로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하고 신라 건국에 큰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개국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었고, 유리왕 9년에 본피부(本彼部)로 개칭되면서 낙랑후(樂浪侯)에 봉해지고 정씨 성을 하사받았다. 이때 정씨 성을 하사받은 사람은 지백호의 5세손 정동충(鄭東沖)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후 법흥왕 3년(516년)에 문화(文和)로 시호(諡號) 되었고, 태종무열왕 3년에는 감문왕(甘文王)에 추봉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사실은 대부분의 족보가 그렇듯이 역사서에 이따금 보일 뿐, 고증으로 확인된 것은 아니다. 신라시대에 정씨는 6부족 중의 하나임에도 크게 이름을 떨친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신라 말엽 청해진을 근거로 하여 동아시아의 해상무역권을 독점했던 장보고의 핵심 참모 중에 정년(鄭年)이 있다. 그는 젊어서 단짝 친구 장보고와 함께 당나라에 건너가 무관으로 입신했으며, 장보고가 귀국하여 청해진을 설치한 후에도 핵심 참모로 이름을 떨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이것으로 경주정씨가 정식 문중으로 자리 잡았다고 볼 수는 없다. 따라서 경주정씨가 정식 문중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중시조인 문정공(文正公) 정진후(鄭珍厚) 때부터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정진후는 검교첨의평리가 벼슬이었던 정극중의 아들인데, 고려 때 문과에 합격하여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정당문학(政堂文學) 병부상서(兵部尙書) 겸 군기시윤(軍器寺尹)과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고,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다. 그로 인해 그 후손들이 경주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현재 경주정씨의 후손들은 문헌공파(文獻公派)·양경공파(良景公派)·월성위파(月城尉派)·평장공파(平章公派) 등으로 분파되어 있다. 조선조에서 경주정씨는 15명의 문과급제, 30명의 무과급제자를 냈다. 또한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총 9만4465가구에 30만344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경주정씨의 연혁과 인물
앞서 이야기했듯이 경주정씨는 지백호의 42세손(40세손으로 기록하는 문헌도 있다)인 문정공 정진후를 중시조로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그 후 경주정씨는 문헌공파·양경공파·월성위파·평장공파 등 4파로 분파되었다. 각 분파별 연혁과 인물을 다음과 같다.
문헌공파는 중시조인 정진후의 증손인 정위(鄭偉)의 아들 정현영(鄭玄英)을 파조로 한다. 그는 좌복야를 지낸 정위의 아들로 호부상서와 수문전 태학사를 거쳐 삼중대광 문하시중에 이르렀다. 시호가 문헌으로 내려졌기 때문에 문헌공파의 파조가 되었다.
그 후손으로는 정헌대부로 이부상서를 지내고 월성군에 봉해진 정종철(鄭宗哲)과 그의 둘째아들로 이성계와 함께 일본군 아지를 격퇴해 이름을 떨친 정인조(鄭仁祚)가 있다. 조선시대 들어와서 이조판서를 역임한 정염(鄭廉)의 아들 정지년(鄭知年)은 홍문관과 사헌부 사간원을 역임했으며, 단종을 보살펴 달라는 문종의 고명신으로 단종이 폐위되자 삼촌인 정홍덕(鄭弘德)과 함께 남원 교룡산에 은거하였다.
그의 아들 중 첫째아들인 정효항(鄭孝恒)은 성종 때 서거정(徐居正)과 함께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및 ‘동국통감(東國通鑑)’을 찬수(撰修)했다. 또 둘째아들인 정효상(鄭孝常)은 단종 때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장원했으며, 예종 때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남이(南怡)의 옥사(獄事)를 다스리는데 공을 세워 익대3등공신(翊戴三等功臣)에 책록(策錄)되고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졌다. 또 정지운(鄭之雲)은 성리학(性理學)의 대가로 조화(造化)의 이(理)를 규명한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저술하였다. 이는 후에 조선 중기 성리학의 주요 논쟁인 ‘사단칠정논쟁’의 발단이 되었다.
또 정승복(鄭承復)은 을묘왜변 때 추자도에서 전공을 세워 함흥판관에 제수되었으며, 그의 두 아들인 정사준과 정사횡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휘하에서 무공을 세웠다. 또한 호조참의 정윤근(鄭允謹)은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하였으며, 그의 아들 정창문(鄭昌文)은 정유재란 때 왜군과 전투를 벌이다 순절하였다.
양경공파는 공민왕 때 모반사건을 토벌하여 도첨의정승이 된 정휘(鄭暉)의 아들 정희계(鄭熙啓)를 파조로 한다. 정희계는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창업함으로써 개국 일등공신이 되고 계림군에 봉해졌다. 그의 손자인 정승조(鄭承祖)는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성종 때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감찰(監察)을 거쳐 연산군 때 검열(檢閱)에 재직하였으나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스승인 김종직은 사사되고, 그는 곽산에 유배되었다. 그 후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학문 연구에만 진력했다.
양경공파에서는 흑의장군 정발(鄭撥)이 유명하다. 그는 경주정씨 중시조인 정진후의 7대손이며, 양경공파 파조인 정희계의 6대손이다. 25세에 무과에 급제한 후 해남현감과 거제현령 등을 거쳐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석 달 전에 부산진 첨사(僉事)로 부임하였다. 그가 부산진 첨사로 부임한 뒤 얼마 되지 않아 왜군이 25만 대군과 병선 4만여 척을 이끌고 부산진으로 쳐들어왔다. 그는 영도를 순찰하다가 왜병과 마주쳐 싸우다 본성으로 후퇴한 뒤 성문을 닫아걸고 굳게 지켰다. 성문을 닫아건 뒤 진두에서 지휘하며 결사항전을 했으나 중과부적으로 어려움에 닥치자 백병전에 돌입하여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정발의 용전 사실은 전쟁기간 중에는 조정에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 왜군으로부터 부산진에서 정발의 분전으로 곤란을 겪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조정에서 그에게 병조판서를 추증하고 충장(忠壯)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동래부사 송상현과 함께 사당을 지어 배향했다. 지금도 충렬사는 부산시 동래구 안락동에 남아 있으며, 정발 장군의 동상도 부산시 초량동에 세워져 있다.
정발의 아들 정흔(鄭昕)은 사량만호(萬戶)가 되어 왜군을 섬멸하여 전라수사(全羅水使)에 승진되었으며, 정선현감을 역임했다. 또한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 데도 공을 세워 호위대장에 올랐다.
또한 정호(鄭浩)는 이순신 휘하에서 돌격대장이 되어 당포해전과 노량해전에서 공적으로 세워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되었으며, 정응신(鄭應莘)은 인조의 항복에 반대하다가 해남에 유배되었고, 숙종 때 종묘사직을 수호했던 정인중(鄭麟重), 학행(學行)이 탁월하여 사림의 추앙을 받았던 정시휘(鄭時輝)와 정동윤(鄭東潤) 등도 이름이 높다.
월성위공파의 파조는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 정금실(鄭金實)의 아들로 부마(駙馬)가 되어 월성위(月城尉)에 봉해졌던 정이기이다. 정이기의 형인 정보기(鄭寶奇)는 병부상서를 역임했다.
정이기의 후손으로는 선무원종2등공신(宣武原從二等功臣)에 올랐던 정구(鄭龜)와 그의 아들인 정광업(鄭光業)과 정홍업(鄭弘業) 형제가 유명하다. 정광업은 선조 때 제용감(濟用監) 봉사(奉事)를 역임했으며, 임진왜란 때는 숙부 정원과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켜 참전했다가 장렬하게 순절하였다. 그의 아우 정홍업은 학문으로 이름을 떨쳤다. 선조 때 무과에 급제했던 정공청(鄭公淸)은 진도에서 군수를 역임했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하여 안강·경주·울산·동래 등지에서 전공을 세웠다.
또한 문하시중으로 월성군(月城郡)에 봉해졌던 정손경(鄭遜卿)이 있으며, 그의 둘째아들 정극온(鄭克溫)은 이부상서를 지내고 대장군에 올랐으며 금자광록대부로 좌복야를 거쳐 판삼사 참지정사에 이르렀다. 또 그의 아들 정필(鄭弼)은 벽상삼한삼중대광으로 중추원사(中樞院使)와 한림학사(翰林學士), 평장사(平章事) 등을 거쳐 문하시중에 이르렀고, 계림군에 추봉되었다.
평장공파는 고려조에 평장사를 역임한 정필(鄭弼)을 파조로 하고 있다. 평장공파는 조선 태종 때에 유일로 천거되어 과천·의성 등지에서 현감을 역임했던 정기(鄭其)와 그의 아들 5형제가 중추적인 인맥을 형성하고 있다. 정기는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과 호조 정랑을 지내고, 봉렬대부(奉列大夫)로 한성부 소윤에 추증되었다. 그의 슬하에 5형제를 두었는데, 모두가 크게 되었다.
첫째인 정차온(鄭溫)은 세종 때 언양현감과 사헌부 감찰을 지냈으며, 상주 판관을 거쳐 권농병마절도사를 역임했다. 후에 세조가 단종을 폐위하자 고향으로 돌아가 후진 양성에 힘썼다. 그의 아우 정차량(鄭次良)은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셋째인 정차공(鄭次恭)은 영천군수와 평산 도호부사(都護府使)를 지내고 이조참의를 지냈으며, 넷째 아들 정차검(鄭次儉)은 수의교위(修義校尉)로 부사직을 역임했다. 정간(貞簡)이라는 시호를 받았던 정차양(鄭次讓)은 해남현감을 지냈다. 하지만, 5형제 모두 단종이 폐위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왔다. 이들이 고향에 들어오면서 건넌 다리를 오영교(五榮橋)라고 부르고 있다.
그 밖의 평장공파 인물로는 정대영(鄭大英)이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휘하에서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지키는 데 공을 세웠다. 또한 그의 사촌동생인 정대방(鄭大方)은 임진왜란 때 대구 팔공산에서 공을 세웠으며, 정유재란 때 정대영과 함께 화왕산성 방어에 참전하여 무공을 세웠다.
경주정씨의 현대인물
경주정씨의 현대 인물로는 국회의원으로 정동성·정규헌·정정훈·정웅·정희채 등이 있다. 학계에서는 정관섭·정종진·정석호·정경훈씨 등이 있고, 법조계에는 정태균·정만조·정동윤 등이 있다. 재계에서는 정기영 한국농약주식회사 회장, 정형식 일양약품주식회사 사장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