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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크소리와 함께 박사장의 방으로 수경이 들어온다.
박사장은 의자에 앉아 그라인더로 커피를 갈고 있고, 수경은 그 맞은편에 서 있다.
“잠깐 저 쪽에 앉지.”
“네.”
“전수경씨 말야... 전에 있던 사장이 수경씨 칭찬을 많이 하더구만... 얼굴도 예쁘고, 노래도 잘한다고...”
수경은 미소를 띄며 “과찬이세요. 전 사장님께서...”
“그런데 그건 전 사장 얘기고...”
수경은 박사장을 보며 “네?”
“난 이 까페를 젊은 감각으로 바꿔보고 싶단 말이지. 전 사장이 무슨 생각으로 수경씨한테 클로징 무대를 줬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거든...”
“제 노래가 맘에 안드세요?”
박사장은 고개를 저으며 “수경씨 노래 잘하는건 알겠는데... 선곡이 맘에 안든다는거야. 여기가 뭐 노인네들 드나드는 노인정도
아닌데 언제까지 그런 노래만 할거야? 예전에야 뭐 미사리가 나이든 사람들이나 찾는 장소라고는 했지만 지금은 아니지 않나?”
수경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인다.
“저쪽에 피렌체 가본 적 있나? 거긴 아이돌까지는 아니어도 메인보컬 하나 잘 세워서 연일 대박이야. 노래 신선하고 볼거리
많으니까 그야말로 빵빵 터진다구.”
“제가 어떻게 하길 바라세요?”
“간단해... 더 섹시하게... 더 파격적으로... 알겠어? 아직까지야 뭐 마땅한 대안이 없으니까 수경씨를 메인으로쓰긴 하겠지만
클로징 가수가 오프닝 하지 말라는 법도 없으니까 내 말 명심해. 옷도 좀 신경쓰고... 이건 뭐 민중가수도 아니고...”
박사장의 말에 적잖이 거슬린 수경은 일어나는데 “그리고 공연 끝나고 아무리 손님이 없어도 가게 문 닫기 전에는 술 마시지 마.
눈에 거슬리니까.”.
“네... 알겠습니다.”
수경은 얼굴이 어두워진 채로 박사장의 방에서 나온다.
규호는 수경을 보며 “누나. 무슨 일 있었어요? 얼굴이 왜 이렇게 어두워요?”
“아무 일도 아냐. 규호야, 나 먼저 들어갈게.”
“정말 괜찮아요? 이제 곧 문닫을 시간인데 기다렸다가 같이 가요. 내가 바래다줄게요.”
“아냐. 됐어. 혼자 갈 게.”
같은날 밤. 자동차 영업소
기태는 책상을 정리하며 퇴근할 준비를 하고, 준혁은 터벅터벅 영업소 안으로 걸어 들어온다,
준혁은 기태에게 “아직 안 갔냐?”
“이제 가야지. 늦은거 보니까 오늘은 건수 좀 올렸나 보다?”
“건수는 무슨... 하루 종일 헛방만 날리고 왔는데...”
기태는 준혁의 어깨를 툭치며 “그럴 수도 있지. 기운내”
“그래. 고맙다.”
준혁은 가는 기태에게 “기태야? 저녁에 무슨 일있냐?”
“글쎄다. 와이프는 애들 데리고 친정에 가서... 뭘 할지 고민이다.”
“왜... 싸웠냐?”
“아니... 며칠 휴가 얻었다고 친정에 가서 쉬다 온다네... 나도 내일 퇴근하면 가기로 했구...”
“그래? 그럼 오늘은 괜찮은거네? 우리 오랜만에 탁구나 한게임 칠까?”
“그거 좋지.... 그런데 근처에 탁구장이 있나 모르겠다.”
“찾아보지 뭐. 일단 불끄고 나가자.”
근처 탁구장으로 들어온 준혁과 기태.
양복을 걷어부친채 공을 주거니 받거니 하던 준혁과 기태는 내기 탁구를 시작한다.
“오늘 지는 사람이 술 사는거다.” 기태가 준혁에게 말한다.
“좋지.”
둘은 신나게 탁구를 친다. 분위기 상 준혁이 앞서가는 분위기 같은데.
기태가 걷어올린 공이 살짝 뜨자 준혁이 기다렸다는 듯이 스매싱을 날리는데, 그 공이 기태의 테이블에 꽂힌다.
“오... 허준혁... 이젠 못당하겠는데... 내가 졌다.”
“그래. 그럼 오늘 술은 기태 네가 사는 거지?”
“알았다 인마. 가자.”
포장마차 안.
준혁과 기태는 술을 마시고 있다.
“기태야. 너 행복하냐?”
“뭐가?”
“지금 사는거... 제수씨랑, 애들이랑 같이 사는거 행복하냐구?”
“세삼스럽게 그런건 왜 물어? 사는게 다 똑같지 뭐.”
“제수씨 말야... 제수씨가 네 첫사랑이라고 했냐?”
“글쎄다. 나혼자 일방적으로 좋아하는 짝사랑이나 풋사랑말고... 서로가 마음이 통했던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첫사랑이라면
첫사랑이겠지?”
“행복하냐?”
“사는게 뭐 있냐? 다들 지지고 볶고 아침에 싸웠다가도 저녁에 화해하고 그렇게 사는거지...”
“너도 제수씨랑 싸운단 말이야?”
“그럼 별 수 있냐? 첫사랑이니 뭐니 해도 이십년넘게 서로 다른 세상에서 살다 온 사람들인데... 안 싸우는게 이상하지...”
어느덧 테이블엔 소주병이 여럿 있는 걸로 보아 시간이 꽤 지났다.
“기태야...”
“왜? 벌써 취했냐?”
“기태야...”
“왜 인마? 탁구는 몰라도 술은 나한테 안되겠다. 이제 그만 일어나자. 많이 먹었다.”
“기태야... 수경이 말이야... 수경인 어떻게 살고 있을까?”
“자꾸 생각나냐?”
“그래... 생각이 안난다면 거짓말이지... 기태야?”
“왜?”
“수경이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기태는 준혁의 물음에 “글쎄다. 예전에야 관공서를 찾아다닌다거나 알면식이 있는 사람한테 부탁하면 가능하기도 했다는데
요즘엔 그렇게 쉽지는 않을 거다. 개인정보다 뭐다해서 기관들마다 예민하게 생각하니까 예전 같지는 않을거야.”
“그렇겠지? 그래... 늦었다. 그만 일어나자.”
“그래. 그만 가자.”
준혁과 기태는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가려는데...
“아... 준혁아... 혹시 모르겠다. 고등학교 동창회 사무실로 알아보면 연락처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 고맙다. 조심히 들어가라.”
다음날 오후. 자동차 영업소 안
준혁은 여성 고객에게 영업소 안에 전시된 차를 설명하고 있다.
“고객님께서 지금 보시는 차를 한마디로 설명드리자면 경제적이다, 스마트하다, 그리고 친환경적이다 입니다. 엔진 자동정지
기능은 정차 혹은 신호 대기시 엔진이 자동으로 정지되고, 차량의 재출발시 엔진이 자동으로 재시동되어 정차시의 연료소비를
줄이고 배기가스를 저감시키구요. 경제운전 상태 안내 및 채점기능이 탑재되어 있어 차량의 속도 및 가속상태를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해서 운전자 스스로가 경제운전을 할 수 있도록 학습하게 하며, 경제운전에 따른 연비향상 결과를 8단계 그래픽으로
표시해주어 운전자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편의성을 더하였습니다."
"게다가 풀오토 에어컨, 하이패스 시스템, 버튼시통장치 및 스마트키 시스템, 사이드 및 커튼 에어백, 후방주차보조 시스템을
옵션이 아닌 기본상품으로 구성하여 차량을 구입하는 분들께서 부담은 줄이고 만족도는 높일 수 있도록 출시된 상품입니다.
어떠십니까? 마음에 드시지 않으십니까?”
여성 고객은 준혁은 보며 “네. 마음에 드네요. 설명도 친절하시구요.”
“감사합니다. 오늘 바로 계약하시면 고객님께는 하이브리드 전용 DMB 내비게이션은 고객님 부담 없이 제가 장착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손님은 크게 기뻐하며 “정말요? 그럼 지금 바로 계약할게요.”
“잘 생각해셨습니다. 어디 가셔도 이 가격대에 이만한 조건 만나는게 쉽지 않으실 겁니다. 그럼 이쪽으로 오시지요.”
계약서 작성을 끝낸 고객은 돌아가고 준혁의 얼굴에 모처럼 화색이 돈다.
절로 콧노래까지 나오는데 기태가 궁금해 준혁의 곁으로 오며 “드디어 한 건 했구나.”
“그래... 이게 얼마만에 건수 올리는건지 모르겠다.”
“축하해 인마.”
“축하는 무슨... 처음엔 반응이 심드렁하길래 이번에도 공치나보다 싶었는데 내비게이션 서비스로 해준다니까 바로 OK하는거
있지? 뭐 윗돌 빼서 아랫돌 괴는 격이다만 기분은 좋다.”
“그래. 요즘엔 고객들이 너무 약아서 그런 조건 제시해도 시큰둥해 하는 사람도 있는데 잘됐다 정말.”
“고맙다.”
“참. 혹시 동창회 사무실은 연락해 봤냐?”
“아. 맞다.”
기태의 말에 준혁은 황급히 자리로 가며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여보세요. 거기 강릉여고 총동창회죠? 사람을 좀 찾으려고 하는데...”
“무슨 일이시죠?”
“네. 급히 연락해야 하는 친구가 있는데 연락처를 몰라서요.”
“찾으시는 분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네. 전수경입니다. 1998년에 졸업했구요.”
“1998년 졸업이면 54회이신데... 전수경씨라구요?”
“네. 그렇습니다.”
“죄송합니다만 54회 전수경씨 연락처는 없네요.”
“그렇습니까?”
“네. 저희 학교 졸업했다고 모두 총동창회에 연락처를 남겨 놓으시는건 아니니까요.”
“아... 네... 그렇겠죠... 그럼 저 54회 졸업생 연락처를 몇 명이나 확보하고 계신지 알 수 없을까요?”
“왜 그러시죠?”
“꼭 찾아야 하는 사람이라 수소문을 좀 해보려구요.”
“개인정보보호 방침상 그런 식으로 연락처를 제공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네... 잘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한껏 기대에 부풀었다가 실망한 준혁. 그 때 불현 듯 종식의 말이 떠오른다.
‘며칠 전에 우연히 그 앞을 지나가는데 어떤 여자가 등대 올라가는 계단에 거기 앉아 있더라구. 지나가는 길이라 자세히는 못봤는데 느낌은 분명 수경이 같은게...’
준혁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영업소를 뛰쳐 나간다.
기태는 급하게 뛰어 나가는 준혁을 보고는 “어디가?”라고 묻지만 준혁은 못 듣고 달려 나가고 외근을 나갔던 지점장이 준혁의 뛰어 나가는 모습을 본다.
“허준혁이는 어딜 저렇게 뛰쳐 나가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지점장님 어디 다녀오십니까?”
“지점장들 회의가 있어서 본사에 다녀왔네... 이거 참.. 할 얘기도 있는데... 알았어. 가서 일 봐.”
영동고속도로를 달리는 준혁의 차, 왼손으로 턱을 괸 채 운전을 하는데 계속 종식의 말이 떠오른다.
‘며칠 전에 우연히 그 앞을 지나가는데 어떤 여자가 등대 올라가는 계단에 거기 앉아 있더라구. 지나가는 길이라 자세히는
못봤는데 느낌은 분명 수경이 같은게...’
같은 시각. 미사리 라이브까페 로마. 규호가 일찍 출근하여 가게를 청소하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수경이 누나? 누나가 어쩐 일이에요? 전화를 다 하고...”
“규호야. 나 오늘 몸이 안 좋아서 출근 못 할 거 같아. 이따 사장님 오시면 네가 말씀 좀 잘 드려줘.”
“무슨 일 있어요? 어제 사장님 방에서 나올때 부터 안색이 안좋던데...”
“그냥 몸살 기운이 있는데 심한건 아니니까 걱정은 하지 말구.”
“사장님께 누나가 직접 말씀드리시죠. 한다리 건너 말씀드리면 사장님께서 언짢아하실 텐데...”
“그냥 네가 잘 좀 말씀드려. 내일부터는 안 빠지고 나가겠다고. 알겠지?”
“네. 알겠어요. 누나. 정말 괜찮은거죠?”
“그래. 걱정마. 그럼 끊는다.”
전화를 끊은 수경은 플랫폼에 정차되어 있던 강릉행 버스에 몸을 싣는다.
몸살 기운이 있어 못나간다는 것은 거짓말이었고, 박사장에서 들었던 얘기들 때문에 마음이 상해 기분전환을 위해 강릉에
가려는 것이었다.
주문진의 그 등대는 준혁이와의 추억이 어려 있는 장소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마음이 답답할 때마다 찾던 아지트와
같은 곳이다.
톨게이트를 빠져 나가는 버스, 해안도로를 달려온 준혁의 차가 도로가에 선다.
계단을 통해 등대 위로 올라가는 준혁. 옛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등대 위에 올라서 한참동안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던 준혁은 다시 계단을 내려와 차에 타 시동을 건다.
사이드브레이크를 풀고 다시 서울로 출발하려는 데 준혁의 차 뒤로 택시 한 대가 멈춰선다.
택시 안에서 한 여자가 내려 등대를 향해 올라가는데 스쳐 지나가는 느낌이 수경이가 분명하다.
- 다음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