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봄 부흥회 5.20(월요 새벽) / 김운용 목사(장로회신학대학교 총장)
말씀 : 예레미야 33:1-3
제목 : 우린 쓰러져선 안되는 버팀목들입니다
1 예레미야가 아직 시위대 뜰에 갇혀 있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두 번째로 임하니라 이르시되
2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
사랑하는 아버지,
이 새벽의 첫 시간을 주님께 올려드리는 귀한 성도님들 주님께서 보실 때, 주님 참 예쁘시지요..
주님, 이들에게 좀 잘해 주세요. 말씀 들을 때도, 찬양할 때도, 기도할 때도 역사하셔서 한 영혼 한 영혼 어루만져 주시옵시고,
어떤 삶의 무거운 무게가 있다 할지라도 가볍게 하시는 주님 만나거나 춤추는 역사 있도록 주장하여 주옵소서
새벽에 찬양도 올려 드리고, 귀한 예물 주님 앞에 구별하고 성별하여 들고 나와 하나님 앞에 이 시간 봉헌합니다.
저들의 정성을 담았습니다. 저들의 눈물의 기도를 담았습니다.
감사의 제목을 담은 예물입니다. 주님께 올려 드리오니 주님 기뻐 받아 주시고 이 예물 쓰여지는 곳에 역사하여 주셔서
주의 사역, 주의 교회, 주의 나라 세워지는데 아름답게 쓰여지게 역사하여 주옵소서.
참 어려운 때를 살아갑니다. 우리 성도님들의 가정을 지키시고, 일터에 복 주시고, 인생길에 주의 말씀으로 덮으셔서
늘 주의 자녀답게 믿음으로 걸어가는 귀한 권속들 될 수 있게 믿음의 부유함의 복을 덧입혀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제가 사는 아파트에는 주목 몇 그루가 심겨져 있습니다.
붉을 주(朱) 자를 써서, 나무와 속이 붉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지요.
이 나무는 대부분 천 미터 이상 고산지대에서 자라는 나무인데,
요즘에는 개량이 되어서 아파트 관상수로도 자주 사용되는 나무입니다.
언젠가 바람이 좀 세게 불었던 날이 있었던지, 산책길에 보니까 나무 한 그루가 비스듬하게 쓰러져 있었습니다.
오래된 아파트여서 대부분이 오래 전에 심겨져 잘 자라고 있는데, 아마 뿌리를 제대로 내리지 못한 나무가 쓰러진 것 같습니다.
산책하다가 그것을 보고서 똑바로 세워주고 쓰러진 쪽을 꼭꼭 밟아 주었습니다.
그런데 한 번 쓰러진 나무는 똑바로 서지를 않잖아요. 아파트 경내를 산책하다 보니까, 전에 버팀목으로 썼던 막대기가 보이길래
그걸 주워다가 쓰러진 쪽으로다 딱 받쳐주고, 집에서 노끈까지 가져다 꼭꼭 묶어 주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제 아내가 뭐라고 이야기했게요..
'우리 남편 참 자상하기도 하다.' 이렇게 이야기한 게 아니라~
'참 오지랖도 넓다. 은퇴 후에 관리소장 하면 되겠다. 걱정이 안 되네'
그런데도 상관하지 않고, 꼭꼭 밟아주고 '잘 자라라' 했습니다.
저에게는 이 주목이라는 나무가 참 귀한 나무다 라고 하는 추억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는 강원도 화천에서 소대장으로 군 복무를 할 때에 화악산이 저희 작전 지역이었습니다.
눈이 오면 작전도로 치워야 되니까, 거기까지 한 10km 구보해 가서 눈 치우고, 돌아왔다가 오후에 또 눈 오면 또 달려가고요..
4~5월이 되면, 겨우내 무너졌던 진지를 보수하는 일이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소대원들 데리고서 한 달 파견명령을 받아서 진지 보수하는 일을 하러 나가려고 대대장한테 신고를 했더니,
'야, 김중위 나 좀 보고 가' 그러는 겁니다. 소대원들 보내고 혼자 남았는데, 주소 하나를 적어주면서
'화악산에 가면 벼락 맞은 주목등걸이 있는데, 그거 뿌리째 캐다가 이거 목공소 주소인데 여기다 갖다 줘' 그러는 겁니다.
그 당시의 관례였습니다. 진급을 앞둔 대대장이, 아마 상관들에게 티테이블이나 괴목을 만들어서 선물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산등성이에 벼락 맞아 쓰러져 있는 나무를 뿌리째 캐서 그걸 끌고 내려온다는 게 보통 일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소대원 33명, 선임하사까지 34명, 저까지 35명..
그거 아예 옮겨 붙어 갖고 끌고 밀고 아무튼 오전 내내 야단 법석을 피우면
그거 하나 끌고 내려올 수가 있습니다. 군대에서 안 되는 일 없잖아요.
그거 일정량이 모아지면 트럭에다 싣고 그거 목공소에 갖다주면, 거기까지가 제 임무였습니다.
그런데, 주목나무 뿌리 캔 것을 몇 개를 가지고서 목공사에 갔는데
엊그저께 갖다 주었던 나무가 손질을 해 놓고 니스 칠을 해 놓았는데 완전 작품으로 바뀐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주목'이란 나무가 참 귀한 나무구나라고 하는 생각을 갖고 사는데
저희 관리소 직원은 어느 날 보니까 그게 귀찮았는지, 나중에 보니까 반대쪽으로 이제 또 쓰러져 있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버팀목은 삼각이나 사각으로 대줘야 되는데 한쪽만 대 줬더니, 버팀목이 없는 쪽으로 이렇게 쓰러져 있습니다.
아파트 경내에서 버팀목 할 만한 걸 찾는 게 쉽지가 않잖아요. '저거, 하나 더 대 줘야 되는데..' 하고 몇 주가 지났는데,
어느 날 산책길에 보니까, 아예 그 나무를 계속 뽑아서 던져 버렸더라고요.
버팀목이 있으면, 지금도 견고하게 세워질 나무입니다. 버팀목이 없어서 그렇게 무너져 내리고 만 것입니다.
버팀목이 있으면 세워지고, 버팀목이 없으면 무너진다라고 하는 이야기는 나무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것은 교회의 이야기이고, 사역의 이야기고, 가정의 이야기고, 자녀의 이야기이고 인생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예레미야서 33장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말씀입니다마는,
말씀에서 만나는 예레미야라고 하는 사람이 민족의 교회의 버팀목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나라가 어려운 상황 가운데 있었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그 당시 '이집트' - '애굽'이라고 나오지요.
이집트라는 나라하고 '앗시리아'라고 하는 나라 - 성경에는 '앗수르'로 나오지요.
이 두 나라가 패권을 장악합니다. 작은 나라인 남왕국 유다에서는
친 이집트 정책을 펼칠 것인가? 친 앗시리아 정책을 펼칠 것인가? 이걸로 나눠져서 싸우고 있었습니다.
신흥 강대국 바벨론이 등극하더니, 앗시리아라고 하는 나라를 점령했습니다.
그리고 크고 작은 나라들을 공격해서 영토를 확장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런 어려운 상황 가운데 있을 때는 어떻게 합니까?
'이제 신흥 강대국 바벨론하고 손을 잡아야 된다.' '아니다. 지금까지 우방이었던 이집트와 손을 잡아야 된다.'
이걸 갖고 싸우고 있는 동안에 바벨론이 침공해 들어왔습니다.
먼저는 46개 성읍을 점령했고요. 마지막 성읍 예루살렘을 공격을 했습니다.
그래서 성읍은 함락이 되었고, 불타고 있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붙잡혀 간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록된 말씀이 오늘 예레미야서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예레미야서의 말씀을 보게 되면, 뭐라고 말씀합니까?
이 예레미야서 30장부터 33장의 말씀은 회복과 위로의 메세지로 알려져 있는데요. 결론부에 해당되는 말씀이 오늘 말씀입니다.
말씀은 이런 상황 가운데서 뭐라고 말씀합니까? 하나님께서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라고 했답니다.
'이대로 가면 하나님 앞에 매 맞는다. 이대로 가면 이 나라 망한다.'
이런 심판의 메세지를 전하다가 오늘 말씀에 보게 되면, "시위대 뜰에 서 있었답니다."
여기서 '시위대'라고 하는 것은, 마치 우리나라의 수도를 경비하는 '수도방위사'가 있고,
청와대를 방위하는 '수도경비사'가 있는 것처럼 이 왕궁을 호위하는 부대에 영창이, 군대 교도소가 있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거기 갇혔답니다.
이런 상황이 먼저 언급되는 이유는, 지금 어떤 상황이라는 이야기지요?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는 그런 시간이랍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행했더니, 하나님 원하시는 대로 행했더니, 하나님 전하라고 주시는 말씀 전했더니,
그 결과가 무엇이었답니까? 죽도록 얻어맞고 지금 감옥에 갇혀 있었답니다.
이런 상황이 먼저 언급되고 난 다음에 그 다음 말씀을 보게 되면, 예레미야서의 공식 문구가 등장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두 번째로 임하니라 이르시되" 이렇게 말씀이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두 번째로 예레미야에게 임했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한 성경의 약속이 무엇입니까?
아무리 죽을 것 같아도, 아무리 캄캄한 인생길을 지금 걷고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면,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도 살아나서 여호와의 군대가 되더라"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한 성경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했답니다. 많은 내용이 생략되어 있지만, 우리는 무엇을 추정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들어갔을 때, 예레미야가 살아났을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벌떡 일어섰을 것입니다.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 역사하신 하나님을 경험하고 난 다음에
2절 말씀은 고백 형식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지요.
(2절)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이렇게 말씀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최근에 번역된 성경 번역들을 보게 되면,
우리가 읽고 있는 개역개정판 성경하고 약간 다르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두 개만 예를 들어 볼까요?
(표준 새번역) "땅을 지으신 주님, 그것을 빚어서 제자리에 세우신 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그 이름이 '주'이신 분께서 말씀하셨다."
(공동번역)은 개신교회 성서 신학자들과 캐톨릭의 성서 신학자들이 공동으로 번역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지요.
(공동번역) "땅을 만든 나 야훼가 말한다. 땅을 빚어 든든히 세운 나의 이름은 야훼다." 이렇게 말씀합니다.
'야훼'는 '여호와'의 히브리어 원문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일을 만드시고, 일을 행하시고, 일을 성취하신다" 이렇게 번역된 말씀이 창조 신앙하고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땅을 만드신 분, 땅을 지으신 분, 제자리에 세우시고 그것을 통치하시는 분, 창조 신앙과 연결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번역됐을까? 히브리어 원어를 찾아 보았습니다. 이렇게 번역되는 게 아무 문제 없이,
아니 이렇게 번역될 수 있도록 강의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문법을 분사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번역이 틀린 번역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넓게 이해할 수 있도록 그렇게 문을 열어 놓은 문법 구조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여기서 창조 신앙과 연결하고 있는데, 히브리어 동사들입니다.
이 동사는 창조 내러티브를 들려주고 있는 창세기 1장에서 그대로 사용되는 동사들입니다.
예를 들면, '만들다' '짓다' '성취하다' - '아사, 아차르, 바라' 이런 동사들이 다 창세기 1장에 그대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단어들의 특징적인 것은, 성삼위 하나님이 주어일 때만 사용할 수 있는 동사들을 사용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일을 만드시는데 누가 만드십니까? 성삼위 하나님께서 지금 만들고 계시답니다.
"그 일을 진행하고 계시는 분, 성취하시는 분이 성삼위 하나님이시다!"
무엇을 강조하고 있지요? - 하나님의 주권 신앙을 강조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내 삶이 어려워도, 내 삶이 사방으로 꽉 막혀 있어도,
하나님께서 너를 여기까지 인도하셨고, 하나님께서 너를 장래에도 인도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 신앙과 연결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러분, 지나온 날들을 한번 돌이켜 보십시오.
어려운 일이 없었습니까? 있었습니다. 답답한 일이 없었습니까? 있었습니다.
어제 저녁 우리가 묵상했던 것처럼, 삶에 수많은 난관들이 있었고,
어려움이 있었고, 답답한 일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주권 신앙, 하나님께서 통치하심을 믿게 되면, 우리는 한 가지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이지요.
장래에도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줄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한국교회의 여러분들의 위임 목사님께서 소개하셨습니다.
예배가 무엇인가? 이 자리에 서 있는데, 과거를 끌어당겨서 여기서 맛보는 것입니다. '아남네시스'라고 하는 단어를 사용하지요.
"지난 모든 날들을 돌이켜보니 은혜 아닌 것이 없습니다. 여기까지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살아온 날 동안에 받았던 은혜를 떠올리게 되면, 장래에도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줄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미래를 끌어당겨서 오늘 여기서 맛보는 것을 '프로랩시스'라는 단어를 사용하지요.
예배 현장은 이것들이 함께 묶어지면서 함께 춤 추는 시간, 이것이 예배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이 일깨워 줍니다.
※ [너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네 삶이 망가진 것 같고, 이대로 끝난 것 같고, 답답한 상황 가운데 서 있지만, 하나님께서 장래에도 인도하실 것이다."
그 확신을 예레미야가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면 고백이 생겨집니다.
그 다음 말씀을 보게 되면, 자기가 경험한 그 고백, 자기가 경험한 하나님,
자기가 경험한 은혜들을 증거하는 메신저 형식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예레미야서 33장 3절 말씀입니다. 우리 다 함께 33장 3절 말씀을 같이 봉독하실까요..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아멘!
기도하는 사람들에게는 "응답하시겠다."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보이시겠다"라고 하는 말씀이 먼저 들어오겠습니다마는,
그것보다도 먼저 들어와야 되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부르짖다"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도 아주 독특한 히브리어의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요. '카라'라고 하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 단어는 부르짖는데, '아버지!' 이때는 절대 쓸 수 없는 단어입니다. '아버지' 이때도 쓸 수 없는 단어입니다.
어제 저녁 말씀드렸던 것처럼, 창자가 끊어질 것 같은 '스프랑크 니조마이'의 마음,
그런 마음을 가지고 "아버지! 도와주시지 않으시면, 내 인생 설 방도가 없습니다.
하나님, 내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지 않으시면, 나는 여기서 주저앉을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그러한 사실을 알기에, [아버지~!!] 창자가 끊어질 것 같은 간절함을 가지고
하나님께 부르짖는 사람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신답니다.
알지도 못했던 크고 비밀한 일을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고 계시답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버팀목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나라가 무너졌습니다. 교회가 무너져 내렸습니다. 가정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가족들이 어디로 흩어졌는지 알 수 없고, 생사를 알 방도가 없습니다.
그런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 혼자 감옥에 갇혀 있는데,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예레미야야, 네가 '카라' 부르짖는 버팀목이 되면, 다시 세워지는 역사가 계속되게 될 것이다!" 그런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저절로 되는 일은 없습니다.
좋은 교회도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고요, 좋은 가정도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습니다.
성도들의 눈물과 헌신과 사랑으로 교회는 세워지고요.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눈물의 기도가 있고, 사랑으로 간절하게 간절하게 헌신하는 엄마가 있고 아빠가 있을 때, 자녀가 있을 때,
가정이 세워지고 교회가 세워지고 인생이 세워진답니다.
애 간장이 녹듯이 기도했던 '카라의 기도'는 저에게도 있었습니다.
가만히 돌이켜 보면, "어머니의 기도가 저를 세웠구나"라고 하는 생각이
나이가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새롭게 새롭게 고백하게 됩니다.
"아!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 새벽마다 눈물로 눈물로 기도하셨던 내 어머니의 기도 때문에 여기 서 있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평생 저를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가난한 삶을 살았기에 대단한 유산 저에게 물려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기도의 유산만큼은 저에게 확실하게 물려주셨습니다.
제 어머니는 노년에 관절염이 도지셨지요..
장정이 10분이면 걸어 올라갈 수 있는 거리를 제 어머니는 다리가 아프니까 가다가 쉬고 가다가 쉬고,
아픈 다리 질질 끌면서 가다 보니까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데도 불구하고, 새벽 제단을 거르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고향에 가끔 가서, 어머니를 차로 모시고 새벽 제단 쌓으러 가면서 어머니에게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어머니, 추운 날씨에 아픈 다리 싸매 들고 고생하지 마시고요. 그냥 집에서 기도하세요."
100번 말씀드리면, 100번 대답이 똑같았습니다. "우리 아들이 목사인데..." 그리고, ... ... ...입니다.
그 뒤에 무슨 이야기인지, 제가 지금까지도 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 아들이 목사인데, 목사는 기도해 주는 사람이 많아야 된다는데,
에미가 기도 안 하는데 누가 우리 아들을 위해서 기도하겠어.." 그 뜻이, "우리 아들이 목사인데..."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집에도 계신다는 이야기, 신학적으로 옳은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신학자였던 아들의 이야기를 한마디로 모든 것을 초토화시킨 것은 "우리 아들이 목사인데..."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버팀목이 있어서 내가 오늘 여기 세워져 있구나 고백하게 됩니다.
저는 미국에서 공부할 때, 한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아주 오래 전 이야기입니다마는, 그 목사님이 이런저런 교제하면서 이런 가정 이야기, 살아온 인생 이야기도 하고 이러면서
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목사님인데, 그 목사님이 오래전에 했던 이야기가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저는 김 목사님이 부럽습니다.'
그분은 가난한 집에 태어나서 대학을 갈 수가 없는 형편이어서 해군사관학교에 진학을 했습니다.
키도 건장하고, 체력도 좋고, 공부도 잘해서 해군사관학교 입학해서 열심히 공부해서 성적도 상위권이었답니다.
그런데 4학년 1학기에 폐병이 도졌습니다. 전염성이 있잖아요. 그래서 바로 후송 조치가 되었습니다.
후송 가서도 열심히 약도 먹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예배드리고 운동도 열심히 하고 했더니, 그 효과가 있어선지
6개월 만에 완치 판정을 받고 4학년 2학기에 동기들하고 같이 공부하게 복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해군사관학교 교장이 새로 부임을 했는데, 교수부장이 학교 상황, 학생들의 상황을 쭉 보고합니다.
그러면서 이 친구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 생도가 폐결핵이 발병돼서 6개월 후송 갔다가 다행히 완치 판정을 받고 새로 복교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해군사관학교 교장이 딱 한마디 하는 겁니다.
"야, 6개월이나 후송 갔다 온 친구가 온전한 해군 장교 되겠어? 잘라" 그랬답니다.
그 말 한마디에 완치 판정을 받았고, 성적도 좋은데 임관 6개월 남겨놓고 퇴교 조치가 되었습니다.
고향의 교회당에 와서 마룻바닥에 엎드려 통곡을 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왜 제 인생은 이렇게 꼬아 버리십니까?"
피눈물을 쏟으면서 통곡하며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들려주신 음성이 있어서 저희 장로회 신학대학교에 입학을 했습니다.
"세상의 지휘관 되지 말고 하나님 나라의 지휘관 되어라!"
저는 장신대에서 공부할 때 친구를 몰랐습니다. 그런데 미국 가서 공부하면서 만나서 교제했던 친구였습니다.
석사 과정을 마치고 저는 바로 박사과정의 억셉트가 되어서
몇 군데가 입학허가가 떨어졌기 때문에 장학금 조건 좋은 데로 골라서 갔는데,
그 친구는 여섯 군데인가를 응시를 했는데 한 군데서도 입학허가가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재수를 했습니다.
그 다음 해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삼수를 했습니다. 4수째 할 때, 제가 전화해서 '미국에 좋은 학교만 넣지 말고,
캐나다에도 좋은 학교 있으니까 캐나다의 토론토 대학 넣어 봐라. 한국 사람들에게 요즘에 입학허가를 잘 준다고 그러더라'고..
그래서 오플라이를 했는데 미국의 학교는 또 다 떨어졌는데, 토론토 대학교에서 입학허가가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시작했고, 코스 2년 하는데 3학기 올 A로 전부 다 성적을 유지하고 열심히 했답니다.
그런데 학교에 어학 정책, 영어 토플 점수와 관련된 정책이 바뀌어서 한 달 안에 정해진 점수를 요구하는데 그걸 못 채웠습니다.
토플, 그 당시 600개를 제출하라는데, 597개를 맞았답니다. 다른 성적이 좋으니까 그대로 받아들였는데
이 학교가 여러 학교들이 연합해서 박사 과정을 운영하기 때문에 왜 니네 학교만 이거 토플 점수를 유지하지 않느냐?
전부 다 토플 600개 못 넘긴 사람들을 한 단위로 다 제출하게 해라 이래서
600개를 못 넘겨서 또 두 번째로 퇴교 조치가 되었습니다.
그분은 40일 금식 기도를 들어가면서 저에게 했던 이야기가 바로 이야기였습니다.
'저는 김 목사님이 부럽습니다.'
저는 그때 박사과정 코스 끝내고, 그리고 어학시험 패스하고, 종합시험 패스하고 프로포잘 심사까지 통과해서
논문 거의 다 끝나가고 있었고, 마지막 관문만 남겨놓고 있었습니다.
자기는 하다가 중단되었는데, 이렇게 거의 끝까지 달려온 제가 부럽다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머니들 이야기도 나오고
'저 목사는 어머니도 그렇게 간절하게 기도하신다는데, 장모님도 기도의 대장이시라고 하고..'
그런데 자기 집에는 양가에 기도해 주는 분이 없습니다.
그렇게 되고 나서야 어머니에게 한국에 전화해 갖고,
"어머니, 어머니, 나는 기도해주는 어머니가 없어서 인생이 이렇게 팍팍한가 봐요.
인생이 이렇게 꼬이는가 봐요. 어머니, 교회 가서 저를 위해서 기도 좀 해 주세요."
종갓집의 장손 며느리여서 제사 때문에 못 나가던 어머니가
아들이 인생길이 꼬여서 기도 부탁하니 어머니가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답니다. 그런데 이제 교회 나가기 시작한 사람이,
내가 어머니를 위해서 기도하면 더 깊게 기도하지, 어머니가 아들을 위해서 얼마나 깊게 기도하겠느냐고...
'평생 아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어머니가 있는 김목사님이 부럽습니다.' 그 이야기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버팀목이 있는 곳에서 세워지는 역사는 계속됩니다.
민족이 무너지고, 교회가 무너지고 있을 때,
예레미야가 목숨 걸고 버팀목의 사명을 감당하다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들려주었던 영적 원리도 그것이었습니다.
"흙 묻은 손이 있을 때 가정에도 교회에도 새 봄이 펼쳐진단다.
봄동산이 펼쳐진단다. 봄 들판이 펼쳐진단다.
흙 묻은 손들이 있을 때, 가을 들판이 그곳에 활짝 펼쳐진단다."
그렇습니다. 예레미야가 그 영적인 원리를 알았습니다.
"나는 결코 쓰러질 수 없는 버팀목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 붙잡고 예레미야가 벌떡 일어나서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계속해서 주어진 사명 감당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네가 우뚝 서 있으면 세워지는 역사는 계속된다." 그 말씀 듣고 일어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결코 쓰러져서는 안 되는 버팀목들입니다.
그 버팀목들이 우뚝우뚝 서 있는 그곳에 세워지는 역사는 이 새벽에도 계속되게 될 줄 믿습니다.
우리의 인생길에도 계속될 것입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우리가 천국 가고 난 그 다음에도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될 줄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결코 쓰러져서는 안 되는 버팀목들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하나님 앞에서 기도로 몸부림치면 늘 찬양으로 응답하시던 하나님께서
어느 날은 이 찬양으로 제게 응답을 주셨습니다. 찬양을 입술에 담아주셔서 고백하게 하셨고,
그 고백이 계속될 때 제 영혼이 살아나고 제 기도가 살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나의 힘을 의지할 수 없으니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 것은 주께서 참 소망이 되심이라
하나님의 꿈이 나의 비전이 되고 예수님의 성품이 나의 인격이 되고
성령님의 권능이 나의 능력이 되길 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
이 시간,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디에 세우셨는지, 누구의 버팀목이 되라고 지금 이 새벽에 나를 세우셨는지,
가정을 돌아보시고, 교회를 돌아보시고, 자녀들을 돌아보시고, 힘든 여정 힘든 인생길을 걷고 있는 우리 성도님들,
혹시 교구의 식구들... 나와 가까이 지내는 친구들, 내가 기도로 붙잡아 줘야 될 사람이 누구인지 이 시간에 한번 살펴보십시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을 불러가면서
"하나님, 이 사람 좀 붙잡아 주시옵소서! 우리 아이 좀 붙잡아 주시옵소서!
힘든 인생길을 걸어가고 있는 분, 말씀 듣고 벌떡벌떡 일어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내가 먼저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버팀목이 무너져서는 쓰러져서는 안 되는 버팀목이오니, 주여! 내가 기도 가운데서 쓰러지지 않게 하시고,
부르짖는 '카라'의 기도, 이 시간 하나님 앞에 올려드릴 때,
주님 약속대로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응답하여 주시옵소서! 응답하여 주시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