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조선의 '건축왕' 일제 탄압 속 빛난 조선계 디벨로퍼
일제 강점기에 조선계 디벨로퍼들이 활동하기에는 지금보다 제약이 훨씬 많았다.
조선계 건설사의 관급공사 참여를 막은 일제는 조선계 디벨로퍼사들에 금융권 차별을 가했다. 부동산 개발의 핵심인 자금조달의 길을 막은 것이다.
당시 조선식 주택은 문화주택에 비해 담보평가가 20~30%가량 낮았다. 담보평가가 낮아 은행에서 빌릴 수 있는 돈이 적었으니 조선계 디벨로퍼들은 일본식 주택이나 문화주택 건설업자에 비해 불리한 금융조건에서 사업을 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조선식 주택 건설업자에 대한 총독부의 견제와 탄압이 은근하게 꾸준히 이뤄지는 가운데, 자칫 꼬투리를 잡히면 옥고에 고문까지 당했던 상황을 감안하면 조선계 디벨로퍼들의 애국심은 가벼이 볼 만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탄압 속에서도 경성의 인구가 급증하며 조선계 디벨로퍼들은 빠른 속도로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다. 9000원 하던 집이 10년도 안돼 13만원으로 뛰어오르던 시절이었다.
이들은 경제적으로 형편이 어려워진 왕실과 귀족층의 대형 한옥을 매입해 토지를 분필한 후 33~132㎡ 규모의 중소형 근대한옥을 개발해 판매했다. 혁신적인 건축양식 개발을 통해 중산층 이하 서민들에게 주택 대량공급을 단행한 셈이다.
이 같은 조선계 디벨로퍼들의 분필 작업 덕분에 1917∼1927년 경성부 관내 지적목록을 살펴보면 경성부 면적이 19% 증가하는 동안 지번 수는 37%나 증가했다. 1번지당 토지면적은 443.2㎡에서 383.1㎡로 감소했다. 필지 분할을 통한 부동산 개발이 얼마나 활발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조선계 디벨로퍼들이 단순 사업성에 매몰돼 저질 주택을 공급한 것은 아니다.
김경민 서울대 환경계획과 교수는 “19세기 중후반 뉴욕의 서민주택 공급을 담당한 디벨로퍼들은 경제적 이윤만을 추구해 방에 햇빛이 일절 들어오지 않고 환기도 되지 않는 방을 공급해 오히려 사회적 문제를 야기시켰다”며 “반면 조선계 디벨로퍼들은 과거 한옥의 문제점을 개량하는 동시에 좁은 면적에 효율적인 주택 배치와 내부 구조 변경에 집중하며 전통한옥의 독립적인 안채, 사랑채, 행랑채를 압축해 담아냈다”고 지적했다.
위생부터 일조권, 수납공간까지 신경쓴 도시형 한옥을 건설한 조선계 디벨로퍼들을 ‘집장사’라고 폄하하는 것은 매우 야박한 처사라는 것이다.
최지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