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육사(莊陸寺) 경북 영덕군 창수면 갈천리 120 ☎ 054-732-6289
경북 영덕군 창수면 장육사길 172
운서산(雲棲山,520m)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 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이다. 고려 공민왕(재위 1351 ~ 1374)때 나옹선사가 서기 1355년에 창건한 사찰이다. 주요 건물인 대웅전(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38호)은 앞면 3칸 옆면 3칸의 규모이여, 지붕은 옆모습이 사람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방식으로 건축되었으며, 조선중기 사찰 건축 양식으로 알려져 있고, 대웅전의 단청을 금단청으로 하여 화려하기 이를 데 없으면서도 색상이나 무늬가 장엄하고 거룩하다.
삼존불 뒤에 모셔져 있는 영산회상도 후불탱화(경북 유형문화재 373호)는 조선시대 영조 1764년에 만들어졌고, 지장탱화(경북 유형문화재 374호)도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예술적 가치와 미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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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육사는 1355년(공민왕 4) 영덕에서 태어난 나옹 혜근(懶翁 慧勤, 1320~1376)스님이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후의 자세한 연혁은 전하는 문헌이 없어 알 수 없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세종 때 산불로 인하여 사찰 전체가 불탄 뒤 중건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폐허가 되었고, 얼마 후 다시 중건하였다.
그런데 사전류를 보면 1900년(광무 4년)에 이현규(李鉉圭)가 중수하였다고 되어 있으나, 이는 문헌을 잘못 해석하여 생긴 오류로 보인다. 이현규가 중수 하였다는 것을 절에 전하는 <홍원루중수기> 현판을 그가 썼기 때문에 그렇게 본 듯 한데, 실제로 현판의 내용을 자세히 읽어보면 이현규가 중수한 것이 아니라 여려 계원들의 합심, 그 중에서도 특히 황정오 이유정 전석출 등
세 사람의 노력에 주로 힘입었으며, 중수한 해도 1900년이 아니라 1937년임을 알 수 있다.
장육사 누각인 흥원루에는 위에서 본 <흥원루중수기>를 비롯한 중수 현판 9매가 전하는데, 이를 통해 근대의 연혁을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홍원루를 중수한 데 이어 1940년에는 신령각을 중수했다. 최근에는 1988년 요사채를 지었고, 1998년 계단을 정비하였으며, 2001년 범종각을 조성하여 오늘에 이른다.
장육사 일주문(一柱門)
장육사 일주문 - 일주문을 사찰로 들어가는 첫 번째 관문이다. 원래 지붕을 가진 일반적인 건축물이라고 하면 사방에 네 개의 기둥을 세워 지붕의 하중을 지탱해야 하는 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일주문은 한 줄로 나란한 두 개의 기둥만으로 지붕을 지탱하며 서 있는 건축물이다.
일주문이란 명칭은 바로 이런 건축적인 특징에서 붙여지게 된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모습에 비추어 일심(一心)이라는 의미를 부여한다. 즉 신성한 사찰에 들어서기 전에 흐트러진 마음을 하나로 모아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일주문의 경지는 아직 무언가를 깨달았다고 할 수 없는 위치이다. 다만 단호한 결심과 실천 의지를 보이면서 구도자로서의 길을 시작하는 단계일 뿐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일주문을 기준으로 중생이 사는 세상인 세간(世間), 그리고 속계(俗界)와 생사 번뇌에서 해탈한 깨달음의 세계인 출세간(出世間) 즉 진계(眞界)로 나누어지는 것이다.
장육사 일주문을 문경 봉암사의 일주문을 본따서 만든 것으로 2009년 낙성되었다. 이는 나옹선사의 선맥을 잇고자 하는 뜻에서 만든 것이다. 현판의 글자는 홍원루에 있는 글자를 집자한 것이다.
장육사 흥원루(興遠樓)
장육사 흥원루(興遠樓) - 흥원루는 1937년에 중수하였다. 누각 형태의 흥원루 1층에는 종무소가 있고 좌측에는 각종 집기 등을 보관하는 창고로 쓰이고 있다. 2층에는 템플스테이의 일환인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100여명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다.
흥원루 전면에는 운서산 장육사(雲棲山 莊陸寺)라는 편액이 걸려 있고 법당 방향인 후면에는 흥원루(興遠樓)라는 편액이 각각 걸려 있다.
장육사 종무소
종무소, 운서산방 그리고 운서산 장육사 편액이 보인다.
장육사 흥원루
장육사 범종각(梵鐘閣)
장육사 범종각 - 범종은 절에서 쓰는 종을 가리키며 순수한 우리말로 인경이라고도 하는데, 절에서 많은 사람을 모이도록 하거나, 모든 이들에게 때를 알려주는 종으로, 그 소리가 아주 신묘하여 예경이나 의식에도 쓰이게 되었다. 범종 소리는 우리의 마음속 깊이 울려 어리석은 몸과 마음을 자비하신 부처님의 품으로 이끌어 준다. 지옥에 있는 중생들을 위해 소리를 낸다고 한다.
본래 종은 불교가 중국에 들어온 후로 중국에서 예로부터 행하던 종과 인도의 건추(추推나무 조각을 마주쳐서 소리를 냄)에서 본받아서 만든 것인데, 대중을 모으기 위해서나 때를 알리기 위해서 치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지 점차 조석예경이나 기타 법요 행사 때에 대중에게 알리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종소리 자체에 신성한 뜻을 붙여서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큰 종을 종루가 종각을 짓고 달아두며 모양과 크기는 일정하지 않고, 종의 맨 윗부분은 용의 머리처럼 만들어 소리내는 음통과 거는 역할을 하는 용두가 있다. 상부엔느 젖꼭지 모양의 유곽이 둘러싸 있고 아랫부분에 양편으로 상대해서 두 개의 당좌가 연꽃무늬로 있게 되는데 종을 칠 때는 이 곳을 쳐야 한다.
또한 몸통에는 사보살상ㄹ이나 아름다운 천녀가 악기를 연주하면서 하늘을 날아가는 모습을 한 비천상(飛天像)이 아름답게 새겨진다. 중생이 종소리만 들어도 번뇌가 없어지고 지혜가 자라나며 지옥에서 벗어나고, 삼계에 윤회하는 일도 없이 성불하여서 중생을 제도하게 될 것이다 하는 축원을 곁들이게 되었다. 과연 종소리로 할여금 듣는 자로 하여금 마음을 맑게 하는 힘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이른 새벽 동이 트기 직전에 절에서 울려퍼지는 그 우렁차고도 은은한 종소리는 중생의 혼미한 잠을 깨워주고 열띤 머리를 식혀주며, 불안한 가슴을 어루만져 주는 힘이 다분히 지니고 있다. 저녁예불에는 33번을 치고, 새벽예불에는 28번을 친다.
장육사 범종은 1992년에 조성되었으며, 범종각은 2001년에 조성하였고, 2004년 단청을 하였다.
장육사 심진당(深眞堂)
장육사 심진당(深眞堂) - 심진당이란 진리에 깊게 들어가는 당우란 듯을 가진 이름으로 불법을 공부하는 스님들이 머무시는 요사채인 심검당, 선불장 등의 의미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심진당은 현재 장육사 사중 스님들이 사용하는 요사채이다. 1990년대에 신축되어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장육사 석등의 위치가 아주 절묘하다.
두마리의 사자가 석등을 떠 받치고 있는 형국인데 사진을 찍는 각도에 따라서 심진당 앞에서 떠 받치는 모양이기도 하고 또한 대웅전이나 관음전을 떠 받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아래 사진은 대웅전과 관음전 사이를 떠받치는 있는 모습으로 포착하여 보았다.
장육사 대웅전(大雄殿)
장육사 대웅전(大雄殿, 경북 유형문화재 제 138호) - 이 건물은 고려 공민왕 때 나옹선사가 창건한 장육사의 주불전이다. 조선 세종 때 산불로 소실된 후 재건하였고, 임진왜란 때 폐찰되었다가 중건하였으며, 광무 4년(1900)에 중수하였다.
규모는 앞면 3칸, 옆면 3칸의 규모이며, 지붕은 옆모습이 사람인(人)자인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방식으로 건축되었으며, 조선 중기 사찰 건축 양식으로 알려져 있다. 단청을 금단청으로 하여 화려하기 이를 데 없으면서도 색상이나 무늬가 장엄하고 거룩하다.
장륙사 대웅전은 태조 4년(1395)에 태조와 그의 부인 신덕왕후 강씨를 기리기 위하여 지방관리들이 중심이 되어 만들었고, 태종 7년(1407)에 다시 금을 입혔다. 또 숙종 3년(1677)에 수리하였다는 등 자세한 기록이 있어 유명하다.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문수보살 보현보살이 협시하고 계신다(장육사 주지이신 효상스님 설명)
그러나 육안으로 보이기는 오히려 석가모니부처님의 모습은 아미타불 수인을 하고 계시며 그 좌우에는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로 보인다.
가구나 보아지의 형상, 천장 등에서 임진왜란 이전의 고식 수법을 보이고 있고, 화려한 금단청, 빗천장의 주악비천상, 좌우 벽체의 보살상 벽화는 독특한 필법으로 예술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대웅전 내 영산회상도(경북 유형문화재 제 373호) - 대웅전에 석가모니불상의 뒤쪽 벽면에 걸어 봉안한 이 후불탱화는 석가모니불 영산회를 표현한 탱화이다.
영산회상이라는 뜻은 부처님 당시 인도의 영취산에서 설법하신 모습을 말한다. 영취사는 독수리를 닮은 산이란 뜻이다. 화면 중앙에는 촉지인의 수인을 취한 석가모니불과 좌우 협시인 문수보살 보현보살을 위시하여 사천왕과 8대보살 8대제자 타방불 4위, 팔부중과 국왕과 왕비 등이 합장한 모습으로 배열되었다. 이 탱화는 비단에 채색한 것으로 1764년 영조 때 조성되었다.
장육사 대웅전 내 지장탱
지장보살도(경북 유형문화재 제 374호) - 지장보살님은 석가모니불이 입멸한 뒤부터 미륵불이 출현할 때까지 천상에서 지옥까지의 일체중생을 교화하는 자비로운 보살님이다.
중앙에 크게 강조한 지장보살님을 중심으로 도명존자와 무독귀왕 그리고 지옥의 십대왕과 판관들이 있다.
승려형의 머리를 한 지장보살님은 한 손에 석작을 다른 한 손에는 투명구슬(장상명주)를 잡고 연화대좌 위에 앉아 있다.
견본채색으로 조선 1764년에 조성되었다.
장육사 대웅전 내 신중탱
장육사 신중탱화 - 신중탱은 불법을 호지하는 호법신을 묘사한 불화로 대개 법당의 중심부에서 왼쪽과 오른쪽 벽에 봉안한다. 그런데 이 신중탱화에 나오는 대부분의 호법신들은 불교 고유의 신중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고유의 신들이 많이 섞여 있다. 이것은 재래 토속신앙의 불교적 전개를 의미한다. 아울러 토착신앙에 대한 불교의 적극적 수용의 면을 엿볼 수 있다.
이들 토속신들의 기능은 대개 호법선신(護法善神)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불교의 신중은 삼분되어 상단, 중단, 하단 각각 1백 4위에 이른다. 상단 신중에는 대예적금강 및 8대금강, 4대보살, 10대광명 등으로 구분하다.
중단 신중에는 대범천, 제석천왕 및 사대천왕, 대승제천, 공덕천, 위태천신 등의 제천신 및 용왕, 모신, 수신 등 칠원성군 및 삼배후성 아수라 등 팔부신중으로 구분한다.
하단 신중에는 호계신, 복덕신, 토지신, 도량신, 가람신, 산신, 강신, 풍신, 목신, 축신 방위신 등으로 구분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중탱화는 보다 많은 신중을 수용하게 되어 1백 4위의 신중을 이루게 된다. 신중탱화는 신앙적 기준에 따라 대예적금강신을 중심으로 하는 탱화, 제석천과 대범천 동진보살을 주축으로 하는 탱화, 제석천과 대법천을 주축으로 하는 탱화, 동진보살을 주축으로 하는 탱화로 구분된다.
우리나라 고유의 재래적인 신들을 수용하여 탱화의 변용을 꾀하였으며, 그러한 습합 형태는 우리민족의 관용적이고 역동적인 신앙관을 반영하는 것이다. 불교 고유의 것만을 고집하지 않고 여러 문화에 대해 열린 자세를 보인 정신이 끝내는 다른 문화조차도 불교화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한 모습을 이런 탱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장육사 신중탱화는 30여 전 도난 당한 후 새로이 조성되었다.
장육사 대웅전 내 칠성탱
칠성탱화 - 칠성탱화는 수명장수신으로 일컬어지는 칠성을 봉안한 전각의 후불도이다. 주로 자손의 수명장수를 발원했던 칠성신앙은 한국불교 신앙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경우의 하나라 칠성은 104위의 신중탱화에서 보면 여타의 다른 신중과 같이 불법수호에 참여하는 신중의 하나였으나, 일반 민중의 신앙대상이 되면서 신중탱화에서 칠성탱화로 분화되어진다. 그러나 본래는 북극성과 북두칠성의 신(神)이 인간의 수명과 길흉화복을 주재한다는 믿음에서 온 민족 신앙이었다.
이렇듯 자연발생적이고 소박한 민족적 종교가 구체화된 것은 불교 이전 중국 도교에서 말하는 불두칠성에 대한 신앙과 습합되면서부터로 추정된다. 이는 불교의 사회적 특징으로 일컬어지는
“널리 화합하고 응하여 하나가 된다(普和總同性)”는 표현에 잘 부합되는 것이기도 하다.
치성광여래가 원형의 두광과 신광 안에 선정인으로 앉아계신다. 치성광여래는 천재지변을 관장하고 난리(전쟁)와 질병을 다스리며 재앙을 물리칠 뿐만 아니라 특히 자식 낳기를 원하는 사람이 불공을 올리면 그 원을 살펴 들어준다고 하였다.
일광보살 - 해를 보관에 얹고 있으며 번뇌를 제거하고 광명을 가져다 준다.
월광보살 - 달을 보관에 얹은 모습으로 나타나 있으며 중생 인도를 완성하겠다는 대서원을 발하신 분이다.
칠원성군과 칠성여래
북두제1성 - 자손만덕 탐낭성군은 자손들의 화복과 만덕을 관장한다고 하는 분이다. 부처님의 명호로는 선명칭길상왕여래 혹은 운의통증여래불
북두제2성 - 장난원리 거문성군에게 공양을 올리면 온갖 장애와 어려움을 소멸시켜준다고 한다. 부처님은 보배세계의 광음자재여래불이다.
북두제3성 - 업장소제 녹존성군은 인간들의 온갖 업장을 소멸시킨다고 한다. 부처님으로는 원한한 세계의 금색보광묘행성취여래불이다.
북두제4성 - 소개구득 문곡성군은 구하는 바 모든 것을 얻게 한다고 한다. 부처님은 걱정 없는 세계의 최승길상여래불이다.
북도제5성 - 백장진멸 염정성군은 인간들의 온갖 재난을 없애준다고 한다. 부처님은 맑고 깨끗한 세계의 법회뢰음여래 혹은 광달지면여래불
북두제6성 - 복덕구족 무곡성군은 재물과 전택을 주관하여 복과 덕을 갖게 한다. 부처님은 진리의 뜻 법해승혜유희신통여래
북두제7성 - 수명장원 파군성군은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수명에 장해가 되는 재난과 동요를 막아 수명을 연장시켜 준다고 한다. 부처님은 유리로 된 세계의 약사유리광여래이고 약사여래칠불의 대표가 된다.
문수보살 벽화 - 산스크리터어 Manjusri를 음시한 문사사리의 별칭이다. 대승불교에서 최고의 지혜를 인격화한 보살.
Manjusri라는 산스크리트는 묘길상이라고도 번역되며 묘음보살이라고도 하낟. 또 바가슈바라(Vagisvara,언어의 주인)이라고도 한다.
문수보살이 나오는 경전은 250년 무렵부터 만들어졌지만 400년 무렵부터 소재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오른손에 무명의 구름을 잘라버리는 지혜의 칼을 높이 치켜들고 왼손에는 패엽(貝葉)으로 된 반야바라밀경을 들고서 왕자처럼 치장한 모습으로 표현된다.
중국에서는 8세기 부렵부터 문수보살 숭배가 유행했으며, 산서성(山西省)에 있는 우타이산(五臺山)은 문수보살의 성지로서 그를 모신 사찰로 가득 차 있다. 천계에 있는 보살이라고 알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인도에 실재했던 인물이라고도 하는 설도 있다.
여러 가지 방식으로 모습을 나타낸다고 하는데, 즉 꿈속에 나타나거나, 그가 사는 성스러운 신의 순례자, 코탄에 불교를 전한 승려 바이로차나, 티베트 불교를 개혁한 아티샤, 중국의 황제로도 화현한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문수보살 신앙이 삼국시대부터 유행했는데 신라의 고승 자장은 그 유포에 큰 역할을 했다. 한국의 오대산은 중국의 우타이산과 마찬가지로 문수보살의 상주처로서 중시되어 왔는데, 643년(선덕여왕 12)에 중국으로부터 귀국산 자장은 오대산 중대(中臺)에 적멸보궁을 건립함으로써 오대산의 중요성을 널리 부각시켰다. 황룡사의 9층탑도 문수보살 신앙을 굳건히 하고자 한 자장의 노력에 의해 세워졌다. 그 뒤 문수보살 신앙은 계속 유행되어 오늘날에도 많은 사찰의 대웅전에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문수보살이 봉안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보현보살 벽화 - 普賢菩薩(Samantabhadra). 삼만다발날라 혹은 필수발타라 음역하며 보현 또는 변길이라 번역한다. 문수보살과 함께 석가여래불의 협시보살로 유명한데 문수보살이 여래의 왼편에서 부처들의 지덕(智德) 체덕(體德)을 말하고 있으며, 이 보살은 오른쪽에서 이덕(理德) 정덕(定德) 행덕(行德)을 맡고 있다.
석가가 중생을 제도하는 일을 돕고, 또 중생들의 목숨을 길게 하는 덕을 지녔으므로 보현연명보살, 또는 줄여서 연명보살이라고도 한다. 문수보살과 함께 모든 보살의 으뜸이며, 형상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크게 나누어 6개의 엄니(牙)가 난 흰 코끼리를 탄 모양, 연화대에 앉은 모양의 두 종류가 있다. 석가여래를 협시하는 경우에는 오른손을 여의(如意), 왼손을 여인(如印)으로 결인(結印)한다.
또 밀교에서는 금강살타와 같이 생각하여 태장계 만다라의 중대팔염원 남동 끝에 두며, 왼손에는 연꽃을 들고 그 위에 검을 세웠고, 오른손은 삼업묘신의 인(印)을 결하고 있다. 불타의 이(理), 정(定), 행(行)의 덕을 맡아 보는 보살이다.
장육사 대웅전 내 주악비천상
주악비천상 - 불상의 위쪽에 위치한 천개(天蓋)의 내부 천장에는 용이나 화염, 보주, 극락조 등 다양한 조각들이 장식된다. 그리고 천개의 주위에는 목조주악비천상과 같은 비천상이 천장에 매달려 장식되며, 이러한 화려한 조각들은 불전의 내부 공간에 극적인 효과를 연출하게 된다. 주악비천상은 각기 당비파(唐琵琶)와 피리를 연주하는 모습이며 천의(天衣)를 길게 늘어뜨리며 비스듬히 내려오는 형태로 표현되었다.
비천상은 부처님이 영산회에서 설법을 하실 때 음악과 꽃비(散華)를 내려주는 역할을 하는데 음악과 꽃비는 부처님 설법으로 비유된다.
장육사 삼층석탑
장육사 삼층석탑 - 삼층석탑은 대웅전과 육화당 사이에 위치해 있다.
장육사 육화당(六和堂)
장육사 육화당(六和當) - 부처님은 공동생활에서 모든 사람이 염두에 두어야 할 여섯 가지의 중요한 윤리덕목을 말씀하셨는데, 이것을 육화(六和)라 한다.
첫째는 계율을 가짐으로써 서로 화동(和同)하고 애경(愛敬)하라(戒和)
둘째 의견을 같이 하라(見和) 오직 정법에 의한 정견만을 같이 해야 한다.
셋째는 이익을 균등하게 나누어 가져라(利和)
넷째는 부드럽게 행동하라(身和)
다섯째는 자비롭게 말하라(口和)
여섯째는 남의 뜻을 존중하라(意和)
위 육화 여섯 가지로 화합함을 말함이니 육화경의 간략한 말이다. 육화당이란 육화합을 하는 대중방이라는 말이며, 현재 템플스테이 방사로 사용중이다.
장육사 관음전(觀音殿)
장육사 관음전(觀音殿) - 관음전은 2007년 5월 신축 낙성을 하여, 대웅전에 모셔져 있던 건칠관음보살좌상을 이운하였다. 특히 이운식 행사에는 전국의 불자 4천여명이 동참하여 대성황을 이루었다.
관음전 내 관세음보살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남순동자 해상용왕이 협시하고 계신다.
건칠관음보살좌상(보물 제 993호) - 관음전에 모셔져 있는 높이 86Cm의 조선초기 건칠보살좌상이다.
일반적으로 건칠이란 진흙으로 속을 만들어 삼베를 감고 그 위에 진흙가루를 발라 묻힌 다음 속을 빼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 보살상은 삼베 대신에 종이을 이용하였으며, 머리의 보관은 나무로 별도로 만들어 올렸다.
신체의 굴곡은 그다지 선명하지 않으나 목걸이, 옷깃과 소매, 배, 다리까지 화려한 영락을 두어 장식성을 강조한 수법은 조선조 보살상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고려에서 조선시대 조각으로 연결해 주는 조각사적 의미가 매우 높은 불상이라고 한다.
복장발원문과 개금묵서명이 발견되어 1395년(홍무 28년)에 백진을 비롯한 영해부의 관리들과 부민들의 시주로 조성되었고, 1407년(영락 5)에 개금되었음이 밝혀졌다.
복장발원문에 따르면 조선 태조 4년(1395년)에 영해부사 백진(白瑨)과 주민들의 시주로 조성되었고, 태종 7년(1407)에 개금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또한 개금기에 의하면 위장사(葦長寺) 선당(禪堂) 관음보살이라 기록하고 있음을 볼 때 영해도호부 용두산 우물 옆에 있었다는 위장사에 안치된 불상으로 보인다.
사가라용왕 - 용은 상상의 동물로, 기린 봉황 거북과 함께 4대 영물 중 하나이다. 동서양 모두 뱀을 원형으로 하여 다른 동물을 혼합시킨 모습이다. 용왕은 용신, 용왕할머니, 수신이라고 하며 특히 비를 내리게 한다고 하여 예로부터 민간신앙으로 자리 잡았다.
음력 6월 15일에 지내는 용신제나 용왕굿은 대표적인 민간신앙이다. 불교에 수용되면서 법을 수호하는 천룡팔부의 하나가 되었다.
인도에는 용을 천궁을 수호하는 용, 비를 부르는 용, 지룡(地龍)과 회륜전왕(回輪轉王)의 대복팔장(大福八藏)을 관장하는 용으로 분류한다. 불교 경전에 등장하는 용의 선악 양면을 보여준다. 선룡은 모두 팔용으로 난타 발난타 사가라 화수길 덕차가 아나바달다 마나사 우발라이다. 이들은 불법을 수호하고 비를 내리게 하여 풍년을 이뤄준다고 핮다. 특히 바다용왕인 사가라는 기우의 본존이다. 난타와 발난타는 석가가 강림할 때 청정수를 토하여 부처의 몸을 씻었다고 하는 선룡이다.
남순동자 - 남순동자는 화엄경의 입법계품에 근거하여 관음도의 오른쪽 아래에 합장하고 서 잇다. 일찍이 남행하여 53위의 선지식을 두루 섭렵하고 문수 보현보살을 만나 불도를 이룬다. 동자(童子)는 동아(童兒), 동진(童眞), 동남(童男)이라고도 하는데 보살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20세 미만의 스님이 되고자 하는 어린아이를 일컫는 말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동자상이 많이 조성된 이유는 동자의 해맑은 미소와 순수함이 부처님의 마음과 같다고 여겨져 왔기 때문이다.
남순동자는 일찍이 문수보살의 안내를 받아 53명의 선지식을 찾아 가르침을 받고자 남방의 모든 나라를 두루 돌아다니고 마침내 보현보살을 만나 십대원(十大願)을 들은 뒤 아미타불의 극락정토에 왕생하여 불도를 이룬다.
남순동자라는 이름은 남행하여 53명의 선지식을 두루 섭렵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며, 관세음보살을 모시는 관음전(원통전)에서 해상용왕과 함께 관음보살을 양 옆에서 협시한다. 그러나 이들은 조각상을 하지 않고 후불탱화에서만 나타나고 있다. 화엄경 입법계품 제 39에 나오는 선재동자(善財童子)가 가장 많이 알려져 있는 동자의 모습이다.
일반적으로 쌍꼭지 머리를 하며, 옷주름을 낸 음각선이 깊고 이목구비가 단정하며, 얼굴과 어깨는 둥글고 안정된 모습으로 묘사된다. 동자상은 보통 형태에 있어서는 머리를 양쪽으로 묶은 형태, 머리를 늘어뜨린 형태 등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장육사 산령각(山靈閣)
장육사 산령각 - 장육사 산령각에 봉안되었던 탱화는 30여년 전 도난당했고, 새로이 탱화를 조성하여 모셨다. 2002년 매미로 반파되어 쓰러져가던 산령각을 2003년 새로이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장육사 산령각 내 산신탱
산신님 - 자연물에 정령(精靈)이 있다고 믿는 애니미즘에서 비롯된 것으로, 산신령 또는 신령이라고도 한다. 산신에 관한 믿음은 고대로부터 있어온 곳으로, 명산에는 영함한 신이 있어 나라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신의 도음을 기원하는 제사를 올렸다.
산신이 가장 전형적인 숭배대상으로 나타난 것은 고대의 건국신화인데, 단군신화를 비롯하여 한결같이 천자(天子)가 산꼭대기에 내려오면서 산신과 연결된다.
산신은 백발노인이나 호랑이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때로는 백발노인이 호랑이를 타거나 동자와 함께 나타나기도 한다. 이 점에서 산신은 신선이나 선산 등 도교적 요소가 가미된 민간신앙의 단면을 보여준다. 또 산신은 앞서 본 것과 같이 남성신 뿐 아니라 여성신의 경우도 많은데, 일반적으로 산모신(山母神)으로 관념화되어 있는 미륵할미나 산할미(산고, 山姑) 등 수없이 많다.
대체로 산신의 개념은 그 어느 신관보다도 보편화된 것으로, 불교사찰의 산신탱화로도 짐작된다. 대부분의 절에서 볼 수 있는 이 산신탱은 산신각과 함께 불교가 민간신앙의 큰 줄기를 수용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이 경우 물론 신앙대상은 아니며, 절의 수호신 역할을 한다.
장육사 산령각 내 독성탱
독성님 - 미륵하생경에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열반에 즈음하여 네 명의 큰 제자들에게 “나의 가르침이 사라질 때까지 열반에 들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말법시대의 중생들을 위한 자비이다. 이때 네 명의 큰 제자는 마하가섭존자, 군도발탄존자, 빈두로존자, 라후라존자 등이다.
이 가운데 빈두로 존자가 바로 나반존자이다. 빈주도 존자는 범어 ‘핀돌라바라드바자’의 음역이데 16나한 중 한 분이다.
흰 머리와 긴 눈썹을 가진 분으로서 부처님 당시 여러 곳을 두루 다니며 포교에 힘썼고 부처님의 당부에 따라 열반에 들지 않고 말세 중생들의 복전이 되었다. 중국 선종 사찰에서는 식당에 그 형상을 모시고 늘 공양하며, 우리나라에서도 독성각에 모시고 받든다.
참고로, 말법시대에 중생을 위해 유촉하신 ‘ 네 큰 제자 중 가섭존자와 라후라 존자는 십대제자에 드시는 분들이고, 군도발탄 존자는 18나한 중 한 분이디사. 18나한은 16나한에 가섭존자와 이 분을 추가한 것이다. 따라서 독성 신앙은 미륵경에 근거한 말법시대 중생을 위한 신앙이라 하겠다.
장육사 산령각 앞 뜰에 있는 아귀 발우
산령각에서 내려다 본 장육사
장육사 요사채
홍련암으로 올라가면서 바라 본 홍련암
장육사 홍련암(紅蓮庵)
홍련암 - 홍련암에는 지공, 나옹, 무학으로 이어지는 3대화상이 모셔져 있다 홍련암은 나옹스님의 수행터로 알려져 있으며, 20여년 전 개축하였고, 2003년 단청을 하였다.
지공대화상 진영
지공스님 - 인도승려 지공대사(指空大師)
지공화상(指空和尙)은 14세기 인도에서 태어나 성장과 수학의 시기를 제외하고 생애의 대부분을 동아시아에서 활동한 고승이다. 지공은 가섭존자의 제 108대 법손으로, 석가모니의 부왕인 정반왕의 아우 곡반왕의 후손이라고 적고 있다. 민지(閔漬)의 지요서와 지공이 번역한 불전을 간행하면서 이색(李穡)이 남긴 뒷글에서는 20세 때 인도 나란다대학에서 수업을 마치고 유행길에 올랐다고 말하고 있다.
지공은 1318년 봄, 19세의 나이로 지금의 네팔 남쪽(인도 마가다국 나란다)에서 출발하여 인도의 동부를 돌아 세일론섬에 당도하엿다. 그것은 나란다를 떠나기 전 율현으로부터 스리랑카의 길상산에 보명존자(普明尊者)를 찾아뵈라는 명을 받고 남하하였던 것이다.
그는 보명존자를 만나 득도하여 의발을 전수받았다. 이때 그곳에서 1년간 보내고 다시 인도의 서부를 돌아 북부의 네팔과 부탄 사이에 있는 시킴을 거쳐 1320년 티벳으로 들어갔다. 그것은 스승 보명존자의 부탁에 의해서였다. 그가 지나간 이 통로는 당대(唐代)부터 개통되었고, 인도의 신비사상이 강하게 반영된 후기 밀교사상이 티벳에 전파된 중요한 통로였다.
이 과정에서 동쪽의 해로를 다라 미얀마와 말레이반도까지 왔던 그의 여정은 좌절을 맛보았다. 다시 인도 서부의 타르사막과 인도북부를 거쳐 북부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티벳에 1320년에 도착하였다. 이 때 그의 나이 21세 되던 가을이었다. 티벳 서부와 놉놀을 거치고 다시 투르판을 경유하여 사천성과 운남의 변방에 이르러기까지 5여년을 소요하여야만 하였다. 천신만고 끝에 원(元)의 수도인 연도(燕都)에 도착하여 원의 황제 진종으로부터 환대를 받았다.
티벳을 떠나 3년간 촉에서 좌선하였는데 그의 나이 24세 되던 해까지 그곳에서 보낸 셈이다.
대독하에서 도적을 만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남기도 하였고, 운남에서 비를 만나 하안거를 보냈던 사실도 보이며, 대리국에서 호도를 먹으면서 다른 육식을 사양한 점으로 미뤄 지계(持戒)에도 철저하였던 고행자였음을 알게 해준다. 또한 중경로에서 5차례 열었던 법회로서 겨울을 그곳에서 보냈음을 알 수 있다.
스님은 대체로 겨울과 여름엔 여행을 피하고 봄 가을에 교화를 위하여 이동하였다고 보여진다. 그가 원나라의 수도 연도(燕都)에 도착한 시기는 태정(泰定) 초이므로 1324년에 해당한다. 그의 나이 25세였고 봄이라 추측된다. 미루어 짐작하건대 지공화상은 인도에서 1300년에 출생한 셈이 되는데, 이러한 계산을 그를 찾아 감화를 받았던 백운화상(白雲和尙) 경한(景閑)이 님긴 백운화상어록((白雲和尙語錄)에서도 재확인 되고 있다.
나옹대화상 진영
나옹대선사(懶翁大禪師, 1320~1376) - 나옹대선사는 경상도 영해부(현 경북 영덕군 창수면 가산리 불모곡)에서 서기 1320년 1월 15일에 출생하였다. 속성이 아씨(牙氏)이고 부(父)는 선관령(膳官令)을 지낸 아세구(牙世具, 혹은 牙瑞具)이고 모(母)는 영산정씨(靈山鄭氏)이다.
어릴적 이름은 원혜(元慧)이고 법명은 혜근(慧勤), 호는 나옹(懶翁) 또는 강월헌(江月軒)이며 시호는 선각(先覺)이다. 20세인 서기 1339년 친구의 죽음을 보고 생에 대한 의문을 가져 상주의 공덕산 묘적암 요연(妙寂庵 了然)께 의탁하여 출가하였다. 이후 1344년에 회암사(檜巖寺)로 가서 밤낮으로 수행하여 크게 깨닫고 1348년 중국의 대도 법원사에서 지공화상(指空和尙)을 친견하고 한 해를 머물렀다. 그 후 평산처림(平山處林)에게 불법을 이어받고 강남 등지를 행각하였다.
다시 지공을 찾아 그에게서 선지(禪指)를 전해 받았으며 1358년 고려로 귀국하였다. 1361년 신광사 주지로 있다가 구월산과 금강산에 머물렀고 1367년 청평사에 있을 대 지공이 보낸 가사와 편지를 받았으며 4년 후 회암사에서 지공의 사리를 친견했다. 1370년 51세에 개경의 광명사에서 공부선(功夫選)을 관하여 환암혼수(幻庵混修)를 얻었다. 이때 당시의 국사이며 신돈파로서 화엄종 대종사인 설산(雪山, 千熙)을 방석으로 때린 사건이 어록에 전한다.
이듬해 8월 왕사(王師)에 임명되어 금란가사와 법복 및 바루를 하사 받았으며 병란에 불탄 회암사 중창에 전력하였다. 공민왕이 죽고 우왕이 즉위하여 다시 왕사로 추대 되었으나, 회암사를 낙성한 직후에 중앙 대간들의 압력으로 밀양의 영원사로 거처를 옮겨 가던 중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서기 1376년 5월 15일이니 세수는 57세이고 법랍은 38세였다.
스스로 자신의 죽음을 열반불사라 하였는데 ‘10년 이내에도 신륵사 이외에도 금강산, 치악산, 소백산, 사불산, 용문산, 구룡산, 묘향산 등 7개소에 묵은 이색이 찬한 탑비가 세워졌다. 처음 신광사에 있을 때인 1363년 담암 백문보가 서문을 지은 어록이 편집되었던 것을 그의 사후에 목은 이색이 다시 서문을 짓고 환암혼수가 교정하여 문인인 무학자초, 각청, 각우, 각변, 각연, 각오, 유곡각광, 각뢰 등이 재차 편집하엿다. 태조 이성계의 왕사인 무학 자초대사가 바로 나옹선사의 제자이며 그의 법계를 이어 받았다. 경북 영덕군 창수면 갈천리 120번지 장육사는 나옹이 서기 1355년에 창건한 사찰로서 유형문화재 제 138호이며, 건칠보살좌상은 보물 제 993호로 지정되었다.
무학대화상 진영
무학스님(無學, 1327~1405) - 고려 말, 조선 초의 승려이다.
속성은 박, 속명은 자초(自超), 호는 무학이다.
18세에 소지선사 밑에서 승려가 되었으며, 용문산(龍門山) 혜명국사로부터 불법을 배운 뒤 묘향산의 금강굴에서 수도하였다.
공민왕 때 원나라의 연경에 유학하여 인도의 지공선사와 당시 원나라에 가 있던 혜근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고려에 돌아와서 오대산 등지를 순례하였다. 나옹을 만나 서산 영암사(靈巖寺)에서 수년을 머물다가 1356년(공민왕 5)에 돌아왔다. 1392년(조선 태조 1) 조선 개국 후 왕사가 되고 회암사(會巖寺)에 있다가, 그 다음해에 수도를 옮기려는 태조 이성계를 따라 계룡산 및 한양을 돌아다니며 땅의 모양을 보고 마침내 한양으로 정하는 데 찬성하였다.
1397년 태조가 그의 장수를 기원하는 탑을 회암사 북쪽에 세워주었다. 말년에는 금강산 금장암에 들어가서 여생을 마쳤다.
홍련암 옆에는 죽림이 빼곡하게 형성되어 있다.
홍련암에서 내려다 본 장육사
장육사 미유암(瀰瑜庵)
미유암(瀰瑜庵)
미(瀰) : 물 넑을 미, 물 깊을 미
유(瑜) : 아름다운 옥 유, 아름다운 모양 유
암(庵) : 암자 암
물 깊은 곳에서 옥구슬이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내는 것처럼 마음 깊은 곳에서 공부가 되어 옥구슬처럼 아름다운 불성의 자리가 드러나는 것과 같음을 비유한 이름이다.
흔히 사찰에서 많이 쓰는 심검당과도 같은 뜻인데, 심검당이란 말이 가진 강함을 부드럽게 표현하여 미유암이라고 한 것이다. 미유암은 2008년 2월 관음전 자리에 있던 건물을 이건 낙성하였고, 현재 요사채로 사용하고 있다.
장육사 삼륜당(三輪堂)
장육사 삼륜당(三輪堂) - 장육사의 공양간이다. 공양간이란 식사를 하는 곳을 말하며, 사찰에서는 식사를 공양한다고 표현한다. 보시를 할 때는 보시를 하는 사람, 보시를 받는 사람, 보시하는 물건의 세 가지가 텅 비어 버린 것을 이른다. 즉 주는 사람 , 공양물, 받는 사람 모두 청정해야한다는 의미를 가진 무루보시를 말하는 것으로, 내가 누구에게 무엇을 보시했다는 생각이 없이 보시하는 것이다. 곧 공양간의 이름이 삼륜당인 것은 위의 무루보시의 의리를 되새긴다는 의미이다.
불교적인 의미는 세 개의 바퀴 즉, 이 세계를 받치고 있는 세 가지의 기반인 금륜(金輪), 수륜(水輪), 풍륜(風輪)을 이르며, 중생의 번뇌를 없애는 부처님의 몸 입 뜻(즉 身 口 意)의 삼업이 청정한 것이기도 하다.
장육사 동영상
첫댓글 아귀 발우 궁금했는데 감사합니다
네에....모든 것이 모르면 그냥 지나치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