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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의 문체, 또는 이순신의 단호함과 그로 인한 강렬함은 전장에 대한 묘사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그런데 그런 단호함의 근저엔 어떤 멜랑콜리가 있다. 죽음을 예감할 수 있는 자, 즉 자신의 행위가 불러일으킬 결과를 예감할 수 있는 자의 두려움이다. 단호함은 멜랑콜리(그리고 근거인 두려움)의 증거이다. 바꿔 말해 단호함은 모든 행위는 반드시 늦는다고 예언하는 자의 강박적 반복행위이다. (멜랑콜리와 예언적 능력과의 관련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ꡔ꿈 예언에 대하여ꡕ에서 칸트의 ꡔ미와 숭고의 감정에 관한 고찰ꡕ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다루어지고 있다) 여기서 우린 독일 정신병리학자 테렌바하(Hubertus Tellenbach)의 논의에 힘입어 논의를 좀더 구체적으로 밀고 나가보자.
멜랑콜리는 정신분열증과 나란히 2대 내인성정신병(endogene Psychosen)이다. 여기서 내인성(內因性)이란 규정은 정신의학에서 심리적 동기로부터 이끌어낼 수 있는 심인성(心因性) 장애(예를 들어 히스테리)나 신체적 원인이 확실한 외인성(外因性)내지 신체인성(身體因性) 장애(예를 들어 기질성 정신병)와 함께 3가지 원인(原因)영역 중 하나다. 내인성이란 단순히 말하자면 ‘안에서 생겼다’라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내(內)’는 그리스어로 ‘엔돈(endon)'으로 단순히 ‘밖(外)’과 구별된 ‘안(內)’이 아니다. 오히려 엔돈은 이 상대적인 안(內)과 밖(外)의 공통된 근원을 말하며, 이 근원에서 발한 내인성의 현상들 안에서 스스로를 전개하며 머물고 있는 ‘자연’이다.
내인성(엔돈인성)의 사태에서, ‘외’적인 자연이 인간의 ‘내’적인 자연(그 사람의 본성)으로서 모습을 드러낸다. 엔돈은 세계(cosmos)와의 상관관계에서 내인성을 발전시킨다. 따라서 내인성정신병의 병인은 엔돈의 영역에 있다는 주장은 당연하다. 테렌바하는 멜랑콜리에 특별한 친화경향이 있는 인간의 존재유형을 ‘멜랑콜리-친화형’으로 정의한다. 그에 설명에 따르면 이런 유형은 부여된 사태를 특이한 형태로 불가피적으로 ‘전前멜랑콜리 상황’을 ‘상황구성’해버린다.
우리가 동적 유형학의 틀 내에서 ‘상황’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떤 사람의 유형적 특질로 야기되어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미리 주어진 공共인간적(mitmenschlich) 의미연관을 매개로서 일정 방법으로 ‘자기 자신을 실현’하고, ‘자기 자신을 전개’하는 데 있어, 유형은 이 연관을 자기의 상황으로서 구성한다. 바꿔 말하면 멜랑콜리 친화형의 유형전개에 따라, 가까운 주위 타자들을(그뿐만 아니라 모든 신변적인 것, 예를 들어 주거환경 등도) 특이한 방법으로 ‘상황구성(situieren)’하는 경향이 늘어난다. 상황구성이란 대인환경(내지 사물적인 신변적인 것)을 봉입성(封入性: Inkludenz)내지 채무성(債務性: Remanenz)이란 현상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현존재의 기투 안에서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을 말한다. 타자mitmensch를(혹은 예를 들어 이사의 경우처럼 정든 주거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에 실패한 경우, 거기서 유형 자신에 의해 구성된 상황이 멜랑콜리의 병인이 된다. 즉 그 사태에서 내인성의 병적 변화가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ꡔ멜랑콜리ꡕ)
테렌바하가 멜랑콜리 친화형의 두 가지 특징으로 드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고착적 질서 지향 2) 자기 일에 대해 과도한 높은 요구수준. 멜랑콜리 친화형 인간은 정연한 질서에 의해 지배되고 우발사(偶發事)가 가능한 한 배제된 세계에서 살고 있다. 이들에게 외부세계란 예측불가능하고 대응-불가능한 사태로 가득한 세계이다. 따라서 여기서 질서 자체가 스스로를 질서 안에 가두는 경계라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테렌바하는 이와 같은 멜랑콜리 친화형의 공간성을 ‘봉입성’이라고 부른다.
이와 대조적인 멜랑콜리 친화형의 시간성인 ‘채무성’은 스스로에게 늦음을 취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 요구수준이 높기 때문에 만약 그것이 달성되지 않으면 참을 수 없는 부채감을 경험한다. 그들은 일을 남김없이 완전히 끝내려는 생각과 일을 간단히 마무리 지을 수 없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았다는 생각 사이의 끼어있다(딜레마). 건강할 때는 아슬아슬하게 이 두 경향 사이를 건너지만, 위기적 상황에 빠지게 되면 이 자가당착적인 위험이 갑자기 표면화된다. ‘부채’로서의 채무가 ‘죄’로서의 채무로 체험되게 된다.
테렌바하는 「멜랑콜리의 여러 형태」라는 글에서 위 두 가지 특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로 ꡔ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ꡕ의 베르테르(봉입성)와 ꡔ이것이냐 저것이냐ꡕ의 키에르케고르(채무성)에게 찾는다. 그렇다면 김훈 소설의 주인공들, 특히 이순신은 어떻게 볼 수 있을까? 물론 우리는 그가 공간적 성격을 띠고 있는 봉입성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베르테르가 롯테와의 사랑이 실패 후 커다란 세계를 거부하고 자신을 가두는 어떤 질서에 몰두한 것처럼, 이순신은 모함에 의한 고초를 통해 임금에 대한 충(忠)에 배신감을 느끼고, 오로지 ‘칼’이라는 질서(또는 ‘적’에 의해 자신이 규정된다는) 질서에 스스로를 가두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시간성으로서 멜랑콜리이다.
분명 이순신은 우발사가 배제된 질서정연한 세상에 자신을 가두고 있다. 그리고 그 질서, 즉 경계로서의 질서에 등장하는 ‘적’이라는 환영과 그것을 겨누는데 사용하는 ‘칼’에 모든 걸 집중하고 있다. 그 어떤 것도 벗어날 수 없는 그 자체로 완벽한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때문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었다(그는 전쟁을 끝내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소식을 들은 후 이순신은 심하게 동요한다. 왜냐면, 그것은 예측하지 못했던 우발사로 그것은 전쟁이란 질서 위에 서있는 그의 세계를 송두리째 위협했기 때문이다. 적이 죽자 그의 세계는 순식간에 거대한 황무지로 변해버렸던 것이다.
임진년 개전 이후 남해안의 포구와 물목마다 벌어졌던 저 끝없는 싸움과 죽음과 죽임이 이렇게 끝장이 날 수가 있는 것인가. 나는 머릿속에 거대한 황무지가 펼쳐지고 있음을 느꼈다.(ꡔ칼의 노래ꡕ, 277쪽, 강조는 인용자)
여기서 그가 자신의 세계를 계속 유지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불균형 속에 빠진 엔돈(자연)을 다시 ‘내재화’하는 것이다. 여기서 내재화할 수 있는 ‘적’ 자체를 만들어 내어내는 과격한 ‘엔돈 변경(Endokinese)’이 일어난다. 이는 개별성의 제거라는 차원이 아니다. 왜냐면 거기서는 개별성도 엔돈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축소되거나 확대되는 그림자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대상의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방식으로 전쟁이 끝나는, 이 세상의 손댈 수 없는 무내용을 감당할 수 없었다. 말하여질 수 없는 적의가 산더미처럼, 파도처럼 내 마음에 밀려왔다. 임진년에 이물의 앞쪽에서 눈보라로 나부끼며 달려들던 적을 맞을 때보다 더 크고 깊은 무서운 적의로 나는 잠들지 않았다. (ꡔ칼의 노래ꡕ, 278쪽, 강조는 인용자)
‘나의 방식’이 아닌 ‘이런 방식으로’ 끝나는, ‘나의 전쟁’이 아닌 ‘그들의 전쟁’을 이순신은 용납할 수 없었다. 왜냐면 이는 자신의 질서를 완전히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계로서의 질서는 항상 우발적인 것에 의해 무너지기 마련이고, 이에 대한 멜랑콜리 친화형의 대응은 이순신과 비슷하다. 다시 말해 이 순간 봉입성은 채무성으로 이행하는 것이다. 그것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완벽성’에 대한 강박관념과 여전히 할 일이 남았다는 자각 사이에서 생기는 시간차, 즉 ‘늦음’의 문제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가 하려는 것은 그 시간차를 극복함으로, 다시 말해 남은 부채를 모두 변제함으로 자신의 질서로 되돌아가려는 시도이다. ‘자연사(自然死)’가 의미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첫댓글 첫문단 마지막, <그에 설명에 따르면 이런 유형은 부여된 사태를 특이한 형태로 불가피적으로 ‘전前멜랑콜리 상황’을 ‘상황구성’해버린다.> ->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이런 유형은 부여된 사태를 불가피하게 전멜랑콜리 상황으로 바꿔 버리곤 한다.
세번째 문단 마지막 <왜냐면, 그것은 예측하지 못했던 우발사로 그것은 전쟁이란 질서 위에 서있는 그의 세계를 송두리째 위협했기 때문이다.>에서, '전쟁'대신 앞서 언급한 '칼'과 '적'이라는 질서로 설명함이 더 나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