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기술의 발달은 국방력 강화에도 기여했는데, 고려 말에 최무선은 왜구가 자주 침범하자 화약과 총을 만들기로 결심하였다. 연구한 결과, 화약을 만드는 세 가지 재료는 염초(초석), 유황, 분탄이었는데, 그 중 유황과 분탄은 쉽게 구할 수 있으나 염초를 만드는 것이 가장 어렵고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래서 우왕 2년(1376)에 염초의 제조법을 알고 있던 원나라 상인 이원에게서 흙으로부터 추출(抽出)하는 방법을 배우고, 화약을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간단한 화약을 이용한 무기, 즉 화전(火箭) 등을 만들어 실험하여 본 그는 마침내 자신을 얻어 화약과 각종 화약을 이용한 무기를 연구하고 만들 화통도감(火筒都監)의 설치를 조정에 건의하여 1377년 10월부터 본격적으로 화약과 화약 무기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화통도감에서 제조된 화기들은 모두 18가지로, 이 중에서 총포의 종류는 대장군(大將軍), 이장군(二將軍), 삼장군(三將軍), 육화석포(六火石砲:완구의 일종), 화포(火砲), 신포(信砲), 화통(火筒) 등이며, 화전(火箭), 철령전(鐵翎箭), 피령전(皮翎箭) 등은 발사물, 그밖에 질려포(疾藜砲), 철탄자(鐵彈子), 천산오룡전(穿山五龍箭), 유화(流火), 촉천화(觸天火)와 로켓무기로 주화(走火)가 있다.
1380년 왜구가 진포(금강하구)에 대거 침입하자 화통과 화포 등을 처음 사용하여 왜구 선박 500여 척을 전멸시켰고, 1383년 남해의 관음포에서 왜구를 격파했다. 최무선의 주요 저서로는 화약수련법(火藥修鍊法), 화포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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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무선의 화약과 진포(鎭浦)대첩
1.화약 발명에 뜻을 둔 동기 2.화약의 연구과정 3.조정에서 화약연구를 인정 화통도감 설치 4.진포대첩 5.공신에 대한 역사의 푸대접 6.최무선의 공훈을 재조명 현양해야 한다
1. 화약 발명에 뜻을 둔 동기
최무선하면 누구나 화약을 발명한 사람이란 것은 다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부터 630여년 전의 화약의 성능이나 어떤 역사적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생각해 본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생애와 고려조가 원나라의 부마국으로 전락하여 침탈에 시달리는 피폐한 상황을 틈타 왜구가 전국의 해안지대 뿐만 아니라 내륙 깊숙이 침범하여 노략질을 자행하던 것을 최무선이 화약과 화약무기를 만들고 새로운 병선을 건조해서 이 무기를 가지고 해도부원수가 되어 진포해전에 직접 참가하여 대첩을 거둠으로서 그로부터 차차 왜구가 소멸된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 것으로 본다. 최무선은 경상도 영천(永川) 사람으로 영천 최씨 시조 최한(崔漢)의 6대손이며 그의 아버지는 광흥창사(고려때 관리들의 봉급을 관리하던 관청의 수장)의 벼슬을 하고 있던 최동순의 둘째 아들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호기심과 아울러 창의력이 뛰어나서 특이한 것을 생각해내는 지력이 비범하였고 병정놀이도 즐겨하였다. 차차 성장하여 일반 사람들이 하는 유학의 경서 공부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과학 기술에 관한 책을 탐독하였으며 병법에 관한 토론에도 열정적이었고 새로운 병기의 필요성과 사용법 개선을 주장하였다. 그는 벼슬길에 나아가 지문하부사에 이르렀으나 이러한 벼슬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평소 마음먹고있던 병기 개선에 관심을 기울였다.
최무선은 영주(永州:지금의 永川)에서 살다가 아버지가 광흥창사의 벼슬을 하게되자 개경에 가까운 예성강하구(광흥창이 있는 곳) 근방에 옮겨 살게 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언제 옮겼는지는 기록에 없다. 그는 여기서 왜구의 침범으로 인한 재난을 여러번 겪게되어 그 피해가 너무 엄청나고 극심함을 목도하였다. 고려군이 침범한 왜구와 싸웠으나 자주 패하여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렇게되니 왜구의 행패와 노략질은 더욱 심하여 백성의 살길은 더욱 막막하고 조정의 두통거리가 되었다. 왜구들은 양식들은 물론 값어치가 있는 물건은 모조리 빼앗아 갈 뿐 아니라 목숨까지도 짓밟는 참상을 연출하고 있었다. 왜구들은 단순한 도덕이 아니라 왜의 지방군벌 번주(藩主) 밑에서 잘 조련되고 칼,창을 잘 쓰는 재주가 워낙 능숙한 무리로 대집단을 이루어 노략질을 일삼는 해적군단이었다. 특히 최무선의 아버지 동순은 관리들의 녹봉을 관리하는 책임자였기 때문에 전국에서 세납된 곡식이나 특산물이 조운선에 실려 예성강하구를 통해서 개경으로 가게 되어있으므로 이를 잘 관리해야만 한다. 왜구는 이것을 약탈하기위해 호시탐탐 예성강하구를 노리고 있었을 것이다. 최무선은 아버지의 직무가 바로 왜구의 피해를 입기 쉬운 것이었으므로 일찌부터 왜구의 피해를 심각하게 생각했고 어떻게하면 왜구를 물리칠 수 있을까하는 것으로 골몰하였다. 그는 어느날 중국에서 쓰고있는 화약을 떠 올렸다. '화약'은 폭발하는 힘이 무척 강하고 세서 이것으로 무기를 만들면 칼, 창, 활만 가지고 싸우는 왜구 따위는 일격지하에 섬멸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화약이 없다. 다만 중국에서 수입하는 소량이 관에서 허가하는 용처에 쓰이고 있을 뿐이었으며 중국에서는 제조법을 극비로하여 국법으로 제조나 유통을 엄격히 통제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힘으로 화약을 발명해내야 했다. 그는 화약을 만들어야 우리 백성이 편안하게 살 수 있고 국가도 튼튼해진다고 생각하고 화약을 만들기로 결심하였다.
2. 화약 연구과정
화약을 만들려면 우리에게는 어떤 자료나 문헌이 없는 이상 중국 상인들을 접촉하여 방법을 알아보는 도리 밖에 없다고 생각한 최무선은 예성강하구를 드나드는 중국 강남으로부터 오는 배의 상인을 만났다. 그러나 그들은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전술한 바와 같이 당시 중국에서는 화약제조자는 정해져있고 제조법이나 사용법, 가지는 것을 국법으로 금지하고 있어 이금지된 행위를 하는 자는 사형에 처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연루된 가족이나 종사자까지도 극형을 면치 못하기 때문에 화약이라는 말만 들어도 벌벌 떨게 되어 있었다. 최무선은 그래도 뜻을 굽히지 않고 이사람 저사람에게 묻고 다녔으나 거절당하다가 하늘의 도움인지 원나라 염초장, 이원을 만나게 되었다. 이원은 상인을 따라 우리나라에 왔는데 그 상인과 이원을 자기집에 청하여 머물게 하고 새옷을 준다든지 음식과 술대접을 극진히 하고 융숭하게 대우하여 끈질기게 화약 제조법을 물었다. 처음에는 단호하고 막무가내로 거절하던 이원이 여러날 같이 지내는 동안 그 대접이 융숭하고 극진하며 최무선의 애국심과 열의에 감동하여 마침내 화약제조법을 서서히 털어놓게 되었다. 축적된 기술이 없는 우리의 당시 상황에서 한두번 들어서 그 방법을 안다는 것은 어려운 것이었다. 듣고 쓰고 또 몰래 시험해 보기도 했지만 번번히 실패하였다. 이원이 수십일 머무는 동안 실험을 했으나 실패를 거듭했다. 이원이 돌아가고 난 뒤 마당가에 공장을 설치하고 온가족이 잠자는 시간 외에는 이 일에 매달렸다. 피나는 노력 끝에 어느 정도 요령을 터득하여 몇 달만에 약간의 화약을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그들의 기쁨은 참으로 형언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다음 단계는 대량 생산이다. 이것도 어려운 문제였다. 그는 온갖 정성과 재산을 쏟아 붓기를 여러해가 거듭 되니 살림은 거덜이 나고 끼니조차 걱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하는 수없이 부호에게 도움을 청하였으나 거정당하고 나라(정부 기관)에 지원을 청하였으나 냉담하게 거절하였을 뿐 아니라 그를 믿지도 않았다. 항간에서는 그를 미친 사람 취급까지 하였다. 그러나 최무선은 다년간 공들여 이루어놓은 이 일을 그만둘 사람이 아니었다. 요즘같으면 국가에서 보조를 해주던가 대기업에서 지원을 해 줄 법하지만 그 당시 사회에서는 어려운 일이었다. 한 개인이 연구사업을 한다는 것은 요즘 핵개발하는 것만큼이나 어렵고 무리였을 것이다. 예성강 하구 외딴 곳에서 화약실험장치를 해놓고 실험하기 전에 잘못으로 화약통이 폭발하여 여기에서 일하던 큰아들과 종사자 한사람이 화염 속에 휩싸여 죽었다. 그것을 목격한 최무선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아픔과 착잡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의 부인의 슬픔은 최무선의 슬픔보다 몇갑절 더했을 것이다. 그는 남편이 원망스러웠다. 그는 남편에게 달려들어 "화약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라"고 외치며 도끼를 들고 공장으로 내달아 시설을 마구 쳐부수어 없앤다고 휘둘렀으니 최무선이 그 뒤를 쫓아가 가까스로 만류해놓고 둘이 다 땅바닥에 주저앉아 목놓아 통곡하였다. 아들 죽음의 슬픔도 채 가시기 전에 또 다른 슬픔이 닥쳐왔다. 화불단행(禍不單行) 재앙은 한 번 오고 그치는 것이 아고 재수가 없으면 연속해서 다가온다는 슬픔일 것이다. 최무선을 시기하는 조정 중신들이 '최무선이 화약을 만들어 역적질을 하려는 것이다' 모함하는 상소로 의금부에서 잡아가두어 치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새, 최영, 이성계 등 몇몇 중신들에 의해 혐의가 풀렸다. 최무선은 심문받는 자리에서 "화약과 화약무기야말로 나라를 침략하는 적을 막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특히 왜구의 침탈의 만행으로부터 백성을 보호하고 평화롭게 살도록 하기 위해서는 서둘러 만들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의 나라사랑과 겨레를 아끼는 충정에 중신들과 왕이 감동되어 바로 방명하게 되었으며 그 후 화약을 다량으로 만들 수 있게 됨으로서 전화위복이 되었다.
3. 조정에서 화약 연구를 인정 화통도감 설치
최무선은 화약을 대량 생산하게 되자 이를 사용하는 화포, 화통 등 화약무기 제작에 착수하였다. 쇠를 녹여 화포의 포신과 받침대를 만들고 포탄인 철탄자를 만들고 화약장치기구 등을 만들었다. 그때의 화포는 지금의 대포와 비교하면 성능이 말할 수 없이 떨어지지만 상당한 원거리의 목표물을 박살내는 위력에 사람들은 환호성을 올렸다. 이때 최무선의 창의력과나라를 지키려는 애국신에 크게 감동한 조정에서는 마침내 최무선의 건의를 받아들여 고려 우왕 3년 10월에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화통도감을 조정의 기구로서 설치하고 그를 제조관(提調官)으로 임명하여 화약무기 제조에 관한 것은 모두 그에게 맡겼다. 최무선이 바라던 소망이 오랜 고난 끝에 이루어진 것이다. 최무선이 설계하여 만든 화약무기의 종류는 대장군포, 이장군포, 삼장군포, 육화석포, 신포, 화포, 화통, 화전, 철령전, 피령전, 질려포, 천산오룡전, 주화, 유화, 촉천화 등이 문헌에 남아 있다. 이것을 종류별로 나누어보면 장군포는 크기가 다른 발사장치이고 전은 화살로 피령전은 가죽으로 날개를 만들어 단 것이고 철령전은 쇠로 만든 날개를 달은 화살이며 각종 발사장치로 쏘아보낼 수 있는 것으로는 위의 각종 화살, 돌탄환, 쇠알탄 등이 있다. 질려포는 공모양의 쇠안에 쑥, 화약, 쇠파편 등을 섞어 놓고 발사하여 적진에서 폭발시켜 인마를 살상하거나 연기를 일으키는 무기였다. 주화, 유화, 촉천화 등은 조금씩 기둥이 다른 일종의 로케트형 화기이며 대체로 화사류 몸통 부분에 화약통을 달아 불을 붙여 발사하여 원거리의 적진에 화공용으로 썼으며 밤에 쏘면 무서운 불꽃이 분사함으로서 적을 놀라게도 하였다. 기타 신포는 요즘의 신호탄 발사장치이다.
배를 타고 오는 왜구를 막기 위해서는 최무선은 병선을 개조하여 이 화약무기를 크고 튼튼한 병선(군함)에 탑재 장치하는데 신경을 썼다. 당시의 병선은 규모가 작아서 무거운 화포를 장치하고 포탄을 발사할 경우 그진동과 충격으로 배가 뒤집히거나 침몰할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예성강하구 한적한 곳에 조선소를 설치하고 대형 병선을 건조하는 한편 건조해 놓은 많은 병선의 계류장도 벽란도(碧瀾渡) 근처에 마련했다. 병선에 화포를 장치하고 발사물인 철탄자와 화약을 비축하였다. 이렇게 많은 전투함대를 갖추는 것을 보고 조정 신하 중에는 '필시 무슨 엉뚱한 역모의 뜻이 있는 게 아닌가' 의심하고 몰래 여러날 뒷조사를 해보았으나 전연 그런 기미는 보이지않고 오직 나라를 지키고자하는 일념으로 일하고 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최무선은 우왕 3년 화통도감의 제조관이 된 후 우왕 6년까지 그 짧은 기간에 화약무기를 장착한 병선 수백척을 건조하는 업적을 쌓았다. 이 특수전함의 건조기록은 고려사에는 없고 태조실록의 최무선졸기(卒記)에 기록이 보이는데 최무선이 전함의 제도를 널리 물어 연구하여 도당(都堂:정부)의 감독하에 만들어 비축하였다. (又訪求戰艦之制言於都堂監督備造)라고만 되어있어 그 구성과 규모 등 제원(諸元)은 알 수 없다.
4. 진포대첩
왜구가 창궐하기 시작한 것은 고려 충정왕 2년(1350년)경부터의 일이었다. 이리하여 30년간 왜구에 시달렸다. 우왕 6년(1380년) 음력 8월 하순 농촌에서는 가을걷이가 끝날 무렵 진포(鎭浦:지금의 군산으로 추정)로 쳐들어온 왜구는 병력수는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병선은 무려 500척이나 되는 조직적으로 편성된 강도선단(强盜船團)이었다. 이들은 호남 내륙 평야에서 추수한 곡식을 노렸을 뿐만 아니라 개경으로 가는 세미와 조정에 바치는 공물이 이 전포의 진성창(鎭城倉:지금 임파의 서쪽 10리지점)에 보관된 것 등을 약탈하기 위해 이 포구로 침입해 온 것이다. 왜구의 병선이 아무리 작다고 하여도 500척이면 그 돛대와 깃발이 금강하구를 꽉 매워 숲을 이루고 강물은 왜선으로 덮여 물이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왜구들은 굵은 밧줄로 배와 배를 연결하여 묶어놓고 일부 병력을 배치하여 선단을 지키게 하고 약탈부대는 내륙깊숙이 쳐들어가 우리 백성들이 1년 내내 피땀흘려 거둬 놓은 쌀과 곡물을 마구 빼앗았을 뿐만 아니라 집에다 불을 놓고 닥치는 데로 사람을 죽였다. 부로( 虜)로 잡혀간 사람도 부지기수이고 시체는 산과 들을 덮었다.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참상으로는 두세살난 계집아이를 잡아다가 머리를 깎고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고 물에 씻어 쌀, 술과 함께 천제(天際)의 제물로 바치는 천인공로(天人共努) 할 만행을 일삼았다. 600년 전의 왜구는 반식인종과 같았다. 이때 전라감사로부터 장계(狀啓)를 받은 조정에서는 분기충천(憤氣衝天) 이번에야말로 이 왜구들을 철저하고 무자비하게 응징해서 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최무선이 만들어놓은 화포, 화통 등으로 무장한 함대를 동원 왜구를 토벌키로 하였다. 화통도감의 제조관인 최무선을 해도부원수로 심덕부를 도원수로, 나세를 상원수로 삼아 병선 100척을 동원 출전케하였다. 예성강하구를 출발하여 경기, 충청도 해안을 거쳐 진포 어귀에 당도한 고려함대는 진격을 멈추고 적정을 살폈다. 왜구들의 배는 약 500여척으로 배사이를 밧줄로 연결해놓고 경비병을 풀어 지키고 있었다. 왜적들은 고려 수군에 화포와 같은 고성능 무기가 있을 줄은 생각도 못하고 유유히 노략질한 쌀과 곡식을 배 안으로 적재하느라고 부산하였다. 고려 수군이 왜선의 바로 앞까지 진격하자 왜구들은 놀라 전력을 다하여 항전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우리 지휘관의 공격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발포신호탄이 발사되었다. 최무선은 진포해전에서 함포(화포, 화통 등) 사격의 주동지휘관이다. 우리 함선의 화포, 화통과 불화살 등이 일제히 불을 뿜으며 날았다. 천지가 진동하는 우레소리는 포연과 함께 왜선을 삽시간에 풍비박산(風飛雹散) 불태우고 수장시켰다. 왜적들은 대부분 불에 타죽고 물에 빠져죽었다. 그리고 여기서 대부분의 병선을 잃었다. 참으로 통쾌한 승리였다. 목숨을 건진 왜구 잔적들은 뭍으로 올라가 더욱 극성스럽게 노략질을 하며 전라도에서 경상도 쪽으로 쳐들어갔다가 먼저 내륙으로 간 왜구들과 운봉에서 합류하였는데 다음은 그해 9월에 이성계 장군의 황산대첩(荒山大捷)으로 이어진다. 이때 진포해전이 끝나고 왜적에게 사로잡혀갔던 백성 334명을 구해냈다. 진포해전에 대첩을 거두고 개경으로 개선한 장수들은 우왕으로부터 최무선, 나세, 심덕부 등 여러 원수에게는 금 50량씩을, 비장인 정룡, 윤송, 최칠석 등에게는 은 50량씩 하사되었다. 이 싸움의 3장군 가운데 으뜸은 당연히 최무선이었다. 그리하여 그에게는 순성익찬공신(純誠翊贊功臣)의 호를 내리고 광정대부 문하부사(匡靖大夫 門下府事:正二品)란 벼슬을 제수하였으며 얼마 뒤에는 중대광 영성군(重大匡 永城君:從一品)이란 작호를 본하였다. 진포해전에서 고려군이 왜구를 소탕하는데 최무선의 공적이 지대하였음을 단적으로 입증하고 있는 것은 당대의 대표적 시인이며 대학자였던 권근은 진포대첩을 극찬한 시를 남겼을 정도이다. 이 찬양시가 권근의 양촌집(陽村集:권근의 문집)에 실려있다.
진포에서 왜선을 격파한 최무선 원수를 축하하다. 최공이 처음으로 회포를 만들었다. 님의 재략이 시대 맞춰 태어나니 30년 왜구를 하루에 평정했구려 바람 실은 군함은 나는 새도 못 따라가고 화차(火車)는 우레소리 울리며 진을 재촉하네 주유(周瑜)가 갈대 숲에 불을 놓은 것이야 우스개 거리일 뿐이고 한신(韓信)이 배다리를 만들어 잠시동안 앵(앵) 땅에 건너갔다는 것이 자랑거리가 될까보냐 풍성 장렬한 공은 이제부터 만세에 전해지고 능연각(凌練閣:공신들의 초상화 걸어두는 곳)에 초상화 걸려 여러 공경 가운데 으뜸일세 공의 화약무기 제조는 하늘의 도움이니 한 번의 바다싸움에 흉포한 무리 쓸어버리니 하늘에 가득하던 도적의 기세 연기와 함께 사라지고 세상을 덮을 공명은 해와 더불어 영원하리 긴 맹세가 어찌 긴 세월을 기다릴까 응당 군사의 대권(활과 도끼를 하사하여)을 맡기셧네 종묘의 복으로 경사로히 나라는 안정을 찾았으니 억망 백성의 목숨이 다시 소생하였네
原文 賀崔元帥茂宣破鎭浦倭船 (하최원수무선파진포왜선) 公始作火 (공시작대포) 明公才略應時生 三十年倭一日平 명공재략응시생 삼십년왜일일평 水艦信風過鳥翼 火車催陳震雷聲 수함신풍과저익 화차최진진뢰성 周郞可笑徒焚葦 韓信寧誇暫渡 주량가소도분위 한신영과잠도앵 豊烈自今傳萬世 凌煙圖畵冠諸卿 풍열자금전만세 능연도화관제경
天誘公衷作火 樓船一戰掃凶徒 천유공충작화포 누선일전소흉도 漫空賊氣隨煙散 蓋世功名如日鋪 만공적기수연산 개세공명여일포 永誓豈惟期帶礪 專征應亦賜弓 영서기유기대려 전정응역사궁부 宗 慶賴邦家定 億萬蒼生命再蘇 종조경뢰방가정 억만창생명재소
* 원문에는 宣이 先으로 되어 있음 帶礪:공신의 집안은 영구히 단절시키지 않는다는 약속
진포해전의 의미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화약과 이것을 사용하는 화포 등 화약무기를 만들고 규모도 크고 개량된 병선에 장치하여 함포사격으로 적선 500여척을 일거에 박살낸 대승을 거둔 것으로 세계 대전사에 마땅히 기록되어야 할 위훈(偉勳)임에도 당시 위정자들의 정치적 목적에 의한 관견(管見)으로 우리의 사서(史書)에서 폄하하고 자세한 기록을 빼버린 우(愚)를 범하였다. 또 하나는 당시 전라도 북부지방의 세미(稅米)의 조운(漕運) 보관한 진성창의 곡물을약탈하기 위해 왜구의 대선단이 진포로 침입해온 것을 고려수군은 최무선의 지휘하에 화포사격으로 단숨에 무찔러 왜구의 기를 꺽어서 다음 남해 관음포대첩의 두 번 해전으로 고려수군을 감당할 수 없어 왜구가 이로부터 차차 사라지게 된 것이다. 5. 공신에 대한 역사의 푸대접
이성계가 고려조를 전복하고 조선왕조를 창건하기 위한 혁명을 모의하는 과정에서 최무선에게 가담할 것을 간청하고 또 그가 만든 화약과 화약무기를 쓰게 해 달라고 애원하면서 장래 큰 벼슬을 약속하다든지 돈으로 유혹했으나 이를 단호히 거절했으며 조선 건국후 이태조가 최무선에게 벼슬하기를 요청했으나 이 또한 거절했다. 이태조가 두차례나 최무선에게 간청한 것에 대해서 "나는 다만 우리 고려조와 나와 같은 땅에 살고 있는 겨레 형제들을 위하여 외세의 침략과 약탈로부터 수호하기 위해 쓰일 화약이나 화약무기를 만들뿐이며 돈이나 벼슬을 하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니 그만 헤아려주시오"하고 겸손하게 거절했다. 또 "이 화약과 화약무기는 어느 개인의 영달이나 목적을 위해 사용할 수 없고 사용되어서도 안된다"고 말하여 혁명세력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때 이성계의 휘하 장수 한 사람이 "저 사람이 우리의 기밀을 알게 되었으니 혹 누설시킬 우려가 있으므로 처치하는 것이 좋겠다"고 진언하였으나 이성계가 이를 막았다는 일화가 있다. 최무선은 고려말 정치는 문란하고 백성은 왜구의 노략질에 시달리고 있을 때 하늘이 낸 국가의 기둥이요. 30년 왜구를 몰아낸 백성에게는 호국의 별과 같은 인물이었지만 이성계 혁명파에 가담하지 않았다하여 그들의 질시를 사게 됨으로서 고려사난 고려사절요의 열전에서 빠져버렸다. 그뿐만 아니라, 명신록(名臣錄)이나 명현전(名賢全)에서 조차 그의 공훈을 아예 깍아버리거나 무시해버렸다. 그의 업적과 비교하여 참으로 미미한 인물까지 명신록에 올라있는데 최무선에게만 이토록 푸대접을 했다. 심지어 현대에 와서 1994년 고려숭의회(高麗崇義會)에서 발간한 여말충의열전(麗末忠義列傳)에서 조차 최무선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현대 사학자들조차 최무선을 모르고 있는지 이해가 안되며 한편으로는 그 후손들의 활동도 미약하여 위대한 조상의 업적을 햇빛보게 못한데도 한몫의 원인이 있다하겠다. 화통도감은 우왕 3년(1377년) 10월 최무선의 건의에 의하여 조정 안의 정식 관청으로 설치되었다가 11년 후인 창왕 즉위년(1388년) 8월에 당시 대사헌 조준의 시무상소에 의하여 철폐되고 군기시로 통합되었다. 철폐이유로서는 용관도태(冗官陶汰:불요불급한 관청기구의 폐지)로서 경비절약과 관기확립을 들고 있으나 이것은 표면상의 이유일 뿐이다. 그 당시 고려의 실권은 이성계 혁명세력에 넘어가고 있는 시점이라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었는지도 의문이다. 대집단의 왜구는 격멸하였다고 할 수 있으나 소규모의 왜구는 산발적으로 출몰하고 있어 백성의 피해가 속출하고 있었으므로 화약무기의 필요성은 감소된 것이 아니었다. 그 기구를 병기시에 병합 운영해서도 지장이 없을 거라는 주장이기는 하나 독립기관에서 타기관에 부속된다 함은 그 비중이 감소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조선 초기 화약과 화약무기의 보유량이 격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태종 1년(1401년)의 통계를 보면 화약은 겨우 6근 4량, 가궁 200여장, 중, 소 화통 200여개에 불과하였다. 최무선이 관직에서 물러나 와약과 화약무기 제조에 종사하지 못한 불과 13년 동안에 이렇게 빈약해진 것이다. 이성계의 혁명세력은 자기들의 일에 거추장스럽거나 방해가 되는 인물은 가차없이 내쫓거나 유배를 보내거나 아니면 죽음을 내리는 무자비한 숙청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최무선은 이러한 불행에는 휘말리지 않았다. 하지만 화통도감 폐지는 혁명세력과 최무선의 갈등에서 빚어진 결과라고 보여진다. 그 동안 고려조는 망하고 조선조가 건국되었다. 태조 이성계는 최무선이 혁명에 가담하지 않은 것은 서운하였지만 인물이 아깝고 그가 세운 공로를 잊지않고 태조 2년(1393년)에 그에게 정헌대부 검교참찬문하부사(檢校參贊門下府事)란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그는 '고려조에 충성한 사람이 어찌 조선조에서 벼슬을 하겠느냐'하고 이를 사양하여 받지 아니하고 고려 유신(遺臣)으로서의 충절을 지켰다. 그는 태조 4년(1395년) 봄 3월에 70세를 일기로 파란 많고 오직 호국의 일념으로 살아온 이 시대의 영웅, 나라의 큰별이 숨을 거두었다. 태종 1년(1401년) 11월에 최무선을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우정승 판병조사 영성부원군(大匡輔國崇錄大夫 議政府右政丞 判兵曹事 永城府院君)의 벼슬과 작호를 추증하여 생전의 큰 공훈을 기리고 높여 충성하는 본보기로 삼게 했다. 이것은 태종이 화약무기를 확충 개발시킬 필요가 있었기에 그의 아들 최해산을 발탁 군기시 주부(主簿)로 등용하였다. 고려말 왜구 토벌에서 우왕 2년(1376년) 최영 장군의 홍산대첩, 우왕 6년(1380년) 8월의 최무선 장군의 진포대첩, 동년 9월의 이성계 장군의 황상대첩, 우왕 9년(1383년)의 정지 장군의 남해관음포대첩이 있는데 이것을 왜구격멸 4대첩이라 일컫는다. 여기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의 관음포대첩의 기록이 내용도 약간 다르지만 석연치 못한 점이 발견된다. 고려사의 정지열전에는 화포를 쏴서 적선 17척을 불태웠다(發火 焚賊船十七 )는 기록은 있으나 최무선장군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관음포대첩의 주장은 정지장군이나 화포를 사용하여 대첩을 거둔 것은 바로 포사격 지휘를 맡은 최무선 장군이다. 최무선의 그 위대한 공적이 당시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우선 권근의 찬양시를 분석해보자. 첫 구절에 명공재략응시생(明公才略應時生)한 것은 최무선의 재략이 아니었던들 30년간이나 시달려온 왜구를 소탕할 계책이 조야를 막론하고 아득했을 것이다. 그러니 그가 이땅에 태어난 것은 참으로 때맞추어 출생하였다고 한 것 같다. 바로 그 뒤 구절인 삼십년왜일일평(三十年倭一日平)은 30년간 시달려온 왜구의 피해를 하루에 평정했다고 하였다. 조금 과장된 표현이다. 이미 전술한 바와 같이 그 뒤에도 몇 번의 왜구토벌의 싸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거나 권근은 최무선의 공은 당시 어느 누구보다 더 위대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최무선의 공이 너무 위대하여 만세에 이르도록 전해질 것이며, 세상을 덮을 공은 햇빛과 같이 온누리에 펴질 것(豊烈自今傳萬世 蓋世功名如日鋪)이라 하였다. 고려의 공신들의 초상화를 능연각에 걸어서 현창기념하는데 그 중에서도 최무선의 초상화가 다른 공경대부보다도 으뜸이라고 하였다. 능연도화관제경(凌煙圖畵冠諸卿)이 이것이다. 그리고 공신의 집안은 영구히 단절시키지 않는다는 약속인 영원한 서약을 어찌 기대하지 않겠는가(永誓豈惟期帶礪)라고 한 것을 보면 고려의 충신 훈신 영웅들이 많지만 권근은 이들을 다 능가하는 공적이라고 찬양한 것이다. 세종실록의 세종 12년 4월 초에 병조참의 박안신(뒤에 이조판서로 예문관대제학을 겸임)의 상소문에는 정지, 최무선, 나세 등의 이름이 오르고 있으며 우리 측은 병선 10척으로 출격하였는데 적은 수가 많고 아군은 수가 적어서 형세가 불리하였으나 화포를 쏘아 적을 대패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역사는 승자의 전유물인가? 조선초 고려사 편찬때 조선건국의 전말을 합리화하는 방향에서 엮었다고 하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정사(正史)에서 최무선의 기록을 빼버리거나 있어도 간략하게 하여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진실한 내용을 잘 모르도록 만들어 놓았다. 태조와 태종은 최무선의 재주와 기술, 그 공적이 아까워 벼슬은 내렸지만 자기 왕조 창건에 동조하지 않은 것이 서운하여 가장 중요한 그의 공훈 기록을 사서에 올리는 것을 소홀히 하였고 그 뒤 역대 왕과 중신, 사가(史家)들이 더욱 푸대접을 하였는바 그들의 정의감이나 양심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지리지인 동국여지승람과 신중동국여지승람은 그 기록이 자세치 않으면 그 근거와 의미를 상실한다. 여기도 살펴보면 편파적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여말 왜구격멸 4대첩 중 최영장군의 홍산대첩과 최무선 장군의 진포대첩의 기록은 찾아볼 수 없는 반면 이성계장군의 황산대첩과 정지장군의 관음포대첩은 크게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6. 최무선의 공훈을 재조명 현양(顯揚)해야한다.
최무선은 이성계 혁명세력 일파와의 갈등으로 고난과 역경을 딛고 전생애를 바쳐 이륙해 놓은 화통도감의 폐지와 아울러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도 화약제조법과 화포제조법 등의 책을 저술하였다. 이것이 화약수련지법(火藥修鍊之法)과 화포법(火 法)이다. 또 화포를 쏴서 적을 섬멸한 그림을 그렸는데 이를 용화포섬적도(用火 殲賊圖)라고 한다. 그가 집필을 시작한 때 그의 나이 이미 64~5세쯤으로 그 당시로서는 상노인이었다. 그러나 자기 사후에는 누가 이 일을 알아차려서 할 것인가? 데리고 있는 기술자나 종사원도 알기는 하지만 부분적인 전문가는 될지언정 종합적인 설계라든지 제작에는 어려움이 많으며 문헌 없이는 위험성이 많은 화약과 화약무기를 만드는 것은 지난한 일이라 생각되었다. 그는 노년의 건강을 걱정하는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저술에 몰두하여 집필을 시작한 지 6~7년만에 나누리를 짓게 되었다. 최무선이 숨을 거두기 직전에 한 권의 책을 그의 부인에게 맡기며 "내 아들이 장성하면 이 책을 내어 주시오"하고 유언하였다. 그의 아들 최해산이 나이 열다성이 되어 글을 알게 되자 그의 부인은 이책을 아들에게 꺼내주었다. 최해산은 아버지의 거룩한 뜻을 받들어 열심히 공부하고 익혔다. 태종 1년(1401년) 당대의 대학자 권근의 추천으로 군기주부(軍器主簿)에 등용되었다함은 전술한 바 있다. 성종 18년(1487년) 8월 최무선의 증손인 어모장군 최식(崔湜)이 임금에게 상서하면서 집에 보관하던 화약관계서적과 용화포섬적도를 바쳤다는 기록이 있는데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조선조의 신하 중에 최무선의 공적을 찬양하고 그 자손을 관직에 등용할 것을 주장한 사람도 더러 있다. 정이오는 대제학을 거쳐 찬성사에 이른 학자로서 태종 17년(1417년)에 군기시 화약고기(火藥庫記)를 쓰는 가운데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진포에서 최무선이 처음으로 화통과 화포로서 우레와 벼락같이 쳐서 그들의 혼을 뺏고 간담을 서늘하게하지 않았으면 그 완악하고 사나운 것을 쉽게 굴복시키지 못하였을 것이다. 30년동안 왜구의 침략을 당하였음에도 태평을 유지하게 된 것은 다른 힘이 아니고 여기에 있었던 것이니 참으로 힘 쓸 바를 안 분이다'고 하고 또 '옛날에 나라에 공로가 있으면 사당을 세워 향사를 하였는데 공로가 이렇게 크고 영원불멸의 위훈임에도 향사를 하지 않음은 명시의 궐전(明時闕典) 즉 밝은 시대의법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강조하고 최무선을 향사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가납되지 않았다. 양성지는 대사헌을 거쳐 대제학에 이른 학자로 세조 2년(1456년) 집현전 직제학으로 있으면서 임금께 상소하여였다. '신라때부터 단지 포석(砲石)의 제조만 있었고 역대로 화약의 법이 없었는데 전조(고려)말에 최무선이 처음으로 원나라에 가서 화포제조법을 배워 가지고 돌아와 그 기술을 전하니 지금은 군진(軍鎭)에서 사용하여 이로움이 말할 수 없습니다. 최무선의 공은 만세토록 백성의 해를 제거한 것이고 문익점의 공은 만세토록 백성에게 이로움을 일으킨 것입니다. 어찌 백성들이 이 두 사람으로부터 입은 은택이 적다할 수 있겠습니까 고향에 사우(祠宇)를 세워 춘추를 고을원에게 명하여 제향을 올리게 하고 그 자손을 공신의 자손이라 칭하여 죄가 있으면 용서하고 관직에 등용할 것을 건의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최무선과 같이 살던 동시대인이나 후세에 살았던 사람까지 그의 공을 찬양하고 향사를 주장하였으며 또 그 자손의 관직등용을 주장하고 있으나 최해산을 등용한 이외 사당 건립과 향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세조때 양성지의 상소는 아무 것도 받아들여진 것이 없다. 조선 왕조의 편파적인 사필이 최무선의 공적을 왜곡하고 까뭉개서 햇빛을 보지 못하였다. 이것은 우리 국민 즉 세상 사람들이 그의 공적을 잘 모른다는 것이 극명한 증좌(證左)이다. 30년간 치성했던 왜구는 해마다 3도(전라, 경상, 충청)를 침범하여 해안에 가까운 지방은 곡식이나 물건을 빼앗고 사람을 죽이고 집을 불태우는 만행을 자행하였는데 당하지 않은 곳이 거의 없었으며 종국에는 이들 해안지방에는 사람이 살지 않아 한때 텅비어 쓸쓸한 상황이었다. (入冠下三道 屠燒沿海州郡殆盡 三道沿海州郡蕭然一空) 이러한 왜구를 최무선은 무찌르기 위해 평생을 바쳐 화약을 발명하고 또 이것을 사용하여 적을 무찌를 수 있는 화약무기 즉 화포, 화통을 고안 제작하고 왜구는 바다로 오기 때문에 병선을 개량해서 화포를 장착할 수 있는 큰 군함을 만들었으며 여기에 포사격을 지휘할 전술지휘관인 원수로 출전하여 진포대첩을 거둔 것은 1인 4역을 한 공훈인 셈이다. 우리 역사상 이같이 빛나는 공적일진데 그 전적지(군산)에 대첩비 하나쯤 세워 그 따을 사적지로 지정 보호 관리함으로서 우리 국민의 가슴에 자긍심을 심어주고 후손들의 교육의 장으로 화용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문익점의 목화시배지는 저웁에서 사적지로 지정하여 보호관리하고 있다. 지금은 조선왕조시대가 아닌데도 이러한 위대한 선현이요 공신을 언제까지 어두운 역사의 장막 뒤에 묻어둘 것인가? 최무선은 죽는 날까지 왜구의 침략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고심하고 나라의 미래에 화약무기가 계속 발전하도록 저서까지 남김으로서 나라와 백성을 사랑하는데 헌신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일생을 통한 창의적인 정신과 꾸준한 노력과 불굴의 투혼을 받아서 우리들이 지금 절실하게 필요로 하고 있는 지술자립의 의지를 확고히 해야하며 세계화한 과학기술의 무한경쟁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산 교훈이 되고 있는만큼 그의 공적을 발굴 재조명하고 현양(顯揚)해서 오늘의 호국의 얼로 삼아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