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18년 건국한 백제의 첫 서울은 한강의 남쪽 유역, 그리고 왕성은 위례성, 지금의 풍납토성입니다.
둘레 3.5㎞. 폭 43m. 높이 11m의 풍납토성.
한국고대 성곽 전문가인 대전 한밭대 심정보 교수는 풍납토성을 쌓는데 투입된 흙의 총량은,
1.5t 트럭 13만대 분량인 226만 6천t이라는 연구결과를 내놓았습니다.
풍납토성 전체를 쌓는데 투입된 총 연인원은 445만명,
기원전 1세기에 축조를 시작한 풍납토성은 백제라는 절대 왕권의 산물이며,
475년 개로왕 때 고구려 장수왕에 의해 풍납토성이 함락되고 만 493년 동안의 백제를 우리는 한성백제라고 부릅니다.
1392년에 건국한 조선의 서울[首都]은 서울,
1910년 한일합방으로 조선 왕조는 무너졌으니 조선의 서울은 518년간의 역사를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서울은 한성백제의 역사와, 조선의 역사를 합쳐 천 년 고도(古都)의 유서 깊은 터전입니다.
9월 6일, 한성백제박물관 강당에서 <2011년 한성백제아카데미> 첫 강좌를 들었습니다.
출석부(?)에 서명하고 강당에 들어온 사람들이 자리를 채운 것을 보니 1회당 300명이 거의 다 들어온 양 대성황입니다.
청년층에서 노년층까지, 여성들도 많고 그야말로 남녀노소 다 망라해서 역사에 대한 큰 관심 새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속한 <위례역사문화연구회> 회원들도 여기저기 눈에 띄고, 동지들이 많으니까 마음 든든, 흐뭇합니다.^^^
<2011년 한성백제아카데미>는 천년 고도 서울의 재조명 사업의 일환으로 추진 중인 한성백제박물관이 4월 개관에 앞서,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한성백제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한성백제박물관 홍보와 아울러 박물관의 사회교육적 기능을 다하려고 서울시민을 대상으로 마련한 교육강좌입니다.
* 교육의 주제는 [서울과 백제, 2천 년 고도 여행],
* 기간은 2011. 9. 6 ~ 12. 20 (총 15회), 매주 화요일 : 14:00 ~ 16:00 (2시간)
* 인원은 회당 300명, 총 4,500여명
* 강의 주제는,
1. 서울과 백제―다시 찾은 백제 역사, 한성시대(김기섭) 2. 서울의 선사문화(신숙정)
3. 마한과 백제 (권오영) 4. 백제의 건국)―설화와 역사(양기석)
5. 한성백제의 도성―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형구) 6. 백제의 영토확장과 지배(노중국)
7. 한성백제인의 식생활문화(김상보) 8. 백제인의 집짓기(김왕직)
9. 백제 복식의 창조력과 아름다움(박선희) 10. 한성백제의 사상(조경철)
11. 백제의 고분문화(이남석) 12. 한성백제의 철기 문화(이남규)
13. 한성백제의 대외관계(신형식) 14. 고구려 보루가 아차산에 있는 까닭은?(최종택)
15. 웅진·사비시대 백제 흥망의 역사―중국과의 관계를 중심으로(양종국)
* 이형구 교수님과 함께.
백제의 역사적 자료는 주로 우리나라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일본의 [서기], 중국의 [삼국지 위지 동이전] 등이며,
여러 가지 원인으로 해서 아주 적습니다.
따라서 백제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여 발표하는 학자들의 강의는 현장에서 직접 해설하는 우리들에게는 귀한 자료가 됩니다.
첫날 강의 주제인 <서울과 백제 ― 다시 찾은 백제 역사>를 발표한 김기섭 한성백제박물관 전시기획팀장은,
" 서울에서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을까? "라는 문제부터 시작하여 백제의 건국과 왕성인 하남 위례성을 쌓아 국가의
체제를 갖춰 나가는 과정을 여러 사료를 근거로 설명한 후, 한성백제박물관의 전시구성에 대해 자세하게 소개했습니다.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석촌동 고분군 등 백제한성기의 핵심 유적, 유물을 체계적으로 보존, 관리하고 수도 서울의 2천 년
역사를 재조명하고, 문화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건립한 한성백제박물관은 3개의 상설 전시관을 운영하는데,
구석기부터 청동기까지 백제의 여명으로 보여주는 제1전시실 .
BC18년부터 AD475년까지 493년간 백제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국력이 가장 강했던 시기의 문화를 의식주와 종교,
사상을 연출하는 제2전시실.
475년 서울을 빼앗기고 도읍을 공주로 옮긴 후의 백제의 모습과 서울에 있었던 고구려, 신라의 지방문화를 소개하는 제3전시실.
풍납토성이 하남 위례성이라는 결정적 증거를 '발견'한 선문대의 이형구교수('발견'이라는 단어를 강조했습니다.)의 생생한
발굴에 얽힌 이야기는 그의 '화형식[火刑式]' 장면을 담은 사진도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생명의 위협까지 감수하며 위례성의
정체를 밝히려고 하는 한 고고학자의 결연한 의지를 보는 감동이었습니다.
학문에서는 역사의 증인이지만, 풍납동주민에게는 죄인이 된 그는 풍납토성과 석촌동 고분 사이로 도로를 내는 것을 한사코
막아낸 문화재 지킴이의 선두에 선 분이라 강연 내내 감회가 색달랐습니다.
"서울 지역의 구석기문화는 기원 전 1만년, 신석기문화는그 후부터 1500년전이라고 산술적으로 구분할 수 있지만,
토기가 만들어진 때부터를 신석기문화로 보면 된다." 는 신숙정 한강문화재연구원의 설명이 기억에 남았습니다.
또, "도토리를 채집하고 물고기와 조개를 잡고 사슴을 사냥하고 좁쌀과 기장 농사를 지었는데,
곡식은 흙냄새가 많이 나서 밥을 짓지 않고 시루에 쪄서 먹었을 것이다."는 추정이 쉽게 납득되었습니다.
한신대학교 권오영교수, 경당지구의 발굴을 통해 풍납토성이 왕성이라는 추정을 가능케 한 공로를 세운 분입니다.
큰 구덩이에서 나온 말머리뼈 9개, 교실 3개 반 넓이를 가진 여자형 건물지, 우물 한 곳에서 주둥이가 깨진 항아리와 병만 215개.
모두 백제 왕궁에서 거행된 제례의식의 결정적 증거를 발굴한 그는 강의 도중 " 앞으로 토목공학을 배울 예정이다."라고 밝혀
역사적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새로운 학문을 익히려는 의욕을 보여 주었습니다.
백제인들이 무엇을 먹고 살았을까?, 대전보건대학교 김상보교수의 강의도 흥미진진했습니다.
아프리카가 원산지인 벼가 어떤 루트로 우리나라로 들어왔는가, 쌀과 민물고기를 합쳐 만든 식해, 그리고 조기 상어 숭어로
젓갈을 만들어 먹었는데 그 때의 이름은 '축이'. 김치와 술의 제조법을 일본에 전한 수수허리는 일본의 주신[酒神]이 되었고,
귀족층은 쌀밥 + 된장국 + 김치를 한 상에 올려 먹었고,
참기름을 머리에 발라 사랑하는 사람을 유혹했다는 멋진 이야기가 기억에 오래 남았습니다. ^^^
백제인들은 어떤 집에 살았을까 ?, 명지대 건축학부 김왕직교수의 강의도 관심을 끈 주제였습니다.
모계사회일 때는 동굴이나 막집에서 살았고, 부계사회일 때는 움집에서 살면서 농사를 짓기 시작했으며,
점점 취락을 이루고 성곽을 짓고 안전하게 살게 되었다는 발전 과정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집은 4각형, 5각형, 6각형, 여자형, 철자형 등등 여러 형태였지만, 대부분 땅을 파고 기둥을 박은 움집 형태였습니다.
하층계급(70%)은 4각형(장방형집)에서 살고, 중산층(20%)과 귀족층(10%)이 6각형집에서 살았다는 통계가 재미 있었습니다.
백제인들은 어떤 옷을 입고 살았을까?
상명대학교 박선희교수의 주제가 있어야만 비로서 백제인들의 필수요소 <의식주[衣食住]>가 온전할 수 있습니다.^^^
중국의 황하문명보다 한발 앞선 고조선의 홍산문화가 우리 문화의 중심이라는 내용이 청중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특히 금관과 갑옷의 원조는 우리나라인데 신라 김춘추의 중국 복식 도입으로 금관이 사라지게 되었다는 사실과,
고조선의 실크는 색과 문양이 다양하여 백제인들이 입었던 옷은 단조로운 백의[白衣]가 아니라,
물들인 옷감으로 옷을 많이 해 입었다는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붉은 옥으로 목걸이를 만들고 귀걸이도 만들었으며,가죽과 모직물,마직물,사직물, 면직물 등 중국보다 앞선 직조술로 옷감을
짜 입었으며, 관모와 갑옷에 대한 역사적 사례를 근거로 한민족의 우수한 문화를 가늠할 수 있었습니다.
최종택 고려대교수가 던진 질문,
" 고구려 보루가 아차산에 있는 까닭은? "은 고구려와 백제의 전쟁 이야기가 깔려 있어 재미 있었습니다.
또, 몽촌토성을 발굴하다 발굴한 고구려 토기 하나가 인생의 진로를 바꿔 놓게 된 사연과,
고고학은 막노동자의 자세로 하는 학문이라는 우스갯 소리도 박수를 받았습니다.
깨진 항아리 하나가 이상해서 한 달 동안 밤샘을 하며 깨진 조각을 붙여 보니 긴 목과 나팔처럼 벌어진 아가리를 특징으로 하는
고구려 토기, 이름하여 나팔입항아리, 그 당시 남한에서 출토된 유일한 고구려 토기로 밝혀지면서 구의동 유적이 고구려
보루임을 밝혀내는 큰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는' 희한한' 이야기였습니다.
이제까지 고분만 1,100기를 발굴했다는 공주대 사학과 이남석교수는 무덤 자리가 명당 자리라고 단정하였습니다.
죽은 이가 믿는 신에 따라 묘제[墓制]가 결정되며, 무덤은 사람들의 사후세계에 대한 인식이라는 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백제 고분을 크게 토장이냐 화장이냐로 나눈 후, 토장은 적석이냐 봉토냐 횡혈이냐, 축조 재료는 돌이냐 흙이나 목재냐, 옹관이냐
벽돌이냐 흙이냐 항아리냐 등 18가지 유형으로 분류한 점이 알아 듣기 쉬웠습니다.
<2011 한성아카데미>는,
백제사람들이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었느냐 하는 단순하면서 중요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구하는 강좌였습니다.
나는 15강좌 중 <장미축제>와 <팸투어>해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두 번 빠졌지만,
박물관 홈피에 있는 동영상으로 강의를 들을 수 있어 15강좌 모두를 수료한 셈이 됩니다. ^^^
좀처럼 만날 수 없는 귀한 강좌라서 매번 맨 앞자리에 앉아 요점도 적고 사진도 찍어가며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9월 첫 주에 시작하여 12월의 네째 주에 강좌를 수료하니 가을 겨울 두 계절이 어느 새 지나갔습니다.
이제 봄이 오면 탐방객들에게 좀더 깊이 있고 재미 있는 해설을 들려줄 수 있을 것 같아 기다림의 시간만 남았습니다. ****
첫댓글 선생님의 글 읽는 것만으로도 현장감이 넘처서 기쁩니다.
감사하고 소중한 글 자랑 스럽습니다.
건강한 모습 뵙는듯 즐거운 시간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