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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24. 묵상글 들 ( 부활 제2주간 금요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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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24.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님. 부활 제2주간 금요일 .
오늘의 묵상
사도들의 복음 선포에 최고 의회 의원들은 분노합니다.
첫 번째 심문에서 위협하는 정도로 그쳤던 의원들이, 이제는 사도들을 없애 버리려 합니다.
그러나 아직 순교의 차례가 오지 않았습니다.
온 백성에게 존경받는 율법 교사 가말리엘이라는 바리사이가 지혜로운 말로 광포한 의원들을 달래면서 사도들은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납니다.
기원 전후 무렵 자유주의적인 견해와 관용적 태도로 유명하였던 율법 학자 힐렐의 손자로서,
바오로 사도의 스승이기도 하였던 가말리엘은(사도 22,3 참조),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주관하시므로 그리스도인들을 내버려 두자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움직임이 인간적인 것에서 비롯되었다면 그 자체로 사라져 버리겠지만,
하느님에게서 시작되었다면 의회가 결코 없앨 수 없으며, 어쩌면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것이
하느님께 맞서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최고 의회가 온갖 노력을 기울여 예루살렘의 첫 교회 공동체를 막았지만, 급속히 성장하였습니다. 사도들의 복음 선포에 대한 열정에서 비롯하였음이 틀림없으나, 더욱 분명한 힘은 사도들에게 주어진 성령입니다.
복음 속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을 살펴봅니다.
물론 한 아이가 가지고 있던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와 사도들의 남다른 활동도
기적의 재료와 도움이 되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늘을 우러러 감사 기도를 바치시며
아버지 하느님의 일을 행하신 예수님의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자, 사도들은 스승을 주님으로, 메시아로 담대하고 열정적으로 선포하고 증언하였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더욱 이기적이고 물질적인 세상에서 예수님을 선포하고 증언하는 것을 막으려는 온갖 악에 맞설 수 있도록 담대함과 열정을 허락하시는 성령께 온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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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24.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부활 제2주간 금요일
오늘 미사의 말씀은 "기적"을 이야기합니다.
"마침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요한 6,4).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빵을 많게 하신 기적 이야기의 시간적 배경을 파스카와 연결시킵니다. 이로써 우리는 이 기적이 단순히 물리적으로 빵의 양을 증가시켜 그곳에 있던 군중을 먹이신 일로 끝나지 않고, 예수님께서 당신 몸을 이 세상에 양식으로 내어주실 희생 제사로 승화되리라는 것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요한 6,9)
참으로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파악입니다. 장정만도 오천 명이라니 소량의 빵과 물고기로 군중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없음은 자명하지요. 그런데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우리는 숫자와 데이터에 둘러싸여 살아갑니다. 어느 선까지는 상황을 파악하고 분별하는데 도움이 되지요. 문제는 이 현실적 데이터가 쉽사리 우리를 회의와 실망, 포기로 끌어가기도 한다는 점입니다. 숫자나 데이터에는 숨은 희망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빛을 잃고 지치고 절망합니다. 자신의 초라함과 우리의 한계와 해결해야 할 과제의 거대함에 짓눌려 지레 주저앉습니다. 필립보처럼, 안드레아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요한 11)
하지만 예수님은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니다. 적은 양이지만 아버지 앞에 펼쳐놓을 양식이 있고, 또 그것을 내놓은 순박하고 용기있는 아이가 있으니까요. 무엇보다 아버지의 사랑과 능력을 체험할 제자들과 군중이 있습니다. 감사할 일은 넘치고 또 넘칩니다.
"사람들이 보리 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요한 6,13).
군중은 "원하는 대로"(요한 6,11) 양식을 받아서 배불리 먹습니다. 그런데도 엄청난 양이 남았다고 하네요. 사실 사람은 본성상 잉여분을 챙기고 싶어 합니다. 내일의 양식을 기약할 수 없는 가난한 이들도 그렇지만, 부자들도 가진 것을 더 불리고 싶어하니까요.
"억지로라도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요한 6,15)
그런데 군중은 빵을 더 챙기지 않는 대신 빵을 많게 할 능력을 지니신 예수님을 소유하려 듭니다. 그분이 임금이 되시면 더 이상 양식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았나 봅니다.
제1독서에서는 사도들에게 일어난 기적이 나옵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사도 5,41)
불신과 회의에 익숙했던 제자들이 예수님 때문에 박해받을 수 있음을 영광으로 여기게 된 변화야말로 큰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보잘것없는 소유에 실망하던 그들이 스스로 보잘것없이 작은 자가 되어 모욕 당하기를 기뻐하는 이로 변모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임금이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파스카의 밤을 통과한 것입니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화답송)
주님 때문에 겪는 수치와 모욕과 업신여김을 받아들이는 이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따라 죽기를 영광으로 여기는 이를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지요. 사도들은 이제 예수님과 함께 "먹히기 위해" 세상에 자기를 내놓는 존재로 굳건히 서게 됩니다.
사랑하는 벗님! 매일 빵의 기적에 참여해 주님을 모시는 우리도 그 기적에서 멀리 있지 않습니다. 파스카의 밤을 지나 부활하신 주님처럼, 부활의 증인이로 우뚝 선 사도들처럼 우리도 변화되기를 청합시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면 누구도 막을 수 없으니, 회의와 불안과 실망의 장막을 걷어버리고 감사하며 나아갑시다.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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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24.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부활 제2주간 금요일>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요한6,8)
'빵의 기적!'
'나눔의 기적!'
요한6,8의 말씀은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예수님께 말한 말씀입니다.
그의 말처럼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는 상황 앞에서 오병이어(五餠二魚)는 너무 초라해 보입니다. 아무 소용이 없어 보입니다.
소용이 없어 보이는 이 초라한 것에 예수님께서 개입하시니, 그것에 예수님의 마음이 들어가니 많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가득차게 남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오병이어의 기적'은 하느님께서는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분이시라는 것과 예수님과 함께하면,
곧 우리가 하는 모든 움직임에 예수님의 마음을 담으면 우리도 기적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배불리 먹은 것은 분명 기적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런 기적이 가능했을까?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께서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빵의 기적'을 이렇게도 묵상해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 그들 마음 안에 예수님의 마음이 들어가 저마다 가지고 있는 것을 다 내어 놓았고, 내어 놓은 것을 함께 나누어 먹고 남은 '나눔의 기적'으로.
그렇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는 모든 움직임에 예수님의 마음을 담으면 우리도 기적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 앞에 자주 등장하는 크고 작은 불편함이나 고통도 나에게 이로운 것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오늘 독서에 나오는 사도들처럼.
하지만 아무리 작은 것, 곧 무심코 던져지는 말이나 작은 행동 하나에도 예수님의 마음을 담지 않으면 나의 마음도 아프고, 너의 마음도 아프게 합니다. 나아가 더 큰 아픔을 낳기도 합니다.
오늘도 많은 생각과 말과 행위가 일어날 것입니다. 내가 하는 모든 움직임에 예수님의 마음을 담도록 합시다!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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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24.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부활 2주 금요일-가말리엘에게 영적 식별을 배우다.
오늘 사도행전에서 가말리엘의 말을 읽고 묵상하다가
가야파와 가말리엘을 비교하며 가야파가 아니라 가말리엘이
대사제였다면 예수께서 죽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대사제 가야파는 예수님 문제를 처리하면서
백성 전체를 위해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낫다는 논리로
예수님을 죽여야 한다는 결정을 끌어낸 사람이 아닙니까?
가야파의 생각은 정치지도자라면 아주 합리적이고도 현명한 생각이지요.
그렇잖아요? 여러 사람이 죽는 것보다 한 사람이 죽은 것이 좋고,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민족을 위해 한 사람이 희생되는 것이 좋지요.
그러나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생각할 때 그리고
그가 대사제라는 것을 생각할 때 그는 크게 잘못한 것이지요.
정치가라면 모를까 대사제라는 사람이 하느님의 뜻이 무엇일까 생각지 않고
인간적으로 그것도 정치적으로 생각하였으니 이 얼마나 큰 잘못입니까?
이런 가야파와 비교할 때 가말리엘은 우리 신앙인의 모범이고,
특히 영적 식별의 본보기를 잘 보여 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가야파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신앙인이냐 아니냐는
사실 영적 식별을 하고 사느냐 않느냐에 있습니다.
내가 지금 가고 있는 것이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인지,
내가 지금 가고 있는 것이 하느님께로 가고 있는 건지 세상을 헤매고
있는 건지 식별치 않고 가고 있다면 무슨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하느님의 뜻인지 아닌지 생각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면 어찌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저의 경우 다행스러운 것은 작은 일은 생각 없이 그러니까 무의식적으로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하지만 큰일을 앞두고는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는데
이때 하느님 뜻을 식별하면서 오늘 사도행전의 가말리엘을 본보기 삼습니다.
장상이 소임을 주거나 형제들이 선출한 경우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 경우 저는 무조건 그 소임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믿습니다.
문제는 내가 하려고 하는 일들인데 내가 하려고 하는 일도
안 좋은 일 또는 악한 일일 경우에도 문제가 안 됩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좋은 일이 생각났을 때 그것이 하느님에게서 온 것인지,
알량한 내 머리에서 나온 것인지 이때가 문제이고 식별이 필요한 때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시작한 많은 일들, 지금 하고 있는 선교 협동조합이나
과거의 순회 공동체나 북한 선교나 포르치운쿨라 축제와 행진 같은 것인데
이런 것들이 머리에 떠올랐을 때 저는 한동안 괴롭습니다.
이것이 내가 하고 싶은 것이어서 내 머리에 떠오른 것인지
하느님께서 제 안의 성령을 통해 제 머리에 떠오르게 하신 것인지
바로 식별이 되지 않기 때문인데 이 경우 저는 웬만큼 고민하고는
'주님 당신 뜻에 맡깁니다.' 하고는 일을 저질러 버립니다.
나쁜 일 또는 악한 일이 아니기에 일단 저지르지만
그 일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형제들을 통해 그 일이 지속되겠지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아니라면 얼마 안 가서 망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사도행전에서 "저들의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말한 가말리엘에게 배운 것이고,
저의 확고한 믿음입니다.
요즘도 저는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 선교의 집>에 작업장을 만들고 이주민들과 우리 조합원들이
함께 일도 하고, 기도도 하고, 밥도 먹는 공동체 생활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함께> 하는 것인데
지난주 독서에서 읽었듯이 함께 모여 기도하고 빵을 나누는 삶을 살았던
초대 교회 공동체를 재현하려는 것이고 그래서 저는 매일 출근할 것입니다.
그리고 일을 시작하고 해나가면서 식별을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면 <일거리>와 <먹거리>가 생길 것이고
그렇지 않고 시들시들하면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고 판단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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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김레오나르도김찬선 2 시간 전 (200424. 07:30. 현재)
강론에서 말씀드렸듯이 앞으로 저는 <여기 선교의 집>에 특별한 일이 없으면 출근을 해서 선교 공동체 삶을 시작하고 살 것입니다. 같이 모여서 기도하고, 같이 일하고, 같이 빵을 나누는 것입니다. 이 일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되시면 여러분들도 참여해주시기 바랍니다. 직접 와주시면 제일 좋고, 못 오시더라도 같은 지향으로 계신 곳에서 기도해주시고, 일거리를 소개해주시고, 후원도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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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24. 이영근 신부님.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살 수 있겠느냐?” (요한 6,5)- 양주 올리베따노
오늘 <복음>은 이른바 “오천 명을 먹인 빵의 기적” 이야기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공생활에 있어서 분수령이 되는 중대한 사건이었습니다. 상향곡선을 그려오던 예수님의 인기는 이 사건을 정점으로 절정에 달하게 되고, 이후부터는 차차 하향곡선을 그리게 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기적 이야기를 “표징”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곧 오늘 이 이야기가 측은한 마음이 들어 자비를 베푸는 기적 이야기인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생명의 빵”으로서 내어주는 “표징”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관복음>에서는 빵과 물고기를 제자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시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직접 군중에게 나누어 주시면서”(요한 6,11) 당신 자신을 “빵을 주시는 분”으로 계시하십니다. 곧 당신 자신이 “생명의 빵”임을 표징으로 드러내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6,14)이심은 알아보지만, 여전히 “생명의 빵”으로 “자신을 내어주시는 분”으로 알아보지는 못했습니다. 아니, 오히려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정치적, 민족적인 임금으로 삼고자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한 군중과 제자들을 피하여,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십니다.”
오늘 <복음>에는 제자들과 예수님의 차이가 ‘모자람’과 ‘충만함’이라는 대조를 통해서 극렬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시험해보려고 필립보에게 물으셨습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요한 6,5)
“빵”을 사야할 곳이 어디인지를 가르쳐주기 위함입니다. “빵”이신 당신 자신을 옆에 두고서 묻는 질문입니다. 당신 자신을 “빵”으로 내어주시고자 물으시는 질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질문은 우리 자신에게 던져야 할 일입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서 빵을 구하고 있는가?
그런데 필립보는 엉뚱한 대답을 합니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 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질문과는 상관없이 양을 계산하고 ‘모자람’을 계산할 뿐, 빵을 사야 할 곳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안드레아도 “여기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라고 말하지만, 역시 양을 계산하고 ‘모자람’뿐만 아니라 그것이 ‘소용없다’고까지 말합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그는 그것을 “아이”가 가지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가져서 부유하고 힘 있고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이가 아닌, 오히려 보호와 보살핌을 받아야 하고, 주는 것을 받아먹어야 하는 무능력하고 나약한 가난한 ‘아이’가 그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것은 모자라거나 소용없는 것이 아니라, ‘일곱 개’의 ‘충만함’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것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 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 그야말로 모두가 먹고도 남는 “충만함”입니다. 남은 ‘열 두 광주리’는 ‘열두 지파’, ‘열 두 제자’에서 보듯이 하느님 백성 모두를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가 먹기에 충분한 빵이 이미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체성사의 “표징”을 알아들어야 할 일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빵”으로 건네주십니다. 우리는 이미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생명의 충만함을, 사랑의 충만함을 이미 얻습니다.
그러니, 그 안에서 감사와 찬양을 노래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빵으로 내어주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게 나누어 질 때 우리는 진정 충만해 질 것입니다. 아멘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요한 6,9)
주님!
보잘 것 없는 것이라고 하찮게 여긴 저를 용서하소서.
비록 작은 것이라도 무가치하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당신이 저를 그러하듯, 값지고 소중하게 여기게 하소서.
가진 모든 것에 감사하게 하소서!
제 자신에 감사하고, 당신 사랑에 감사하고, 당신의 동행에 감사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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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24. 부활2주간 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께서 빵을 마련해 주셨다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천 명이 먹고도 남았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이해가 되지 않는 일도 믿음 안에서는 가능한 일입니다. 주 하느님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먹고도 남았다’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면 이 이야기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먹고도 남았지만 결국은 때가 되면 또 배가 고플 것이고, 또 먹어야 하는데 그때마다 기적을 베풀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 안에 숨겨진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필립보나 안드레아는 인간적인 계산에 밝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군중의 배고픔에 대한 걱정을 하실 때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하고 말했습니다. 단순한 생각을 그대로 말한 것입니다. 계산이 밝으니 주님을 몰라봅니다. 결국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항상 부족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권능을 믿을 것 같으면 ‘제가 가진 것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모두를 내 놓으니 나머지는 당신이 채워주십시오!’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주님께서는 차고 넘치도록 베푸십니다. 베풀면 베풀수록 베풀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됩니다.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하찮게 보일 수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에 대한 감사를 드렸고 나누었습니다. 필립보와 안드레아가 '이백데나리온 이상'의 세상의 가치에 골몰해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논리로는 이해하지 못할 또 다른 세상의 가치를 보여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은 일을 떠오르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손에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남은 것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습니다. 주님께서는 차고 넘치도록 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은총을 주시는 주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분으로부터 주어진 은총의 결과물에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채워주실 수 있는 분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빵을 많게 한 기적은 곧 성체성사를 통해서 생명의 빵을 끊임없이 제공하시게 되리라는 표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성체이십니다. 살아계신 생명의 빵이십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물질적인 결과물에 매여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하며 억지로라도 임금으로 삼으려고 한 것을 보면 그들의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말은 모세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 이스라엘 백성에게 남긴 말과 연관 됩니다. 이 때 모세는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 동족 가운데에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 주실 것이다"(신명18,15).하였습니다. 바로 그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탈출하도록 한 모세와는 달리 백성을 죄악으로 부터 구원할 메시아이십니다. 예수님은 정치적 해방을 이룬 모세와는 다른 영적 해방자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습니다. 깨닫지 못하는 군중들을 피해 외로이 하느님 곁에 머물렀습니다. 예수님께서 홀로 있다는 것은 곧 ‘하느님 아버지와 같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늘 한적한 곳을 찾으시며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는 곧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확인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적인 계산을 모두 주님께 맡기고 그분의 권능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네가 하는 일을 주님께 맡겨라. 계획하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잠언16,3).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 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시편37,5). 분명한 것은 모든 사람들이 먹고도 남을 빵은 예수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해방, 탈출을 위해 내가 예수님께 내어 놓아야 할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무엇인가?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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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24. 부활 제2주간 금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 ♣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로 오천 명 이상의 군중을 먹이신 이야기는 네 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는데, 공관복음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자비와 권능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요한복음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신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공관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님께서 배고픈 사람들에게 기적의 빵을 주신 일에서
예수님의 신원이 드러난 것으로 기록했고, 요한복음서 저자는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당신의 신원을 드러내시려고 기적을 일으키신 것으로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같은 기적 이야기이지만 세부 사항에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요한 6,5-6).”
여기서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라는 말씀의
뜻은, “사람들을 먹일 빵을 어디에서(또는 ‘어떻게’) 구할 수 있겠느냐?”입니다.
당시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질문의 의도를 몰랐기 때문에 제대로 대답을 못했지만,
오늘날의 우리는 답을 알고 있습니다.
답은 “주님에게서”입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 라는 말의 뜻은,
“예수님께서는 ‘빵의 기적’을 통해서 당신의 신원을 계시하려고
계획하고 계셨다.”입니다.
예수님께서 필립보 사도에게만 질문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제자들 모두에게 질문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계획을 실행하시기 전에 먼저
빵을 어디에서 구할 수 있겠느냐고 제자들에게 물으신 것은,
당신의 계시를(가르침을) 그들이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 라는 말의 뜻은,
“더 깊은 깨달음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하신 질문이다.”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빵’은
영적인 양식과 육적인 양식을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공관복음에는 제자들이 먼저 와서 사람들의 배고픔을 걱정하는 말을 하면서
군중을 해산시키자고 건의했고(마태 14,15; 마르 6,35-36; 루카 9,12),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마태 14,16; 마르 6,37; 루카 9,13).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라는 예수님 말씀은,
교회의 역할, 또 공동체의 사랑 실천을 강조하신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영적 생명의 빵’은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지만,
육적인 빵의 문제는 우리의 ‘나눔’과 사랑 실천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물론 양식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라면 주님께 간청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할 수 있는 일도 안 하면서 하늘만 쳐다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다는 필립보 사도의 말과(요한 6,7)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안드레아 사도의 말은(요한 6,9),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빵의 기적’은
분명히 하느님의 권능으로 일으키신 ‘하느님의 기적’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두 사도의 믿음이 부족했음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또 어떤 아이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내놓은 일에 대해서는,
그 일은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는 훌륭한 일이긴 하지만,
그 빵과 물고기가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시는 것이 가능했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기적은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어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요한 6,14-15).”
여기서 ‘그 예언자’는 신명기 18장 15절에서 모세가 예고한 예언자인데,
유대인들은 그 예언자를 메시아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라는
사람들의 말은, “이분은 틀림없이 메시아시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말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1)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생각했을 뿐이고, 메시아로 믿은 것은 아닙니다.
만일에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다면 예수님의 뜻에 따랐을 텐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 예수님께 자기들의 뜻에 따르라고 요구했습니다.
(생각하는 것과 믿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시며 하느님이시다.” 라고 생각만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는 것은 온 마음으로 받아들여서 삶 전체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시며 하느님이시다.” 라고 믿는 사람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예수님의 뒤를 따르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합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것은, 자신의 온 삶을 주관하시는 분이 예수님이라고
믿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온 삶을 예수님께 맡겨 드립니다.
또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는 것은, 예수님은 온 세상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고 믿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에 순종하게 됩니다.)
2) 그들이 생각하는 메시아는 사람들을 하느님 나라로 인도하는 구세주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세속의 부귀영화를 주는 정치 지도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사실 그 사람들이 원한 것은 임금이 아니라, 임금이 줄 부귀영화였습니다.
그들은 로마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서 독립하는 것도 희망했을 것이고,
로마제국의 하수인이었던 기득권층 사람들을 몰아내는 것도 희망했을 것이고,
강대국을 만들어서 자기들이 행복하게 살게 되는 것도 희망했을 텐데,
그런 희망들은 모두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과는 상관없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과 사람들이 희망하는 것 사이의 불일치는
‘생명의 빵’에 관한 긴 논쟁으로(요한 6,22-71) 이어지게 됩니다.>
(‘빵의 기적’ 이야기를 읽고 나서,
사람들이 배불리 먹었다는 것과 사람들이 먹은 그 ‘빵’만 생각하고,
그 빵을 주신 예수님을 잊어버리면, 성경을 읽은 것이 아닌 것이 되어버립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지금 여기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계시면서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시는 주님이신 분이라는 가르침이 들어 있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은 ‘육신의 배부름’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희망하고, 또 그것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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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24. 부활 제2주간 금요일/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코로나19로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확진 판정을 받아 치료를 받는 분이 있습니다. 환자들을 치료하는 의료진이 있습니다. 코로나19는 또 다른 고통을 주고 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입니다. 미국 정부는 경기부양책을 마련하였습니다. 기업에 무상 원조와 저금리의 융자를 해 준다고 합니다. 개인에게도 일정한 금액을 준다고 합니다. 시민권이나 영주권이 없어도 세금을 낸 사람에게는 준다고 합니다. 코로나19로 인한 경제적인 피해가 크기 때문입니다. 정부의 지원을 받은 기업은 직원을 해고 하지 않아야 합니다. 정부의 지원을 받은 개인은 소비활동을 해야 합니다. 정부의 적극적인 경기부양 정책이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기업과 개인에게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한국에서도 지방자치 단체와 중앙 정부가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기업과 개인에게 도움을 주는 방안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함께 한다면 건너지 못할 강은 아닙니다.
‘석과불식(碩果不食)’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마지막 남은 과일은 먹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마지막 씨 과일은 땅에 심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봄이 되면 새싹이 나고 그렇게 나무는 숲이 되고, 숲에는 생명이 깃들기 마련입니다. 무엇이 마지막 남은 과일일까요? 진흙 속에서도 연꽃이 핀다는 희망입니다. 힘들과 어려운 상황 속으로 달려가는 의료진의 헌신입니다. 가진 것을 기쁜 마음으로 내어 주는 나눔입니다.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하느님의 영광을 먼저 찾는 신앙입니다. 이것이 인류의 문화와 문명을 일궈온 원동력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최고 의회 앞에서 물러 나왔다. 사도들은 날마다 성전에서 또 이 집 저 집에서 끊임없이 가르치면서 예수님은 메시아시라고 선포하였다.” 시련과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는 기회로 여겼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또 다른 석과불식을 보았습니다. ‘측은지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듣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경제적인 논리로 접근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을 먹게 하려면 특별한 경제부양책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200 데나리온은 있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면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빵을 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먹을 것이 있는지 물어보셨습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감사의 기도를 드렸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모여 있던 사람들이 충분히 먹고도 빵은 남았습니다. 재물을 마련해서 빵을 마련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표징을 일으켜서 사람들이 배불리 먹도록 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자비와 연민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을 먹이신 큰 기적을 행하신 후에도 아무 미련 없이 그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셨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곳에 성당을 세우고, 철야기도를 하면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 올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소유하려하지 않으시고, 또 다른 곳으로 향해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기적과 치유의 은사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참된 하느님의 나라는 ‘기적과 치유’를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희생위에서 세워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실한 사람들의 희망과 빛이시오니 간절히 비는 저희를 굽어보시어 맞갖은 기도와 찬미의 제사로 저희가 언제나 하느님을 찬양하게 하소서.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주님, 아드님의 십자가로 저희를 구원하셨으니, 주님 사랑으로 저희를 지켜 주시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에 이르게 하소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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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24.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모든 덕행들의 어머니
-분별력의 지혜-
공동체의 지도자는 물론이고 모든 이들에게 참으로 필요한 덕이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하여 분별력의 덕을 모든 덕행들의 어머니라 칭하기도 합니다.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에게도 참 중요한 분별의 지혜입니다. 배움의 지식은 짧았어도 옛 어머니들의 분별의 지혜은 뛰어났습니다.
저 역시 어머니에 대한 많은 일화가 있지만 두가지 사실은 지금도 생생히, 고맙게 기억하며 세월 흘러 나이 들어갈수록 어머니를 그리워하게 됩니다. 제 어머니는 화를 내거나 매를 든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겨울철 저는 연 만드는 것을 참 좋아해 겨울에 10회 정도는 연을 만들어 띄웠을 것입니다.
어머니 몰래 마실 간 틈을 이용해 만들어 놓곤 했습니다. 어머니는 마실 후 연만든 것을 알아 채신후, “너 또 연만들었구나!” 곱게 눈흘기길뿐 더 이상 말씀하지 않았기에 참 안도감을 느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한창 내적 갈등으로 장기간 결석했을 때도 “너 학교 안가니?” 한마디만 하실 뿐 더 이상 말씀하지 않았습니다만 지금도 고맙게 기억합니다.
사막교부들은 물론 그 후예인 성베네딕도 역시 특히 강조한 것이 분별의 지혜였습니다. 머리가 나쁘면 손발의 고생이 많듯 장상이 분별력이 부족하면 공동체가 많은 혼란과 불편을 겪기 마련입니다.
-‘대 안토니오 압바는 말합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의 몸을 고행으로 혹사시킴으로 고통받고 있다. 그들은 분별력이 부족하다. 하여 그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참으로 하느님의 사람들은 분별력이 뛰어납니다. 분별의 잣대는 사랑이자 겸손이고 하느님께 가까워질수록 사랑과 겸손, 지혜도 함께 하기에 좋은 분별력을 지니게 됩니다. 성 베네딕도 역시 아빠스의 자질로서 분별력의 덕을 강조합니다.
“자기의 명령에 있어서는 용의주도하고 깊이 생각할 것이다. 그 명령이 하느님께 관계되는 일이든 아니면 세속에 관계되는 일이든 분별있고 절도있어야 할 것이니, ‘만일 내가 내 양의 무리를 심하게 몰아 지치게 하면 하루에 죽어 버릴 것이다’하신 성조 야곱의 분별력을 생각할 것이다.
이밖에도, 모든 덕행들의 어머니인 분별력의 다른 증언들을 거울 삼아, 모든 것을 절도있게 하여 강한 사람은 갈구하는 바를 행하게 하고, 약한 사람은 물러나지 않게 할 것이다.”(성규64,17-19)
1500년전의 성 베네딕도는 이렇듯 지혜로웠고 뛰어난 분별력의 덕을 지닌 경이驚異로운 수도승이었습니다. 참으로 수도공동체는 물론이고 모든 공동체의 책임자가 지녀야할 필수적 덕목이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다음 대목 역시 성인의 분별력의 지혜를 입증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 학원을 설립해야 하겠다. 우리는 이것을 설립하는 데 거칠고 힘든 것은 아무것도 제정하기를 결코 원치 않는다.”(성규 머리말 45-46)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의 온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율법교사 가말리엘의 존재가 군계일학(群鷄一鶴), 뛰어난 분별력의 덕을 지닌 이로 드러납니다. 그의 사도들에 대해 해결책을 제시하는 분별력의 지혜가 최고의회의 분위기를 압도합니다.
“이제 내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저 사람들의 일에 관여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저들의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때로 판단이 서지 않을 때는 주님께 맡기고, ‘건들이지 말고 그냥 내버려두고’ 기다리며 지켜보는 것이 분별의 지혜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 역시 분별력의 대가(大家)임이 드러납니다. 오천명을 먹이신 후의 지혜로운 처신입니다.
예수님은 오천명을 먹이신후 군중들의 광적 분위기에 편승하여 경거망동, 부화뇌동하지 않으셨습니다. 참으로 위태한 유혹의 순간이었습니다. 오늘 복음 말미, 군중들의 반응과 예수님의 처신이 참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하신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표징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분별력이 결핍된 무지한 군중들은 예수님을 임금으로 세우려 하자 예수님은 집착없이 산으로 떠나, 영원한 안식처이자 피난처, 정주처가 되시는 ‘하느님 안 제자리’에 머뭅니다. 노자의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라는 말마디처럼 공을 이루면 거기에 머물지 않고 초개(草芥)같이 내버려 두고 떠나는 예수님의 분별력의 지혜와 처신이 참 아름답습니다. 문득 이형기 시인의 낙화落花란 시 첫 연이 생각납니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무욕의 지혜입니다. 일체의 탐욕이나 야심이 없기에 이런 아름다운 떠남의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했기에, 늘 하느님과 함께 했기에, 늘 하느님 안에 머물렀기에 이런 분별력의 지혜란 은총의 선물입니다. 때로 분별이 되지 않을 때는 잠시 주님 안에 고요히 머물러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어제는 가톨릭 교회 역사상 참 각별한 날이었습니다. 코로나 사태로 중단됬던 미사가 두달만에 거행된 날로 많은 분들이 주님 성체를 모실 때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합니다. 저 역시 어제 작심하고 많은 시간을 내어 참 많은 분들에게 수도원 하늘길 십자로 중앙에 위치한 아름다운 배경의 예수님 부활상을 찍어 카톡으로 다음 축복의 기도와 사진을 전송하며 미친듯 사랑을 나누니 얼마나 행복하던지요.
“사랑하는 자매님도 익명의 성녀중 한분이지요. 수도원 예수님 위로와 치유, 평화의 축복인사 받으시고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가장 좋은 분별의 잣대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시고 판단하셨겠나 기도하는 마음으로 찾아 보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에게 분별력의 지혜를 선사하십니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 바라보고, 그분의 성전 우러러보는 것이라네.”(시편27,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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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24. 부활 제2주간 금요일. 굿뉴스. 한결. 03:14 ㅣ No.137758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요한 6,14)
오늘 복음은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오병이어’ 기적사화를 전하고 있습니다.
마태오, 마르코, 루카의 공관복음서들뿐만 아니라 요한 복음서까지도 전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참으로 익숙하고 한 편으로는 중요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예전에는 그런 생각들과 의견들이 분분했습니다. 과연 이 기적의 의미는 무엇인가?
가진 것 하나 없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나선 모습에 가엾은 마음이 드신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치유해 주시고 먹을 것까지 주신 사랑을 전하는 모습.
어린 아이가 자기가 가진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내어 놓자 주섬주섬 자기들이 가진 것을 꺼내어 먹었다는 가슴 따뜻한 나눔의 이야기.
하지만 오늘 저의 마음을 울린 것은 이 기적 자체의 의미가 아닌 그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의 반응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체험했습니다. 즉, 빵을 배불리 먹었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어쩌면 오랜 시간 그들에게 다시 돌아올 과거의 영광을 그리고 그 영광을 이루어줄 다윗 임금의 후손을 기다리던 그들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생각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하지만 그 자리를 피하신 예수님을 보며 그들이 바라본 것과 예수님께서 바라던 것이 다르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마태 11,17) 하셨던 말씀처럼 어쩌면 우리는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에 마음을 빼앗겨 진정 우리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하느님의 일’들에 눈이 멀어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왕이 되기 위해 하신 행동이 아닌데 군중들은 그분을 임금으로 모시려고 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보여주신 기적이 우리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를 드러내는 데에 쓰이곤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늘 우리의 뒤에서 우리를 지지해주고 계신데 왜 내가 바라보고 있는 ‘그 방향’에 당신이 없느냐고 화내곤 합니다.
이미 은총의 샘이 터지고 넘쳐 내 삶을 가득 채우고 있는데, 내가 원하는 그 ‘물’이 없다고 투덜대고 하느님은 계시지 않다고 부정합니다.
우리는 언제 가장 그분께서 우리 곁에 함께 하시고 계시다고 생각합니까?
가장 행복한 순간에?
원하던 기도를 들어주셨을 때?
내가 가장 지치고 힘들었을 때에?
그분께서는 그 모든 순간에 함께 하십니다. 단지 우리가 그분을 보려고 하지 않기에 볼 수 없을 뿐입니다.
그래도 참 다행입니다.
우리가 부족해도, 우리가 정녕 ‘먹을 빵’만을 생각해도 그분께서는 그 ‘모든 것’들을 ‘항상’ 우리에게 주십니다. ‘언젠가는 진정한 내 뜻을 알아주겠지’하는 마음으로 빵도 치유의 기적도 그리고 끝내 당신의 목숨도 우리에게 내어주십니다. 참으로 바보같아 보이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랑이란 것도 사실입니다. 이미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시기로 결정하신 그분은 너무나도 완전한 분이시기에 그리고 변함이 없으신 분이시기에 그 결정을 무르는 방법도 모르시고 가지고 계시지도 않습니다.
이 어찌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가 부족해도 그분이 완전하시니 말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어도 그분이 용서해주시니 말입니다.
우리가 어디를 향해 있을 지라도 그분이 항상 그곳에 함께 계시니 말입니다.
그런 그분의 변함없는 사랑에 힘입어 아주 조금만 변하는 오늘이 되길 기도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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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24.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활 제2주간 금요일]
사도행전 5,34-42
요한 6,1-15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빵 산’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은 당시 유다 백성들에게 초미의 관심사였습니다.
그분께서 건네시는 말씀은 얼마나 명쾌하고 또 감미롭던지 암울했던 백성들의 삶을 희망과 기쁨으로 가득 차게 만들었습니다.
가시는 곳마다 앓는 사람, 죽어가는 사람, 마귀 들린 사람들을 치유시켜주셨습니다.
그러다보니 예수님 일행이 가는 곳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보려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려고, 그분으로부터 치유를 받으려고,
그분께 조언을 구하려고...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갈릴래아 호숫가를 따라 걷는 예수님과 제자들, 그 뒤로 셀 수도 없이 많은 군중들이 따라 걷습니다.
말씀을 선포하기 좋은 적당한 장소에 도달하면 군중들을 편안하게 자리에 앉힙니다.
사람들이 당신을 잘 볼 수 있는 약간 높은 언덕 위에 서신 예수님께서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그 말씀이 얼마나 감동적이고 살아있고 재미있던지 사람들은 시간가는 줄 모릅니다.
그러던 중 예수님께서 제자 필립보를 향해 조금은 생뚱맞은 질문 하나를 던집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저 사람들’이란, 열 명 스무 명, 백 명 이백 명이 아닙니다.
끝도 보이지 않는 많은 수의 군중입니다.
예수님께서 설마 진담으로 그러는 것을 아니겠지, 생각했던 필립보는 불가능한 일이라며 강하게 고개를 젓습니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 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이백 데나리온 어치 빵이라고 했는데, 데나리온은 예수님 시대 당시 통용되던 은화였습니다.
이것을 당시 가치로 따지자면 로마제국 군대 군인들의 하루 복무비 정도, 아니면 팔레스타인 지역 노동자들의 하루 일당 정도였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5만 원 정도 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200 데나리온 어치 빵은 천만 원 어치 빵인 것입니다.
옆에 있던 다른 제자 안드레아는 더욱 비관적인 어조로 말합니다.
예수님의 제안에 어림도 없는 일이라며 고개를 흔듭니다.
“여기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결과는 어떻게 전개됩니까?
예수님께서는 한 아이의 손때 묻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기초로 엄청난 빵의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기적을 통해 제자들이 얻게 된 빵의 양, 생각만 해도 어마어마합니다.
천만 원 어치 빵입니다.
트럭으로 몇 트럭이 될 정도였습니다.
제자들은 갑자기 자신들의 눈앞에 나타난 ‘빵 산’ 앞에 입을 다물지 못했을 것입니다.
신이 나서 나누어주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으로 깜짝 이벤트가 꾸며진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느라 굶주렸던 백성들은 원 없이 빵과 물고기로 배를 채웠습니다.
모두가 배불리 먹은 다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한 가지 당부를 하십니다.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
그래서 제자들이 남은 조각들을 모았더니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습니다.
열둘이란 숫자는 완전함을 뜻하는 숫자이지요.
그 완전함이 또 다른 완전함으로 가득 찼습니다.
이는 하느님 나라의 풍성함을 드러내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이미지는 풍성함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 사랑과 자비가 풍성하게 흘러넘치는 곳,
더 이상 고통도 눈물도, 상처도 죄도 없는 곳,
그저 하느님 사랑과 인간의 행복만으로 충만히 채워지는 곳...
빵을 많게 하는 기적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곧 도래할 하느님 나라의 전형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곳,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배를 채우는 곳, 그 누구도 예외 없이 구원되는 곳...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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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24. 전삼용 요셉 신부님. [부활 제2주간 금요일]
사도행전 5,34-42
요한 6,1-15
모든 기적은 “될까요?”로부터 시작된다
두 팔 없이 태어난 여자아이가 있습니다.
이름은 ‘제시카 콕스’(Jessica Cox), 올해 나이 35세입니다.
그녀는 두 다리만으로 할 수 있는 가능한 것들을 찾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두 팔을 가진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
세수나 화장도 손수 하지만 더 놀라운 건 두 발만으로 콘택트렌즈까지 착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타자는 1분에 25단어 정도가 가능하며, 그 작은 핸드폰 자판으로도 문자 메시지를 큰 불편 없이 친구들과 주고받습니다.
14살에 태권도 공인 2단을 땄고 수영도 합니다.
바다에서 서핑도 하며 물론 운전도 합니다.
그녀는 장애인 면허가 아니라 일반 운전면허를 취득하였습니다.
자동차만이 아니라 비행기 조종도 합니다.
그녀는 20대 중반에 이미 단독으로 비행에 성공하였습니다.
“불가능하리라 생각하지 않았어요. 무조건 ‘한다’라고 말하곤 했죠!”
“무조건 한다.”라는 믿음은 사실 “할 수 있을까?”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다보니 할 수 있다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두 발로 두 손이 하는 것을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은 두 손이 있는 사람도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하는 기적을 낳았습니다.
처음부터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면을 무시하면 결국엔 자신의 믿음대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의 시작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기적을 일으키실 작정을 하시고 마음을 떠보기 위해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하고 물으십니다.
필립보는 말도 안 된다고 혀를 찹니다.
그런데 이와 비슷하기는 하지만 무언가 다르게 안드레아가 대답합니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둘 다 믿음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둘의 자세는 상당한 차이를 보입니다.
마치 마중물이 들어간 상태와 들어가지 않은 상태를 보는 것 같습니다.
필립보는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확정적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안드레아는 의문형으로 말합니다.
의문은 이미 가능성을 1%라도 전제하고 있으므로 나오는 말의 형태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봉사하라고 하면 “저는 능력이 없어서요.”라고 잘라버리는 경우가 있고, 어떤 사람은 “제가요? 할 줄 아는 것도 없는데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하기 싫다는 의미로 들리고 그래서 시켜도 일을 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사람을 시키면 무슨 일을 시켜도 잘합니다.
빵 다섯 개는 우리 자신의 인간적 능력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숫자 ‘5’는 다섯 개의 감각, 즉 ‘오감’(五感)을 나타낼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의 능력을 말합니다.
물고기 두 마리에서 숫자 ‘2’는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과 진리입니다.
사람을 바꾸기 위해 이미 그 사람 안에서 성자와 성령께서 힘을 쓰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라면 부정적으로 확정하지 않고 의문 하고 질문합니다.
그러면 이미 믿음이 시작된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런 사람을 통하여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미시간 그랜드 래피드 근처에 1904년도에 개발한 석고 광산이 있었습니다.
1943년까지만 해도 수백만 달러가 나가는 광산이었으나 결국 쓸모가 없어져 폐광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사람이 이 폐광의 지하터널 온도가 연중 균일하게 10도 시 정도가 된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칠면조, 계란, 감자 등을 저장하는 창고로 변형시켜 큰돈을 벌었습니다.
모든 기적은 “혹시?”라는 작은 1%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데서 시작됩니다.
한 걸음이 없으면 두 걸음도 없습니다.
몇 년 전부터 사람들이 전에게 유튜브를 하라고 권하였습니다.
저는 시간도 없고 자신도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난 못해!”라고 말하지 않고,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고만 했습니다.
할 수 없다고 말해버리면 영원히 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정에 나를 가두어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이번 코로나 때문에 시간이 생겨서 유튜브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많은 분에게 주님께서 양식을 주시는 재료가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제가 사제가 된 것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도 적어도 의문은 해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불가능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절대 부정적 확정문을 사용하면 안 됩니다.
작은 의문이 기적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항상 주님의 뜻에 나의 마음을 열어놓아야 합니다.
우리는 나를 통한 주님의 계획을 잘 모릅니다.
주님의 어떤 뜻이 들어온다면 부정적 정언으로 마침표를 찍으며 끊어버리지 말고 적어도 “될까요?”라는 의문으로라도 마음을 열어놓아야 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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