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가정, 행복한 인생/전 4:4-12
성경본문: 전도서4:4-12
4. 내가 또 본즉 사람이 모든 수고와 여러 가지 교묘한 일로 인하여 이웃에게 시기를 받으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5. 우매자는 손을 거두고 자기 살을 먹느니라
6. 한 손에만 가득하고 평온함이 두 손에 가득하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으려는 것보다 나으니라
7. 내가 또 돌이켜 해 아래서 헛된 것을 보았도다
8. 어떤 사람은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으니 아무도 없이 홀로 있으나 수고하기를 마지아니하며 부를 눈에 족하게 여기지 아니하면서도 이르기를 내가 누구를 위하여 수고하고 내 심령으로 낙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고 하나니 이것도 헛되어 무익한 노고로다
9.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10.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11.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12.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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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양인순목사
가정의 달 5월입니다. 가정은 하나님이 직접 디자인하시고, 이 땅에 세우신 최초의 기관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보다 먼저 가정을 만드셨습니다. 가정은 하나님의 꿈을 이루어가는 곳입니다. 가정은 천국의 삶을 맛보고 누리는 곳입니다. 가정이 행복해야 교회가 행복합니다. 가정에서 스트레스 받으면 어딘가는 가서 풀어야 합니다. 그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가정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푸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람에게 풀면 안되고 하나님 앞에 풀어야 합니다. 사람에게 잘못 말하면 상처가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메주알 고주알 일러바치는 것입니다. 이것을 제일 잘한 사람이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이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았습니까? 남도 아닌 장인 사울 왕이 무려 10년 동안 특공대를 만들어 죽이려고 쫓아다닙니다. 아마 보통 사람 같으면 화병에 걸려 죽었을 거예요.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 앞에 다 고합니다. 그는 넘어져도 세상으로 넘어지지 않고, 하나님 앞으로 넘어집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 한 가지 알려 드릴까요? 제가 책에서 본 건데요 아주 기가 막힌 방법입니다. “스트레스를 스트레스 받게 하라” 이해되셨습니까? 삶 속에서 스트레스가 오면 대부분은 좋지도 않은 그것을 감사하며 아멘으로 받습니다. 그리고 속상해하고 잠 못 이룹니다. 그 스트레스를 내가 받지 말고 이렇게 해보는 것입니다. “야! 너 같은 것은 스트레스도 아니야! 감히 어딜 덤벼! 한 번만 더 까불면 너 혼날 줄 알어!” 그러면 스트레스가 놀라서 도망친답니다.
인간은 누구나 스트레스를 받기보다는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의 소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주의 자녀들이 하나님이 주신 해아래서 기쁨을 누리고,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느끼고 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서울대 사회발전 연구소가 전국의 20살 이상 된 성인 1200명을 대상으로 한국인의 행복지수를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한국인의 행복지수는 평균 66.5점이었습니다. 여러분의 행복지수는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행복한 삶을 결정하는 요인으로는 약 70%가 건강을 꼽았습니다. 다음이 경제력(약11%), 사랑(6.5%), 신앙(5.2%), 안정된 직장(2.8%) 순 이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이 행복한 삶을 결정하는 요인이라고 여기십니까? 통계에서 보듯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보다 건강하면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우면 행복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자기의 꿈을 성취하면 행복해진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 행복의 조건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행복의 절대 조건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나라별 행복지수를 조사한 결과를 보면 반대입니다. 세계에서 제일 행복하다고 느끼는 나라 사람들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소득이 5만 불이 넘는 스위스나 스웨덴 같은 나라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입니다.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의 하나인 방글라데시였습니다.
1인당 국민소득 200달러요, 인구 밀도는 세계 1위입니다. 문맹률이 90%가 넘고, 매년 홍수로 국토의 80%이상이 물에 잠깁니다. 천연자연도 없고, 교육 시설이나 의료시설은 열악하기 그지없습니다. 사회는 양극화 되어있고, 뇌물과 부정부패가 만연한 나라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출근할 직장도 없고, 공부할 학교도 없고, 아파도 찾아갈 병원조차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모두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선교지에 가면 가슴 아픈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코를 막고 30분간 애를 써야 버틸 수 있는 곳에 사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너무 해맑은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가난을 가난인 줄 모르고, 아픔을 아픔인 줄 모르고 사는 그들의 모습이 가슴 아픕니다. 그런데 정작 본인들은 너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행복지수가 높은 대부분의 나라는 공통적으로 3세계에 속한 후진국들입니다.
물론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행복의 기준과 그들이 생각하는 것은 다를 수 있습니다. 지금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 진정 오늘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만드느냐는 것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경제적인 풍요로움이 결코 인간의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나라는 심리적으로 더 불안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자살률이 오히려 높습니다. 행복은 경제적 조건이나 환경과 비례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전도서를 쓴 솔로몬은 인생의 부귀영화를 모두 누린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내린 인생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전도서 1장 2-3절을 보십시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그리고 8절 말씀을 계속해서 보십시오.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
솔로몬은 지혜의 왕으로서 세상 모든 낙을 다 누려보았지만 그 모든 것이 피곤함 뿐이요, 만족함이 없는 세상이라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내린 마지막 결론은 인생은 ‘헛되다(nothing, meaningless)’는 것입니다. 결국 해아래서 무엇인가를 잡아보려고 몸부림치고 수고했지만 그 결국이 헛된 것이라면 얼마나 허무한 인생일까요? 오늘 본문에서 행복을 빼앗겨버린 허무한 인생의 3가지를 살펴봅니다. 이것을 극복하면 곧 행복한 인생, 행복한 가정을 이루게 될 줄 믿습니다.
첫째, 위로자가 없는 인생은 헛됩니다.(1-3)
우리가 걸어가는 인생의 길은 광야의 사막과 같습니다. 우리는 시온의 대로를 달려가기를 원하지만 우리 인생길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모래바람 부는 사막에서 목말라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전갈과 불 뱀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길을 잃고 방황할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원치 않는 순간 마라의 쓴물을 마신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고통스러운 시간도 있습니다.
물론 눈에 보이는 큰 아픔과 고통도 있지만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작은 것이지만 우리를 또한 힘들게 하는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사막을 걸어갈 때 가장 힘든 것은 무엇일까요? 전에 말씀드린 기억이 있습니다. 사막의 카라반들에게 가장 힘든 것은 모래바람도, 뜨거운 태양도, 목마름도 아니랍니다. 신발 속으로 들어가는 작은 모래 알갱이랍니다. 처음에는 모르지만 이 작은 모래가 발을 부릅트게 하고, 결국은 쓰러지게 한답니다. 남이 알지 못하는 고통 속에 시달리는 분들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것으로 사람을 판단하거나 말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내 입장에서 함부로 말해서도 안됩니다. 상대방의 작은 아픔의 눈물을 기억할 줄 알아야 인격적인 사람이 됩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십시오. 전도자는 해 아래서 학대받는 자를 보고 있습니다. 그들의 눈물을 보고 있습니다. 얼마나 고통이 컸던지 사는 것보다 죽은 자를 부러워합니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은 것이 복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전도자가 볼 때 더 안타까운 것은 무엇입니까? 그들에게 위로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인생은 때로 눈물 젖은 빵을 먹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도종환 님의 시처럼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며,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흔들리지 않고, 눈물을 흘리지 않고 가는 인생이 어디 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흔들리는 순간, 눈물 젖은 빵을 먹는 순간에 누군가 나를 위로해 주고, 격려해 주는 사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고통의 터널을 가장 쉽게 통과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은 내 마음을 알아주고, 눈물을 닦아 주는 보이는 누눈가가 있다는 것이죠. 내 아픔의 눈물을 이해하고, 닦아주는 좋은 동반자가 있다면 우리는 어떤 고통도 이길 수 있습니다.
한 마을에 친구 둘이 산길을 걷다가 곰을 만났습니다. 먼저 곰을 발견한 친구가 높은 나무 위로 도망을 갔습니다. 늦게 곰을 본 친구는 피할 겨를이 없어서 땅바닥에 엎드려 죽은 척 했습니다. 곰은 죽은 사람을 건드리지 않는 다는 걸 알았지요. 아니나 다를까 곰이 냄새만 맡다가 사라졌습니다. 나무에 올라갔던 친구가 신기한 듯 내려와서 물었습니다. “곰이 자네 귀에 뭔가 말을 한 것 같던데 뭐라고 하던가?” 친구가 말합니다. “위험할 때 혼자 피하는 사람과는 친구를 하지 말라더군.”
세월이 지나 이 두 친구가 다시 산길을 걷다가 또 곰을 만났습니다. 이번엔 반대로 지난번 나무에 올라갔던 친구가 죽은 척 땅바닥에 엎드렸습니다. 곰이 어슬렁거리며 다가오더니 한 사람이 죽어 있는게 아닙니까? 이 곰은 착한 곰이라 땅을 파더니 이 사람을 땅속깊이 묻어주었습니다.
예나지금이나 참된 친구는 우리 인생을 풍요롭게 하고 나쁜 친구는 나를 아프게 합니다. 위험할 때, 아프고 힘들 때 내 곁에서 위로할 수 있는 좋은 친구가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고 함석헌 선생의 글 가운데 「그대는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하는 시가 있습니다.
만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탓던 배 꺼지는 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할
그런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어도 너의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 두거라’일러줄
그런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하며 빙긋이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여러분 가운데 이런 인생의 친구가 있다면 참으로 행복한 분입니다. 우리는 지금 군중 속의 고독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과거 어느 때 보다도 속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친구가 그리운 때를 살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겐 힘들고 지칠 때 위로해 줄 수 있는 친구가 필요합니다. 정말 힘든 일이 있을 때 그 무거운 짐을 함께 나눌 친구가 필요합니다. 나의 아픔을 쏟아 놓았을 때 포근히 덮어주고 치료해 줄 수 있는 친구가 필요합니다.
런던 타임즈’가 ‘친구’라는 말의 정의를 현상 모집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우수한 것 셋을 뽑았습니다.
친구란 무엇인가? 그 첫 번째는 “온 세상과 모든 사람이 다 나를 버릴 때, 그때에 찾아와 주는 사람이다.” 두 번째는 “너무 괴로워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침묵할 때에 그 말없는 말을 이해해주는 사람이다.” 세 번째는 “내가 기쁜 마음을 가지고 만나면 기쁨이 배가 되고 내가 고통스러울 때 만나면 고통이 반으로 감해지는 사람이 친구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정 서로의 마음을 헤아려주고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친구, 즉 내 삶의 위로자가 필요합니다. 부부간에 좋은 위로자가 되어야 합니다. 부모와 자녀사이도 좋은 위로자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와 성도 간에도 서로의 아픔을 함께 나누며, 눈물을 닦아주는 위로의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행복한 가정, 행복한 교회를 만드는 비결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아무리 위로자가 되어서 함께한다 해도 그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때로는 위로가 오히려 더 큰 아픔으로 다가올 때도 있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위로자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이십니다. 보혜사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은 지금도 우리 곁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의 아픔을 함께 겪으시며 위로해주십니다. 성령님의 위로가 여러분의 삶 가운데 넘치시기를 축복합니다.
둘째, 명예와 부를 좇는 인생은 헛됩니다.(4-6절)
본문 4-6절에서 전도자 솔로몬은 해 아래서 헛된 것, 바람을 잡으려는 헛된 것에 대해서 말합니다. 4절 말씀을 함께 읽습니다.
“내가 또 본즉 사람이 모든 수고와 모든 재주로 말미암아 이웃에게 시기를 받으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세상에는 열심히 노력하고 수고해서 많은 것을 얻고 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한 남보다 특별한 재주가 있어서 인기를 얻고, 부를 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남이 시기를 할 만큼 잘 나가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습니다.
친구나 주변 사람들이 잘되는 것을 보면서 ‘나는 그동안 뭐했나’ 라는 자괴감에 빠지는 분이 있을지 모릅니다. 나는 오히려 친구보다 더 열심히 노력하고, 성실하게인생을 살아왔는데 ‘나는 왜 이럴까’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마음의 각오를 해야 합니다. 남이 나보다 잘 되었을 때 그것을 진심으로 축복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듯이 남 잘되는 꼴을 못보는 사람, 하나님이 주시는 큰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물론 정직하고 바른 방법으로 잘 되었다면 그것보다 더 축하할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좀 잘못된 방법으로 잘 나가고 있다면 그것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새벽 말씀 묵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시편73편에 아삽이 넘어질 뻔 순간을 기억합니다. 찬양대장 아삽이 볼 때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르게 선하게 사는 사람은 지질이 궁상을 떨고 있고, 악한 사람들을 보니 고통도 없고, 재앙도 없습니다. 하는 일마다 잘 돼서 재산이 늘어납니다. 그래서 시인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넘어지고 미끄러질 뻔 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악인의 형통함은 꿈을 꾸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꿈 속에서 아무리 화려한 것을 다가져도 꿈이 깨는 순간 다 헛것입니다. 악인은 한 순간에 파멸에 던지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삶이 진정한 복임을 깨닫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진정한 행복, 진정한 축복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도움없이 잘되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형통이 아니라 불통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내가 기도하지 않고 있는데 잘 된다면 조심하십시오. 내가 주님 보시기에 합당하지 않은 길로 가고 있는데 무사하다면 지금 돌아서야 합니다. 그것을 즐기시다보면 돌이킬 수 없는 아픔이 다가옵니다.
하나님 없이 세상에서 누리는 명예와 부는 헛된 것임을 성경은 강조합니다. 솔로몬이 전도서에서 결국 강조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자기가 해아래서 인생의 모든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하나님 없이 살아왔던 모든 삶은 전적으로 헛되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누리고 있는 인기와 명예와 부는 잠깐입니다. 남이 나보다 잘 될 때 우리들이 잠깐 부러워하는 것일 뿐입니다. 삶의 목표를 바르게 정해야 합니다. 여러분 자녀들의 삶의 목표를 바르게 조준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의 가치를 따라가면 결국은 잘 가는 것 같지만 잘못된 길로 갈 수 있습니다.
지난 주 미국의 시사월간지 'Atlantic Monthly(애틀랜틱 먼슬리)' 재미있는 사실이 발표됐습니다. 하버드 의대 정신과 의사인 조지 베일런트(Vaillant) 교수는 1937년 하버드대에 재학중이던 남자 268명의 삶을 72년간에 걸쳐 추적하여 조사했습니다. 그들은 당시에 현명하고, 야심만만하고, 판단력이 매우 뛰어난 수재들이었습니다. 최고 엘리트답게 그들의 출발은 상쾌했습니다. 연방상원의원에 도전한 사람이 4명이었고 대통령도 나왔습니다. 유명한 소설가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연구 시작 후 10년이 지난 1948년 즈음부터 20명이 심각한 정신 질환을 호소했습니다. 50세 무렵엔 약 3분의 1이 한때 정신질환을 앓았습니다. 그것을 잡지에서 “하버드 엘리트라는 껍데기 아래엔 고통 받는 심장이 있었다”고 지적했습니다.”
베일런트 교수가 내린 결론은 이것입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관계이며, 행복은 결국 사랑” 이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인생의 행복은 좋은 대학이나 명예나 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곁에 얼마나 좋은 사람들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사랑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좋은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쌓이면 후에 우리의 인생은 참으로 행복했노라고 고백하게 될 줄 믿습니다.
셋째, 상생과 협력을 모르는 인생은 헛됩니다.(9-12절)
서두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인생길은 광야의 여정입니다. 혼자 걷다보면 쓰러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누군가가 나를 일으켜 준다면 다시 걸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곁에 아무도 없다면 그것이 곧 끝입니다.
그래서 9절에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니라”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미련해 보여도 혼자보다는 둘이 낫다는 말씀입니다.
논어에 “삼인행 필유아사(三人行 必有我師)”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 사람이 걸어가면 그 가운데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는 말입니다.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통해 무엇인가를 배우려고 노력하는 것이 지혜자의 모습입니다. 아무리 생각이 달라도 그것을 귀 기울여 들어보면 그것을 통해 배울 것이 있습니다.
혼자 부르는 노래보다 합창이 더 아름답습니다. 홀로 악기를 연주하는 것보다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훨씬 웅장하고 아름답습니다. 혼자 개인기를 발휘하여 하는 경기보다는 서로가 합력하여 팀워크를 이루는 축구나 야구가 멋집니다. 인간은 누구도 혼자 존재할 수 없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아담을 지으시고 혼자 사는 것을 보시고 좋지 못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베필을 지으리라.”(창2:18)
모든 사람은 더불어 살아가는 관계적 존재로 지음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혼자가면 빨리 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오래가지는 못합니다. 혼자가면 남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나누는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아무리 내가 잘나고 똑똑해도 언젠가 실수하고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 곁에 돕는 자가 필요합니다. 함께 격려하고, 일으켜주고, 울어줄 수 있는 동역자가 필요합니다. 세상에 독불장군은 없습니다. 아무리 내가 성공했어도 아무도 박수를 쳐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실패한 인생입니다. 좀 늦게 가도 괜찮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환호를 해주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묵묵히 내 곁에서 나를 믿어주고, 동행할 수 있는 위로자가 있고, 친구가 있고, 동반자가 있다면 그 인생은 행복할 수 있습니다.
가정의 달을 보내면서 내 인생의 뒤안길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나는 어떻게 내 인생의 길을 달려가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의 가정은 진정한 위로와 행복이 있는가? 오늘 전도자의 고백처럼 해 아래서 바람을 잡는 헛된 인생이 되지 않기 위해서 다시 한번 옷깃을 여미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진정한 행복은 외모나 크기나 평판에 있지 않습니다. 내 곁에 진정한 위로의 사람이 있다면, 나를 붙들어 주고,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홀로가 아닌 더불어 살아가는 아름다운 가정, 아름다운 인생이 모두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