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P10기 가을야유회 금산사,전주한옥마을 탐방기 2012.11.12 금년도 AIP10기 가을야유회는 전북 김제에 있는 금산사 그리고 전주 한옥마을을 찾기로 했다. 부부 동반모임으로 28명이 참가하였다. 아침 7시30분에 양재역 부근 집합장소에서 출발한 버스 는 다행히 출근시간을 피해서인지 그다지 밀리지 않고 고속도로를 달린다. 안개가 짙다. 날씨는 포근할 모양이다. 제대로 바깥 경치가 잘 보이진 않지만 산야가 붉고 누렇게 변해서 깊어가는 가 을임을 실감케 한다. 회장이 해외출장이라 총무가 애를 많이 썼다. 이용희 내외가 준비했다는 한 보따리의 비닐 봉지에는 없는 것이 없다. 물은 물론,소주,안주거리,과자,사탕 등등. 회장사모님 이 몇시간을 달여서 만들었다는 대추차,원두커피--이용희 회원이 계속 서빙을 한다. 회장을 대신해 김인수전회장이 인사말에 이어 지루하지 않게 마이크를 돌려가며 근황소개를 하 게 한다. 또 여성회장께서 준비한 음악 테이프는 젊은 시절에 많이 불렀던 노래라 모두 눈을 감 고 감상을 한다. 휴게소에서 잠시 휴식시간을 가진뒤 곧장 금산사 주차장으로 달린다. 금산산(金山寺) 금산사 주차장에 내리니 과연 이른 아침에 출발해서인지 우리가 가장 빠른 팀인것 같다. 입구는 각종 상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난전도 많이 펼쳐 놓았다. 각종 나물류가 가장 많다. 금산사는 금산사의 창건과 관련하여 "금산사사적"의 내용을 근거로 불 때 599년 백제 법왕의 자복 사찰로 창건되었으며, 이 후 진표율사에 의한 6년여의 중창으로 사찰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음 을 알 수 있다. 금산사가 미륵신앙의 성지로 자리 메김 한 것은 진표율사 때부터이다. 금산사는 오랜 역사 뿐만 아니라 수많은 보물을 지닌 사찰로 국보1점,보물 11점을 보유하고 있다. 일주문에는 모악산 금산사(母岳山 金山寺)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우람한 기둥 위에 멋진 글씨로 위용을 자랑한다. 글씨는 서예가 일중(一中) 김충현선생의 글씨이다. 모악산이냐 무악산이냐의 논쟁이 있으나 무(毋,말무,없을무)가 아닌 母(어미모)로 쓰여 있어 모악산으로 굳어진 것 같다. 일주문 둥근 기둥이 워낙 크고 일체형이라 과연 통나무일까? 붙여서 만든 것일까? 궁금해진다. 두 금강장사가 지키는 금강문을 지나 천왕문에 들어선다. 네명의 사천왕이 눈을 부릅뜨고 잡신과 악귀의 출입을 막고 서 있다. 금산사는 역사뿐만 아니라 규모에서도 압권이다. 보제루를 지나 가람의 중심에 이르면 우측에 자리한 국보 제62호인 미륵전은 3층건물인데 법당 안은 한층 통으로 뚤려 있다. 1층에는"대자보전(大慈寶殿)", 2층에는 "용화지회(龍華之會)" 3층에 는 "미륵전(彌勒殿)" 등의 각기 다른 편액이 걸려있다. 이름은 다르지만 모두가 미륵불의 세계를 나타낸다. 이러한 다층의 사찰 건축으로서 미륵전은 법주사의 팔상전과 함께 한국 건축사의 위대 한 업적으로 꼽힌다. 일찍이 삼국시대로부터 축적된 기술적, 미학적 아름다움은 국토 곳곳을 불 국토의 장엄으로 만들어 나갔던 것이다. 안을 들여다 보면 또한번 놀란다.어마어마한 크기의 미륵삼존불이 모셔져 있다.미륵전 미륵삼존 불상은 옥내 입불로서는 세계 최대이며, 가운데 주불이 11.82m, 좌우 보불은 8.8m가 된다. 주불이 키가 더 큰 이유는, 주불의 아래에는 연화대를 놓았지만 옆의 두 분의 보불에는 연화대를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조로 배치됨으로써 ‘삼존불이 봉안된 모습’이 ‘뫼 산(山)자 형태’ 를 이루고 있다. 정면으로 본당인 대적광전(大寂光殿 보물:제476호)이 우람한 모습으로 서 있다.대적광전에는 일반적으로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한 삼신불(三身佛)을 봉안하여 연화장 세계를 상징하게 된다. 삼신은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을 말한다.금산사의 대적광전에는 특이하게 5여래 6보 살이 모셔져 있다. 5여래는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왼쪽에서 부터 아미타불.석가모니불, 노사나 불 그리고 약사불이다. 6보살은 역시 왼쪽에서부터 대세지보살, 관음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 일광보살, 월광보살이다. 건물 내부에는 바닥에 마루를 깔고 뒷면에 6개의 기둥[高柱]을 세운 뒤 그 기둥 사이를 후불벽(後佛壁)으로 만들었다. 그앞에 불단(佛壇)을 설치하고 비로자나불을 중심 으로 좌우 2구씩 모두 5구의 불좌상과 그 사이에 보살 입상 6구를 안치하여 열하나의 불보살상이 나열 되어 있어 타 여늬 사찰에서 보지 못하는 광경이다. 금산사는 국보급 보물이 많다. 위에 설명한 국보 제62호인 미륵전.보물 제476호인 대적광전 외에 보물급 전각과 탑을 소개한다. 미륵전의 북쪽 위 송대에 보물 제25호인 오층석탑이 자리한다. 정사각형 판재를 이용한 이 석탑 은 높이가 7.2m로서 소박하고 단순한 구조를 지녔다. 본래 기록에 따르면 9층이라 하였는데 지 금 남아있는 옥개석의 형태나 체감율 등에서 6층 이상이 손실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보물 제26호 방등계단-송대(松臺)라고 부르는 미륵전의 북쪽 높은 대지에 방등계단(方等戒壇)이 있다. 또한 이 계단의 중앙에 보물 제26호인 부도 1기가 있어 그 형태에 따라 석종형(石鐘形) 부 도라고 부른다. 육각다층석탑-대적광전 오른쪽 앞마당에 위치하며 보물 제27호이다. 탑의 재질 이 흑색의 점판암으로 된 특이한 경우인데, 완전한 모습은 아니지만 정교하면서도 우아한 공예 적 석탑이다. 대적광전 오른쪽에는 독특한 형태의 노주(露柱)가 있다. 노주란 ‘노반지주(露盤之 柱)’의 줄임말로서 처음에는 전각의 정면 귀퉁이에 세우는 두 개의 장대였다가 나중에 탑의 상륜 부를 구성하는 부재로 사용되었다.고려시대의 조성기법을 간직하고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어 보물 제22호로 지정되었다. 석등-대장전 앞에 보물 제828호인 고려시대의 팔각석등이 있다. 지대석에서 보주까지 거의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고 전체 높이는 3.9m이다. 그외 부도군의 3번 부도비가 보물 제24호로 지정된 혜덕왕사진응탑비(慧德王師眞應塔碑)이다. 고려 예종 6년(1111년)에 세운 것이다. 그리고 금강문에서 동북쪽으로 50m쯤 떨어진 곳에 보물 제28호로 지정된 당간지주가 있다. 절에 중요한 행사나 법회가 있을 때 깃발을 걸어서 이를 알 리는 일종의 안내판이 당간(幢竿)이고, 이를 지탱하는 것이 지주(支柱)이다. 석련대(石蓮臺)-대적광전에서 동남쪽으로 10여m 떨어진 곳에 보물 제23호 석련대(石蓮臺)가 있 다. 불상의 대좌로서 정확한 이름은 석조연화대인데, 높이 1.67m, 둘레가 10.3m가 넘는 거대한 작 품이다.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형의 연화대좌인데다가 더욱이 하나의 화강석으로 각 면에 조각 한 수법이 정교하고 아름답다.
대장전(大藏殿)-미륵전의 정면 서쪽에 앞면과 옆면 각 3칸씩의 다포식 팔작지붕인 대장전(大藏 殿)이 자리한다. 이 전각은 보물 제827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장전은 본래 진표율사가 절을 중창 하면서 세워졌다. 여러 차례 변화가 있었지만 전각 꼭대기에는 복발과 보주 등이 아직 남아 지금 도 신라 때의 목탑 양식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북강삼층석탑(보물 제29호)-고려시대의 석탑으 로 높이 4.65m이며, 전체적으로 신라탑의 전형을 따르고 있으나 옥개석(屋蓋石)이 넓으며 낙수면 (落水面)의 경사가 급한 면에서 고려시대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석탑은 화강암으로 만들 어 졌으며 정방형이다.
아름다운 여러 전각들을 살펴보고 송대라 부르는 방등계단으로 올라섰다. 방등계단의 성격을 도 솔천(兜率天)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즉 미륵신앙의 근본도량인 금산사에는 미 륵의 하생처로서 미륵전을 조성하고, 그 위에 도솔천을 구현하여 미륵상생신앙을 나타냈다는 말 이다. 이 계단의 중앙에 부도 1기가 있다. 모양에 따라 석종형부도라 부른다. 방등계단 옆에는 적 멸보궁이 있다. 적멸보궁은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시는 전각으로 불상이 없다. 적멸보궁안을 보니 부도 있는 쪽으로 창문이 뚤려 있고 신도들은 그 쪽 진신사리 방향을 향해 기도를 올린다. 높은 계단위에서 내려다 보이는 금산사 사찰 경내가 너무 아름답다. 단풍으로 물든 전경이 그림 같다. 몇번의 카메라 샷다를 눌러 저장을 하지만 좀처럼 발걸음을 뗄수가 없다.
육각다층석탑 석련대 노 주 나한전 오층석탑
전주한옥마을 전주비빔밥 다음 코스로 이동하기 위해서 버스를 탔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그 유명한 전주비빔밥을 먹기 위해 40분 가량 버스는 쉼없이 달린다. 전주에 오면 당연히 전부비빔밥집을 찾지만 오늘 찾는 집 은 가족회관이라는 대형 음식점인데 입구에 관광버스들이 즐비하다. 여행은 눈으로 즐기는 것만 이 좋은 여행이 아니다. 맛여행이 따라야 한다. 그래서 특별메뉴로 인당 25,000원 짜리를 주문했 단다. 덕분에 고급 전주비빔밥을 먹어보게 되었다. 미리 나온 밑반찬 맛 보느라 벌써 비빔밥도 나 오기 전에 배가 부르다. 그래서인지 정작 비빔밥의 맛을 제대로 평가를 하기 힘들어졌다. 몇가지 반찬은 너무 짜다는 평이다. 특히 젓갈에 담근 조기구이는 짜서 먹기가 어렵다. 전주 전통음식 명 인의 집으로 소문난 가족회관의 대표는 요리전문가인 김년임씨이다. 오늘 여행의 하일라이트인 전주한옥마을에 도착했다. 작년에 논어반에서 이곳을 다녀갔기 때문에 생소하지 않고 기억이 생생하다. 해설사 아가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더구나 총무의 친형이신 분이 대학교 교수정년을 마치고 자원봉사 활동을 하시는데 일부러 우리 일행을 맞으러 나왔다. 오목대(梧木臺)와 이목대(梨木臺) 처음으로 찾은곳은 전주 한옥마을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언덕위의 오목대(梧木臺)이다. 고려 우왕 6년(1380) 운봉 황산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른 이성계가 개선길에 머물렀던 곳이다. 그후 태 조가 머물렀다는 뜻으로 "태조고황제주필유지비(太祖高皇帝駐畢遺趾)"라는 비문을 고종황제가 친필로 쓰고 비각을 광무4년에 세웠다. 이성계는 승전가를 부르며 개선 귀경 도중 전주에 있는 종친들을 모시고 승전축하연을 베풀었다. 이성계는 이 자리에서 한고조 유방이 항우를 물리치고 고향에서 종친을 모시고 잔치를 베푸는 자리에서 불렀다는 대풍가(大風歌)를 불렀다. 이성계는 대풍가를 통해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천 하재패의 꿈을 은연중에 나타낸 것이다. 大風氣兮雲飛揚 큰 바람이 일어나서 구름이 날아오르다. 威加海內兮歸故鄕 위세가 해내에 떨치고 고향에 돌아오다. 安得猛士兮守四方 어디서 용맹한 무사를 얻어 사방을 지키게 할까 오목대에서 구름다리 육교를 건너 이목대가 있다. 이목대는 시조 이한(李翰)때부터 누대에 걸쳐 살던 곳으로 발이산(發李山)자락이다. 이성계의 4대조 이안사가 이 곳에서 태어나 진법놀이를 하며 자란 곳이다. 목조는 당시 전주부사와의 불화로 함경도로 옮겨갔다.이것이 이성계가 조선 왕조를 건국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곧 하늘의 뜻으로 여겼다. 이 내용은 용비어천가 3장에 묘사되어 있다. 건물은 없고 고종황제가 친필로 쓴 "목조대왕구거유지(穆祖大王舊居遺址)"의 문구를 새긴 비석과 비각이 서 있다. 오목대에서 내려오는 길목에 큰 느티나무가 서 있다. 느티나무는 왜 느티나무라는 이름을 가졌을 까? 해설사의 재치있는 답변이다. 멀리서 봐도 늘 티가 나기 때문이라고. 또 누군가 말했단다. 삯이 느리게 트는 나무이기 때문에 얻은 이름이라고. 느티나무는 이곳의 당산나무로 수호신 역할 을 한다. 맞은편 길은 사랑길이라고 한다. 연인들의 아베크길이다. 한옥마을로 들어섰다. 전주한옥마을 전주한옥마을은 대략 720세대로 1910년대부터 형성되었다. 전주는 후백제시대의 왕도였고 고려 말까지 성터가 있었으나 일제 때 허물어졌다. 전주는 쌀을 중심으로 하는 곡창지대로 일본의 강 점기 시대에 전주에서 나는 산물을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수송해 가기 위해 불편했던 성터를 모두 허물었다고 한다. 1910년대와 20년대,30년대까지는 전주 성내는 부촌이고 학문을 숭상하는 선비촌이었다. 그러나 그뒤 일본인이 들어와 살게 되니 점차 양반들이 이곳을 떠났다고 한다. 1977년 박정희 대통령이 오목대에서 전주한옥마을을 보고 감탄하며 한옥마을을 잘 보존하라는 지시에 따라 한옥보존지구가 되었다. 80년대와 90년대에는 이곳이 빈민가로 전락하기도 했다. 그 뒤 2000년대 들어와서 국제대회가 열리고 부터 한옥마을이 외국인에 의해 재평가되어 관광객 이 몰리고 이젠 한해 500만의 관광객이 찾는 마을이 되었다.
한옥마을 골목길을 지난다. 해설사 말대로 골목안 집들의 구성이 다양하다. 양철지붕도 있고 전 통기와집과는 거리가 있는 집도 간혹 있었다. 이 또한 어려웠던 역사의 뒤안길인 셈이다. 길가로 정비된 가로수가 늘어서 있다. 회화나무이다. 이 길은 이성계의 옥호을 따 태조로라고 한 다. 골목 끝쪽에 풍남문이 보인다. 고려말에 건축되었다는데 국보1호인 숭례문을 건축한 사람과 동일인이라고 한다. 처음으로 찾은 곳은 정동성당이다. 정동성당은 서울의 명동성당,대구의 계산성당과 함께 남한의 3대성당으로 꼽힌다. 정동성당은 천주교 200년 역사를 간직한 의미있는 교회이다. 1791년 일어난 신해박해는 이곳이 무대였다. 순교한 신자에 감명받아 100년뒤 프랑스 신부가 이 곳에 성당을 건축했다고 한다. 한강 이남에선 가장 컸다고 하는데 명동 성당을 본떠 만든 것이라 고- 종탑은 비잔틴 양식으로 돔 형태를 갖추었다. 해설사 말대로 성당의 벽돌을 보니 색상이 다 르다. 그래서인지 더 아름답게 보인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신자는 아니지만 모자를 벗고 경건한 마음으로-- 한옥마을을 오면 필수 코스가 경기전이다. 경기전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봉안한 곳으로 태종 10년인 1410년에 창건 되었다. 입구에 홍살문이 서 있다. 문이 3개인데 홍살문 외에 외삼문과 내삼문이 있다. 경기전 정전 앞에는 하마비가 서 있다. 하마비를 떠받치는 동물은 사자 인데 두마리이다. 현대적인 의미의 풀이가 재미있다. 관광객이 말한 것으로 두마리중 하나는 주 차장 입구를 표시하고, 또 한마리는 잡상인 출입금지라는 의미란다. 당시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 고 하마를 해야 하는 곳이다. 입구 기둥에는 밑둥에 흰 회칠을 하였는데 이 또한 뜻이 있다고 한 다. 첫째는 현실적인 방법론으로 쓰였는데 벌레들이 올라오지 못하도록 방충 역할을 했다는 점 이고 다음은 흰 회칠은 구름으로 표현된 것으로 구름 위의 사당을 표현한 것이다. 안으로 들어가면서 시선을 끈 나무가 있었다. 땅에 붙었다고 할 정도로 휘어진 매화나무였다. 나무나이가 100년이나 되었다는데 전주사고가 있는 쪽을 향해 마치 절을 하는 모습이다. 매화는 선비들이 좋아하는 나무이다. 그래서 호학나무(好學木)로 불리기도 한다. 조금 더 안쪽에 전주사 고(全州史庫)가 있었다. 조선조 실록을 보관하는 장소이다. 이조실록은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는데 개국에서 멸망할 때까지 모든 왕들의 일기가 적혀있고 업적과 과실이 모두 실려져 있다. 세계 어느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대단한 유산임에 틀림없다. 우리나라는 모두 9개의 세계 기록유산을 가진데 비해 일본은 단 한개라고--독일이 11개로 가장 많이 보유한 나라이다. 중국 이 5개라니 우리나라도 대단한 문화대국으로 자부하고 싶다. 전주사고를 2층까지 들어가서 구경 하였다. 경기전 정전인 어진 박물관으로 갔다. 어진이란 왕의 초상화를 말하는 것으로 태조에서 철종 때 까지 25대 임금의 초상화 중에서 현존하는 어진은 태조,영조,철종 어진 뿐이다. 세종과 정조 어진 은 실제 모습이 아니고 추정해서 그린 것으로 국가에서 공인한 표준 영정이다. 고종과 순종 어진 은 사진을 보고 모사한 것이다. 태조어진은 보물 제931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주는 태조의 본향 으로 그 선대들이 살았던 곳이다. 이를 기념해 1410년(태종 10) 태조어진을 전주에 봉안했으며 1872년 구본이 낡아 박기준,조중묵,백은배 등 8인의 화사가 새로 모사해 경기전에 모셨다. 태조어진을 보면 평상시 집무복인 익선관과 청룡포 차림의 전신상 어진이다. 다른 임금이 모두 붉은 청룡포인데 비해 태조는 푸른 청룡포가 다르다.(고종황제는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뀌어 황색 청룡포를 입게 되었다) 수염 하나까지 세밀하게 그린 점은 놀랄만하다. 특히 우측 눈위의 사마귀까지 그려져 있다. 어진을 한양에서 이곳 전주로 옮겨오는 과정이 그림으로 전시되어 있다. 무려 708일이 걸려 이곳 전주까지 가마로 360여명이 동원 되었다 한다. 당시의 가마도 전시되어 있었다. 경기관을 나와 전주한옥마을 큰 거리를 산보했다. 보도블록에 색갈이 다른 것이 보였는데 이 줄 이 성터가 있던 자리라고 한다. 최명희 문학관과 최명희길도 보인다. 소설 혼불로 유명한 문학인 이다.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손자이신 이석 황손의 집인 승광제(承光齊)에 들렀다. 이석황손은 가 수 활동을 했기 때문에 많이 알려져 있다. 부재중이어서 친견은 못했지만 집안 곳곳을 볼 수 있었 다. 전주의 전통술 박물관인 계영원(誡盈院)을 찾아 전통술과 제기들 전시품을 구경했다. 이제 모든 일정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야 하는 시간이다. 남자 회원들은 길가 풍광이 좋은 상점 에 들어가 전을 시켜 이곳의 명주인 생막걸리 '천둥소리'를 시켜 출출한 배를 채웠다. 한편 여성 회원들은 전통 찻집에서 귀한 황주를 마셨다고 자랑이다. 금요일이라 차가 밀릴수도 있다고 서둘 러 달려왔다. 다행히 막히지 않아 예정시간에 닿아 양재에서 김영수 회장 부인이 내는 저녁을 먹 고 헤어졌다. 필자는 집이 수원이라 죽전임시정류장에서 먼저 하차하였다. 회장단 총무부부와 이용희회원 부부의 노고가 컸다. 심심한 사의를 표하며 참가하신 회원님들 이른 새벽부터 수고 많았습니다. 즐겁고 멋진 하루를 보낸 행복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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