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외모는 다양하다. 이목구비가 뚜렷하면 호감을 받지만 얼굴 각 부분의 비율이 조금이라도 맞지 않으면 거부감을 일으키기도 한다. 눈이나 귀도 양쪽이 약간씩 다르지만, 사람들은 남의 얼굴을 자세히 보지는 않는다. 모두 주어진 것에 만족하여 편하게 사는 것이다.
도서관에서 형님을 사귀었다. 노래 공부도 같이 다니고 문학기행도 함께 갔었다. 말수는 적어도 마음 씀씀이가 깊어 자매처럼 잘 지내게 되었다. 나는 그녀를 형님이라 부르게 되었다. 우리는 매주 월요일마다 복지관에서 ‘가곡 부르기’ 시간에 만난다. 그녀는 노래 부르는 즐거움 때문에 오가는 거리가 한 시간 이상 넘어도 빠지지 않고 열심이다.
어는 날이었다. 나는 『런던에서 사람 책을 읽다』라는 내용 중에서 육십 번째 생일 아침에 홀연히 가방을 싼 여자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무작정 기차를 타고 내린 곳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 있은 실제 이야기였다. 형님은 그 나이가 가출하는 나이인가 보다. 우리 영감도 그 나이에 살던 아파트 판 돈을 들고 나갔다고 들려주었다. 혼자, 삼 남매를 가르친다고 안 해본 일이 없었다고 했다.
글쓰기를 하면서 마음을 다스렸던 형님을 독서 모임에서 처음 만났다. 그녀는 시 쓰기를 좋아했다. 힘들었던 만큼 깊이 있는 글로 마음을 풀어내었다. 지난해에는 작은아들이 동물병원을 차렸다고 했다. 너무, 고맙고 좋아서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밥을 사고 싶다고도 하였다.
그러던 형님이 노래공부시간 내내 무표정이었다. 말도 줄이고 조용했다. 우리는 집으로 가기 위해 언덕바지를 내려오며 이야기를 했다. 오늘 지하철에서 영감(집 나간 남편)을 보았다고 했다. 마스크를 하고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자는 척하고 있기에 유심히 보니 귀가 짝귀인 틀림없는 남편이었다고 했다. 목적지라 얼결에 내리기는 했지만 우울하고 편치 않았다고 했다. 차는 지나갔고 말을 나누지 못하고 내린 자신이 한심했다며 웃음인지 울음인지 분간이 안 가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로 위로를 하겠는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형님도 안됐지만, 지하철 경로석 앞자리에 마주 앉은 여인, 그 아내를 얼굴만 가리고 외면하면 몰라볼 줄 알았나 보다. 자식 셋을 낳고 살았는데 짝귀를 가진 그를 어찌 모를까. 저지른 일이 있으니 아는 척 못 하는 심정이 오죽하겠냐마는 차라리 한 손으로 귀를 덮고 있든지 할 것이지, 그 생각이 못 미쳤나 보다. 못 보았으면 좋았으련만, 형님의 잠 못 이루는 날들이 몇몇 밤이랴.
스물셋 새댁 때였다. 백일도 지나지 않은 딸아이를 업고 손위 동서의 문병을 다녔다. 미숙아로 조산한 조카는 무균 인큐베이터 실에 있고, 제왕절개 수술한 동서는 산부인과에 입원했기 때문에 자주 갔었다. 동서는 출산 후유증이 심했다. 조카가 있는 아동병원에서는 퇴원시키라고 연락이 왔었다.
귀한 장손을 아무도 맡으려 하지 않았다. 할머니가 데려다가 보살펴야 되겠지만 그럴 형편이 못 되었다. 두 할머니들은 부동산 소개와 바느질을 하시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혹 잘못되면 원망 들을 것을 염두에 두신 것 같았다. 병원비 걱정만 한다. 사정이 딱했다.
내가 데려가겠다는 마음으로 병원에서 수유법을 배웠다. 장이 약하니 양을 조금씩 늘리라고 한다. 바닥부터 눈금 한 칸 올릴 때마다 작은 티스푼 반씩 우유를 늘리고 물의 양을 50cc를 넘기지 말라고 했다. 두 얘기를 업고 안고 집으로 왔다. 메모를해가며 양을 조절했다. 조금씩 먹이니 돌아서면 또 먹여야 했다. 천 기저귀도 섞이지 않게 색실로 표를 했다. 정성을 다하여 돌보았다. 친정엄마가 손녀를 보러 와서 놀랬다. 겁도 없이 무슨 일이냐며 꾸중을 했다.
잘할 수 있다고 안심은 시켰지만, 속으로는 무섭고 떨렸다. 장손 아이가 무탈하게 크도록 빌고 빌었다. 며칠은 감당할 만했다. 일주일, 보름이 지나니 수면 부족으로 눈 밑에는 검은 자국으로 움푹 들어갔다. 모유 먹는 딸은 순하고 잠도 잘 잤지만, 조카는 양껏 먹일 수 없으니 자꾸 보챘다.
처음에는 신랑도 자기 조카니 불평이 없었다. 마침내 오지랖이 넓다고 짜증을 부린다. 힘들어도 참고 있는데……. 드디어 한 달이 되었다. 동서가 퇴원을 했고, 살림 도우미도 한 명 구했기에 목욕을 시키고 새 옷을 한 벌 사서 입혀 데리고 갔다. 등에 업힌 딸을 내리기도 전에 ”지 아이 아니라고 한쪽으로만 눕혀서 짝귀를 만들었다.“며 화를 냈다. 할 말을 잃은 나는 고맙다는 치사 한마디 듣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지금 같았으면 사진으로 찍어두어서 증명이라도 하겠지만, 잘못 눕혀 만들어진 짝귀였다면 제 자리로 돌아왔어도 골백번이나 돌아왔겠다고 혼자 속을 삭이며 하늘을 보았다. 마음속 위로에 귀를 기우렸다. ”잘 하였다. 내가 너의 정성을 보았다.!“라는 주님 음성이었다. 흐르는 눈물을 훔쳤다.
지금도 동서는 마음의 귀가 꽉 막힌 짝귀인지 매사 좌충우돌하며 여럿을 찌르고 다닌다. 아집을 세우고 있을 뿐, 이해심은 찾아볼 수 없었다. 형제들과도 외면하고, 딸 사위들도 멀어졌다. 외적인 짝귀보다 배려할 줄 모르는 마음의 짝귀가 더 고치기 힘드나 보다.
큰집 조카의 보이지 않던 미숙함이 자라면서 나타났다. 쉰 살이 가까웠지만, 장가도 못 가고, 눈도 나쁘고, 지능도 낮아 직장도 없다.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동서를 더 가시 돋게 했다. 나도 동서도 일흔과 여든을 넘기며 함께 늙고 있다. 자식은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 미움도 털어 버리고 섭섭함도 내려놓자,
복지관으로 형님이 웃으며 다가왔다. “영감 며칠 전에 보냈다.”며 담담하게 말한다. 마지막 가는 그에게 “내가 누구요?”하고 물으니 “ooo”하더라고 했다. 이름은 잊지 않았더라며 먼 산을 바라보았다. 형님은 “미안하오, 잘못했소, 용서해주오.”를 마음의 귀로 들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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