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장 문(文)과 무(武)
너른 뜨락.
이름 모를 기화요초(琪花瑤草)가 화원을 가득 메우고 있다.
가히 화해(花海)와 같다.
그 너른 꽃의 바다에 묻힌다면, 방향 감각을 상실해 버릴 것이다.
무수한 꽃송이는 기문둔갑(奇門遁甲)에 따라 심어진 것이기에, 까딱 발을
잘못 디딘다면 방향 감각을 잃고 헤매다가 탈진해 버리게 되는 것이다.
"쿨룩쿨룩… 저 곳을 봐라!"
기침 소리와 더불어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흐른다.
의자에 앉아 있는 괴팍한 용모의 중년인. 그는 섭선을 쳐들어 뜨락 한 곳
의 국화(菊花)를 가리켰다.
국화의 빛깔은 흰빛이었다.
천자만홍을 자랑하는 다른 꽃송이 가운데, 청초하게 피어난 국화 한 송이
는 자신의 의연하고 고아한 자태를 마음껏 자랑하고 있는 것 같았다.
"국화군요?"
"그렇다. 국화다."
"……."
"녠녠… 너를 낳은 여인이 제일 좋아했던 꽃이지."
"나, 나의 어머니!"
백무영은 흑포로 몸을 휘어 감고 있었다.
어느 틈엔가 그는 완전한 청년으로 성장해 있었다.
그가 회혼의림에 들어온 지 어언 구 개월째였다.
그는 그 사이 만박에게서 문(文)을 배웠고, 추노에게서 무(武)를 터득했
다.
그 자신의 무공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는 측량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어머니… 나의 기억 속에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없다.'
백무영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만박은 흐릿한 시선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너의 어머니는… 녠녠, 본시 네 아버지가 아닌 다른 사람과 결혼할 작정
이었다."
"아……!"
"그런데 네 아버지가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녠녠, 네 어머니는 네 아버
지를 사랑하게 되었고… 급기야 둘은 도망을 쳐서 결혼하게 되었다."
"으음……."
"녠녠… 그로 인해 한 명의 천재(天才)가 폐인이 되고 말았지."
"천재라면… 나의 어머니와 결혼하기로 했던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렇다. 그는 네 어머니를 잃은 데 상심하게 되었으며, 네 아버지를 죽
여 복수할 작정이었다. 해서, 그는 네 아버지 되는 자를 찾아갔지."
만박의 시선은 국화 송이에 던져지고 있었다.
칙칙하고 암울한 눈빛.
백무영은 그의 눈빛이 오래 묵은 술의 빛깔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천재 청년은 네 아버지를 만나게 되었고, 결국 두 사람은 격돌하게 되었
다."
"결과가 어찌 되었습니까?"
"패한 쪽은 네 아버지 쪽이었다."
"아……!"
백무영의 상체가 휘청거렸다.
아버지에 대한 것을 거의 알지 못하는 상태이기는 하나… 아버지가 누군
가에 의해 패배했다고 하자, 강한 실망이 느끼어진 것이다.
'아버지가 패하시다니?'
백무영이 괴로운 표정 가운데 입술을 질끈 깨물 때, 만박은 착잡한 눈빛
가운데 말을 이었다.
"솔직히 패배할 쪽은 천재 청년 쪽이었지. 네 아버진 이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검을 맞아 준 거였다."
"그, 그랬군요."
"천재 청년은 네 아버지의 어깨에 일 검을 가하는 찰나, 그가 양보해 주
었다는 걸 알게 되었지. 그래서 그는 더욱더 큰 치욕감을 느끼게 되었으
며, 그 날 검을 꺾어 버렸다. 그리고 그는 그 날로 무림을 떠나 버리고
만 것이다."
만박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백무영은 그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술을 떼었다.
"그 사람은 누굽니까?"
"……."
만박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백무영은 문득 그의 눈에서 신광이 뿜어지는 걸 볼 수 있었다.
'설마, 만박 사부가 나의 어머니를 사랑했던 사람이란 말인가?'
백무영은 아차 하는 기분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만에 하나 만박이 자신의 어머니를 사랑했던 사람이라면, 그는 백무영의
가문에 대해 뼈저린 한(恨)을 느끼고 있음이 틀림없는 일이 아닌가?
백무영을 맡아서 기르고 있는 사람들은 백무영의 가문에 대해 빚이 하나
씩 있는 사람들이다.
육사부와 오사부가 그랬으며, 사사부 만박도 마찬가지였다.
빚의 종류는 각기 다르다. 황금의 빚일 수도, 피의 빚일 수도, 그리고 사
랑이라는 감정에서 우러난 복수심일 수도…….
"넌 어깨에 많은 짐을 걸고 있는 녀석이야. 네 정체가 들통나게 된다면,
수만 명의 무림인들이 너를 잡아 죽이고자 할 거다."
만박은 천천히 눈길을 돌렸다.
혼탁한 강물의 빛처럼 흐릿한 눈빛. 그 쓸쓸한 눈빛 가운데에는 미묘한
감정이 짙게 배어 있었다.
'무영, 이 녀석의 눈매는 그녀와 너무나도 닮았다. 그녀는 중원에서 가장
아름다운 눈을 가지고 있었지.'
만박의 눈빛은 연민의 정으로 가득 찼다.
그것도 잠깐, 그는 백무영의 콧등이며 입매를 쓸어 보며 입가를 일그러뜨
렸다.
"네놈의 용모는 네 아비와 너무 닮았다. 난 네놈의 얼굴만 보면, 때려죽
이고 싶다는 충동이 든다."
만박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손바닥을 쳐들었다.
그의 손바닥은 자줏빛으로 물들었으며, 다섯 손가락이 활짝 펼치어지며
비파(琵琶) 우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만박의 손에서는 강맹한 경력이 분출되어 나왔다.
경력은 우레 소리를 동반하며 백무영의 가슴 쪽으로 다가섰다.
순간, 백무영은 허리를 가볍게 틀며 우측으로 신형을 이동시켰다.
펑-!
폭음과 더불어 백무영이 서 있던 곳에 큰 구덩이가 패이며 허공으로 흙
모래 바람이 피어 올랐다.
백무영이 선 채 장력에 격타당했더라면, 가슴뼈가 으스러지는 상처를 입
었을 것이다.
"괘씸한 추노! 어느 새 네놈에게 허무변환보(虛無變幻步)를 모조리 전수
해 주었군."
만박의 눈썹이 역팔자로 꿈틀거렸다.
"후후… 허무변환보 뿐만이 아니라 생사십해(生死十解)도 모조리 전수받
았습니다. 추노 말에 의하면, 사사부님의 눈썹이 꿈틀거릴 때, 조심을 하
라더군요. 사사부의 눈썹이 꿈틀거리면, 장기인 자전신강(紫電神强)이 폭
출될 테니까."
백무영은 유쾌한 표정을 지었다.
"나의 일 장을 피했다고 크게 좋아할 것 없어. 네놈이 아무리 강해져 봤
자, 나의 십 초 상대도 안 되니까. 네놈이 비위에 거슬리는 짓거리를 하
면, 단박에 목뼈를 분질러 버릴 거야."
만박은 욕설을 터뜨렸다.
그는 늘 백무영에게 욕을 해 댔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말과는 달리 기쁨
에 가득 찬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어느 새 이 정도로 성장했단 말인가? 아아, 용의 아들이 개일 수는 없
듯, 어느 새 한 마리 용이 되었다.'
만박은 조금 전 칠 성 공력을 가해 일 장을 후려쳤었다.
그런데 백무영은 너무나도 가볍게 그의 일 장을 피해 버렸던 것이다.
처음 회혼의림에 왔을 때에 비해 두 배 강해지지 않았더라면, 절대 피하
지 못했을 것이다.
"꺼져 버려! 네놈의 얼굴만 보고 있으면, 비위가 거슬리니까."
"물러가겠습니다, 사사부님!"
백무영은 장읍을 취한 다음에 뒤돌아섰다.
만박은 그가 떠나가는 것을 묘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뒷모습이 그와 너무 흡사하다. 아아, 무영은 그와 너무나도 비슷해지고
있다.'
구월 구 일.
일컬어 중양절(重陽節)이다.
중양절은 청명절(淸明節)과 더불어 중원의 명절이다.
중양절에는 등고(登高)라는 풍습이 있는 바, 그것은 산꼭대기로 올라가
수유화(茱萸花) 가지를 꺾어 머리에 꽂고, 고향과 친구를 생각하는 것이
었다.
중양절은 금릉성을 흥청거리게 했다.
명절이란, 모든 사람의 가슴을 들뜨게 하는 따사로운 바람이라 할 수 있
는 것이다.
회혼의림 구석진 곳.
백무영은 석고처럼 경직된 표정을 한 채 목검을 쥐고 있었다.
놀라운 건 그의 두 눈이 검은 천에 의해 감춰져 있다는 것이다.
바로 앞쪽에는 추노가 서 있었다.
추노의 손에는 북이 들려 있었는데, 그 크기는 보통 북보다 작았으며 매
우 묵직해 보였다.
"오늘부터는 추혼마고(追魂魔鼓)를 이기는 수련을 해야 합니다. 추혼마고
는 사마외도(邪魔外道)의 음파절기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추혼마고가
울리면 의지력이 희박해지고 환각이 생기게 되지요. 또한 공포심이 몸을
엄습하는 가운데, 내공 운용이 힘들어지게 됩니다."
"……."
백무영은 반석처럼 버티어 서 있었다. 그는 피나는 수련 가운데 일류고수
의 기도를 얻게 된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 강호 출도를 한다 하더라도, 중원의 기라성 같은 무사 가
운데 그를 격파할 수 있는 사람은 백 명도 되지 않을 것이다.
"추혼마고를 치는 가운데 철탄(鐵彈)을 던지겠소이다. 속하가 전수해 드
린 절기를 써서 철탄을 모조리 막아 내십시오."
"시작하시오, 추노!"
백무영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거렸다. 그는 자신의 청력에 상당한 자신을
갖고 있었다.
추혼마고 소리가 청력을 흐리게 한다지만, 철탄이 던져지는 소리 정도는
쉽게 간파할 수 있지 않겠는가?
추노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추혼마고의 오른쪽 면에 손바닥을 대었다.
주름진 손바닥이 검은 가죽면에 닿은 찰나.
둥-!
소리와 함께 백무영의 몸이 휘청거렸다.
"으윽! 기, 기혈이 뒤집어지다니."
기가 막히는 노릇이었다. 북소리를 듣는 찰나, 내장이 자리를 바꾸며 피
가 울컥 치밀어올랐다.
백무영은 정신이 혼미해짐을 느끼며 몸을 휘청였으며, 그 순간 무엇인가
가 그의 손목을 때렸다.
"우욱!"
백무영은 철탄을 손목에 맞고 인상을 찡그리며 목검을 떨어뜨렸다.
찰나, 추노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검은 무인(武人)에게 있어 목숨과도 같은 것! 팔목이 잘려지기 전에는
결코 검을 떨어뜨려선 아니 되오. 내가 공자를 헛가르친 것 같구료."
"다, 다시 하겠소."
백무영은 더듬거리며 목검을 주워 들었다.
그는 목검을 든 채 걸음을 내디디기 시작했다.
움직이는 가운데라면 추노도 자신을 쉽게 쓰러뜨리지 못한다는 생각에서.
하지만 그의 생각은 삼 보를 걷기 전에 쓸데없는 생각으로 판가름나고
말았다.
추혼마고가 울리는 찰나 골이 으스러지는 듯한 통증이 느끼어졌으며 북
소리와 더불어 날아든 철탄이 또다시 그의 손목을 맞춘 것이다.
백무영은 화끈한 통증을 느끼며 또다시 목검을 떨어뜨렸다.
"죄송하오, 추노."
백무영은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추노는 근엄한 표정 가운데 눈을 부라렸다.
"연습에서는 실수가 용납되나, 실전(實戰)에서는 실수가 용납되지 않습니
다. 단 한 번의 실수만으로도 목숨이 끊어질 테니까. 제가 누누이 말씀드
렸듯이, 사람의 목숨이란 가느다란 명주실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아차 하
는 순간에 끊어져 버릴지도 모를."
"가는 명주실!"
"공자는 많은 적을 갖고 있습니다. 공자는 강호에 나가는 대로 무수한 적
과 만나게 될 것이며, 그들은 강호계의 경험이 풍부한 절정고수들입니다.
지금 이 정도의 실력 가지고는 단 하루도 버티지 못합니다."
추상(秋霜)과 같은 호령이었다. 늘 자상하게 대해 주는 추노였지만, 무공
을 가르칠 때에는 준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사실 백무영의 실력은 추노의 이러한 불호령 가운데 욱일승천(旭日昇天)
성장해 가고 있는 것이다.
"제가 하나의 심법(心法)을 일러 드리겠소이다. 그것은 양의심공(兩意心
功)이라는 것이외다."
"양의심공?"
"일컬어 분심공(分心功). 마음을 두 개로 나누는 내공법으로, 양의심공을
익힌다면 동시에 두 가지 무공을 시전할 수 있습니다."
양의심공은 도가절학(道家絶學)이다. 그것은 공동과 무당(武當)에만 비전
되는 내가심공으로서, 강호계에 절전된 지 삼 갑자가 넘은 백도비학이었
다.
양의심공은 내공 증진에는 도움이 전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양의심공을
익히는 사람이라면 마음을 둘로 나눌 수 있기에 적과 싸우며 사색을 할
수 있고, 오른손으로 검법을 시전하고 왼손으로 장법을 시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양의심공을 익히는 데에는 십오 일이 걸렸다.
양의심공을 외우기까지 백무영은 추혼마고와 비폭철탄에 의해 무수한 고
통을 경험해야만 했다.
솔직히 말해, 고통이라는 건 이제 괴로움이 될 수 없다.
문제는 정신적인 데에 있다.
백무영은 언제부터인가 한시빨리 자신의 성취를 마감하고, 강호계로 나아
가야겠다는 꿈을 품게 된 것이다.
그러하기에 그는 하루 두 시진(時辰)만 수면하고 그 나머지 시간은 문무
의 성취에 열중하면서도 불만을 품지 않는 것이다.
달빛이 어깨를 금빛으로 물들이고 있다.
자시(子時).
삼라만상이 잠들었을 시각.
백무영은 눈을 안대로 가린 채 뜨락 한가운데 서 있었다.
뜨락 둘레에는 자욱한 운무가 번지고 있었다.
백무영은 그것이 반음양자부진(反陰陽紫府陣)이라는 진세에 의해 일어나
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반음양자부진은 만박이 창안한 기문진세 가운데 하나로서, 음파를 차단해
버린다.
그러하기에 회혼의림 안에서 아무리 큰소리가 일어난다 하더라도, 외부에
서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화려한 달빛 가운데, 추노는 천천히 추혼마고를 쳐들었다.
백무영은 알지 못하되, 추혼마고는 십대마물(十大魔物) 가운데 하나로 꼽
히고 있는 마병(魔兵)이다.
추혼마고는 금단의 병기로 알려져 있으며, 과거 추혼마고를 쓰는 여마(女
魔)로 인해 백도인 천여 명이 학살당한 바 있다.
여마는 만박에 의해 죽었고, 그 때부터 추혼마고는 만박의 소유물이 된
것이다.
만박은 본시 그것을 파괴해 버릴 작정이었으되, 백무영을 속성시키기 위
해 사용하게 된 것이다.
추혼마고의 소리를 이기는 경지에 이른다면 사마외도의 이혼수법(離魂手
法), 미고대법(媚蠱大法)에 당하게 되더라도 오랫동안 의지를 잃지 않고
버틸 수 있게 된다.
"……."
백무영의 낯빛이 전과 다르다. 그의 표정에는 차갑다거나 뜨겁다거나 하
는 정서가 깃들여 있지 않았다.
이끼가 가득한 바위가 이러할까?
백무영의 표정에는 나이답지 않은 관조의 빛이 가득 흐르고 있었다.
도부 시절 그의 가슴에 가득하던 살기(煞氣)는 안으로 갈무리되어 겉으로
는 전혀 드러나지 않게 되었고, 얼핏 보면 별 특징이 없는 미남자로 보일
뿐이다.
두드러지지 않은 것!
그것이야말로 만박이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이기도 했다.
'…….'
백무영은 마음 속마저 텅 비우고 있었다.
피나는 고행(苦行)을 거듭하지 않았더라면, 이러한 경지에 쉽게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시작하겠소!"
추노는 천천히 추혼마고를 쳐들었다.
벌써 여러 날째, 백무영은 추혼마고 소리 가운데 휘청거려야만 했다.
추혼마고성은 내공을 분산시키고 혼백을 어지럽힌다.
선승(禪僧) 중에서도 달관을 한 노승이 아니라면, 추혼마고 소리를 듣고
정신을 제대로 간직하지 못할 것이다.
추노는 손바닥에 내공을 가해 추혼마고를 두들겼고, 지척을 뒤흔드는 북
소리가 멀리까지 메아리치며 뜨락 가득하던 꽃이 낙화되기 시작했다.
꽃송이가 비처럼 펄펄 날리는 가운데, 추노의 손가락이 퉁기어졌다. 염주
알과 비슷하게 생긴 검은색 탄환 하나가 허공울 가르며 백무영의 손목을
향해 퉁기어졌다.
"양지혈(陽池穴)!"
백무영은 나직이 외치며 목검을 쳐들었다.
목검은 빛살처럼 빠르게 허공을 갈랐다.
팟-!
목검의 끝 부위와 철탄이 부딪쳤으며, 백무영의 입가에는 환한 미소가 번
졌다.
그는 처음으로 철탄을 막아 낸 것이다.
'벌써 양의심공을 완벽히 시전하다니!'
추노의 머릿카락이 빳빳이 일어났다.
그의 짐작으로는 적어도 두 달은 지나야 백무영이 양의심공을 실전에 쓸
수 있으리라 여겼는데, 백무영은 그의 상상을 초월하는 빠른 성취를 이룩
한 것이다.
펑펑펑-!
철탄이 쉬지 않고 떠올랐다.
백무영은 추혼마고 소리와 싸우는 가운데, 철탄을 막기에 정신이 없을 지
경이었다.
열 개의 철탄 가운데 세 개는 목검으로 퉁기어 냈고, 네 개는 피할 수 있
었으며 세 개는 피하지 못하고 몸에 맞았다.
전과 엄청나게 달라진 것이라면, 단 한 번도 검을 떨어뜨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뜨락에서 호탕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백무영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 그 웃음소리는 천룡의 울부짖음
소리를 닮아 가고 있었다.
뜨락 구석진 곳에 만박이 머물러 있었다.
그는 추노와 백무영이 실전처럼 연무하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머지않아 떠날 때가 되었군. 아아……!"
만박은 손바닥으로 머리결을 매만졌다.
그가 알고 있는지 모르지만, 최근 들어 그의 귀밑머리는 완전히 하얗게
세어 버리고 말았다.
백무영을 가르치느라 신경을 곤두세웠기 때문에 머리카락이 눈처럼 세어
버린 것이다.
"한 마리 용을 길러 난세(亂世)의 하늘을 끊어 보겠다는 생각이 그릇된
환상이라 여겼었는데… 아아, 지금은 환상이 사실화될 수 있을지도 모른
다는 생각이 드는군."
그는 조용히 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에는 미인의 눈썹 같은 달이 떠 있었다.
달빛은 금색의 새털이 떨어져 내리듯이 퍼져 내리고 있었고, 나무의 잔가
지에 부딪치며 금색 파문을 만들었다.
"그는 모든 방면에서 날 능가했지. 중원제일(中原第一)의 기남아(奇男兒)
소리를 듣던 나는 모든 종류의 경쟁에서 그에게 격파당했다. 마지막으로
그를 능가했다고 여겼던 부분은 그에게 후사가 없다는 것이었는데, 그것
마저 꺾이는군. 하지만 무영은 그만의 아들이 아니다. 그는 우리 모두의
아들이다."
그 해 겨울엔 눈이 많이 내렸다.
금릉성은 눈이 거의 없는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눈이 내린 것이
다.
그리고 봄은 또다시 돌아왔다.
今年花似去年好 去年人到今年花
始知人老不如花 可惜落花君莫掃
금년의 꽃은 지난해처럼 좋은데, 지난해 왔던 사람 금년에는 늙었노라.
사람이 늙어 꽃보다 못한 줄을 비로소 알겠거니… 애석해라, 그대여! 지
는 꽃을 쓸지 마라.
지붕이 얕은 석옥 안에서 시를 읊는 소리가 흘러 나왔다.
맑고 낭랑한 목소리는 가히 천상옥음(天上玉音)이라 할 수 있을 정도였
다.
석옥 안, 검은색 유삼을 걸친 미청년이 단아한 자세로 앉아 글을 읊고 있
었다. 또랑또랑한 눈동자에 우뚝 일어난 콧날, 가히 천의무봉(天衣無縫)의
용모를 지닌 일세의 미장부(美丈夫)라 아니할 수 없다.
백옥을 깎아 만든 듯한 미끈한 용모.
그의 입술이 벌어질 때마다 하이얀 치열이 들여다보이는 것 또한 매력적
이었다.
뭇여인이 그를 보고 한숨을 쉬지 않는다면, 도리어 이상한 일일 것이다.
다만 그의 입매의 일그러짐이 묘한 냉기(冷氣)를 느끼게 하는 것이 용모
의 흠이라면 흠일 것이다. 그의 눈빛에서 강한 정광이 폭사되어 나왔다.
'오늘은 만박 사부를 만나는 날이다!'
그는 천천히 책장을 덮고 몸을 일으켰다.
일순 그는 허리를 가볍게 틀었으며, 한 줄기 연기가 흐르는 듯한 가운데
그의 몸뚱이는 빠끔히 열린 창을 통해 사라져 버렸다.
그가 시전한 신법은 능운비연신법(凌雲飛燕身法).
일 갑자 수위의 내공이 없다면, 시전하지 못할 경공(輕功)이다.
일 갑자의 수위란 육십 년의 수위를 말한다.
흑의미장부는 나이답지 않게 가공한 내공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정자의 지붕 위에도 상당히 많은 눈이 내렸다. 가뜩이나 부실한 천장이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지 않을까, 의구심이 들 정도이
다.
정자 위에는 만박이 머물러 있었다.
그는 붓을 쥐고 있었으며, 고뇌에 가득 찬 얼굴로 그림을 그려 나가고 있
었다.
떨리는 손길과 정지된 호흡.
불상의 마지막 눈 부위를 조각하는 승려의 모습이 이러할까?
화선지 위에는 한 여인의 얼굴이 그려지고 있었다.
나이는 이제 스물 정도, 계란처럼 갸름한 얼굴에 눈썹이 초생달이 내려앉
은 듯 우아하다.
고혹(蠱惑)스러운 듯 처연한 눈매가 슬퍼 보이며, 오똑한 콧날이며 상냥
한 입매에는 오만한 기개가 엿보이고 있었다.
만박은 숨도 쉬지 않고 그림의 마지막 부분을 완성시키고 있었다.
그가 그리는 부분은 여인의 손목 부분이었다.
희고 갸름한 손이 살아 있는 듯한 모습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여인의 손끝은 우아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삼매지경(三昧之境)!
만박은 백무영이 바로 뒤에 다가섰는지도 모르고 그림에 전념했다.
어느 한순간, 그의 입매에는 만족스럽다는 미소가 번졌다.
백무영은 그걸 훔쳐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만사에 불평 불만 투성이인 만박 사부의 입가에 만족감에 찬 미소가 번
지다니…….'
백무영은 그림의 여인을 유심히 바라봤다.
정녕 아름답고 우아한 여인이다.
백무영으로서는 처음 보는 얼굴.
그런데 이상하게도 얼굴 윤곽이며 눈매가 낯익어 보였다.
'매력적인, 아니 마력적인 용모다.'
백무영이 내심 감탄하고 있을 때, 만박의 목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무영, 넌 이 여인이 아름답다고 여기지 않느냐?"
만박은 백무영이 뒤에 와 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 아름답습니다."
백무영의 목소리에 떨림이 있었다.
"후후… 그렇다. 이 여인은 중원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손꼽혔다.
아니, 이 여인은 고금제일화(古今第一花)라고 불리어도 부족함이 없었다."
"고금제일화!"
"정녕 아름다운 여인이었지. 모든 사람은 미(美)에 완벽함이 없다고 말했
으되, 그러한 관념은 이 여인의 아름다움 앞에서 완전히 허물어지고 말았
다."
만박은 호수를 보며 말을 이어 나갔다. 그의 눈빛에는 쓸쓸한 정서가 가
득 담기어 있었다.
"이 여인의 아름다움은 악마적(惡魔的)이었지, 그러하기에, 이 여인으로
인해 중원사(中原史)가 고쳐 쓰여지게 된 것이다."
실로 엄청난 말이다. 한 여인으로 인해 중원의 역사가 달라지다니?
"이 여인은 천하사대세력의 판도를 바꿔 버렸다. 후후……!"
"천하사대세력이라면?"
"백도(白道)의 관산검맹(關山劍盟), 마도(魔道)의 연환마교(連環魔敎), 그
리고 서하(西夏) 여왕궁(女王宮), 중원의 비밀세력인 혈의맹(血衣盟). 훗
훗, 사대세력의 종사들이 이 여인으로 인해 한바탕 뒤엉켜 싸우게 되었고
… 그러다가 혈겁이 거듭된 것이다."
만박은 그렇게 말하다가 백무영을 바라봤다.
백무영의 시선은 초상화에 집중되어 있었다.
만박은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을 이었다.
"한 여인으로 인해 천하가 어지러워진다면, 넌 그 여인을 어떻게 하겠느
냐?"
"베어 버리겠습니다."
백무영은 잠깐 생각하다가 대답했으며, 만박은 움찔하다가 고개를 끄덕거
렸다.
"네 아버지와 똑같군, 무정(無情)하기가."
나지막한 목소리이다. 백무영은 그 목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만박은 차츰차츰 본래의 표정으로 변화되었다. 그는 언제 고뇌에 빠졌더
냐 싶게 냉혹한 표정이 되었다.
"저 그림을 태워 버려라!"
"태우라니요? 심혈을 다해 그리신 그림을 어찌 태우란 말씀이십니까?"
"그녀는 나에게 늘 심마(心魔)였다."
"아……!"
"너무나도 오랫동안 그녀의 그림자에 휘감겨 있었지. 어쩌면 이제 그 그
늘에서 벗어나게 되었을지도……."
"으음……."
"네녀석에게 충고하건대, 절대 여심(女心)의 덫에 걸려들지 마라. 하지만
넌 어쩔 수 없이 그런 꼴이 되고 말 것이다. 네놈에겐 운명적인 도화살
(桃花煞)이 끼여 있으니까."
만박은 피식, 웃었다. 그 모습은 혹독한 교두(敎頭)가 아니라, 자애스러운
친척 어른으로 보였다.
백무영은 초상화를 태운 다음에 정자 위로 되돌아왔다.
그 사이, 만박 앞에는 기묘한 물체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것은 반짝거리며 안이 투명히 비쳐 보이는 옥배(玉杯)에 담긴 검은색
액체였다.
"이, 이게 무엇인지요?"
"술이다."
"술이오?"
"후후… 오늘은 네놈과 헤어지는 날이다."
"아, 어느 새 벌써……."
"그래서 이별주를 준비한 것이다."
"이, 이별주?"
"날 감상적이라 생각하지 마라. 널 떠나보내는 게 슬퍼 이별주를 주는 게
아니니까. 어쩌면 너는 이 술을 마시고 죽을 수도 있다."
만박은 그렇게 말하며 품에서 작은 흑진주(黑眞珠) 한 알을 꺼냈다. 한눈
에 보아도 알 수 있는 흑진주에 달빛이 어른거리자, 아름다운 광채가 사
방으로 퍼져 나갔다.
'흑진주로 무엇을?'
백무영이 고개를 갸우뚱거릴 때, 만박은 손가락을 퉁겨 흑진주를 술잔에
떨어뜨렸다.
츠읏-!
소리와 함께 흑진주가 흐물흐물 녹아 버리는 게 아닌가?
"흑진주가 녹다니?"
백무영의 입이 따악 벌어졌다.
흑진주는 어지간한 독에는 녹지 않는 보석이 아닌가?
그런데 한 잔의 술 속으로 빠져들며 순간적으로 녹아 버리다니?
"마셔라! 한 방울도 남기지 말고."
"으으……!"
백무영의 뺨이 약간 창백해졌다.
흑진주를 녹이는 독이 내장으로 들어간다면?
그 결과는 상상만 하더라도 끔찍한 일이 아니던가?
"물론 마시기 싫다면, 마시지 않아도 좋다."
"마시겠습니다."
백무영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내장이 탈지도 모른다."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왜?"
"제가 사사부님을 존경하기 때문이지요."
백무영은 그렇게 말하며 잔을 번쩍 쳐들었다.
그는 만박이 뭐라 말할 짬도 주지 않고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쓰군요."
백무영의 얼굴은 야릇하게 일그러졌다. 그러나 그의 입매에는 늘 그러하
듯 엷은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진심이외다, 존경한다는 말은.'
백무영은 천천히 잔을 내려놓았으며, 그 순간 그의 얼굴이며 손이 시꺼멓
게 물들기 시작했다.
혈맥을 타고 독기가 퍼져 나가는 속도는 엄청나게 빨랐다.
백무영은 독에 대한 내성이 강한 체질임에도 불구하고, 찰나적으로 독에
중독이 된 것이다. 그는 가벼운 신음 소리를 내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우직스러운 것도 제 아비를 고스란히 닮았다."
만박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 녀석의 혈관 속에는 대영웅(大英雄)의 피가 흐르고 있다. 어떠한 악
(惡)을 가르치든 그 피는 흐려지지 않는다."
그가 속으로 말하고 있을 때, 추노가 정자 위로 사뿐히 날아 내렸다.
추노는 백무영이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도 전혀 놀라워하지 않았다.
그는 일이 이렇게 될 줄 이미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는 정중히 장읍을 취한 다음, 고개를 쳐들었다.
"시작할까요?"
"시작하게."
만박은 천천히 팔뚝을 내밀었다.
"후회는?"
"후회 따윈 없어."
만박은 담담한 눈빛을 흘리며 편안한 자세를 취했다.
추노는 그의 얼굴을 힐끗 올려다보다가 품에서 가는 수정관(水晶管)을 꺼
냈다.
수정관의 굵기는 갓난아기의 새끼손가락만 했다.
수정관의 한쪽은 일순 만박의 혈관 속으로 파고들었으며, 또 한쪽 끝을
통해 피가 쏟아져 나왔다.
추노는 피가 분출되는 쪽을 재빨리 이동시켜 백무영의 심장 위쪽 부분에
틀어박았다.
이혈대법(移血大法)!
묘강(苗彊) 지방에 비전되고 있는 수법이다.
만박은 백무영에게 이혈대법을 시전하고 있는 것이다.
"내 몸 안에는 백독진기(百毒眞氣)가 있지. 난 어렸을 때부터 실험하기
좋아했으되, 살아 있는 인간을 실험 도구로 삼을 수 없기에 나의 몸을 실
험 대상으로 삼은 것이지. 후후, 삼십여 년 간 늘 독물(毒物)을 먹어 온
탓에 나의 피 속에는 강한 독기가 배이게 되었으며… 나의 피는 어떠한
독이든 몰아낼 수 있는 해독액으로 화하게 되었지."
"……."
"이 녀석이 먹은 만독혈신초(萬毒血神草)의 즙은, 나의 피만이 해독할 수
있는 독이야. 이 녀석이 독즙을 먹지 않았더라면, 무조건 때려죽였을 것
이야. 한데, 이 녀석은 죽을 걸 알면서도 독즙을 마셔 버렸단 말야. 고약
한 녀석! 나를 감동시켜 나의 마지막 재산까지 털어놓게 하다니……."
이혈대법은 반나절에 걸쳐 진행이 되었다.
이혈대법이 끝났을 때, 만박은 병자처럼 얼굴이 핼쓱해졌으며, 전신의 땀
구멍에서 모조리 비지땀을 흘렸다.
반면, 백무영은 기혈이 충만된 듯 혈색 좋은 얼굴로 편안히 잠들어 있었
다.
백무영은 회혼의림의 외부지역에서 정신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는 마차(馬車)의 어자석(馭者席)에 축 늘어진 채 머물러 있었다. 그의
오른손에는 종이쪽지 한 장이 쥐어져 있었는데, 종이에는 글이 적혀 있었
다.
<낙양쾌화림(洛陽快花林)으로 가라. 그 곳에서는 네게 밤(夜)을 가르쳐
줄 것이다.
낙양에 가는 도중에 어떠한 일을 만나든 무공을 쓰지 마라. 넌 아직 미숙
하다. 빚을 갚을 정도가 되려면, 더 강해져야 한다. 도중에 도망갈 생각은
아예 마라. 도망간다면, 만 리를 추적해서라도 살해할 테니까.>
백무영은 종이를 구겨 쥐며 중얼거렸다.
"도망은 가지 않소이다. 도망갈 생각이었더라면, 오사부에게 매를 맞던
시절에 도망갔을 것이외다."
백무영은 천천히 손을 쳐들었다. 그는 언제 쓰여졌는지 모르게 쓰여진 방
립(方笠)의 끝부분을 잡고 밑으로 내렸다.
그리고 이 세상 모든 여인이 보고 싶어할 정도로 준미(俊美)한 얼굴은 방
립에 의해 반 이상 감추어지게 되었다.
이제 보이는 건 약간 각져 보이는 턱과 굳게 다물어진 아랫입술뿐이다.
백무영은 천천히 말고삐를 잡았으며, 은은한 말굽 소리와 함께 마차는 관
도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