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리는 날 이사한다는 건
정동식
장마 기간 중 2~3일 소강상태를 보이더니 오늘은 소나기 퍼붓듯 많은 비가 내린다.
소서인데 비가 와서인지 그렇게 덥지는 않다. 글을 쓰는 도중에 열어 놓은 창 너머로 서늘한 바람이 들어와 작은 더위날을 무색하게 한다. 도서관에 갔다가 점심 먹으러 집에 오는 길에 우리 아파트 건물에 길쭉한 사다리가 시커먼 먹구름을 향해 걸려 있었다. 지면과 기울기가 꽤 되는 것으로 보아 최소한 15층 이상은 될 듯 보였다. 집에는 치과에 갔다 온 아내가 아들 방에서 곤히 잠들어 있다. 깨울까 말까 하다가 밥보다 잠이 더 보약이라 생각하고 혼자 점심을 차려 먹었다. 식사 중에 사다리차 작업대가 오르락내리락하며 점심도 거른 채 멈춰 설 줄 몰랐다. 어쩌면 시간상으로 보아 저분들은 미리 먹고 왔을지도 모르겠다. 비 오는 날 이사하는 광경은 흔치 않다. 늘 하는 얘기지만 우중에 치르는 모든 행사는 번거롭고 불편하다. 소시민에게는 버스 탈 때 우산 접고 펴기도 만만치 않고, 시장보기, 자동차 운전, 그리고 밖으로 못 나가니 운동도 불편하다. 특히 집안의 대소사가 있는 날이면 하객 맞이도 쉽지 않다. 나들이할 때도 챙길 것이 많아 평소 에너지의 두 배를 들여야 겨우 비슷한 정도의 만족감을 느낄 수 있으니 말이다.
이사를 위탁받은 업체나 이사를 하는 당사자도 마찬가지다. 이런 불편한 날에 이사할 수밖에 없는 사연이 있을 것이다. 오늘같이 비가 내리는 난감한 상황에 업체들은 어떤 지혜로 이런 난관을 헤쳐 나가는지 궁금했다.
나는 점심 식사 중이었고 그분들은 이사 중이다. 그분들이라 하지만 다수가 아니라 사다리차 작업대에서 일하시는 분뿐이다. 고층에서 이삿짐을 내리는 장면은 내 집 안에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베란다 너머 바로 코앞에서 이루어지는 작업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이삿짐을 차에서 사다리차 작업대에 옮겨 실어 고층으로 올리는 작업이었다. 이사를 오는 사람이다. 나는 소화도 시킬 겸 한 수저 뜨고 이사장면을 보면서 일부러 느릿느릿 점심을 먹었다. 이사는 사다리차와 이삿짐 차 2대가 한 세트를 이루어 계속되고 있었다.
업체는 우천에 대비해 박스형으로 된 육면체 작업대에 우의를 입혔다. 이삿짐이 젖지 않도록 사다리차 작업대의 세 방향에 방수천 같은 것을 둘러쳐 놓은 것이다. 작업대 바닥과 짐을 싣고 내리는 두 면은 일을 위해 천을 두를 수 없었다. ‘위~~~ 이이 이잉’하며 사다리차 작업대가 내려와 짐을 싣는다. 이사용 박스 세 개 정도가 실리고 나머지 공간에는 작은 짐을 담고 스위치를 조작하니 작업대가 위로 올라간다. 아래쪽에서 짐 싣는 사람은 혼자인 듯 아닌 듯 아리송하다. 나는 두 사람은 있어야 짐을 실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담배를 홀로 말없이 피우는 것으로 보아 혼자인 게 분명하다. 둘 일지도 모른다는 추정을 해봤는데 아무래도 둘은 아닌 것 같았다. 왜냐하면 짐이 올라간 뒤에 두 사람의 대화로 추정할 만한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인간은 수다와 소통의 존재인 만큼 만일 두 사람이라면 필시 어떤 얘기를 주고받았을 터이기 때문이다. 밑에서 일하는 기사님은 작업대가 올라가 있는 동안 이삿짐 차 안에 있는 짐을 사다리차 작업대에 싣기 좋게 이삿짐을 바깥쪽으로 이동시키고 있었다. 아마 계속해서 사다리차를 조작하는 것으로 보아 이분이 사다리차 기사님일 가능성이 높다. 이삿짐 차량 운전기사님도 현장 어딘가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고 있을지 모른다. 모두 인건비를 아끼려는 생존전략이다. 요즘 이런 업체에서는 멀티플레이어들을 선호할 듯싶다.
작업대 밑바닥을 보니 레일 같은 것이 대여섯 개 놓여 있었다. 아마 이삿짐차에서 사다리차 작업대로 무거운 물건을 옮길 때 용이하도록 접촉면을 줄이려고 설치한 것 같았다. 이사작업 일부에 대한 궁금증이 어느 정도 풀려, 남은 식사를 마저 하고 밖을 보니 이미 이삿짐센터 일행은 모두 떠나고 없었다.
오늘 이사 오는 이웃을 보니 별안간 우리 이사하던 때가 떠올랐다. 나는 지금까지 모두 일곱 번 이사를 했다.
네 번은 근무지가 바뀌는 바람에, 한 번은 하도 일이 안 풀려서, 또 한 번은 주인이 비워 달라고 해서, 그리고 마지막은 대구에서 우리 집을 마련하고 이사를 했다.
아무래도 가장 인상에 남는 이사는 첫 번째 이사와 마지막 이사이다. 첫 이사는 부산에 살다가 첫 발령지인 서울로 이사 갈 때다. 생애 처음 한 이사였다.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고 나도 출근한 지 불과 한 달이 되지 않아 휴가도 못 내고 장인 어르신 주도하에 이루어진 이사였다. 장인 어르신은 그 당시 환갑 전이셨지만 온 머리에 서리가 내렸다. 그런 백발 덕분에 상당히 연세 있는 분처럼 경로 대우를 받으시곤 했다.
나는 애지중지하던 큰딸의 이삿짐을 싣고 천리길을 마다하지 않고 올라오신 장인 어르신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부산에서 국민대 인근 정릉 복지아파트까지 이삿짐 차에 직접 탑승하고 오신 분이 바로 장인 어르신이셨다.
마지막 이사인 일곱 번째 이사는 우리 집을 사서 한 이사였으니 당연히 의미가 크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지금의 아파트로 이사 온 후 비교적 순조롭게 항해를 하고 있다.
운 좋게도 7번 이사하며 비 내리는 날은 없었다. 오늘 이분들은 왜 비 오는 날을 이사 날짜로 선택했을까, 궁금해서 달력을 보았더니 음력으로 소위 손 없는 날이다. 비록 비가 내려서 힘은 들었겠지만 그분들이 이사일을 오늘로 잡아 마음이 편하다면 그냥 좋은 날 아닐까? 길일이 따로 없다. 내가 마음 편하면 길일이다.
이왕 우리 라인의 이웃으로 오셨으니 아무쪼록 가족 모두 평안하고 행복하게 잘 지내시면 좋겠다.
(2023.7.7.)
첫댓글 집을 마련해서 이사를 가면 신바람이 나지만 집주인에게 쫒겨나서 가게 된다면 마음이 상할 수도 있습니다. 비 오는 날의 이사는 쉽지는 않지만 사정이 있을 겁니다. 계속 글을 쓰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