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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독립영화계의 등용문인 선댄스 키드 시절을 지나서 할리우드 안으로 안착한 이들은 수없이 많다.
미노스님이 두차례 추천한 바 있는 '데이빗 고든 그린' 역시 유사한 과정을 지났다.
그의 출세작인 "조지 워싱턴(2000)"에서 미국시골 지역 흑인 소년의 건조하고 위태로운 존재론을 백지에 올린 후
전주 영화제에서 상영된 바 있는 "올 더 리얼 걸스(2003)"로 연달아 주목받았고
이후 아래 소개해드리려는 3편의 작품으로 놀랄만한 재능은 아니지만,
주제와 서사를 시적으로 풀어내어 정지된 듯한 분위기를 선사하거나
기존 선배들의 드라마 작법에 거의 한발짝 모자라거나 유사한 경험의 제공으로
할리우드의 어떤 장르라도 세심한 선구안으로 재생시킬 능력이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미노스님이 영자막으로 보신 "죠지 워싱턴"의 분위기가 어떤 것인지는 초반 5분 정도만 본 것으로 대충 짐작할 뿐이지만.
백인 감독이 만든 흑인 소년 성장기 영화이긴 하지만, 소개된 내용에서는 익숙한 인간에 대한 작법이 감지되어
앞으로 할리우드의 중심에 서게될 감독의 데뷔작으로서 필독해야될 영화가 한편 더 추가되었다.
세상은 넓고 봐야될 영화는 많다식의 상상 목록에 포함시킬 정도는 아니지만, 역시 아쉬운 건 아쉬운거다.
현재까지 세 편의 영화를 만난 것만으로 간단히 평을 하자면
지금 30대 중반인 데이빗 고든 그린은 엄청난 기대감을 갖게하는 감독이라기보다
선배들이 어떻게 미국 영화의 역사를 만들어갔는지 잘 이해하고 유산들을 어떻게 살려낼것인지
본능적으로 감지하며 작가적 감수성과 장르 어느 쪽에서도 빠지지 않을 재능을 겸비한 듯 하다.
하지만, 워낙 데뷔작이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는 비아냥을 들은 감독들이 많은지라
아직 데이빗 고든 그린은 그 자신의 몹시 궁금한 출세작인 "죠지 워싱턴"을 뛰어넘은 작품을 만들지 못했거나
아니면 데뷔작 역시도 과한 미국 평단의 주례사를 받은 것이 아닐지 궁금하다.
의구심을 접자면 데이빗 고든 그린은 자신이 지금 어떤 주제를 다루고 있으며 그것을 활황시키는 데
어떤 흐름과 장소, 인간들이 거론되어야 익숙한 시선에 잡힐 수 있는지 영화 학습을 통해 체득했음이 분명하고,
역으로 바로 그런 작법 때문에 누구 누구의 영향, 낡아빠진 우물에서 괜히 건진 주제에 집착했다는
형해화의 비평을 피할 수 없겠지만, 앞으로 그의 행보에 따라 언제나 그렇듯 평가는 파도를 칠 것이다.
굳이 밝히자면 지금 내게 데이빗 고든 그린은 영화를 잘 알고 만들지만, 아직은 거기에 머무른 평지의 습작이다.
3편의 영화에서 데이빗 고든 그린은 손바닥의 인장을 스크린 내 캔버스에 남김으로서 자신의 영역을 표시했다.
인상주의 화풍에 경도된 듯 영화의 중앙에 그림 한 점을 싣고 클로즈업함으로서 별도의 주제 선언을 하는 친절함과
적절한 신화 원형의 반복, 차가운 관계의 종말, 유쾌한 코메디의 좀비스러운 전복성을 구사하고 있다.
딱 반길만큼의 장인 기질을 지닌 젊은 감독의 작가로의 도약을 기원하면서 3편의 지난 작품을 만나본다.
이번에는 진짜 짧게 쓴다, 다들 지겨워하니까 ^^
1. 언더토우 Undertow(2004) : 발 다친 오이디푸스는 부친 살해 후 동전처럼 물에 잠긴다.
스핑크스는 오이디푸스에게 물었다. "다리에 관해서 무얼 아냐?"
우리말에서만 가능한 언어 우스개지만, 신화에서 다리 脚는 다리 橋가 된다.
신화의 주인공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기 전에 다리-발을 다쳐야한다.
버려진 신체의 표식이야말로 아버지의 법으로 들어가기 위한 통과 의례의 희생양이 된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제이미 벨이 연기한 시골 10대 역시도 초반에 지붕에서 뛰어내리다가 발에 못이 박힌다.
한동안 쩔뚝거리던 발은 작품 내를 지배하는 햄릿의 그림자인 삼촌이 등장할 때쯤에 시커먼 딱지가 앉는다.
신데렐라가 한쪽 구두를 떨어뜨려 왕자의 언어로 들어오는 것처럼 소년의 부상은 운명의 출입구 역할이 된다.
"언더토우"는 휜히 드러날만큼 "햄릿"을 시골 마을 소년의 성장기로 가져오면서
테렌스 맬릭의 "황무지"와 "천국의 나날들"이 떠올려지는 길의 여정과 풍경을 건조한 어조의 시적 운율로 포장하며
찰스 노튼의 "사냥꾼의 밤"에서 보였던 외부인의 침입과 도주-Love/Hate-를 글자 그대로 노출시킨다.
한마디로, "언더토우"는 선배-고인들의 원형을 어떻게 내 것으로 가져올 수 있는가에 대한 자신감에 가득찬 외마디이다.
데이빗 고든 그린이 첨언한 것을 굳이 덧붙이자면, 황량한 풍경과 불임과 비생산적인 사람들의 풍경 정도이겠다.
훌륭한 원형의 새로운 개작들이 시도하는 현실과 역사에의 접목이란 지점에서 감독은 의지를 보이지 않고
영화 내 햄릿과 오이디푸스의 여정은 그저 현대의 신화인 영화 내 서사로서 그저 숨을 죽이고 만다.
일찌감치 배제시켜버린 어머니의 죽음과 애인의 결별 등에서 영화는 철저히 남성 방랑기를 따라가면서
어떻게 그녀들이 실은 자기 자신의 욕망의 전치이며, 심지어는 삼촌조차 소년 자신일 수 있음을 걷어내지 못한다.
"햄릿"과 "오이디푸스"는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자신의 욕망을 감히 인정하지 못하고 멈칫거리는 남성의 독백이며
아버지의 거대한 법 안으로 진입하기를 망설이는 유아의 거울 낭만일진대
영화는 선배들의 동일한 그것들이 기존에 수행했던 남매-형제의 근친애적 보호영역을 되살리고,
위 가족 초상화 뒤에 숨겨져 후면으로의 가족 이미지를 지켰던 오래된 멕시코 동전을 강물에 버리고
기독교식 세례 방식으로 친아버지이자 삼촌에게 수장됨으로서 아버지 이전의 세계(외조부모)로 들어갈 수 있다.
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의 "리턴"의 간결하고 직선적인 오이디푸스의 풍경화가 살짝 그리울 정도로
"언더토우"는 감상적인 자연을 허락하지 않고 종극 이전에 극중 누구에게도 행복을 기약하기를 거부한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햄릿"을 벗어나서 "황무지"로 변신하고자 하는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하지만, 테렌스 맬릭의 그것에 일종의 시대적인 맥락이 흘렀다면, 데이빗 고든 그린에게서 그것은 감지되지 않는다.
아마도, 이것은 전작 "죠지 워싱턴"의 흑인 소년들과 이 작품에서의 불임 흑인 부부를 연결시킬 때 다르게 읽힐 것이다.
적어도 이들 형제가 도시가 아닌 해안과 강변, 하층민 지대를 선택했음을 기억한다면 해석의 여지는 확장가능하다.
"언더토우"는 흠잡을 때 없을 정도로 무난한 원형에의 집착을 드러내지만,
역으로 그 테두리 밖으로 어떻게 나아갈 수 있는지 아직은 대답하지 않는 익숙한 오이디푸스의 황무지 여정이다.
2. 스노우 엔젤 Snow Angels(2007) : 얼어붙은 마을에도 봄은 있을까?
겨울은 온전히 얼어붙게 하지 않는 유일한 것은 온정이다.
그것은 사람으로부터 발생되고 전염되며 확산되어 봄을 일으키고 불러온다고 믿어진다.
영원히 실종되어 어린 시체의 꿈에 도달한 땅에도 겨울은 가만가만 동면을 이기고싶다.
"스노우 엔젤"은 눈꽃 천사의 감동어린 해피 드라마같은 제목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구이자 불임의 땅에 머물러 멍청한 계절의 변화를 희구하지 않으려는 감독의 관심이 투영된 연작이다.
영화는 이안 감독이 "아이스 스톰"에서 얼어붙은 가족 관계를 스와핑과 죽음으로 내몰았던 지점을 기억하거나
클린트 옹이 "미스틱 리버"에서 서로 분리된 절연체로서 어떤 불꽃도 기대할 수 없는 강가를 연모하는 이들에게는
능히 기시감의 마을로 들어갈 수 있을만큼 낯익은 한 가족의 파멸 이후 찾아드는 뜻모를 마을의 봉합극이기도 하다.
샘 록웰과 케이트 베켄세일의 이혼 부부와 유아 실종과 죽음으로 이어지는 굵은 가지 위에
불륜, 별거로 이어지는 아버지이자 남편들의 탈락 기호와 더불어 10대 소년 성장기의 드라마는 전작과 동일하지만.
전작이 결국 더 넓은 외연으로 안착하는 것에 비해 실화를 바탕으로 한 "스노우 엔젤"은 정점의 일단락을 감행한다.
따뜻한 햇살이 십자가의 무덤을 비추는 암시이자 주제 상징의 그림이 재차 주인공 이혼남의 벽에 걸리고
타인의 죽음 이후에 모두가 자신의 자리로 쉽게 복귀해버리는 종결은 지극히 모호한 수사의 간략한 소외를 꿈꾸지만,
한 가족의 몰살이 그저 묻혀버리는 마을에 어떤 봄이 찾아올 지 영화는 말하지 않고 서둘러 닫는다.
주요 출연진 중 한 명인 10대 소년의 첫경험과 사랑이 극 내외를 헐겁게 떠도는 방랑자가 되고,
마지막 장면에서 사라져버린 애견은 왜 마을을 버렸는지 질문도 대답도 없을 때 영화는 열렸으나 닫힌 구조에 머문다.
전작에 이어 여전히 감독이 신뢰하는 유일한 기류는 노인 세대의 따뜻함인데,
아쉽게도 그것이 어디서 연유되는지는 이 작품의 시대 공간적 맥락의 실종과 더불어 제시되지 않는다.
"스노우 엔젤"은 한 가족의 패망기를 가슴 깊숙한 곳으로부터의 쇠망치로 기억하지 못하는
미국 노동자들의 불안한 일상에 기대어 선 낯익은 얼어버린 마을로의 초대곡이다.
3. 파인애플 익스프레스 Pineapple Express(2008) : 요양소에서 할머니가 데리러 오셨다 !!
이미 카페 내 세 회원분들이 그 해의 베스트 10 목록에 올리신 영화에 굳이 첨언할 말이 있을까?
게다가 개인적으로 미국식 농담과 상황 유머, 몸 개그에 그닥 재미있어하지 않는 목석으로서
내게 "파인애플 익스프레스"는 데이빗 고든 그린이 드디어 할리우드 메이저로 진출하였으며
갑작스럽게 마약 소동 코메디 장르극으로서 새로운 재데뷔전을 흥행리에 치룬 것으로 다가온다.
이전 그의 전작들에서 스스로 각본을 썼던 자리에서 이탈해
이 작품의 주인공이자 미국 내 코메디 배우로서 진 켈리, 월 페렐의 후발 주자로서 위치를 다져가는 세스 로건과
"40살까지 못해본 남자"와 "슈퍼배드" 이후로 탄탄한 코메디의 계보를 이어가는 주드 아파토우의 각본에 힘입고 있다.
문제는 평자들이 지적한 지점, 기대되는 신인 감독이 할리우드의 코메디 제작 시스템과 만났을 때
발휘되어야할 자신만의 인장으로서의 분위기, 정서, 상황의 봉우리일텐데
이것을 구별해내려면 전술한 세스 로건과 주드 아파토우의 작품들을 미리 일독한 이후
그들만의 코메디 월드의 꼭지점이 어떻게 데이빗 고든 그린에게서 변별되어 깃발이 꽂혔는가 발견할 때 가능할 것이다.
불가해한 상황극의 난장 "에어플레인(1980)" 이후 미국 코메디 영화들의 줄기들은
"메리에겐 무언가..(1998)" 화장실 유머의 지저분한 침튀기기에서도 여전히 울어야할 해피엔딩의 계보를 이어왔다.
곧 이어진 "아메리칸 파이(1999)" 이후의 십대 남성의 성욕 발견의 성적 코메디류는 21세기에도 힘을 발휘하고 있다.
"파인애플 익스프레스"에서 앞의 두 작품들과는 달리
시골이 아닌 도시 중심으로 들어와 라디오 방송과 음악들의 시끌벅적함을 즐기고,
쉴 새 없이 피워무는 대마초의 향연을 "레퀴엠"의 마약 상상계로 이끌기를 거부하고
낙천적인 평민들이 악당을 물리친다는 일면 불가능하며 스스로에게도 해괴하고 낯설은 전경을 선택한다.
작품 내에서 반향을 일으키는 대부분의 유머 코드들은 감독의 강조된 빗금 치기가 아니라 각본가들의 소통 언어로 보인다.
데이빗 고든 그린이 할리우드 중심으로 들어와
이전에 그가 보여주었던 어떠한 원형적 비극의 시선을 던져버린 채 선택한 대마초 소동극은
그 자체로는 미국식 유머로서 무리없이 유통되겠지만,
개개의 주요 캐릭터들에게 오히려 비극적인 초능력을 부여하는 끝마당 정리에서 슬쩍 엇나간다.
국가의 마약 금지 간섭으로 시작한 프롤로그가 이후 극 전반을 지배하지는 못하지만,
그나마 감독의 인장은 극의 전개와 동떨어진 정물이나 인간을 카메라에 담을 때나
여전히 신뢰하는 노인층으로서 요양원 할머니가 손자들을 데리러 오는 종결에서 찾아진다.
이전까지 등장했던 인상주의 그림은 벽의 그래피티로 변하지만,
감독은 여전히 붉은 색 손바닥으로 여기 자신이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 작품에 대한 코메디 장르로서의 평가와 감독 자신의 개입에 대한 비평은
아무래도 각본을 맡은 두 코메디 전업 영화인들의 작품을 조금 더 찾아본 뒤에나 가능하겠지만,
미국식 코메디에 제대로 한번 웃어본 적이 없는 지라 기실 기대가 되지는 않는다.
생각해보니 어떤 코메디극을 보아도 웃어본 적이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파인애플 익스프레스"는 소환장 배달부에 대한 기발한 발견의 희열과 중산층에 대한 조롱이 정리되지 않은 채
대마초의 환락을 그대로 코메디 액션으로 밀어붙여 자경단이 되버린 성인 남자의 상처 입은 승리 체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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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제가 느끼기에도 컷님 예상대로 '조지 워싱턴'을 뛰어넘는 이후의 작품은 없었던 거 같습니다..다음 작품도 상업영화쪽(코미디)이던데 걱정 반 ,기대 반이군요..^^
영화볼때만큼만 안촐랑대셔도 좋겠구만요. 미국식 코메디에 잘 안웃는 공통점을 또 하나 발견한것이 반갑기도 하고 떨떠름하기도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