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수업 - 매일 금강경을 읽는데 부족하다고 느껴집니다
질문
스님 저는 금강경을 매일 예외없이 읽으려고 노력합니다. 처음에는 이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고, 삶이 많이 개선된다고 느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걸로 충분한가?'라는 의문이 듭니다. 삶이 정체된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그럼에도 계속 독송을 이어가고는 있지만, 결국 멈출 것이라는 예측이 점점 강해집니다. 어떻게 해야 계속 수행할 수 있을까요?
보살승운동의 수행법
<금강경>은 대승경전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보살승운동의 교과서입니다. 보살승운동을 전개하던 이들은 재가불자들에게도 경전을 읽고 쓰고 배울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습니다. 종교개혁이 말씀의 권리를 모든 이들에게 평등하게 나눴듯이, 불교의 종교개혁에 해당되는 보살승운동 역시 법을 지니는 특권을 출가에서 재가로 확장했습니다.
보살승운동의 핵심은 결집된 경전 즉, 교과서입니다. 이 교과서를 중심으로 수행을 하는 것이 오종법사행입니다. 한국에서 흔히 금강경 독송 수행을 한다고 하는 것은 이 오종법사행 중 수지와 독에 해당되는 수행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종법사행을 차례로 설명하겠습니다.
수지란 경전을 지니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시에는 사실 이것만으로도 엄청난 수행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경전은 귀했기 때문입니다. 인쇄술이 발전하기 전 성경 한 권의 값이 집 한채 값이었다는 기록을 비춰보면 알 수 있듯이, 경전 뿐 아니라 책은 매우 희유했습니다.
현 시대에서 수지를 일반화하여 생각해본다면 경전을 비롯한 도서를 소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책을 많이 가지고 있는 장서가가 되기 위는 것도 수지의 일환입니다. 더불어 일상을 살아가는 동선에서 최대한 자주 접촉할 수 있도록 책장 인테리어를 하는 것도 수지 수행의 좋은 방법입니다. 견물생심이기에 자주 본다면 자연스럽게 수지의 다음 단계인 독으로 넘어갈 수 있을테니 말입니다.
독이란 경전을 읽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국불교는 기도를 할 때 경전을 독송하는 것으로 대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웃종교에서 기도란 원하는 것을 청하는 형태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불교의 기도 형식은 사뭇 다릅니다. 1시간 동안 기도한다면 원하는 것을 발원하는 시간은 기껏해야 1분 정도입니다. 나머지 59분은 경전을 읽어 공양올리는 독송의 시간을 가지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불자들은 원하는 것을 기원하는 것으로는 기도가 성취되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이는 인과에 걸맞지 않은 탐욕입니다. 기도가 성취되기 위해서는 과가 나올 수 있는 인의 공덕을 지어야 합니다. 이 공덕을 짓는 방법으로 일상에서 지혜로운 노력을 이어가는 것은 기본입니다. 여기에 더불어 노력할 수 있을만큼 충분한 노력을 다 했다면 이제 경전을 독송하는 공덕을 지어 이를 인으로 삼아 조금이라도 더 기도 성취의 확률을 높이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런 인과의 양심에 걸맞는 형식으로 발전한 것이 바로 불교의 기도법입니다.
한국불교에서는 독과 송을 붙여서 독송이라고 표현하지만 사실 독은 소리내어 읽는 수행이고, 송은 경전을 암송하는 의미이기에 분별되어야 합니다. 경전을 수지하고 소리내어 읽는 것이 익숙해졌다면 이제는 그 뜻을 배우는 것과 더불어 경전을 암기해야 합니다.
사실 암송의 의무는 보살승운동 이전에는 비구의 의무였습니다. 그렇기에 비구들은 붓다의 진리인 법을 마음에 지니고 있었고, 이것을 재가자들에게 전달해주고 설법해주는 권한을 지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보살승운동 이후 오종법사행이 강조되며 이 암송이라는 수행의 권리는 재가불자들에게까지 열렸습니다. 그렇기에 수 많은 재가법사들이 보살승의 교과서를 암기하여 광장에 나아가 암송을 바탕으로 한 포교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종법사행은 교과서를 만독하는 과정의 교육시스템입니다. 이 중 암송이 들어가는 이유는 두뇌를 계발하는 최고의 방법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교과서를 암송하는 이유는 그 속의 진리를 실천하여 삶을 개선하고 결국 성불의 실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 실천 수행의 과정 속에서 두뇌의 성능이 떨어지는 것이 유리할까요? 아니면 최적화 된 두뇌의 컨디션을 지니는 것이 유리할까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암송? 도전해야 합니다.
서사유통은 서사와 유통의 합성어입니다. 이것도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봐야 하는데, 책이 워낙 귀한 시기이다보니 경전을 지니고 있는 이들은 이를 베껴쓰는 서사수행을 통해 첫째로 더욱 강력한 자극과 반복을 바탕으로 한 뛰어난 학습효과를 기대할 수 있었습니다. 둘째로 사경한 결과물인 또 다른 경전을 다른 이들에게 선물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서사와 유통을 붙여서 표현한 것입니다.
사경을 일반화하면 요즘은 필사라고 표현합니다. 필사수행의 장점은 무엇일까요? 공부 원칙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결국 두뇌는 더욱 강렬한 자극을 주는 것 그리고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정보를 중요하다고 판단합니다. 사경은 단순히 눈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소리를 내는 독과 손으로 쓰는 촉감 그리고 종이와 먹의 향과 천천히 그 뜻을 새기는 의식까지 활용하는 멀티감각의 수행입니다. 두뇌에 강렬한 자극을 줄 수 밖에 없는 시스템이고, 집중력이 발휘될 수 밖에 없는 수행이며 그렇기에 매우 뛰어난 교육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학습법입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출판 기술이 너무 뛰어납니다. 더 이상 책은 귀하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책값이 너무 싸다고 느껴집니다. 짜장면 한 그릇도 만원인 시대인 것을 고려한다면 가치에 비해 너무 너무 저평가 된 것이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각설하고 책이 이처럼 흔한 시대이기에 베껴 쓴 사경본은 더 이상 유통의 가치가 없어졌습니다. 다 쓴 사경본을 절에서 태워서 공양올려달라고 요청하는 시대이니까요.
이런 시대이기에 달라진 사경 수행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터넷 사경입니다. 인터넷으로 사경하는 수행은 비록 종이에 사경하는 것과 비교했을 때 수행효과는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유통이라는 측면에서는 훨씬 더 가치가 있습니다. 누군가 검색을 했을 때 붓다의 귀한 진리가 인연 닿을 수도 있고, 우연히 서핑하던 중 꼭 필요한 구절이 선물처럼 주어질 수도 있습니다. 인터넷에 내가 남기는 사경 한 구절이 누군가의 삶을 바꿀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저작거리에서 금강경 한 구절을 듣고 깨침을 얻은 육조혜능 스님의 인연담처럼 말입니다.
더불어 이 유통이라는 측면만 놓고 본다면 인터넷이라는 매체는 지금껏 유래 없는 수승한 도구입니다. 텍스트와 오디오 그리고 비디오 컨텐츠로 붓다의 진리를 담아내 유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이 컨텐츠는 이론적으로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전달될 수 있는 무한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경전 속에서 인터넷에 대한 언급이 없는 이유는 이것이 가치가 없어서가 아니라 지금까지 인터넷이 있는 세상 속에서 경전이 결집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말 그대로 오종법사행의 뉴노멀 시대입니다.
마지막 오종법사행은 위인해설입니다. 오종법사행은 교육 체계임을 강조했습니다. 다른 누군가에게 강연을 하는 힘, 법문을 하는 능력, 해설을 해주고 주석서를 집필하는 것은 도깨비 방망이를 뚝딱 휘두르는 것처럼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철저한 준비과정을 거친 것입니다. 오종법사행이라는.
수지와 독송 그리고 암송과 서사 더불어 유통의 과정까지의 기본기를 탄탄하게 갖췄을 때 비로소 다른 이들에게 경전의 가르침을 해설해 줄 수 있는 자신감이 생깁니다. 이 기본기를 준비하는 기간은 사람마다 모두 다를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충분해지면 넘처 흐른다는 것입니다. 조급해 할 것 없이 누구나 자신만의 환경 속에서 축적된 법의 기본기를 전달하는 위인해설의 시간은 반드시 옵니다. 글로든 말로든 행동으로든 어떤 방식으로든.
오종법사행의 훈련법
경전을 독송하는 것, 책을 읽는 것에서 정체된 것이 한국 불자들의 보편적 상황일 것입니다. 오종법사행이 말하는 메시지는 단순합니다. 이 교육시스템대로 공부하고 훈련하면 되니, 하나의 과정이 충분하다면 다음 과정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수지와 독이 연습되었다면 이제 그 뜻을 배우는 과정 그리고 암송과 서사유통의 과정으로 용기내서 나아가셔야 합니다.
만약 독송의 과정이 충분하지 않다고 느낀다면 그 효율을 높이는 훈련법도 있습니다. 인터넷 시대를 넘어 소셜네트워크 시대의 후반부에 이른 지금 시대의 용어로는 컨텐츠 기획자가 되는 훈련입니다. 컨텐츠 기획자란 단순히 텍스트와 오디오 그리고 비디오 컨텐츠를 소비하는 것을 넘어 이를 분석하고 재가공하는 훈련입니다. 혹시 어려워보이나요?
물론 그냥 소비하는 것보다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정해진 형식에 따라 의도를 가지고 책을 읽고, 법문을 듣는 훈련을 하면 생각보다 어려운 작업은 아닙니다. 다만 낯설 뿐이죠. 더불어 이 훈련을 소화한다면 단순히 경전을 독송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교육효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금강경을 읽고 공부하는데 아무런 질문도 없는 것이 효과적일까요? 분명한 질문을 지니고 있는 것이 효과적일까요? 당연히 후자입니다. 더불어 아무리 훌륭한 붓다의 가르침이라는 정보도 먹기만 하고 소화시키지 못한다면 결국 똥으로 나오고, 남은 것은 정신의 독소가 될 뿐입니다. 그렇기에 읽고 공부한 내용은 올바른 형식을 활용하여 결과물을 내놓아야 합니다. 이 컨텐츠 분석의 과정을 통해 정보의 소화불량을 해소시킬 수 있습니다.
또한 컨텐츠 기획자로써 아웃풋의 결과물을 축적해 놓는다면 이는 정량화 된 근거를 바탕으로 한 확신을 선물합니다. 공부의 결과물이 축적되고 있음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으니까요. 확신만 가질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다른 이들에게 재가공 된 친절한 컨텐츠가 유통된다면 이것만으로 큰 법보시가 되는 것입니다. 불법을 공부하는 것이 재미 뿐 아니라 의미도 함께 더해지는 것입니다.
오종법사행을 현대적으로 해석하여 효율을 높이는 시작은 컨텐츠 기획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충분히 훈련된다면 컨텐츠 편집자로써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그 다음입니다. 숙련된다면 자신만의 컨텐츠 크리에이터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 크리에이터가 무엇일까요? 위인해설을 하는 설법가이자 강연자 그리고 주석가이자 작가인 것입니다. 이 모든 진리가 담겨 있는 도구를 요즘은 컨텐츠라고 부르니까요.
어떤가요? 이렇게 재미있고 의미있는 교육시스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수지와 독송만 지속하고 싶으신가요? 아니면 용기내어 오종법사행의 안내에 따라 컨텐츠 기획자의 훈련 과정에 도전하고 싶으신가요? 수행자의 공부법에는 갱년기가 올 겨를이 없답니다.
첫댓글 수행자의 공부법에는 갱년기가 올 겨를이 없다.
스님 감사합니다_()()()_
오종법사행의 안내에 따라 컨텐츠 기획자의 훈련과정에 도전하고 싶으신가요? 넵 스님.
도전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