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봄 부흥회 5.20(월요 저녁) / 김운용 목사(장로회신학대학교 총장)
말씀 : 사도행전 28:1-10
제목 : 그대, 하늘 파티에 초대받았다
7 이 섬에서 가장 높은 사람 보블리오라 하는 이가 그 근처에 토지가 있는지라
그가 우리를 영접하여 사흘이나 친절히 머물게 하더니
8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워 있거늘 바울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낫게 하매
9 이러므로 섬 가운데 다른 병든 사람들이 와서 고침을 받고
10 후한 예로 우리를 대접하고 떠날 때에 우리 쓸 것을 배에 실었더라
†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60여 년이 지나가던 때, 교회는 큰 위기 가운데 놓여 있었습니다.
12 사도 가운데 11명은 이미 순교를 당했고요.
소아시아까지 복음이 전해져서 교회가 세워졌지만 교회들은 다 무너질 위기 가운데 처해 있었습니다.
마지막 남았던 사도 한 사람도 천혜의 감옥인 밧모섬에 유배를 당했습니다. 그것으로서 교회는 다 끝난 것 같았습니다.
교회가 무너지는 소식을 들으면서 밧모섬에 무릎 꿇고 기도하는 사도 요한에게
하나님께서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보면 이렇게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한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계시록 2:2-3)
소아시아 일곱 교회 가운데 한 교회였던 에베소 교회는 대단한 교회였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칭찬으로 칭찬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말씀을 듣게 되면 심장이 멎는 것 같습니다.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계시록 2:4-5)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교회가 무너져 내리고 있는데, 교회를 다시 세울 방도가 무엇이랍니까?
사방으로 어려움 가운데 둘러싸여 있는데, 그 어려움을 헤쳐나갈 방도가 무엇이랍니까?
※ [처음 사랑, 처음 행위]랍니다.
무너지고 있는 교회를 세우는 이것이 과연 대단한 비법이 될 수 있을까요?
※ [처음 사람 처음 행위]
로마의 15대 황제였던 안토니우스 황제는 자기가 신이라고 자처하면서
로마 전역에 신상을 세우고 황제 숭배 사상을 퍼뜨렸던 사람이었습니다.
철권 통치를 하고 있는 그에 눌려서 이제 기독교는 씨도 없이 말라버릴 수밖에 없는 상황 가운데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 대한 해법이 무엇입니까?
'한 달만 참아라 내가 황제 쓰러뜨리겠다.' 아니면 '내가 다 해결하겠다.' 이런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처음 사랑, 처음 행위를 회복하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보아도 이것은 해법이 되지 않는 것 같은데,
신현태 시인의 '첫사랑'이라고 하는 시를 읽다가 무릎을 쳤습니다. 이런 내용의 시입니다.
"눈을 다 감고도 갈 수 있느냐고 비탈길이 나에게 물었다.
나는 말했다.
두 발이 없이도
아니, 길이 없어도 나 그대에게 갈 수 있다고.."
* 이런 좋은 시를 읽어드려도 아무 느낌이 없는 분들은 지금 첫사랑하고 함께 살면서 날마다 시달리고 살든지,
아니면 중매 결혼을 했든지, 첫사랑 떠나보내고 마음에 가끔씩 생각나는
그런 사람은 첫사랑에 대한 시를 읽고서 이렇게 냉랭할 수가 없습니다. ㅎ
* 첫사랑 - 그것은 길이 없어도 갈 수 있게 하는 힘이랍니다...
발이 없어도, 아니 비탈길이어도 넉넉하게 그 길을 갈 수 있는 힘! 이것이 첫사랑의 힘이랍니다.
저는 군 복무 시절에, 주말이면 종종 가짜 휴가증을 만들어 갖고 서울로 놀러 나오곤 했습니다.
마치 후배가 인사 장교를 하고 있는 친구가 있어서 '야, 휴가증 한 장 보내라' 정확하게 다 기록하고서
이걸 딱 들고 부대에서 여자친구를 만나기 위해서 나오는데, 버스가 두 시간에 한 번 있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걸어가는 게 좋아서 부대에서 버스 타는 데까지 한 시간, 사청리에서 버스를 타고 마장동 버스터미널
오는 데 세 시간이 걸리는데, 그 어간에 헌병초소를 다섯 군데를 지나야 됩니다. '휴가증 보겠습니다' 그러면 딱 꺼내줍니다.
분명히 토요일에 서울 나가는 것 보니까 도망 가는 것 분명한데, 휴가증 보니까 완벽합니다.
저는 그때, 간이 두근두근 뜁니다. 왜냐하면, 바로 내려가서 '2795부대 ㅇㅇㅇ중위 휴가 중입니까?'
전화 안 통화면 그게 가짜인 게 바로 들통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잘 다녀오십시오'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까지 통과하고서 마장동 버스터미널에 내립니다.
그러면 강남고속터미널로 바로 버스를 타고 달리지요. 버스가 바로 오면 40분, 기다렸다 타면 한 시간이 걸립니다.
벌써 5시간 지났습니다. 그리고 전주 내려가는 고속버스 예매를 합니다.
자리가 있으면 바로 출발하지만, 없으면 한 시간 길게 기다릴 때는 두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세 시간이 걸려서 전주에 딱 내렸는데, 그때 교제하고 있던 아가씨가 딱 나오더니,
급한 일이 있다면서 딱 1시간 만나주고 쪼르르 들어가 버립니다. 그러면 저는 다시 8시간이 넘는 거리를 투벅투벅 또 돌아옵니다.
멀었을까요? - 하나도 안 멀었습니다.
만약에 다음 주에 또 한 시간 만나준다고 한다면, 가는데 8시간은 오는데 8시간 또 내려갈 것 같습니다.
이게 첫사랑의 힘입니다. 그때 투자한 게 아까워서 지금 데리고 살고 있습니다. 이게 첫사랑의 힘이랍니다.
첫사랑이 있는 그곳에서, 사랑에 대한 감격이 있는 그곳에서 세워지는 역사는 계속된답니다.
이번 집회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코로나로 묶었고, 어려움에 묶였고, 삶의 환경 때문에 묶였고, 삶의 여러 가지 요건 때문에 묶였지만,
찬양하다가 기도하다가 첫사랑의 정열들로 벌떡벌떡 일어나게 되면
가정이 살게 되고, 교회가 살게 되고, 자녀들이 세워지고, 다음 세대가 세워지는 역사가 힘 있게 진행될 것이다.
첫사랑의 정열을 회복했으면 좋겠다."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과 함께 둘째 날 집회 기도하고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
아버지 하나님,
이 저녁에도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하는 부평성전에, 주안성전에,
그리고 송도 예배 처소에 또 온라인으로 예배하는 모든 성도들과 함께 마음 모두워서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첫사랑의 정열로 다시 일어설 수 있게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긴 찬양 하나님 앞에 올려드렸습니다. 마음 담아서 찬양 올려드렸습니다.
하나님, 이 저녁에 정성껏 준비한 예물 들고 나와 하나님 앞에 올려드리는 손길들이 있습니다. 눈물 젖은 기도의 제목도 담겼고,
하나님 향한 감사의 제목도 가득가득 물질에 담아서 이 시간 하나님 앞에 올려드리오니, 주님 향기로운 예물처럼 받아주시옵소서.
참 어려운 때를 살아가는 우리 성도님들, 말씀으로 위로해 주시고 말씀으로 격려해 주시고 찬양할 때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놀라운 능력을 힘입는 놀라운 역사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둘째 날 저녁 말씀 앞으로 나갑니다. 말씀이 들어갈 때 마른 뼈들도 살아나리라 말씀하셨사오니,
우리 심령이 말씀 가운데서 소생케 되는 복된 시간 될 수 있게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만약 다시 태어난다고 한다면, 지금의 배우자와 또 결혼하시겠습니까?
이것은 묻지도 말고, 함부로 대답도 말아야 되는 그런 질문입니다. 대답 잘못 했다가는 한 십 년 넘게 고생합니다.
어느 기독교 기관에서 우리 크리스찬들의 가정생활에 대한 리서치를 했답니다.
그 가운데 들어가 있는 질문 가운데 하나닙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95% 이상이
'한 번이면 족하다' 그렇게 대답을 했답니다.(크리스천들이)
이 기록을 어느 목사님이 보고서
'우리 교회는 그럴 리가 없어. 우리 교회는 얼마나 부부금실도 좋고 신앙생활도 정말 재밌게 하는지, 우리 교회는 이럴 리가 없어!'
그래서 목사님이 묻지도 말고 대답도 함부로 안 해야 될 이 질문을 주일 오전 예배 시간에 교인들에게 던지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윤회설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하나님이 또 생을 허락해 주신다고 한다면, 지금의 배우자와 또 결혼하시겠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 교회 교인들은 잠잠했습니다. 이 정도인지는 몰랐습니다. 순간적으로 목사님이 당황을 하고 서 있습니다.
제일 앞자리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던 노 권사님이 당황한 목사님을 보더니, 목사님을 격려하려고 손을 슬그머니 들더랍니다.
얼마나 반가웠던지.. "권사님, 그렇게 정이 깊으셨군요. 다시 태어나도 지금의 배우자와 또 결혼하신다고요..
그 이유를 좀 한번 말씀해 주실래요..." 했더니,
권사님이 손을 내리면서 목사님을 빤히 쳐다보며 그렇게 대답을 하더랍니다.
"목사님, 고놈이 다 고놈이예요. 그래도 길들여진 놈이 좀 데리고 살기가 편하지 않겠어요.."
무슨 이야기일까요? 지금 행복하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만족감이 떨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조금 뒤로 돌아가 보십시다. 교제할 때, 저 남자 아니면(저 여자 아니면) 사는 의미가 없을 것 같고,
'저 사람을 평생 사랑하면서 살겠다' 하는 마음으로 결혼 생활 시작했는데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익숙해지고, 또 서로 살아가면서 그냥 편해지다 보니까 그런 마음이 약해진 것일 것입니다..
어떤 점에서 본다고 한다면, 그리스도인들 교회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행복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서 서 있는 존재들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행복하지 않는데, 어떻게 그 행복을 세상과 나눌 수 있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본다고 한다면, 그리스도인들은 무조건 행복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야 세상이 알지 못하는 그 행복을 세상과 나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2012년도 유럽 연합 EU의 상임 의장이었던 '헤르만 반 롬페이'라고 하는 사람이
세계 각국의 지도자들에게 선물을 해서 유명해진 책이 있지요.
"The world book of happiness"라고 하는 제목의 책입니다. "세상의 행복지침서"라고 번역을 해볼 수 있을까요..
그 책의 편집자인 '레오브만스'는 세계 50여 개국의 행복학 권위자들에게
"행복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행복은 어디서 온다고 생각합니까? 행복은 어떻게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이런 류의 질문들을 보내서 그들이 보내온 답변들을 함께 편집하는 형식으로 만들어진 책입니다.
그 책에 보면, 멕시코의 '가르시아 베가'라고 하는 사람은 이렇게 조언을 하더군요.
우리는 인생이라는 파티에 초대를 받았다.
파티에서 무엇을 할까? 즐겁게 놀기, 마음껏 행복해 하기,
그런데 어떤 파티든 입장료가 있다. 타인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는 의무와 책임 말이다.
- 가르시아 베가, 멕시코 -
인생은 파티이고, 우리는 거기에 초대를 받았답니다. 그래서 무조건 행복하면 된답니다.
그런데 나의 행복만 추구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행복도 조금 고려하면서 살면
우리는 함께 행복해질 수 있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크로아티아 출신의 '멜코빅'이라고 하는 사람이 제시한 '행복 요리법'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는 기본 재료와 선택 자료를 나누어서 이것을 적절하게 배합하면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답니다.
기본 재료 = 믿을 수 있는 친구,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사람,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도전적인 일,
기본 욕구를 채워줄 만큼의 돈, 매일 세 가지의 좋은 일, 이 모든 것을 갖고 있다면 감사하는 마음, 이것이 기본재료랍니다.
선택 재료 = 한 명이나 그보다 많은 자녀, 섬김의 삶과 신앙생활, 몇 년 이상의 공부, 몸과 마음의 건강,
가끔 실패와 좌절의 쓴 맛, 이런 재료들을 잘 배합하면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답니다. 그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파티'라는 말, 참 좋은 말입니다.
그러나 인생은 가만히 생각해보면, 파티로만 이어질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또 평범한 것이라지만, 기본 재료나 선택 자료로 제시한 그 내용들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다 기본적으로 주어지는 내용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에게 다 주어지진 않습니다.
누구나에게 주어지는 재료인데, 그러면 나는 자녀가 없으면 행복해질 수 없다는 이야기인가요?
그런 점에서 본다고 한다면, 그들의 제시도 한계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에서 만나게 되는 바울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는 결코 파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사도행전 27장 말씀과 함께 연결해서 읽어보게 되면
그도 이제 평생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다음에 주님 섬기는 기쁨으로 살았습니다.
복음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교회를 섬기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그 일에 마음 두고 평생을 달렸습니다.
그도 나이 들어서, 이제 세상을 떠날 때가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당시의 세계 심장부인 로마에 복음을 전하고 싶다는 열망을 가지고 자청 죄수가 되어, 그는 로마 군인에 끌려서
지금 로마 황제의 재판을 받기 위하여 가이사랴에서 배를 타고 로마로 호송되어 가고 있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27장부터 연결되는 말씀을 보게 되면,
그렇게 마지막 생명까지도 주님을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드리겠다고 가고 있는 그의 발걸음에 엄청난 풍랑이 일어났답니다.
예사 풍랑이 아니라, 열나흘 동안 먹지도 자지도 못할 정도로 그렇게 심한 풍랑이었답니다.
왜 먹지 못했을까요? 왜 자지 못했을까요? - 곧 배가 파손될 것 같으니까.. 그 정도로 위급한 상황 가운데 서 있었다는 이야기지요.
그렇게 허덕이면서 가다가 결국 배가 파선을 당했고, 겨울 바다에 빠져서 그는 허우적거리며
널판지 하나 잡고 죽을 힘을 다해서 헤엄을 쳐서 가까스로 한 섬에 표류해 나왔답니다.
마음 따뜻한 원주민들을 만났습니다.
원주민들이 불도 피워주고, 따뜻한 스프도 끓여오고, 그래서 불에다가 옷을 말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이 사그라져 가니까 불을 좀 더 돋우려고 나무 한 묶음을 가져다가 불에 넣었더니,
그 속에 숨어 있던 독사가 뜨거움을 이기지 못하고 나와서 사도 바울의 손을 물고 있더랍니다.
대부분의 독사는 독을 주입하고는 자기가 살기 위해서 수풀로 도망을 가는데,
이 독사는 간이 부었는지 사도 바울 손에 대롱대롱 매달려서 혈관에다 계속 독을 주입하고 있더랍니다.
그렇게 따뜻하게 맞아주던 원주민들이 자기들의 민간 신앙을 따라서
'저 사람은 바다에서 살아 나왔지만, 지금 신이 진노하고 있는 사람이다.
만약에 이런 사람에게 호의를 베풀었다가는 우리가 신의 진노를 면치 못한다.' 갑자기 냉대하기 시작하더랍니다.
여기에서 무슨 파티 할 분위기입니까? 여기서 무슨 노래가 나오고, 여기서 덩실덩실 춤이 나올 그런 상황입니까?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원망이나 터져 나올 상황이지요.
몇 년 전에, 저는 학기를 마치고 성적 처리를 마친 다음에 출판사에 넘길 책 원고 마무리를 하고
연초에 '북미 예전 학회'라고 하는 학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미국에 갔습니다. 뉴멕시코주의 알버커키에서 있었던 학회였습니다.
3박4일 동안의 빡빡한 학회 일정을 다 소화를 하고, 학회를 마치고 하룻 저녁을 잔 다음에
바로 한 교회의 집회 인도를 위해서 LA로 날아갔습니다.
그 교회는 연초에 온 교인들이 사흘 동안 금식하면서 성회를 하고 있더군요. 목사님은 8일 동안 금식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학기를 마치고 좀 무리를 했기 때문인지, 또 미국 와서 학회 일정까지 바쁘게 지냈기 때문인지,
첫날 말씀을 전하고 와서 몸살이 나고 말았습니다. 저는 비교적 건강한 체질이지만, 한 번 아프면 죽도록 아프기 때문에
집회 인도하고 돌아와서 몸이 아프면 안 될 것 같아서 LA에서 공부하고 있는 제자들하고 식사 약속을 했다가 다 캔슬을 했습니다.
목사님이 금식 중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호텔에서 하루 종일 누워 있었습니다.
그런데 화장실을 한 번 갈려고 하는데, 얼마나 아픈지 저는 그런 아픈 것을 처음 경험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방광염이라고 하더군요.
그냥 여행 중이기도 했고, 보험이 없어서 미국의 병원 잘못 갔다가는 그냥 날벼락 맞는 걸 알아서
'그냥 참자' 하고서 항생제 한 알 못 먹고 끙끙 앓으면서 누워 있었습니다. 그 병 앓느라고 거의 밤에 밤잠을 이루지 못했지요.
새벽 네 시 반, 5시에 있는 새벽 집회를 설교를 하기 위해서 일어났는데
오한이 얼마나 나는지 도저히 설교하러 못 갈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강사가 오한 난다고 설교 안 할 수가 있습니까?
LA는 온화해서 오리털 돕바, 한국도 춥고 '알버커키'도 굉장히 추운 도시여서
오리털 돕바하고 장갑, 목도리 다 가져갔는데, LA는 겨울에도 그게 필요없는 동네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거 오리털 돕바 꺼내서 입고 목도리 하고 마스크 하고 장갑 끼고 나타났더니,
호텔 직원이 좀 이상한 사람으로 저를 새벽에 쳐다봐요.
그것도 미국 사람들 아무도 나가지 않는 새벽 4시 40븐께 그러고 나타나니, 호텔 직원이 자꾸 저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 봅니다.
교회의 제일 앞자리에 앉았습니다. 오리털 돕바를 벗으면 죽을 것 같아서 돕바를 벗지 못하고 제일 앞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찬양팀이 찬양을 인도하는 한 15분간 저는 한가지 기도만 계속 했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좀 해 주세요. 저 놀러 온 것 아니거든요. 설교하러 왔거든요.
저 양반들 지금 금식하면서 성회하고 있는데, 이런 몸으로 무슨 은혜를 끼치겠어요.. 하나님, 어떻게 좀 해 주세요."
계속 한 15분 정도 기도하는데, 열이 싹 내리는 겁니다.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마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이제 목사님 나오셔서..."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돕바 입고는 설교할 수 없잖아요.
그래서 내가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마음으로 돕바를 벗었습니다.
그리고 강단에 딱 올라갔더니, 오한이 싹 사라지는 겁니다. 이건 사실입니다..
본래 집회 중이어서 설교 40분 준비해 갖고 갔는데,
이거 오늘 한 10분만 하고 빨리 가서 호텔에 가서 쉬어야 되겠다 하는 마음으로
오늘 그냥 엑기스로 짧게 하리라고 생각했는데, 오한이 사라지니까 40분 설교 그대로 다 했습니다.
그리고 결단 찬송 부르고, 함께 이제 기도하는 시간으로 나아가게 하고,
개인 기도 시간을 갖는데, 저도 기도하기 위해서 앞자리로 딱 왔는데 또 다시 오한이 들기 시작하는 겁니다.
제가 뭐라고 기도했게요? - "하나님, 치사하게 이러시기입니까!"
강단에 올라가니까 오한이 떨어지고, 강단에서 데려오니까 애들 장난도 아니고 하나님, 이러시기입니까?
교인들 다 금식하면서 기도하고 있는데, 그냥 갈 수가 없어서 돕바 입고 한참을 앉아 있는데, 몸이 하도 아파서 기도가 안됩니다.
그냥, 그냥 이렇게 앉아 있는데, 하나님께서 환상으로 보여주신 말씀이 바로 사도행전 28장, 오늘의 이 본문이었습니다.
허름한 옷을 입은 한 노인이 초라한 모습으로 황량한 들판에 서 있었습니다.
그때, 한 신사가 그에게 다가오더니, 그의 손을 잡아 일으킵니다.
그리고 그를 빙빙 돌려가면서 춤을 추는데, 환상 가운데 봤던 것은 남미의 탱코 춤이었습니다. 탱고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파티할 수 없는 자리인데, 춤이나 오지 않는 그런 자리인데,
삶의 여건을 보게 되면 원망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는 그런 자리에 서 있는데,
그곳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면서 춤을 추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거기에 우뚝 서 계시는 한 분 때문이었습니다.
삶의 환경이 좋아서가 아니었고, 내가 원하는 대로 모든 일이 잘 풀려서가 아니었고, 내가 기도하면 돌아서기만 하면, 하나님이 바로 응답해 주시는 그런 놀라운 생생한 역사가 내 삶을 감싸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춤을 추고 파티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거기에 우뚝 서 계시는 한 분 때문에 그는 파티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풍경, 그것은 우리의 인생을 행복하게 하기도 하고 불행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유난히 굴곡 많은 인생을 살았던 도종환 시인은 그의 시 가운데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이름 없는 언덕에 기대어 한 세월 살았네
한 해에 절반 쯤은 황량한 풍경과 살았네
꽃은 왔다가 순식간에 가버리고
특별할 게 없는 날이 오래 곁에 있었네
그렇습니다.
인생의 풍경은 황량했습니다. 외로웠습니다. 답답했습니다.
특별할 게 없는 날이 오랫동안 내 풍경이었습니다.
시인은 그런 삶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 벌떡 일어나 이렇게 노래합니다.
너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 풍경을 견딜 수 있었을까
특별하지 않은 세월을 특별히 사랑하지 않았다면
저렇게 많은 들꽃 중에 한 송이 꽃일 뿐인
너를 깊이 사랑하지 않았다면... - 풍경, '도종환' -
내 삶의 환경은, 풍경은 황량한데, 거기에 사랑하는 사람이 우뚝 서 있습니다.
그러자, 그 풍경은 달라졌답니다.
그래서 시인을 외칩니다. 황량한 인생길에서 너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아니, 네가 내 인생이 없었다고 한다면, 그 황량한 들판을 내가 어떻게 헤쳐나올 수 있었을까?
풍경, 그것은 우리의 인생을 아름답게 만듭니다.
아니, 내 인생의 풍경이 되어 주시고 배경이 되어 주시는 내가 사랑하는 존재,
그 존재가 우뚝 서 있을 때, 그 사랑, 사랑은 우리들을 일으켜 세웁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을 지금 이끌어간 것은 사랑이었습니다.
주님의 놀라운 사랑, 아니 그 놀라운 주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주님을 향해 불타오르는 주님에 대한 그의 사랑, 그것이 그를 이끌어가고 있었습니다.
외로운 날에도, 답답한 날에도, 그는 그 사랑에 붙들려 나가고 있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 사랑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게 되고 벌떡벌떡 일어나 덩실덩실 춤이 나 올 정도로
그 사랑은 그를 그렇게 감격하게 만들었습니다.
몇 년 전, 어느 방송에서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등장시켜서 진행되었던 프로그램이 있었지요.
할아버지가 문제를 내면 할머니가 알아 맞히고, 할머니가 문제를 내면 할아버지가 알아 맞히고,
그 윤색되지 않는 꾸밈이 없는 투박한 시골 어르신들의 그 입담이 웃음을 자아내게 했기 때문에 한 동안 방영된 적이 있었지요.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가운데 사회자가 어느 할머니에게 마이크를 갖다 대더니 물었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하고 결혼하셔서 몇 년 동안 사셨어요?'
'53년 살았어예..'
'아니고, 정말 긴 세월을 사셨군요. 그런데 53년 결혼 생활하면서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사랑한다라고 하는 말 몇 번이나 하셨어요?'
'한 번도 없었어예..' 바로 퉁명스럽게 대답이 터져 나왔습니다.
뭐 물어볼 것도 없어서인지, 사회자는 바로 마이크를 할아버지에게 갖다 대더니
'할아버지,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 할아버지 믿고 따라와서 53년을 함께 살아준 할머니에게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도 안 하시고, 너무 인색하셨네요..
할아버지, 이 자리를 빌어서 할머니에게 사랑한단 말 한마디만 하시지요..'
'못 해요'
'그래도 한 번만 하세요. 지금 전국에서 방송 보고 있는데, 이대로 끝날 수가 없잖아요.'
계속 아나운서가 밀어붙입니다. 그래도 안 하시니까 나중에는 좌중의 박수까지 유도해서 격려 박수를 보내고,
계속 마이크를 들이대면서 재촉을 하니까 할아버지가 숨을 깊게 들이 내쉬더니,
할머니를 보고 '여보, 사랑해.' 이렇게 할 줄 알았더니, 눈을 부릅뜨고 할머니를 쳐다보면서 "니, 알제?" 한마디 하더라고요.
보나 마나, 경상도 분인 것 같습니다. 무뚝뚝해서, 둘이 있을 때도 잘 못하는데, 이게 전국에 텔레비전에 나간다는데
남사스럽게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여기 이 자리에서 합니까?
할머니는 압니다. 할아버지가 입으로 나불나불대듯이 그렇게 무슨 입으로 뭐 사랑하니 어쩌니 이야기 한마디 안 해도,
할아버지가 나를 얼마나 아끼고, 나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고,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기 때문에
그 험한 세월 자녀들 키우면서 여기까지 달려올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인생을 아름답게 만들지요.
사랑은 표현되면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표현되지 않아도 사랑은 아름답습니다.
로마 교회가 핍박 가운데 있었습니다. 사도들에 의해서 세워지지 않았고, 자생적으로 생겨진 로마 교회,
어린 교회가 대 박해가 일어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당하고 교회가 이제 풍비박산 날 수밖에 없는 상황 가운데 서 있습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 있는 교회를 위로하기 위해서 쓰여진 말씀이 바로 로마서 말씀입니다.
로마서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면,
"너희들이 지금 고난 가운데 있는데, 너희들이 아픔 가운데 있는데,
한 달만 참아라. 6개월만 참아라. 그 고난은 다 지나간다.
내가 너희들을 잊지 않고 있고, 그 고난은 반드시 해결되게 될 것이다.
너의 남편은 순교의 제물로 죽었고, 너의 아들이 지금 붙잡혀 있지만,
남편은 죽었으니까 어쩔 수 없고, 너의 아들은 절대 죽지 않는다."
혹시 여러분, 로마서를 읽어보시다가 이런 말씀 발견한 적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런 말씀은 없습니다. 로마 교회가 기다리고 듣고 싶었던 메세지는 그것이었는데,
그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위로하기 위해서 쓰여진 말씀에는 어떤 말씀이 쓰여져 있습니까?
말씀을 받아 적어 전했던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 노래를 그들에게 이렇게 들려 줍니다.
(로마서 8:31-32, 35, 37-39, 현대인의 성경)
31 만일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라면, 누가 우리를 대항할 수 있겠습니까?
32 자기 아들까지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하나님이,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다른 모든 것도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시지 않겠습니까?...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는단 말입니까?
고난입니까?
외로움입니까?
핍박입니까?
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협입니까?
칼입니까?...
37 그러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이 모든 것을 거뜬히 이깁니다.
38 그러므로 죽음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지옥의 권세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은 것이나, 깊은 것이나, 그 밖에 그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나는 확신합니다.
무슨 이야기를 들려 줍니까? - 하나님의 사랑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풍랑 이는 바다 위에서도, 죽을 것 같은 삶의 자리에서도,
독사의 독에 감염되면서 이제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어려움의 삶의 자리에서 무엇에 이끌려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에 이끌려가고 있습니다. 그 사랑의 하나님이 바울 곁에 우뚝 서 계십니다.
풍랑이 일어날 때도, 끊임없이 환란이 이어질 때도,
돌 들고 쫓아다니며 죽이겠다고 나서는 반대자들의 틈바구니에서도,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으로 덮으셨습니다.
그 의연함이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까? 당당함이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만 생각하면 벌떡벌떡 일어나 춤 추고 싶고, 벅찬 감격에 찬양이 절로 나오는 그런 하나님의 사랑,
그 사랑이 그를 세우고 있습니다. 이 감격의 마음, 이것이 고난을 이기게 하지요. 이것이 어려움을 이기게 만듭니다.
어려운 환경도 헤치고 넉넉하게 달려갈 수 있게 만드는 힘을 공급해 주지요
이원규 시인은 이런 마음을 "겁나게와 잉 사이로"라고 하는 재미있는 제목의 시에서 이렇게 노래를 합니다.
경상도 말로 한다고 한다면, "억수로와 예 사이"겠지요.
"억수로와 예 사이"에 무엇을 넣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전라도 말로 시를 썼기 때문에, 전라도 말로 시를 그대로 읽도록 하겠습니다.
전라도 구례 땅에는 비나 눈이 와도 꼭 겁나게와 잉 사이로 온다
가령 섬진강 변의 마고실이나 용두리의 뒷집 할머니는
날씨가 조금만 추워도 겁나게 추와불구마잉!
어쩌다 리어카를 살짝만 밀어줘도, 겁나게 욕봤소잉!
강아지가 짖어도, 고놈의 새끼 겁나게 싸납소잉!
조깐 씨알이 백힐 이야글 허씨요.
지난봄 잠시 다툰 일을 얘기하면서도
성님, 그라고봉께, 겁나게 세월이 흘렀구마잉!
궂은 일 좋은 일도 겁나게와 잉 사이
여름 모기 잡는 잠자리 떼가 낮게 날아도 겁나게와 잉 사이로 날고
텔레비전 인간극장을 보다가도 금새 새끼들이 짜안해서 우짜까이잉!
눈물 훔치는 너무나 인간적인 과장의 어법
내 인생 마지막 문장, 허공에라도 비문을 쓴다면 꼭 이렇게 쓰고 싶다
"그라제, 겁나게 좋았지라잉!"
겁나게와 잉 사이에다 무엇을 넣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겁나게 꼴보기시러잉", 이러면 분위기 달라지는 겁니다.
"겁나게 좋았지라잉, 억수로 좋아예" 이러면 분위기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알고 계십니까?
사도 바울도 평생 겁나게 좋았지라잉, 억수로 좋아예 이 말을 품고 사셨다는 것, 알고 계십니까?
사도 바울은 사도의 반열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도는 예수님께서 직접 불러 세우신 사람이고,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부터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실 때까지 함께 했던 사람, 이것이 사도의 조건이었습니다.
완전수였던 사도는 열 둘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배반한 가룟 유다가 스스로 목 매달아 죽었을 때,
예수님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 급격한 사건 때문에 깜박 잊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명을 따라서 승천하신 후에 함께 모여서 성령의 강림을 기다리며 간절하게 함께 간구하고 있었을 때에
그들이 기도하다가 갑자기 생각해낸 것입니다. '아, 한 자리가 비었구나..' 완전수가 채워지지 않았다.
그래서 사도 보선을 합니다. 사도 보선하고 기도를 계속했을 때, 성령께서 교회에 임하셨고
성도들에게 성령께서 임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복음의 증인 되게 하셨고, 사명 감당할 수 있도록 하셨지요.
완전수입니다. 사도 가운데서 사도 야고보가 제일 먼저 순교를 당했습니다. 베드로도 순교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다 순교를 해나갔는데 성경에 보게 되면 사도 보선 했습니까? 보선 하지 않았습니다.
왜 보선을 안 했습니까? 이들은 이 땅에서 주님 섬기다가 영원한 천국으로 주님 보좌 곁으로 올라갔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그래서 사도 보선 하지 않습니다.
사도는 12, 완전수여서 더 이상 필요가 없는 사실을 유대교 전통에서 나온 것이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도바울인데,
사도바울은 자기가 13번째 사도라고 떠들고 다닙니다.
초대교회가 처음에는 의아해 했습니다. 그런데 그 비밀을 알고 나서 이방인을 위해서 세운 나의 13번째 사도다.
"나는 사도의 반열에 들어갈 수도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박해했던 사람입니다.
많은 주님을 믿는 사람들을 죽였던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사도의 반열에 들 수도 없는 자격도 안 되는 사람인데,
이 죄인을 귀하게 여기셔서 13번째 사도로 주님 세워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감격의 마음을 로마에서 1장 1절 말씀을 보십시오. 고린도전서 1장 1절 말씀을 보십시오. 고린도후서 1장 1절 말씀,
데살로니가전서 1장 1절 말씀, 데살로니가후서 1장 1절 말씀,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1장 1절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사도 된 나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특별한 은혜로 말미암아 사도 된 나 바울은..."
무슨 이야기입니까? 약간 표현은 다르지만, 늘 편지를 써 보낼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마다,
나 같은 죄인,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그 고백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주의 사역을 감당했다는 그런 이야기이지요.
우리 시대의 유명한 심리학자인 '스캇 팩'은
그의 책 "아직 가지 않는 길"이라고 하는 책에서 현대인들의 아픔과 문제의 근원을 추적합니다.
특별히 미국 사회가 폭력으로 얼룩지고, 그리고 교회가 쇠퇴하면서
기독교 정신이 점점 사라져 가는 그 상황들을 이야기하면서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놀라움의 상실이다. 경탄, 감격을 상실하면서 미국 사회가 병들어 가고 있다"고 분석을 하면서
305장 찬송,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찬송을 1절부터 4절까지 적고 있더군요.
Amazing Grace! How sweet the sound.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와~
Amazing Grace! - 이 단어가 가슴에서 사라지고, 이 표현을 하면서 내 눈에서 눈물이 사라지는 순간,
이 놀라움과 감격이 사라지고 감탄이 사라지고 감사가 사라지는 순간 병 들기 시작하더랍니다.
놀라움이 찬양하게 만듭니다. 그 놀라움이 인생을 치유하며 건강하게 만든답니다.
♬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놀라와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우리, 이 찬양 한 번 하고 말씀 더 이어갈까요..
할렐루야! 우리 가슴에 손 한 번 얹으실까요.. 나 자신에게 그렇게 한 번 외치십시다.
나 같은 죄인, 나 같은 죄인,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그것이 황량한 들판에서 춤 추게 만들었답니다.
죽이려고 달려드는 풍랑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주님의 그 행복을 잃어버리지 않고 달릴 수 있었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인생의 풍경은 황량합니다. 어둡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어둠의 순간들을 이렇게 행복에 젖어서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가던 길이 막히고, 배가 파손되어서 한 섬에 표류되었습니다. 알고 보니 멜리데 섬이라고 했습니다.
신약을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하면,
멜리데 섬은 지중해 한복판에 있는 지금 유명한 관광지가 된 말타섬으로 보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만약에 말타가 성경에 나오는 멜리데 섬이라고 한다고 한다면,
아프리카 동북쪽 320km, 시실리 남쪽 98km, 길이는 29km, 폭은 15km 이런 섬에 그가 표류를 했습니다.
BC 1000년 경의 페니키아인들이 그곳을 점령해서 살고 있다가
제 2차 카르토고 전쟁에 로마가 승리하면서 BC 28년부터 그 섬을 로마가 다스리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당시의 황제였던 아우스트소 황제가 이곳에 행정관을 파송을 해서 그곳을 다스리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의 정비가 된 다음에 원로원들 퇴역 장군들이 혹시 모여서 반란을 도모할까 싶어서 원로원에서 은퇴하면,
장군에서 퇴역을 하면 이 사람들을 가족과 함께 집단 이주시켰던 섬이 말타 섬, 멜리데 섬으로 알려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 섬에는 TV에 나오고 신문 지상에 나왔던 우리나라의 유명인들이 다 모여 사는 섬이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섬에 얼마나 유명한 사람들이 모여서 사느냐 그것에 별로 관심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해 보게 되면, 그 섬의 최고 높은 사람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옛날 성경에는 원주민 추장이었다고 번역이 되기도 합니다.
이 프로투스라고 하는 말, 헬라어는 추장으로 번역해도 되고, 최고 높은 사람으로 번역해도 되고,
당시의 로마 행정관의 이름이 프로투스였습니다.
그가 만약에 로마의 행정관이었다고 한다면, 젊은 날에 공부 잘하고 실력이 있어서
행정고시에 패스하고 어쩌면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서 양질의 교육을 받고
이른 나이에 그렇게 시험에 패스해서 그곳의 국가공무원으로 일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의 집은 로마의 명문가였음이 틀림이 없습니다.
만약에 그가 원주민 추장이었다고 한다면, 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들로 산으로 다니면서
아버지 때부터 부족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 뛰었던 전사였음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가 로마의 행정관이었는지 아니면 원주민 추장이었는지 정확하게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그냥 '프로투스', 그래서 오늘 개역개정판 성경은 섬에서 가장 높은 사람,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가 넓은 토지를 갖고 있었답니다. 옛날 성경에는 농장을 가지고 있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헬라어 원어는 토지라고 번역해도 괜찮고, 과수원으로 번역해도 괜찮고,
별장으로 번역해도 괜찮은 그런 단어입니다. 얼마나 풍광이 좋은 곳에 멋진 집 별장을 갖고 있었느냐
아니면, 얼마나 넓은 토지 그곳에서 엄청난 수확이 일어나는 과수원을 갖고 있었느냐,
아니면 지금 개발 호재로 땅값이 오르고 있는 그런 곳에 넓은 땅을 갖고 있었느냐, 성경은 거기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 않습니다.
그럼 성경의 관심은 무엇이었습니까? '보블리오의 아버지가 열병에 걸려서 죽어가고 있었다'입니다.
성경은 그 사람에게 모든 초점이 맞춰지고 있습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의 복음을 듣게 하기 위하여
사도 바울은 열나흘 동안 풍랑에 시달려야 했고, 겨울 바다에 빠져야 했고,
물을 바가지로 들이마시듯이 그렇게 물을 먹으면서 죽을 힘을 다해서 수영을 해야 했습니다.
독사에 물려야 했습니다. 원주민들의 냉대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 사람이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의 복음을 듣게 하기 위하여]
성경의 모든 관심은, 죽어가고 있는 한 노인에게로 집중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람이 그곳에 서 있었기 때문에 죽어가던 노인이 생명을 얻게 되었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손을 얹어서 기도했더니, 그 노인의 열병이 사라졌고,
그 소문을 듣고 그 섬에 아픈 사람들이 다 몰려와서 사도 바울의 기도를 받고 다 나았답니다.
그리고 성경에, 오늘 본문의 결론이 어떻게 나옵니까?
"사도 바울이 후한 대접을 받았다." 속된 표현으로 하면, 오늘 말씀의 결론은 그렇게 끝이 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복음을 전하고 생명을 살린 다음에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또 후한 대접을 받고 잘 먹고 잘 살다가 사도 바울이 죽었더라'
그것이 오늘의 결론입니다. 설교도 여기서 끝내야 될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 잘 믿고, 어떤 분이 예수님 잘 믿고 축복 많이 받고 잘 먹고 잘 살다가 죽었더라"
그것이 우리의 인생의 결론일 수가 없지요. 그가 그곳에서 후한 대접을 받고 그렇게 살다가 죽었더라로 끝날 수가 없습니다.
원어 성경으로 읽어 보면, 사도 바울은 여기서 손을 얹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치유의 역사들을 그곳에서 드러내고 있는데,
누가복음 4장에 나오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시는 장면과 함께 연결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기록과 그 문법과 그 단어와 그 시제들이 똑같은 구조를 취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잘 드러나 있지 않지만,
누가복음 4장에서 베드로의 열병 걸린 장모를 고치는 그 기록, 그 단어, 그 시제, 그 문법들이 송두리째 그대로 사용돼서
오늘 사도행전 28장에 보블리오의 병든 아버지를 고치는 기록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 지금 예수님께서 치유하시고, 예수님께서 회복시키시고 예수님께서 세우시고,
예수님께서 구원하시고, 예수님께서 행복하게 만드시고 예수님께서 가정을 세우시고,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는
이 놀라운 역사를 생생하게 그곳에서 드러내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영성 신학자인 헨리 나우웬은 이것을 가리켜서 'The living remind'라고 이야기하지요.
책 제목이지요. 두란노에서 이 책을 기가 막힌 제목을 잡아서 번역을 했더군요.
"예수님을 생생하게 기억나게 하는 사람"
"예수님을 생생하게 기억나게 하는 사람"
지금 그곳에서 질병을 고치고 있는데, 질병을 고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회복하시고
예수님께서 구원하시는 놀라운 역사를 그곳에서 지금 온전히 드러내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게 그 땅에서 맘껏 주님의 능력과 영광을 드러내고 그리고 사도행전 후반부에 보게 되면, 그는 로마로 갑니다.
황제를 만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죽음으로 통하는 길이었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었고,
그러나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많은 사람과 자유롭게 만날 수 있게 되었답니다.
사도행전 28장의 31절 마지막 절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담대하게 거침없이] 황제에게 재판을 받으면서도 거침없이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고,
로마에서 만나는 많은 사람들, 그들을 대하면서 그는 거침없이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답니다.
황제가 돌아왔습니까?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로마의 고위직들이 회개하고 돌아왔습니까?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AD 64년 전후에 네로 황제의 박해 때, 로마의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굶주린 사자밥이 되어서 찢겨 순교를 당한 걸로 역사학자들은 전하고 있습니다.
로마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갔으나, 예수님의 복음을 들고 갔으나, 로마를 돌이키지 못했고,
로마를 주님 앞에 세우지 못했고, 로마 황제를 회개시키지 못하고, 개죽음을 죽은 것입니다.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눈물의 기도로 씨를 뿌렸고, 사랑으로 씨를 뿌렸고, 생명을 걸고 씨를 뿌렸던 그 땅에...
300년 후에 복음의 씨가 생명의 씨앗이 움터 오게 만들고 있습니다.
300년 후에 그곳에 교회가 세워집니다. 박해하던 황제가 나타나서 교회를 지어줍니다.
하나님께 함께 나와 예배하기 위해서 황제가 수많은 신하들을 이끌고 교회로 달려오기 시작합니다.
결국 로마가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믿는 나라로 국교로 정할 만큼 온 나라가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순교를 당한 지 300년이 지난 다음에 로마에서 일어났던 역사였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300년 후에 일어날 그 놀라운 역사를 그의 생애 마지막까지 주를 위해서 걸어가고 있는 주님의 사랑하는
종에게 보여주고 싶으셨습니다. 맛보게 하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멜리데 섬으로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종을 부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의 복음으로 영혼들이 살아나는 역사를 그곳에서 보게 하셨습니다.
치유 받고 회복되는 역사를 보게 하셨습니다.
마을이 회복되고, 가정이 회복되고, 인생이 회복되는 역사를 그곳에서 미리 맛보게 하셨습니다.
그곳에서 생명이 살아나는 놀라운 역사가
죽으러 가는 내 사랑하는 종에게 보여주고 싶으셔서 멜리데 섬으로 사도 바울을 초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300년 후에 일어날 그 생명의 역사를,
로마 땅에서 일어날 엄청난 복음의 역사를 맛보게 하시기 위하여 사도 바울을 그 섬에 우뚝 세우셨습니다.
초대교회 문헌을 읽다가 우연히, 이것은 뭐 성경의 내용은 아닙니다만,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뒤에 '천사장 가브리엘과 나눈 대화'라고 하는 글을 어느 크리스찬이 써놓은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천사장 가브리엘이 예수님께 지상에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했고,
온 세상이 구원 받을 수 있도록 하셨다고 말씀하셨다.
또한 모든 세대의 모든 곳에 모든 사람이 예수님이 그들을 위하여 행하신 것을 전해 듣고
그의 나라로 들어오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씀하셨다. 가브리엘은 누구와 그 일을 하셨느냐고 물었다.
갈릴리 어부 출신과 여러 평민 계층의 제자들, 여인들과 일을 하셨다고 대답했다.
가브리엘이 계속해서 물었다. '이 일을 이루기 위해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까?'
[나의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나의 메시지를 남겨 두었다. 그들이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전할 것이다.] 예수님은 그렇게 대답하셨다.
그러자 가브리엘은 깜짝 놀라면서 큰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럴 만한 위인들이 못 되는 것 같던데요. 만약 그들이 실패라도 하면 어쩔 셈이십니까?'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다른 대안은 없다. 나는 그들을 믿는다.']
그렇습니다. 그것 때문에 초대교회가 목숨을 걸고 달렸습니다.
우리가 대안이랍니다. 우리 교회가 대안이랍니다. 다른 대안은 없답니다.
우리가 식어지면 똑같이 복음의 역사가 식어지고, 우리가 무너지면 똑같이 우리 시대에 복음의 역사가 무너지고,
다른 대안은 없답니다.
그것 때문에 사람들의 비난에도 풍랑에도 환대에도 그리고 독사가 나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그 어려운 환경에도
그의 시선은 오직 우리 주님께서 행하시는 일에 모든 시선을 두고 있었기에
그는 그 풍랑 이는 바다 위에서도 잘 달려갈 수 있었습니다.
풍랑을 만나 죽을 고생을 하고 타고 가던 배가 좌초되고 부서졌는데, 겨울 바다에 빠졌는데,
그리고 사람들의 냉대를 받고 있는데, 독사에 몰려서 내 인생이 끝나가는 상황인데.. 그는 그곳서에도 의연합니다.
왜? - 그는 지금 그곳의 하나님의 파티에 초대 받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파티, 생명들이 살아나서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그래서 생명들 때문에 벌떡 벌떡 일어나 함께 춤을 추는 파티,
그 파티에 초대받았기에 그냥 주저앉아 있을 수 없었습니다.
모든 시선을 주님께 집중하고 그렇게 달려갔을 때, 그 땅에서 생명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아니 주님께서 미리 맛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로마 땅에 펼쳐질 그 놀라운 생명의 역사를 우리 시대에도 계속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도 이제 찬양하면서 결단의 자리로 나갈까요...
♬ 내게로부터 눈을 들어 추를 보기 시작할 때 주의 일을 보겠네
내 작은 마음 돌이키사 하늘의 꿈꾸게 하네~ 주님을 볼 때
모든 시선을 주님께 드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느낄 때
내 삶은 주의 역사가 되고 하나님이 일하시기 시작하네~♬
복음을 전했지만, 목숨을 걸고 달려가고 했지만, 원했던 것만큼 기대했던 것만큼 나라는 돌아오지 않았고,
왕은 굽히지 않았고, 잘 먹고 잘 사는 로마의 귀족들은 시늉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시선을 주님께 드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느낄 때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볼 때 ,하나님은 일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이 시간, 모든 시선을 주님께 고정하고 우리의 마음을 다 모두어서 함께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기 시작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시작하실 것입니다.
가정을 가슴에 품고, 자녀들을 가슴에 품고, 교회를 가슴에 품고, 사역을 가슴에 품고, 죽어가는 영혼들을 가슴에 품고,
이 시간 주님 한 번 크게 부르시고 함께 통성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