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Ⅱ-79]아름다운 사람(22)-‘파리의 택시운전사’ 홍세화
어제 오후 정읍의 지인형님이 “홍세화선생 부고가 났네” 카톡을 보내왔다. 화들짝 놀라 검색을 해보니, 지난해부터 전립선암으로 1년 넘게 고생하다 항암치료를 끊은 채 끝까지 사회활동을 하다 돌아가셨다는 것을 확인했다. 홍선생을 잘 알지는 못해도(딱 한번 한겨레신문사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쳐 반가운 목례로 인사를 나눈 적 있다), 1995년 펴낸 『파리의 택시운전사』라는 책으로 처음 알게 됐고(망명자로 삶의 폭풍을 겪는 과정과 애틋한 일화들로 열광적인 호응과 성원을 받음), 2000년 펴낸 문화비평서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나눈다』를 책을 통해, 그의 삶과 사상의 세계를 좀 안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이미 ‘고전’이 된 두 권의 책은 아직도 나의 서가에 꽂혀 있다.
1970년대말 프랑스에서 회사원 시절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에 연루돼 본의 아닌 망명을 했다. 순전히 먹고 살려고 빠리에서 택시운전사를 하다, 20년만인 1999년 그리운 고국으로 망명했다. 한겨레 편집위원 등 언론인으로, 노동운동에 늘 앞장선 진보적 지식인의 ‘상징’이 되었다. 무엇보다 그는 ‘관용寬容’을 뜻하는 프랑스어 ‘똘레랑스tolerance’라는 개념(용어)을 선보임으로써, 흑백논리가 지배적인 우리 사회에 지적 성찰의 계기를 제공한 ‘똘레랑스의 전도사’였다. 그는 마지막 인터뷰에서 “이성의 빛을 잃는 순간, 우리는 인간임을 포기하게 된다. 맹자가 말한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 이 사단四端이 바로 똘레랑스”라고 말했다. 또한 작년 1월 한겨레신문 칼럼에서 “자연과 인간, 동물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성숙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소유所有에서 관계關係로, 成長에서 성숙成熟으로 뛰어오르는 단계'가 당신들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宿題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지상에서의 마지막 당부를 했다. 조국 대표가 말하는 ‘사회권 선진국’은 이를 뜻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똘레랑스,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그는 이 땅에서 사반세기 동안 진보적인 지식인 역할을 톡톡히 했다. 한겨레 기획위원과 편집위원으로 일했으며,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편집인을 지냈다. 그가 만든 한겨레 독자페이지 ‘왜냐면’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그 페이지에 나의 졸문이 대서특필된 적이 있다. 흐흐. 진보신당 대표와 사회단체 <장발장은행: 벌금형을 선고받고 돈을 못내 형을 사는 사람들을 지원>의 은행장을 맡기도 했다.
조용하고 올곧은 성품으로 많은 독자와 지인들의 존경을 받았던 홍 선생은, 우리 곁을 떠나도 너무 빨리 떠났다. 맑은 얼굴만 보아도 선하고 사욕 하나 없는 의로운 사람이라는 게 확실하게 쓰여 있지 않은가. 선하고, 중요한 인플루엔서influencer. 이런 슬픈 죽음의 소식이 있을 때마다 나는 종종, 자주 ‘하늘’을 원망하곤 한다. 100세가 흔한 요즘 세상에 1947년생이니 만으로 77세. 나보다 열 살 위 형님인 것을. 빨라도 너무 빠르지 않은가. 그는 ‘아름다운 사람’이 아니고 누가 뭐래도 ‘훌륭한’ ‘존경받는 사람’이었다. 한국은 여전히 암담하고 할 일이 너무 많은데, 그처럼 공의公義와 타인에 대한 연민憐憫에 투철했던 사람들을 왜 이리 빨리 데리고 간단 말인가? 이런데도 그는 똘레랑스하자고 외칠지 의문이다. 함석헌, 문익환, 김대중, 백기완 선생은 고생은 하셨지만, 그래도 ‘거의 천수天壽’를 누렸다 치자. 하지만 조영래 변호사, 정치인 제정구, 전사戰士시인 김남주, 장준하 선생과 쇠귀 신영복 선생을 비롯하여 이름이 많이 안 알려진 수많은 진보인사들을 이렇게 일찍 꺾어버리는 그 ‘속내’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도대체 알지 못할 일이다. 왜 이렇게 안타깝고 아쉽다는 말 밖에 하지 못하게 만드는가? 반면에, 금방이라도 데려가야 할 ‘인간’들은 왜 데려가지 않고, 그들은 또 명命이 길고 부귀와 공명을 다 누리게 하는지 모를 일이다. 화가 난다. 하늘은 나의 이 ‘어리석은 질문’에 최소한 응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근황을 모르고 있었기에 나로선 그의 돌연한 별세가 너무 속상하고 애닮기만 하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