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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맞아! 우리가 이렇게 살았었어.”
1950년 6월25일 북한군이 남침했었을 그 즈음해서의
우리네 생활모습을 65년이나 지난 오늘 다시 본다.
오랜만에 보는 옛 모습들이다.
한 민족이 서로 다른 이념으로 남북으로 갈라져 지내다가
북쪽의 일방적인 야욕으로 남침을 당했다.
그들은 왜 무력으로 동족을 해치면서 통일을 하려했을까?
남과 북의 사상논쟁을 파고들자면 끝이 없다.
오늘 이 자리에서는 6·25당시 우리네의 가난했던 생활상만 있는 그대로 살펴보자.
굳이 사진 설명을 하지 않아도 참 많은 생각을 하게하는 사진들이다.
특히 전후(戰後)에 태어난 사람들은 과거의 우리 부모들의 가난했던 삶을
되돌아봄으로써 많은 점을 느껴야한다고 생각한다.
하늘로만 솟는 빌딩숲과 아파트의 주거문화,
대형 마트의 풍부한 먹거리 생필품들, 그리고 거리에 넘치는 자동차 물결 등등...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이 당시 6·25 남침으로 공산화되었다면
과연 오늘 우리의 현실은 어떻게 변했을까?
필자의 고향은 북쪽 땅 함흥이었다.
해방되고 그 이듬해 엄마 손에 이끌려 당시의 한탄강(임진강)을 건너
남쪽 땅을 밟은 탈북민이었다.
6·25사변은 그로부터 4년 후 인천 신흥국민학교 3학년 시절에 맞았다.
당시 백천 경찰서장인 아버지를 따라 가족들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을 해야만 했다.
바로 윗 사진의 멍게와 해삼을 파는 여인들처럼
필자 역시 할아버지와 함께 자갈치시장 길바닥에서 UN성냥을 팔고 있었다.
바로 엊그제였던 것 같았는데 벌써 6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사진은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미군 Kenneth Lehr씨가 찍은 50년대 부산 길거리 풍경들.
sns로 들어 온 사진들이다>
[화보] 1953년 수원의 초여름 모습
입력 2015-07-31 10:48:08
1953년 경기도 수원 초여름 풍경이 공개됐다.
한국 전쟁 당시 오산 공군기지에서 근무한 미군 월워스 병장과 동료 군인들이 수원과 오산 일대를 사진으로 남긴 것.
이 사진은 야후 플리커를 사용하는 아이디 m20wc51 유저가 이베이를 통해 다수의 한국전쟁 사진을 구매 후 많은 이들과 추억을 나누기 위해 공개한 것으로 알려졌다.
동아닷컴 영상뉴스팀
[광복70주년] 대중교통의 변천사
입력 : 2015.08.11 09:28 조선일보
입력 : 2015.08.11 09:28
사진/ 조선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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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여행 광복70주년]우리가 살던 그 집
입력 : 2015.08.11 17:31
광복 70주년 시간여행 '우리가 살던 그 집'
식민지로부터 해방된 이후, 우리의 생활양식에 맞는 주택을 만들어가는 것이 과제가 되었었다. 하지만 분단과 전쟁 등 혼란 속에서 편리한 기능을 추구하는 경향은 점차 입식 위주의 서구식 생활양식을 도입하게 하였다.
해방 이후 사회적, 정치적 불안정 속에서 더욱 가속화된 주택난을 해소하기 위해 정책적 차원에서 지속적으로 대량 공급되면서 도시 서민주택으로 확산되어 갔다.
또 한국전쟁 이후에는 전란으로 인한 폐허를 복구하는 차원에서 구호성 주택이 많이 건설되었는데, 주로 외국의 원조에 의해 건립된 재건주택·희망주택 등으로 불리는 집합주택이 여기에 해당한다. 대부분 온돌과 마루 구조에 거실, 부엌, 변소가 서로 인접하여 실내가 구성되었다. 이들은 전쟁 후 과도기에 급조된 주택으로 대부분 채광, 위생 등은 전혀 고려되지 않고 최소한의 기본조건만을 갖춘 정도로 생활에 불편한 점이 많았다.
사진/조선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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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여행 광복70주년] '한국의 패션피플들'
입력 : 2015.08.12 09:47
'해방이후~1950년대'
1945년 해방을 맞으면서 일제에 의해 통제받던 복식제도에 반발하여 한복을 많이 입었다. 하지만 한국전쟁을 거치며 미국에 의해 들어온 구호폼 의복으로 양복이 다시 보급되었고, 군복을 염색한 구제품과 군용담요를 개량해 코트를 만드렁 입는등 구제품패션이 인기였다.
1955년 최초의 디자이너 단체인 대한복식연구회가 조직되고, 1956년 대한민국 최초의 패션쇼 '노라조 여사'의 패션쇼가 열렸었다.
전쟁 직후 디자이너 부띠끄들이 모여든 명동이 패션 1번지로 떠올랐고 이들의 주도로 하이패션이 싹텄다.
'1960~70년대'
패션의 다양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기이며, 대중문화가 패션에 큰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 시대이다. 맘보바지가 젊은이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 하였고, 미니스커트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미니스커트는 미풍양속을 저해한다는 이유로 단속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미니스커트의 등장은 단순한 의복의 변화가 아니라, 당시 사회상을 반영하고 우리민족의 전통적인 패션의식의 대변화 였다.
미니스커트가 젊은 여성들로부터 선풍적 인기를 누려 사람들의 의상에 관한 개념이 자기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수단으로 전환된 시점이다.
스커트 뿐만 아니라 70년대 들어 판탈롱바지(바지통이 매우 넓은 바지)의 유행과 선글라스, 머리수건 등 다양한 패션소품이 등장했고 과장된 형태의 부풀린 헤어스타일, 남성들의 장발이 크게 유행했다.
'1980~90년대'
기성복산업 시대가 열린 시기로, 83년 교복자율화를 기점으로 청소년 패션(신세대의 등장)을 중심으로 발전하였고, 더욱더 감각적이고 개성을 중시한 패션문화가 형성되었다.
'2000년대'
의식주 전반에 걸쳐 잔연과 천연을 추구하는 경향 및 2004년 웰빙문화 확산으로 옷에대한 기능성이 중시되고, 복고풍의 영향으로 장식적 디테일이 강하고, 색채는 전반적으로 밝고 강렬하다. 사회,문화적으로 여가에 대한 중요성이 부각되고, 패션 트렌드는 캐주얼 중심으로 이동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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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여행 광복70주년] 사진으로 본 대한민국 선거
입력 : 2015.08.13 08:06
과거의 선거 풍경
과거 유세 현장의 모습
옛 자료 사진들을 보면 수많은 청중들이 모인 가운데 후보들이 학교 운동장이나 한강고수부지 등 대형 집회 장소에 모여 합동 유세를 열었다. 1970년대 합동 연설회장에는 청중들이 버스 위에 올라가 후보자들의 연설을 경청하고 늘어선 포장마차에선 함께 막걸리를 마시기도 했다. 때로는 한 정당의 마스코트인 황소가 유세장에 등장하는 등 축제분위기 속에 진행됐다.
선거 포스터의 변천사
선거 표어와 포스터에도 시대상이 반영됐다. 1960년대 '공명선거 이룩하여 자손만대 물려주자' 같은 딱딱한 문구에서 2000년대로 올수록 연예인이 선거 포스터 모델로 등장하고, 문장도 부드럽고 간결한 문체로 바뀌었다.
투표함
우리나라 최초의 선거는 1948년 5월 10일 시행된 제헌국회의원을 뽑는 선거였다. 이 시절부터 1960년대까지 나무로 만든 투표함이 선거에 쓰였다. 그러나 이번 6·4 지방선거에 쓰일 투표함은 연성플라스틱 재질로 되어 있어 외부 충격에 파손되지 않고, 특히 윗부분에는 전자칩(NFC-고유식별번호 인식가능)까지 부착돼 있어 다른 투표함과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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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클립] 뉴스 인 뉴스<279> 한국 농업 70년
[중앙일보]입력 2015.08.13 00:06
올해로 한국은 광복 70주년을 맞이합니다. 1945년 8월 15일은 일제의 수탈로 황폐했던 한국 농촌에 따사로운 볕이 다시 드리운 날이기도 합니다. 보릿고개란 말이 생겨날 만큼 지독했던 가난과 6·25 전란의 고통을 딛고 한국 농업은 눈부시게 성장해왔습니다. 최빈국을 세계 11위 경제대국으로 올려놓은 한국인의 ‘밥심’. 바로 한국 농업 70년의 힘입니다.
‘광복 이후 한국 농업·농촌 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무엇입니까’. 농림축산식품부와 농림수산식품교육문화정보원이 광복 70주년을 기념해 설문 조사를 했다. 지난달 3~12일 열흘간 10대 이상 한국인 1317명을 대상(복수 응답 가능)으로 했다. 조사는 서울부터 제주까지 전국에 걸쳐 진행했다. 문헌 조사와 전문가 분석을 거쳐 추출한 50여 개 키워드를 제시하면 설문 대상자가 2~3개를 선택하는 방법을 썼다. 인지도와 선호도 중심으로 설문을 하다 보니 10~20대 사이에서 인기인 ‘삼시세끼’ 같은 최신 방송 프로그램도 ‘전원일기’를 제치고 순위에 포함됐다. 한국인이 직접 뽑은 농림업 70년을 설명하는 10대 키워드를 소개한다.
1. 새마을 운동(설문 응답률 23.6%)
자조·근면·협동을 내세운 1970년대 농촌 부흥 운동이다. 70년 ‘새마을 가꾸기 운동’이란 이름으로 시작했다. 마을 길 넓히기, 지붕과 상수도 개량, 마을회관 건립 같은 환경 개선 사업에서 출발해 농촌 소득증대 사업으로 이어졌다. 때마침 다수확 신품종 벼인 ‘통일벼’가 개발됐다. 통일벼의 보급과 함께 주식인 쌀의 생산량이 크게 늘었다. 농가 소득도 빠르게 증가했다. 농촌의 성공에 힘입어 도시·공장 새마을 운동, 학교 새마을 운동이 펼쳐졌다. ‘신바람’이란 말이 이때 유행했다. 한국인에게 ‘잘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열어준 운동이다. 설문 조사에서 선정 이유에 대한 답으로 ‘국가 경제가 살아났다’ ‘국민이 부지런해졌다’ ‘낙후된 농촌이 발전됐다’ ‘한마음 한 뜻이 됐다’ 등이 있었다. 연령대별로 새마을 운동을 직접 경험한 50대(33.6%)와 60대 이상(31.8%)의 응답률이 높게 나왔다. 10~30대의 응답률은 10%대에 그쳤다.
2. 비닐하우스(21.9%)
사계절 내내 신선한 채소와 과일을 재배할 수 있게 한 비닐하우스의 등장은 한국 농업 70년사에서 ‘백색 혁명’으로 꼽히는 사건이다. 초록색이던 밭의 색깔을 흰색으로 바꿔놨다는 의미도 있다. 70~80년대에 걸쳐 국내 석유화학산업의 발전과 맞물려서다. 비닐이 농가에 보급되기 시작한 70년대 밭고랑에 비닐을 씌워 병충해를 막고 온도도 일정하게 유지하는 기술이 발전했다. 계절에 따라, 기후에 따라 농산물 값이 급등락하던 일이 줄었다. 고추·감자·딸기·배추 등 채소의 생산량과 품질을 획기적으로 높이는 역할을 했다. 80년대 들어선 비닐하우스로 대표되는 시설 재배가 발달했다. 연령대별로는 10대(33.4%)에서 비닐하우스를 꼽은 비율이 높았다. 50대(15.3%), 60대 이상(15.3%) 응답률은 낮은 편이었다.
3. 친환경 농산물(20.7%)
1300여 명 조사 대상 가운데 셋째로 많은 사람이 친환경 농산물을 선택했다. 환경 오염과 서구화된 식생활로 건강이 나빠질 수 있다는 우려 탓에 친환경, 유기농, 무농약 농산물에 대한 관심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설문 조사에서 지역별로는 대도시(24.4%), 연령별로는 30대(33.9%)에서 친환경 농산물을 꼽은 사람이 많았다. ‘건강한 밥상이 가족의 건강을 책임진다’ ‘농촌을 살릴 수 있는 길이다’ 등 이유가 따랐다.
4. 경운기(14.3%)
광복 직후인 50년대만 해도 논과 밭에서 사람의 일손을 돕던 건 소가 전부였다. 산업화와 맞물려 60년대 혜성 같이 나타난 동력 경운기는 농촌 풍경을 바꿔놨다. 63년 처음으로 국산 경운기가 등장했다. 이후 해마다 1만 개 넘는 경운기가 농촌에 보급됐다. 70년엔 트랙터, 73년엔 이앙기가 한국 농촌에 차례로 소개됐다. 정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함께 많은 농촌 일꾼이 서울 공장으로 향했다. 정부는 농산물 재해 대책 용도로 경운기, 양수기, 방제기 등을 지원하고 보급했지만 이들 농기계는 부족한 농촌 일손을 메우는 역할로 자리매김을 한다. 현재는 논·밭 갈기(경운 정지), 모내기(이앙), 수확, 방제 등 분야의 기계화율은 97~99%에 달한다. 설문 조사에선 ‘농가의 일손을 덜어줬다’ ‘고령화 사회에 꼭 필요한 농기구’ 등 이유로 경운기를 지목했다. 권역별로는 제주도(26.5%)에서 높은 응답률이 나왔다.
5. 삼시세끼(14.0%)
방송프로그램 순위만 따졌을 땐 ‘전원일기’가 1위였다. 하지만 전체 순위로 보니 중장년층 표가 갈리고 10대와 20대의 압도적 지지 속에 tvN의 예능 프로그램 ‘삼시세끼’가 ‘농업 70년 10대 키워드’ 안에 이름을 올렸다. ‘삼시세끼’에선 도시 생활에 익숙한 연예인이 산골(정선)과 섬(만재도)에서 하루 세 끼를 차려 먹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솔직하게 담아낸다. TV 예능 프로그램을 많이 접하는 10대(29.9%)와 20대(25.7%)의 응답률이 매우 높았다. 반대로 50대(4.3%), 60대 이상(8.2%)의 응답률은 낮았다.
6. 귀농귀촌(11.5%)
70년대 많은 젊은이가 성공의 꿈을 안고 서울로 향했다. 40여 년이 지나 이들 ‘베이비 붐(전쟁 후 높은 출산율을 기록)’ 세대는 은퇴를 했거나 앞두고 있다. 도시에서의 일을 접고 다시 농촌으로 향하는 귀농귀촌 인구가 늘고 있다. 고령화되는 농촌에 대한 해법으로 정부가 장려를 하고 있는데다 건강한 생활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면서 귀농귀촌 열기는 점점 뜨거워지는 중이다. 귀농귀촌은 중장년층만의 관심사가 아니다. 설문 조사에서 한창 은퇴를 고민할 나이인 50대(15.9%) 다음으로 30대(14.5%)에서 높은 응답률을 기록했다. 팍팍한 도시 생활에 지치고 어린 자녀의 건강을 걱정하는 30대 젊은층에서도 농촌생활에 대한 관심과 선호가 높다는 얘기다.
7. 신토불이(10.8%)
‘몸과 땅은 둘이 아닌 하나’란 뜻의 신토불이(身土不二). 한국에서 난 사람은 한국에서 자란 농산물을 먹어야 건강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90년대를 기점으로 당연히 한국에서 나고 자란 것만 먹던 시대가 막을 내린다. 우루과이 라운드를 계기로 국내 농산물 시장이 개방되고 국제 물류가 발달하면서다. 동시에 신토불이란 말이 크게 유행을 하기 시작했다. 값싼 외국 농산물이 대량으로 수입되고 품질 낮은 식재료가 국산으로 둔갑해 팔려나갔다. 동시에 신토불이 농산물에 대한 국민의 관심은 더 커졌다. 설문 조사에서 직업군별로 농림어업 종사자가 19.1%의 높은 응답률을 보였다. 국산 농산물을 더 아껴줬음 하는 농업 현장의 절실함이 드러났다. 주부, 학생 등(11.5%)의 응답률도 비교적 높았다. 농림어업 유관기관 종사자(6.3%)의 응답률이 가장 낮았다.
8. 한식 세계화(10.8%)
비빔밥, 불고기, 김치 같은 한식은 건강과 맛, 두 가지를 모두 갖췄다. 세계에서도 통하는 경쟁력이다. 한식은 한국에서 난 농산물로 만들 때 가장 맛있다. 세계로 뻗어나가는 한식의 경쟁력에 한국 농어촌의 미래가 있다며 설문자 열 명 중 한 명이 한식 세계화를 중요 키워드로 꼽았다. ‘음식 문화를 세계로 전파하는 것이 한국을 알리는데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이란 응답도 있었다.
한식 세계화에 대한 응답률은 10대(18.1%), 20대(17.3%)에서 특히 높게 나타났다. 이번 설문 조사를 맡은 리서치알앤에이의 윤춘식 책임연구원은 “요리 프로그램 유행과 함께 한식에 대한 인기가 급상승하면서 TV 매체에 친숙한 이들의 응답률이 가장 높았다”고 분석했다.
9. 박정희 전 대통령(10.2%)
한국을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한 대통령이라고 불리는 박정희(1917~79년) 전 대통령. 한국 농업 70년을 상징하는 10대 키워드로 뽑혔다. 그는 63년부터 79년까지 제5~9대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박 전 대통령 취임 초기 한국은 매해 봄마다 보릿고개를 걱정하던 가난한 농촌 국가였다.
박 전 대통령은 이번 10대 키워드 조사에서 1위로 꼽힌 새마을 운동과 떼어놓을 수 없다. 새마을 운동은 한국 농촌을 바꿔놨다. 한국이 70년대와 80년대를 거치며 공업 국가로 도약할 수 있었던 것도 농업의 발전이 있어 가능했다. 박 전 대통령 재임 시기 젊은 시절을 보내 향수가 있는 60대 이상(14.2%)과 50대(13.3%)에서 응답률이 높게 나왔다. 이들은 ‘국가 발전의 토대를 이뤘다’ ‘우리를 배부르게 해줬다’ ‘새마을 운동을 통해 농업 발전을 이뤘다’ 등을 선택의 이유로 설명했다.
10. 경지 정리(9.8%)
60~70년대만 해도 네모난 밭과 논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물길은 물론 농산물과 사람이 오갈 길도 마땅치 않은 논밭이 대부분이었다. 70년대 촉발한 새마을 운동을 계기로 경지 정리 사업이 전국적으로 펼쳐졌다. 90년대 정부의 경지 정리 사업은 한 단계 발전해 진행된다. 농경지와 경작로, 수로를 표준화해 정비했다. 논이냐, 밭이냐에 따라 용도에 맞게 경지를 정리했고 정부 예산 지원이 따랐다.
설문 조사에서 경지 정리의 혜택을 경험한 40대(17.1%), 50대(14.9%)에서 높은 응답률을 기록했다. 10대(1.3%)나 20대(3.0%) 청년층의 응답은 미미했다.
세종=조현숙 기자 newear@joongang.co.kr
[시간여행 광복70주년]추억 속 '둘만 낳자' 캠페인
입력 : 2015.08.19 10:05
한 집에 7~8남매는 보통이었고 많은 집은 12남매까지 있었던 시절,먹고 살기가 꽤나 힘들었고 빠듯한 생활에 아이들이 태어날 때마다 저 먹을 것은 다 타고난다는 고정된 관념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관념도 무너지기 시작해 1960년대에 이르러 정부 주도하에 가족계획이 실현되었고, 그에 따라 다양한 가족계획 포스터가 발행되었다.
1961년 4월 1일에 (사)대한가족계획협회가 만들어졌다. 협회는 5년간의 사전작업 후 1966년에 '세자녀 갖기 운동'을 시작으로 활발한 활동에 들어가게 된다.
추억 속 '둘만 낳자' 캠페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60년대 후반 벌인 출산조절 캠페인 사진 속 “둘만 낳아 잘 길러서 1000불 소득 이룩하자”라는 표어가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1965년 299불이었던 국민소득은 1969년에도 815불에 지나지 않았다.
1961년 11월부터 전국 보건소를 동원, 추진된 가족계획사업은 10년후 인구증가율 2%를 목표로 강력하게 추진했다.
1960년대 인구문제 '출산 붐(베이비붐)과 피난민들로 인한 급격한 인구 증가'
'표어' 적게낳아잘기르면 부모좋고 자식좋다/덮어놓고 낳다보면 거지꼴을 못면한다/많이낳아 고생말고 적게낳아 잘키우자
1970~80년대 인구문제 '산업화로 인한 도시 인구 증가, 촌락인구 감소'
'표어' 딸 아들 구별말고 둘만낳아 잘기르자/하루 앞선 가족계획 십년 앞선 생활안정(1970) 잘키운 딸하나 열아들 안부럽다/둘도많다/축복속에 자녀하나 사랑으로 튼튼하게/하나씩만낳아도 삼천리는 초만원 (1980)
1990년대 인구문제 '성비 불균형'
'표어'선생님! 착한일하면 여자짝궁 안시켜주나요?/고운 딸하나 백아들안부럽다(남아선호사상)
2000년대 인구문제 '저출산과 고령화'
'표어'아빠! 혼자는싫어요 엄마! 저도동생을 갖고싶어요/하나보단 둘, 둘보단셋이 행복합니다./하나의 촛불보단 여러개의 촛불이 더밝습니다(저출산 고령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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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여행 광복70주년] '한국의 흡연과 금연' 담배 이야기
입력 : 2015.08.20 07:43
'사진으로 보는 담배의 역사'
건강에 큰 해악을 끼친다는 점에서 늘 주목을 받아왔던 담배. 최근에는 금연구역 지정, 가격 인상 등으로 재조명을 받고 있다.
담배에는 시대적 상황과 사람들의 애환이 담겨 있다.
80년대 초반까지 버스, 기차등 건물 실내 에서 담배를 피웠다. 담배가 피우는사람 몸에 나쁘다는건 알고있었지만, 피우지않는 다른사람에게도 나쁜영향을 준다는걸 알지못했었다. 80년대 초반 금연붐이 일고난후 이런것들이 알려지면서, 실내 흡연이 금지가 되었다.
▲왼쪽부터 한국인 기술로 만들어진 광복기념, 최초의 담배인 '승리' , 최고급 담배잎으로 만든 고급담배로 부유층의 인기를 얻었던 '백구' (1940년대) 전쟁후 희망과 의욕을 불어넣기 위한 담배인 '파랑새' , 한국 최초의 필터담배인 '아리랑' (1950년대)
▲왼쪽부터 한국 최초의 박하담배 '금관' , 제1차 경제개발계획 및 동양 최대 신탄진 담배공장 준공 기념으로 나온 '신탄진' , 새마을운동 독려 담배 '새마을' , 당시 최고 인기담배 '청자' (노래는 추자, 담배는 청자라는 말도 있었다.)
▲왼쪽부터 한국 최초의 탄소필터 장착 담배 '은하수' , 충무공의 창의력과 애국심을 기르는 담배 '거북선' , 당시 가장 순한 담배 '태양'
▲왼쪽부터 1988년 88올림픽 기념 담배 '88' , 한국 최초의 레이져 천공담배 '한라산' (1980년대), 대전 엑스포 기념담배 '엑스포' , 저소득층을 배려한 담배 '디스'(1990년대)
▲왼쪽부터 국산 최초 초슬림담배 '에쎄' , 대학가에서 많이 팔리는 인기담배 '레종' , 국내 최초 저타르 담배'시즌' , 세계최초 시가엽 함유 브랜드 담배 '보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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