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Ⅱ-80]어느 군郡의 1957년생 57명의 갑계모임
귀향한 지 5년, 지난해 여름, 한 친구가 어느 모임을 소개하며 가입 의사를 물었다. 모임의 성격이나 구성이 너무 재밌었다. 임실군 13개 면에 사는 1957년생 동갑계인데, 이름하여 <임실군 57회>란다. 57년생이므로 정회원이 57명이고, 결원(먼 곳으로 이사를 가거나 사망의 경우)이 생기면 회원 추천을 받아 면별 회원수를 고려해 가입을 허락한다고 했다. 가입 전 예비모임에 처음 참석했을 때, 무척 당황했다. 모두 ‘닭띠’인데도, 나보다 보통 대여섯 살은 위로 보여, 아무리 동갑이라 해도, 더구나 초면인 처지에 막바로 반말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런데도 기존 회원들이 이무럽게 받아들여줘 고마웠다. 한 친구는 수인사를 하자마자 “영록아”라고 부르는데, 처음 본 친구에게 “00아”라고 부르기가 뭐해 ‘0형’이라고 하니 직바로 핀잔이 날라왔다. 돌아서면서 생각하는 게 ‘저 친구들도 내가 자기들보다 늙어보이겠지?’였다. 그런가? 나도 그렇게 늙었을까? 서글픈 일이다.
아무튼, 한 달에 한번 정기모임. 1년에 봄나들이 한번, 연말에 부부동반 송년모임을 한다. 농촌에 살다보니 ‘갑계’라는 재밌는 문화가 있음을 알았다. 도시생활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별난 모임이다. 같은 면 아니면 인근면까지 합해 구성된 동갑모임은 자주 모여 농사정보도 교환하고 사는 얘기도 나누는데, 그렇게 끈끈할 수가 없다. 동갑 이유 하나만으로 충분한 것같았다. 참 별나다. <임실군 57회>는 군郡차원으로 확대된 것인데, 나야 고향인 오수면 출신 몇 명만 알 뿐이고, 살면서 한번도 만나보지 못한 친구들이 대부분이다. 지금껏 대여섯 번 참석했는데, 이름과 사람이 매치되지 않은 것도 곤혹스러운 일이고, 친구들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는 게 문제였다. 앞으로 56명을 조금이라도 알고, 헷갈리지 않으려면 최소 몇 년은 걸릴 상싶다. 아무튼 ‘고향 지킴이’들이 대부분인데, 아주 친한 듯 다가오는 그들이 싫을 까닭은 없다. 고향에서 살면서 같은 군내에 동갑내기 친구들을 많이 사귀어서 나쁠 것은 없지 않은가.
오늘 57명 중 35명이 봄나들이를 다녀왔다. 관광버스 안에는 여러 친구들이 희사한 물품들로 가득했다. 한 친구는 인삼을 투깔스럽게 많이 튀겨왔고, 또 한 친구는 토마토를 한 박스, 같이 못가 미안하다며 일행의 우비 선물에 떡과 요구르트 등등등등,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를 판이다. 목적지는 ‘한국의 나폴리’라는 통영. 봄비치고 제법 많이 내린 우중의 날씨에도 70%가 참석했으니 성황인 셈. 아침 8시 20분 오수 출발, 11시 통영 도착. 모모한 인사는 아침부터 술잔을 권하고, 휴게소에서 담배를 피우는 친구들이 아직도 3분의 1은 되는 듯하다. 어시장 내 회집에서 즐거운 점심시간. 회장을 비롯한 모모한 인사들이 연신 건배사를 하며, 주고받는 술잔 속에 우정이 싹트기라도 하는 듯, 어쩌면 그렇게 ‘겁도 없이’ 술들을 잘 마셔대는가, 놀랍다. 35명이 참이슬 34병을 작살냈다고 한다. 오후 1시, 비가 갈수록 세차게 내리든말든, 한산도閑山島로 가는 300여명이 넘게 승선하는 유람선에 올라탔다. 모두 전국에서 온 관광버스 관광객이다. 천안의 동네모임, 초등학교 동창모임 그리고 군내 동갑모임 등. 선장이 재밌다. 비가 너무 많이 오니 한산도에 착륙, 제승당을 보면 뭐하겠냐며, 한려수도를 한바퀴 돌면서 아예 MC와 가수로 나서 분위기를 띄웠다. 순식간에 춤판과 트로트판이 벌어져 거의 2시간여를 띵까띵까. 참, 우리 민족은 ‘음주가무飮酒歌舞 DNA’만큼은 타고난 듯하다. 그리고 왜 그렇게 하나같이 가수들인지. 선장은 키도 크고 멀끔하게 생겨 여자 꽤나 호렸을 듯하다.
모두 바쁜 일상 속에서 오늘 하루쯤 일탈逸脫은 차라리 힐링이리라. 날씨는 궂었지만 서로 얼굴만 보아도 반가운 듯, 여기저기에서 심한 욕지꺼리도 흉이 안된다. 동갑내기 친구들이니까. 이상한 일이지만, 오직 그 이유 하나만으로 말이다. 오후 4시, 이제는 '아침에 나온 구멍'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 3시간 가까이 걸리는 거리. 비는 줄기차게 내리고 있다. 요새는 관광버스 안에서 음주가무가 금지돼 있다고 한다. 어길 시 과태료를 문다는데, 어떻게 알까했는데, 블랙박스를 점검하는 모양이다. 그것 참, 하지만 그건 아닌 것같다. 우리의 스트레스를 관광버스나 노래방 아니면 어디에서 풀 수 있을까? 이제 곧 모를 심고, 고추 등 밭작물을 심는 농번기인데. 마음의 준비를 하자고 이런 봄나들이를 하는 게 아닐까? 친구들은 모두 ‘한가락’씩 하는 무명가수들. 대단하다. 거기에 비좁은 통로에서 선보이는 몸춤들. 또한 회장단들의 술잔 권유 순례라니? 노래방 베스트셀러가 날아다닌다. 한 친구는 듣보잡인 장사익의 <섬>이란 노래를 부르며, 친구들의 우정을 칭찬하고, 혼자서는 못사는 공동체사회를 역설해 박수를 받았다.
저녁을 먹고 가느냐? 건어물이라도 선물로 가져가야 하느냐?의 판단기준도 재밌다. 옆지기들의 핀잔을 우려해서이다. 놀러갔다오면서 저녁도 안먹고 차려달라고 해? 무슨 모임이 선물 하나도 없어? 등의 마눌님들의 잔소리를 듣게 하지 않도록, 저녁도 먹고 죽방멸치 한 상자씩을 배려하는 회장단의 노고에 감사를 드린다. 다음달은 농번기이므로 모임을 유예한다고 하니, 욕 잘하는 한 친구가 다음주에 옻순과 삼겹살 파티 번개팅이 있다고 거듭 공지한다. 이 글을 쓰려고 보니 35명이 회식하거나 함께 유람선 타는 모습 등을 담은 사진 한 장 박지 않은 게 유감이다. 한산도 제승당에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불타는 애국혼의 흔적을 느껴보지 못한 것도 서운한 일이다. 그래도 유람선 무대에서 친구들과 발바닥의 때를 조금이라도 벗겼으니 즐거운 위안을 삼자. 이 비가 그치는 내일이면 또 바쁜 농촌의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판이다. 친구들아, 모두 다 건강하게 잘 지내다 6월에 만나자구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한 친구들에게도 조금은 미안한 마음을 갖자. 모처럼 봄나들이 한번 잘 했다. 에브리바디, 굿 나잇(Everybody, good n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