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문학
윤 금 초
#. 청승맞은 날의 신기루
<한길에 가는 저 할머니/ 딸 있거들랑 사위삼소/ 딸이야 있네마는/ 나이 어려 못 여우겠네/ 여보 할머니 그런 말 마오/ 거미는 작아도 줄만 치고/ 제비는 작아도 알만 낳소>(전남 해남지방의 민요)
우, 우, 우…. 바다가 청승맞게 울기 시작하고, 금방 소나기를 몰고 올 것처럼 대기권 구석구석마다 음산하고 끈적끈적한 기운이 감도는, 그 먹구름의 흐린 날이면 우리 마을 앞바다 위에는 신기루가 나타난다고 했다. 저 멀리 바라다 보이는 광막한 바다의 끝자락, 하늘 밑창과 맞물린 그 수평선 위에 종려나무, 야자수 등 울창한 열대식물이 붕붕 떠오른다고 했다. 남양군도南洋群島의 군인들이 거꾸로 물구나무 선 채 희한한 병정놀이를 벌인다는 것이었다. 아방궁처럼 드넓은 집에 선녀가 오락가락 노니는 모습도 보인다는, 신기루의 전설이 서려 있는 고향바다. 이른바 나의 개구쟁이 시절은 그 선망의 바다를 통째로 훔쳐내는 야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온 몸이 뻑적지근하도록 날씨가 을씨년스럽고, 우 우 우 바다가 청승맞게 울기 시작하면 나는 그 환상의 신기루를 붙잡는 꿈속에 들떠 있었다. 그러나 그 신기루는 하도 신기해서 함부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범상한 사람은 쉽사리 볼 수가 없다고 했다.
나는 한반도의 맨 끄트머리, 전남 해남에서 태어났다. 말이 해남이지, 읍내에서도 30여리나 더 땅끝〔土末〕쪽으로 휘어들어가는 화산면 갑길리花山面 甲吉里에서 태어난 것이다. 비가 오면 질척질척 찰거머리처럼 진흙이 달라붙던 마을 앞길이 요즘은 포장되었고, 하루에도 대여섯 차례 노선버스가 지나다니지만 아직도 궁항벽지의 ‘시골티’를 못 벗어난 그런 곳이다.
#. 텁수구이와 게젓과 선비기질
여기서 잠깐 말 머리를 돌려 내 고향의 멋과 맛을 짚고 넘어가자.
육자배기 가락처럼 휘청거리는 멋이 물씬 풍기는 고장, 내 고향 해남은 남도의 맨 끝에 위치해 있다. 예부터 저 유명한 절 대흥사를 매개체로 하여 해남문화권을 형성, 선비의 넉넉한 기질이 넘치는 고장이다. 그러므로 이 고을 아낙들은 된장·간장 담그는 솜씨가 남달랐다. 젓갈 따위의 밑반찬 단속 잘하고 가용으로 빚는 술 잘 담그는 것이 주부의 법도이기도 했다. 따라서 우리 고장 사람들은 수더분하고 구성구성한 맛과 멋이 몸에 배어있다. 맛깔스런 음식을 운위하는 식도락이란 바로 그런 멋과 맛의 운치가 잘 맞아떨어져야 하는 것. 혀끝에 굴리는 미각의 맛보다는 오히려 심상으로 음미하는 멋을 한층 더 높은 선반 위에 올려놓은 고장인지도 모른다.
뚝배기의 그 꺼끌꺼끌한 때깔처럼 소박한 인간미가 곁들인 음식 맛. 그것은 나의 어머니의 성품이자 음식 솜씨이기도 했다. 내 입맛은 아무래도 어렸을 때 향수가 되살아나는 어머니 음식 솜씨의 그 감칠맛을 덮을 게 없으리라.
팔월 한가위나 음력설이면 우리 고장에서는 명절 연휴 동안 내내 먹을 음식, 즉 장장 보름치의 음식을 미리 장만해 둔다. 천방지축 풍류를 즐기던 어린 시절, 우리 동네는 음력 대보름 무렵이면 액막이굿으로 흥청거렸다. 광대처럼 얼굴에 시커먼 목탄을 칠하거나 희한한 변장을 한 우리는 꽹과리를 치며 병신춤을 추는 등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액막이굿을 놀았는데, 굿패가 드는 집에서는 저마다 마당에 멍석을 펴고 그해의 액운을 “직신작신 쳐내 달라”고 푸짐한 음식을 내놓는다.
나의 어머니도 예외는 아니었다. 액막이 굿패를 위해 손수 담근 진양주와 함께 따로 장만한 음식을 내놓았는데, 그 가운데서도 ‘텁수구이’의 그 쫄깃쫄깃한 맛은 우리들의 풍류를 한껏 더 북돋아주는 별미였다. 술잔에 입술이 쩍쩍 달라붙는 진양주. 찹쌀 죽과 누룩을 빚었다가 다시 찹쌀 죽으로 덧술을 하는 진양주. 어머니는 오지항아리에 그 진양주를 담가서 안방 아랫목에 파묻어두곤 했는데 부글부글 술이 괴는 냄새가 풍기기만 해도 금방 군침이 도는 것이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내 고향 해남 화산의 생선 맛은 참 희한했다. 특히 텁수구이(상어고기의 일종)가 그렇다. 살이 피둥피둥 찐 텁수를 한 뼘 크기로 자른다. 두세 번 칼집을 내고 진간장에 설탕·볶은 깨 등 갖은 양념을 버무린 다음 실고추를 띄운다. 고기가 허물어지지 않도록 대꼬챙이를 서너 개 꽂고 석쇠에 얹어서 숯불에 굽는다. 다 익은 고기는 널찍한 대나무 석자에 담아서 한 사흘쯤 통풍이 잘되는 선반 위에 갈무리해 두는데, 기름이 쭉 빠진 텁수구이의 그 쫄깃쫄깃한 맛은 진짜 기찬 것이다.
멋과 맛을 즐기는 내 고향 별미로서 게젓(참게 젓)을 빠뜨릴 수가 없다. 진양주의 안주로는 게젓이 제격이기 때문이다. 게는 늦은 가을 찬 서리가 내릴 무렵에 잡은 암컷이라야 한다. 먼저 옹기그릇에 게가 잠길 정도로 물을 붓고 그 위에 참기름을 떨어뜨려(게 열 마리에 참기름 큰 숟가락 하나 꼴) 둔다. 하룻밤 사이에 그 기름을 게가 몽땅 먹게 한다. 참기름을 듬뿍 먹은 게를, 끓여서 식힌 간장에 담가 두었다가 한 달쯤 지난 다음부터 하나씩 둘씩 꺼내어 딱지를 벗긴 다음 그 속에 붙은 단맛이 든 고약·내장, 발에 붙은 살을 접시에 긁어모아서 갖은 양념으로 버무린 뒤 다시 딱지에 담아서 접시에 열 개의 발을 깔고 그 위에 얹어서 내놓는다. 이 게젓은 먹는다기보다는 진양주를 한 모금 마신 다음 젓가락 끝으로 그 특유의 향내를 맛보는 식-이를테면 심상心象으로 음미하는 것이다. 흔히 이 게젓은 집게발가락 하나만 가지고도 3년은 너끈히 먹는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진짜 별난 음식이기도 하다.
#. 모내기 때 농악놀이와 대동잔치
‘액막이굿’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하는 말이지만, 내 고향의 풍물놀이 가운데 모내기 때 ‘상사소리’와 함께 저절로 어깨춤을 추게 하는 농악을 빼놓을 수가 없다. 일손이 달리는 모내기철이면 이집 저집 서로 돌아가며 품앗이를 했는데, 동네 장정들 20여명이 한꺼번에 모이게 되는 우리 집 모내기 날에는 신나는 농악놀이를 했다. 저녁 새참을 들고 술도 한 순배 돌아간 다음 일의 능률도 높이고 피로도 덜기 위해 농악놀이를 하는 것이었다.
농악놀이를 할 때면 나의 아버지는 항상 북채를 잡았다. 목청이 카랑카랑한 소리꾼이 선소리를 매기면 “어이 어이 어허야 상사뒤요” 하며 모내기를 하는 일꾼들은 후렴을 따라 부르면서 농악의 리듬에 맞춰 손놀림도 재빠르게 모를 심었고 그 뒤에서는 꽹과리와 북을 쳐대는 것이었다. 그럴 때면 나도 덩달아 신이 나서 일꾼들 옆에다 모춤을 날라다 주며 어깨춤을 추었다.
아버지가 북채를 잡는 날이면 저 건너 산 계곡까지 둥 둥 북소리가 메아리치듯 나의 가슴은 마구 울렁거렸다. 북채를 잡은 아버지는 웃는 듯 찡그리는 듯 지그시 눈을 감고, 한쪽 바짓가랑이는 풀어 내려서 물에 첨벙하게 젖은 채 상체를 흔들거나 어깨를 들썩거려가며 무아지경에서 신명나게 북을 쳐대었는데, 북을 치는 그 모습이 그렇게 멋있고 낭만적일 수가 없었다.
둥둥 북소리가 울려 퍼지고 상사소리가 메아리치는 날 저녁이면 우리 집에선 동네 대동잔치가 벌어졌다. 북소리, 상사소리는 우리 집 마당으로 옮겨지고 동네 사람 남녀노소가 한데 어우러지는 그 대동놀이 때면 아버지는 더욱 자지러지는 몸짓으로 북을 두드렸다. 그런 아버지의 멋들어지고 낭만적인 피가 내 몸에도 흐르고 있었던가. 이른바 나의 ‘문학 열병’이 차츰 도지면서 ‘니나노 집’, ‘방석집’을 들락거리고 그곳 작부들과 어울려 젓가락 장단을 맞추다가 논마지기께나 팔아다 바쳤으니까 말이다.
#. 남의 손에 넘어간‘흉년 밥그릇’
모내기 때면 농악놀이를 했던 마을 앞 들녘은 꽤나 광활하다. 내가 자란 갑길리는 물론 부길리, 은산리, 송산리, 시목리 등 다섯 개 부락 사람들의 삶의 터전인 이 앞 들녘은 저 만경평야나 김제평야에 견줄 바는 못 되지만 기름지고 드넓은 농토가 끝없이 펼쳐져 있다. 그 가운데서도 내가 직접 모내기, 김매기, 벼멸구 잡기도 했던 ‘마당배미’는 어찌나 기름진 논이었던지 ‘흉년 밥그릇’이라고 했다. 가을이면 무르익은 벼이삭끼리 뒤엉켜 스크럼을 짜고 있어서 탱자를 던지면 그것이 논바닥에 떨어지지 않고 데굴데굴 굴러간다고 해서 ‘탱자배미’라고 하거나, 금싸라기 같은 땅이라고 하여 ‘금토배미’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 ‘흉년 밥그릇’은 이미 우리 가족 손을 떠나고 말았다. 아버지가 논문서, 집문서를 잡히고 둘째 사위 재정보증을 섰다가 그만 남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 한 동네에 사는 천병희 씨에게 팔았다가 아직도 그것을 되돌려 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좀 부풀려서 말하면, 나의 둘째 자형은 일찍이 1960년대 초반부터 부동산 투기에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자신의 손에 쥔 것은 쥐뿔만큼도 없으면서 남의 힘을 빌어다가 해남읍 시외버스터미널, 연탄공장 등을 겁 없이 사들였는가 하면, 나중에는 광산업, 간척사업(내수면 매립사업)까지 손을 댄 것이다. 그런데 그 겁 없이 달려든 무리수가 결국 죄 없는 우리 집과 주위 친척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힌 것이다. 피해를 입힌 정도가 아니라 ‘날벼락’ 바로 그것이었다. 땅을 일구는 농부는 농사가 곧 명줄인데, 어느 날인가 채권자들이 우르르 몰려와 ‘흉년 밥그릇’, 혹은 ‘탱자배미’로 불리는 우리 논의 벼를 몽땅 훑어가버리는 난리 벼락이라니…. 나의 아버지는 그때 충격을 받고 천수를 누리지 못한 채 뇌졸중으로 쓰러졌다가 결국 세상을 버리고 말았다.
면사무소가 들어서 있는 화산면 마명리에는 5일마다 한 번씩 장이 선다. 이따금 장날 저녁이면 장터 쇠전마당에다 포장을 치고 관객을 동원하는 노천극장露天劇場이 생기고는 했다. 요란한 스피커소리와 함께 그 고장 처녀 총각들을 몸살이 나도록 들뜨게 만드는 이동극장. 카우보이가 마구잡이로 인디언을 살해하는 서부활극이나, 찔끔찔끔 눈물을 쥐어짜게 만드는 ‘장화홍련전’, ‘심청전’ 따위를 상영하는 이동극장-그 노천극장이 서는 날이면 나는 어김없이 극장으로 달려갔다.
돈도 없이 동네 또래들과 함께 이동극장 앞을 서성거리다가 극장 출입구를 지키고 서있는 우람한 체격의 ‘기도’가 한눈을 팔거나, 혹은 공짜로 구경 온 이 고장 건달패들과 밀고 당기는 등 실랑이를 벌일 때 얼른 그(기도)의 가랑이 사이로 끼어들어 노천극장 안으로 숨어들고는 했다.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도둑고양이처럼 극장 주변을 어슬렁어슬렁 맴돌다가 잽싸게 포장을 들추고 이동극장 속으로 달려 들어갔다. 구성진 목소리의 변사辯士는 황야를 질주하는 서부활극의 말발굽소리를 영락없이 흉내 내었고, 총에 맞은 인디언은 “억!” 소리도 못 지른 채 고꾸라지고…. 이런 장면을 보면서 나도 장차 변사가 되거나, 영화의 히어로가 되겠다는, 참으로 가당찮고 엉뚱하기 짝이 없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노천극장 포장을 들추고 기어들어가 공짜 영화를 즐기고 엉뚱한 발상을 했던 그 젊은 날의 낭만적 체험을 ‘철딱서니 없는 몽상적 보헤미안 시절’이라고 표현하고 싶은데 그것이 나중에 나의 문학적 자양분이 되었다고 하면 지나친 과장일까.
해남 대흥사는 우리 집에서 10㎞ 쯤 떨어져 있는 두륜산 중턱 그윽한 숲 속에 웅크리고 있다. 나의 종가인 연동蓮洞의 고산 윤선도尹善道 유적지(지금은 고산기념관이 들어서 있음)를 지나 동쪽을 바라보면 늠연한 모습으로 엎드려 있는 두륜산. 대흥사는 조선팔경이나 명산대찰의 반열에 끼어들 만큼 그렇게 유명한 사찰은 아니지만 내 제2의 고향 같은 곳이다. 신라 진흥왕 5년(서기 544년) 아도화상阿度和尙에 의해 창건된 이 절은 나의 정신적 요람, 혹은 문학적 성장 배경으로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텁텁한 뚝배기 술을 좋아하는 이 고장 사람들은 거의 그러하지만, 우리 식구들은 사월초파일이면 어김없이 이 대흥사 나들이를 했다. 요즘의 김밥처럼 잘게 썬 것이 아니라, 김 한 장을 통째로 말아서 말좆 만큼 길고 시커먼 그 해웃밥을 먹는 재미로 나는 누나들 뒤꽁무니를 따라 대흥사 나들이를 했던 것이다.
피안교彼岸橋를 건너 해탈문解脫門을 향해 오르다 보면 바른쪽으로 부도전浮屠殿이 나타난다. 서산대사, 초의선사 등 저 유명한 학승學僧들이 열반한 뒤에 그 유골을 안치하여 세운 둥근 돌탑 50여기가 들어서 있는 이곳 부도전에 이르면 사람들이 벌 떼처럼 몰려 있었다. 거기 모여 있는 사람들은 저마다 잔 돌멩이를 집어서 그 석탑 위에 던지고, 돌멩이가 굴러 떨어지면 다시 던지기를 쉼 없이 되풀이했다. 던진 돌멩이가 굴러 떨어지지 않고 부도전 돌탑 위에 얹히게 되면 “와! 와!” 신이 나서 발을 구르기도 했다. 믿거나 말거나 같은 허황된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던진 돌멩이가 부도전 위에 얹히면 자신의 소망이 에누리 없이 이루어진다는 바람에 어느 해였던가, 나는 해가 저문 줄도 모르고 그 짓을 되풀이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내가 부도전에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부도를 떠받들고 있는 받침대의 조각이 그지없이 정교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부도를 떠받들고 있는 남생이나 거북,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 혀를 길게 빼문 개 등 받침대의 돌조각에서 조형예술의 한 극치를 발견했던 것이다. 그 옛날 이름 모를 어느 석공이 자신의 전생애를 다 바쳐 쪼았을 법한 이들 돌조각은 현대조형예술을 뺨칠 만큼 놀라운 솜씨를 드러내고 있다고 믿게 되었고, 거기서 나는 창작행위의 진정성을 터득하게 된 것이다.
#. 민초들의 삶의 애환과 풍류정신
부도전을 지나 한참을 더 산 속으로 올라가면 목불木佛 1천여 점을 모셔놓은 천불전千佛殿에 이른다. 대흥사에는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가 현판을 쓴 무량수각이나 대웅보전 외에도 여러 가람이 있지만 나는 굳이 천불전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곳 천불전에 이르면 나는 항상 조바심이 생겼다. 천 개의 불상 가운데 혹시 나를 닮은 부처는 없을까. 내가 부처를 닮고, 부처가 나를 닮고…. 그러므로 나는 눈에 불을 켜고 부처를 닮은 나의 얼굴을 찾고자 안달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곳 천불전을 수십 번 들락거리며 그토록 찾았던 ‘나의 얼굴을 닮은 부처’는 끝내 보이지 않았다. 어디 그 뿐인가. 신기루가 나타난다는 고향 바다에도 신기루나 그와 비슷한 것은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생각을 고쳐먹기로 작정했다. 그 철딱서니 없는 짓거리들도, ‘망상적 보헤미안 짓거리’도 졸업을 하고, 방학 때(대학 다닐 때)면 아예 대흥사의 말사인 표충사에 들어가 고시준비생들과 함께 하숙을 하면서 ‘문학 고시’인 신춘문예를 준비하였다. 대흥사와 나는 그만큼 찐득찐득한 인연이 있는 것이다.
내가 중학교에 다닐 그 당시 고향에는 서점은커녕 만화가게 하나 없었다. 고작해야 5일마다 한 번씩 서는 장날이면 시장바닥에서 ‘명랑’, ‘아리랑’ 등속의 대중잡지를 겨우 구경할 정도였으므로 문학전집이나 무슨 세계명작을 대할 기회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문학적 스승 없이 ‘암중모색’을 계속했던 나는 우리 고장에서 유일하게 대학(공주사범대학)에 다니는 외숙(천병국, 전 한국문인협회 해남지부장)이나 친척인 윤전하 선생(당시 해남여중 재직)을 찾아가 습작 원고를 보여 드리고는 했다. 그러나 그것도 끝이 안 보이는 암중모색일 뿐 나의 문학적 성취를 이룰 만큼 큰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 후 나는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어느 날 우연하게 헌책방에서 구하게 된『한국문학전집』. 거기 실린 김동리 선생의 소설, 서정주 선생의 시를 만날 수 있었다. 이때 나는 입이 쩍 벌어지는 커다란 충격을 입었다. 도대체 김동리, 서정주 선생은 밥을 어떻게 먹고, 오줌은 어떻게 싸는 것일까. 잠은 어떻게 자며, 과연 인간처럼 호흡하고 사는 것일까. 나는 그들이 인간이 아닌, 무슨 초월자나, 신선처럼 여기게 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의 삶의 방식, 문학의 방법론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서라벌예술대학 입학원서를 쓰기로 했다. 당시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에는 시에 김구용, 박목월, 서정주, 소설에 김동리, 손소희, 이범선, 평론에 김상일, 구비문학에 임동권 교수 등이 출강하고 있었으므로.
나중에 또 설명을 하겠지만, 1964년 3월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 입학을 한 것이다. 김동리 교수의 소설 실기 시간에는 종종 내가 쓴 습작 운고를 텍스트로 삼아서 토의할 정도로 ‘빵빵한 문청’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작가가 된 것처럼 속으로 우쭐대기도 하였고, 이런 허황한 꿈속에서 소설 쓰기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 무렵 나는 소설 외에도 틈틈이 시를 습작하여 서정주, 박목월 교수께 가져다 보여 드리곤 했다.
하루는 박목월 교수께 시 습작 원고를 보여 드리자, 한참 뜸을 들이다가 “니는 시보다는 시조 가락을 잘 타고 있다. 시조 쪽으로 방향을 틀어보는 게 어떻겠나?” 하시는 것이었다. “아하, 피는 못 속이는구나. 나의 선조 가운데 시조시인 고산孤山이…. 그때 나는 벼락 맞은 대추나무 방망이로 뒤통수를 한 대 꽝! 두들겨 맞은 충격을 받았다. 그날로 소설 습작을 접고 우리 정형시 창작에 매달린 것이다. 내 문학의 뿌리, 혹은 문학적 안태본安胎本은 고산 윤선도(1587〜1671)의 뜨락에 닿아 있는 것이다. 오늘 비로소 고백하지만, 나는 나의 12대 선조인 고산을 떠올리며 시조문학을 경영해온 것이다. 우리 모국어母國語를 가장 아름답게 표현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고산의「오우가」나 「산중신곡」「어부사시사」등은 내가 추구하고 있는 현대시조문학과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고산 이후 한때 대가 끊겼던 문학적 혈통을 실로 300년이 지난 후에 내가 그 뒤를 이었다고 자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향에는 아직도 나의 ‘깨복쟁이 친구들(소꿉친구)’이 땅을 일구며 살고 있다. 몇몇 친구들은 이미 세상을 등지고 운명을 달리했지만 무지렁이 같이 순박하게 살아가는 그들은 내가 1년에 한두 번 고향에 가면 “니 사진 신문에서 봤다”, “너 무신 문학상 탔다드라” 하거나 “언제 보니께 니가 TV에도 나오드라” 하면서 맥주잔을 디밀기도 한다. 그럴 때면 울컥 가슴이 먹먹해온다.
그러므로 나는 이 땅에 뿌리박고 살아온 나의 부모나 내 이웃들-민초民草들의 삶의 애환과 풍류정신이 담긴 우리 시대의 풍속화를 시로 쓰는 것이다. 나의 시조 「해남 나들이」도 그런 연장선상에서 구상한 것이다.
<대흥사 장춘구곡/ 살얼음도 절로 녹아/ 마애여래상의 광배를 입고 서서/ 땟국을, 홍진 땟국을/ 헹궈내는 아낙들// 그 옛날 유형流刑의 땅 남도 끄트머리/ 백연동 외진 골짝 고산孤山 고택 녹우단의 겨우내 움츠린 목숨, 풀꽃 같은 백성들아. 직신작신 보리밭 밟듯 돌개바람 휩쓸고 간 동상의 뿌리에도/ 무담시 발싸심하는 봄기별이 오는가.// 새물내 물씬 풍기는 파장의 저잣거리/ 어물전 세발낙지, 관동 명물 해우도 불티나고/ 텁텁한 뚝배기 술에 육자배기 신명난다.>(졸시「해남 나들이」전문)
#. 질풍노도시대와 무단가출… 포목점 점원 생활
나는 본래 1943년 음력 6월 3일 아버지 윤종남, 어머니 천상심의 팔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당시 면서기를 하던 외삼촌이 출생신고 때 둘째 누나와 생년월일을 뒤바꾸어 1941년 8월 7일생으로 등재하였으며, 그 때문에 또래들보다 3년 먼저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당시에는 2, 3년 늦게 출생신고를 하는 관행이 일반화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인생 3년을 가불하여 살아오고 있는 것이다.
중학교를 졸업한 다음 1958년 3월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맞아 괜히 싱숭생숭 헛바람이 들어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한 채 빈둥거리다 그 해 봄 무단가출, 목포에서 포목점 점원 생활을 했다. 6개월 만에 어머니가 이곳저곳 수소문하여 포목점으로 찾아오는 바람에 점원 생활 접고 귀가. 집에 돌아온 뒤에도 역시 빈둥거리다 우리 동네 건너 마을 송산리에 있는 서당에 다니기 시작했다. 거기서 천자문, 명심보감, 소학, 대학을 떼었다. 그때 서당에서 가끔 한시漢詩도 습작했다. 그것이 나중에 정형시, 즉 시조를 짓는데 다소 도움이 된 것 같다. 나는 동네 또래들보다 정신연령이 조숙한 편이었으므로 젖비린내 나는 또래들과 잘 어울리지 않고, 손 위 선배들과 휩쓸려 다녔다. 그러면서 선배들 연애편지를 대필代筆하여 주었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해남 화산은 도서 벽지라 서점이 없었으므로 5일마다 한 번씩 장날이 서면 장바닥에서 ‘홍길동뎐’ ‘장화홍련뎐’ 등 대중소설을 닥치는 대로 사다 읽었다. 연애편지를 대필하기 위해 서간문집書簡文集 같은 것을 들추어가며 여기저기 좋은 문장을 베껴 짜깁기하기도 했다. 토정 이지함土亭 李之函 선생이 나의 미래를 암시하고 있었던 것일까. 설이면 심심풀이로 동네 또래들과 토정비결을 보았는데 그때마다 ‘글 쓰는 재주가 있다’고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연애편지 대필을 해주면서 글쓰기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릴없이 빈둥거리다 1961년 3월 조선대학교 부속고등학교 야간부에 들어갔다. 고2 때 학교 신문에 콩트 비슷한 것을 발표했는데, 그게 그만 포복절도할 유머 소설이 되어 장안의 화제가 아닌, 교내 화제가 되었다. 이때부터 학과 공부는 저만큼 밀쳐 두고 수업시간이면 몰래 문학서적만 들춰 보게 되었다. 고3 때는 조선대학교에서 공모한 전국고등학생 문예콩쿠르에 소설「달무리 서다」를 응모, 가작 입선한 것이다. 이때부터 내 ‘문학 열병’은 더욱 도지게 된 같다.
#. 한 번의 낙선과 한 번의 당선
이야기는 196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6년 겨울이었다. 그해 겨울 추위는 혹독한 것이었다. 제법 강골인 나로서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살을 에는 강추위였다. 당시 서울 미아리 서라벌예술대학 근처 텍사스촌 일대를 방황하며 나는 ‘원형질原形質’ 동인들과 어울려 대포를 들이키거나, 그것도 아니면 술집 여자 근처를 맴도는 치기에 차 있었다. 그 겨울의 추위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무렵 ‘원형질’ 동인 여덟 명 일당 가운데 한꺼번에 세 명이 문단에 데뷔했다(‘원형질’ 동인지同人誌는 말이 동인지지 사실은 유치찬란하기 으를 데 없는 프린트 판이었다).《文學》지에 최범서 형이 소설로,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유광우 형이 소설로, 그리고 장지성 형이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로 각각 입상한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물론 ‘원형질’ 동인의 잔여 세력이 겪는 추위란 지독한 것이었다.
신춘문예 시상식이 끝난 1월 어느 날이었다. 우리 일당은 서울 우이동 골짜기의 방갈로에서 최형, 유형, 장형의 당선 축하 술타령을 벌였다. 밤새껏 가슴 속 추위를 달래고자 퍼부은 알코올 기운이 거나해지자 드디어 박남규 형이
“금초야, 너는 우리 땜에 망했다, 망했어. 문창과 학회지 때문에 너까지 망했단 말이야!”
문예창작과 과대표였던 남규 형이 창자의 어느 한 마디를 다 끊는 것 같은 소리를 지르며 내 머리채를 쥐어뜯기 시작했다. 나는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 학회지인『서라벌 문학』창간호 원고를 챙기고, 교정을 보는 등 책을 편집하는 북새통에 그만 신춘문예나 잡지 등 문예작품 모집에 응모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던 것이고, 그 여파로 오늘 이렇게 지독한 추위를 겪고 있는 것이다.
“성님.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 겁니다. 이제 우리도 가슴에 칼을 갑시다.”
나도 와락 남규 형의 머리채를 잡고 쥐어뜯고 있었다. 어느새 우리 악당 여덟 명은 버마제비처럼 한데 엉클어졌다. 서로 상대방 머리칼을 쥐어 뽑으며 나뒹구는 등 헉헉거리며 신음소리를 지르며 가슴에 칼을 갈기로 말없는 언약을 굳게 했는데, 글쎄 술집 여자들도 괜히 그 썰렁한 분위기에 휘말려 덩달아 훌쩍거리게 되었다. 술판은 그만 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1966년 겨울의 그 쓰라린 추위는 나에게 관점 전환의 한 계기를 만들어 주었을까. 밤이면 잠 안 오는 약 ‘카페나’를 먹고 어거지로 끙끙댔던 어리석음, 알코올 기운에 절어 비틀거릴 때 앞에 지나가는 여인의 엉덩이 움직이는 모습만 보고도 금방 흥분, 시 한 편씩을 써 갈기던 그 졸속공사를 많이 지양해야겠다는 것을 조금씩 터득하게 되었다. 어쩌면 시詩의 신神 뮤즈가 내 안에 와 머무르고 있었던가. 오랫동안 억압상태의 문고리를 따놓은 것처럼 시내버스 안에 앉아서도 마구 원고를 끼적거리곤 했다. 화장실에 앉아서도 끼적거리고, 식사 도중에도 끼적거리거나 작품 구상 때문에 저작咀嚼을 멈추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어서 가족들의 핀잔을 듣기 일쑤였다. 그런 내공內功의 결과였을까.「내재율內在律」1, 2, 3으로《시조문학》지에 1회 추천부터 3회 추천완료까지 ‘내락’을 받았고, 공보부(현 문화체육관광부) 신인예술상에도 입상하게 되었다.
서울의 지독한 추위를 온몸으로 감당하며 방황하던 그 무렵 나에게는 크나큰 충격 사건이 벌어졌다. 베트남 전쟁 이래 처음으로 한국군의 월남파병 문제가 불거져 나왔고 상하常夏의 정글 속에, 대리전쟁의 사선死線에, 내 아우 주식周植이가 끌려간 것이다. 이방의 국경지대에다 생명을 내맡긴 아우한테서는 1주일이 멀다 하고 거푸 편지가 날아왔다. 그러나 나는 (잔인하게도) 끝끝내 단 한 장의 회답도 띄우지 않았다.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그 아픔을 아우 주식에게, 그리고 미지의 형제들에게 안겨주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나는 생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다. 꼭 쓰지 않고서는 도저히 배길 수 없었던 그 뭉클한 가슴 속 응어리, 그 절박한 사연(체험담)을 나는「안부安否」라는 작품에다 뭉뚱그려 넣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1967년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투고했다. 그러나 그 작품은 예심도 통과하지 못한 채 미끄러지고 말았다(그 당시 자주 만났던 선배 시조시인이 내 원고를 일부러 본심에 올리지 않고 예심 과정에서 탈락시켰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이 사실은 확증은 없지만 심증은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나에게도 오기라는 것이 있었던가. 이제 비로소 고백하지만 이듬해(196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오기로, 진짜 독기毒氣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나는 오기로 똑같은 내용의 시조「안부」를 동아일보에 다시 투고했다. 그런데 1967도에는 예심에도 통과하지 못했던 그 치졸稚拙하기 이를 데 없는 원고가 1968년도에는 심사위원이 바뀐 때문이었을까, 내 주변 ‘상황’을 솔직하게 진술한「안부」의 당선 통지를 받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하여 나는 우리 신춘문예 사상 유일하게 한 작품을 가지고 한 번의 낙선과 한 번의 당선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일화를 남기게 되었다. 따라서 1966년 공보부 신인예술상 입상, 1967년《시조문학》3회 추천 완료, 196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등 내리 3년에 걸쳐 그 당시에는 흔치 않은 ‘3관왕’에 등극(?)한 것이다.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안부’ 전문을 소개한다.
금 낚시 드리우는 초승달 앞녘 강에
깎인 돌의 초연 냄새 피로 씻지 못한 자리
어머니 품안을 떠난 죄 구렁의 어린 양.
역한 바람 풀어 헤쳐 철새 등에 띄운 안부
못다 푼 긴긴 설화 실꾸리로 감기는데
저 하늘 닫힌 문 밖에 벽을 노려 섰는가.
누다비아 산허린가 빗발치는 가시덤불
세계의 귀가 얽힌 불행의 수렁길에
거미줄, 거미줄 사이 겨냥하는 눈망울….
선불 맞은 짐승처럼 파닥이는 나비 죽지
한 떨기 목숨 가누어 내젓는 기구의 손,
그 무슨 깃발을 안고 너는 끝내 포복하나.
뒤틀린 사랑 타며 포효하는 나의 士兵.
동남아 밤을 밝혀 무지개 지르는 날
떨리는 그 입술 모아 더운 김을 나누자.
초정 김상옥 선생을 만나지 않았다면 나의 문단 입문入門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당시 심사를 맡았던 김상옥 선생은 심사평(1968년 1월 10일자)에서 이렇게 언급했다.
<흔히 시조를 일러 이조李朝의 노래라 한다. 그러나 시조는 어느 한 시대에 얽매인 것이 아니다. 저 향가 이후 우리 모국어의 미학적 절제를 가한 한 가능성을 보이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때문에 이 절제는 언제나 그대로 고정될 수는 없다. 보다 더 고차적인 이유가 나타날 때 비로소 다시 변형하거나 파괴할 수도 있는 것이다.
올해 들어 시조를 응모 대상에서 제외한 신문사도 더러 있었으나 이번《동아》에 선보인 작품들은 의외로 우수한 것이 많았다.
당선작「안부」와 장정문 씨의「동백해곡冬柏海曲」은 더욱 빼어났다. 시조의 시적 형태미를 잘 체득하고 있는 점에는 오히려 장 씨의 것이 승勝하나, 내용에 있어선 「안부」보다 훨씬 열劣하다 할 수 있다.
그렇다고「안부」가 내용에만 치우친 것은 아니다. “금 낚시 드리우는 초승달 앞녘 강에” “떨리는 그 입술 모아 더운 김을 나누자” 하는 구절. 앞에 것은 당시唐詩 ‘아미산월반륜추峨嵋山月半輪秋’의 그런 적막감을 현대적인 기교로 다시 대하는 느낌이다.
그리고 뒤의 것은 이미 치르고 있는 어느 전쟁을 회의하되, 빨리 승리와 평화를 갈구하는 외침이 아프도록 생생하다.>
당시 동아일보 문화부 문학담당 기자였던 김병익(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 선생으로부터 당선 통보를 받았고, 시조부문 심사를 김상옥 선생이 맡았다는 정보를 얻었다. 이틀 후 서울 인사동 ‘아자방亞字房’으로 김상옥 선생을 찾아뵈었을 때였다. 한참 나를 뜯어보신 선생님은 “이름자를 고쳐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신춘문예에 응모한 이름이 윤금초尹今艸였는데 “이름의 이미지가 너무 여려 보이고 섬약해 보이니까 옆구리에 칼을 하나 차라”고 하셨다. 금초今艸의 풀 초艸 자 이미지가 나의 외모처럼 너무 연약해 보이니까 좀 강인해 보이도록 칼 도刀 자가 들어있는 처음 초初자로 바꾸라는 것. 다시 말하면, 듣느니 처음 같은 생각만 하라고 금초今初라는 필명을 지어준 것이다. 나의 이름은 본명 금호金鎬에서 今草→ 今艸→ 今初로 네 번씩이나 세상이 바뀌는 변화 과정을 거쳐 온 것이다.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상식장에서 만난 아동문학가 윤석중 선생은 나를 일러 ‘금시초문今始初聞 선생’이라며, 항상 ‘금시초문’ 같은 작품만 쓰라고 격려해 주기도 하였다.
대저 사람의 이름 석 자는 불리면 불릴수록 어떤 계시를 받게 되는 것이고, 이름 석 자의 불림을 당한 당사자는 불림을 당한 만큼 자기 최면에 걸리게 되는 것일까. 초정 선생이 필명 ‘今艸’를 ‘今初’로 고쳐 준 다음 나의 시조 발상법도 좀 더 강건해지고, 시 정신 역시 종전보다 훨씬 더 강렬해진 것이 숨김없는 사실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 따로 떼어내면 별 의미 없는 이미지들
다른 자리에서 얘기한 바 있지만, 문득 ‘홍어 삼합’을 떠올린다. 서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이미지와 이미지가 서로 버무려져 기막힌 어울림을 연출하는 ‘홍어 삼합’의 경지. 강한 충돌 끝에 화해를 이루는 아이러니한 음식 맛의 한 극치가 ‘홍어 삼합’이 아닌가 싶다. ‘홍어 삼합’은 세계적으로도 그 유래를 찾을 수 없을 만큼 강한 맛이 세차게 충돌하여 깊은 맛을 자아내는 묘한 미학을 지닌 우리 토속 음식이다. 먼저 잘 익은 김치를 접시에 깔고, 그 위에 홍어를 양념 초장에 살짝 찍어 올려놓는다. 다시 그 위에 껍질까지 잘 붙은, 삶은 돼지고기를 얹은 다음 한 젓가락 집어 입을 크게 벌리고 가득 먹는 게 ‘홍어 삼합’이다. 잘 곰삭은 홍어의 톡 쏘는 맛과, 오래 묵은 김치의 시큼 달콤한 맛, 삶은 돼지고기의 오도독 씹히는 맛, 게다가 다진 마늘‧잘게 썬 청양고추‧참기름‧갖은 고명 곁들여진 양념 초장이 어우러진 그 절묘한 조합이라니! 이렇듯 강한 맛이 세차게 충돌하여 깊은 맛을 자아내는 묘한 미학을 창출하는 음식 같은 시조를 꿈꾼다. 따로 떼어내면 별 의미 없는 이미지들이지만 제 짝을 찾아 서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재료들이 어우러져 기막힌 어울림을 연출하는 그런 시조를 꿈꾼다.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뒤섞여 어쿠스틱acoustic한 음색과 일렉트로닉electronic한 음색, 발랄한 감성과 비판적 시각이 한데 뒤섞여 서로 하모니를 이루는 시조를 희망한다. 그리하여 파란破卵‧역사易思‧창출創出의 시조를 모색한다. 알에서 깨어나 기존의 관념과 틀을 벗어버리고破卵, 사물을 거꾸로 보고 뒤집어서 생각해보는 발상의 전환으로易地思之, 우리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가치 창출創出을 모색하고자 하는 것이다.
설망어검舌芒於劍이라고 했던가. 이 말은 혀는 칼보다 날카롭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데, 한 편으로는 정제되지 못한 언어가 난무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가 너무나 많이 보아온, 그리하여 너무나 익숙한 현실을 직설적으로 드러내는데 큰 비중을 할애한 글은 비리기 짝이 없다. 풍자시조가 설 자리가 어디인가? 현실 그 자체를 드러내기보다는 현실을 해체하여 시적 공간 속에 재구성하고, 이를 통해 시 문맥의 바깥-이를테면 일상의 공간 속에서와는 다른 체험이나 각성, 정서적 울림을 안길 수 있어야만 극적 반전의 순간을 맞이하는 ‘오도시(펑 터지는 웃음)’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중요한 일은 시나 시조는 현실을 끌어안되 그 현실을 날것으로 드러내지 않고, 그것을 발효시켜 새로운 그 무엇으로 형상화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가끔 주제가 구체적으로 소화되지 못한 채 생경하게 겉도는 글을 발표한 것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소화불량의 주제는 결국 백화점식 언어의 나열, 부자연의 극치인 오버액션, 우편엽서 같은 풍광의 묘사, 과장되어 겉도는 배경 묘사 같은 결과를 낳는 것이다.
내공이 부족하거나 연륜이 짧은 신인일수록, 주제의식이 강렬하면 강렬할수록 거기에 압도된 나머지 서술구조를 중도에서 포기하는 실수를 저지르기 십상인데, 글쎄 그 함정을 교묘하게 빠져나가는 끈기를 잃지 않는 게 어디 그렇게 수월한 일인가.
#.‘뼈다귀의 포엠’과‘껍데기의 포엠’
이 근자에 정형시단의 흐름을 ‘3박三薄’으로 규정할 수 있을 법하다. 경박輕薄, 부박浮薄, 천박淺薄. 격화파양隔靴爬癢이라는 말이 있다. 신발 신고 발바닥 긁기라는 말이다. 신발 신고 발바닥을 긁은들 가려운 데가 시원해지겠는가? 나는 여기서 ‘뼈다귀의 포엠poem’과 ‘껍데기의 포엠’에 관해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무슨 목적의식에 너무 치중하게 되면 시의 행간에 담을 이른바 사상이란 것을 미리 설정해 두고 거기에다 격에 맞지 않는 미사여구를 덧씌워 놓은 것이 시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뼈다귀의 포엠’이라는 죽은 시조를 생산하게 된다. 반대로 ‘껍데기의 포엠’은 표현 형식에만 치중한 나머지 감동적인 내용을 담아내지 못한 시조를 말한다. 내용과 형식은 서로 분리할 수 없는 불가분의 것이므로 둘 다 좋은 시조의 요건과는 거리가 멀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외중내졸外重內拙. 표현 양식(형태)에 매달리다보면 내용이 치졸해진다는 이야기다. 이것저것 겉모양에 신경을 쓰게 되면 그 그릇에 담는 내용물이 옹골차지 못하고 부실해지기 마련이다. 표현 양식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거기 담는 내용(사상)이 우선순위에 올라야 한다고 본다. 또 하나는 박이부정博而不精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정교하지 못하다는 말이다. 따라서 시조는 ‘윤회’만 있지 ‘변화’는 없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고, 그러므로 멜랑콜리melancholy(까닭 없이 우울해지는 상태)에 젖을 수밖에 없다. 또한 철 지난 서구 시학에 대한 무분별한 신봉은 ‘시체 사랑하기’와 같은 것이어서 눈꼴이 실 수밖에.
시란 언어를 사용하되 언어를 초월하는 ‘그 무엇’이다. 시는 “말 밖의 말言之外言, 뜻밖의 뜻意之外意, 풍경 밖의 풍경景之外景을 담지 않으면 그 맛은 납을 씹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한 중국 시인 원교袁校를 떠올린다.
역경에서 꽃이 피듯 좋은 문학은 자기가 살아온 그만큼의 삶의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어느 작가의 말마따나 시는 세상을 썩지 않게 만드는 최상의 방부제라고 생각한다. 피땀을 흘리지 않은 농사꾼이 풍성한 수확을 기대할 수 없듯이, 고통을 감내하지 않은 시인이 아름다운 시를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시는 무통분만이 불가능한 예술이다.
#. 외롭고 고통스런‘우물 파기’
누구에게나 글감을 찾는 작업은 그리 수월한 일이 아닐 것이다. 무릇 ‘글감 찾기’란 황금광맥을 채굴하는 외롭고 고통스런 필마단기匹馬單騎의 ‘금광쟁이’가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일찍이 마르크 샤갈은 ‘미학의 교과서’로 알려져 있는『거장들의 예술론Artists on Art』에서 이런 말을 남긴 적이 있다. “내 작품 속에 일화적逸話的인 요소는 없습니다. 우화는 물론이고, 전설이라는 의미에서 문학과 관련된 요소도 없어요. …나는 본질적으로 ‘환상’이나 ‘상징주의’ 같은 용어들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편입니다. 우리의 내면세계는 바로 현실이에요. 어쩌면 실제적인 세계보다 더 현실적인지도 모릅니다. 비논리적으로 보이는 것들을 ‘환상’이니 ‘우화’ 또는 ‘망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자연에 대한 몰이해를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지요.”
그렇다. 샤갈이 설파했듯이 모든 예술은 “체험의 생생한 기억에 의심할 여지없이 가장 깊은 인상을 남겨 준 ‘환경’의 일부”라는 대목에 방점을 찍고 싶은 것이다. 그 ‘환경’이란 것은 작가가 직접 체험하였거나, 아니면 간접 체험했거나 상관없이 모든 예술은 그 발화자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법이다. 프랑스 조각가 에밀 부르델이 언급했듯이 ‘모든 예술은 지식의 열매’인 것이다. 마찬가지 논리로 시인과 작가는 자기가 아는 지식 이상의 그 무엇을 그릴 수도, 흉내 낼 수도 없는 것이다. 글쓰기 작업, 혹은 시조 짓기 작업은 자신의 예술적 소양과 지식을 총체적으로 집약하여 표현하는 정신노동의 결정체이다. 파블로 피카소 역시 ‘거장들의 예술론’에서 “내 생각으로는 회화에서 무엇인가 ‘찾아내려고’ 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발견’을 해야 합니다. 땅만 내려다보고 다니면서 돈지갑이나 주우려는 사람에게 누가 관심을 갖겠습니까? … 자연과 예술은 서로 다릅니다. 결코 같은 것일 수가 없습니다. 그림을 그릴 때 내 목적은 내가 발견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지, 내가 찾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술을 통해, 자연은 갖고 있지 못한 개념을 표현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내 주변에서 마주치는 몇몇 문인은 이제 인스피레이션inspiration(영감)이 고갈되어 글쓰기 작업을 잠시 ‘휴업’한 상태라고 고백한다. 누구나 ‘영감’이라는 우물은 바닥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바닥난 우물물이 다시 고이기를 기다리는 것은 어리석고 어리석은 짓이다. 시세의 변천도 모르고, 낡은 생각만을 고집하여 이를 고치지 않는 각주구검刻舟求劍의 어리석음을 냉큼 떨쳐버리지 못하고 말이다. 메마른 우물은 서둘러 폐쇄조치하고 새 우물을 파야하고, 광맥이 끊긴 광산은 가차 없이 폐광을 선언하고 다른 황금 광구鑛區를 찾아나서야 한다. 그것만이 감성 경화에 걸리는 병폐를 막아주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글감 찾기’란 그리 수월한 문제가 아니다. 일손이 좀 많이 드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긴 하지만, 인스피레이션이 고갈되었을 때 나는 소설책을 읽는다. 글감을 찾기 위해 평소에 관심을 가졌던 취미생활 관련 서적이나, 인문 ‧ 사회과학 서적을 뒤적인다. 이른바 철저한 텍스트 분석 작업이라고나 할까. 그 예로 나는 소설가 이청준 선생의「이어도」를 읽고 옴니버스시조「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를 썼으며, 역시 이청준 선생의 소설「선학동 나그네」(임권택 감독이 연출한 <천년학>)를 패러디하여「쑥대머리 2」를, 김동리 선생의 소설『을화』와『무녀도』, 이경자 소설『계화』를 패러디하여「지노귀새남 2」를 각각 완성한 것이다.
소설 지문 속에 충청도 토박이말을 꾸꿈스럽게(남들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것들을 꼼꼼히 기억하거나 챙기는 것) 구사하여, 독한 마음을 먹지 않고서는 도저히 독파하기 어려운 이문구 선생의 소설 작품들-예컨대『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를 읽고「뜬금없는 소리 2」,「물너울 뒤척이다」,「성담론 시편 5」등 여러 편의 시조를 건질 수 있었고, 역시 그의「담배 한 대」와「백의」를 읽고「아직은 보리누름 아니 오고」, 그의 소설「가을 소리」를 면밀하게 읽은 다음「개오동 그림자」를 각각 생산한 것이다. 또한 연작소설집『우리 동네』를 읽고 열 서너 편의「뜬금없는 소리」연작을 건졌다. 작가 이외수 선생의 소설 작품은 바로 내 문학의 보물창고나 다름없다. 내 시조의 광맥과 같은 것이다. 그의 소설『들개』를 읽고 「생살 드러낸 강」,「등비늘 번들거리는 바다」,「칠금령 흔드는 새」,「헛바람 화냥기처럼」,「잘디잔 물풀처럼」같은 작품을 구상할 수 있었고, 장편소설『칼』을 읽고「짱짱한 아이 목소리」,「무슨 말 꿍쳐 두었니?」, 창작집『장수하늘소』를 보고「산은 막막 비어 있었지」,「봄 먼저 당도하여」같은 작품을 잇달아 생산한 즐거움이라니!
어디 그뿐인가. 나는 서양미술사를 공부하면서 거장巨匠들의 작품 세계를 정형시로 풀어낸 것이다. 모네, 달리, 루소, 코로, 마티스, 클레, 로댕, 르동, 고흐, 위트릴로, 보나르, 피카소 등 서양미술사에 큰 획을 그은 거장들의 작품을 재해석하여 시조 문맥 속에 풀어낸 것이다. 또한 사설시조집『주몽의 하늘』에 수록한「우화」 시리즈는 시로 쓴 ‘역사 인물평전’이라고 할 수 있다. 김시습, 황현, 남곤, 성현, 정희랑, 홍윤성, 이항복, 유자광, 이괄, 남사고, 박엽 등 역사 인물을 풍자한 시편을 발굴해낸 것이다.
몇몇 미래학파들의 주장에 따르면 미래의 인간상은 아틀라스 신을 닮아갈 것이라고 한다. 어깨로 이 지구를 떠받들고 서 있는 아틀라스, 갖은 고난과 간난艱難의 수렁에 서서 몸소 인류의 운명을 짊어진 채 끙끙거리는 아틀라스 신이 바로 미래의 인간상이라고 한다.
나는 요즘 또 다른 글감을 찾기 위해 ‘새로운 우물 파기’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심인보의『곱게 늙은 절집』을 읽으며 시조의 양식적 개방성을 이끌어내고자 궁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김주영 선생의 장편소설『客主』(전 9권)를 읽으며 ‘따라지 백성들’-그 ‘곤고한 자들’의 울부짖음을 정형시의 문맥 속에 풀어내는 것이다. 땅만 내려다보고 다니면서 돈지갑이나 주우려는 사람들, 감각에 의탁하여 시조문학을 경영하는 일부 시인들과는 달리 나는 다시 ‘필마단기’의 여행길에 올랐다. 새로운 글감을 찾아 외롭고 고통스런 ‘우물 파기’ 작업을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서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이미지와 이미지가 세차게 충돌하여 깊은 맛을 우려내는 ‘홍어 삼합’의 경지 같은 시조를 찾아서. 이 또한 몹쓸 병마가 아니겠는가!
고려의 문호 이규보李奎報는 ‘시의 깊은 뜻을 간추려 논함[論詩中微旨略言]’에서 시 창작 과정을 단계별로 설명하고 있다.
“대저 시는 뜻이 중심이 된다. 뜻을 펼치는 것이 더 어렵고, 말을 엮는 것은 그 다음이다. 뜻은 또 기氣가 중심이 된다. 기의 우열에 따라 시가 깊어지기도 하고 얕아지기도 한다. 그러나 기는 하늘에서 나온 것이어서 배워서 얻을 수는 없다. 그래서 기가 저열한 자는 글을 꾸미는 것을 잘하는 것으로 알고, 뜻을 앞세우는 법이 없다. 대개 그 글을 아로새기고, 그 구절을 꾸미면 어여쁘기는 하겠지만, 그 속에 함축하여 깊고 두터운 뜻이 없고 보면 처음엔 볼만 해도 두 번만 읽으면 맛이 다하고 만다. 시의 출발은 뜻意에 있다. 기는 마음속에 쌓인 기운-즉 생각을 펼쳐가는 힘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기운을 맹자는 호연지기浩然之氣라고 했다. 좋은 시는 기의 축적에서 비롯된다.”
“시라고 하는 것은 사상의 표현이지. 시를 지으려고 할 때는 사상(철학)부터 단련하지 않으면 똥 무더기 속에서 깨끗한 물을 얻어내려는 것과 같아서 평생토록 애를 써도 이룩하지 못할 것이야.”
이것은 다산 정약용이 전남 해남 대흥사의 혜장惠藏스님을 불러 앉혀 놓고 타이른 말이다.
“진실한 글은 있는 그대로를 써야지. 핍박을 당하는 농민의 괴로움을 그대로 써야 산 글이 되는 게지. 그림도 마찬가지야. 뜻만 그리고 모습을 그리지 않으면 그것은 그림이 아닌 게야.”
#. 시 문맥 속에 풀어내는 시대정신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에서 아들 학연學淵에게 “나는 궁한 뒤에야 저술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 극도로 총명한 선비가 극도의 곤궁한 처지에 빠진 뒤에야 비로소 경서經書의 올바른 뜻을 알아낼 수 있었다.”고 하는 편지를 보냈다.
< … 시의 근본은 세상을 걱정하고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며, 항상 무력한 사람들을 들어 올려 주고 무산자無産者를 구휼하고 싶어 방황하고 안타까워서 그냥 두지 못하는 그런 간절한 뜻이 담겨 있어야 하는 것이다. … 시대를 아파하고 퇴폐한 습속을 통분히 여기지 않는 것은 시가 아니다. 아름다움을 아름답다 하고 미운 것을 밉다 하며, 옳은 것을 찬미하고 잘못을 풍자하며,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하려는 뜻이 없으면 시가 아니다.>
정약용은 자신이 살던 시대를 <조그마한 것도 병들지 않은 것이 없는 사회>로 판단하고, 그 봉건 암흑사회의 병폐를 구석구석 파헤쳤다.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실학사상을 실천했던 정약용의 시는 <당대의 현실을 널리 다면적으로 정확하게 묘사>한 리얼리즘 정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다산시선茶山詩選」에 수록되어 있는 「적성촌積城村에서」 같은 시가 그런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다.
<시냇가 헌집 한 채 뚝배기 같은데 / 북풍에 이엉 걷혀 서까래만 앙상하네 / 묵은 재에 눈이 덮여 부엌은 차디차고 / 체 눈처럼 뚫린 벽에 별빛이 비쳐드네 / 집안에 있는 물건 쓸쓸하기 짝이 없어 / 모조리 팔아도 칠 ․ 팔 푼 안 되겠네 / 개꼬리 같은 조 이삭 세 줄기와 / 닭 창자 같이 비틀어진 고추 한 꿰미 / 깨진 항아리 새는 곳은 헝겊으로 때웠으며 / 무너져 앉은 선반대는 새끼줄로 얽었도다….(송재소 번역)>
자신이 숨 쉬고 있는 시대의 절실한 문제들을 시의 문맥 속에 풀어내야 한다고 역설한 정약용은 만덕산 중턱에다 지은 초당에 틀어박혀 저술에만 전념했다. 너무 오랫동안 앉아서 글을 썼기 때문에 끝내는 엉덩이에 땀띠가 나고 나중에는 그것이 곪아터지고 말았다. 이제 앉을 수마저 없게 되자 벽에 선반을 만들어 놓고 서서 집필을 했다. 손수 미나리를 가꾸어 판 돈으로 지필묵紙筆墨을 마련하고, 다신계茶信契를 중심으로 모인 제자들 도움으로 생계를 꾸려갔다. 낮이면 관아官衙 사람들이 귀찮게 트집을 잡기 일쑤였으므로 밤길을 재촉하여 재 넘어 외갓집(해남 연동의 윤선도 고택)에 찾아가 쌀 떡 녹차 건건이 따위를 가져다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남은 머리카락이 수심으로 다 희고 / 늙은 눈이 눈물로 밝아지지 않네 / 이 삶이 어디서 즐거움을 찾을까.>
다산 정약용이 18년간 「위리안치」되어 있었던 유배지에서 쓴 시의 한 대목이다. 고통과 좌절의 삶 속에서도 <곤고한 자>의 부르짖음을 멈추지 않은 정약용. 현실 비판의식과 풍자정신이 짙게 깔린 그의 시는 그러므로 나의 문학지도文學地圖에 적지 않은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첫댓글 저도 요즘 글감을 찾느라 고민중인데 글을 쓴다는 것이 참 어렵다는 생각을 늘 하고 삽니다.
뭔가를 써야한다는 생각은 있는데 뭘 써야할지 몰라 세월만 보내고 일을 하다보면 그마저도 다 잊어버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