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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백파] ♣ 낙동강 1300리 종주 대장정 (16) ―[1]
생명의 물길 따라 인간의 길을 생각한다!
☆ [낙동강 종주 (제5일)] * 제6구간(안동→ 풍산)
▶ 2020년 10월 09일 (금요일) [별도 탐방] ① 반변천 수계-영양(1)
반변천(半邊川) ← 낙동정맥
태백시에서 발원한 낙동강(洛東江)이 남쪽으로 흐르면서, 수많은 지천(支川)들이 유입한다. 우선 태백시 남쪽 동점(銅店)의 구문소 아래에서 ‘철암천’이 흘러들고, 봉화 석포면에서 ‘석포리천’이, 봉화군 소천면 분천리에서 ‘회룡천’이, 소천면 현동역 아래에서 ‘현동천’이, 소천면 임기리에서 죽미산 산곡에서 발원한 ‘덕신천’이, 봉화군 재산면 갈산리에서 일월산 북쪽에서 발원한 ‘재신천’이, 봉화군 명호에서 백두대간 구룡산에서 발원한 ‘운곡천’이 유입된다. 그리고 안동시 정하동에서 영양 일월산과 청송 주왕산에서 발원한 ‘반변천’이 임하댐을 경유하여 낙동강에 흘러든다.
반변천(半邊川)의 ‘본류’는 경상북도 영양군 북쪽에 솟아 있는 일월산(1218.5m)과 백암산(1003.7m) 사이의 산곡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흐르다가, 청송군 파천면 어천리에서 주왕산에서 발원한 ‘주왕천’과 구암산(807.7m)에서 발원한 ‘용전천’이 합류하여 임하호(댐)에 흘러들고, 안동시 길안면 신덕리에서 면봉산(1220.6m)에서 발원한 ‘길안천’이 북류하여 임하댐 아래의 반변천에 유입되고, 안동시 정하동에서 낙동강에 합류하는 하천이다. 주류의 길이가 109.4㎞로 낙동강 동북 지역의 대지류(大支流)이다. 반변천이 흐르는 유역은 영양군과 청송군 그리고 안동시 임동면, 임하면, 남선면 등 낙동강 동쪽 지역이다.
낙동정맥(洛東正脈)
낙동정맥(洛東正脈)은 낙동강 동쪽에 위치한 정맥으로,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이어지는 백두대간(白頭大幹) 삼수령-구봉산에서 남쪽으로 갈라져서, 영천의 운주산(雲住山, 806m)까지 높이 1,000m에 달하는 산줄기를 형성하고, 경상북도 월성군 서면 아화리의 낮은 구릉을 넘어 다시 경상남도 가지산(加智山, 1241m)을 거쳐 천성산-금정산을 경유, 부산 다대포, 낙동강 하구(몰운대)에서 끝난다.
낙동정맥(洛東正脈)은 백두대간 삼수령-구봉산에서 분기하여, 통리재(영동선, 국도 제38호선 통과)-백병산(1259m)-면산(1245m)-석개재(지방도 제910호선 통과)-삿갓봉-진조산(908m)-답운치(국도 제36호선 통과)-통고산(1067m)-칠보산-(덕산지맥 분기)-한티재(430m, 국도 제88호선 통과)-검마산(1017m)-(금장지맥분기)-백암산(1004m)-창수령-맹동산(808m)-(화림지맥분기)-황장재(국도 제34호선, 당진영덕고속국도 통과)-대둔산(900m)-왕거암(→주왕산(周王山), 907m)-주산재(지방도 제914호선 통과)-피나무재(지방도 제914호선 통과)-통점재(국지도 제68호선 통과)-(팔공기맥분기)-가사령(국지도 제69호선 통과)-(비학지맥분기)-침곡산(725m)-한티재(국도 제31호선 통과)-운주산(806m)-이리재(익산포항고속국도, 지방도 제921호선 통과)-시티재(국도 제28호선통과)-어림산(510m)-마치재(지방도 제904호선 통과)-남사봉(470m)-만불산(275m)-사룡산(비슬기맥분기)-숲재-당고개(국도 제20호선 통과)-백운산(892m)-고현산(1034m)-운문령(국지도 제69호선 통과)-가지산(1241m, 운문지맥분기)-석남령(구24번국도 통과)-신불산(1159m)-영축산(1081m, 영축지맥분기)-정족산(749m, 남암지맥분기)-천성산(922m)-(용천지맥분기)-군지산(535m)을 지나, 부산의 계명산-금정산(802m)-산성고개(산성터널 통과)-만덕고개(국도 제14호선 통과)-백양산(642m)-구덕산(562m)을 경유하여 몰운대에 이른다.
반변천(半邊川)의 수계(水系)
낙동정맥(洛東正脈)은 경상북도와 경상남도의 동해안[東]과 낙동강 유역의 내륙[西]을 가르는 분수령 산맥이다. 낙동정맥의 동쪽은 삼척-울진-영덕-포항-울산으로 이어지는 동해안이고, 서쪽은 태백-봉화-영양-청송-영천-청도-밀양-양산-부산의 북구-사상구-사하구로 이어지는 낙동강 수계이다.
반변천은 낙동정맥의 영양군 수비면 칠보산(974m)의 서쪽 일월산(1218.5m)에서 (→ 청량산 분기) 덕산봉-안동 무협산으로 이어지는 ‘덕산지맥’과 남쪽으로 이어지는 낙동정맥의 주왕산(周王山, 907m) 아래 피나무재(지방도 제914호선 통과)-통점재(국지도 제68호선 통과)에서 서쪽으로 분기하는 ‘팔공기맥(보현산맥)’ 사이의 모든 산곡에서 발원한 물이 모인, 낙동강 지천이다. 그러므로 반변천과 그 지류들의 수계(水系)는 경상북도 영양군과 청송군 전체에 걸쳐져 있는 아주 방대한 영역이다.
반변천(半邊川)은 낙동정맥 서쪽의 영양군과 청송군 일대의 모든 산곡에서 발원한 물들이 합류한다. 다시 말하면, ‘반변천’ 수계는, 경상북도 영양군 덕산지맥 일월산에서 발원한 본류(本流)에 일월면 문암리에서 ‘문상천’이 합류하여 남으로 흐르다가 백암산에서 발원한 ‘장파천(長坡川)’이 들어오고, 일월(면)에서는 ‘장군천(將軍川)’이, 영양읍에서는 ‘구청천’이 흘러든다. 영양군 입암면 연당리(남이포)에서 ‘동천(東川)’이, 그 아래 입암면 신사리에서 ‘신사천’과 ‘동산천’이, 입안면 방전리에서 맹동산에서 내려오는 ‘화매천(花梅川)’이 반변천에 흘러들면서 굽이굽이 남쪽으로 흘러내린다.
☞ [장군천] 병자호란 때 오장군 삼달이 임금이 청나라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곳에서 자결했다고 하여 유래된 명칭이다.
*— [동천의 하구] 입암면 연당리 석문 부근은 옛날 남이 장군이 아룡·자룡 형제를 토벌했다 하여 ‘남이포’라 한다.
그리고 청송군 진보면 각산리에서는 진보면 괴정리 태행산에서 발원한 ‘서시천’이 반변천에 흘러들어 임하호[林河댐]에 유입된다. 그리고 임하댐 건설로 생긴 임하호에는 주왕산에서 발원한 ‘주산천’과 팔공기맥 구암산에서 발원한 ‘용전천’에, 중태산의 ‘신기천’이 합류하여 흘러든다. 그리고 안동시 길안면 배방리 계명산에 발원한 ‘용계천’이 임하댐에 흘러든다. 임하호의 아래 안동시 길안면 신덕리에서는 팔공기맥의 구암산과 면봉산에서 발원한 긴 ‘길안천(吉安川)’이 반변천에 유입한다. 임하댐을 지난 반변천은 서쪽으로 흘러서 안동시 낙동강(洛東江)에 유입된다.
▶ (영양군 대부분의 하천이 남쪽으로 흘러 낙동강과 합해지는데, 낙동정맥의 동쪽 수비면((首比面) 본신리와 오기리에서 시작된 장수포천만이 북동쪽으로 흘러 왕피천의 원류가 되며 동해로 흘러든다.)
영양군(英陽郡)
영양군은 경상북도 북동부에 위치한,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지역이다. 동쪽은 낙동정맥을 경계로 하여 영덕군과 울진군, 서쪽은 덕산지맥을 경계로 하여 안동시, 남쪽은 청송군, 북쪽은 일월산-칠보산을 경계로 하여 봉화군과 울진군에 접하고 있다. 행정구역으로는 영양읍(英陽邑), 입암면(立巖面), 청기면(靑杞面), 일월면(日月面), 수비면(首比面) 석보면(石保面)등 1읍 5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군청은 경상북도 영양군 영양읍 서부리에 있다.
영양의 자연환경
영양군의 지세는 낙동정맥과 덕산지맥의 높은 산지(山地)로 둘러싸여 분지상(盆地狀)으로 발달했으며, 전반적인 해발 고도가 경상북도에서 가장 높다. 군의 동부에 낙동정맥의 백암산(白巖山, 1,004m), 북부에는 일월산(日月山, 1,219m) 등 1,000m 이상의 높은 산들이 둘러싸고 있다.
군의 동쪽에는 칠보산의 남쪽으로 이어지는 ‘낙동정맥’에는 검마산(劍磨山, 1,017m), 백암산(白巖山, 1,004m) 등이 포진하고 있으며 그 아래로 울련산(蔚蓮山, 939m), 금장산(金藏山, 849m), 오십봉(五十峰, 827m), 맹동산(808m), 명동산(明童山, 812m) 등 높은 산들이 이어진다. 군의 서부에는 일월산 서쪽으로 분기한 ‘덕산지맥’이 남으로 뻗어 가는데, 덕산봉, 영등산(507m) 등의 산들이 서쪽 안동시 예안면과 경계를 이루면서, 안동댐의 낙동강 수계와 임하댐의 반변천 수계를 가름한다. 일월산에서 남쪽으로 분기한 ‘중앙지맥’이 흥림산(767m), 작약봉(726m), 표대산, 무이산으로 이어져 입암면 석문(남이포) 앞에서 그 맥을 다한다. 낙동정맥과 덕산지맥의 사이에 위치한 ‘중앙지맥’은 군의 중앙에 위치하면서 ‘반변천 본류’와 ‘동천’의 분수산맥이기도 하다.
영양의 문화 유적
영양읍 감천리에 선사시대 유적인 고인돌이 있고, 여러 곳에 고분이 산재해 있다. 산성은 청기면 상청리에 검산성(劍山城, 경상북도 기념물 제65호)이 있다.
영양의 불교문화재
영양에 소재한 불교 석탑으로는 입암면의 ‘영양신구동삼층석탑’(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84호)과 수성암을 벽돌모양으로 다듬어서 쌓아올린 산해리의 ‘봉감모전오층석탑’(鳳甘模塼五層石塔, 국보 제187호)을 비롯하여, 영양읍의 ‘화천리삼층석탑’(보물 제609호), ‘현일동 삼층석탑’(보물 제610호), ‘현이동 모전오층석탑’(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2호), 영양 ‘삼지동모전석탑’(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83호), ‘서부동삼층석탑’, 일월면의 ‘용화동삼층석탑’(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8호) 등이 있다.
☞ 국보 제187호 ‘봉감모전오층석탑’(鳳甘模塼五層石塔)
영양읍에서 안동으로 가는 31번 지방국도 변에 있다. 탑은 험준한 산으로 쌓인 계곡을 따라 흐르는 반변천 옆 밭 가운데 서 있다. 탑이 위치한 마을은 오래전부터 봉감(鳳甘)으로 불려 일명 ‘봉감탑’이라고도 한다. 탑은 벽돌 모양으로 다듬은 돌을 쌓아올린 모전석탑(模塼石塔)으로, 1단의 기단(基壇)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탑이 위치한 주변 밭에는 기와 조각과 청자 파편이 많이 흩어져 있을 뿐, 사찰에 대한 문헌기록이나 전해오는 이야기들이 전혀 없다. 1930년대 아리야마 쿄우이치(有光敎一)의 조사로 처음 알려졌으며, 1943년 스기야마 노부조(衫山信三)의 『조선의 석탑(朝鮮の石塔)』에 소개되면서 알려졌다. 이후 1981년과 1988년 해체보수가 이루어졌으며 1999년의 방수처리, 2000년의 기단 보수 등을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모전석탑은 7세기 전반에 건립된 ‘경주분황사석탑’(국보30호)에서 시작하여 신라 말기에 이르기까지 건립되었고, 이어서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봉감모전오층석탑(鳳甘模塼五層石塔, 국보 제187호), 군위남산동모전석탑(軍威南山洞模塼石塔), 제천장락리칠층모전석탑(堤川長樂里七層模塼石塔, 보물 제459호), 정암사수마노탑(淨巖寺水瑪瑙塔, 보물 제410호) 등이 있다. 그리고 선산죽장동오층석탑(善山竹杖洞五層石塔, 국보 제130호), 선산낙산동삼층석탑(善山洛山洞三層石塔, 보물 제469호), 경주서악리삼층석탑(慶州西岳里三層石塔, 보물 제65호), 경주남산리삼층석탑(慶州南山里三層石塔, 보물 제124호), 의성빙산사지오층석탑(義城氷山寺址五層石塔, 보물 제327호), 월남사지모전석탑(月南寺址模塼石塔, 보물 제298호), 운주사지석탑(雲住寺址石塔) 등이 있다.
‘모전석탑(模塼石塔)은 건조 재료는 석재이지만 형태가 전조탑파(塼造塔婆, 줄여서 塼塔)의 양식을 보이고 있는 탑을 일컫는다. 일반적으로 전탑을 축조하는 데는 건탑(建塔)에 앞서 벽돌을 만들어내는 작업이 우선되어야 하는데, 이러한 작업과정에서 진흙을 빚어 벽돌을 구워내는 일이 곧 석재를 다듬어 모전석(模塼石)을 생산하는 일로 바뀌어져, 결국은 모전석탑을 축조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현상으로서 한국석탑의 하나의 이색적인 양식으로 정착되었다.
영양의 유교문화재
영양군 일월면 도계리의 ‘영양향교’(英陽鄕校,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75호), 일월면 주곡리의 ‘월록서당’(月麓書堂,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172호), ‘장렬공사당’(莊烈公祠堂,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77호), 가곡리의 ‘명고서원(明皐書院)’, 입암면 산해리의 ‘봉람서원(鳳覽書院)’, 영양읍 동부리의 ‘여남강당’(汝南講堂,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76호), 석보면 원리리의 ‘석천서당’(石川書堂,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79호) 등이 있다. 입암면 연당리의 ‘영양 서석지’(英陽瑞石池, 중요민속자료 제108호)는 광해군 때의 학자인 정영방(鄭榮邦)의 은거지로 유명하다.
또한 영양읍에는 영양 ‘현동 당간지주’(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85호), 수비면에는 ‘영양 신원동백자도요지’(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71호), 석보면에는 ‘영양 화매동백자도요지’(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72호)가 있고, 영양읍 서부리에 ‘영양 상여장’(英陽 喪輿匠, 경상북도무형문화재 제14호)이 전승되고 있으며, 감천리에 영양의 ‘측백수림’(英陽 側栢樹林, 천연기념물 제114호)이 있다.
☞ 영양향교’(英陽鄕校)
1679년(숙종 5)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1701년에 현감 한세기(韓世箕)와 유림 조시상(趙是常)·조덕수(趙德壽) 등이 협력하여 육영루(育英樓)를 신축하였다. 1974년에 명륜당을 보수하였는데, 명륜당의 현판은 고려 말의 명필인 한수(韓修)가 쓴 것이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맞배지붕 겹처마에 8칸으로 된 대성전, 工자 지붕 홑처마에 7칸으로 된 명륜당, 신문(神門), 사주문(四柱門) 등이 있다. 대성전에는 5성(五聖), 송조 4현(宋朝四賢),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 봉람서원(鳳覽書院)
1602년(선조 35)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송간(松澗) 이정회(李庭檜), 용담(龍潭) 권지(權持), 삼산(三山) 박경문(朴慶門), 만취(晩翠) 권산립(權山立), 서봉(西峯) 신지남(申智男), 어천(漁川) 김순룡(金舜龍) 등의 주도로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일명사(逸名寺)의 법당에 봉람서원(鳳覽書院)이라 현판하고 1960년(숙종 16)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다. 1801년(순조 1) 경상북도 영양군 입암면 병옥동(屛玉洞)에 이건하면서 옥동서원(玉洞書院)으로 개칭하였다. 상주 옥동서원 유생들의 원명도용(院名盜用) 상소로 1807년(순조 7) 봉람서원이라 다시 개칭하였다.
경내 건물로는 묘우(廟宇)·강당·동재(東齋)·서재(西齋)·전사청(奠祀廳)·장서각·신문(神門)·정문(正門)·주사(廚舍) 등이 있었다. 1868년(고종 5)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나 현재까지 복원되지 못하고 폐허화되어 있으며, 강당만이 남아 있다. ☞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이천리(理川里)
영양의 고건축물(古建築物)
영양에는 예로부터 이름난 고택들이 많다. 영양군 청기면 상청리의 ‘벽산생가’(碧山生家, 경상북도 기념물 제64호), 기포리의 ‘회곡고택’(晦谷故宅,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79호), 일월면 주곡리의 ‘호은고택-조지훈생가’(趙芝薰生家, 경상북도 기념물 제78호), 주곡동 ‘옥천종택’(注谷洞玉川宗宅,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42호), 영양 가곡동 ‘월잠고택’(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95호), 석보면 소계리의 ‘오류정 종택’(五柳亭宗宅,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82호), 원리리의 ‘석계고택’(石溪古宅,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91호), 영양읍 감천리의 ‘오일도 생가’(吳一島生家,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48호), 하원리의 ‘월담헌’ 및 ‘사월종택’(月潭軒-沙月宗宅,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52호)이 있다.
벽산생가(碧山生家)
벽산생가는 영양군 청기면 상청리에 있다. 단종복위운동을 하다가 이곳으로 입향한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의 15대손인 순국열사 벽산(碧山) 김도현(金道鉉, 1852~1914)의 생가로, 임진왜란 때 군자감정(軍資監正)으로 선조를 호종한 10대조 김응상(金應祥)이 1580년에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근래에 대대적인 개수를 해서 면모는 일신하였으나 옛 기법은 많이 잃었다. 대문간은 1950년 작품이다. 경상북도 기념물 제64호. 기념물 지정 조사 때 건물의 건축적인 가치에서는 좋은 평가를 얻지 못하였으나 ‘독립운동가 벽산의 생가’라는 점에서 사료적인 가치가 인정되었다.
벽산생가(碧山生家)는 ㅁ자형이며 구조가 단순한 소규모 건물이다. 초가(草家)의 대문채 안으로 들어가면 안채 중문이 보인다. 우측에 마구간, 부엌, 안방이고 대청 2칸에 이어 서편에 두 칸 머리방이 있다. 남쪽으로 마루방, 이어서 사랑방 2칸이 계속되어 중문에 이른다.
1884년 이래 김도현은 의병을 일으켜 안동, 함창, 선성과 강릉, 영양 일월산 등지에서 의병활동을 하면서 전과를 올리기도 하다가 1907년 2월에 왜적에 체포되어 대구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출감 이후 영양군 구 객사에 교실을 만들고 영흥(英興)학교를 개교하여 자제들을 훈육하였다.
검산성(瞼山城)은 벽산 선생이 개인재산으로 생가마을 뒷산에 쌓은 성으로 창의도총부(倡義都摠部)를 설치하여 의병활동을 하던 곳으로 동쪽에는 냇물의 절벽이고 서쪽은 경사가 급하며 남쪽은 완만한 지형조건을 이용하여 둘레 500m의 성을 쌓았는데 지금은 서쪽 산기슭에 200m 가량이 남아있다. 비록 작은 규모지만 실제로 의병이 주둔하였던 역사의 현장이다.
벽산은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비분강개하여 영해 대진리 산수암(汕水巖)에서 동해에 들어가 자결(自決)하고 말았다. 죽기 전에 벽산은 절명시(絶命詩)를 남겼다. 뜨거운 우국지정을 품고 동해의 깊은 바다에 몸을 던지다.
我生五百來 아생오백래 오백년 왕조 마지막에 태어난 나
赤血滿空腸 적혈만공장 붉고 붉은 의분의 피 가슴에 가득하다
中間十九載 중간십구재 국모 시해되고 독립운동 19년에
鬚髮老秋霜 수발노추상 머리칼은 늙어서 서리가 끼었는데
國亡淚未已 국망루미이 나라가 망하니 눈물이 하염없고
親沒心更傷 친몰심갱상 어버이 여의니 마음 더욱 아프구나
獨立故山碧 독립고산벽 내 고장 푸른 산에 홀로 서서 생각하니
百計無一方 백계무일방 백 가지 계책 중에 내 쓸 방법 하나 없네
萬里欲觀海 만리욕관해 할 수 없다 머나먼 바다로나 가자
七日當復陽 칠일당복양 새 양기 돌아오는 동짓달 초이레
百百千丈水 백백천장수 희고도 또 흰 바다 그 깊이 천 길이니
足吾一身藏 족오일신장 내 한 몸 넉넉히 간직할 만하여라.
— 벽산(碧山)의 유시(遺詩, 絶命詩) 재령(載寧) 이용태(李龍兌) 역
‘도해단(蹈海壇)’은 영덕군 영해면 대진리 벽산선생 순절지이다. '벽산선생김도현도해비'(碧山先生金道鉉蹈海碑)가 있다. 의병 항쟁과 계몽운동으로 항일구국의 의지를 펼치던 벽산 김도현은 1896년 선성의병진의 중군장으로 활약하면서, 향산(響山) 이만도(李萬燾, 1841~1910)와 사제의 인연을 맺었고 스승 이만도의 단식 절명을 보고 함께 자결을 결심했으나, 효를 실천하라는 스승의 권유로 뜻을 미루어, 1914년 부친상을 치르고 1914년 동짓달 초이레, 절명시(絶命詩) 한 수를 남기고 영해 산수암(汕水巖)에서 바다 속으로 걸어 들어가 생(生)을 마감하였다. 1915년 2월 13일 비를 세웠고 1971년 9월 3일 박정희 대통령이 ‘千秋大義’(천추대의) 휘호를 내리며 중수하였다. — 김도현 열사에게는 1962년에 건국공로훈장이 추서되었다. 벽산의 유물로는 『벽산집(碧山集)』 2권과 고종황제 하사품인 삼인검(三寅劒), 칙지(勅旨), 밀지(密旨)등이 있다.
* [참고] ☞ 이만도(李萬燾)는 퇴계 이황의 후손으로 1876년 양산부사를 지내면서 구휼미(救恤米)를 풀어 많은 백성들을 구해 칭송이 자자했다.(양산 원동면 가야진사 앞 ‘行府使李侯萬燾永世不忘碑’(행부사이후만도영세불망비)가 있다. 향산은 1895년 단발령이 내려지자 고향인 안동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켰고,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을사오적을 사형하라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1910년 나라를 빼앗기자 24일간의 단식 끝에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회곡고택(晦谷古宅)
회곡고택은 선조 임금 때의 문신 회곡(晦谷) 권춘란(權春蘭, 1539~1617)이 노년에 살던 곳이다. 권춘란은 안동사람으로 일찍이 퇴계 이황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익히고 22세에 사마시를 거쳐 한림사간원(翰林司諫院) 정언(正言),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춘추관 편수관을 역임했다.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사재를 털어 의병을 도왔으며 안동에서 의병장 김윤명(金允命)의 휘하에 들어가 활동했다.
권춘란(權春蘭)은 그 후 청송부사를 지낸 뒤로는 벼슬을 멀리하고 학문에만 전심했다. 그는 자손이 없어 동생 권춘계의 장남 권태일을 양자로 삼았는데 이 집은 권춘계가 임진왜란 전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회곡고택은 1988년 9월 23일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79호로 지정되었다.
* [세수대(洗手臺)] ☞ 회곡고택 부근에는 권태일의 장인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이 사위의 집에 갈 때, 집 앞산에 다다라 세수했다는 ‘세수대’가 있다. 실제로 세수대가 있는 것은 아니고 김성일이 언덕 단면에 ‘자하동문(紫霞洞門)’이라고 쓰인 곳 아래를 흐르는 시냇물에서 세수를 했기 때문에 이곳을 세수대라고 부르게 되었다. 자하동문 글자 밑에 ‘하마비(下馬碑)’라고 쓰여 있다.
* [회곡고택의 유물] ☞ 회곡고택 사당(祠堂)에는 회곡선생문집(晦谷先生文集), 장곡선생유서통(藏谷先生諭書筒)과 교지(敎旨), 옥관연(玉冠硯), 옥관자(玉冠子), 관인(官印), 호패(號牌), 공신록(功臣錄), 행장기(行狀記) 등 가문의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회곡 권춘란 선생은 학자가 학문을 해 나가는 내용을 그림으로 요약한 ‘회곡선생진학도(晦谷先生進學圖) (권1~4)를 편찬했다. 제1권에는 太極統體人事圖 태극통체인사도, 論性理氣圖논성리기도, 張子西銘圖장자서명도, 東銘戱過圖동명희과도, 四勿箴圖사물잠도, 克己銘圖극기명도, 白鹿洞學規圖백록동학규도, 敬齋箴圖경재잠도, 夙興夜寐箴圖숙흥야매잠도를 싣고 제2권에는 小學內外編目圖소학내외편목도, 大學性情序功之圖대학성정서공지도, 中庸中和位育之圖중용중화위육지도, 論語言仁之圖논어언인지도, 孟子不動心之圖맹자부동심지도, 詩風雅頌正變之圖시풍아송정변지도, 思無邪之圖사무사지도를 싣고, 제3권에는 書典謨訓誥序次圖서전모훈고서차도, 人心道心圖인심도심도, 丹書敬義之圖단서경의지도, 母不敬之圖모불경지도를 싣고, 제4권에는 易學入門括例之圖역학입문괄례지도, 春秋經世之圖춘추경세지도, 聖賢道統傳緖之圖성현도통전서지도, 呂氏鄕約圖여씨향약도를 싣고 있다.
가마실 월잠고택(月岑古宅)
월잠(月岑) 정유석(鄭惟碩:1634∼1714)의 5대손 정상추(鄭象樞:1759∼1834)가 정조(正祖) 3년(1779)에 건립하였다고 한다. 그 후 방계(傍系)인 현 소유자의 5대조가 매입하였다. 정유석은 영해면(寧海面) 인량리(仁良里)에서 이곳으로 이거하여 정착하였다.
‘가마실’은 마을의 경치가 아름다워 가곡(佳谷)이라 불렀으며 혹은 부곡(釜谷)이라고도 한다. 마을마다 가마솥의 모양을 하였는데, ‘주곡(주실마을)’ 590 번지에 한양 조씨(漢陽趙氏)의 터전이 있고, ‘가곡(가마실)’은 407 번지에 야성 정씨 월잠고택의 터전이 있으며, ‘도곡’은 196 번지에 야성 정씨 오헌(梧軒)고택의 터전이 있는데 모두가 가마솥의 형국이므로 땅 이름을 부곡(釜谷)이라 하였고 세 마을을 일컬어 삼부곡이라고 불렀다.
‘월잠고택(月岑古宅)’은 마을의 중심부 동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막다른 골목 끝에 서 있는 대문을 들어서면 ㅁ자형 정침(正寢)이 동남쪽으로 배치되어 있고 북편에 방앗간채가 있다. 정침은 정면 4칸, 측면 5칸의 박공기와집이다. 자연석을 이용하여 축대를 쌓고, 자연석으로 주초를 한 후 네모기둥을 세웠다. 안채와 사랑채 어칸에는 모두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상부의 가구는 삼량(三樑)집이다. 특히 안채의 하부에는 뜬 창방처럼 보를 하나 더 질러 들보를 보강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대문채는 대문 좌우로 행랑 1칸과 마굿간 1칸을 두었다. 방앗간채는 원래 초가였으나, 퇴락하여 다 허물어졌다.
야성 정씨 장렬공종택(壯烈公宗宅), 장렬공사당(壯烈公祠堂)
장렬공종택은 충의와 학문을 연마하며 후학 양성과 조상들의 덕과 정신을 받들며 초야의 삶을 선택한 야성 정씨(野城 鄭氏) 참판공 종가 (參判公 宗家)이다. 영양읍에서 31번 국도를 따라 4㎞ 정도 가다가 918번 지방도로를 거슬러 2.4㎞로 더 가면 일월면 가곡리가 나온다. 인근 주곡, 도곡 마을과 함께 가마솥 형국을 취하고 있어 부곡(釜谷) 혹은 삼부곡(三釜谷)으로 불리는 이 마을에는 야성 정씨와 한양 조씨가 모여 마을을 이루고 있으며, 참판공 정담(鄭湛·1548~1592)의 종택은 마을 중앙인 가곡리에 위치하고 있다.
야성 정씨는 영덕 김씨와 더불어 영덕을 대표하는 토성으로 울진 평해 기성면 사동에 거주했으나 조선 선조 임진왜란에서 전라도 전주성을 지키기 위해 웅치전투에서 최후까지 싸우다가 죽음을 맞이한 참판공 정담이 영해 인량리로 옮긴 후 1810년 정담의 9대손 정치묵(1781~1815)이 현재 일월면 가곡리로 입향해 자리를 잡았다.
장렬공사당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웅치(雄稚) 전투에서 순절하신 정담(1548년∼1592년) 선생의 위패를 모신 불천위 사당이다. 정담은 선조 때 충신으로 자는 언결(彦潔)이며, 1583년 무과에 급제하고 1592년 김제군수로 있을 때 임진왜란을 당하여 나주판관 이복남과 의병장 황박 등과 함께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하였다. 순조 때 장렬공(壯烈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조정에서는 그 충절을 기리어 병조참판 겸 의금부사에 증직하고 비를 세웠으며, 조선 숙종 때 정문을 세웠다. 이곳에 장군의 유물로서 무과급제 때부터 김제군수 재직 때까지 받은 교지 7점과 장군의 행적을 기술한 「충렬록」, 판각 85매와 충렬록 전적 2권을 소장하고 있다.
오류정종택(五柳亭宗宅)
조선 영조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낸 오류정(五柳亭) 김두행(金斗行:1705∼1785)이 영조 11년(1735)에 지은 살림집이다. 그는 충의공(忠毅公)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의 13대손으로 현재의 석보면 소계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만년에는 책을 벗삼아 살았다 한다. 독서를 위해 건물 후원에 정자를 짓고 5그루의 버드나무를 심은 후 중국 동진(東晉)·송(宋)대의 시인 도연명(陶淵明)의 뜻을 따라 오류정(五柳亭)이라 하였다.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5칸의 口자형 뜰집으로, 안동 지방을 중심으로 대거 분포되어 있는 양반 주택의 대표적인 예이다. 사랑방 왼편에 2칸을 내어 우물마루를 깔고 헌함(軒檻, 기둥 밖으로 놓은 좁은 마루)을 돌려 계자각(鷄子脚, 마루 난간에 세우는 가는 무늬기둥)을 설치하였다.
문중에는 23매의 천자목판(千字木板)이 전한다. 1804년 경성광통방판각(京城廣通坊板刻)으로, 세로 25cm, 가로 37cm로 된 박달나무 또는 자작나무로 전해지고 있다. 이 판각은 자체가 미려하고 국·한문의 음과 해석이 달려 있어 처음 학문을 배우는 사람에게 매우 편리한, 귀중한 유산이다.
영양의 정자(亭子)
영양읍 대천리의 영양 ‘삼구정’(三龜亭,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32호), 감천리의 ‘학초정’ 및 ‘정침’(鶴樵亭·正寢,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64호), ‘연소정(蓮沼亭)’, 석보면 주남리의 ‘남악정’(南嶽亭,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80호), 수비면 발리리의 ‘약천정’(藥泉亭,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78호), 입암면 신구리의 ‘약산당’(藥山堂,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81호) 등이 있다.
영양 삼구정(三龜亭)
삼구정은 충청도 ‘황간현감’을 지낸 오극성(吳克成)의 맏아들인 용계(龍溪) 오흡(吳翕, 1576~1641)이 지은 정자로서 건물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팔작지붕을 가지고 있다. 오흡은 함양 오씨(咸陽吳氏)로 호가 용계(龍溪)이다. ‘삼구정’이란 정자 앞에 세 개의 바위가 나란히 있는데, 형상이 마치 정자를 업은 거북이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병자호란 때 임금이 청나라에 굴욕적인 항복을 하자, 오흡(吳翕)은 향리로 돌아와 지금의 대천리에 있는 자신의 거소에 ‘삼구정’을 세웠으나 화재가 일어나서 제택(第宅, 살림집과 정자를 통털어 이르는 말)이 소실되었다. 그 뒤 맞은편 강둑에 다시 정자를 세우고 만년에 수양하였으며, ‘사명대(思明臺)’를 만들고, 송국매죽(松菊梅竹)을 심고 글과 술로 세월을 보냈다.
조선 중기의 건물로 후대에 다소 개조되었으나 초익공(初翼工)의 조각수법(彫刻手法), 중간문설주를 세웠던 문얼굴 등에서 고격(古格)을 엿볼 수 있으며, 마루방 상부가구(上部架構)의 정식적인 수법 등은 흔치 않은 예이다. 영양군내에서 가장 오래된 정자이며, 부근에는 유원지가 있고 주변경관이 매우 아름다워 많은 관광객이 찾는 명소이다. 용계(龍溪) 오흡(吳翕)이 쓴 「삼구정에 붙여(題三龜亭)」라는 율시가 있다.
新卜龜巖結小廬 신복구암결소려 새로 거북바위 위에 작은 집 꾸미니
隋時風景書圖如 수시풍경도서여 수시로 바뀌는 풍경, 책속의 그림인 듯
風來水面胸襟豁 풍래수면흉금활 물 위에 부는 바람, 가슴이 시원하고
月滿峰頭眼界虛 월만봉두안계허 달이 산 위에 뜨니 눈앞이 환하네
滿地煙霞全屬我 만지연하전속아 모든 곳의 아름다운 풍경 모두 내 것이니
薰天富貴不關渠 훈천부귀불관거 하늘 같은 저 부귀, 나와는 상관 없어라
時人莫笑斯翁樂 시인막소사옹락 사람들아 이 즐거움 비웃지 마시게
老去幽情與世疎 노거유정여세소 늙을수록 이 마음 세상과 멀어지나니
— 吳翕오흡 「題三龜亭」 삼구정에 붙여 『龍溪先生文集』
감천리의 학초정 및 정침(鶴樵亭·正寢)
조선 중기 효종 때 삼수당(三秀堂) 조규(趙頍, 1630∼1679) 선생이 지은 것이다. 영양군 영양읍 감천 2리 가지리 마실에 있다. 뒤에는 갓등산이 둘러있고 앞에는 반변천이 흐르는 아늑한 자리에 서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는 건물이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왼쪽 앞쪽에 학초정이 있고 조금 떨어진 뒤편에 살림집인 정침이 자리하고 있다. 학초정의 정침(正寢, 살림채)은 ‘ㅁ’자형 기본구조에 정면 좌우 끝으로 두 칸을 더 달아 양날개집 형태를 띠고 있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에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왼쪽 2칸은 온돌방이고 가운데와 오른쪽 4칸은 대청이다. 온돌방 아래는 아궁이를 두었고 대청은 누마루로 높였다.
정자의 정면 처마도리에 ‘鶴樵亭’(학초정) 편액이 걸려 있다. 오른쪽 처마도리에는 ‘英芝洞天’(영지동천), ‘壽城烟霞’(수성연하)라 새긴 편액도 있다. 마루간 상부에는 오래되어 희미해진 또 다른 학초정 편액과 ‘圖書堂’(도서당)’ 편액, 그리고 김두철(金斗喆) 등 4인의 글을 새긴 ‘次鶴樵亭’(차학초정), 용초(蓉樵) 조병일(趙秉馹)의 ‘夢贈鶴樵亭主人’(몽증학초정주인) 등 당대 명사들의 제영(題詠)이 걸려 있다.
삼수당(三秀堂) 조규(趙頍)는 인조 8년인 1630년에 영양 입암면 연당리 임천동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호은(壺隱) 조전(趙佺), 아버지는 석문(石門) 조정환(趙廷)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특했던 그는 학문을 좋아해 한번 읽은 내용은 곧장 외웠다고 전한다. 그는 현종 1년인 1660년 생원시에 합격해 성균관에서 공부했는데, 여러 생도들이 그의 학문과 인품을 존경하여 ‘남주거사(南州居士)’라 불렀다. 조규(趙頍)는 중년에 감천리 ‘가짓들’로 이거해 정자를 짓고 ‘삼수당(三秀堂)’이라 편액하고 자신의 호로 삼았다. 삼수당이라 이름 지은 것은 ‘이곳의 잔디가 빛이 나서 1년에 세 번 아름답다’는 뜻이다. 조규는 삼수당(三秀堂)에서 말년을 보냈고 집 문간에는 언제나 찾아드는 이가 끊이지 않았다.
* [동학 역사의 산실] ▶ '학초정(鶴樵亭)‘
학초정는 일찍이 한양 조씨(漢陽趙氏) 조규(趙頍)의 것이었고, 후에는 밀양 박씨(密陽朴氏) 박학래(朴鶴來)의 것이 되었다. 수백 년을 사이에 두고 주인은 바뀌었으나 그 모습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한다.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64호로 지정되었다.
박학래(朴鶴來)는 신라 박혁거세의 67세손으로 고종 원년인 1864년 4월24일 예천군 호명면 산합리에서 태어났다. 자(字)는 중화(仲化), 호(號)는 학초(鶴樵)다. 아버지는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지낸 박준영(朴準永), 어머니는 양주 조씨(楊州趙氏)였다. 집안은 원래 권문세가의 높은 지위에 있었으나 광해군 때 영의정을 지낸 박승종(朴承宗)이 인조반정으로 자결한 이후 완전히 몰락하게 되었다. 철종 대에 가문의 지위와 명예는 회복되었지만 여러 대가 관직에서 멀어졌고 가난은 극복될 수 없었다. 박학래 역시 뼈에 사무치는 가난 속에서 성장했다.
담대하고 언변이 유창했으며 임기응변에 뛰어났던 그는 누구를 만나도 논리로 상대를 압도하고 설득할 수 있는 역량이 있었다. 그리고 조선의 마지막 과거시험인 1894년 사마시에 합격하기도 한 문장가였다. 그는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로 활동했다. 그러나 일제의 동학군 토벌이 강화되자 예천을 떠나 경주, 청송, 영천 등지로 옮겨 다니며 살다가 1910년경 마지막으로 안착한 곳이 영양 감천리의 지평이었다. 그는 삼수당을 인수해 살면서 학초정(鶴樵亭)이라 이름 붙였다. 동학 기록인 「학초전(鶴樵傳)」도 여기서 저술하였다. 60세 되던 1923년경 학초정에서 완성된 「학초전」은 한글로 저술되었으며, 왜군이나 관군이 아닌 동학도 측의 기록으로는 처음으로 발견된 것이라 동학사(東學史)에 있어서 귀중하게 평가된다. 학초(鶴樵) 박학래(朴鶴來)는 1942년 12월12일 학초정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당대의 시대모순에 대항하고 타결을 위해 행동한 지식인이었고, 탐관오리의 학정에 저항하면서도 피를 흘리지 않고 해결하려 애썼던 온건한 개혁가였다.
영양군의 전래설화 ☞ 「베틀굴전설」
이 고장에는 지명전설과 인물전설이 몇 편 전해오고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베틀굴전설」을 들 수 있다.옛날 구매동이라는 마을에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젊은이가 살고 있었다. 그는 당장의 끼니조차 잇기 힘들었기 때문에 남들이 공부할 때도 공부를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낙심하지 않고 집안일을 도우면서 틈틈이 독학을 하였다. 노력한 보람이 있어 얼마 뒤에는 가난도 면하고 같은 마을에 사는 처녀와 결혼도 할 수 있었다.
얼마 동안 두 부부는 행복한 생활을 영위했으나, 남편이 전장(戰場)에 나가게 되는 바람에 그들은 안타까운 심정을 누르고 이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편이 ‘두 해가 지나면 돌아오마.’ 하고 기약하고 북방으로 떠나자, 아내는 마을 근처 골짜기에 있는 동굴로 들어가 베를 짜며 남편이 무사히 귀향하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나 두 해가 지나도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내는 베틀에 앉은 채 남편을 기다리다 지쳐 끝내는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이 동굴을 베틀굴이라 했는데, 지금도 궂은 날 밤이면 두 사람의 못 다한 사랑을 애처로워하는 듯 베 짜는 소리가 이 동굴에서 들려온다고 한다.
이 밖에도 조선 때 온갖 권세와 횡포로 말미암아 사라지게 되었다는 「지씨마을이야기」, 시어머니의 구박에 못이겨 죽음을 택하고 말았다는 「황씨부인당전설」, 「장군천전설」 등이 전해온다.
영양의 명산지 — '산나물', ‘영양고추’의 본고장
2008년 현재 임야가 전체면적의 80.7%를 차지하며 경지 중 논이 약 26.99%를 차지하고 밭은 약 73.01%를 차지하며 밭농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영양은 매년 5월 산나물축제가 열리는 산나물의 고장이다.
특산물은 껍질이 두껍고 빛깔이 고우며 맵고 단맛이 나는 고추는 ‘영양고추’라고 하여 질이 좋기로 유명하며, 이 고추로 만든 고춧가루·고추장도 더불어 유명하다. ‘영양더덕’은 토심이 30∼50㎝ 정도의 모래참흙에서 퇴비와 톱밥을 이용한 유기물로 재배하여 뿌리가 곧고 길게 뻗어 자연 더덕 특유의 맛과 향기를 지니고 있다. 일천궁은 미나리과 숙근초로 내한성이 강한 북방형 식물로 한방의 4대 기본약재로 쓰이며 전국의 70%가 영양군에서 생산되며 품질이 우수하기로 이름나 있다.
‘영양참배’는 과일이 매끈하고 육질이 아삭아삭하여 그 맛은 전국최고를 자랑하며 복숭아는 특유의 향기가 진한 고품질 복숭아로 시중에 인기가 높다. 영양포도는 포도 생육에 적합한 기후와, 토질이 좋아 포도 알이 굵으며 주야간의 온도차이가 많아 당도가 매우 높은 것이 특징이다. 해발 1,219m의 고산인 일월산을 중심으로 주위의 검마산과 맹동산에서 생산되는 ‘고랭지 여름채소’는 토양이 비옥하고 경사가 적당하여 물 빠짐이 좋으며 한여름 기온이 낮은 재배환경에서 생산되며 특히 배추는 결구엽이 많고 조직이 단단하여 쉽게 무르지 않으며 맛이 고소하여 최고를 자랑한다.
영양의 청정 자연과 명승지
영양군의 북쪽 일월면과 청기면 사이에 있는 일월산(日月山)은 주봉이 일자봉(日字峰)과 월자봉(月字峰)으로 되어 있다. 일월산 정상 일자봉에 오르면 동해 일출의 장관을 볼 수 있다. 흰 바위가 있는 강점골, 기우제를 지냈던 곳, 대나무가 많은 댓골, 도장바위가 있는 도장골, 병풍바위가 늘어서 있는 병풍골, 호박소가 있는 호박골 등의 아름다운 절경이 펼쳐져 있다. 그 밖에 용화사터·용화동3층석탑(일명 선녀탑·공주탑), 선녀가 내려와 목욕했다는 용화선녀탕 등이 있다. 부근에 천축사(天竺寺)·천화사(天華寺) 등의 사찰이 있다.
일월산에서 시작되는 반변천의 물줄기를 따라가면 일월면 곡강리의 척금대와 여기봉, 병풍암, 반월산, 이수곡, 동만곡, 약수천, 지석암 등의 ‘곡강8경’, 영양읍의 세심암(洗心巖), 선유굴(仙遊窟), 양호대(養浩臺), 송영당(送迎塘), 원당지를 비롯한 삼지(三池), 입암면의 초선대(招仙臺), 남이포(南怡浦), 입암(立巖) 등이 있어 강변, 절벽, 백사장 등이 조화를 이룬다,
그 중 ‘선유굴(仙遊窟)’은 영양읍 하원리 서쪽에 있으며, 이 굴은 일월산에서 발원하는 반변천이 영양읍 상원리를 돌아 하원리에 이르러서 오랜 세월동안 퇴적암 석벽을 침식하여 형성된 것이다. 굴 주위는 아름답고 선경을 이루며, 옛날 신선이 내려와 놀았다는 전설에 따라 선유굴이라고 명명되었다.
‘입암(立巖)’은 입암면 연당리와 신사리로 반변천이 흘러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석봉(石峰)으로, 입암의 양편이 모두 석벽이라 사람과 짐승이 올라가지 못해 ‘선바위’, 일명 ‘선암(仙巖)’이라고도 한다.
계곡으로는 수비면 수하리의 수하계곡과 본신리의 본신계곡, 석보면 삼의리의 삼의계곡 등이 있다. ‘수하계곡(水下溪谷)’은 반변천의 지류로 수비면 본신리와 오기리에서 시작되는 장수포천(長水浦川)의 맑은 물이 소나무가 무성한 산속을 뚫고 흐르며, 넓적한 화강암과 부딪쳐 웅덩이를 만들기도 하고, 크고 작은 폭포를 빚어내어 매우 아름답다. 수비면 송방계곡도 아름답다.
수하계곡과 울련산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 있는 ‘본신계곡’은 금장산-울련산-검마산-백암산으로 이어지는 낙동정맥의 준령 사이에 태고의 신비로움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장장 6㎞에 걸쳐 맑고 푸른 계곡이 펼쳐져 있다. ‘삼의계곡’은 해발 812m의 명동산(明童山) 깊은 골에서 솟아나는 맑은 샘물이 오랫동안 쉬지 않고 흙을 깎아내며 원시림 속을 흘러 6㎞의 계곡이 만들어졌으며, 계곡물이 매우 맑고 차가우며 크고 작은 폭포가 많다.
폭포로는 영양읍에서 청기면으로 가는 입구 1㎞ 지점에 신경통·안질·가려움증에 효험이 있다는 높이 3∼4m의 ‘팔수곡폭포(八水谷瀑布)’, 영양읍 감천리의 반변천과 연한 국도변에 위치한 ‘감천폭포(甘川瀑布)’, 석보면 화매리의 ‘화매절골폭포’와 ‘화매폭포’ 등이 있다. 약수로는 입암면 양항리의 ‘양항약수’, 청기면 정족리의 ‘나방약수(羅方藥水)’ 등이 있다.
또한, 석보면 원리리의 8대 경승지인 광로산(匡蘆山)·병암산(屛巖山)·낙기대(樂飢臺)·세심대(洗心臺)·동대(東臺)·서대(西臺)·석천서당(石川書堂)·광록정(廣麓亭) 등의 ‘석포팔경(石浦八景)’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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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정맥 ▶ 2019년― 백파의 영양 일월산(日月山) 산행기
* 필자는 2019년 6월 16일 일요일, 경상북도 영양군에 있는 일월산을 오른 바 있다. 일월산은 영양군의 주산이요, 반변천의 발원지이다. 영양의 모든 산수와 문화 그리고 삶의 중심을 이루는 승지이다. 실제로 해발 1,219m의 일월산을 몸으로 체험한 산행기(山行記)를 통하여 영양의 진면목의 일단을 소개하고자 한다.
* [산행 코스] ▶ 일월산 윗대티(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오리리, 31번 국도)→ 화엄정사→ 큰골 갈림길(이정표)→ 나무다리→ ‘뿌리샘’(반변천 발원지)→ 큰골 갈림길(이정표)→ 가파른 경사→ 이정표→ 월자봉(점심)→ 일월산(일자봉) 해맞이 공원(나무테크 전망대)→ 선녀탕 하산길→ 가파른 내리막길 → 계곡→ 선녀탕→ 굿당→ 31번 국도(승차)→ 귀경(20:15)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산 — 낙동정맥에서 갈라져 덕산지맥
오늘 산행하는 일월산(日月山)은 낙동정맥에서 갈라져 나온 한 지맥에 속한 산이다. ‘낙동정맥(洛東正脈)’은 낙동강 동쪽에 위치한 정맥으로, 우리나라 전 국토의 중추를 이루는 백두대간(白頭大幹) 태백산의 윗쪽 구봉산(九峰山)에서 남쪽으로 갈라져 나와 태백의 백병산(白屛山, 1,259m)-울진의 통고산(1,067m)-영양 검마산(白嶺山, 1,017m)-울진 평해의 백암산(1,004m)-청송 주왕산(周王山, 907m)을 경유하여, 영천의 운주산(雲住山, 806m)까지 높이 1,000m에 달하는 산줄기를 형성하고, 월성군 서면 아화리의 낮은 구릉을 넘어 다시 경상남도의 가지산(加智山)-취서산(鷲棲山, 1,059m)을 거쳐 부산의 금정산(金井山, 802m), 다대포의 몰운대(沒雲臺)까지 이어져, 낙동강 동쪽 하구에서 그 맥을 다한다. 그 길이는 약 370㎞에 이른다.
영양(英陽) 일월산(日月山, 1,219m)은, 백두대간 ‘구봉산’에서 갈라져 나온 낙동정맥이 ‘백병산’과 ‘면산’을 지나 남하하다가, 영양과 울진의 경계에 있는 ‘통고산’(1,067m) 아래 칠보산에서 분기한 ‘덕산지맥’의 남쪽 일월지맥에 솟은 산봉이다. 낙동정맥에 가까운 위치에 있다. ‘덕산지맥’에서 분기한 일월지맥은 남으로 뻗어 흥림산-작약산으로 이어지는 영양의 중앙지맥이다. 그리고 덕산지맥은 덕산봉을 지나서 남으로 뻗어가면서 서쪽의 안동시 예안면과 경계를 이루면서, 안동시 성곡동-용상동까지 이어진다. 덕산지맥은 안동댐의 낙동강 수계와 임하댐의 반변천 수계를 가름한다.
이 덕산지맥의 서쪽 끝에 봉화 청량산(淸凉山, 870m)이 있다. 강원도 태백시 너덜샘에서 발원한 낙동강은 청량산-도산서원 앞을 지나 안동댐을 흘러들어 낙동강의 본류를 이루는데, 여기 영양 일월산의 ‘뿌리샘’에서 발원한 반변천(半邊川)은 영양읍을 지나 청송군 진보를 경유하여 임하댐으로 흘러들어, 안동시에서 낙동강 본류에 합류한다.
유서 깊은 일월산(日月山)
오지의 첩첩산군, 일월산은 거대한 산체가 하늘에 치솟아 있어 그 산세가 웅장하다. 산정의 능선은 평평하고 급하지 않으나, 산정에 서면 동쪽으로 낙동정맥의 산군 너머 동해가 바라보이고 동해에 뜨는 해와 달을 제일 먼저 바라볼 수 있다고 해서 일월산(日月山)이라고 부른다. 정상부에는 두 봉우리가 솟아 있는데 주봉은 일자봉[日月山 정상, 1,219m]이고, 거기서 2km 가량 떨어진 서쪽에 월자봉(月字峰, 1,170m)이 있다.
일월산의 산목련
일월산 정상 부근에서 만나는 순백의 산목련, 군데군데 피어있는 하얀 산목련이 눈을 환하게 밝힌다. 꽃말이 ‘수줍음’인 것처럼, 그 순결한 자태가 조용히 길손의 마음을 끈다. 일명 함박꽃이라고 하는 이 꽃은 주로 깊은 산중에 피어나는데, 넓은 잎들이 무성한 가운데 한 송이 꽃봉오리가 살포시 고개를 내밀고 피는 것이다. 높은 나무의 잎들에 얹혀 조용히 피어있는 자태는 순결하고 고고한 기품을 풍긴다. 함박꽃은 속씨식물 중 꽃 생김새가 가장 원시적이다. 무궁화처럼 매일 몇 송이씩 피어나서 오랫동안 감상할 수 있으며 탐스러운 꽃에서 풍겨나오는 은은한 향기기 일품이다.
중국에서 ‘천녀화(天女花)’, 천상의 여인이다. 불교에서는 ‘용수화’라고 하는 데 하얗게 피는 꽃송이 한 가운데 있는 수술과 가을에 익는 열매모양이 용(龍)을 닮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불교의 이상세계인 ‘용화세계(龍化世界)’를 상징한다. 발아래에 보이는 단풍취도 싱싱하고, 월자봉 아래에서 보았던 하얀 물참대꽃도 그 탐스럽게 피어 있다. 순백의 맑은 꽃들의 숨결이 더운 가슴을 신선하게 보듬는다.
[일월산 정상의 풍경] — 정상석, 현대적 감각의 조형물
오후 2시 30분, 오늘의 최고 산행 포인트인 일월산(1,219m, 일자산) 정상에 도착했다. 울창한 숲길을 벗어나니, 거리낌 없이 열린 시공(視空) 속에 천하의 첩첩 산들이 장관을 이루며 시야에 들어온다. 산을 오르는 것이 늘 그렇듯이 힘들게 높이 오른 만큼 세상이 크게 멀리 보이고 자연의 아름다운 장엄경을 한 가슴에 안을 수 있다. 그것은 높은 하늘 공간에 오른 자만이 누릴 수 있는 복락이고 그리하여 산과 사람이이 하나가 되는 아름다운 대의가 이루어진다. 그래서 공자도 ‘동산이 오르니 노나라가 작게 보이고 태산에 오르니 천하가 작게 보인다’(登東山而小魯 登泰山而小天下)고 했다. 물론 이 말은 성현이 추구하는 도(道)의 경지를 말한 것이지만, 내 오늘 청정한 일월산 정상에 올라 느끼는 마음 또한 그러하다. 아무런 사심이 없는, 자연 그대로의 순수한 마음을 지니는 것, 그것을 맹자는 호연지기(浩然之氣)라 했다.
일월산 정상(頂上)의 표지석이 아주 조형적이다. 몇 개의 장방형의 받침돌 위에 놓인, 정사각형의 커다란 ‘표지석’은 현대적인 감각으로 디자인한 것이었다. 정사각형 대리석은 크기가 다른 두 부분으로 나누어 그 안에 커다란 원(圓)을 양각해 놓았다. 원의 전체를 보면 해[日]를 나타낸 것이고 원의 가장자리 일부를 떼어 놓은 부분은, 차고 기우는 달[月]을 상징하는 듯 했다. 그리고 커다란 원의 한 가운데 세로로 ‘日月山’이라는 이름을 순백의 글씨로 음각해 놓았다. ― 표지석의 뒷면에는 이문열 쓴 ‘日月頌辭’(일월송사)가 새겨져 있다. 이문열은 영양 출신의 소설가이다.
日月頌辭 (일월송사)
곤륜崑崙의 정기가 해 뜨는 곳을 바라 치닫다가 백두대간을 타고 남으로 흘러
동해 바닷가에 우뚝한 영산靈山으로 맺히니 이름 하여 일월산日月山이다.
해와 달을 품은 넉넉한 자락은 그윽한 옛 고을 고은古垠을 길러내고
삼엄한 기상은 거기 깃들어 사는 이들에게 매운 뜻을 일깨웠다.
세상이 평온하면 이 땅 가득 지혜와 영감이 향내를 피워내다가도
나라가 치욕을 입으면 비분에 찬 은사隱士들의 수양산首陽山이 되거나
죽기로 맞서는 지사志士들의 마지막 베개와 무덤이 되었다.
이제 옛 古隱은 문향文鄕 영양英陽으로 자라 새로운 천 년을 마주하고 섰으니
아아, 일월산이여 그 기상 그 자태 바뀌고 다함이 없으라,
우리 영양과 더불어 길이 우뚝하라. / 서력기원 2001년 1월 1일 이문열李文烈
[일월산 정상] — 하늘로 열린 산상의 무대, 동해 해맞이 명소
일월산 정상(頂上)은 험한 오지의 고산이지만, ‘새해의 해맞이’ 명소로 널리 알려져 있는 곳이다. 일월산 정상에는 널찍한 나무테크 계단식 전망대를 만들어 놓아 많은 사람들이 편안하게 앉아 ‘동해의 일출’을 맞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정상의 표지석은 동쪽 방향으로 확연히 열려 있었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면 낙동정맥의 첩첩산군이 파도처럼 출렁이고 그 너머에 동해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정상석 앞 너른 공간에는 산의 경사면을 이용하여, 무대의 객석 같은 아주 넉넉한 나무테크 계단을 만들어, 많은 사람들이 앉아서 동해 일출을 볼 수 있도록 시설해 놓았다. 그야말로 하늘과 태양을 바라는 산상의 야외무대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지역의 특별한 행사나 산상 음악회를 열어도 좋은 만큼 풍광이 아름답고 확연한 전망이 좋은 공간이다. 이곳 지차체에서는 영양의 진산(鎭山)인 일월산에 많은 정성을 기울여 놓은 것 같았다. 비록 1,200고지의 높은 산이지만 가까운 곳에 KBS송신소가 있어 정상부까지 자동차가 올라올 수 있다. 우리처럼 몸으로 힘들게 산을 올라오지 않더라도 그만큼 접근성이 좋다. … 정상석 앞에서 마음속으로 동해에 일출을 떠올리며 일월산의 맑은 정기를 한 몸에 안았다.
[일월산 험난한 하산 길] — 급전직하, 아래로 쏟아지는 가파른 산길
오후 2시 45분, 하산에 돌입했다. 하산지점은 ‘용화선녀탕’ 계곡이다. 정상에서 내려가는 하산 길은 경사가 가팔랐다. ‘큰골’에서 능선을 타고 올라올 때와는 아주 다르게 길은 험난했다. 일월산은 전체가 토산이지만 정상에 가까운 산길은 돌들이 아무렇게나 쌓여져 있어 발을 놓기에 아주 불편했다. 그렇게 아래로 쏟아지는 산길이었다. 오후 2시 55분, 일자봉 정상에서 0.3km 내려온 지점(1,085m), 갈림길이 나왔다. 여기에서 능선을 따라 그대로 내려가면 우리가 산행을 시작한 윗대티(→ 2.5km)로 내려가고, 오른쪽 산비탈을 타고 내려가면 용화선녀탕(→ 2.5km)이다. 우리는 계획한 대로 선녀탕 길을 택하여 하산을 했다.
[원시(原始)의 계곡] — 울창한 수림과 이끼 낀 바위, 청랑한 물소리
오후 3시 35분, 드디어 계곡에 내려섰다. 우리가 내려오는 하산 길은 워낙 가파르고 험하여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길이었다. 수량이 많지는 않지만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청아하다. 깊은 산 깊은 계곡, 울창한 계곡을 따라 내려오는 길도 바위가 미끄러워 매우 조심스러웠다. 그야말로 원시림(原始林)의 계곡이다. 길이 있는 듯하다가 길이 사라지고 벼랑을 따라서 걷다가도 다시 계곡을 건너야 하는 길이었다. 바위마다 초록의 이끼가 끼어 자연의 정결한 생명력이 느껴지고, 잡목들이 울창한 계곡은 해가 기운 듯 어둑했다. 이끼가 낀 바위를 타고 흐르는 물줄기가 더없이 맑았다. 고사리과의 관중은 기품이 있다. 방사형으로 뻗어가는 줄기가 힘차고 그 줄기에 달린 잎들이 반듯하고 가지런하다. 계곡물은 작은 폭포로 쏟아지다가 맑은 웅덩이를 이루기도 한다. 미끄럽고 험한 계곡길이다. 평평한 암반에도 싱그러운 초록의 이끼가 뒤덮여 응달진 계곡의 정취가 더욱 깊다.
그렇게 30여 분 이상을 내려오니 하늘을 찌르는 낙엽송 군락지가 나타나고 길도 비교적 평탄해졌다. 이 계곡은 일월산 안에서도 무속이 성행하는 곳이다. 넓어진 계곡 가장자리에 정성으로 쌓은 두 개의 돌탑이 있고, 그 돌탑 사이에 네모진 돌 상자를 만들어 그 안에 치성을 드리는 촛불을 켜놓았다.
[강림계곡 용화선녀탕] — 인간의 세상이 아닌 신선(神仙)의 세계
조금 아래로 내려오니 ‘용화선녀탕’이다. ‘용화선녀탕은 일월산 여러 계곡 중 일자봉 동북편에 이어진 강림계곡 초입에 위치해 있다. 하늘나라 선녀를 다스리는 옥황상제가 이곳에 내려와 보고 선녀들이 목욕할 곳으로 적당하다고 생각하여 선녀들의 오르내림을 허락했음인지 골짜기의 이름이 ’강림곡‘이요 선녀들이 목욕을 한 곳이라 하여 선녀탕이라고 한다.’ 그 아래 폭포를 바라보는 전망대인 듯한 나무테크 시설물이 있다. 내려가 보니 치성을 드리는 단이 마련되어 있었다. 이곳의 명칭이나 전설이 무속이나 도교적인 신앙의 현장이다. 폭포는 수량이 많지 않고 규모도 그리 크지 않으나 물줄기가 깨끗하고 청아했다. 중간의 단계에 맑은 물이 고인 웅덩이가 있다. 그리고 아래쪽에 조금 큰 웅덩이이가 있다. 이곳이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와 목욕재계를 하는 곳이겠다.
반[영양 일월산의 굿당] — ‘황신부인당’과 굿판 ‘선황당’
오후 4시 15분, ‘선녀탕’에서 조금 내려오면, 아담하게 지어진 건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두어 채의 건물이 있는 굿당에 내려왔다. 전체를 둘러보니 여느 사찰의 분위기가 아니다. 무엇보다 제일 위쪽의 두 칸 짜리 크지 않는 건물에 각각 ‘황씨부인당’과 ‘산신각’ 현판이 걸려 있고, 그 건물 오른쪽에는 ‘호랑이를 타고 앉은 신선(神仙)’을 조각한 조형물을 모셔놓았다. 그리고 오른쪽 아래에는 장대한 거송(巨松) 아래에 나무테크 제단을 만들고 거기에 오색의 천을 매달아 놓았다. ‘선황당’이다. 바로 굿을 하는 곳이다. 원래의 ‘황씨부인당’은 월자봉 정상 아래에 있었다.
여기 경내의 중앙에는 사람이 기거하는 건물이 있고 그 아래에는 아담한 연못 정원이 꾸며져 있는데, 오늘따라 하얀 연꽃 몇 송이가 정결하게 피어 있었다. 여기가 바로 그 유명한 일월산 내림굿을 하는 굿당이었다. ‘산신각’이나 ‘신선’은 다분히 도교적인 것이고, ‘황씨 부인당’과 ‘선황당’은 굿을 하는 무속 신앙의 현장이다. 특히 일월산은 그 지형상 태백산의 가랑이에 위치해 있어 음기(陰氣)가 강한 여산(女山)으로 알려져 있어, 매달 그믐날만 되면 전국 각지의 무속인(巫俗人)들이 찾아와 영험함과 신통함이 더한 ‘내림굿’을 한다. 그리하여 무속인들로부터 성산으로 추앙받는 곳이기도 하다. 그 대표적인 장소가 용화사 굿당과 황씨부인사당이다. 무속 신앙은 늘 산신이나 신선 사상과 자연스럽게 결합되어 있다. 황씨 부인당에 관한 이야기가 흥미롭다.
[황씨부인당 이야기] — 영양 지방 전해지는 원혼의 신격화 이야기
‘황씨 부인’의 이야기는 경상북도 영양군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傳說)로 전해온다. 황씨 부인이 시어머니의 구박 또는 남편의 소박으로 억울하게 죽었다는 이야기이다. 어느 쪽이든 한 여인이 한을 품고 죽어 원혼(冤魂)이 되었다는 모티브이다.
☞ [황씨부인당의 전설 ①] — 첫날밤 신랑으로부터 소박을 당한 황씨 부인의 이야기
옛날 일월산 아랫마을에 황씨 성을 가진 처녀가 살고 있었는데, 워낙 인물이 고와 마을의 두 젊은이가 서로 탐내어 결혼하고 싶어 했다. 황씨 처녀는 두 총각 중 한 총각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다. 신혼 첫날밤 뒷간에 다녀오던 신랑은 신방(新房) 문앞에서 기겁을 했다. 신방의 문에 칼날 그림자가 어른거렸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신랑은 앞마당의 대나무 그림자를 칼 그림자로 잘못 알고 처녀를 빼앗긴 연적(戀敵)이 앙심을 품고 자신을 죽이려고 숨어든 것이라고 생각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멀리 달아나버렸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신부는 족두리와 원삼(圓衫)도 벗지 못한 채 신랑을 기다리다가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괴이하게도 처녀의 시신은 첫날밤 모습 그대로 삭을 줄을 몰랐다. 살아 있었을 때처럼 앉음새가 흐트러지지 않았고 돌부처처럼 앉아 있었다. 한편 멀리 도망간 신랑은 외지에서 다른 처녀를 만나 장가를 들었다. 그런데 이들 부부 사이에는 아이가 생겨도 낳기만 하면 이내 죽곤 했다. 답답한 마음에 점쟁이에게 물어보니 바로 ‘신부 황씨’의 억울한 원혼 때문이라고 했다. 뒤늦게나마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친 신랑은 지금의 일월산 부인당 자리에 신부의 시신을 옮기고 사당(祠堂)을 지어 혼령을 위로했고, 그때서야 신부의 시신이 홀연히 삭아 없어졌다고 한다.
☞ [황씨부인당의 전설 ②] — 시어머니의 혹심한 구박을 견디다 못해 자결한 며느리
영양군 청기면 당리 마을의 우씨 집안으로 시집 온 황씨가 아들을 낳지 못해 시어머니의 구박을 견디다 못해 일월산으로 올라가 목을 매고 죽었다. 그 후 일월산 삼막(蔘幕)에서 죽은 채로 발견된 황씨를 남편이 장례 지냈다. 그 일이 있은 후로 마을에 좋지 않은 일이 거듭 발생했다. 죽은 황씨 부인이 당리 마을의 영천 이씨 명존(命存) 할배에게 현몽하여 당(堂)을 지어 달라고 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 말을 좇아 황씨 부인을 당신(堂神)으로 모셨다.
황씨 부인의 죽음은 시어머니의 구박 또는 남편의 소박과 같은 가부장적 횡포가 가장 큰 원인이다. 시어머니가 구박한 큰 이유는 황씨 부인이 계속 딸만 낳았기 때문이다. 남편의 소박은 황씨 부인이 절개를 지키지 못한 것으로 오해한 결과이다. 그래서 자결한 황씨 부인은 죽어서도 죽지 않은 상태로 일월산 주변을 맴돈다. 마을 사람들 앞에 나타나 산 사람처럼 말을 걸기도 하고 원혼(冤魂)의 형상으로 비상하게 나타난다.
그 원한(怨恨)의 결과는 ‘해코지’ 또는 재앙(災殃)으로 나타난다. 원혼(冤魂) 설화는 살아서 '원한'을 갖고 죽으면 원혼이 되는데, 이는 ‘원한 풀기’[解寃]라는 결말을 지향하기 마련이다. 이 설화 역시 결원-해원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해코지에 이어 나타나는 현몽은 마을 공동체가 원혼 발생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게 되는 과정이다. 황씨의 원혼은 남편 또는 마을의 유력자에게 현몽(現夢)하여 공동체의 신(神)으로 자리매김함으로써 자신의 원한을 풀고자 한다. 여성 원혼이 마을 공동체의 풍요와 안녕을 관장하는 신이 되었다는 것은 개인을 넘어서 사회적 차원의 해원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 [황씨부인 이야기의 문학적 변용 ①] — 미당 서정주(徐廷柱)의「신부(新婦)」
이 설화는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산 부근의 당리 마을에서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바탕으로 형성된 데다 여성의 원혼이 일월산 일대의 공동체 신앙으로 오래 지속된 점에서, 원혼의 신격화(神格化)를 보여 주는 전형적 사례이다. 지금도 일월산신의 신내림을 받으려는 무속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황씨 부인은 일월산의 대표적인 상징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우리 민족의 정한(情恨)은 여러 문학작품의 소재로 다양하게 원용되었는데, 대표적인 작품에 조지훈(趙芝薰)의 시「석문(石門」과 서정주(徐廷柱)의 시「신부(新婦)」가 있다.
신부는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당기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고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40년인가 50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 방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초록재와 다홍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 서정주의 시「신부」
이 시는, 미당(未堂) 서정주(徐廷主)의 시집 『질마재신화』첫머리에 실린 작품이다. 『질마재신화』는 서정주의 여섯 번째 창작 시집으로서, 산문 지향적 성격이 강해지는 후기시의 출발점이 되는 시집이다. 총 45편의 산문시로 이루어져 있다.「신부」는 우리의 고전 설화-황씨부인 이야기-를 끌어와 현대시로 변용(變容)시킨 작품이다. 전체적으로 호흡이 긴 산문시의 틀 안에 ‘오해가 빚은 비극’과 ‘여인의 정절’이라는 주제를 담고 있다.
* [황씨부인 이야기의 문학적 변용 ②] — 조지훈(趙芝薰)의「석문(石門)」
우리 문학사에서 청록파로 알려진 시인 조지훈은 이곳 영양 출신이다. 조지훈 시인은, ‘황씨부인의 설화’를 바탕으로「석문(石門)」이라는 시를 남겼다. 시적 화자가 바로 ‘황씨 부인’이다.
당신의 손끝만 스쳐도 소리 없이 열릴 돌문이 있습니다. 뭇 사람이 조바심치나 굳이 닫힌 이 돌문 안에는, 석벽난간(石壁欄干) 열두 층계 위에 검푸른 이끼가 앉았습니다.
당신이 오시는 날까지는, 길이 꺼지지 않을 촛불 한 자루도 간직하였습니다. 이는 당신의 그리운 얼굴이 이 희미한 불 앞에 어리울 때까지는, 천 년(千年)이 지나도 눈감지 않을 저의 슬픈 영혼의 모습입니다. 길숨한 속눈썹에 항시 어리운 이 두어 방울 이슬은 무엇입니까? 당신의 남긴 푸른 도포 자락으로 이 눈썹을 씻으랍니까? 두 볼은 옛날 그대로 복사꽃 빛이지만, 한숨에 절로 입술이 푸르러 감을 어찌합니까?
몇 만 리 굽이치는 강물을 건너와 당신의 따슨 손길이 저의 흰 목덜미를 어루만질 때 그때야 저는 자취도 없이 한 줌 티끌로 사라지겠습니다. 어두운 밤하늘 허공중천(虛空中天)에 바람처럼 사라지는 저의 옷자락은 눈물어린 눈이 아니고는 보이지 못하오리다.
여기 돌문이 있습니다. 원한도 사모칠 양이면 지극한 정성에 열리지 않는 돌문이 있습니다. 당신이 오셔서 다시 천년토록 앉아 기다리라고 슬픈 비바람에 낡아가는 돌문이 있습니다. — 조지훈「석문(石門)」(전문)
[에필로그 일월산 산행] — 원시의 청렬(淸冽)한 숨결이 살아 있는 ―
영양(英陽)은 강원도 태백시와 경상북도 청송의 중간에 있는 산간 오지(奧地)이다. 지금은 도로망이 잘 구축되어 수월하게 오갈 수 있지만 옛날에는 외부인들이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첩첩산간에 있는 곳이다. 그래서 ‘6·25전쟁’ 당시에 이곳에서는 아무런 전란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영양 출신 권용길 님의 말이다. 경상북도 영양군 북쪽에 위치한 일월산은 산이 높아 동해에서 솟아오르는 해와 달을 먼저 볼 수 있다고 해서 이름이 일월산이 되었다고 한다. 또 산마루에 천지가 있는데, 그 모양이 해와 달을 닮아서 일월산이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 이 산에는 황씨 부인의 전설이 전하는 ‘황씨 부인당’이 있는데, 지금도 무속신앙(巫俗信仰)의 성지로 알려져 있다.
원시의 울창한 숲 속에서 느끼는 청렬(淸冽)함은 일월산이 우리에게 안겨준 행복이었다. 거기 낙동강의 발원지가 있는 곳, 그만큼 인간의 때가 묻지 않은 자연의 순결함이 우리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 이상 [2019년 6월 16일 백파의 ‘영양 일월산 산행기’에서 발췌] …♣ [계 속] ☞ 반변천 수계 영양(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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