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636
10월7일[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연중 제26주간 토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youtu.be/Nu25f-XLWrU?si=51j3OBkt8rK_9gBZ
[작은형제회 김종화 알로이시오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탄의 복종도 큰 기쁨이었지만, 더 큰 기쁨이 있었으니, 제자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선교 사명을 부여받은 제자단의 규모는 상당했습니다. 직접 선발하신 12명의 제자 외에도, 70명 혹은 72명의 제자단이 존재했습니다. 70이라는 숫자는 창세기 10장에 등장하는 모든 민족들의 명부에 따라, 전 인류를 이루는 일흔 국가의 숫자와 일치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인류 전체의 구원을 위해 70명의 제자단을 뽑으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다들 무사히 선교 활동을 마치고 돌아와 예수님께 보고를 드리고 있습니다. 출발 당시 제자들은 예수님의 신신당부에 따라 돈주머니도 식량자로도, 여벌 옷이나 신발도 지니지 않았습니다.
땡전 한 푼도 없이 계속된 전도 여행길에 제자들은 굶주림에 시달렸고, 심신은 지칠대로 지쳤을텐데, ‘선교 여행 결과 보고회’ 분위기는 놀랍게도 기쁨과 축제의 분위기였습니다.
제자들 얼굴은 피곤한 기색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보다는 충만한 기쁨으로 가득한 의기양양한 얼굴, 세상을 다 얻은 그런 얼굴이었습니다. 상기된 얼굴의 제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루카 복음 10장 17절) 제자들의 성공담에 예수님께서도 크게 기뻐하시며 이렇게 응답하십니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는 권한을 주었다. 이제 아무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루카 복음 10장 18~20절)
제자들은 마귀들이 자신들에게 굴복하고 물러나는 것, 다시 말해서 사탄에 대한 하느님 나라의 승리를 직접 목격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으로 인해 도래한 하느님 나라를 직접 체험한 것입니다. 그들은 그 체험이 얼마나 강력했던니 예수님을 향해 주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뱀과 전갈을 짓밟는 능력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유다 문학 안에서 뱀과 전갈은 그 사악한 본성상, 생명을 위협하는 사탄의 부하로 여겨졌습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전갈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키시는 분, 독사와 살모사를 짓이기고 사자와 용을 짓밟으시는 분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부여받은 그러한 능력을 고스란히 당신 제자들에게 물려주신 것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더 이상 사탄의 세력에 지배되지 않게 되습니다. 그들은 이제부터 하느님 아버지의 다스림을 받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에게 있어 사탄의 복종도 큰 기쁨이었지만, 그와 비교할 수 없을만큼 큰 기쁨이 있었으니, 제자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입니다. 결국 제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릴 수 있게 선택된 것입니다.
고대 근동지역에서는 각 고을마다 그 고을 주민들의 명단을 명부에 써서 잘 보존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 명단에 들어 있는 사람들은 그 고을에서 제공하는 모든 혜택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곳으로 간주된 하늘나라에서도 그와 비슷한 명단이 존재한다고 여겼습니다. 그 명단에는 하느님께서 뽑으신 모든 사람들의 이름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이름하여 생명의 책입니다.
생명의 책! 사이비 교주들이 자주 애용하는 표현입니다. 지금 서울구치소에서 무상 급식 잘 하고 계신 사이비 목사 역시, 틈만 나면 ‘생명책’이라는 표현을 써서 우리를 포복절도시킨 바 있습니다.
“누구를 찍지 않으면 생명책에서 삭제시키겠습니다. 광화문 집회 안나오면 생명책에서 지워버리겠습니다. 헌금 안내면 생명책에서 빼버리겠습니다.”
그 소중한 생명의 책을 그토록 남용하고 훼손시켰으니, 조만간 하느님 앞에 섰을 때, 그간 습관적으로 저질러온 신성모독을 어찌 감당해낼까 걱정입니다. 생명의 책에 이름이 기록되는 것은 지독한 허언증과 과대망상증에 걸린 사이비 목사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절대 아닙니다. 오직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친히 하실 일입니다.
우리는 그저 하루하루 보속하는 마음으로 이웃 사랑에 충실하면서, 하느님의 크신 자비와 사랑만을 굳게 믿으며, 그분의 관대한 용서와 자비를 기대할 뿐입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마음의 어머니>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취직을 하려고 했지만 면접 때마다 번번이 떨어졌어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던 면접에서도 떨어지게 되자 청년실업자는 회장님을 붙잡고 호소했습니다.
“늙으신 홀어머니를 모시고 삽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뜻밖에도 회장님은 관심을 보이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노모가 계시다고……, 그러면 발을 씻겨드리고 내일 다시 오게”
집으로 돌아온 청년은 회장님의 요구대로 생전 처음 어머니의 발을 씻겨 드리려고 했습니다. 그 순간, 어머니의 발에 박힌 굳은살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발이 아니었습니다. 거북이 등처럼 굳어진 발은 여기저기 갈라지고 발톱은 닳아 검게 오그라져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나를 위해 가셨던 길은 천 걸음인가, 만 걸음인가?’
아들을 위해 발이 닳고 피멍이 들도록 걸어온 어머니의 사랑과 슬픔의 흔적이었습니다. 청년은 펑펑 쏟아지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지요. 어머니의 발을 만져보고서야 비로소 어머니의 마음을 만져 볼 수 있었습니다.
다음 날 회사로 다시 찾아간 청년은 회장에게 인사를 했습니다. “회장님! 감사합니다. 회장님은 저에게 어머니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온 몸으로 깨달을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면접도 마다하고 돌아서 나오는 청년에게 회장님은 말했습니다. “되었네, 내일부터 출근하게”
이 이야기는 실제로 일본 어느 기업의 면접시험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회장님은 왜 청년을 채용했을까요? 효자라서 그랬던 것은 아닌 것 같죠? 몸으로 어머니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고객에게도 똑같이 관념이 아닌 가슴으로 대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손으로 만져보세요. 머리로 생각하는 것과 다른 또 하나의 세계가 거기 있습니다.[출처: 유투브, 이어령 교수의 80초 생각나누기]
‘어머니’라 부를 때, 이 청년에게 어머니의 발을 씻어주기 전과 후의 어머니란 이름의 차이는 분명하였을 것입니다. 몸이나 머리로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 ‘가슴’으로 느끼고 아는 것이 온전히 어머니가 누구인지 아는 것 같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를 요한에게 맡기시며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분명 육신을 나으신 어머니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요한은 영적으로 새로 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탄생 이면에 마리아란 어머니가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성모님을 어머니라 하면서 우리를 낳고 기르시기 위해 어떤 수고를 하셨는지 구체적으로 느끼고 마음에 새기지 못한다면 온전히 성모님을 어머니로 아는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교부들은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교회가 탄생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나온 ‘피와 물’이 곧 ‘성사’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아담의 옆구리에서 뽑아낸 갈비뼈로 하와를 만들었듯이, 하느님께서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뽑아낸 피와 물로 교회를 만드신 것입니다.
피는 죄를 사해주고, 물은 깨끗해진 영혼에 들어오시는 성령을 의미합니다. 요한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피와 물, 즉 성사로 새로 태어난 교회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례 받을 때 ‘죄의 용서(피)와 성령의 임하심(물)’을 체험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성체를 영할 때나 고해성사를 할 때도 죄의 용서와 성령의 오심을 경험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것만 보면 성모님이 교회의 탄생을 위해 고생하신 것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카나의 혼인잔치에서처럼 은총을 중재해 주시는 분은 실제로 성모님입니다. 왜냐하면 성모님은 그 피와 물을 담는 신비로운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5천명을 먹이는 기적을 행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5천명을 먹일 빵을 살 생각만 하지 감히 기적은 엄두도 못 냅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한 번도 기적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지만 예수님께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기적을 얻어내셨습니다. 그만큼 성모님의 믿음이 완전하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깨끗하고 완전한 그릇이기에 하느님을 품으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우리에게 중재하시는 모든 은총은 바로 당신 아들의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오는 피와 물입니다. 따라서 은총을 중재하기 위해 성모님의 영혼은 예리한 칼에 찔리는 고통을 겪어야만 합니다.
성모님께서 오늘 십자가에서 당신 아들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당신 품에 안으시는 것은 당신 아드님을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오는 피와 물의 은총입니다.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하고, 다시 살리시기 위해 어머니는 당신 아드님의 죽음을 보고 계셔야 하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그리스도의 고통만큼이나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겪으셔야만 당신 아드님의 피와 물을 얻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6.25때 한 겨울 어떤 어머니가 다리 밑에서 아기를 낳고 당신의 옷으로 아기를 감싸 당신은 죽고 아기는 지나가는 미군에 발견돼 미국에서 자랐다고 합니다.
어느 정도 성장해서 한국에 찾아온 그 아이는 어머니 무덤에 자신의 옷을 벗어 덮어드리고 ‘얼마나 추우셨어요.’라고 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아무리 우리가 성모님을 어머니라 불러도 성모님의 발을 씻어드리기 전에는 그분이 우리를 위해 어떤 고생을 하셨는지 가슴으로는 느낄 수 없게 됩니다.
성모님이 십자가 밑에 계시지 않았다면 우리 어머니가 되실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성모님의 영혼이 예리한 칼이 찔리듯 아플 것이라는 시메온의 예언을 깊이 깨달으며, 우리도 당신 아드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신 어머니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구체적으로 느껴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1998년 9월입니다. 저는 본당 신부님과 월요일 아침 미사를 마치고 ‘온천’엘 가기로 했습니다. 신부님을 모시고 온천엘 가려고 생각하니 긴장이 되었고, 그만 아침미사에 늦었습니다. 제의실에서 본당 신부님께 죄송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신부님은 제의실 수녀님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조 신부님이 미사에 늦을 사람이 아니니 10분 전에도 안 나오면 꼭 전화를 하세요.” 저는 신부님께 야단을 맞을 줄 알았는데 신부님께서는 저를 믿어 주셨습니다. 저는 미사 30분 전에는 고백소에서 성사를 주었습니다. 본의 아니게 수녀님에게 미안했습니다. 25년이 지난 9월입니다. 저는 마음 편히 아침산보를 하고 있었습니다. 퀸즈성당 본당신부님이 전화를 하였습니다. 신자들이 모두 걱정한다고 하였습니다. 신부님도 제가 어디 아픈 것은 아닌지 전화하였습니다. 나는 평상시처럼 아침 산보 중이라고 하였습니다. 나중에야 이유를 알았습니다. 그날 아침 미사가 제 차례였는데 저는 깜빡 잊었습니다. 수녀님은 본당 신부님에게 전화를 하였고, 본당 신부님이 저를 대신해서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신부님도, 신자들도 모두 저를 걱정하였습니다. 제가 혹시 아픈 것은 아닌지, 산보 중에 교통사고를 당한 것은 아닌지 걱정하였다고 합니다. 4년 동안 한 번도 미사에 늦은 적이 없었기에 그만큼 저를 믿어 주셨음에 감사를 드립니다. 저의 부주의를 탓하지 않고, 먼저 저를 걱정해 주었던 신자분들과 신부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평소에도 미사에 늦은 적이 있었다면 본당 신부님도 저의 부주의를 먼저 탓하였을 것입니다. 저의 성실함이 있었기에 본당 신부님은 저의 부주의함 보다는 저의 건강을 먼저 생각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선교를 하고 다녀온 제자들을 맞이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마귀를 쫓아낸 일을 말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의 보고를 듣고 대견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교만해 질 것을 염두에 두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그리고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우리의 무엇이 하느님나라에 기록될까요? 우리의 업적, 능력, 재물은 아닐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것이 필요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잘못을 뉘우치는 회개와 이웃을 위한 선행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오늘은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16세기 중엽 오스만 제국(현재의 튀르키예 지역을 중심으로 한 이슬람 제국)은 영토를 확장하고자 유럽을 침공하였습니다. 1571년 10월 7일 그리스도교 연합군은 그리스의 레판토 항구 앞바다에서 벌인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 제국을 무찔렀습니다. 비오 5세 교황은, 이 전투의 대승이 묵주 기도를 통한 성모님의 간구로 하느님께서 함께하신 덕분이라 여기고, 이를 기억하고자 ‘승리의 성모 축일’을 제정하였습니다. 나중에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저도 묵주기도에 대한 작은 체험이 있습니다. 적성 성당에 있을 때입니다. 운전 중에 묵주기도를 하는 편은 아니었습니다. 어느 날 서울에 가는 길에 묵주기도를 하고 싶어졌습니다. 차를 세우고 묵주를 꺼내는데 제 앞으로 큰 트럭이 지나갔습니다. 멈추지 않고 계속 운전했다면 큰 트럭과 충돌할 수도 있는 아찔한 순간이었습니다. 묵주기도를 한 것도 아니고, 묵주기로를 하려고 준비만 했는데도 하느님께서는 저를 지켜주셨습니다. 저는 그 뒤로 매일 묵주기도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2002년 ‘빛의 신비’를 제정하였습니다. 이로써 묵주기도는 예수님의 탄생을 묵상하는 환희의 신비, 예수님의 공생활을 묵상하는 빛의 신비,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고통의 신비, 예수님의 부활을 묵상하는 영광의 신비로 완성되었습니다. 묵주기도를 정성껏 바치면 성모님의 전구로 악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0,17-24: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제자들은 예수께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라는 명을 받고 떠나갔다가 돌아와서 기쁨에 넘쳐 스승님께 일의 결과를 기쁨에 넘쳐 보고드리고 있다. 예수께서는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18절). 이 말씀은 사탄이 높은 하늘에서 땅으로, 기고만장한 오만에서 굴욕으로, 영광에서 모멸로, 막강한 힘에서 무력한 상태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오시기 전에는 그자가 세상을 지배하였고, 모두 그를 경배하였다. 그러나 하느님의 아들 말씀이 하늘에서 내려오시자, 그는 자기의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는 권한을 주었다. 이제 아무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19절) 뱀과 전갈을 밟을 수 있는 능력은 그리스도께서 뱀의 머리를 짓밟으신 사실에서 온다. 그들이 뱀과 전갈의 독침에 쏘이더라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치유될 것이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시고 사탄을 물리치셨고, 세례를 받은 우리에게도 같은 능력을 주신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기적을 행하고 사탄을 물리친 일로만 기뻐한다면 교만이 커질 수 있다. 그래서 그 교만을 싹일 때 잘라버리신다.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20절) 하신다. 논에 피가 올라오면 즉시 뽑아버리는 농부처럼 하신다.
제자들의 보고를 들으시고 예수님 역시 기쁨으로 찬가를 부르신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21절).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이란 이방의 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과 점성사들, 그리고 이스라엘의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말한다. 그들은 모두 세상의 비밀과 하느님의 뜻을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었다. 하느님의 뜻은 인간의 생각과는 다르다. 그분은 겸손한 사람, 마음이 가난한 사람에게 당신의 진리를 드러내신다. 이것이 복음서의 중심 사상이며 예수님의 본 모습이다. 스승님은 우리를 철부지들이라고 하신다. 이것은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고 하는 사람들보다 우리가 구원받을 준비가 더 잘 되어있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분의 신비를 알 수 있으니, 우리의 눈은, 또 그분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눈은 행복한 눈이다. 우리는 그분의 놀라운 가르침을 들었으니, 우리 삶의 참된 제물로 그분께 흠숭과 영광을 드려야 할 것이다.
=====================
[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요한 신부님]
강론을 준비하며 성경을 공부하고 묵상할수록 “성경은 교만한 자 앞에서는 침묵한다.”는 옛 교부들의 가르침을 다시금 곱씹게 됩니다. 수 천년의 시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과 손을 거쳐오며 쓰여진 글입니다. 그것도 그냥 이야기가 아니라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여주시려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과 섭리가 부족한 인간의 언어로 표현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섭리 속에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 마음 속에서 살아움직이며 전해진 말씀이니, 제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일천한 지식과 얕은 깨달음으로 그 심오한 의미를 다 헤아릴 수는 없습니다. 그저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자처하는 교만한 이들에게는 그 심오한 뜻을 감추시고, 겸손한 자세로 마음을 활짝 열고 다가가는 순수한 영혼에게는 그 뜻을 드러내보이시는 하느님 사랑의 배려에 놀라고 감사하게 될 뿐이지요.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로부터 파견받아 복음을 선포하고 돌아온 제자들도 그런 놀라움과 감사함 속에서 크게 기뻐하며, 한껏 고무된 채로 예수님께 자신들이 보고 듣고 느낀 하느님 섭리를 보고하고 있습니다. 그 강렬한 체험을 통해 믿음이 깊어진 덕분인지, 그들은 이제 예수님을 ‘스승’님이 아니라 ‘주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런 제자들의 기쁨이 가벼운 교만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그들을 진정시키시며, 그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진짜 마음을 기울여야할 참되고 중요한게 무엇인지를 알려주십니다.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자신이 하느님께 부여받은 능력을 이용하여 눈에 보이는 결과를 얻어내는데에만 신경쓰다보면, 정작 중요한 하느님의 뜻은 소홀히하면서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드러내고 높이기 위해 노력하게 되지요. 주객이 전도되고 나아갈 길을 잃어버린채 헛되고 부질없는 것들 속에서 방황하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그러지 않도록 미리 조심시키시는 것이지요.
신앙생활의 참된 기쁨은 놀랍고 신비한 기적들을 체험하는데에 있지 않습니다. 내가 어디에, 어떤 상황에 처해있든 나의 주님께서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시며 지켜주시고 힘을 주신다는 분명한 확신 안에서 신앙생활의 참된 기쁨과 보람이 우러나오는 겁니다. 그러니 눈에 보이는 기적보다 믿음이 먼저입니다. 감각적인 체험보다 감사가 먼저입니다. 내 소원과 바람이 이루어지는 것보다 주님과 함께하는게 먼저입니다. 신앙의 신비는 작고 약한 이들의 겨자씨 한 알만큼도 못되는 보잘 것 없는 믿음을 통해서 우리를 주님 사랑으로 물들이고 변화시킵니다. 자신의 약함과 부족함을 솔직히 인정하는건 아프고 어려운 일이지만, 우리가 그런 모습으로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면 그분께서 우리를 따뜻하게 안아주실 겁니다.
=====================
[성 분도회 왜관수도원 이성근 사바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파견하신 일흔두 제자가 복음 전파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와 보고하는 내용을 들려줍니다.
제자들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선교 여행 중에 겪은 일들 가운데, 마귀들까지 자신들에게 복종했다는 사실을 기쁨에 차서 보고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여기에 구마 기적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제자들이 마귀들을 쫓아내었다는 것은 하느님 나라가 이 땅 위에 실현되었기에 악의 권세가 굴복되고, 사람들이 그 권세에서 풀려났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복음을 전파하고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의 특권은, 명예나 명성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는 데 있습니다.
모든 것이 내가 바라거나 계획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도 있지만, 복음 전파는 참으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하느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것을 체험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서도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경고 말씀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자신들이 하는 일에 도취되어 그것을 자신의 능력으로 이루어 냈다고 생각할까 염려하십니다.
다른 일들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일을 할 때에도 성취감은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겠지만, 성과에만 연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기쁨은 내가 무엇을 이루었을 때가 아니라 실제 생활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며 살아갈 때 얻을 수 있습니다.
====================
[광주대교구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은 묵주 기도의 동정 마리아 기념일(10월 7일)입니다. 중세 봉건 시대에 신하들이 자기 주인에게 복종의 의미로 화관을 봉헌하던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관습을 성모님께 적용하여, 성모님께서 아들 예수님의 신비에 참여하면서 얻으신 기쁨과 고통과 영광을 기억하며 장미로 된 삼중관을 봉헌하였습니다.
처음에 이 축일은 1571년 10월 7일, 그리스의 레판토 해전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오스만 제국의 공격을 물리친 것을 기념하는 데서 출발하였습니다. 마침 그날이 로마에서 로사리오 형제회가 장엄한 행진을 한 날이어서, 비오 5세 교황은 이 승리를 ‘그리스도인의 도움이신 마리아’께 봉헌하였고, 그 다음 해부터 이날을 축일로 지내게 되었습니다.
이후에도 빈과 페트로바라딘 등지에서 오스만 제국에게 잇달아 승리하자 클레멘스 11세 교황은 이날을 ‘로사리오의 축일’로 제정하였습니다.
기도는 우리에게 커다란 힘을 줍니다. 물론 그 힘이 세속적인 권세나 승리를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자신을 성화시키고 이 세상을 하느님의 나라로 만들어 가는 데는 엄청난 힘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주님의 사명을 수행하고 기뻐하며 돌아왔습니다. 자신들 안에서 새롭고 엄청난 힘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 가능하신 줄 알았던 능력들이 자신들에게서 나왔고, 이를 통해 마귀들까지 그들에게 복종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이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보다는 철부지들에게서 드러난 것을 더 흐뭇하게 바라보십니다. 철부지들 안에 숨겨진 단순함과 순수함이 하늘 나라의 열쇠인 것입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의 이름으로>
우리는 많은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대개는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하고 끝마무리합니다. 기도하되 내 이름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능력을 지니고 계시고 그 풍요로움을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일흔두 제자가 선교여행에서 돌아와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제자들은 여러 질병을 낫게 해 주었을 뿐 아니라 마귀까지도 쫓아냈는데 그것은 그들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 때문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통해서 마귀들을 복종시킨 것입니다. 제자들은 기뻐했고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때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루카 10,20) 참다운 기쁨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하느님 나라에 뽑힌 것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마귀를 복종시킬 수 있었던 것도 하느님께 선택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누리는 인기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인기의 바다에 빠지면 주님은 잊고 나를 드러내서 결국 주객이 전도되고 망하게 됩니다. 언제나 주님을 가슴에 품고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특별히 세례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로 뽑아주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불러주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능력을 당신의 자녀들을 통해서 드러내시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주님의 도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성 마더데레사 수녀님은 자신을 “하느님의 손에 쥐어진 몽당연필”이라 했고, 소화 데레사 성녀는 “주님 손안의 장난감, 주님 손안에 쥐어진 작은 공”이 되길 원하셨습니다.
과연 나는 주님 안에서 무엇이 되고 있는가? 그리고 무엇이 되어야 할까?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아무리 인기가 좋아도 주님의 도구임을 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의 영광을 위해 일을 함으로써 주님을 차지하는 기쁨에 머물길 바랍니다. 우리의 이름이 이미 하늘에 기록되었다면 그 이름의 빛을 잃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주님, 저의 머리 위로 당신의 손길을 얹어 주소서. 만일 당신의 도우심을 받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성 필립보 네리) 무슨 일을 하든지 당신의 이름이 살아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렸을 때의 기억이 하나 떠올랐습니다. 한겨울 동네 친구들과 놀던 중에 추우면 햇볕이 잘 드는 담벼락에 나란히 기대서서 햇빛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던 기억입니다. 그러면 따뜻한 것은 물론이고 기분도 좋았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아직도 그 기억이 생생하게 납입니다.
중학생 이후 그렇게 담벼락에 기대서 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햇볕에 얼굴이 타지 않을까 싶어서 그늘만을 찾았습니다. 햇볕은 나를 따뜻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나를 태워버릴 것처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이 기억이 떠올려져서 사제관 베란다에 나가서 따뜻한 햇볕을 느껴보았습니다. 약간 덥기도 했지만, 요즘 아침저녁으로 선선해져서인지 그 햇볕이 좋았습니다. 햇빛이 천천히 피부를 통과해 스며들고 빛과 따뜻함으로 몸 전체가 채워지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도 이와 같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사랑으로 몸 전체가 채워지면서 기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위해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햇볕을 맞기 위해 먼저 햇빛이 비치는 담벼락에 기대 서 있어야 하는 것처럼, 주님 앞에 먼저 나가야 합니다. 전혀 기도하지 않으면, 또 어떤 신앙생활도 하지 않으면서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의 빛을 느낄 수가 있을까요?
지금 당장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얻으려는 것보다 먼저 주님을 보는 데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의 사랑과 은총도 보일 것입니다.
전교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일흔두 제자가 기뻐하며 말합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주님의 이름만으로도 마귀들이 힘을 잃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에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굳게 믿고 주님의 뜻에 맞춰서 행함으로 인해 하늘 나라에 가까이 가게 된 것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즉, 마귀를 쫓아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의 이름을 간직하면서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이유는 분명해집니다. 이 세상의 삶은 결코 무한한 시간이 아닙니다. 언젠가는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께 나아가서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됩니다. 주님의 사랑과 은총 안에서 머물면서 이 세상 안에서도 기쁨과 행복의 시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작지만 큰 바램>
루카 10,17-24 (일흔 두 제자가 돌아오다,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
그때에 일흔두 제자가 기뻐하며 돌아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는 권한을 주었다. 이제 아무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에게 따로 이르셨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작지만 큰 바램>
어딘가 날 닮은
사람을 만나면
참 좋다
하느님께서도
내게서 그러시면
참 좋겠다
=====================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기쁨의 등급>
오늘 복음은 아주 밝은 색입니다. 주님의 입에서 즐거움, 기쁨, 행복이라는 말이 연속으로 나옵니다.
오늘 복음은 일흔두 제자가 파견되었다가 돌아와 보고하는 10장인데 전 장인 9장에서는 열두 사도가 파견되는 얘기가 있었지요.
그런데 열두 사도는 별 성과가 없이 돌아왔는지 그에 관한 얘기는 없고, 주님께서 세 제자만 데리고 산에 올라가 있는 동안 남은 제자들이 악마의 추방에 실패하고 주님으로부터 질책받은 내용뿐입니다.
그런데 이런 9장과 달리 오늘 일흔두 제자는 악마 추방에 성공하고 주님께서도 매우 기뻐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기쁨도 대단하셨겠지만 이들은 얼마나 더 기뻤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제자들에게 악령추방을 기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그런데 이 말씀은 진정 악령추방을 기뻐하지 말라는 말씀일까요? 그런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압니다. 악령추방은 기뻐해야 할 일이지요.
이 말씀은 우선 그 기쁨에 의기양양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성취의 기쁨은 종종 우리를 그 성취에 의기양양하게 하지요. 그리고 그 의기양양은 겸손보다는 교만에 가까울 수 있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것을 너무 기뻐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일 겁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우리의 기쁨이 이런 것이나 이 정도에 머물거나 안주하지 말고 더 나아가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라는 것도 더 큰 성취와 성공으로 나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진정한 성취 또는 성공으로 나아가라는 뜻일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더 큰 성취와 성공의 기쁨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서의 진정한 성취와 성공 말입니다. 주님 말씀대로 하늘나라에 이름이 등록되는 것을.
주님께서는 참 행복 선언에서 이미 말씀하셨지요. 이 세상에서 배부르고 웃는 사람은 불행하고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인 사람이 진정 행복하다고.
아무튼 오늘 복음은 기쁨에는 등급이 있음을 가르쳐 주고, 우리가 어떤 기쁨과 행복을 살아야 할지도 가르쳐 줍니다.
이 말은 기쁨이란 뭔가를 얻거나 성취했을 때의 만족인데 우리가 뭘 바라고 청하고 소유해야 할지와 관련이 있지요.
그것을 돌아보는 오늘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어제 바자회가 있었고, 너무 많은 분이 와주셔서 성황리에 진행되었습니다.
덕분에 저는 식사할 시간도 없을 정도로 바빴고, 오늘 늦잠을 자 묵상을 깊이 하지 못하고 강론을 올렸습니다.
양해를 바라고, 오늘도 많은 분들이 와주시기를 청합니다.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일치의 중심>
- 그리스도 예수님과 우정의 여정 -
“기도가 답이다”
"주님은 어지시다 찬양들 하라,
당신의 자비 영원하시다,"(시편136,1)
10월 묵주기도 성월에 맞이하는 오늘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은 참 의미가 깊습니다. 462년전 이슬람제국의 침략으로 유럽이 풍전등화 상태에 있을 때 1571년 10월 7일 주일, 오전부터 시작된 그리스의 앞바다 레판토 해상에서 그리스도교 연합군과 이슬람 제국의 치열한 전투는 오후 4시경 그리스도 연합군의 대승으로 끝납니다. 어느 역사가는 말합니다.
“이 오스만 제국의 패배는 지중해에서의 오스만의 확장을 저지시켰고, 서부의 주도권을 유지하였으며. 예전에는 저지할 수 없었던 오스만을 격퇴할 수 있다는 서방의 자신감을 신장시켰다.”
그리스도교 연합군의 신성동맹을 성공시킨 성 비오 5세 교황은 이날 모든 신자에게 묵주기도를 바치도록 하였고 교황 자신도 함께 베드로 광장에서 묵주기도를 바쳤다 합니다. 마침내 치열한 해상 전투 끝에 그리스도교 연합군은 대승을 거두었고 사람들은 묵주기도의 힘 덕분에 승리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성 비오 5세는 10월 첫 주일을 ‘승리의 성모 축일’로 지내도록 했고, 후에 10월 7일로 확정되면서, 1960년 성 요한 23세는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그 명칭을 바꿉니다. 성 비오 5세가 전 유럽 신자들에게 묵주기도를 바치도록 했고 기도의 힘으로 대승을 거두었던 것입니다. 당시 오스만 제국의 술탄 셀립 2세는 “나는 모든 기독교 제왕들의 무력에는 꼼짝도 안 하지만, 다만 저 교황의 기도의 힘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고 고백했다 합니다.
여기서 잠시 성 비오 5세 교황에 대해 소개합니다. 교황이 없었다면 신성동맹도 없었을 것이며 레판토 해상 전투에서 유럽의 승리도 없었을 것입니다. 성 비오 5세 교황은 무엇보다 기도의 사람이었고 실행의 사람이었습니다. 성 비오 5세는 자신이 속해있던 도미니코회의 규율에 따라 종래의 호화스러웠던 교황청의 의식주를 간단하고 검소하게 하여 교황청을 수도원과 비슷하게 만들었습니다.
교황 즉위식을 중지시키고 그에 들어갈 경비를 모조리 빈민구제 및 경영이 곤란할 정도로 가난한 수도원을 원조하는 목적으로 기부하게 하였습니다. 그는 교황용 제의를 맞추지 않고 전임 교황들의 제의를 그대로 입었으며 때때로 맨발로 로마의 성당들을 순례했다고 합니다. 교황이라는 가장 높은 지위에 올랐으면서도 예전의 검소한 수도생활을 평생 그만두지 않았으며, 따라서 교황청은 도덕과 근면의 모범적인 곳이 되었고, 교황청의 개혁도 최고조에 이르렀다 합니다.
또 하나 소개드리고 싶은 일화입니다. 성 비오 5세 때부터 교황이 본격적으로 하얀색 의복을 입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까닭은 교황으로 선출된 이후, 성 비오 5세가 교황들과 추기경들이 입었던 기존의 붉은 색 의복을 입는 대신에 자신의 하얀색 도미니코회 수도복 입기를 고집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 성인의 영향력이 얼마나 지대한지 하느님께서 유럽을 구하라 예비하신 섭리의 교황임을 깨닫습니다. 성인은 레판토 해전에서 대승을 거둔 다음해인 1572년 5월1일 “오, 주님! 저에게 고통과 인내를 더하여 주소서.”란 기도를 남기고 선종합니다. 아마도 레판토 해전으로 인한 심신의 충격이 컸던 듯 합니다.
기도의 힘은 믿음의 힘이자 바로 하느님의 힘입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삽니다. 제 수도생활 만 41년, 아무리 기도해도 기도에는 여전히 초보자같습니다. 그래도 심기일전하여 다시 기도를 시작합니다. 레판토 해상 전투에서 대승을 거둘수 있었던 것도 묵주기도를 통한 성모님의 전구 덕분임을 깨닫습니다. 묵주기도 성월 10월, 묵주기도 많이 바치시기 바랍니다. 묵주는 천국에 들어가는 패스포드란 말도 있으니 늘 묵주는 소지하시기 바랍니다.
성모님 손잡고 천국문 입장하는데 수문장인 성 베드로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보고 듣고 말하지 못해도 감각은 마지막까지 살아있기에 마지막까지 손에 들고 할 수 있는 기도가 묵주기도입니다. 그래서 수도자들이 임종하면 손에 묵주를 쥐어주나 봅니다.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 또한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일흔 두제자들이 복음 선포의 사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귀환하자 감격에 넘쳐 감사기도를 바치는 주님이십니다. 당시 제자들은 주님께 그대로 기도도 보고 배웠을 것입니다.
일치의 중심이신 주님과 우정의 여정중인 우리들에게 기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기쁨에 벅차 자신들의 업적을 고백하는 일흔 두 제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은 그대로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대로 우리가 용기백배하여 더욱 기도할 의욕을 북돋우는 말씀입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는 권한을 주었다. 이제 아무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한다.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참으로 끊임없는 한결같은 간절한 기도로 주님과 날로 깊어지는 우정의 사람들인 우리를 세상 무엇도 해치지 못합니다. 세례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었음이 바로 참 기쁨의 원천임을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기쁨의 감격에 벅차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바치는 주님의 감사기도입니다. 다음 기도문은 공관복음에 전해오는 단 하나 예수님의 감사기도문입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바로 일흔 두 제자들은 물론 우리 모두가 겸손하고 순수한 영적 철부지들입니다. 주님의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 주셨다.” 라는 고백에서 아버지와 일치의 절정을 보여주니 이 또한 예수님의 깊은 기도의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이런 예수님과 우정을 깊이하는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절대적이겠는지요! 이어 제자들에게 주시는 행복 선언 역시 그대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눈이 있다고 다 보는 것이 아니요, 귀가 있다고 다 듣는 것이 아닙니다. 무지에 눈멀고, 무지에 귀먹으면 참으로 영적현실을 보지도 못하고 하느님의 말씀도 듣지 못합니다. 가을은 기도의 계절입니다. 끊임없이 한결같이 깨어 바치는 간절한 기도가 믿음을 더해주고 주님과의 우정을 깊이해주며 날로 마음의 눈을, 마음의 귀를 열어주고 밝게 해줍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의 행복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끝이 없습니다. 기도와 회개는 함께 갑니다. 잠시 기도와 회개의 삶에 소홀했다 하더라도 다음 제1독서 바룩서의 말씀에 용기백배 다시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아이들아, 용기를 내어라. 너희 마음이 하느님을 떠나 방황하였으나, 이제는 돌아서서 열 배로 열심히 그분을 찾아야 한다. 그러면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신 그분께서, 너희를 구원하시고, 너희에게 영원한 기쁨을 안겨 주시리라.”
그러니 날마다 끊임없는, 한결같은 기도와 회개로 열 배로 그분을 찾고 사랑하며 주님과 우정의 여정에 충실하시기 바랍니다. 저 또한 늦게 수도사제생활에 입문했기에 주님의 영원한 현역의 전사로서 몇배로 힘껏 살았고 지금도 여전히 이런 각오로 삽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과의 우정을 날로 깊게 해줍니다.
"하늘의 하느님을 찬양들 하라, 당신의 자비는 영원하시다."(시편136,26) 아멘.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루카10,20)
<묵주기도의 힘!>
오늘 복음(루카10,17-20)은 '예수님에 앞서 둘씩 짝지어 파견되었던 일흔두 제자가 돌아와 예수님께 보고하는 말씀'과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에 한 말씀'입니다.
일흔두 제자가 기뻐하며 돌아와 예수님께 말합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루카10,17)
열두 제자는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지 못했는데(루카9,40), 일흔두 제자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복종시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그들에게 이렇게 이르십니다.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루카10,20)
잠시 지나가는 이 세상에서 행해지는 우리의 영적인 움직임들이나 그에 따른 활동들, 곧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드러내는 것은 지금 여기에서 보상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음 너머에 있는 저 세상에서 보상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믿는 이들은 지금 여기에서 행해지는 칭찬 앞에서 겸손을 드러내려고, 교만으로 은총의 선물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오늘은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이 기념일은 1571년 10월 7일, 그리스도 연합군이 묵주기도를 통한 성모님의 간구로 하느님께서 함께하신 덕분에 이슬람 제국을 물리친 것(레판토 해전)을 계기로 제정된 기념일입니다.
레판토 해전의 승리는 성모님의 전구기도를 통해 이루어진 기적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어머니요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손을 꼭 잡고 바치는 기도인 묵주기도를 열심히 바칩니다.
그래서 저도 어디를 가든, 산책할 때나 등산을 할 때 항상 오른손에 묵주를 꼭 쥐고 묵주기도를 바칩니다.
'함께 해 봅시다!'
=====================
[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iVCbLRSHc4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루카 10, 20)
땅과 하늘은
사랑으로
단절되어 있지
않습니다.
실천적 기쁨이
최고의
기쁨입니다.
이름을
드러내지 않아도
드러나는
하느님 나라의
맑은 기쁨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쁨은 있어야 할
자리에 우리가
있어 주는
인내의 기쁨입니다.
고생 끝에
얻는 참기쁨이
있습니다.
기쁨으로
살게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만난 것이
가장 큰
삶의
기쁨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 나라를
보게되는
기쁨을 우리는
누립니다.
이름이라는
우리의 인격을
되찾아주십니다.
하늘의 길을
배우는
시간입니다.
헛되이 살았던
지난 시간을
반성합니다.
이름 속에
하늘의
첫 시작이
있습니다.
우리의
이름 위에
하늘이 있고
마음이 있고
실천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위하여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인격은 고유의
이름값을 하는
하느님 자녀들의
소중한 삶을
일컫습니다.
이름마저
버리고
하느님과
하나가 됩니다.
우리 이름이
하느님을
드러내는
기쁨이고
실천이길
기도드립니다.
아버지의
선하신 뜻은
우리의 이름인
인격으로
전달됩니다.
모든 인격은
하느님 나라를
향합니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