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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프와 젖꼭지-나 다니던 초등학교, 사창가에 있었다/구광렬
1
창근이네 집에는 누나들이 많았다 난 녀석의 친누나들이라 믿었고 그녀들, 더운 날에도 짙은 화장을 했다 마당 한가운데 뽐뿌 물에 등목을 할 양이면 토종참외만 한 유방들이 덜렁거렸는데, 사이사이 돈을 다발로 끼워줘도 그 꼭지만은 못 빨게 했는지 팥알만 한 것들, 갓 잡은 암다랑어 속살보다 붉었다
어린애가 보기에도 어린애 같던 계집들. 비싼 울음을 싸게 파느니 싼 웃음을 비싸게 팔겠다는 듯, 사이사이 신음 아래 깔깔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아껴놓은 눈물방울들, 세상이 양껏 울음 울 수 있을 방을 주고 열쇠를 줄 때까지 젖꼭지에 매달아 놓겠다는 듯, 봄비맞은 앵두알처럼 뽐뿌 아래서만 반짝였다
2
그럼에도 창근이 아버진 서예가였다 색색거리는 소릴 듣고도 붓 흔들림이 없었다
마당에선 일 끝난 누나가 뽐뿌질을 하고, 어린 우린 안방기둥을 잡고선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외치고, 창근이 어머닌 숱 빠진 사리빗자루를 들고선 ‘장사 망친다’ 후려치고…… 하지만 창근이 아버진 결코 떨리지 않는 손으로 한 획 한 획, 정성스레 그었다
술래잡기 끝나고 털레털레 집으로 돌아온 난, 펌프 물속 그 젖꼭지들이 하 삼삼해, 밤새 엄니의 소 안창살보다 더 검은 젓꼭지를 눈으로 가져가다가, 뺨 싸대기를 얻어맞았다
화분과 화분 사이/구광렬
해 뜰 무렵엔 인도가 원산지인 벤자민이 한국의 춘란을 넘어 브라질이 원산지인 부겐빌레아의 꽃분에까지 그림자를 드리우고, 해 질 무렵엔 아프리카가 원산지인 떡깔고무나무가 중국의 관음죽을 넘어 부겐빌레아, 춘란, 벤자민의 꽃분에까지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림자가 있는 낮에는 1.
그림자가 없는 밤에는 0.
그 사이를 지나다 보면
스위치가 있는 듯 연결과 단절을 느낀다
하지만 발 묶인 자의 희망, 그리움을 ‘이다’, ‘아니다’만으로 나타낼 순 없는 일. 무엇보다 지구의 대척점에 고향을 둔 나무들이 같은 시각에 떠오르는 태양 앞에서 그들의 키만큼만 그림자를 드리울 수 있다면, 잔인하다
벤자민, 부겐빌레아, 춘란, 떡깔고무나무, 관음죽. 사이사이 공용어는 손짓이다 서로를 향해 이파리를 뻗음으로써 그림자 없는 밤에도 1, 연결을 넘어 연대를 꿈꾼다
건전 이발소/구광렬
머리를 깎는 동안 이발사는 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딸이 농협에 취직했다, 휘발유보다 경유가
더 비싸지겠다, 보일러가 터졌다 하지만 이야기의 반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벽에 걸린 그림 때문이었다
어미 개와 강아지 열 마리를 그리고 있는, 한 화가를 그린 그림이었다 그중 한 마리가 캔버스 밖으로 발을
내밀어, 그림 속 화가에게 건네고 있었다 그림 속 그림의 강아지의 웃음, 그림 속 화가의 웃음, 그림 밖 내
웃음이 삐거덕거리지 않고 번져나갔다 그제야, 자신의 말을 건성으로 들었다는 걸 안 이발사, 웃었다
밖으로 나오니, 함박눈이 내렸다 건너 성당의 마리아상 속눈썹에까지 쌓일 기세였다 공원놀이터가 보이고,
빈 그네 위에 흰 눈이 쌓이고, 고요한 밤, 소시민을 위한 밤이 될 듯했다 단지, 머리카락을 잘랐을 뿐이건만
뇌수술을 받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담벼락에 주차되어있는 내 디젤 짚을 보는 순간, 20년 된
보일러가 떠오르고, 10년 째 취직 못하는 아들놈이 떠올랐다 그렇게 풍경은 그림이 되고 있었지만, 난 그림
밖에 있었다
정녕 그 그림을 그린 화가도 웃었을까 시동을 걸기도 전에, 그림 속 강아지 발이 그리웠다
[ 구광렬 시인의 프로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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