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신궁(朝鮮神宮)
1. 조선신궁(朝鮮神宮)
일본은 일제강점기 한국 식민지배의 상징 가운데 하나로 각 지역에 관폐대사(국가에서 폐백을 올리는 신사)를 세웠다. 일본은 조선신사의 건립을 통해 영구적인 식민지 제국 통치가 무탈하게 이어지기를 기원했다. 이를 위한 수단에는 식민 통치를 받는 백성에 대한 ‘정신 세뇌’만큼 확실하고 손쉬운 방법은 없었다.
일본의 잔인한 민족말살 정책은 이른바 ‘식민지 조선의 수호신’이라는 교묘한 핑계 뒤에 숨어서 집행됐다. 1920년부터 일제가 세운 한반도 내 신사의 수가 1945년에는 모두 82개에 달했다. 면 단위의 작은 규모 신사도 1062곳이나 됐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은 조선인으로 하여금 학교나 가정까지 작은 신단을 만들어 참배하도록 강제했다. 조선의 국토와 백성의 정신은 날이 갈수록 망가져 갔다. 이제는 흔적으로만 남은 일제강점기 조선 신궁의 치욕스러운 역사를 짚었다.
남산 한 가운데 일본이 세운 '신궁'
남산 북서쪽 사면에 대규모로 들어섰던 조선신궁(현재 남산 식물원 일대)의 전경. <한겨레> 자료 사진
오늘로부터 99년 전인 1919년 7월 18일, 일본은 남산의 조선신궁(1925년 6월 27일에 개칭) 창립을 공표했다. 가장 높은 사격을 가진 신사인 ‘신궁’의 자리로 경성(서울)의 남산을 낙점한 것이다.
일제는 1920년 본격적인 조선신궁 건설 착공을 시작해 1925년까지 5년여의 공사 기간 끝에 이를 완공한다. 총 43만 평(약 142만4000㎡) 남산 부지에 수백개의 돌계단과 함께 무려 15개의 건물을 꽂아 넣었다. 조선신궁이 완공된 직후 나온 잡지 기사를 보면 당시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완공 직후의 경성역(서울역) 내부 플랫폼과 화물창고 모습.
왼쪽 멀리 남산에 일제가 만든 남산신궁의 모습이 보인다. <한겨레> 자료 사진.
신축의 경성(서울)역을 지나 남대문을 들어서노라면 우변 남산성지에 신작로가 통하고 우문이 있고 석계가 있고 올라가서는 한양공원 터에 대소 건물이 굉장히 놓였나니 이것이 조선신궁이라는 것이다. 총공비 2,064,800원의 국고금으로 전후 5개년 4월에 준공되어 (중략) 까닥하면 불경죄에 걸리는 이렇게 존엄 차 무서운 곳이다.
- <개벽> 제64호 1925년 12월 1일 치
한국 최초의 종합잡지 <개벽>은 1925년 12월 1일 ‘경성은 일 년 간 얼마나 변했나?’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잡지를 보면, 일본이 한양공원 터(현재의 남산공원)에 건설한 조선 신궁으로 인해 남산 전역이 일본적 색채가 농후한 공간으로 탈바꿈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아울러 경성 시내 한가운데 자리 잡은 신궁이 식민지배 아래의 조선인들이 일본에 대한 공포감을 느끼는 상징물이 되었다는 것도 역시 알 수 있다.
이 상쾌한 청신한 바람과 조망이 조흔 곳을 구하려면 반듯이 올라오기까지의 고난을 지나야 된다는 수도자의 고행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이 시원한 터에, 노송도 정자도 벗나무도 모두 자취없이 사라지고 그 대신 신궁건축의 공사가 벌어져서 흙차가 (중략) 이곳 저곳에는 다듬지 아니한 석재가 쌓여 있어서 정서도 흥취도 피난해 도망간지 오래였다. 한양공원은, 공원으로의 생명은 죽은 후였다.
- <개벽> 제26호 1922년 8월 1일 치
남산 조선신궁과 층계. 앞쪽 긴 건물은 서울역(경성역).
1925년 6월 27일 일제는 ‘조선신사’를 ‘조선신궁’으로 개칭해 매년 10월 17일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조선인들에게도 강제로 이곳에서 참배하도록 강요했다. 조선신궁 건립 이전의 신사가 대체로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을 위한 공간이었다면. 조선신궁 건립 이후 신사는 본격적으로 조선인들을 일본인화하기 위한 동화의 장치로 활용됐다.
일본은 인격신 천황제에 대한 숭배를 바탕으로 식민지 ‘동화주의’의 구현을 이루고자 했다. ‘주민의 동화’는 신도 신앙을 공통분모로 삼아 신사참배를 하는 일본인과 그렇지 않은 조선인의 차이를 허물게 했다. 이는 일본인과 조선인 모두를 천황제 제국의 ‘충성스런 신민’으로 만드는 작업이었다.
실제 일본 총독부의 ‘동화주의’ 정책은 신궁 건립을 계기로 본격화했다. 일본은 조선신궁의 건설 준비가 한창이던 1915년을 계기로 일반 신사에 대한 정비 및 종교에 대한 규칙도 완비했다. 이후 ‘동화주의’ 정책은 1932년 ‘정신교화’ 운동의 강화로, 1935년부터는 ‘심전개발’ 운동으로 구체화하여 나타났다.
1929년 조선총독부는 서울 경복궁 안마당에서 조선박람회를 개최해 조선왕조를 우롱하며 식민지배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당시 조선 8도에서 모여든 박람회 관광객에게 개화한 경성의 근대상을 보여주며 자연스레 자신들의 지배를 합리화한 것이다. 박람회 당시 제작된 일종의 관광 가이드인 이 지도에는 행사가 열린 경복궁 일대와 남산의 조선신궁은 강조돼 자세히 그려져 있는 반면, 수많은 독립지사들이 목숨을 잃은 서대문형무소는 나와 있지조차 않고 있다.
총독부는 종교계 전반에 대한 탄압, 신사의 설립과 신사 신앙의 적극 장려, 신사참배 강요 등으로 정책을 전개했다. 그 결과 1930년대 중반에는 신사와 신궁의 설립이 크게 늘어나고 신사에서 주관하는 행사와 신사 참배자 수도 급증하게 되었다. 이는 전국적인 차원에서 관찰되는 현상이었다.
이러한 신사체제의 강화는 주민 일상생활에서 국가 신도의 의례적 실천에 대한 강요로도 이어졌다. 신사참배는 대개 집단적으로 이뤄졌는데, 특히 학생들이 주요한 동원 대상이었다.
일제강점기 중학생이던 재일 통일운동가인 정경모씨는 당시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이 왔소이다. 배속장교 우두머리가 교장 이하 전 교원과 천여명의 전교생을 인솔하고, 나팔을 불면서 남산 꼭대기로 행진해 가지 않겠소이까. 드디어 전원이 신궁 앞에 정렬하고 늘어서자 “사이코케리레이”(최고의 예우 경례) 구령이 떨어지더군요. 만일 절을 안 한다면 그땐 나뿐만 아니라 집안 식구 모두가 잡혀 들어가는 판 아니겠소이까. 무섭습디다. 정말 무서웠어요. 얼떨결에 자세가 무너지면서 허리를 굽혔소이다. 그 순간 어린 소년의 넋이 산산조각이 난 것이지요.
- 재일 통일운동가 정경모 <한겨레> 2009년 5월 19일 치
일제 말기 조선신궁 참배는 주민들의 ‘일상’이 되었는데, 특히 학생들의 경우에는 수시로 단체 참배가 강제되기도 했다.
일본, ‘스스로’ 신사를 허물다
서울시와 서울역사박물관이 서울 한양도성 회현자락 부지내 발굴조사 현장에서 개최한 설명회에서 연구진이 조선신궁의 여러 건물 중 가장 큰 '배전'의 콘크리트 기초와 기둥자리 등과 옛 성곽 자락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조선신궁은 일제가 한국인들의 민족 정체성을 탈색하기 위해 1920년 지었으며 조선총독부, 통감관저, 일본공사관, 헌병사령부의 중심점 역할을 하다가 1945년 일본이 패전국이 되고 나서 사라졌다. 신소영 기자
남산의 조선신궁은 1945년 태평양전쟁이 끝난 직후 파괴된다. 특이한 점은 일본인 스스로 신사를 해체, 소각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혼란 속에서도 자신들의 신성한 신을 ‘스스로 하늘로 돌려보낸다’는 원칙을 잊지 않고 집행했다.
8월 16일부터 시작된 조선신궁 해체 작업은 약 2달여의 작업을 거쳐 10월 6일 모두 마무리됐다. 일본은 신궁 내 각종 신물 등은 일본으로 보내고, 남은 시설은 소각했다.
당시 남산의 조선신궁이 아닌 지방의 신사로 쓰이던 곳들도 모두 조선인들에 의해 철거됐다. 해방 직후 파괴된 신사 및 신궁의 건수는 모두 136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는 행정관청에 대한 습격보다도 많았고, 경찰관서에 대한 습격 건수인 149건에 육박하는 숫자였다.
이로 인해 당시 조선인들에게 신사가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이자, 강한 적개심을 갖는 대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71년 해방 후 조선신궁이 헐린 자리에 남산 식물원, 동물원, 분수대 등이 조성됐다. 분수대 뒤로 지금은 서울시교육연구원으로 바뀐 '어린이회관'과 옛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보인다. 1970년 한옥으로 지었던 기념관은 2010년 현대식 건물로 새로 단장해 재개관했다.
이후 1970년 10월 남산의 옛 조선신궁의 자리에는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건립됐다. 일제의 국가신도의 성지에 일제에 맞선 독립운동가의 기념관을 앉힌 것도 일제의 강권통치 아래 피식민의 내면에 축적돼온 적개심과 반감 정서를 엿볼 수 있다.
현재 당시 신사는 창원시 마산합포구의 제일 여고와 대구 달성공원 등에서 희미한 흔적만 찾아 볼 수 있다.
[출처] 강민진 한겨레신문 기자 :<역사속의 오늘> / 한겨레신문, 2018. 7.18.
남산의 조선신궁의 원경
조선신궁 朝鮮神宮
社格: 官幣大社, 祭神:天照大神 明治天皇, 位置: 京城府 南山, 列格年:大正 8년7월18일(1919년),
創立年: 大正 8년 7월 18일, 鎭座年: 大正 14년 10월 15일
총독부 청사만큼이나 우리 기억에서 잊혀진 것이 바로 남산의 '조선신궁'이다. 조선신궁은 남산 중턱 안중근의사기념관 바로 윗편 분수대 일대에 있었다. 일제는 서울시내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바로 이곳에 조선신궁을 짓고, 어린 학생들은 물론 일반시민들에게도 이곳을 참배토록 강요하였던 것이다. 그건 조선(한국)사람들에게 일본제국주의의 정신을 주입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조 이후로 남산은 한국인에게 신령스런 산으로 여겨져 왔다. 태조 3년(1394년), 한양(서울)에 도읍을 정한 이성계는 북악산을 주산(主山) 삼고는 한양을 병풍처럼 막아주는 남산을 도읍지의 거대한 방패로 여겼다. 1396년, 남산에 목멱대왕의 신사(神祠)를 세우고 이후 성산(聖山)으로 여겼는데, 이는 남산을 안산(案山)으로서의 위용을 갖추려 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남산은 조선왕조의 개국정신이 깃든 유서깊은 곳이라고 하겠다
1910년 조선을 집어삼킨 일제는 조선을 영구통치할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 증좌 가운데 하나가 무려 11년에 걸쳐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은 점이다. 또 창씨개명이나 일본어 사용 등을 강요한 점도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남산에 조선신궁을 세운 것도 바로 그런 맥락에서 비롯했다고 하겠다.
일제가 남산에 신사(神社)를 세운 것은 1910년 한일병탄(倂呑) 직후부터 이다. 1940년 조선통독부가 펴낸 <시정(始政) 30년사>에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대정(大正) 원년, 1912년부터 이곳에 조선신사 건립을 시작했다. 이 해 총독부는 조선신사 조영(造營) 준비비로 별도의 예산을 책정했으며, 그로부터 3년 뒤인 1914년에는 준비조사를 마쳤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면 조선신사(朝鮮神社) 건립 장소는 어디로 결정되었을까? 그 당시에는 구체적인 장소를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표현이 있다.. “반도의 중앙에 위치하여 명치성대(明治聖代)로부터 가장 관계가 깊은 경성부 내의 정지(淨地)를 선정하여 신역(神域)으로 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말은 결국 신사 건립 대상지로 남산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얘기이다. 총독부는 1920년 5월 27일 남산에서 신사 건립 기공식을 가졌다. 5년간의 공사를 거쳐 마침내 1925년 10월 신사 준공식을 가졌는데, 공사비가 무려 156만 4852엔에 달할 정도로 당시로선 대역사였던 것이다. (* 총독부는 1925년 6월 27일자로 ‘조선신사’를 ‘조선신궁’으로 개칭했다.)
조선신궁 평면도. 붉은 원 순서대로 위에서부터 상(上)광장, 중(中)광장, 하(下)광장임
1920년대에 발행된 경성유람지도의 일부분으로 사진 중앙에 조선신궁의 모습이 보인다.
조선신궁 평면도(朝鮮神宮 平面圖)
조선신궁 조감도(朝鮮神宮 造監圖)
조선신궁 조감도(朝鮮神宮 造監圖)는 조선신궁을 입체적으로 표현한 그림으로 좌우가 축약됐지만 남산 능선에 자리잡은 그 거대한 규모를 알 수 있다. 그림 하단 중앙에 숭례문 2층 문루가 보이고 그림 우측에서 좌측으로 참배경로를 잘 보여주고 있다.
성곽이 있었을 남산능선을 중광장까지 완만하게 깍고 성벽처럼 축대를 쌓아올려 거대한 토목공사로 조선신궁이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남산 정상 쪽에서 내려다본 조선신궁 전경. 멀리 경성역(서울역)과 철도가 보인다
상광장(上廣場)의 조선신궁의 중심 건물인 배전 모습. 뒤로 남산의 바위벽이 둘러쳐져 있다
참궁신도로(參宮新道路) 계단
남대문 옆에 세워진 조선신궁 안내 석등. 이 옆으로 전차가 다녔다
전언에 따르면, 서울역에서 출발해 시청 쪽으로 다니던 전차가 이곳을 지날 무렵이면 차장이 전차를 세우고 승객들에게 조선신궁을 향해 묵념을 하도록 했다고도 한다. 기독교 신자들 가운데는 이곳 신궁 참배를 거부하다가 목숨을 잃은 분도 여럿 있다.
참궁신도로(參宮新道路)
남대문에서 조선신궁 참배를 위하여 올라가는 길의 모습
경성의 시가 간선도로인 남대문통에서 분기되어 하광장(下廣場)에 이르는 돌계단을 오르면 다시 중(中)광장, 상(上)광장을 거쳐 사지(社地)에 도착한다. 남대문통 분기점에서 하광장까지 연장 278간(약 500.5m), 폭 10간(약 18m)로 차도와 보도로 구획되어 가로수를 심어두었다.
하광장, 중광장 사이의 돌계단은 화강석조로 연장 127간 5분, 계단폭은 4간(약 229.5m×7.2m)으로 양측 각각 폭 2간(약 3.6m)은 잔디를 심은 경사면으로 합쳐서 폭이 8간(약 14.4m)이다. 계단은 발딛는 곳 1척 1촌 5분, 계단 한단의 높이 4촌 3분(약 35cm×13cm)으로 50단을 1연(一連)으로 7연이 있고 각 연 사이에 15척(약 4.5m, 10평)의 계단참을 설치하였다.
그곳 양쪽에 설치된 등롱은 문무관(文武官) 및 각 도(道) 또 경성부의 헌등으로 매일 밤 불을 밝혔다. 어른은 한번에 두 계단을 오를수 있었다. 그리고 계단의 경사도 매우 완만하여 노인과 여자 모두 즐겁게 올랐다. 정상에서 내려다보아도 조금도 두려운 느낌이 없었다.
공사는 용산 오도조(五島組)에 청부하였다. 청부금은 61,480원이고 석재는 모두 관급(官給)으로 동대문 밖의 채석장에서 11,718절(切)의 화강석을 베어냈다. 이 가격이 8,441원이었기에 결국 이 대석단의 총공사비는 69,921원으로 대체로 거의 7만원의 의미였다. 기공은 본년(1924년) 6월 23일이고 완공은 내년(1925년) 6월 17일이었으나 금년내에 돌계단만은 전부 끝낼 예정이었다.
참궁신도로(參宮新道路)는 숭례문에서 하참도에 이르는 완만히 정비된 도로로써 참궁로, 참배로라고 불렀다. 숭례문에서 하광장까지 연장 278간(약 500.5m), 폭 10간(약 18m)로 차도와 보도로 구획되어 가로수를 심어두었다. 식민지배의 위용을 맘껏 누리는 듯 참배로가 남산으로 거칠 것 없이 치고 올라가는 광경이다.
도로 좌우의 일본식 건물이 밀집해 있는 것으로 보아 남산일대는일본인 주거지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도로 오른쪽면이 성곽길로 보이는데 중간에 도로가 굽어지는 곳의 축대에 성돌이 보인다.그 굽어지는 부분 아래를 가로질러 지금은 퇴계로길이 나있다.
토목부의 건축과 당국자는 "내년에 어천좌(御遷座)는 충분히 시간에 맞출 예정이고 남대문에서의 10간 도로를 새로 만들고 돌계단 앞에는 약 1천평의 광장을 만들 것이다. 계단의 입구에는 철근 콘크리트 폭 5간의 대조거(大鳥居), 대등롱(大燈籠), 사호표(社號標) 등을 만들 예정이다. 계단 입구의 22계단은 특별히 폭을 12간으로 할 예정이다. 중광장에 접하는 12계단, 하광장에 접하는 폭 12간(약 21.6m)의 계단 22계단을 합쳐서 384계단이다.
돌계단을 올라서면 1,600평의 대광장이 나타난다. 그곳은 왜성대 방향의 이참도(裏參道-동참도)에서 온 자동차 등도 알맞게 오를 수 있는 곳이다. 그곳에 도시락 등을 취급하는 자그만한 찻집을 만들 예정이다. 찻집은 신사의 비용으로 만들어 경영은 누군가에게 맡길 것으로 생각한다.
원래 계단이라는 것은 계단의 숫자가 많고 적은 것으로 편안하거나 위험한 것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고 그 경사 상태가 중요하다.
일본에서 가장 높은 돌계단은 첫째로 구능산(久能山의 동조궁東照宮)의 9백계단(1,159계단), 다음은 금평(琴平-香川県仲多度郡琴平町金刀羅宮の石段)의 6백계단(785계단,奥の奥社まで1368段) 등으로 금평은 매우 편안했다. 교토 풍국신사(京都 豊國神社)의 아미타봉(阿彌陀峰)의 3백계단(565계단)은 매우 경사가 급하였고, 도쿄 애탕신사(東京 愛宕神社)의 돌계단은 90계단(86段、傾斜角度37度) 정도이지만 매우 오르기 어렵다.
조선신궁의 돌계단은 보통보다도 경사가 매우 완만해 한 계단의 높이도 보통은 5촌 또는 6촌인데 겨우 4촌 3분(약 13cm)에 불과했다. 폭도 1척 1촌 5분(약 35cm) 이어서 오르기가 쉬웠다. 노인과 여자 모두에게도 위험은 없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돌계단은 조선명소의 하나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남산공원을 자주 오르내리곤 했었지만 일제시대 때의 일은 전혀 생각을 못했던 것이 사실이었으며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난 일도 아니었건만 조선신궁이 있었다는 과거는 우리 모두들 잊고 사는 이야기 속의 일이 된것 같아 보였다.
애써 그 자료을 찾아 과거의 사실을 뒤적여 보았더니 누구도 찾지 않은 듯 했고 조용히 숨어있었다. 조선신궁으로 오르는 남산에 가로놓였던 예전의 그 계단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현재의 힐튼 호텔 앞에서 시작되어 백범광장 부근까지 이어졌던 계단은 그 간 여러차례의 공사와 새로이 생긴 계단으로 인해 어디에 있었는지 도대체 알 수 없을 정도로 혼란만 가중시켰다.
하광장(下廣場)
신궁 참배 후 사호석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는 학생들
일제가 패망하던 1945년에는 무려 1141개의 신사가 조선 전역에 세워졌다.수많은 조선인들이 참배를 강요당하였고 정신적으로 일본 신민화의 길을 걸었다. 일제가 신사를 세우고 참배를 강요한 목적이 정신적 일본 신민화였다.일제는 조선뿐 아니라 중국이나 타이완같은 나라에도 정책적으로 신사를 세웠고 타국민에게도 강제로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조선신궁을 참배하고 나오는 일본군
추운 겨울 몸빼바지와 교복을 입은 여고생들이 한껏 폼을 잡고 기록을 남긴다.
서울역 건너편 힐튼 호텔에서 시작해서 길 건너 계단을 이용해서 남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어린이 놀이터와 백범광장, 안중근기념관, 교육과학연구원(옛 어린이회관), 그리고 분수대가 있는 남산공원으로 이어진다. 이 영역은 일제시대 건립한 조선신궁(朝鮮神宮)이 자리하던 영역이다. 지금 이곳에는 일제 시설에 대한 어떠한 표시도 남겨놓지 않고 여러 동상들과 비문들을 비롯한 국가의 기호들이 과잉으로 들어앉아 있다. 다만 계단의 배치와 지형이 주는 느낌을 통해서 일제가 그들의 성소를 만들기 위해 산을 깎아 마련한 공간이라는 어렴풋한 느낌만을 받을 뿐이다.
하광장의 대석단(大石段)
관폐대사조선신궁(官弊大社朝鮮神宮)라고 쓰인 대석단(大石段)이 하광장에 설치되어 있다. 국가가 관리하는 신사로 격이 높음을 표시하고 있는 대석단 뒤로 중광장에 오르는 계단에 여러 조형물들이 설치되어 있다. 힐튼호텔 앞 삼거리 근처에 있었던 사호석(社號石). '관폐대사 조선신궁'이라고 적혀 있다
한편 하광장에서 나눠져서 남쪽을 우회하여 주차장 아래 터널(현재의 남산 과학교육원 아래 계단이 있는 곳 부근)을 통과하여 동참도와 합치게 한 길을 서참도(西參道)라 하였고 폭은 터널내에서는 4간 나머지는 3간이며 연장 412간 8분이었다.(774.04m×7.2m<5.4m>)
왜성대공원 원래 조선총독부 앞(숭의여자대학교 부근)에서 구 한양공원에 이르는 산책길을 자연 지형에 맞게 개수하여 중광장에 이르는 길을 동참도(東參道)라 불렀으며 폭 4간 연장 589간이었다.(1,062.2m×7.2m) 동,서참도는 차마(車馬-차량과 마차)도 다닐 수 있다. 터널이 있던 위의 중광장은 흙을 돋우어 평탄하게 만들었던 곳 같았으며 해방 후 여러차례의 공사로 인해 원래 상태로 되돌려진 듯한 모습같았다.
관폐대사조선신궁(官弊大社朝鮮神宮)라고 쓰인 대석단(大石段)이 하광장에 설치되어 있다. 국가가 관리하는 신사로 격이 높음을 표시하고 있는 대석단 뒤로 중광장에 오르는 계단에 여러 조형물들이 설치되어 있다.
계단은 넓은 34개의 계단 위로 50계단씩 7번이 설치되어 총 384개의 계단을 설치하고 등롱(燈籠, 가로등)이 계단 옆으로 설치되어 각 도와 경성부, 문무관의 헌등이 매일 밤 불을 밝히고 계단 입구에 조선에서 제일 큰 도오리(鳥居)가 직경 1.1m에 가로세로 8m 규모의 인조석으로 장대하게 자리잡고 있다
조선신궁 어진좌제 당시 배전 앞 석계 앞의 제등실 총독과 부인
위 사진은 서울역 철도와 만리동이 바라보이는 조선신궁의 모습이고, 아래 사진은 제3대 조선총독인 사이토 마코토가 동부인하여 1925년 조선신궁 진좌제 당일에 배전으로 올라가는 모습이다. 사이토 총독이 조선신궁으로 참배하러 가던 참도가 시작되는 장소가 며칠 전 복구공사를 마치고 새 단장을 한 숭례문 앞이었다.
당시에는 숭례문 바로 옆에 "관폐대사 조선신궁참도"라는 거대한 비가 있었고 숭례문부터 남산 조선신궁까지 참도가 잘 닦아져 있었다.
관폐대사는 일본신사 중에서 가장 사격이 높은 곳을 말한다. 조선신궁 외에 부여군 부여읍에서 조영 중이던 부여신궁도 사격이 관폐대사여서 조선의 관폐대사는 두 곳이었다. 부여 신궁의 창립년은 소화 14년 6월 15일이었고 완공을 못하고 종전을 맞았다. 부여신궁의 祭神은 應神天皇. 齊明天皇. 天智天皇.神功皇后였다.
1945년 일본에 현존하는 신사 중에 관폐대사는 66개소, 관폐중사는 68개소, 관폐소사는 5개소였다. 조선에는 관폐대사만 2 곳 있었고 관폐중사와 관폐소사는 한 곳도 없었다. 관폐(官幣)라는 사격 아래에 국폐(國幣)라는 사격이 있고 도공(道供)이나 읍공(邑供)은 그보다 더 아래 사격이다.
기록에 의하면 1868년 조선에는 일본신사가 이미 2 곳이나 있었다. 이후 일본신사는 계속 늘어나서 1900년에는 7 곳, 1910년에는 40 곳에 이른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할 때 조선에는 1141 곳의 크고 작은 일본의 침략신사가 세워졌다.
社格으로 구분하면, 관폐대사가 2 곳, 국폐소사가 8 곳, 神社가 69 곳, 작은 규모의 神祠가 1062 곳, 모두 1141 곳이다. 신사가 있던 곳의 면소재지와 설립년월일까지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명치 1868~1912 / 대정 1912~1926 / 소화 1926~1989
일본 각료와 의원들의 신사참배로 최근 국제적 관심의 촛점이 됐던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는 명치유신을 위해 목숨을 바친 3,588명을 제사지내기 위해 1869년에 세워진 도쿄초혼사(東京招魂社)로 창건되었다.
그후 1879년에 국가를 위해 순국한 자를 기념한다는 의미를 가진 야스쿠니신사로 개칭된 신사이다. 제신은 250만 명에 이르고 여자도 6만 명에 달한다.
1945년 이전까지 육해군성 소속의 특수신사로서 천황숭배와 군국주의 보급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야스쿠니신사는 일본이 제국주의로 발돋음하고 침략신사를 점령국에 세워나가는 출발점이기도 했다.
유럽의 기독교와 중동의 이슬람교는 국가가 전쟁 수행을 할 때 국민과 병사들을 단결시키는 중요한 구심점 역할을 했다. 고려도 몽골과 수십 년 전쟁을 치를 때 불교가 구심점이 되었다.
불교국가였던 일본은 신사참배를 통해 천황과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단합을 이끌어내고 저항하는 식민지 백성들을 세뇌하고 순화시켰다. 일본의 침략신사는 조선을 비롯하여 만주와 중국, 타이완, 남양군도 등 일본군이 진주했던 여러 지역에 상당수 세워졌다.
중광장 (中廣場)
중광장 전경
조선신궁의 높은 계단을 힘겹게 올라서면 나타나는 중광장은 가로 38간 2분, 세로 39간 8분(약 68.76m×71.64m)로 면적이 1,520평 4홉이다. 하광장과의 높이 차가 172척(약 52.12m)으로 마당에 자갈이 깔려있다.
주위는 울타리(荒垣)가 둘러쌓였고 주차장(馬場) 정면 입구에는 안내판(制札), 제1등롱(燈籠) 및 제1조거(鳥居-도리이)를 세워두었다. 주차장은 폭 8간 5분, 길이 46간 2분(약 15.3m×83.16m)로서 상광장과 연결되었다.
동・서참도가 만나서 이 광장에 도달한다. 울타리 밖에 경찰관 출장소 및 휴게소가 있다. 왼편 아래로 서울역이 내려다 보인다.
제1조거는 높이 28척(약 8.48m), 기둥 사이의 거리 21척 3촌(약 6.45m), 기둥 직경 2척 7촌(약 82cm)으로 화강석으로 만들었다. 각 부재는 모두 하나(一本)로서 기둥은 땅을 파서 세웠고 콘크리트로 기초를 견고하게 했다. 제1등롱 1대(對-쌍)는 높이 17척(약 5.15m)로 화강석으로 만들었다.
계단을 올라 배전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도리이와 그 뒤로 남산 능선이 보인다
사진의 제찰에는 '신역오조(神域五條)'라는 제목으로 청정을 유지할 것, 화기를 주의할 것, 건물을 더럽히지 말 것, 수목을 베어내지 말 것, 날짐승을 애호할 것이라며 1925년(대정 14)10월 게시한 글이 적혀있었다.
하였다. 일반참배자에게는 상광장, 황족의 하승은 제3조거 아래에 있었다
경찰 출장소
경찰관출장소는 가로 21척, 세로 12척(약 6.4m×3.6m), 처마 평균 높이가 11척(약 3.33m)의 맛배집(切妻造)로 건평이 7평이다. 대기소(詰所)・휴게실・세면대 등을 구비한 목조건물로 동・서참도가 만나서 주차장으로 올라가는 비탈길에 있어 건물 아래에 허리 높이로 경사지게 돌을 쌓았다.
오른쪽에 입구로 올라가는 계단을 설치했다. 나무판자를 세워 벽을 삼았고 유리 창문을 한쪽으로 설치했다. 조선신궁 경찰관출장소란 간판이 있다. 상부는 진벽(眞壁)이고 기와지붕이다.
남산정 휴게소
휴게소 남산정은 가로 54척, 세로 21척(약 16.4m×6.4m), 처마 높이 9척 3촌(약 2.8m)로 건평이 35.61평의 목조 팔작집(入母屋造)이다. 휴게실 출입구 위에 구리판으로 만든 차양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차양을 받치는 세 개의 나무 기둥 가운데 것에 남산정이란 간판을 달아놓았다. 휴게실(토방 및 다다미방 각 1)・매점・조리장・온돌거실・욕실・곳간(物置) 등을 구비했으며 진벽에 기와지붕이다.
남산정 내부 다다미방에서 내려다 보이는 경성시가가 한 눈에 들어와 잠시 피로를 풀기에 충분했다. 나무사이로 보일락 말락한 흰 건물이 총독부 신청사이며 왼편 준령은 북한산이다.
제1조거는 높이 28척(약 8.48m), 기둥 사이의 거리 21척 3촌(약 6.45m), 기둥 직경 2척 7촌(약 82cm)으로 화강석으로 만들었다. 각 부재는 모두 하나(一本)로서 기둥은 땅을 파서 세웠고 콘크리트로 기초를 견고하게 했다. 제1등롱 1대(對-쌍)는 높이 17척(약 5.15m)로 화강석으로 만들었다.
세월이 흘러 건물은 이미 자취를 찾을 수 없으며 뒤로 보이는 남산 정상에 지금은 서울타워가 들어서 있으나 산의 곡선은 그 당시와 크게 변함이 없다.
상광장(上廣場)
상광장은 가로 26간(약 46.8m), 세로 31간 5분(약 56.7m)으로 면적은 819평이다. 서북쪽 두 곳은 울타리(荒垣)로 막았고 북쪽에 참집소(參集所) 정면에 타고온 것에서 내리라는 안내판(下乘札) 및 제2등롱이 있다. 전면에 자갈을 깔았다. 남쪽에 접속하는 면적 1,041여평은 사무소 부지로써 칙사전・사무소 및 부속건물이 있다.
신부수찰수여소(神符守札授與所)는 정면 19척 2촌(약 5.82m), 측면 14척 4촌(약 4.36m), 처마높이 12척 5촌(약 3.78m)으로 건평이 7.68평이다. 맞배집 각진 기둥의 건물이다. 벽은 외부에는 판자를 붙였다. 내부는 나무에 회반죽을 칠했다.(木摺漆喰塗) 도연천정(棹緣天井). 다다미가 깔렸으며 출입구는 미닫이 판자 문이다. 창(窓)은 종이, 유리 그리고 무량호 등의 장지를 적절한 장소에 만들었다. 신부수여대를 붙이고 지붕은 작은 동판 지붕으로 요소에 금 도금 또는 검은색 쇠장식을 붙였다. 비 떨어지는 곳은 사반석(四半石-정사각형 돌을 비스듬히 까는 방식)을 깔았다.
수수사(手水舍)는 신부수찰수여소와 상대하여 있으며 화강석의 대수반(大水盤)에는 정수(淨水)가 항상 넘쳤다. 건평은 4평이었다. 이 물은 하광장에서 전기 펌프에 의해 본전 뒤 산 위 저수지에 올려진 것을 끌어서 쓰는 것이었다. 경내에 있는 수도는 전부 이 저수지로부터 공급이 되었다.
칙사관(勅社館)과 사무소(社務所)
칙사관(勅社館)은 귀빈이 머무는 장소이거나 참배를 주재하는 자들이 머물던 시설로 보이며 사무소(社務所)는 조선신궁을 관리하던 시설로 보인다.
제기고(祭器庫)
제기고(祭器庫)는 정면 25척 2촌 5분(약 7.65m), 측면 19척 5분(약 5.77m), 처마 높이 16척 5촌 8분(약 5.02m)으로 건평이 15.11평으로 차양(向拜)이 붙어있음. 교창조(校倉造-각재나 삼각재를 우물 井자형으로 짜올려서 지은 창고)를 본뜬 내화구조로 맞배지붕이다.
벽은 연와조이고 외부는 가로 눈금이 착색된 몰탈을 칠했다. 내부는 흰 회반죽을 칠했다. 바깥 지붕 및 마루는 철근 콘크리트이며 천정은 콘크리트 하단에 흰 회반죽을 칠했다. 마루는 판자를 붙였고, 마루 아래는 바람이 통할 수 있게 했다.
마루 받침(床束) 및 계단은 석조(石造). 창 및 입구는 외부에 회반죽을 칠했다. 두터운 흙벽 건물의 문 내부에 철망을 쳤다. 위의 지붕은 목조 작은 동판 지붕이다. 비 떨어지는 곳은 사반석을 깔았다.
칙사전(勅社館)
칙사전은 건평 49.13평으로 처마 높이가 16척 8촌 5분(약 5.1m)의 팔작집(入母屋造)이다. 차 세우는 곳(車寄)・현관・칙사간(上段構)・큰방・수행원의 간・의관을 갖추는 곳(衣紋室)・목욕실・변소 등을 구비했다. 벽은 허리 높이까지는 벽돌을 쌓았다. 외부는 판석(板石)을 세워 붙였다. 상부는 진벽에 안료를 섞지 않은 회반죽을 칠했다.(眞壁白漆喰塗) 내부의 칙사간과 큰 방은 도배를 하였다. 기타는 진벽에 회반죽을 칠했다. 천정은 칙사간은 작은 격자무늬 천정. 큰 방은 격자무늬 천정. 기타는 원협천정(猿頰天井)이다. 모두 상부는 방한용 야(野)천정을 붙였다.
마루는 실내. 다다미를 깔았고 서까래 옆 및 복도 아래는 판자를 붙인 위에 조선 돛자리를 깔았다. 모두 방한의 이중 마루였다. 지붕은 판자가 휘지 않도록 댄 띳장에 기와 지붕을 걸쳤다. 현관 앞 차 대는 곳은 곡선 박공 기와 지붕. 창호는 외부는 유리장지, 내부는 종이장지로 만들었다. 서까래 옆은 외부는 유리가 있는 덧문이고 내부는 유리장지로 만들었다. 난방설비는 모두 개스 난로를 사용했다.
사무소는 건평 133.73평으로 처마 높이 16척 3촌(약 4.98m)의 팔작집이다. 차기(車寄)・현관(玄關)・궁사실(宮司室)・사무실(社務室)・응접실(應接室)・숙직실(宿直室)・소사실(小使室)・수위실(守衛室)・참롱실(參籠室)・신부조제실(神符調製室)・결재소(潔齋所)・취사장(炊事場)・탕비장(湯沸場)・난방용기관실(煖房用汽罐室)・변소(便所) 등을 구비했다.
외부 벽은 허리 아랫부분에 판석을 세워 붙였고(腰板石竪張) 기타는 진벽에 하얀회반죽을 칠했다. 천정은 원협(猿頰)천정 또는 도연(棹緣)천정이다.
궁사실
사무실
방한구조로서 마루는 궁사실, 사무실, 응접실 및 현관은 코르크 타일을 붙였고 기타 각 실은 다다미 수와 관계없이 방한2중 마루로 했다.(疊數何れも防寒二重床床) 지붕은 띳장 기와지붕(棧瓦葺)이다. 차기는 반박공 기와지붕(反破風瓦葺)이다. 창호는 옆으로 돌아가는 유리장지 이중(側廻硝子障子二重建) 또는 외부는 유리장지였다.
내부는 종이장지로 만들었다. 방의 칸막이는 판자(板襖)였다. 무량호(無良戶), 편면(片面), 오(襖), 지첩장지(紙帖障子) 등으로 난방설비는 사무실을 도는 온수장치로 하고, 참롱실은 개스난로를 사용했다. 참롱소는 동(棟)을 달리하여 사무소 뒤에 계속되었다.
조선과 건축 23권(13집 4호)에 조선신궁 사무소 증축공사개요가 나온다. 사무소 증축으로 목조 평가건축으로 31.25평 증축으로 나와있다. 전등, 전화, 벨을 설비했다. 난방은 온수난방 다운피드 일관식이다. 위생장치는 수세식으로 정화조는 옥외에 만들었다. 궁사실 기타에 가구, 깔개, 커튼을 설비했다. 기공은 1933년(소화 8)이고 준공은 1934년(소화 9) 공사비가 총 15,500원 이었다.(땅 고르기, 수위 대기소 이전, 복도 증축 기타 각 부의 모양 바꾸기 등 일체의 공사비 포함)
참집소는 정면 60척(약 18.18m), 측면 24척(약 7.27m), 처마 높이 10척 7촌(약 3.24m)로 건평 40평의 맞배집으로 목조무대 건물이다.(木造舞臺建) 속주(束柱)는 석조, 벽은 허리높이로 돌아 내외 공히 나무 판자를 세워 붙였다.(腰廻內外共竪羽目板張) 총창(總窓). 상부는 진벽을 칠했다.(上部眞壁塗) 천정은 일부 회반죽을 칠하고 보가 보이게 그냥두었다.(漆喰塗化粧裏) 마루는 철근 콘크리트로 했다. 기와지붕에 입구에는 허리 높이에 유리 창문(腰高硝子戶). 미닫이창으로 만들었다(窓引違硝子障子建).
사무소 광장의 앞에 만들었다. 제전의 시기에 참열원이 참집하는 곳으로 평상시는 참배자의 휴게소로 충당했다. 봉납되는 신문지의 열람 및 끓는 차 대접의 설비가 있었다. 또 결빙기에는 수수사(手水舍)로 사용하기 위해서 이곳에 물을 끓여 손을 씻는데 사용하게 제공했다.
정원사대기소(園丁詰所)는 정면 51척(약 15.4m), 측면 12척(약 3.64m), 처마높이 10척 1촌(약 3.06m)의 맞배집(切妻造)으로 건평이 17평이다. 벽은 허리 높이로 판자를 세워 붙였다. 상부는 진벽이고 지붕은 기와지붕이었다. 하승찰(下乘札)은 2기가 있었다. 높이 10척 4촌 5분(약 3.17m)으로 대는 화강석조이고 상부는 목조로
조선신궁(朝鮮神宮) 휴게소 남산정
상광장(上廣場)
사무소 앞 광장을 지나서 돌계단을 올라서면 높이 21척 6촌(약 6.54m), 기둥 사이 거리 15척 9촌(약 4.82m), 기둥 직경 2척1촌(약 0.64m)의 제2조거가 있다. 그 위의 하단은 가로 28간(약 50.4m), 세로 26간(약 46.8m)이고 이 밖에 제기고 부지가 이곳에 접속되어 있으며 합친 면적이 858평 2홉이다. 상중단과 동일하게 울타리로 둘러쌓여 있다. 남북에 상대하여 신부수찰 수여소(神符守札 授與所), 수수사(手水舍)가 있다. 신부수찰 수여소의 뒤에 제기고(祭器庫)가 있다.
상광장(上廣場)에서 바라본 배전.
앞의 계단은 현재 안중근의사 기념관 앞에서 분수대로 오르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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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신궁(朝鮮神宮) 휴게소 남산정
조선신궁(朝鮮神宮) 참궁신도로(參宮新道路)
참궁신도로(參宮新道路)는 숭례문에서 하참도에 이르는 완만히 정비된 도로로써 참궁로, 참배로라고 불렀다. 숭례문에서 하광장까지 연장 278간(약 500.5m), 폭 10간(약 18m)로 차도와 보도로 구획되어 가로수를 심어두었다. 식민지배의 위용을 맘껏 누리는 듯 참배로가 남산으로 거칠 것 없이 치고 올라가는 광경이다.
도로 좌우의 일본식 건물이 밀집해 있는 것으로 보아 남산일대는일본인 주거지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도로 오른쪽면이 성곽길로 보이는데 중간에 도로가 굽어지는 곳의 축대에 성돌이 보인다. 그 굽어지는 부분 아래를 가로질러 지금은 퇴계로길이 나있다.
조선신궁(朝鮮神宮)으로 올라오는 길. 오른쪽 빨간표기(숭례문)
조선신궁(朝鮮神宮)
일제는 침략에 의하여 식민지를 획득하거나 조차권 ·위임통치권 등을 얻으면 그 지역에 예외없이 관립 신사를 세우고 이를 총진수(總鎭守)라 하여 이를 중심으로 정신적 ·종교적 지배를 꾀하였다. 1910년 한국을 강점하게 된 일제는 조선총독부를 세우고 신사정책(神社政策)을 수립하여 각 지역에 관립신사를 세우고 기존의 일본 거류민들이 건립한 민간신사도 관공립화하여 지원하였다.
그들의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주입 도구로서 관립신사 설립계획을 추진하던 총독부는 1912년부터 조선신사(朝鮮神社) 설립 예산을 편성하여 이 일을 추진하였다.
설립 위치는 서울 남산의 한양공원(구 남산식물원 ·안중근의사기념관 ·남산도서관자리)으로 정하고, 여기에 들 제신(祭神)으로는 그들이 건국신화의 주신인 아마데라스 오미가미[天照大神]와 한국을 병탄하고 1912년에 죽은 메이지왕(明治王)으로 결정하였다.
수 년에 걸친 기초조사와 준비를 끝낸 총독부는 1918년 12월 16일 ‘조선신사 창립에 관한 청의(請議)’를 일본 내각에 제출하여 1919년 7월 18일자 일본 내각고시 제12호로 조선신사 창립을 확정 ·공포하였다.
그리하여 남산 한양공원 주위에 부지를 확보하여 1920년 5월 27일 지진제(地鎭祭)라는 기공식을 갖고 건립에 착수하였다. 총부지 127,900여 평 위에 총공사비 156만 4852엔을 들여 일본의 신사 건축양식에 따라 정전(正殿) ·배전(拜殿) ·신고(神庫) ·참배소(參拜所) 등 15개의 건물을 배치하고, 여기에 오르는 돌계단과 참도(參道)를 조성하였다.
공사가 마무리되어 가던 1925년 6월 27일 일본 내각고시에 의해 사격(社格)을 높여 신사의 명칭을 종래 조선신사에서 조선신궁으로 개칭하고, 신사에 둘 3종신기(三種神器)라는 상징물들을 일본에서 가져와 그해 10월 15일 진좌제(鎭座祭) 행사를 갖고 한국인들에게도 참배하도록 강요하였다.
1930년대 이후 일제의 참배 강요 압력이 증대됨에 따라 참배자도 격증하여 30년 38만 6807명에서 1942년에는 264만 8365명으로 늘어났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조선신궁은 이튿날 오후에 승신식(昇神式)이라는 폐쇄행사를 갖고 9월 7일부터 해체작업에 들어가 10월 6일까지 마무리하여 이튿날 나머지는 그들의 손으로 소각하고 철수하였다.
2. 경성신사 京城神社
社格: 國幣小社, 祭神: 天照大神 國魂大神 大己貴命 少彦名命, 位置: 京城府 倭城台,
鎭座年: 明治 31년 10월 3일 (1898년), 創立年: 大正 5년 5월 22일, 列格年: 昭和 11년8월1일
경성신사 京城神社
경복궁이 내려다 보이는 남산 북쪽 자락은 임진왜란 때 왜군이 주둔했던 장소라서 일제는 이곳의 지명을 왜성대라 했다. 숭의학교와 리라초등학교, KBS와 서울예전이 있던 자리다. 1898년 일제는 조선정벌의 상징인 이곳에서 경성신사의 진좌식을 거행한다.
그리고 1905년 제2차 을사조약을 통해 통감부 정치를 하기로 규정하고 1906년에는 이곳에서 개청식을 한다. 경성신사 바로 아래이다. 초대 통감은 1909년 '의병 참모중장' 안중근에 의해 조선 침략의 원흉, 동양평화의 교란자로 지목되어 사살된 이토 히로부미였다.
위 사진은 조선의 무관 복장을 한 사람들이 경성신사 大祭에 참석하러 가는 행렬 모습이다. 한일합방 전에 이미 조선은 병탄되어 있었다. 지금 한옥마을 자리에는 조선을 무력통치하던 헌병대 사령부가 있었고 주변에는 총독관저도 있었다.
극동빌딩 자리에 있던 일신국민학교는 일제 고위관리들의 자녀가 다니던 초등학교였다. 덕혜옹주도 가마를 타고 통학했었다 한다. 그 옛날 수세식 화장실과 스팀 난방시설이 있는 학교였다.
경성신사 내의 노기신사(乃木神社)
경성신사 경내에 있었던 노기신사(乃木神社)의 모습이다. 남산의 하늘선과 신사의 위치를 비교하면 어느 곳에 있었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는 1896년 제3대 타이완 총독을 지냈고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의 전쟁영웅이다. 해군의 도고라면 육군의 노기였던 사람이다.
명치천황이 죽자 부인과 함께 자결하여 충성을 나타냈고 이곳에서도 제신이 되었다. 노기신사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러일전쟁의 성격이 조선과 만주의 지배권을 놓고 러시아와 일본이 벌인 제국주의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신궁에는 명치를, 경성신사에는 노기를 제신으로 삼아 조선병탄을 기리고자 했던 것이다.
임진왜란의 일본 영웅인 가등청정을 제신으로 하는 가등신사(加藤神社)는 서울 용산구 榮町에 있었고 경성호국신사는 용산구 용산정에 있었는데, 용산구에는 일본군 사령부가 있었고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했기 때문이다.
지금의 남산원 자리에 있었던 노기신사의 흔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