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기전에...
정구(鄭逑, 1543년~1620년) 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 유학자, 철학자, 역사학자이자 임진왜란기 의병장입니다.
자(字)는 도가(道可), 가보(可父)이고 호는 한강(寒岡)·회연야인(檜淵野人), 본관은 청주(淸州), 시호는 문목(文穆)입니다.
한강 정구 선생은 서애 선조(1542년~1607년)보다 1년 연하지만 40년
지기이자 퇴계 이황의 동문 제자이십니다.
서애 선조가 1562년(21세)에 퇴계선생의 제자가 되었고 한강 정구 선생이 1563년(21세)에 퇴계선생의 제자가
되었으니 1563년부터~1607년까지 40년이 넘게 친구로써, 동문으로써 우정을 나누셨습니다.
한강선생의 선대는 조선의 개국공신이 되어 출사한 이래 조선의 고관을 배출한 가문으로 한양에서 살았으나 아버지
정사중은 낮은 직책인 부사맹을 지냈고, 부인 성주이씨와 혼인하면서 처가가 있는 경상북도 성주에 정착하였습니다.
그래서 한강선생은 1543년 7월 9일 경상북도 성주 유촌에서 태어났습니다.
청년기 남명 조식의 문하에 찾아가 성리학을 수학하다가 뒤에 퇴계 이황을 찾아가 그에게도 성리학을 수학하여,
영남학파의 양대 거두로부터 학문의 정통을 모두 계수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제자 중 말년에 얻은 제자, 허목은 현종, 숙종 때 남인(청남)의
당수이자 조선 후기 실학으로 이어지는 중간고리로
중요한 인물이 되었습니다.(앞서 올린 미수 허목 관련 글 참고)
그리고 ‘백호 윤휴’ 의
아버지 ‘윤호전’ 이 한강선생의 문인입니다.(‘윤휴’에게 한강선생의 사상이 많은 영향)
한강선생의 예학은 남인과 북인계 예학의
근간이 되었고 역시나 서인 예학의 근간인 김장생 학파와 대립합니다.
이 대립이 결국 훗날 '예송논쟁'에서 제자들의 대리전 양상으로 미수 허목선생이 송시열과 격렬하게 대립합니다.
한강 정구 Vs 김장생 → 한강의 제자 허목 선생 Vs 김장생의 제자
송시열
한강선생의 재미있는 일화는…
서애 선조와 마찬가지로 한강선생은 초당 허엽과 그의 아들인 교산 허균과도 교류하였습니다.
허균의 집에 책이 많았던 관계로 선생은 허균의 집에 들려 책을 여러권 빌려보곤 했습니다.
교산 허균에게 역사책인 《사강》을 빌려보고 10년이 넘도록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이에 허균은 선생에게 편지를
보내 "옛사람의
말에 빌려간 책은 언제나 되돌려주기는 더디다 했는데, 더디다는 말은
1년이나 2년을 가리키는 것입
니다. 《사강》을
빌려드린 지가 10년이 훨씬 넘었습니다. 되돌려주시기 바랍니다. 저도 벼슬할 뜻을 끊고 강릉으로
돌아가 그 책이나 읽으면서 소일하려고 감히 말씀 드립니다."라며 돌려주기를 독촉했습니다.
(당시에는 책 구하기가 어려우니 희귀본에 대한 집착이 당연히 강했겠지요.)
한강 정구 선생은 오랜 지우인 서애 선조의 죽음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에 잠기며 선생이 병환중임에도
서애선조에 대한 애도의 시 2수와 제문(祭文) 2편을 그의 저서 한강집(寒岡集)에 남깁니다.
(전 개인적으로 만사 2수 중 두번째 시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명문'이라 생각합니다.)
한강집(寒岡集) 제1권 - 만사(挽詞)
류서애(柳西厓)의 죽음을 애도한 만사 2수
경연에 있을 당시 으뜸가는 인물로서 / 經幄當年第一人
근세에 유례없는 군신 간의 의기투합 / 風雲際會近無倫
안정 이룰 계책으로 나라를 보전하고 / 安危至計存邦國
선은 권장 악은 말려 대신들 본보기라 / 獻替訏謨聳搢紳
대궐 안의 재상으로 청아하기 산림이요 / 館閣淸如巖壑相
임천에 처한 몸이 근심한 게 묘당일레 / 林泉憂是廟堂身
두 편의 남긴 차자 충정을 담았으니 / 兩篇遺箚輸丹悃
느꺼운 눈물 성왕의 손수건을 적시리 / 感淚應沾聖王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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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서로 벗이 되어 사귄 세월 사십 년 / 傾盖如今四十年
높은 이름 큰 절의 옛날에도 유례없어 / 高名盛義已無前
벼슬하여 묘당에선 천하 걱정 앞섰고 / 廟堂曾見先憂切
물러나 초야에선 혼자의 낙 누렸다오 / 林壑飜成獨樂偏
공께선 병이 깊어 내 손 한번 못 잡았고 / 公病未能携我手
이 몸도 신병 앓아 공의 주검 못 보내니 / 我痾還阻送公阡
초가을 이날 이때 한없는 서러움에 / 新秋此日愁無限
늘그막의 눈물이 샘물마냥 떨어지네 / 衰淚難堪落似泉
한강집(寒岡集) 제12권 - 제문(祭文)
류서애(柳西厓) 성룡(成龍) 에 대한 제문 2편
아, 애통합니다. 생각하면, 지나간 정유년(1597, 선조30)
여름에 공과 서울에서 작별을 나누던 그 당시
공은 느긋하게 가슴속의 생각을 남김없이 드러냈는데 하나같이 모두 나라를 걱정하고 시사를 슬퍼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이후 덧없이 흘러간 세월이 11년이나 되었습니다. 공은 도성에 계실 적에도 오히려
나에게 안부를 물어왔으나 공이 남쪽 고향으로 오신 뒤로는 소식이 감감하였고, 중간에
겨우 한 차례
편지를 띄워 그리는 심정을 토로했을 뿐 멀리 떨어져 있어 서로 만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내가 이 고장에 부임하고 보니 공의 병세가 이미 위독해진 때였습니다.
공의 집을 찾아가
하룻밤을 묵으며 위문하기는 했으나 직접 얼굴을 보면서 손을 잡고 작별을 나누지는 못했는데, 공이
써서 나에게 넘겨준 몇 줄의 쪽지는 사연이 간곡하여 읽고 또 읽으며 감탄하면서 뭉클하게 일어나는
우정을 스스로 가눌 수 없었습니다. 그 뒤 두세 달 사이에 공의 심각한
병세를 걱정하지 않은 적이
없으면서도 한편 신명이 도와서 무사할 것이라고 축원해 마지않았는데, 어느
누가 나라의 불행이
갑자기 여기에 이를 줄을 알았겠습니까.
40년 동안 사귀어 온 관계가 이제 끝났습니다. 단아하고 정중한 의표와 단호하고 조용한 마음가짐,
정밀하고 용의주도한 식견과 깨끗하고 아름다운 행실을 이제는 다시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공께서 다시 한번 일어나 가슴에 쌓인 경륜을 남김없이 다 펴서 우리 백성이 그 혜택을 입게 했으면 하고
바란 것은 사실 조야 사람들의 다 같은 마음이었는데 끝내 이루지 못하고 말았으니, 저
푸른 하늘을 믿을
수 있다는 증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나라의 운수가 약해진 데 따른 슬픔이
더 지극하니 어찌 내 사적인
관계로 인한 슬픔만 있겠습니까.
지난날 이미 공의 마루에 올라가 정겨운 대화를 나누지 못했으면서 지금은 공의 궤연(几筵) 앞에서
절하며 변변찮은 제물을 흠향하시길 기원합니다. 주위를 둘러볼 때 외로움으로
일어나는 슬프고 처량한
내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공의 영령이 계시거든 강림하여 이내 말을
들어주소서. 아, 애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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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공의 순결한 충성과 지극한 효성, 성대한 덕과 두터운 의리는 많은 사람의 이목에 깊이 젖어 있으며,
역사서에 그 내용이 기록되고 후학들이 모범으로 삼고 있으니, 어찌
굳이 선양하고 칭찬을 한 뒤에야
그런 줄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내가 이 고장에 부임했을 당시 때마침
공의 병세가 깊어져 있었습니다.
공은 병중에 내가 본 고을 수령으로 부임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말씀하기를, “아무개가
마침 이 고장에
왔으니 내 병이 혹시 나으면 봄이 돌아와 날씨가 따뜻할 때 서로 만나 우유 자적하게 시간을 보내는
즐거움이 있을 것이다.” 하셨으나 공의 소원이 이루어지기 전에 병세가
이미 위독해져 나로 하여금 겨우
문밖에서 한 차례 위문하는 정도에 그치게 하였고, 끝내는 공의 주검을
보살피게 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제 평소에 서로 사랑하던 의리와 늘그막에 감회가 많은
심정을 어디에 부칠 곳이 없게
됨으로써 마침내 천지간에 풀기 어려운 유감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공의 주검이 마루에 놓여 있을 적에 다시 한 번 전(奠)을 올리며 곡하는 정을 펴고픈 심정이
간절하였는데, 더구나 황천으로 영원히 돌아가는 지금 상여 줄을 잡고
보내 드리고픈 심정이 우리
사이의 지극한 정으로 볼 때 어찌 지극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내가
지병으로 신음하던 끝에 갑자기
위급한 증세가 일어나, 행여 관청에서 금방 죽음으로써 관리와 백성들로부터
수치를 사지나 않을까
두려운 나머지 퇴직을 비는 소장을 재차 올렸는데, 아직 파직한다는
명이 내리지 않았습니다.
방 안에 엎드려 아픔에 시달리는데 온갖 병이 침범하여 제물을 올리는 것조차 몸소 행하지 못하고 장사를
치르는 장소에도 못 가니, 아픈 심정이 가슴을 저며 오장이 다 흔들립니다. 인간 세상에 유감스러운 일이
뭐가 이와 같은 게 있겠습니까. 정신만 아스라이 달려가니 눈물이
하염없이 흐릅니다. 공이시여,
영혼이 계시거든 이내 심정을 굽어살피소서.
[주] 류서애(柳西厓)에 대한 제문 : 류성룡(柳成龍)이 66세를 일기로 1607년(선조40) 5월 6일에
죽어 7월 7일 안동부(安東府) 서쪽 수동리(壽洞里)에 장사 지냈는데, 두 편의 제문 중에 앞의
글은 처음 부음을 듣고
지은 것이고 뒤의 글은 장사 치를 때 지은 것이다.
이때 정구는 안동 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로 재임 중이었다.
첫댓글 두 어른의 깊은 우정 짐작하게 합니다.
자료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