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류산(頭流山) 양단수(兩端水)를 예 듯고 이제 보니
도화(桃花) 뜬 맑은 물에 산영(山影)조차 잠겼어라
아희야 무릉(武陵)이 어디뇨 나는 옌가 하노라
조식(曹植, 1501~1572)
자는 건중(楗仲), 호는 남명(南溟), 시호는 문정(文貞),
성리학파로서 어려서부터 성리학을 공부하며 제자백가(諸子百家)에 통달해
이황 등에 의해 여러차례 벼슬이 내려졌으나 모두 사퇴하고
세도(世道)의 쇠상(衰喪)함과 인심이 허물어져 감을 탄식해 지리산에 들어가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이황과 함께 명성이 높았으며 광해군 때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남명집(南溟集)」, 가사 작품으로는 「남명가(南溟歌)」, 「권선지로가(勸善指路歌)」 등이 전해지고 있다.
- 뒷면에 새겨진 '추모비문' -
『산을 사랑했기에 산에 들어와 산을 가꾸며 산에 오르는 이의 길잡이가 되어 살다 산의 품에 안긴 이가 있다.
사람들이 일러 산사람이라 했던 그 분 우천 허만수님은
1916년 진주시 옥봉동 태생으로 일본 경도전문학교를 졸업했으며,
재학시 이미 산을 가까이 하고자 하는 열정이 유달랐던 분이다.
님은 산살이의 꿈을 이루고자 40여세에 지리산으로 들어와 가없는 신비에 기대 지내며 산을 찾는 이를 위해
등산로 지도를 만들어 나눠주기고 하고, 대피소나 이정표시판을 세우기도 하고,
인명구조에 필요한 데는 다리를 놓는 등
자연을 진실로 알고 사랑하는 이만이 해낼 수 있는 사람에 대한 사랑의 길을 개척해 보였다.
조난자를 찾아 헤매기 20여년, 조난 직전에 사람들을 구출하거나 목숨을 잃은 이의 시신을 찾아 집으로 돌려보내고
부상당한 사람들을 안전하게 옮겨 치료한 일 헤아릴 수 없으며,
지리산 발치의 고아들에게 식량을 대어주고, 걸인들에게 노자를 보태어 준 일 또한 이루 헤아릴 길 없으니,
위대한 자연에 위대한 품성 있음을 미루어 알게 되지 않는가.
님은 평소에 변함없는 산의 존엄성은 우리로 하여금 바른 인생관을 낳게 한다고 말한 대로 몸에 배인
산악인으로서의 모범을 보여 주었으니, 풀 한 포기, 돌 하나 훼손되는 것을 안타까워한 일이나,
산짐승을 잡아가는 사람에게 돈을 주고 되돌려 받아 방생 또는 매장한 일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그런데 어찌된 일이랴.
님은 1976년 6월 홀연히 산에서 그 모습을 감추었으니,
지리 영봉 그 천고의 신비에 하나로 통했음인가.
가까운 이들과 따님 덕임의 말을 들으면 숨을 거둔 곳이 칠선계곡일 것이라 하는 바,
마지막 님의 모습이 6월 계곡의 철쭉빛으로 피어오르는 듯하다.
이에 님의 정신과 행적을 잊지 않고 본받고자 이 자리 돌 하나 세워 오래 그 뜻을 이어가려 하는 바이다.』
- 옆면에는 '진주산악회 1980년 6월 8일 강희근 짓고, 이길성 쓰다' -
3.5㎞ 떨어진 홈바위에서 어떤 장수가 칼을 던져 꽂혔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있고,
풍수설에 따라 지리에 천왕이 있는데 장군이 칼을 들고 천왕을 호위하고 있어
군졸들도 그 영을 따라야 하므로 여기에 칼을 세운 것이라고 하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전하며
한 술 더 떠서 주위의 수목들이 군졸처럼 나열해 칼의 위력을 돋우고 천왕을 옹위하고 있다고도 한다.
마치 경계병이 망을 보고 있는 듯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망바위에 올라 사방의 풍광을 누리는 느낌도 독특하지만
개선문 이후의 컷들을 기대함서 오늘은 바위만 담고서 패쓰한다
고운 최선생 장구지소(孤雲 崔先生 杖屨之所)라 각자 되어있다.
고운 선생이 향적대를 향해 활을 쏘았다는데
이곳에서는 천왕남릉에 가려 향적대가 보이지 않는지라 가짜 문창대가 확실하다.
지리산 유람록을 처음으로 남긴 이륙(1438~1498)은 <유지리산록>에서
"법계사는 천왕봉과의 거리가 20여 리이다. 배 모양의 큰 바위가 있는데, 천왕강(天王舡)이라 부른다.
이 절에서 천왕봉 쪽으로 3, 4리쯤 되는 곳에 또 집처럼 생긴 큰 바위가 있는데, 수십 명이 들어앉을 수 있다.
이곳을 천불암(千佛菴)이라 부른다.
예로부터 세상을 피한 자들이 살던 곳으로, 부뚜막, 굴뚝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적고 있다.
정상석에서 천왕남릉 방향에 있는 일월대 각자는 '일출과 일몰, 월출과 월몰을 동시에 볼 수 있다는 곳'으로
상봉(上峯), 천주(天柱)와 더불어 천왕봉의 다른 이름이며,
아래와 같은 자료들이 전해진다
<1924, 강계형.두류록>
봉우리 남쪽은 일월대인데 오르면 일출의 출입을 볼 수 있어 그렇게 이름지은 것이며,
새로 새긴 대의 이름자는 크기가 팔뚝 만한데 정죽헌이 쓴 글씨이다
<1934, 김택술.두류산유록 下>
바위 위에는 “일월대(日月臺)”라고 세 글자가 새겨져 있다.
전후로 유람하러 온 사람들의 이름이 많이 쓰여져 있다.
혹은 부자가 이름을 함께 적었으며 심지어는 사대(四代)가 이름을 나란히 쓴 것도 있다.
족보와 같다고 할 수 있으니 이것은 일 벌이기를 좋아함이 지나치다.
<1940, 정덕영.방장산유행기>
조금 있으니 해가 지면서 저물려 하였다.
봉우리 아래에는 큰 바위가 옆으로 서 있고,
‘일월대(日月臺)’라는 세 글자가 새겨져 있었으며,
또 그 옆에는 판잣집이 있지만 이미 무너져서 묵기는 어려웠기 때문에 급하게 법계암을 향해 내려갔다.
<1964, 하종락.두류산동유록>
바위의 남쪽 면에는 ‘일월대(日月臺)’란 세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함양(咸陽)의 정(鄭) 아무개가 새긴 것이라고 하였으니 햇수가 아직 오래된 것은 아니었다.
[주지(州誌)]에는 “성모사(聖母祠)가 천왕봉 꼭대기에 있다.”고 실려 있지만, 살필 수가 없었다.
@ 현재의 행서(行書)체의 일월대(日月臺)를 새긴 사람은 정태현(鄭泰鉉,1858~1919)으로
각자 바로 옆에 이름이 새겨져 있으며,
죽헌(竹軒)은 정태현(鄭泰鉉, 1858~1919)의 호이다.
정태현은 일두 정여창의 14대 후손으로
대한제국기(1901년) 충북관찰사, 가선대부 등을 역임한 관료이다.
산 아래 사람들이 智異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라서 上峰이라고 부르는 천왕봉을
김종직(佔畢齋 金宗直)은 천주(天柱), 즉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이라고 했다.
거대한 지리에서 휘하 수많은 준봉들을 거느리고 하늘의 왕이라는 이름으로 우뚝하게 서있는
천왕봉을 수식하는 용어로서는 최고의 걸작이다.
1472년(성종 3년) 8월 보름에 함양고을의 원님으로 재직 중 지리산을 올랐던 김종직은
둘째 날 밤을 천왕봉에서 보내게 되는데
달을 완상하기에 좋은 중추가절임에도 일기가 좋지가 않아서
달을 보지 못하는 아쉬운 마음을 한편의 시로 남겼다.
시의 내용 중에 승유천주(勝遊天柱)"천주의 즐거운 놀이"라는 구절이 있다.
김종직이 말한 즐거운 놀이는 천왕봉에 떠오르는 달구경을 두고 한 뜻이겠다.
누구든지 한번 경험을 해 본 사람들은 평생을 잊지 못한다는 지리산 달밤의 운치를
즐거운 놀이라고 표현을 한 구절에 천주를 부각시킨 대목이 흥미를 끈다.
이후 <천주>라는 용어가 사람들 사이, 특히 지리산을 오른 선비들에 회자되면서
천왕봉을 하늘을 받드는 기둥으로 비유하는 문장가들이 선인들의 유산기 등 기록문집에 자주 보인다.
마침내 <천주>라는 글씨가 후세의 누군가에 의해 천왕봉의 바윗돌에 굵직한 서체의 각자로 남겨져
있어 보는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천왕봉의 위용을 느끼게 해준다
<하익범, 유두류록 1807년>
향적사 옛 터에 이르러 조금 쉬며 숨을 가다듬고 있자니 여섯 명의 남녀가 돌 위에 모여 앉아 있었다.
뭐하는 것이냐고 묻자 복을 구하는 행동이라고 한다.
능선을 따라 호구당(虎口堂) 역참에 이르는 길은 순탄한 길이었다.
고개에 올라 오 리쯤 가니 석문과 승운(昇雲) 사다리가 있었다.
벽을 기어올라 또 오 리를 가니 바로 천왕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