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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0. 묵상글 ( 사순 제1주간 화요일. - 잘하는 기도.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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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0. 사순 제1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잘하는 기도
“너희는 기도할 때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전에 몇 차례 얘기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제가 환갑이 되고,
사제 서품 30주년이 되던 해에 저의 삶을 돌아보게 되었지요.
그때 저는 제가 열심히 살았지만 잘 산 것은 아니라는 뼈아픈 성찰을 하였습니다.
엉뚱한 방향 또는 가야 할 방향과 정반대의 방향으로 열심히 간 것 같은,
그래서 오랫동안 그리고 멀리 잘못된 방향으로 간 것 같은 느낌이었지요.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기도하지 말라는 오늘 주님의 말씀도
같은 맥락처럼 제게는 느껴졌는데
기도를 많이 한다고 잘하는 것은 아니라는 면에서 말입니다.
기도한다고 오래 앉아 있었는데 기도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단호하고 엄밀하게 얘기할 때
빈말은 기도가 아닙니다.
말일 뿐이고 그것도 빈말이며
말 잔치일 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잘하는 기도입니까?
어쩌면 기도하지 않는 것이 잘하는 기도이고,
우리가 흔히 하는 기도를 하지 않는 것이 잘하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자기 말을 하느님께 막 쏟아놓습니다.
이것은 하느님과의 대화에서 내가 대화를 주도하는 것이며,
심한 경우는 내 말만 하고는 대화를 끝내는 겁니다.
이것은 또 이렇게 비유할 수도 있습니다.
걸어오는 전화는 받지 않고,
내가 필요한 경우에만 전화 걸고서는 내 말만 하고 끊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는 하지 않는 것이 잘하는 것이고,
하느님 말씀을 잘 듣는 것이 잘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독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과 비를 맞듯이
하느님 말씀을 그저 듣는 것입니다.
우선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그러고는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나이다.’ 하는 것이고,
듣고 나서는 그 말씀대로 실천하는 것이며,
아무 말도 들리지 않을 때도 그 침묵을 못 견뎌 하지 말고
가만히 주님의 현존 앞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자세는 또한 오늘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앞부분과 같은 자세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되어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길 빌고,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어 아버지의 뜻이 자기 안에서 이루어지길 비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청할 것이 있으면 청하는데
일용할 양식만 청할 것이 아니라
용서의 은총도 청하고,
궁극적으로 구원을 주십사고 청합니다.
말을 많이 하는 기도가 잘하는 기도가 아니라
말을 잘 듣는 기도가 잘하는 기도임을 묵상한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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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0. 사순 제1주간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많은 회사에서 직원 교육을 합니다. 저 역시도 코로나 팬데믹 전에는 많은 회사에서 특강 부탁을 받았습니다. 솔직히 저는 돈을 굴리는 법도 모르고, 회사 구조도 잘 모릅니다. 따라서 제가 하는 강의가 과연 도움이 될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회사에서 인성 교육을 해 달라고 했고, 자기 회사에 꼭 필요하다고 하십니다.
금융, 회계, 인사, 마케팅, 가격 책정 등의 인지적 기량 훈련을 받은 회사가 있고, 주도력, 자제력, 결의 등의 품성 기량 훈련을 받은 회사가 있습니다. 이 두 회사 중에서 어느 회사의 교육 효과가 더 컸을까요? 이 교육은 똑같이 5일 정도에 걸쳐서 이루어졌는데, 그 후 2년에 걸쳐 회사 수익이 평균 30% 증가한 회사가 있었습니다.
업무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인지적 기량 훈련을 받은 회사가 아니라, 품성 기량 훈련을 받은 회사였습니다. 품성 기량 훈련을 통해 훨씬 많은 창의적 아이디어를 창출할 수 있었고, 더 많은 신제품을 선포였다고 합니다. 또한 어떤 어려움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문제의 해결을 향해 적극적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세상 것을 통해서만 이 세상 안에서 더 잘 살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습니다. 세상에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은 사랑이지만, 이 사랑을 예수님께서 강조하셨고, 실제로 이 사랑에 집중하며 사는 사람이 더 행복하게 또 현명하게 지금을 살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은 하느님 나라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 삶에서도 꼭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큰 사랑으로, 하느님의 계획에 잘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인간이 하느님과 맺어야 하는 단순하면서 친밀한 관계를 드러내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에서 실행하기 어려운 것이 하나 나옵니다. 바로 다른 사람을 먼저 용서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하느님의 용서를 받으려면 우리가 먼저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했습니다. 모욕받았음에도 용서해야 한다는 사실이 자존심도 상하고, 상대방이 나를 우습게 볼 것 같은 의구심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용서하지 않는 삶이 얼마나 지금을 힘들게 살 수밖에 없는지를 잘 아실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과 함께하고 굳게 믿기에 그분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용서라는 사랑 실천이 지금 삶을 더 충실하게 살 수 있는 기틀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더 힘차게 살 수 있게 됩니다. 행복이 멀리 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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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사람은 사랑받기보다 이해받기를 원한다(조지 오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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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0. 사순 제1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
우리는 <재의 수요일>에, 자선과 기도와 단식을 통해 타인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숨어계신 아버지 하느님 앞에 의로움을 드러내라는 말씀을 들으면서 사순절을 시작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그 말씀에 이어지는 장면입니다. 곧 기도를 통한 의로움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기도할 때 ~빈말을 되풀이 하지 마라”(마태 6,7)고 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고 말씀하시면서 말입니다.
그러니, 기도는 아버지께 대한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무엇보다도, “아빠, 아버지” 면전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아빠, 아버지”를 향하는 벌어지는 일입니다. “아빠, 아버지” 라 부르는 자녀로서 말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심으로써, 당신의 영광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곧 인간인 저희를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고귀한 지위에 들어 올리십니다. 아버지의 아들인 당신의 반열에 들게 하십니다. 곧 우리를 하느님 되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너희는 신이며, 모두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다.”(시편 82,2)라는 시편작가의 노래를 실현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특전을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을 통하여 받았습니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는 이 엄청난 영예를 선사받음으로써, 동시에 자녀로서의 삶이 소명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리하여, 아들로서의 삶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이 빛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바라는 나라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바라시는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일이 됩니다. 그 일은 다름 아닌, 아버지께서 생명의 빵으로 선사하신 당신 아드님 그리스도를 “일용할 양식”으로 삼아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일이신 “용서”하는 일을 저희도 하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 어떤 시련이나 “유혹”이나 “악”에서도 자신이 스스로 구원자가 되려 하지 않고 아버지께 의탁하여, 자신의 힘으로 그것을 벗어나려 하는 것이 아니라 빛이신 아버지께 신뢰를 두며, 그것을 제거해 달라거나 없애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이 ‘아버지’를 향하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오늘도 우리가 가야 하는 길은 오로지 ‘자녀’로서, ‘아버지의 뜻’을 따라 ‘아들의 길’을 가는 일입니다.
주님! 길이신 주님을 찬미하며, 아빠 아버지를 찬양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
아빠, 아버지!
무엇을 청해야 할지를 알게 하소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소서.
진정 바라야 할 것을 바라게 하소서.
알아야 할 바를 알게 하시고,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하게 하소서.
어떤 상황에서나, 무슨 일에서나, 아버지를 향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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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0. 사순 제1주간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기도한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누군가가 기도해 준다고 하면 마음의 위로를 받습니다. 본인은 기도에 소홀히 하면서도 남에게는 기도해 준다고 말하고 또 기도해 달라고 청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기왕 기도할 바에야 효과 있는 기도, 올바른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저 입으로 하는 기도가 아니라 되는 기도, 열매를 맺는 기도를 하길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6,7-8).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청하기도 전에 알고 계신다니 청하는 바가 하느님 마음에 드는 것인지를 먼저 살펴야 합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기도의 본질적 요소는 많이 생각하는 데에 있지 않고, 많이 사랑하는 데 있다. 기도란 사랑의 행위 외에 다른 아무 것도 아니다.”고 하였습니다. 더 많이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 마음을 잘 살아가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이고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사랑함으로써 사랑 자체인 하느님과 잘 통할 수 있습니다.
많은 분이 묵주기도, 9일 기도, 15기도, 33일 봉헌기도,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 등등 성인 성녀들이 즐겨 봉헌하였던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 기도에 따르는 삶의 쇄신과 실천 없이 목표한 바를 채우기에 급급해하면서 꼭 들어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기도는 사랑으로 가득 차 있을수록 그만큼 더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나의 뜻을 관철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봉헌하는 일이요, 그분의 뜻을 알고 행하는 것입니다.
루이 에블린은 “사람에게 비는 하느님”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고 열심히 공덕을 쌓고, 많은 것을 청하지만 실제로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구원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기를 빌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먼저, 더 많이, 더 깊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한상봉). 그러므로 구하기도 전에 우리의 뱃속까지 환히 꿰뚫어 보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때때로 기도가 들어주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 이사야서 말씀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시온은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고 말하였지.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49,15). 들어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직 때가 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14,14). 그러나 “결코 의심하는 일 없이 믿음을 가지고 청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주님에게서 아무것도 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야고 1,6-7). 나보다 나를 더 환히 아시고 필요한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채워주시는 하느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원하는 때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주시지 않고 더 좋은 것을 당신께서 주시고자 하는 때 당신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주심을 믿습니다. 그때를 인내로 기다립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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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0. 사순 제1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호사유피 인사유명(虎死留皮 人死留名)’이란 말이 있습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뜻입니다. 댈러스에 이름을 남긴 사람이 누군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J F K'로 기억되는 케네디 대통령입니다. 제가 있던 뉴욕의 허브 공항 이름도 ’J F K' 공항입니다. 케네디 대통령은 이곳 댈러스에서 1963년 11월 22일 리무진에 타고 있던 중 리 하비 오스월드에게 암살당하고 말았습니다. 47세의 나이였습니다. 저는 1963년에 태어나서 가브리엘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은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그의 업적과 인생은 잘 모르지만 그가 남긴 취임 연설은 기억납니다. 영어 교재에 있었습니다. “Ask not what your country can do for you. Ask what you can do for your country.(조국이 당신을 위해서 무엇을 해 줄 것인가를 요구하지 말고, 당신이 조국을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시오.)” 예수님께서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라고 하셨던 것처럼 발상의 전환을 떠올리게 하는 문장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 비와 눈은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우리 신앙인들이 남겨야 할 것은 무엇인지 생각합니다. 저는 ‘자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비와 눈이 생명을 살리듯이, 우리는 가진 것을 나누면서 어려운 이웃을 도와야 합니다. 선을 베푸는 집안에는 반드시 좋은 일이 생긴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낯선 손님을 따뜻하게 환대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사악을 주셨습니다. 시렙다의 과부는 엘리야에게 구운 빵을 대접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시렙다 과부를 가뭄에서 구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선을 베푼 사람들은 마지막 날에 하느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어떻게 기도할 것인지 알려 주셨습니다. 교회는 그 기도를 ‘주님의 기도’라고 이야기합니다. 예루살렘의 올리브산에는 ‘주님의 기도’ 경당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각 나라의 언어로 기록된 ‘주님의 기도’가 있습니다. 물론 한국어로 기록된 주님의 기도도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몇 가지 청원이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빛나기를 청합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기를 청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청합니다. 오늘 일용할 양식을 주시기를 청합니다. 우리가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유혹에 빠지지 말고, 악에서 구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청해야 할 것이 있다고 하시면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도 용서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용서는 분쟁과 갈등을 푸는 열쇠입니다. 용서는 화해와 일치로 향하는 내비게이션입니다. 용서는 평화와 사랑으로 넘어가는 다리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정말 아름다운 청원의 기도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들의 마음을 깨끗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이웃에 실천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거울을 보는 것처럼, 기도를 열심히 한다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더욱 많은 사랑을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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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0. 사순 제1주간 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은 주님의 기도를 제자들에게 알려주시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어떤 기도보다 많이 바칩니다. 많이 바친다고 해서 형식적으로 바치거나 기계처럼 외우는 것은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모습으로 옳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강론은 주님의 기도를 바치기 전에 우리가 해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나누고 싶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기도를 바치기 전에 가져야 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하느님은 벌써 알고 계신다는 믿음입니다.
당장 내가 필요한데 하느님께 구하지 않겠습니까? 달라고 조르지 않겠습니까? 그 상황에서 어떻게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시라고 기도하겠습니까? 내 뜻으로 가득 차 있는데 말입니다. 어떻게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내시라고 하며 나의 자리를 하느님께 내어드리겠습니까? 내 안에 나로 가득 차 있는데 말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비우는 작업이 필요한 것입니다. 내 안에 내가 바라는 것을 비워내고 주님의 기도를 봉헌해야 합니다. 내 안에 내가 없을 때 주님의 기도는 그 힘을 발휘할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를 비움으로 봉헌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님의 은총이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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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겁다는 건 살아있다는 것
차디찬 어느 겨울날
사람 없는 한적한 곳 벤치에 앉았습니다.
이곳저곳
앙상하고 마른 가지뿐입니다.
그 가지들을 보고 있자니 더 추워졌습니다.
갑자기 김 모락모락 나는 호빵을 먹고 싶어졌습니다.
속 깊은 그 안까지 뜨끈뜨끈한 호빵 말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앙상하고 마른 가지 안은 여전히 뜨겁다는 생각 말입니다.
겉은 말라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따뜻한 봄날을 위해
아주 뜨겁게 준비하고 있다는 생각 말입니다.
그때부터 살아있는 가지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삶에 겨울 같은 차디찬 시기를 맞이한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우리가 앙상하게 보인다고 하더라도
괜찮습니다.
우리 안은 뜨겁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직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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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0. 사순 제1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기도
“기도와 회개, 그리고 사랑”
-기도가 궁극의 답이다-
“내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니,
내 입에 찬미가 항상 있으리라.”(시편34,2)
찬미의 기쁨으로 살아가는 기도의 사람들이 참으로 멋지고 아름다운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입니다. 믿는 이들의 모두가 기도이며 기도가 모두의 답입니다. 부패나 변질되지 않은 한결같은 발효인생, 사랑의 삶도 기도를 통해 가능합니다. 끊임없는 기도, 끊임없는 회개와 더불어 늘 한결같은 향기로운 사랑입니다. 어제 수도원을 방문했던 형수님께 들은 “러브스토리(love story)”가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얼마전 방문했던 베리굿 피부과 병원에 관한 일화입니다. 의사분과 함께 일하던 친절한 자매 모두가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고 부부처럼 생각되었는데 어제 알게 된 두분의 러브스토리에 감동했습니다. 두분 다 20대 성당에서 교리교사로 함께 일하며 결혼까지 계획한 사이였는데 남자 의사분의 모친의 반대로 무산되어 둘다 헤어져 따로 홀자 살게 되었고 반대하던 남자분의 모친이 세상을 떠나자 수소문하여 그때까지 혼자 살던 연인이었던 여자분을 찾아 둘다 나이 50에 결혼했다는 순애보(純愛譜) 일화였습니다.
“베리굿(Very good)” 병원 명칭 그대로 베리굿 사랑이요 베리굿 인생인 두분께 축복하는 마음 가득했습니다. 한결같은 기도와 함께 가는 회개와 사랑입니다. 베리굿 인생, 베리굿 사랑을 원하십니까? 기도하십시오. 기도가 답입니다. 마침 방문하여 집무실을 정리해주던 형수님이 손잡이가 떨어져 불구가 된 자그맣고 예쁜 연푸른색 컵을 버릴까 하기에 만류했습니다.
“놔 두십시오. 20년 이상 강론집과 시집을 복사 제본하며 함께 해 오던 어느 자매가 선물한 컵인데 그 자매님은 지금 병고로 인해 이런 컵 상태와 흡사합니다. 애틋한 마음, 고마운 마음, 사랑하는 마음, 기도하는 마음으로 끝까지 간직하고 이용하려 합니다.”
사실 저는 평생 살아있는 동안 매일미사를 봉헌해드리기로 내심 결정하여 실행하고 있는 고마운 분들이 여러분 있습니다. 세월 흘러 나이들어가니 저를 포함해 주변에 온통 아픈 분들이고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분들 소식도 자주 듣습니다.
몸은 서서히 무너져도 정신은, 마음은, 영혼은, 끝까지 한결같이 초롱초롱 맑고 밝게 빛날 때 정말 건강한 삶이요 이렇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파도 아프지 않은 것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정신건강, 마음건강, 영혼건강이 으뜸이고 답은 기도와 사랑뿐입니다. 문득 제 창안의 팬티끈과 팬티천의 일화도 생각납니다.
“팬티끈이 영혼이라며 팬티천은 육신입니다. 팬티끈 영혼이 넘치는 희망, 기쁨, 감사로 튼튼하면 팬티천 육신은 좀 낡고 떨어져도 끝까지 입을 수 있지만 팬티끈 영혼이 늘어지거나 끊어지면 그 좋은 육신의 팬티천도 무용지물이 됩니다. 그러니 육신한테 끌려가지 말고 튼튼한 영혼이 주도하여 육신을 추스리고 다독이며 끌고 가도록 하십시오.”
튼튼한 팬티끈 영혼에는 기도가 답입니다. 기도는 사랑입니다. 기도를 잘하는 유일한 방법은 사랑뿐입니다. 기도는 테크닉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기도는 삶입니다. 기도와 삶은 하나이며 함께 갑니다. 기도하는 대로 살고 사는 대로 기도합니다. 기도없는 삶은 상상이 안됩니다. 나중 남는 얼굴도 기도한 사랑의 얼굴인지 그렇지 않은 얼굴인지 둘중 하나일 것입니다. 주님도 나중에 우리 ‘마음의 얼굴’을 검사할 것입니다. 과연 끊임없이, 한결같이 기도한 당신을 닮은 ‘사랑의 얼굴’인지 말입니다.
오늘 말씀은 기도에 관한 귀한 가르침입니다. 기도는 짧고 순수해야 합니다. 빈말을 되풀이하는 것은 하나도 도움이 안됩니다. 사실 삶이 진실하고 간절하면 기도도 말도 글도 행위도 군더더기가 없고 단순하고 순수하기 마련입니다. 주님은 말을 많이해야 들어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보다 우리보다 더 잘 우리를 아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잘 아시는데 왜 기도하는가? 내가 아쉬워서 기도합니다. 기도할 때에 정말 무엇이 필요한지 알게 되고 날로 주님을 닮아 참나가 되고 이런 참나를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참나의 발견이 참기쁨이요 참행복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필요한 것은 오직 “하느님” 한분 뿐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더불어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은 사랑의 기도뿐임을, 하느님 한분뿐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기도의 힘, 사랑의 힘, 말씀의 힘은 그대로 하느님의 힙입니다. 바로 제1독서 아름다운 말씀은 그대로 말씀의 힘, 하느님의 힘을 상징합니다. 어느 것 하나 생략할 수 없어 전문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이처럼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
그대로 대지를 촉촉이 적시는 봄비같은 말씀이며, 이런 말씀의 힘은 그대로 하느님의 힘이 됩니다. 요즘 간혹 내리는 봄비를 보면 20여년전 써놓은 봄비라는 자작 애송시도 생각납니다.
“마음을 촉촉이 적시는
봄비!
내 딸 아이 하나 있다면
이름은 무조건
‘봄비’로 하겠다”-2005.3
기도중의 기도가, 봄비같은 기도가, 말씀이 바로 오늘 복음의 주님의 기도입니다. 우리 삶의 본질적 요소가 그대로 담긴 예수님의 진실하고 단순하고 가난한 삶이 요약된 기도입니다. 이 기도대로 살면 예수님을 닮아 참사람이 됩니다. 참으로 우리의 가난을, 겸손을, 감사를 깨닫고 배우게 하는 기도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도, 참사람이 되는 답도 주님의 기도에 달렸습니다. 평생 기도해도 영원한 초보자임을 깨닫게 하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전반부 셋은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나라, 아버지의 뜻, 즉 하느님 중심의 청원기도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을 한 아버지로 둔 한 가족의 형제들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교회를 어머니로 둔 우리는 모두 한가족의 형제들입니다. 그래서 저는 “어머니 은혜” 동요를 부를 때 마다 어머니 교회를 생각하며 어머니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 감사하는 마음으로 부르곤 합니다.
전반부 셋의 하느님 중심의 삶에 대한 청원과 더불어 후반부 넷은 일상의 삶에서 본질적 필요한 넷의 청원입니다. 즉 일용할 양식을, 용서를, 유혹에 빠지지 않기를, 악에서 구함 받기를 청원하는 것입니다. 말그대로 간절하고 항구한 청원입니다. 모든 원하는 것을 청원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필요한 것들의 청원입니다.
100% 하느님 손에 달린 듯이 기도하고 100% 내 손에 달린 듯이 노력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은총과 노력의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일방적으로 일하도록 맡기는 무책임한 삶이 아니라 청원과 더불어 적극적인 협력의 삶이 절대적이라는 것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내일 세상의 종말이 와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는 삶의 자세입니다. 바로 일곱의 청원과 더불어 동시에 하루하루 목숨을 걸고 사랑의 협력을, 책임을 다하는 진인사대천명 응답의 삶이 참으로 아름답고 멋진 감동적인 삶입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봄비같은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의 기도가 이뤄지는 아름답고 감동적인 하느님 나라의 삶을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주님을 바라보아라. 기쁨이 넘치고,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시편34,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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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0. 사순 제1주간 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참된 기도>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마태 6,7)
온 누리 모든 벗들을
너그럽게 보듬는
마음의 기도
보잘 것 없는 벗들을
애틋하게 바라보는
눈의 기도
서러운 벗들에게
정성스럽게 들어주는
귀의 기도
슬픈 벗들을
따뜻하게 위로하는
입의 기도
아픈 벗들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손의 기도
외로운 벗들에게
다정하게 다가가는
발의 기도
하느님의 뜻을 땅에서
오롯하게 이루어가는
삶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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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0. 사순 제1주간 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마태 6,9-10)
교회는 믿음의 어머니
주님께서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말씀하신 적이 무척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그분 말고는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라고(마태 23,9 참조)까지 하십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기도할 때, 우리는 이 명령을 따릅니다. 아버지를 알아보는 이들은 복됩니다! 성령께서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부르시고는 이스라엘을 꾸짖으시며, “내가 아들들을 기르고 키웠더니 그들은 도리어 나를 거역하였다”(이사 1,2)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그분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하느님이라고도 하니, 하느님 아버지라는 하나의 호칭에는 자식의 사랑과 그분의 권능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아버지를 부르는 말은 아들을 부르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어머니 교회에 대한 언급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말의 뜻을 교회에서 배우는 만큼 아버지와 아들 안에서 어머니를 알아보기 때문입니다.
-테르툴리아누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3 피조물은 하느님이다
피조물이 하느님을 드러내는 곳에서 하느님은 하느님이 되신다
혹자는 피조물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창조주 하느님뿐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엑카르트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인간은 하느님과 너무나 닮아 있기에, 신성도 거기에 깃들어 있다. 엑카르트는 하느님의 형상이 인간 속에 들어 있다는 주제를 글자 그대로 받아들인다. 인간은 하느님과 신성을 모두 이해할 수 있다. 거울이 물 속에 있고, 그 위에 햇빛이 내리비치듯이, 하느님은 자신의 본성과 존재와 신성과 함께 영혼 안에 거주한다. 하지만 엑카르트는 자신의 가르침을 범신론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는 하느님이 영혼이 아니라고 잘라 말한다. 영혼에 비친 것은 하느님 안에 있는 하느님이지만, 영혼은 영혼일 뿐이다. 영혼은 하느님의 아름다움과 빛을 비추는 거울일 뿐이다. 거울이 태양이 아니듯, 영혼도 하느님이 아니다. 이 이미지들은 엑카르트의 만유내재신론과 안의 신학을 상징한다.(123)
✝️ 화요일 성령(성시간)의 날✝️
왕이신 예수님, 당신은 당신의 부모인 마리아와 요셉을 존경하고 순종하며 단순하고 사랑어린 삶을 사셨으니 찬미받으소서. 예수님, 당신은 감추어진 가정생활을 통해 거룩하고 고귀한 삶을 이루셨으니 찬미하나이다. 당신이 저희 가정의 왕이 되기를 바라시니 찬미받으소서. 저희에게 사랑과 자비와 용서를 베풀어 도와주시니 감사합니다. 당신의 다스리심은 섬김을 통해 드러나나이다.
오, 예수님, 저희 가정의 왕이 되어주소서. 어버이의 마음을 지닌 모든 이가 성령 안에서 숨쉬게 하시고 당신의 사랑으로 가정을 생명으로 이끄소서. 가족 구성원이 서로를 섬기기보다 지배하려고 할 때는 교만 · 질투 · 시기 · 이기심 · 술주정 · 무신론 · 불신 · 거짓말이 판을 치나이다. 사랑과 겸손과 희생의 성령님, 오늘 모든 가정을 새롭게 하여 구원해 주소서!
저희 가정이 진리 · 정의 · 사랑 · 평화 · 생명 · 기쁨의 왕국이 되게 하소서. 저희 가정을 모든 악에서 해방하여 각 가정이 온전히 당신의 것이 되게 하소서. 그들 안에 생명이 흘러넘쳐 죽음을 넘어 승리하게 하소서. 당신의 나라가 저희 가정에 굳건한 뿌리를 내리고 모든 가정 안에서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침묵 가운데 주님께 당신의 가정과 특별히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정을 봉헌한다.)(239)
-성시간, 슬라브코 바르바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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