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국대전의 완성 성종은 즉위하자 '경국대전'을 수정하여 1471년 1월 1일부터 공포하여 시행하도록 했는데, 이것이 '신묘대전'이다. 하지만 이 책은 누락된 조문이 많아 다시 개수하여 3년 뒤인 1474년 2월 1일부터 시행하였는데, 이 책이 '갑오대전' 이다. 이 대전에 수록되지 않은 법령 중에 시행의 필요성이 있는 72개 조문은 따로 속록을 만들어 함께 시행하였다. 그러나 1481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논의가 있자 감교청을 설치하고 대전과 속록을 대대적으로 개수하여 1485년 을사년 1월 1일부터 시행하였다.
이것이 '을사대전'이다. '을사대전'을 시행할 때는 앞으로 다시는 개수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이 '을사대전'은 최종적으로 확정된 조선왕 조 영세불변의 만세성전이 되었다. 25년 동안의 참으로 끈질긴 노력의 결실이었다. 오늘날까지 온전하게 전해오는 '경국대전'은 바로 이 '을사대전'을 가리키며 '신묘대전', '갑오대전'을 비롯한 그 이전의 법전들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을사대전'은 현재까지 우리 나라에 전해지고 있는 법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유일한 법전이 되는 셈이다. '경국대전'은 경제육전과 같이 6분 방식에 따라 '이전', '호전', '예전', '병전', '형전', '공전'의 순서로 되어 있으며, 각 법전마다 필요한 항목으로 분류하여 규정되어 있다. 또 조문은 경제육전과는 달리 추상화, 일반화되어 있어 유권해석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다. 이는 20여 년에 걸친 탁마의 결정체로서 손상이 없는 것이며, 명실상부한 조선의 최고 법전으로서 면모를 갖춘 것이라 할 수 있다. |
|
경국대전의 구성 '이전'에는 통치의 기본이 되는 중앙과 지방의 관제, 관리의 종별, 관리의 임명, 사령등에 관한 사항이 마련되어 있다. '호전'에는 재정 경제와 그에 관련되는 사항으로서 호적, 조세 제도를 비롯하여 녹봉, 통화, 부채, 상업과 잠업, 창고와 환곡, 종운, 어장, 염장에 관한 규정과 토지, 가옥, 노비, 우마의 매매와 오늘날의 등기 제도에 해당하는 입 안에 관한 것, 그리고 채무의 변제와 이자율에 관한 규정이 마련되어 있다.
'예전'에는 문과, 무과, 잡과 등의 과거 규정과 관리의 의장 및 외교, 제례, 상장, 묘지, 관인, 그 밖에 여러 가지 공문서의 서식에 관한 규정을 비롯하여 상복제도, 봉사, 입후, 혼인 등 친족법 규범이 마련되어 있다. '병전'에는 군제와 군사에 관한 규정이, '형전'에는 형벌, 재판, 공노비, 사노비에 관한 규정과 재산 상속법에 관 한 규정이, '공전'에는 도로, 교량, 도량형, 식산에 관한 규정이 마련되어 있다. |
|
동국여지승람 이 책은 1481년(성종12년) 50권으로 편찬되었다. 내용은 1477년에 편찬한 '팔도지리지'에다 '동문선'에 수록된 동국문사의 시문을 첨가한 것이다. 편찬 체제는 남송의 '방여승람'과 명의 '대명일통지'를 참고하였다. '동국여지승람'의 1차 수교는 1485년 김종직 등에 의해 이뤄졌는데, 이 때 시문에 대한 정리와 연혁, 풍속, 인 물 편목에 대한 교정, 그리고 '대명일통지'의 구성에 따라 고적 편목이 첨가되었으며, 중국의 지리지에 없는 성 씨, 봉화불을 꽂던 봉수의 양조 등이 신설되었다. 그 뒤 1499년 임사홍, 성현 등이 부분적인 교정과 보충을 가 하였으나 내용상으로는 큰 변동이 없었다. 제3차 수정은 증보를 위한 것으로서 1528년(중종23년)에 착수하여 15 30년에 속편 5권을 합쳐 전 55권으로 완성되었다.
그리고 이를 '신증'이라는 두 자를 삽입하여 '신증동국여지승 람' 이라고 했다. 이 중종시대본은 임진왜란을 겪은 후 희귀해져, 현재는 일본 경도대학 소장본이 유일하며, 161 1년(광해3년)에 복간한 목판본이 규장각도서 등 국내에 소장되어 있다. '동국여지승람' 책머리에는 진전문, 서문, 교수관원직명과 구본 '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노사신의 진전문, 서 거정의 서문 및 교수관직명, 찬수관직명, 목록 등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책의 끝에는 홍언필, 임사홍, 김종직 의 발문이 실려 있어 간행 과정과 의도를 살펴볼 수 있게 되어 있다. 이 책의 몇몇 권에는 경도, 한성부, 경기도, 개성부,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황해도, 강원도, 함경도, 평안 도 등 각 지방의 군현이 수록되어 있는데, 경도 앞에는 조선전도인 팔도총도가 실려 있으며, 각 도 첫머리에는 도별 지도가 삽입되어 있다.
이 지도들은 실측 지도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지극히 단순한 형태를 띠고 있다. 그리고 한결같이 동서의 폭은 넓고 남북의 길이는 짧아 기형적인 모양을 하고 있다. 그래서 팔도총서의 모양은 꼭 실제 지형을 위에서 꾹 눌 러놓은 듯한 형상을 취하고 있다. 당시의 지도들이 이같은 모양을 띠게 된 것은 남북의 교통로에 비해 동서의 교통로가 전혀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이라 추측된다. 한반도의 지형이 동고서저, 즉 서쪽에 평야가 모여 있고 동 쪽에 산악이 집중되어 있기에 동서쪽의 거리는 멀게 느껴지고 남북쪽의 거리는 가깝게 느껴졌을 것이다. 어쨌든 지도의 정확성 여부를 떠나 지리지에 지도를 첨부한 것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편집이었다. 또한 내용 에서도 각 도의 연혁과 총론에서부터 성씨, 인물, 풍속, 봉수, 능묘, 교량위치 등 세세한 내용에 이르기까지 비 교적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특히 인물 속에는 관원뿐 아니라 효자, 열녀 등이 포함되어 있고, 행정 구역에 관해서도 지역의 변천 과정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 주목할 만 하다. 여기에는 세종 대의 지리지가 지녔던 장점인 토지의 면적, 조세, 인구 등 경제, 군사, 행정적인 측면이 약화된 반면에 인물, 예속, 시문 등이 강조되어 있는 데 이는 세종 대에 비해 성종 대가 그 만큼 평화스러웠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